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2022년 4월 7일(목)_55~60p

작성자Frida|작성시간22.04.06|조회수34 목록 댓글 0

[영문판_55p, For the majority of them, this meant death within the next fortnight.

Now the transport for the rest camp was arranged for the second time. Again no one knew whether this was a ruse to obtain the last bit of work from the sick-if only for fourteen days-or whether it would go to the gas ovens ro to a genuine rest camp. The chief doctor, who had taken a likint to me, told me furtively one evening at a quarter to ten, "I have made it known in the orderly room that you can still have your name crossed off the list; you may do so up till ten o'clock."

I told him that this was not my way; that I had learned to let fate take its course. "I might as well stay with my friends," I said. There was a look of pity in his eyes, as if he knew. . . He shook my hand silently, as thought it was a farewell, not for life, but from life. Slow I walked back to my hut. There I found a good friend waiting for me.

<You really want to go with them?> he asked sadly.

<Yes. I am going.>

Tears came to his eyes and I tried to comfort him. Then there was something else to do-to make will:

<Listen, Otto, if I don't get back home to my life, and if you should see her again, then tell her that I talked of her daily, hourly. You remember. Secondly, I have loved her more than anyone. Thirdly, the short time I have been married to her outweighs everything, even all we have gone through here.> Otto, where are you? Are you alive? What has happened to you since our last hour together? Did you find your wife again? And do you remember how I made you learn my will by heart-word for word-in spite of your childlike tears? The next morning I departed with the transport. This time it was not a ruse. [번역판_103p, 대다수의 환자들에게 야간작업을 한다는 것은 곧 2주안에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두 번째로 환자 호송 계획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 때는 이 계획이 환자들의 남은 노동력-비록 14일 동안이지만-을 쥐어짜려는 것인지 정말로 요양소로 가려는 것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 저녁 10시 15분 전 평소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주치의가 다가오더니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직실에 얘기를 잘 해두었고. 당신을 리스트에서 빼도록 했으니 10시까지 당직실로 가보시오.” 나는 그에게 이것이 내 길이 아니라고, 나는 운명이 정해 놓은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나는 내 친구들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이 연민의 빛을 띠었다. 마치 내 운명을 알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그는 말없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것을 삶을 위한 악수가 아니라, 삶과 작별하는 악수였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막사로 돌아왔다. 막사에는 친한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정말로 그 사람들과 함께 가기를 원하나?> 그가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네. 나는 갈 거야> 그러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런 다음 할 일이 있었다. 유언을 하는 것이었다.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며, 그리고 자네가 자네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주게. 내가 매일같이 매시간 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 두 번째로 내가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세 번째로 내가 그녀와 함께 했던 그 짧은 결혼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 주게.> <오토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살아있나?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네 아내를 다시 만났나? 그리고 기억하나? 자네가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자네에게 내 유언을 한 마디 한 마디 외우게 했던 것을.> 이튿날 아침 나는 호송자들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이번에는 속임수가 아니었다.

 

[영문판_56p, We were not heading for the gas chambers, and we actually did go to a rest camp. Those who had pitied me remained in a camp where famine was to rage ever more fiercely than in our new camp. They tried to save themselves, but they only sealed their own fates. Months later, after liberation, I met a friend from the old camp. He related to me how he, as camp policeman, had searched for a piece of human flesh that was missing from a pile of corpses. He confiscated it from a pot in which he found it cooking. Cannibalism had broken out. I had left just in time.

Does this not bring to mind the story of Death in Teheran? A rich and mighty Persian once walked in his garden with one of his servants. The servant cried that he had just encountered Death, who had threatened him. He begged his master to give him his fastest horse so that he could make haste and flee to Teheran, which he could reach that same evening. The master consented and the servant galloped off on the horse. On returning to his house the master himself met Death, and questioned him, “Why did you terrify and threaten my servant?” “I did not threaten him; I only showed surprise in still finding him here when I planned to meet him tonight in Teheran,” said Death.

The camp inmate was frightened of making decisions and of taking any sort of initiative whatsoever. This was the result of a strong feeling that fate was one master, and that one must not try to influence it in any way. but instead let it take its own course. In addition, there was a great apathy, which contribute in no small part of the feelings of the prisoner. At times, lightning decisions had to be made, decisions which spelled life or death. [번역판_105p, 가스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요양소로 가는 것이었다. 나를 불쌍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우리가 새로 들어간 수용소보다 훨씬 혹독한 기근에 시달렸던 그 수용소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을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결국 자신의 정해진 운명을 확인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나는 그 전의 수용소에 있던 한 친구를 만났다. 그는 자기가 수용소의 보안원으로 시체 더미에서 없어진 인육 조각을 어떻게 찾아냈는지를 나에게 말해 주었다. 요리 중인 냄비 안에서 찾아내 압수했다는 것이다. 기아에 시달린 나머지 드디어 수용소 안에서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발생했던 모양이다. 내가 때맞추어 그 수용소를 잘 떠난 셈이다. 이것이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한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이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하인이 비평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 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밤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을 승낙을 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견을 돌려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죽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지요.>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무감각은 수감자들의 감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생과 사를 가르는 결정이었다.

 

[영문판_57p, The prisoner would have preferred to let fate make the choice for him. This escape from committment was most apparent when a prisoner had to make the decision for or against an escape attempt. In those minutes in which he had to make up his mind-and it was always a question of minutes-he suffered the tortures of Hell. Should he make the attempt to flee? Should he take the risk?

I, too, experienced this torment. As the battle-front drew nearer, I had the opportunity to escape. A colleague of mine who had to visit huts outside the camp in the course of his medical duties wanted to escape and take me with him. Under the pretense of holding a consultation about a patient whose illness required a specialist's advice, he smuggled me out. Outside the camp, a member of foreign resistance movement was to supply us with uniforms and documents. At the last moment there were some technical difficulties and we had to return to camp once more. We used this opportunity to provide ourselves with provisions-a few rotten potatoes-and to look for a rucksack.

We broke into an empty hut of the women's camp, which was vacant, as the women had been sent to another camp. The hut was in great order; it was obvious that many women had acquired supplies and fled. There ware rags, straw, rotting food, and broken crockery. Some bowls were still in good conditio and would have been veryh valuable to us, but we decided not to take them. We knew that lately, as conditions had become desperate, they had been used not only for food, but also as washbasins and chamber pots.(There was aa strictly enforced rule against having any kind of utensil in the hut. However, some people were forced to break this rule, especially the typhus patients, who were much too weak to go outside even with helo.) [번역판_107p, 하지만 사람들은 이때도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을 내려 주기를 원했다. 이렇게 어떤 일의 실행을 회피하는 태도는 수감자가 수용소에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 몇 분 동안-이런 문제는 항상 몇 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그는 지옥의 고문과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 탈출을 해야만 할까?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까? 나 역시 비슷한 고통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전선이 우리 수용소에 가까이 왔을 때, 나에게 탈출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수용소에 의사 출신 동료가 있었다. 그는 진료를 하는 길에 수용소 밖에 있는 막사에도 들러야 했는데, 그가 탈출을 시도하면서 나에게도 함께 가자고 했다. 환자의 증세가 전문의의 조언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함께 진찰해야 한다는 구실을 붙여 나를 수용소 밖으로 데려간 것이다. 수용소 밖에서는 저항운동단체의 일원인 한 외국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에게 제복과 문서를 주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겨서 다시 수용소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회를 식량-상한 감자 몇 알에 불과하지만-을 준비하고, 배낭을 구하는 데 쓰기로 했다. 먼저 우리는 여자 수용소에 있는 막사로 뛰어 들어갔다. 여자들이 다른 수용소로 옮겨 갔기 때문에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막사 안은 무질서 그 자체였다. 많은 여자들이 보급품을 받은 다음 서둘러 떠난 것이 분명했다. 넝마 옷, 지푸라기, 상한 음식, 깨진 질그릇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어떤 그릇은 여전히 상태가 좋아서 꽤 쓸모 있어 보이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당시 여자 수용소에는 상황이 나빠지자 그릇을 식기로는 물론 세면대롸 변기로도 사용했다고 한다(수용소에서는 막사 안에 변기를 갖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엄한 규율이 있어싿.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 규율을 어겨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발진티푸스 환자처럼 몸이 너무 쇠약해 도움을 받아도 밖에 나가기 힘든 사람들이 그랬다.

 

[영문판_58p, While I acted as a screen, my friend broke into the hut and returned shortly with a rucksack which he id under his coat. He had seen another one inside which I was to take. So we changed places and I went in. As I searched in the rubbish, finding the rucksack and even a toothbrush, I suddenly saw, among all the things that had been left behind, the body of a woman.

I ran back to my hut to collect all my possessions: my food bowl, a pair of torn mittens "inherited" from a dead typhus patient, and a few scraps of paper covered with shorthand notes(on which, as I mentioned before, I had started to reconstruct the manuscript which I lost at Auschwitz). I made a quick last round of my patients, who were lying huddled on the rotten planks of wood on either side of the huts. I came to my only countryman, who was almost dying, and whose life it had been my ambition to save in spite of his condition. I had to keep my intention to escape to myself, but my comrade seemed to guess that something was wrong(perhaps I showed a little nervousness). In a tired voice he asked me, <You, too, are getting out?> I denied, but I found it difficult to avoid his sad look. After my round I returned to him. Again a hopeless look greeted em and somehow I felt it to be an accusation. The unpleasant feeling that had gripped me as soon as I had told my friend I would escape with him became more intense. Suddenly I decided to take fate into my own hands fro once, I ran out of the hut and told my friend that I could not go with him. As soon as I had told him with finality that I had made up my mind with my patients, the unhappy feeling left me. I did not know what the following days would bring, but I had gained an inward peace that I had never experienced before. [번역판_109p, 내가 망을 보는 동안 친구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곧 이어 그가 외투 속에 배낭을 숨겨 가지고 나에게 왔다. 그가 막사 안에서 다른 배낭을 보았다고 했는데, 그것은 내가 가져오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역할을 바꾸어 내가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쓰레기더미를 뒤져서 배낭은 물론 칫솔까지 찾아내는 횡재를 얻었다. 그런ㄷ 바로 그 순간 나는 뒤에 남겨진 쓰레기더미 속에서 여자의 시신을 보았다. 소지품을 모두 챙기기 위해 나는 내 막사로 뛰어 들어갔다. 음식을 받아먹는 그릇과, 죽은 발진티푸스 한자에게 ‘상속 받은’ 낡은 벙어리장갑 한 켤레, 소기 부호가 쓰인 종이 몇 장(이미 얘기했던 것처럼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잃어버린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이 내 소지품이었다. 나는 마지막 회진을 빨리 끝냈다. 한자들은 막사 양쪽에 깔아 놓은 널판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나는 환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나와 같은 고향 출신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심각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정말로 살리고 싶었다. 나는 탈출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내 고향 친구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어쩌면 내가 약간 초조한 기색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도 나갈 건가요?> 나는 부인했다. 하지만 그의 슬픈 눈초리를 피하기가 힘들었다. 회진이 끝나고 나서 나는 다시 그에게 갔다. 그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나를 맞았다. 어쩌면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 같기로 했다. 내가 친구에게 함께 탈출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나를 엄습했던 그 불평했던 감정이 점점 더 심해졌다. 나는 갑자기 운명을 내 자신의 손으로 잡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막사 밖으로 뛰어나가 친구에게 그와 함께 탈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연한 태도로 환자 곁에 그대로 감기로 했다고 친구에게 말하자마자 그 불편했던 감정이 사라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영문판_59p, I returned to the hut, sat down on the boards at my countryman's feet and tried to comfort him; then I chatted with the others, trying to quiet them in their delirium.

Our last day in camp arrived. As the battle-front came nearer, mass transports had taken nearly all the prisoners to other camps. The camp authorities, the Capos and the cooks had fled. On this day an order was given that the camp must be evacuated completely by sunset. Even gthe few remaining prisoners(sick, a few doctors, and some "nurses") would have to leave. A night, the camp was to be set on fire. In the afternoon the trucks which were to collect the sick had not yet appeared. Instead the camp gates were suddenly closed and the barbed wire closely watched, so that no one could attempt an escape. The remaining prisoners seemed to be destined to burn with the camp. For the second time my friend and I decided to escape.

We had been given an order to bury three men outside the barbed wire fence. We were the only two in camp who had strength enough to do the job. Nearly all the others lay in the few huts which were still in use, prostrate with fever and delirium. We now made our plans: along with the first body we would smuggle out my friend's rucksack, hiding it in the old laundry tub which served as a coffin. When we took out the second body we would also carry out my rucksack, and on the third trip we intended to make our escape. The first two trips went according to plan. After we returned, I waited while my friend tried to find a piece of bread so that we would have something to eat during the next few days in the woods. [번역판_110p, 나는 막사로 돌아가 고향 친구의 발끝에 앉아서 그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전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수감자들을 다른 수용소로 옮기는 대규모 수송작전이 진행되었다. 수용소 당직자와 카포들, 그리고 요리사들은 모두 도망을 갔다. 이날 해질 때까지 수용소를 완전히 비워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잔류해 있던 몇 명의 사람들(환자와 의사 몇 명 그리고 간호사들)까지도 모두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밤이 되며 수용소에 불을 지르게 되어 있었다. 오후가 되었는데도 환자를 실어 나르기로 되어 있는 트럭이 오지 않았다. 대신에 갑자기 수용소 문이 닫히고, 어느 누구도 도망을 칠 수 없도록 철조망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수용소와 함께 불태워질 운명에 처한 것처럼 보였다. 내 친구와 나는 두 번째로 탈출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철조망 담장 밖에다 시신 세 구를 묻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수용소에 있는 사람 중에서 우리 두 사람에게만 이 일을 할 수 있는 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막사에 누워서 고열과 정신착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계획을 세웠다. 첫 번째 시신을 운반할 때 관을 사용하는 낡은 세탁통에다 친구의 배낭을 가져 오기로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시신을 옮길 때 내 배낭을 가져 오기로 했다. 그릭 세 번째 시신을 옮길 때 탈출을 하자는 것이었다. 처음의 두 번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막사로 다시 돌아온 후, 나는 숲에서 며칠 지내는 동안 먹을 빵을 구하러 간 친구를 기다렸다.

 

[영문판_60p, I waited. Minutes passed. I became more and more impatient as he did not return. After tree years of imprisonment, I was picturing freedom joyously, imagining how wonderful it would be to run toward the battle-front. but we did not get that far.

The very moment when my friend came back, the camp gate was thrown open. A splendid, aluminum-colored car, on which were painted large red crosses, slowly rolled on to the parade ground. A delegate from the International Red Cross in Geneva had arrived, and the camp and its inmates were under his protection. The delegate billeted himself in a farmhouse in the vicinity, in order t be near the camp at all times in case of emergency. Who worried about escape now? boxes with medicines were unloaded from the car, cigarettes were distributed, we were photographed and joy reigned supreme. Now there was no need for us to risk running toward the fighting line.

In our excitement we had forgotten the third body, so we carried it outside and dropped it int the narrow grave we had dug for the three corpses. The guard who accompanied us-a relatively inoffensive man-suddenly became quite gently. He saw that the tables might be turned and tried to win our goodwill. He joined in the short prayers that wee offered for the dead men before throwing soil over them. After the tension and excitement of the past days and hours, those last days in our race with death, the words of our prayer asking for peace, were as fervent as any ever uttered by the human voice.

And so the last day in camp passed in anticipation of freedom. But we had rejoiced too early. the Red Cross delegate had assured us that an agreement had been signed, and that the camp must not be evacuated. But the night the SS arrived with trucks and brought an order to clear the camp. [번역판_111p, 친구를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났다. 그가 돌아오지 않자 점점 더 조바심이 났다. 무려 3년을 갇혀 지낸 후, 이제 즐거운 마음으로 자유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전선을 향해서 내달리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를 상상하면서. 그러나 우리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친구다 돌아온 바로 그 순간 수용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적십자 마크가 그려진 번쩍번쩍하는 알루미늄 차가 천천히 점호장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제네바에 있는 국제 적십자사의 대표가 도착한 것이다. 그는 수용소 가까이에 있는 농가에 숙소를 정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누가 탈출을 걱정하겠는가? 차에서 약 상자가 내려지고 담배가 공급되었다. 우리는 사진이 찍혔으며, 기쁨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제 전선을 향해 달려가는 위험한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이에 세 번째 시신을 밖으로 갖다 묻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시신을 밖으로 가져가 파놓은 좁은 무덤에 밀어 넣었다. 우리와 동행한 감시병-비교적 고약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이 갑자기 온순해졌다. 그는 정세가 뒤바뀐 것을 알고 우리의 호감을 사려고 애를 썼다. 시신 위에 흙은 덮기 전에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를 올리자는 우리의 제안에 따라 함께 기도를 올렸다. 오랜 시간을 긴장과 흥분 속에서 보낸 후, 동료의 주검 앞에서 올리는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그 동안 인간의 목소리로 올렸던 그 어떤 기도보다 뜨거웠다. 그렇게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날은 자유에 대한 기대 속에 지나갔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것일까. 국제적십자가 대표는 협정이 조인되었으며, 수용소를 비우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에게 확언했었다. 그러나 그날 밤 나치대원들이 트럭을 타고 와서 수용소를 비우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