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판_40p, In camp, too, a man might draw the attention of a comrade working next to him to a nice view of the setting sun shining through the tall trees of the Bavarian woods(as in the famous water color by Durer), the same woods in which we had built an enormous, hidden munitions plant. One evening, when we were already resting on the floor of our hut, dead tired, soup bowls in hand a fellow prisoner rushed in and asked us to run out to the assembly grounds and see the wonderful sunset. Standing outside, we saw sinister clouds glowing in the west and the whole sky alive with clouds of ever-changing shapes and colors, from steel blue to blood red. The desolate grey mud huts provided a sharp contrast, while the puddles on the muddy ground reflected the glowing sky. Then, after minutes of moving silence, one prisoner said to another, "How beautiful the world could be!"
Another time we were at work in a trench. The dawn was grey around us; grey was the sky above; grey the snow n the pale light of dawn; grey the rags in which my fellow prisoners were clad, and grey their face. I was again conversing silently with my wife, or perhaps I was struggling to find the reason for my sufferings, my slow dying. In a last violent protest against the hopelessness of imminent death, I sensed my spirit piercing through the enveloping gloom. I felt it transcend that hopeless, meaningless world, and from somewhere I heard a victorious 'Yes' in answer to my question of the existence of an ultimate purpose. At that moment a light was lit in a distant farmhouse, which stood on the horizon as if painted there, in the midst of the miserable grey of a dawning morning in Bavaria. "et lus in tenebris lucet"-and the light shineth in the darkness. [번역판_81p, 수용소에서 일할 때도 우리들은 종종 옆에서 일하는 동료의 눈을 돌려 바바리아 숲의 키 큰 나무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풍경(뒤러의 그 유명한 수채화처럼)을 바라보게 했다. 그 숲은 우리가 대규모 비밀 군수품 제조공장을 짓는 데 동원되었던 바로 그 숲이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앉아서 수프 그릇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동료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리고는 점호장으로 가서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을 보라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서 우리는 서쪽에 빛낙 있는 구름과, 짙은 청색에서 핏빛으로 끊임없이 색과 모양이 변하는 구름으로 살아 숨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흙 바닥에 패인 웅덩이에 비친 하늘의 빛나는 풍경이 잿빛으로 지어진 우리의 초라한 임시 막사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감동으로 인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그날도 우리는 참호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잿빛 새벽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 위에 있는 하늘도 잿빛이었고, 창백한 새벽빛에 반사되는 눈도 잿빛이었다. 동료가 걸치고 있는 넝마 같은 옷도 잿빛이었고, 얼굴도 잿빛이었다. 나는 또 다시 아내와 침묵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당시 나는 내 고통에 대한 그리고 내가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곧 닥쳐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으며,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수평선 저 멀리에 그림처럼 서 있던 농가에 불이 들어왔다. 바바리아의 동트는 새벽의 초라한 잿빛을 뚫고 불이 켜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영문판_41p, For hours I stood hacking at the icy ground. The guard passed by, insulting me, and once again I communed with my beloved. More and more I felt that she was present, that she was with me; I had the feeling that I was able to touch her, able to stretch out my hand and grasp hers. The feeling was very strong: she was there. Then, at that very moment, a bird flew down silently and perched just in front of me, on the heap of soil which I had dug up from the ditch, and looked steadily at me.
Earlier, I mentioned art. Is There such a thing in a concentration camp? It rather depends on what one chooses to call art. A kind of cabaret was improvised from time to time. A hut was cleared temporarily, a few wooden benches were pushed or nailed together and a program was drawn up. They came to have a few laughs or perhaps to cry a little; anyway, to forget. There were songs, poems, jokes, some with underlying satire regarding the camp. All were meant to help us forget, and they did help. The gatherings were so effective that a few ordinary prisoners went to see the cabaret in spite of their fatigue even though they missed their daily portion of food by going.
During the half-hour lunch interval when soup(which the contractors paid for and for which they did not spend much)was ladled out at our work site, we were allowed to assemble in an unfinished engine room. On entering, everyone got a ladleful of the watery soup. [번역판_83p, 나는 몇 시간 동안 얼어붙은 땅을 파면서 서 있었다. 감시병이 지나가면서 욕을 했고, 나는 또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점점 더 그녀가 곁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으며, 그녀는 정말로 내 곁에 있었다. 그녀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손을 뻗쳐서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녀가 정말로 ‘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가 파놓은 흙더미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앞에서 내가 예술에 관한 얘기를 했을 것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예술이 가능할까? 그것은 무엇을 예술이라고 부르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즉석 카바레 비슷한 것이 만들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잠시 동안 막사 안을 깨끗이 치우고, 나무의자를 밀거나 함께 못질을 한다. 그런 다음 프로그램을 짠다. 저녁이면 수용소 안에서 비교적 처지가 좋은 사람들이-카포들이나 수용소를 떠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그곳에 모인다. 그들은 몇 번은 웃고, 또 몇 번은 울기 위해 이곳에 온다. 어쨌든 자기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잊기 위해 오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고, 시를 낭송하고 촌극을 하는데, 그 중에는 현실을 풍자한 것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은 현실을 잊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실제로 그것이 현실을 잊는 데 도움이 되었다. 30분간의 점심시간 동안 작업장에서 수프(청부업자가 그 비용을 대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대지는 않았다)를 배급받을 때,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엔진실에서 먹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국자로 퍼준 멀건 수프를 들고 기관실로 갔다.
[영문판_42p, While we sipped it greedily, a prisoner climbed onto a tub and sang Italian arias. We enjoyed the songs, and he was guaranteed a double helping of soup, straight "from the bottom"-that meant with peas!
Rewards were given in camp not only for entertainment, but also for applause. I, for example, could have found protection(how lucky I was never in need of!) from the camp's most dreaded Capo, who for more than one good reason was known as "The Murderous Capo." This is how it happened. One evening I had the great honor of being invited again to the room where the spiritualistic seance had taken place. There were gathered the same intimate friends of the chief doctor and, most illegally, the warrant officer from the sanitation squad was again present. The Murderous Capo entered the room by chance, and he was asked to recite one of his poems, which had become famous(or infamous) in camp. He did not need to be asked twice and quickly produced a kind of diary from which he began to read samples of his art. I bit my lips till they hurt in order to keep from laughing at one of his love poems, and very likely that saved my life. since I was also generous with my applause, my life might have been saved even had I been detailed to his working party to which I had preciously been assigned for one day-a day that was quite enough for me. It was useful, anyway, to be known to the Murderous Capo from a favorable angle. So I applauded as hard as I could.
Generally speaking, of course, any pursuit of art in camp was somewhat grotesque. I would say that the real impression made by anything connected with art arouse only from the ghostlike contrast between the performance and the back ground of desolate camp life. [번역판_84p, 우리가 게걸스럽게 수프를 먹고 있는 동안 한 사람이 술통 위로 올라가 이탈리아 아리아르를 한곡 불러제켰다. 우리는 그 노래를 정마로 좋아했으며, 그에게는 곧 ‘바닥을 긁어서 퍼주는’-이것은 콩알 몇 개가 더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수프 두 국자가 상으로 돌아갔다. 여흥거리에만 보상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흥거리에만 보상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칭찬에도 보상이 돌아갔다. 한 번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수용소에서 ‘살인마 카포’라도 불리는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보호해 주어야 할 일(내가 그런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은 처지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이 생겼다. 일의 전말은 이랬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가시 그 교령술 회합이 열리는 방으로 초대되는 영광을 얻었다. 거기에는 지난번처럼 주치의의 절친한 친구들이 다 모였으며, 역시 불법적으로 참석한 지난번의 그 위생 담당 사관도 있었다. 그런데 그 살인마 카포가 우연히 그곳에 들렀다가 시를 한 편 낭송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의 수는 수용소 안에서 이미 유명(혹은 악명 높은) 시였다. 두 번 청할 필요도 없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일기장 비슷한 것을 꺼내더니 거기에 적혀 있는 자기 예술의 시험작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자기가 지은 사랑의 시를 읊는 동안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대체로 칭찬에 너그러운 편이어서 만약 내가 그의 작업반에 배치되었다 하더라도(사실 그 전에 하루 동안 그의 작업반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 하루로 충분했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던 그 살인적인 카포에게 호의적인 측면에서 좋은 인상을 심어준다는 것은 아주 유용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죽어라고 박수를 쳤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용소 안에서 행해지는 예술 행위는 어떤 종류의 예술 행위든 어느 정도 기괴한 측면을 띠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예술과 관련된 행위에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받는 것은 음울한 현실과 예술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간극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영문판_43p, I shall never forget how I awoke from the deep sleep of exhaustion on my second night in Auschwitz-roused by music. The senior warden of the hut had some kind of celebration in his room, which was near the entrance of the hut. Tipsy voices bawled some hackneyed tunes. Suddenly there was a silence and into the night a violin sang a desperately sad tango, an unusual tune not spoiled by frequently playing. The violin wept and a part of me wept with it, for on that same day someone had a twenty-fourth birthday. That someone lay in another part of the Auschwitz camp, possibly only a few hundred or a thousand yards away, and yet completely out of reach. That someone was my wife.
To discover that there was any semblance of art in a concentration camp must be surprise enough for an outsider, but he may be even more astonished to hear that one could find a sense of humor there as well; of course, only the faint trace of one, and then only for a few seconds or minutes. Humor was another of the soul's weapons in the fight for self-preservation. It is well known that humor, more than anything else in the human make-up, can afford an aloofness and an ability to rise above any situation, even if only for a few seconds. I practically trained a friend of mine who work ed next to me on the building site to develop a sense of humor, I suggested to him that we would promise each other to invent at least one amusing story daily, about some incident that could happen one day after our liberation. He was a surgeon and had been an assistant on the staff of a large hospital. So I once tried to get him to smile by describing to him how he would be unable to lost the habits of camp life when he returned to his former work. [번역판_86p, 나는 지금도 아우슈비츠에서 맞은 두 번째 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날 왜 내가 잠에서 깨어났는지를, 나는 음악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막사 입구에 있는 고참 관리의 방에서 무언가 축하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술에 취해 왁자지껄하는 소리 중에 흔해 빠진 노랫소리도 섞여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방이 조용해졌다. 곧이어 바이올린이 흐느끼듯 토해내는 애끓는 탱고 선율이 조용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너무 많이 연주되어서 식상하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곡이 아니었다.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소리에 나도 덩달아 흐느꼈다. 바로 그날은 어떤 사람이 24번째 생일을 맞는 날이었다. 그 사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다른 편 막사에 누워 있다. 어쩌면 겨우 몇 백 야드 혹은 몇 천 야드에 불과한 거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로 갈 수 없는 그곳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내 아내였다. 이부 사람들 중에서 강제수용소에 예술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뿐만 아니라 유머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더욱 더 놀랄 것이다.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건축 공사장에서 일을 할 때, 실제로 나는 옆에서 일하는 친구를 대상으로 유머 감각을 개발시키는 훈련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적어도 하루에 한 가지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자고 했다. 이야기의 소재는 우리가 풀려나고 난 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일로 하기로 했다. 그는 외과의사로 큰 병원의 보조 스태프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풀려난 후 전에 일하던 병원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수용소 생활에서 얻은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들려주어 그를 웃게 만들었다.
[영문판_44p, In the building site(especially when the supervisor made his tour of inspection) the foreman encouraged us to work faster by shouting: "Action! Action!" I told my friend, "One day you will be back in the operating room, performing a big abdominal operation. Suddenly an orderly will rush in announcing the arrival of the senior surgeon by shouting, 'Action! Action!'
Sometimes the other men invented amusing dreams about the future, such as forecasting that during a future dinner engagement they might forget themselves when the soup was served and beg the hostess to ladle it "from the bottom".
The attempt to develop a sense of humor and to see things in a humorous light his some kind of a trick learned while mastering the art of living. Yet it is possible to practice the art of living even in a concentration camp, although suffering is omnipresent. To draw an analogy. If a certain quantity of gas is pumped into an empty chamber, it will fill the chamber completely and evenly, no matter how big the chambe. Thus suffering completely fills the human soul and conscious mind, no matter whether the suffering is great or little. Therefore the "size" of human suffering is absolutely relative.
It also follows that a very trifling thing can cause the greatest of joys. Take as an example something that happened on our journey from Auschwitz to the camp affiliated with Dachau. We had all been afraid that our transport was heading for the Mauthausen camp. We became more and more tense as we approached a certain bridge over the Danube which the train would have to cross to reach Mauthausen, according to the statement of experienced traveling companions. [번역판_87p, 건축공사장에서(특히 총감독이 나와 순시할 때에는)는 감독이 일을 빨리 하라고 우리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빨리 빨리 움직여!>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자네가 수술실에 들어가 큰 개복 수술을 하게 되었어. 그런데 갑자기 노무원이 달려와 외과과장이 도착했다고 알려 주면서 소리치는 거야. 빨리 빨리 움직여!> 때로는 다른 동료들이 미래와 관련 있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풀려난 후 어느 날 저녁 초대를 받았는데, 자기가 풀려났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는 그 집 안주인에게 이렇게 부탁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밑바닥에서 퍼주세요”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기 위한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 번 유추를 해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인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코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아주 사소한 일이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 예로 아우슈비츠에서 다카우에 있는 한 수용소로 갈 때 체험했던 일을 얘기해 보겠다. 당시 우리를 태운 기차가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가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뉴브 강에 걸쳐 있는 다리가 점점 가까워 올수록 우리는 긴장했다. 여행에 경험이 있는 친구로부터 마우트하우젠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뉴브 강을 건너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영문판_45p, Those who have never seen anything similar cannot possibly imagine the dance of joy performed n the carriage by the prisoners when they saw our transport was not crossing the bridge and was instead "only" for Dachau.
And again, what happened on our arrival in that camp, after a journey lasting two days and three nights? there had not been enough room for everybody to crouch on the floor of the carriage at the same time. The majority of us had to stand all the way, while a few took turns at squatting on the scanty straw which was soaked with human urine. When we arrived the first important news that we heard from older prisoners was that this comparatively small camp(its population was 2,500) had no "oven," no crematorium, no gas! That meant that a person who had become a "Moslem" could not be taken straight to the gas chamber, but would have to wait until a so-called "sick convoy" had been arranged to return to Auschwitz. This joyful surprise put us all in a good mood. the wish of the senior warden of our hut in Auschwitz had come true: we had come, as quickly as possible, to a camp which did not have a "chimney"-unlike Auschwitz. We laughed and cracked jokes in spite of, and during, all we had to go through in the next few hours.
When we new arrivals were counted, one of us was missing. So we had to wait outside in the rain and cold wind until the missing man was found. He was at last discovered in a hut, where he had fallen asleep from exhaustion. Then the roll call was turned into a punishment parade. All through the night and late into the next morning, we had to stand outside frozen and soaked to the skin after the strain of our long journey. [번역판_89p, 이와 비슷한 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우리 기차가 다리를 건너지 않고 “그냥” 다카우로 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기차 안에서 벌어졌던 기쁨의 춤 잔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2박 3일 동안의 여행이 끝나고 마침내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그 동안 기차 안이 너무 좁아서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앉을 수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사람 오줌으로 축축하게 젖은 짚단에 교대로 앉아 있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내내 서 있어야만 했다. 우리가 비교적 작은 규모(수용인원이 2,500명밖에 안 되었다)의 이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들은 첫 번째 뉴스는 그 곳에는 살인용 오븐도, 화장터도, 가스실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몰골이 ‘회교도’로 변한 사람도 곧바로 가스실로 갈 염려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아우슈비츠로 돌려보내기 위한 ‘환자수송차’가 올 때까지는 적어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이 기쁜 소식이 우리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아우슈비츠에 있던 우리 고참 관리인이 소망하던 것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와는 달리 ‘굴뚝’이 없는 그 수용소로 가능한 한 빨리 뛰어 들어갔다. 그 후 몇 시간 동안을 아주 힘들게 보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웃으면서 연신 농담을 주고받았다. 도착 후 인원점검을 하면서 한 사람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차가운 바람과 비를 맞으며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그는 막사 안에서 발견되었다. 피곤에 지친 나머지 그만 잠에 곯아떨어진 것이다. 그 다음 점호는 기합 행렬로 바뀌었다. 오랜 여행의 긴장도 풀지 못한 채 우리들은 밤을 꼬박 새우고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꽁꽁 언 채로 비를 맞으며 밖에 서 있어야 했다.
[영문판_46p, And yet we were all very pleased! There was no chimney in this camp and Auschwitz was a long way off.
Another time we saw a group of convicts pass our work sit. How obvious the relativity of all suffering appeared to us then! We envied those prisoners their relatively well-regulated, secure and happy life. They surely had regular opportunities to take bats, we thought sadly. They surely had toothbrushes and clothes, brushes, mattresses-a separate one for each of them-and monthly mail bringing them news of the whereabouts of their relatives, or at least of whether they were still alive or not. We had lost all that a long time ago.
And how we envied those of us who had the opportunity to get into a factory and work in a sheltered room! It was everyone's wish to have such a lifesaving piece of luck. The scale of relative luck extends even further. Even among those detachments outside the camp(in one of which I was a member) there were some units which were considered worse than others. One could envy a man who did not have to wade in deep, muddy clay on a steep slope emptying the tubs of small field railway for twelve hours daily. Most of the daily accidents occurred on this job, and they were often fatal.
In other work parties the foreman maintained an apparently local tradition of dealing out numberous blows, which made us tale of the relative luck of not being under their command or peerhaps of being under it only temporarily. Once, by an unlucky chance, I got into such a group. If an air raid alarm had not interrupted us after two hours(during which time the foreman had worked on me especially), making it necessary to regroup the workers afterwards, I think that I would have returned to camp on one of the sledges which carried those who had dies or were dying from exhaustion. [번역판_90p,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행복했다. 이 수용소에는 굴뚝이 없고, 또 아우슈비츠는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한번은 한 무리의 죄수들이 우리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그들과 비교해서 우리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커보였는지! 우리는 그 죄수들이 누리는 상대적으로 잘 규정된, 안전하고, 행복한 생활을 부러워했다. 저 사람들은 틀림없이 정기적으로 목욕을 할 거야 하고 생각하니 내 신세가 처량해졌다. 분명 칫솔과 옷솔을 갖고 있을 거야. 매트리스도 각자 하나씩 있겠지.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편지를 받을 거야.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니 적어도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있는 편지 말이야. 우리는 아주 오래 전에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공장에 들어가 안전한 실내에서 일하는 사람을 얼마나 부러워했는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그런 한 조각의 행운을 얻는 것이 당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상대적인 행운의 척도는 이것 말고도 많이 있었다. 수용소 밖으로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나도 여기에 속해 있었다) 중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곳보다 열악한 곳에서 일하는 작업반이 있었다. 매일 12시간씩 가파른 언덕에서 진흙탕을 오가며 좁은 선로를 따라 운반되는 통을 비우는 일을 했던 사람들은 그보다 편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사고의 대부분은 바로 여기서 일어났으며, 그 사고의 결과는 대개 치명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감독이 그곳의 전통이라면서 수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작업반에 배치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런 작업반에 들어가지 않게 된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한번은 운 나쁘게도 내가 우연히 그런 작업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만약 두 시간(그 동안 감독이 줄곧 나를 주시해서 보고 있었다)만에 공급경보가 울려 작업이 중단되고, 그 후 작업조가 다시 편성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지쳐서 죽었거나 아니면 죽어가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대형수레에 실려 수용소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영문판_47p, No one can imagine the relief that the siren can bring in such a situation; not even a boxer who had heard the bell signifying the finish of a round and who is thus saved at the last minute from the danger of a knockout.
We were grateful for the smallest of mercies. We were glad when there was time to delouse before gong to bed. Although in itself this was no pleasure, as it meant standing naked in an unheated hut where icicles hung from the ceiling. But we were thankful if there was no air raid alarm during this operation and the lights were not switched off. If we could not do the job properly, we were kept awake half the night.
The meager pleasures of camp life provided a kind of negative happiness-"freedom from suffering" as Schopenhauer put it-and even that in a relative way only. Real positive pleasures, even small ones, were very few. I remember drawing up a kind of balance sheet of pleasures one day and finding that in many, many past weeks I had experienced only two pleasurable moments. One occurred when, on returning from work, I was admitted to the cook house after a ong wait and was assigned to the line filing up to prisoner-cook F. He stood behind one of the huge pans and ladled soup into the bowls which were held out to him by the prisoners, who hurriedly filed past. He was the only cook who did not look at the men whose bowls he was filling; the only cook who dealt out the soup equally regardless of recipient, and who did not make favorites of his personal freinds or countrymen, picking out the potatoes for them, while the others got watery soup skimmed from the top. [번역판_91p, 그런 상황에서 사이렌소리가 주는 안도감이 어떤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한 라운드가 끝나는 종소리를 듣고, 마지막 순간에 넉 아웃될 위기를 모면한 권투선수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아주 작은 은총에도 고마워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를 잡는 시간을 준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물론 이를 잡는 일 자체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를 잡기 위해서는 천장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추운 막사에서 옷을 벗고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잡는 도중에 공습경로가 울리지 않아 전등불이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고마워했다. 만약 이 시간에 이를 제대로 잡이 못하면 하룻밤의 절반을 꼬박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용소 생할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쇼페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던-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한번은 즐거움에 대한 일종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보았다. 그 결과 지난 수 주 동안 나에게 즐거운 순간이 딱 두 번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일을 마치고 난 후, 취사실에 들어가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요리사 F 앞으로 난 줄에 설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우리와 같은 수감자 출신인 요리사 F는 커다란 국 냄비를 앞에 놓고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내미는 그릇에 수프를 퍼 넣어 주고 있었다. 그는 수프를 퍼주면서 그릇을 내민 사람을 쳐다보지 않는 유일한 요리사였다. 자기 친구나 고향 사람에게는 몇 알 안 되는 감자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위에서 살짝 걷어낸 희멀건 국물만 주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수프를 나누어 주었다.
[영문판_48p, But it is not for me to pass judgment on those prisoners who put their own people above everyone else. Who can throw a stone at a man who favors his friends under circumstances when, sooner or later, it is a question of life or death? No man should judge unless he asks himself in a absolute honesty whether in a similar situation he might not have down the same.
Long after I had resumed normal life again(that means a long time after my release from camp), somebody showed me an illustrated weekly with photographs of prisoners lying crowded on their bunks, staring dully at a visitor. Isn't this terrible, the dreadful staring faces-everything about it.
"Why?" I asked, for I genuinely did not understand. For at that moment I saw it all again: at 5:00 AM. It was pitch dark outside. I was lying on the hard boards in an earthen hut where about seventy of us were "taken care of." We sere sick and did not have to leave camp fro work; we did not have to go on parade. We could lie all day in our little corner in the hut and doze and wait for the daily distribution of bread(which, of course, was reduced for the sick) and for the daily helping of soup(watered down and also decreased in quantity). But how content we were; happy in spite of everything. While we cowered against each other to avoid any unnecessary loss of warmth, and were too lazy and disinterested to move a finger unnecessarily, we heard shrill whistles and shouts from the square where the night shift had just returned and was assembling for roll call. The door was flung open, and the snowstorm blew into our hut. An exhausted comrade, covered with snow, stumbled inside to sit down for a few minutes. But the senior warden turned him out again. It was strictly forbidden to admit a stranger to a hut while a check-up on the men was in progress. [번역판_93p, 하지만 나는 여기서 자기가 아는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우선시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자기 친구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해서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정말로 정직하게 그런 일을 하지 않을 확신이 서지 않는 한 그런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내가 정상적인 생활(이것은 곧 내가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에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의미한다)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 나에게 주간 회보에 실린 사진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죄수들이 침상 위에 빽빽하게 누워서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방문객을 바라보는 사진이었다. <정말 무섭지 않습니까? 사람을 바라보는 저 무시무시한 얼굴들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너무나 끔찍하지 않습니까?> <어째서요?> 나는 물었다. 왜냐하면 정말로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과거에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이 다시 내 눈 앞을 스쳐간다. 새벽 5시, 밖은 아직 어둠에 묻혀 있었다. 나는 70명의 사람들이 ‘치료받고 있는’ 흙으로 만든 막사의 딱딱한 판자 위에 누워 있었다. 우리는 병에 걸려 있었고, 그래서 일을 하러 가지 않아도 되었다. 행진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막사의 한 귀퉁이에 누운 채로 졸면서 그날 분의 빵(물론 환자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적은 양이 빵이 배급된다)과 수프(물을 타서 실질적으로 양이 적어진)가 배급되기를 기다렸다. 그 때 우리는 얼마나 이 상황을 흡족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 모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했다. 우리는 불필요한 체온 저하를 막기 위해 몸을 꼭 밀착하고,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나른한 상태에서 이제 막 돌아온 야간 당번들이 점호를 받고 있는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와 구령 소리를 들었다. 마침 그때 문이 열리면서 눈보라가 막사 안으로 몰아쳐 들어왔다. 지칠 대로 지친 동료 한 사람이 눈을 뒤집어 쓴 채 단 몇 분 동안이라도 앉아서 쉬기 위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고참이 그를 다시 밖으로 쫓아냈다. 인원 점검이 진행되는 동안 외부인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문판_49p, How sorry I was for that fellow and how glad not to be in his skin at that moment, but instead to be sick and able to doze on in the sick quarters! What a lifesaver it was to have two days there, and perhaps even two extra days after those!
All this came to my mind when I saw the photographs in the magazine. When I explained, my listeners understood why I did not find the photograph so terrible: the people shown on it might not have been so unhappy after all. On my fourth day in the sick quarters I had just been detailed to the night shift when the chief doctor rushed in and asked me to volunteer for medical duties in another camp containing typhus patients. Against the urgent advice of my friends(and despite the fact that almost none of my colleagues offered their services), I decided to volunteer. I knew that in a working party I would die in a short time. But if I thought that it would doubtless be more sense in my death. I thought that it would doubtless be more to the purpose to try and help my comrades as a doctor than to vegetate or finally lose my life as the unproductive laborer that I was then. [번역판_94p, 그때 내가 얼마나 그 친구에게 미안했는지 그리고 또 그 순간 그와 같은 처지에 있지 않고, 병에 걸려 병동에서 졸 수 있다는 사실이 또 얼마나 기뻤는지! 그곳에 보낸 이틀이, 그리고 그 이후에 주어진 또 다른 이틀이 내 생명을 보존하는 데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 모든 일들이 잡지에 실린 사진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떠올랐다. 나는 이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들려주었고, 그제서야 그는 내가 그 사진을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어쩌면 전혀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병동에 누워 있은 지 사흘째 되는 날, 나는 야근 당번에 편성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치의가 달려와 발진티푸스 환자를 수용하고 있는 다른 수용소에서 의료 자원봉사자로 일하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친구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그리고 내 동료의사들 중에 이런 일에 자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가 작업반에 들어갈 경우, 짧은 시간 안에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내 동료들을 돕다가 죽는 것이 그 전처럼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로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학실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문판_50p, A man's character became involved to the point that he was caught in a mental turmoil which threatened all the values he held and threw them into doubt. Under te influence of a world which no longer recognized the value of human life and human dignity, which ad robbed man of his will and ad made him an objected to be exterminated(having planned, however, to make full use of him first-to the last ounce of his physical resources)-under this influence the personal ego finally suffered a loss of values. If the man in the concentration camp did not struggle against this in a last effort to save his self-respect, he lost the feeling of being an individual, a being with a mind, wit inner freedom and personal value. He thought of himself then as only a part of an enormous mass of people; his existence descended to the level of animal life. The men were herded-sometimes to one place then to another; sometimes driven together, then apart-like a flock of sheep without a thought or a will of their own. A small but dangerous pack watched them from all sides, well versed n methods of torture and sadism. They drove the herd incessantly, backwards and forwards, with shouts, kicks and blows. And we, the sheep, thought of two things only-how to evade the bad dogs and how to get a little food.
Just like sheep that crowd timidly into the center of a herd, each of us tried to get into the middle of our formations. that gave one a better chance of avoiding the blows of the guards who were marching on either side and to the front and rear of our column. The central position had the added advantage of affording protection against the bitter winds. It was, therefore, in an attempt to save one's own skin that one literally tried to submerge into the crowd. This was done automatically in the formation [번역판_96p,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가치를 위협하고, 또 그것을 의혹 속으로 내던져버린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지닌 가치가 더 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세게, 인간의 의지를 박탈하고 그를 단지 처형(처음에 그를 이용한 대로 이용해 먹다가 육체의 마지막 한 점까지 이용하도록 계획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세계, 이런 세계에서 개인의 자아는 그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만약 강제수용소에 있는 사람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이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며, 그는 자기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 마음을 지니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거대한 군중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한다. 존재가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양떼처럼 무리지어-때로는 여기에 있다가 그 다음에는 저기로, 때로는 함께 몰려다니다가 때로는 서로 떨어져 다니는-다니게 된다. 그런데 비록 수는 적지만 매우 위험한 무리들이 사방에서 이들을 감시하고 있다. 이 무리들은 고문을 하는 것과 남을 괴롭히는 방법에 아주 능통한 자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고함을 치고, 발길질과 주먹질을 해대며 무리를 뒤에서 앞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양떼인 우리들은 오로지 두 가지 생각만 한다. 어떻게 하면 저 무서운 개들을 피할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까 하는 생각 말이다. 떼를 지어 무리 한복판으로 슬금슬금 들어가려는 양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대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 행렬의 양옆과 앞뒤에 있는 감시병들의 주먹질을 피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행렬의 한가운데는 매서운 바람을 덜 맞을 수 있다는 추가적인 이점도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파묻으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일은 대오를 형성할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