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2022년 4월 6일(수)_50~55p

작성자Frida|작성시간22.04.05|조회수24 목록 댓글 0

[영문판_50p, A man's character became involved to the point that he was caught in a mental turmoil which threatened all the values he held and threw them into doubt. Under te influence of a world which no longer recognized the value of human life and human dignity, which ad robbed man of his will and ad made him an objected to be exterminated(having planned, however, to make full use of him first-to the last ounce of his physical resources)-under this influence the personal ego finally suffered a loss of values. If the man in the concentration camp did not struggle against this in a last effort to save his self-respect, he lost the feeling of being an individual, a being with a mind, wit inner freedom and personal value. He thought of himself then as only a part of an enormous mass of people; his existence descended to the level of animal life. The men were herded-sometimes to one place then to another; sometimes driven together, then apart-like a flock of sheep without a thought or a will of their own. A small but dangerous pack watched them from all sides, well versed n methods of torture and sadism. They drove the herd incessantly, backwards and forwards, with shouts, kicks and blows. And we, the sheep, thought of two things only-how to evade the bad dogs and how to get a little food.

Just like sheep that crowd timidly into the center of a herd, each of us tried to get into the middle of our formations. that gave one a better chance of avoiding the blows of the guards who were marching on either side and to the front and rear of our column. The central position had the added advantage of affording protection against the bitter winds. It was, therefore, in an attempt to save one's own skin that one literally tried to submerge into the crowd. This was done automatically in the formation [번역판_96p,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가치를 위협하고, 또 그것을 의혹 속으로 내던져버린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지닌 가치가 더 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세게, 인간의 의지를 박탈하고 그를 단지 처형(처음에 그를 이용한 대로 이용해 먹다가 육체의 마지막 한 점까지 이용하도록 계획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세계, 이런 세계에서 개인의 자아는 그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만약 강제수용소에 있는 사람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이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며, 그는 자기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 마음을 지니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거대한 군중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한다. 존재가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양떼처럼 무리지어-때로는 여기에 있다가 그 다음에는 저기로, 때로는 함께 몰려다니다가 때로는 서로 떨어져 다니는-다니게 된다. 그런데 비록 수는 적지만 매우 위험한 무리들이 사방에서 이들을 감시하고 있다. 이 무리들은 고문을 하는 것과 남을 괴롭히는 방법에 아주 능통한 자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고함을 치고, 발길질과 주먹질을 해대며 무리를 뒤에서 앞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양떼인 우리들은 오로지 두 가지 생각만 한다. 어떻게 하면 저 무서운 개들을 피할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까 하는 생각 말이다. 떼를 지어 무리 한복판으로 슬금슬금 들어가려는 양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대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 행렬의 양옆과 앞뒤에 있는 감시병들의 주먹질을 피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행렬의 한가운데는 매서운 바람을 덜 맞을 수 있다는 추가적인 이점도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파묻으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일은 대오를 형성할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영문판_51p, But at other times it was a very conscious effort on our part-in conformity with one of the camp's most imperative laws of self-preservation: Do not be conspicuous. We tried at all times to avoid attracting the attention of the SS. There were times, of course, wen it was possible, and even necessary, to keep away from the crowd. It is well known that an enforced community life, in which attention is paid to everything one does at all times, may result in an irresistible urge to get away, at least for a short while. The prisoner craved to be alone with himself and his thoughts. He yearned for privacy and for solitude. After my transportation to a so-called "rest camp" I had the rare fortune to find solitude for about five minutes at a time. Behind the earthen hut where I worked and in which were crowded about fifty delirious patients, there was a quiet spot in a corner of the double fence of barbed wire surrounding the camp. A tent had been improvised there with a few poles and branches of trees in order to shelter a half-dozen corpses(the daily death rate in the camp). There was also a shaft leading to the water pipes. I squatted on the wooden lid of this shaft whenever my services were not needed. I just sat and looked out at the green flowering slopes and the distant blue hills of the bavarian landscape, framed by the meshes of the barbed wire. I dreamed longingly, and my thoughts wandered north and northeast, in the direction of my home, but I cold only see clouds. Te corpses near me, crawling with liive, did not bother me. Only the steps of passing guards coul rouse me from my dreams; or perhaps it would be a call to the sick-bay or to collect a newly arrived supply of medicine for my hut-consisting of perhaps five or ten tablets of aspirin, to last for several days for fifty patients. [번역판_98p, 하지만 때로는 이런 일이 수용소 안에서 가장 절박한 자기보존의 법칙에 따라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 법칙은 될 수 있는 대로 눈에 띄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치대원들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항상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수용소에서도 사람들로부터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었다. 잘 알다시피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끄는 강요된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가 있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기를, 혼자서 사색에 잠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은 자기만의 개인적인 공간, 혼자 있는 고독을 열망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요양소’로 옮긴 후 나는 한 번에 5분 정도 혼자 고독을 즐기는 흔치 않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내가 일하는 막사에는 약 50명의 정신착란증 환자가 수용되어 있었는데, 그 막사 뒤 수용소를 두 겹으로 둘러친 철조망 한 귀퉁이에 아주 조용한 곳이 있었다. 이곳에는 시신 여섯 구(수용소에서는 하루에 평균 이 정도의 사람이 죽는다)를 보관하기 위해 기둥 몇 개와 나뭇가지를 엮어서 세운 임시 천막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배수관으로 통하는 구멍도 있었다. 나는 일이 없을 때마다 이 구멍의 나무 뚜껑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곤 했다. 그냥 앉아서 꽃이 만발한 초록빛의 산등성이를 바라보거나 철조망의 마름모꼴 그물 눈 안에 들어가 있는 먼 바바리아의 푸른 언덕을 바라보았다. 나는 간절하게 꿈을 꾸었다. 그러면 내 마음은 북쪽에서 북서쪽, 나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구름뿐이었다. 옆에 있는 시체, 이가 득실거리는 그 시체도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감시병이 지나가는 발소리만이 나를 꿈에서 깨울 수 있었다. 병실에서 부르는 호출이나 새로 들어온 의약품-약이라고 해 봤자 아스피린 다섯 알 내지 열 알이 전부로 50명의 환자가 있는 막사에서 며칠이며 바닥이 나는 양이었다-을 받아가라는 소리 때문에 꿈에서 깰 때도 있었다.

 

[영문판_52p, I collected them and then did my rounds, feeling the patients' pulses and giving half-tablets to te serious case. But the desperately ill received no medicine. It would not have helped, and besides, it would have deprived those fro whom there was still some hope. For light cases, I had nothing, except perhaps a word of encouragement. In this way I dragged myself from patient to patient, though I myself was weak and exhausted from a serious attack of typhus. Then I went back to my lonely place on tghe wood cover of the water shaft. This shaft, incidentally, once saved the lives of three fellow prisoners. Shortly before liberation, mass transports were organized to go to Dachau, and these three prisoners wisely tried to avoid the trip. They climbed down the shaft and hid there from the guards. I calmly sat on the lid, looking innocent and playing a childish game of the throwing pebbles at the barbed wire. On spotting em, the guard hesitated for a moment, but then passed on. Soon I could tell the three men below that the worst danger was over.

It is very difficult for an outsider to grasp how very little value was placed on human life in camp. The camp inmate was hardened, but possibly became more conscious of this complete disregard of human existence when a convoy of sick men was arranged. The emaciated bodies of the sick were thrown on two-wheeled carts which were drawn b prisoners for many mile, often through snowstorms, to the next camp. If one of the sick men had died before the cart left, he was thrown on anyway-the list ad to be correct! The list was the only thing that mattered. [번역판_99p, 약을 받은 다음 나는 회진을 했다. 환자들의 맥발을 일일이 재보고 상태가 위급한 환자에게 반 알씩 주었다. 약을 받은 다음 나는 회진을 했다. 환자들의 맥박을 일일이 재보고 상태가 위급한 환자에게 반 알씩 주었다.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는 약을 주지 않았다. 약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그것이 결국 가망 있는 환자들을 위해 써야 할 약을 빼앗는 것가 같기 때문이다. 증사가 가벼운 환자에게는 격려의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나 자신도 발진티푸스에 심하게 걸려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몸을 끌다시피 하면서 이 환자에서 저 환자로 옮겨가며 그들을 돌보았다. 그런 다음 나는 다시 배수구의 나무 뚜껑 위에 있는 나 혼자만의 장소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 구멍이 어느 날 우연히 내 친구 세 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풀려나기 바로 직전 다카우를 목적지로 하는 대규모 수송 작전이 있었다. 하지만 세 친구들은 아주 약삭빠르게 이것을 피해갔다. 그 구멍 안으로 들어가 감시병의 눈을 피했던 것이다. 친구들이 구멍으로 들어가고 나서 나는 조용히 뚜껑 위에 앉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순진한 표정을 하고 어린 아이처럼 철조망에 자갈을 던지고 있었다. 감시병이 나를 보고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다음 그냥 가버렸다. 그가 간 다음 나는 밑에 있는 세 친구들에게 최악의 위험한 상황은 지나갔다고 알려 주었다. 수용소에서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을 여겨지는지는 이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감정이 무뎌진 수용소 사람들도 병든 사람을 이송할 때에는 이곳에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철저하게 무시당하는지를 느꼈을 것이다. 다 죽어가는 환자의 몸은 바퀴 두 개 달리 수레에 던져진다. 동료 수감자가 그 수레를 끌고 대개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을 몇 마일이나 걸어서 다른 수용소로 옮긴다. 만약 병자 중 한 명이 수레가 떠나기 전에 죽는다 해도 그 역시 마찬가지로 수레에 던져진다. 리스트에 올린 번호와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번호뿐이다.

 

[영문판_53p, A man counted only because he had a prison number. One literally became a number: dead or alive-that was unimportant; the life of a "number" was completely irrelevant. What stood behind that number and that life mattered even less: the fate, the history, the name of the man. In the transport of sick patients that I, in my capacity as a doctor, ahad to accompany from one camp in Bavaria to another, there was a young prisoner whose brother was not on the list and therefore would have to be left behind. The young man begged so long that the camp warden decided to work an exchange, adn the brother took the place of a man who, at the moment, preferred to stay behind. But the list had to be correct! That was easy. The brother just exchanged numbers with the other prisoner.

As I have mentioned before, we had no documents; everyone was lucky to own his body, which, after all, was still breathing. All else about us, i.e., the rages hanging from our gaunt skeletons, was only of interest if we were assigned to a transport of sick patients. The departing "Moslems" were examined with unbashed curiosity to see whether their coats or shoes were not better than one's own. After all, their fates were sealed. But those who stayed behind in camp, who were still capable of some work, had t make use of every means to improve their chances of survival. They were not sentimental. The prisoners saw themselves completely dependent on the moods of the guards-playthings of fate-and this made them even less human than the circumstances warranted.

In Auschwitz I had laid down a rule for myself which proved to be a good one and which most of my comrades later followed. [번역판_100p, 오로지 죄수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말 그대로 번호가 되었다. 그 사람이 주었는지 살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번호’의 생명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 번호의 이면에 있는 것, 즉 그의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된다. 그의 운명과 그가 살아온 내력 그리고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한번은 내가 의사로서 바바리아의 수용소에서 다른 수용소로 한자를 호송할 때 동행한 적이 있었다. 호송되는 환자 중에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의 형이 호송자 명단에 들지 못해 뒤에 남겨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수용소 관리인에게 아주 오랫동안 간청을 했고, 관리인은 마침 수용소에 그대로 남기를 원하는 사람과 그의 형을 바꾸기로 했다. 물론 리스트가 정확하게 맞아야 했지만 그것은 아주 간단히 일이었다. 그 형의 번호 남아 있는 사람의 번호를 바꾸면 그만이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당시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서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숨쉬고 있는 자기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 환자의 호송을 맡은 사람들이 갖는 관심은 환자의 유일한 소유물, 즉 끔찍한 해골 위에 씌워 놓은 넝마 옷뿐이었다. 호송을 맡은 사람들은 뻔뻔스런 호기심을 가지고 호송되는 ‘회교도’의 외투나 신발이 자기 것보다 좋은 것인지를 살폈다. 결국 그들의 운명은 정해진 순서를 따라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 수용소에 살아남은 사람들, 여전히 일할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로 감상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전적으로 감시병의 기분-운명의 노리개라고나 할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 자신을 환경이 강요한 것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아우슈비츠에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을 위한 하나의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그 후 내 동료들도 모두 이 규칙을 따랐다.

 

[영문판_54p, I generally answered all kinds of questions truthfully. But I was silent about anything that was not expressly asked for. If I were asked my age, I gave it. If asked about my profession, I said "doctor", but did not elaborate. The first morning in Auschwitz an SS officer came to the parade ground. We had to fall into separate groups of prisoners: over forty years, under forty years, metal workers, mechanic, and so forth. Then we were examined for ruptures and some prisoners had to form a new group. The group that I was in was driven to another hut, where we lined up again. After being sorted out once more and having answered questions as to my age and profession, I was sent to another small group. Once more we were driven to another hut and grouped differently. This continued fro soem time, and I became quite unhappy, finding myself among strangers who spoke unintelligible foreign languages. Then came the last selection, and I found myself back in the group that had been with me in the first hut. They had barely noticed that I had been sent from hut to hut in the meantime. But I was aware that in those few minutes fate had passed me in many different forms.

When the transport of sick patients for the "rest camp" was organized, my name(that is, my number) was put on the list, since a few doctors were needed. But no one was convinced that the destination was really a rest camp. A few weeks previously the same transport had been prepared. Then, too, everyone had thought that it was destined for the gas ovens, When it was announced that anyone who volunteered for the dreaded night shift would be taken off the transport list, eighty-two prisoners volunteered immediately. A quarter of an hour later the transport was canceled, but the eighty-two stayed on the list for the night shift. [번역판_102p, 나는 모든 종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딱 꼬집어서 질문을 받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만약 누군가 내 나이를 물으면 나는 나이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내 직업을 물었을 때는 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그냥 “의사”라고만 대답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처음 아침을 맞았을 때, 친위대 장교 한 사람이 점호장에 나타났다. 우리는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마흔살 이하, 마흔살 이상, 정신노동자, 기계공 등 이런 식이었다. 그 다음 우리는 탈장 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새로운 그룹이 형성되었다. 내가 속해 있던 그룹은 다른 막사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줄을 섰다. 여기서 또 한 번 분류를 한 다음, 내 나이와 직업을 물었다. 나는 또 다른 작은 그룹으로 보내졌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다른 막사로 보내졌으며, 거기서 또 다른 그룹이 만들어졌다. 이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었으며,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왜냐하면 알아들 수 없는 외국말을 사용하는 이상한 사람들 그룹에 내가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다시 마지막 선별 작업이 진해되었다. 결국 나는 처음에 막사에서 개장 속했던 바로 그 그룹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그 동안 이 막사에서 저 막사로 옮겨 다녔다는 것을 거의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바로 그 몇 분 동안, 여러 가지 형태의 운명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병든 사람을 ‘요양소’로 호송하게 될 때 내 이름(즉 내 번호)이 리스트에 올라갔다. 의사 몇 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목적지가 요양소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몇 주 전 비슷한 호송계획이 있었는데, 그 때도 사람들은 호송되는 환자들이 모두 가스실로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수용소 측에서 호송될 환자 중에서 자원해서 야간작업반에 가겠다는 사람들은 호송자 명단에서 빼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82명의 사람들이 자원을 해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15분 후, 환자 호송계획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82명은 야간작업반 리스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영문판_55p, For the majority of them, this meant death within the next fortnight.

Now the transport for the rest camp was arranged for the second time. Again no one knew whether this was a ruse to obtain the last bit of work from the sick-if only for fourteen days-or whether it would go to the gas ovens ro to a genuine rest camp. The chief doctor, who had taken a likint to me, told me furtively one evening at a quarter to ten, "I have made it known in the orderly room that you can still have your name crossed off the list; you may do so up till ten o'clock."

I told him that this was not my way; that I had learned to let fate take its course. "I might as well stay with my friends," I said. There was a look of pity in his eyes, as if he knew. . . He shook my hand silently, as thought it was a farewell, not for life, but from life. Slow I walked back to my hut. There I found a good friend waiting for me.

<You really want to go with them?> he asked sadly.

<Yes. I am going.>

Tears came to his eyes and I tried to comfort him. Then there was something else to do-to make will:

<Listen, Otto, if I don't get back home to my life, and if you should see her again, then tell her that I talked of her daily, hourly. You remember. Secondly, I have loved her more than anyone. Thirdly, the short time I have been married to her outweighs everything, even all we have gone through here.> Otto, where are you? Are you alive? What has happened to you since our last hour together? Did you find your wife again? And do you remember how I made you learn my will by heart-word for word-in spite of your childlike tears? The next morning I departed with the transport. This time it was not a ruse. [번역판_103p, 대다수의 환자들에게 야간작업을 한다는 것은 곧 2주안에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두 번째로 환자 호송 계획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 때는 이 계획이 환자들의 남은 노동력-비록 14일 동안이지만-을 쥐어짜려는 것인지 정말로 요양소로 가려는 것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 저녁 10시 15분 전 평소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주치의가 다가오더니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직실에 얘기를 잘 해두었고. 당신을 리스트에서 빼도록 했으니 10시까지 당직실로 가보시오.” 나는 그에게 이것이 내 길이 아니라고, 나는 운명이 정해 놓은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나는 내 친구들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이 연민의 빛을 띠었다. 마치 내 운명을 알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그는 말없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것을 삶을 위한 악수가 아니라, 삶과 작별하는 악수였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막사로 돌아왔다. 막사에는 친한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정말로 그 사람들과 함께 가기를 원하나?> 그가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네. 나는 갈 거야> 그러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런 다음 할 일이 있었다. 유언을 하는 것이었다.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며, 그리고 자네가 자네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주게. 내가 매일같이 매시간 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 두 번째로 내가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세 번째로 내가 그녀와 함께 했던 그 짧은 결혼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 주게.> <오토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살아있나?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네 아내를 다시 만났나? 그리고 기억하나? 자네가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자네에게 내 유언을 한 마디 한 마디 외우게 했던 것을.> 이튿날 아침 나는 호송자들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이번에는 속임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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