[죽음의 수용소에서] 2022년 4월 8일(금)_35~40p

작성자Frida|작성시간22.03.30|조회수29 목록 댓글 0

[영문판 35p, The quarters for the sick were most inadequate, there were practically no medicines or attendants. Some of the symptoms of the disease were extremely disagreeable: an irrepressible aversion to even a scrap of food(which was an additional danger to life) and terrible attacks of delirium. The worst case of delirium was suffered by a friend of mine who thought that he was dying and wanted to pray. In his delirium he could not find the words to do so. To avoid thee attacks of delirium, I tried, as did many of the others, to keep awake for most of the night. For hours I composed speeches in my mind. Eventually I began to reconstruct the manuscript which I had lost in the disinfection chamber of Auschwitz, and scribbled the key words in shorthand on tiny scraps of paper.

Occasionally a scientific debate developed in camp. ONce Iwitnessed something I had never seen, even in my normal life, although it lay somewhat near my own professional interests: a spiritualistic seance. I had been invited to attend by the camp’s chief doctor(also a prisoner), who know that I was a specialist in psychiatry. The meeting took place in his small, private room in the sick quarters. A small circle had gathered, among them, quite illegally, the warrant officer from the sanitation squad.

One man began to invoke the spririts with a kind of paryer. The camp’s clerk sat in front of a blank sheet of paper, without any conscious intentn of writing. During the next ten minutes(after which time the seance was terminated because of the medium’s failure to conjure the spirits to appers) his pencil slowly drew lines across the paper, forming quite legible “VAE V.” It was asserted that the clerk had never learned Latin and that he had never before heard the words “Vae Victis”-woe to the vanquished. [번역판_73p, 환자들을 위한 입원실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쓸 만한 약이나 자격을 갖춘 의료보조원도 없었다. 이 병의 증상 중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음식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거부감(이것이 사망의 위험을 더욱 가중시킨다)을 보인다는 것과 무서운 정신착락 증세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내 친구의 경우도 여기에 속했다. 자기가 죽어 간다고 생각했던 그는 기도를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정신착락 상태에서 기도를 하려고 하니 기도할 말이 떠오르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런 정신착란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으려고 애썼다. 몇 시간 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글을 썼다. 아우슈빛 소독실에서 잃어버린 원고를 다시 되살리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작은 종이 조각에 요점이 되는 단어들을 속기로 적었다. 수용소 안에서 때때로 과학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내 직업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까지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교령술 회합이라는 것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수용소의 주치의(그 역시 수감자였다)가 내가 정신과 의사라는 사실을 알고 나를 그 모임에 초대한 것이다. 모임은 막사에 있는 주치의의 작은 방에서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둥글게 앉아 있었는데, 그 중에는 불법으로 여기에 참가한 위생 담당 사관도 있었다. 드디어 한 사람이 주문을 외면서 영혼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도 수용소 서기는 무엇을 쓰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하얀 종이 앞에 그냥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그 다음 10분 동안 (이 시간이 지나면 영매가 영혼을 불러내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고 모임이 끝난다) 종이 위로 천천히 연필을 움직이더니 누구나 알아 볼 수 있는 글씨로 ‘패자에게 슬픔이’ 라는 라틴어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닌가. 서기가 라틴어를 배운 적이 없다는 것과 ‘패자에게 슬픔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었다.

 

[영문판_36p, In my opinion he must have heard them once in his life, without recollecting them, and they must have been available to the “spirit”(the spirit of his subconscious mind) at that time, a few months before our liberation and the end of the war. In spite of all the enforced physical and mental primitiveness of the life in a concentration camp, it was possible for spiritual life to deepen. Sensitive people who were used to a rich intellectual life may have suffered much pain(they were often of a delicate constitution), but the damage to their inner selves was less. They were able to retreat from their terrible surroundings to a life of inner riches and spiritual freedom. Only in this way can one explain the apparent paradox than some prisoners of a less hardy make-up often seemed to survive camp life better than did those of a robust nature. In order to make myself clear, I am forced to fall back on personal experience. Let me tell what happened on those early mornings when we had to march to our work site. There were shouted commands: "Detachment, forward march! Left-2-3-4! Left-2-3-4! Left-2-3-4! Left-2-3-4! Left-2-3-4! First man about, left and left and left! Caps off!" these words sound in my ears even now. At the order "Caps off!" we passed the gate of the camp, and searchings were trained upon us. Whoever did not march smartly got a kick. And worse off was the man who, because of the cold, had pulled his cap back over his ears before permission was given. We stumbled on in the darkness, over big stones and through large puddles, along the one leading from the camp. [번역판_75p,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기억이 나지 않았을 뿐이지 그는 아마 살면서 한 번쯤은 그런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말이 우리가 석방되기 전, 전쟁이 끝나기 불과 몇 달 전인 바로 그 시점에 그의 ‘영혼’에 작용을 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는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은 가능했다.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그런 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을 겪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우리는 작업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구령 소리가 들렸다. “차렷! 앞으로 갓! 왼발 둘, 세, 넷, 왼발 둘, 세, 넷 왼발 둘, 세, 넷 왼발 둘, 세, 넷 왼발 그리고 오른발, 왼발, 모자 벗어! 지금에 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소리다. <모자 벗어> 라는 구령이 떨어질 때, 우리는 마침 수용소 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탐조등이 우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민첩하게 행진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차 없이 발길질이 가해졌다. 춥다고 허락 없이 모자를 귀까지 눌러 쓴 사람은 더 큰 벌을 받았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큰 돌멩이를 넘고 커다란 웅덩이에 빠지면서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비틀거리며 걸었다.

 

[영문판_37p, The accompanying guards kept shouting at us and driving us with the butts of their rifles. Anyone with very sore feet supported himself on his neighbor's arm. Hardly a word was spoken; the icy wind did not encourage talk. Hiding his mouth behind his upturned collar, the man marching next to me whispered suddenly: <If our wives could see us now! I do hope they are better off in their camps and don't know what is happening to us.> That brought thoughts of my own wife to mind. And as we stumbled on for miles, slipping on icy spots, supporting each other time and again, dragging one another up and onward, nothing was said, but we both knew: each of us was thinking of his. wife. Occasionally I looked at the sky, where the stars were fading and pink light of the morning was beginning to spread behind a dark bank of clouds. But my mind clung to my wife's image, imagining it with an uncanny acuteness. I heard her answering me, saw her smile, her frank and encouraging look. Real or not, her look was then more luminous than the sun which was beginning to rise. A thought transfixed me: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I saw the truth as it is set into song by so many poets, proclaimed as the final wisdom by so many thinkers. The truth-that love is the ultimate and the highest goal to which man can aspire. Then I grasped the meaning of the greatest secret that human salvation of man is through love and in love. [번역판_76p, 호송하는 감시병들은 계속 고함을 지르면서 총의 개머리판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다리가 아픈 사람은 옆 사람의 팔에 의지해서 걸었다. 한 마디도 말도 하기 힘들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 때문에 누구든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높이 세운 옷깃으로 입을 감싸고 있던 옆의 남자가 갑자기 이렇게 속삭였다. <만약 마누라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요? 제발이지 마누라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며 좋겠소.>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 가고, 아침을 알리는 연분홍빛이 짙은 먹구름 뒤에서 서서히 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은 온통 아내 생각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머리속으로 그렸다. 그녀가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용기를 주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실제든 아니든 그 때 그녀의 모습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났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도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영문판_38p,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I was able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words, "The angels are lost in perpetual contemplation of an infinite glory" In front of me a man stumbled and those following him fell on top of him. The guard rushed over and used his whip on them all. Thus my thoughts were interrupted for a few minutes. But soon my soul found its way back from the prisoner's existence to another world, and I resumed talk with my loved one: I asked her questions, and she answered; she questioned me in return, and I answered. "Stop!" We had arrived at our work site. Everybody rushed into the dark hut in the hope of getting a fairly decent tool. Each prisoner got a spade or a pickaxe. <Can't you hurry up, you pigs?> Soon we had resumed the previous day's positions in the ditch. The frozen ground cracked under the point of the pickaxes, and sparks flew. The men wee silent, their brains numb. My mind still clung to the image of my wife. A thought crossed my mind: I didn't even know if she were still alive. I knew only one thing-which I have learned well by now: Love goes very far beyond the physical person of the beloved. It finds its deepest meaning in his spiritual being, his inner self. Whether or not he is still alive at all, ceases somehow to be of importance. I did not know whether my wife was alive, and I had no means of finding out(during all my prison life there was no outgoing or incoming mail); but at that moment it ceased to matter. [번역판_78p,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앞에 있던 남자가 비틀거리자 뒤에 오던 사람들이 그 위로 넘어졌다. 감시병이 달려와서 가지고 있던 채찍을 휘둘렀다. 그래서 내 생각이 잠시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 후 곧 내 영혼은 수감자 신세에서 또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찾아 되돌아갔다.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내가 물으면 그녀가 대답했다. 다음에는 반대로 그녀가 묻고 내가 대답했다. <정지!> 드디어 작업장에 도착했다. 모두들 더 좋은 연장을 차지하기 위해 캄캄한 광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곡갱이와 삽을 들고 나왔다. <이 새끼들. 빨리 빨리 움직이지 못해?> 곧 우리는 전날 일했던 배수구로 위치를 찾아서 갔다. 얼어붙은 땅이 곡괭이 끝에서 깨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불꽃이 일어났다. 모두들 말이 없었고, 머리는 마비되어 있었다. 그때도 내 마음은 여전히 아내의 영상에 매달려 있었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나는 아내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만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때서야 내가 깨달은 것이 있는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아는 아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랐다.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수용소에는 오는 편지도 가는 편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문판_39p, There was no need for me to know; nothing could touch the strength of my love, my thoughts, and the image of my belove. Had I known then that my wife was dead, I think that I would still have given myself, undisturbed by that knowledge, to the contemplation of her image, and that my mental conversation with here would have been just as vivid and just as satisfying. "Set me like a seal upon thy heart, love is as strong as death" The intensification of inner life helped the prisoner find a refuge from the emptiness, desolation and spiritual poverty of his existence, by letting him escape into the past. When given free rein, his imagination played with past events, often not important one, but minor happenings and trifling things. His nostalgic memory glorified them and they assumed a strange character. Their world and their existence seemed very distant and the spirit reached out for them longingly: In my mind I took kbus rides, unlocked the front door of my apartment, answered my telephone, switched on the electric lights. Our thoughts often centered on such details, and these memories could move one to tears. As the inner life of the prisoner tended to become more intense, he also experienced the beauty of art and nature as never before. Under their influence he sometimes even forgot his own frightful circumstances. If someone had seen our faces on the journey from Auschwitz to a Bavarian camp as we beheld the mountains of Salzburg with their summits growing in the sunset, through the little barred windows fo the prison carriage, he would never have believed that those were the faces of men who had given up all hope of life and liberty. Despite that factor-or maybe because of it-we were carried away by nature's beauty, which we had missed for so long. [번역판_79p,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내 사랑의 굳건함, 내 생각, 사랑하는 사람의 영상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때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에 내 자신을 바쳤을 것이다. 나와 그녀가 나누는 정신적 대화 역시 아주 생생하고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나를 그대 가슴에 묻어주오.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라오.> 이렇게 내면세계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수감자들은 멀리 과거로 도피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며 과거의 일들을 회상했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작은 해프닝이나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 향수어린 추억이 그들을 성스럽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이상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도 했다. 그들의 세계가 그들의 존재가 현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영혼은 그리움을 향해 먼 과거로 달려갔다. 나는 상상속에서 버스를 탔고, 열쇠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문을 열었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전등을 껐다. 우리 생각은 대개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런 기억들이 때로 우리 마음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내적인 삶이 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전에는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체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때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끔찍한 상황을 완전히 잊어버리기도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우슈비츠에서 바바리아 수용소로 이송되는 도중에 호송열차의 작은 창살 너머로 석양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잘츠부르크 산 정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것이 절대로 삶과 자유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의 얼굴이라고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어쩌면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우리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곤 했다.

 

[영문판_40p, In camp, too, a man might draw the attention of a comrade working next to him to a nice view of the setting sun shining through the tall trees of the Bavarian woods(as in the famous water color by Durer), the same woods in which we had built an enormous, hidden munitions plant. One evening, when we were already resting on the floor of our hut, dead tired, soup bowls in hand a fellow prisoner rushed in and asked us to run out to the assembly grounds and see the wonderful sunset. Standing outside, we saw sinister clouds glowing in the west and the whole sky alive with clouds of ever-changing shapes and colors, from steel blue to blood red. The desolate grey mud huts provided a sharp contrast, while the puddles on the muddy ground reflected the glowing sky. Then, after minutes of moving silence, one prisoner said to another, "How beautiful the world could be!" Another time we were at work in a trench. The dawn was grey around us; grey was the sky above; grey the snow n the pale light of dawn; grey the rags in which my fellow prisoners were clad, and grey their face. I was again conversing silently with my wife, or perhaps I was struggling to find the reason for my sufferings, my slow dying. In a last violent protest against the hopelessness of imminent death, I sensed my spirit piercing through the enveloping gloom. I felt it transcend that hopeless, meaningless world, and from somewhere I heard a victorious 'Yes' in answer to my question of the existence of an ultimate purpose. At that moment a light was lit in a distant farmhouse, which stood on the horizon as if painted there, in the midst of the miserable grey of a dawning morning in Bavaria. "et lus in tenebris lucet"-and the light shineth in the darkness. [번역판_81p, 수용소에서 일할 때도 우리들은 종종 옆에서 일하는 동료의 눈을 돌려 바바리아 숲의 키 큰 나무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풍경(뒤러의 그 유명한 수채화처럼)을 바라보게 했다. 그 숲은 우리가 대규모 비밀 군수품 제조공장을 짓는 데 동원되었던 바로 그 숲이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앉아서 수프 그릇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동료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리고는 점호장으로 가서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을 보라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서 우리는 서쪽에 빛낙 있는 구름과, 짙은 청색에서 핏빛으로 끊임없이 색과 모양이 변하는 구름으로 살아 숨쉬는 하늘을 바로보았다. 진흙 바닥에 패인 웅덩이에 비친 하늘의 빛나는 풍경이 잿빛으로 지어진 우리의 초라한 임시 막사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감동으로 인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그날도 우리는 참호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잿빛 새벽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 위에 있는 하늘도 잿빛이었고, 창백한 새벽빛에 반사되는 눈도 잿빛이었다. 동료가 걸치고 있는 넝마 같은 옷도 잿빛이었고, 얼굴도 잿빛이었다. 나는 또 다시 아내와 침묵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당시 나는 내 고통에 대한 그리고 내가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곧 닥쳐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으며,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수평선 저 멀리에 그림처럼 서 있던 농가에 불이 들어왔다. 바바리아의 동트는 새벽의 초라한 잿빛을 뚫고 불이 켜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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