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판_60p, I waited. Minutes passed. I became more and more impatient as he did not return. After tree years of imprisonment, I was picturing freedom joyously, imagining how wonderful it would be to run toward the battle-front. but we did not get that far.
The very moment when my friend came back, the camp gate was thrown open. A splendid, aluminum-colored car, on which were painted large red crosses, slowly rolled on to the parade ground. A delegate from the International Red Cross in Geneva had arrived, and the camp and its inmates were under his protection. The delegate billeted himself in a farmhouse in the vicinity, in order t be near the camp at all times in case of emergency. Who worried about escape now? boxes with medicines were unloaded from the car, cigarettes were distributed, we were photographed and joy reigned supreme. Now there was no need for us to risk running toward the fighting line.
In our excitement we had forgotten the third body, so we carried it outside and dropped it int the narrow grave we had dug for the three corpses. The guard who accompanied us-a relatively inoffensive man-suddenly became quite gently. He saw that the tables might be turned and tried to win our goodwill. He joined in the short prayers that wee offered for the dead men before throwing soil over them. After the tension and excitement of the past days and hours, those last days in our race with death, the words of our prayer asking for peace, were as fervent as any ever uttered by the human voice.
And so the last day in camp passed in anticipation of freedom. But we had rejoiced too early. the Red Cross delegate had assured us that an agreement had been signed, and that the camp must not be evacuated. But the night the SS arrived with trucks and brought an order to clear the camp. [번역판_111p, 친구를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났다. 그가 돌아오지 않자 점점 더 조바심이 났다. 무려 3년을 갇혀 지낸 후, 이제 즐거운 마음으로 자유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전선을 향해서 내달리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를 상상하면서. 그러나 우리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친구다 돌아온 바로 그 순간 수용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적십자 마크가 그려진 번쩍번쩍하는 알루미늄 차가 천천히 점호장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제네바에 있는 국제 적십자사의 대표가 도착한 것이다. 그는 수용소 가까이에 있는 농가에 숙소를 정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누가 탈출을 걱정하겠는가? 차에서 약 상자가 내려지고 담배가 공급되었다. 우리는 사진이 찍혔으며, 기쁨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제 전선을 향해 달려가는 위험한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이에 세 번째 시신을 밖으로 갖다 묻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시신을 밖으로 가져가 파놓은 좁은 무덤에 밀어 넣었다. 우리와 동행한 감시병-비교적 고약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이 갑자기 온순해졌다. 그는 정세가 뒤바뀐 것을 알고 우리의 호감을 사려고 애를 썼다. 시신 위에 흙은 덮기 전에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를 올리자는 우리의 제안에 따라 함께 기도를 올렸다. 오랜 시간을 긴장과 흥분 속에서 보낸 후, 동료의 주검 앞에서 올리는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그 동안 인간의 목소리로 올렸던 그 어떤 기도보다 뜨거웠다. 그렇게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날은 자유에 대한 기대 속에 지나갔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것일까. 국제적십자가 대표는 협정이 조인되었으며, 수용소를 비우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에게 확언했었다. 그러나 그날 밤 나치대원들이 트럭을 타고 와서 수용소를 비우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영문판_61p, The last remaining prisoners were to be taken to a central camp, from which they would be sent to Switzerland within forty-eight hours-to be exchanged for some prisoners of war. We scarcely recognized the SS. They were so friendly, trying to persuade us to get in the trucks without fea, telling us that we should be grateful for our good luck. Those who were strong enough crowded into the trucks and the seriously ill and feeble were lifted up with difficulty. My friend and I-we did not hide our rucksacks now-stood in the last group, from which thirteen would be chosen for the next to last truck. The chief doctor counted out the requisite number, but he omitted the two of us. The thirteen were loaded int the truck and we had to stay behind. Surprised, very annoyed and disappointed, we blamed the chief doctor, who excused himself by saying that we had been tired and distracted. He said that he ad thought we still intended to escape. Impatiently we sat down, keeping our rucksacks on our backs, and waited with the few remaining prisoners for the last truck. We had to wait a long time. Finally we lay down on the mattresses of the deserted guard-room, exhausted by the excitement of the last few hours and days, during which we had fluctuated continually between hope and despair. We slept in our clothes and shoes, ready for the journey.
The noises of rifles and cannons woke us; the flashes of tracer bullets and gun shots entered the hut. The chief doctor dashed in and ordered us to take cover on the floor. One prisoner jumped on my stomach from the bed above me and with his shoes on. [번역판_113p, 마지막 남아 있던 수감자들은 중앙수용소로 보내진 다음 그곳에서 48시간 안에 스위스로 가도록 되어 있었다. 다른 전쟁 포로들과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나치 대원들을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너무나 친절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망설이지 말고 트럭에 타라고 우리를 설득하면서, 이런 행운을 얻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강한 사람들은 트럭 안으로 밀고 들어가고, 심하게 아프거나 약한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들어올려졌다. 내 친구와 나는-이제는 더 이상 배낭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마지막 그룹에 속해 있었다. 이 그룹에서 13명을 뽑아 끝에서 두 번째로 오는 트럭에 태우기로 되어 있었다. 트럭이 도착하자 주치의가 열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그 중에 우리 둘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뽑힌 열세 사람은 트럭에 올라타고 우리 둘은 뒤에 남아야 했다. 놀라고 화가 나고 실망해서 우리는 주치의에게 따졌다. 그는 너무 피곤하고 정신이 없어서 그랬노라고 변명하면서 우리가 아직도 탈출을 기도하는 줄 알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등 뒤에 배낭을 지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 트럭이 오기를 기다렷다. 이번에는 아주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가 초소에 있던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우리는 지난 몇 시간, 며칠 동안의 흥분으로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끊임없이 오르내렸었다. 그러다가 매트리스 위에서 여행에 대비해 옷과 신발을 그대로 입은 채로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를 잤을까. 시끄러운 대포 소리와 총소리에 잠이 깼다. 예광탄이 터지고 막사 안으로 총알이 날아들었다. 주치의가 뛰어 들어오더니 바닥에 엎드리라고 했다. 위 침대에 있던 사람이 신발을 신은 채로 내 배 위로 뛰어 내렸다.
[영문판_62p, That awakened me all right! Then we grasped what was happening: the battle-front had reached us! the shooting decreased and morning dawned. Outside on the pole at the camp gate a white flag floated in the wind.
Many weeks later we found out that even in those last hours fate had toyed with us few remaining prisoners. We found out just how uncertain human decisions are, especially in matters of life and death. I was confronted with photographs which had been taken in a small camp not far from ours. Our friends who had thought they were traveling to freedom that night had been taken in the trucks to this camp, and there they were locked in the huts and burned to death. Their partially charred bodies were recognizable on the photograph. I thought again of Death of Teheran.
Apart from its role as a defensive mechanism, the prisoners' apathy was also the result of other factors. Hunger and lack of sleep contributed to it(as they do in normal life, also) and to the general irritability which was another characteristic of the prisoners' mental state. The lack of sleep was due partly to the pestering of vermin which infested the terrible overcrowded huts because of the general lack of hygiene and sanitation. The fact that we had neither nicotine nor caffeine also contributed to the sate of apathy and irritability.
Besides these physical causes, there were mental one, in the form of certain complexes. The majority of prisoners suffered from a kind of inferiority complex. We all had once been or had fancied ourselves to be "somebody." Now we were treated like complete nonentities. (The consciousness of one's inner value is anchored in higher, more spiritual things, and cannot be shaken by camp life. But how many free men, let alone prisoners, possess it?) [번역판_114p, 그 덕분에 나는 잠에서 완전히 깰 수 있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었다. 전선이 코앞에까지 온 것이다. 드디어 총격이 잦아들고 아침이 밝았다. 수용소 문에 있는 깃대에서 하얀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로부터 여러 주가 지난 후, 우리는 이 마지막 순간에도 운명의 신이 우리를 우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는 인간의 결정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그것이 생사와 관련된 문제일 때에는 특히 그렇다. 나는 우리 수용소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수용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그날 밤 자유를 향해 간다고 믿었던 우리 친구들은 트럭에 실려 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막사 안에 갇힌 채로 불에 타 죽었다. 사진으로도 군데군데 불에 탄 동료들의 시신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또 다시 테헤란에서의 죽음을 생각했다. 수감자들의 무감각이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는 것 외에 여기에는 또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굶주림과 수면부족(이것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이 이런 무감각한 상태로 그들을 이끌었으며, 수감자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초조함이 이런 무감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보건시설과 우생시설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이와 벼룩이 사람들로 꽉 찬 막사 안에서 무섭게 퍼져나갔다. 니코틴과 카페인 부족도 이런 무감각과 초조함의 원인이 되었다. 물질적인 요인 외에 정신적인 요인도 있었는데, 그것을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대단한 사람’ 이었거나 혹은 스스로 ‘대단한 사람’ 이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한 사람의 내적 가치에 대한 의식은 보다 차원이 높은, 보다 정신적인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수용소 생활이 이것을 흔들 수는 없다. 하지만 수감자는 차치하고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있을까?)
[영문판_63p, Without consciously thinking about it, the average prisoner felt himself utterly degraded. This became obvious when one observed the contrasts offered by the singular sociological structure of the camp. The more "prominent" prisoners, the Capos, the cooks, the store-keepers and the camp policemen, did not, as a rule, feel degraded at all, like the majority of prisoners, but on the contrary-promoted! Some even developed miniature delusions of grandeur. The mental reaction of the envious and grumbling majority toward this favored minority found expression in several ways, sometimes in jokes. For instance, I heard one prisoner talk to another about a Capo, saying, "Imagine! I knew that man when he was only the president of a large bank. Isn't it fortunate that he has risen so far in the world?>
Whenever the degraded majority and the promoted minority came into conflict(and there were plenty of opportunities for this, starting with the distribution of food) the results were explosive. Therefore, general irritability(whose physical causes were discussed above)became most intense when these tension often ended in a general fight. Since the prisoner continually witnessed scenes of beatings, the impulse toward violence was increased. I myself felt my fists clench when anger came over me while I was famished and tired. I was usually very tired, since we had to stoke our stove-which we were allowed to keep in our hut for the typhus patients-throughout the nights. However, some of the most idyllic hours I have ever spent were in the middle of the night when all the others were delirious or sleeping [번역판_116p, 일반적인 수감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계층이 하락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현상은 수용소라는 사회의 구조를 관찰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다른 수감자보다 ‘우월한’ 수감자와, 카포, 요리사, 군수창고 관리인, 보안대원은 대다수 사람들과는 달리 계층이 하락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상승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 몇몇은 약간의 과대망상 증세까지 보이기도 했다.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질투와 불평을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이것을 표현하는데, 이것이 때로는 농담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 번은 어떤 사람이 한 카포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상상해 봐! 내가 알고 있기로 저 사람은 그 전에 큰 은행의 총재에 불과했거든. 그런데 지금 저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으니 얼마나 출세한 거야!> 계층 하락한 대다수의 사람들과 계층 상승한 소수의 사람들이 싸우게 되면(수용소에서는 음식을 나누어 주는 문제에서 부터 시작해 이런 일이 벌어질 때가 아주 많았다) 그 결과는 가치 폭발적이었다. 일반적인 불안감(그 물리적인 요인은 앞에서 이야기했다)에 이런 정신적 긴장이 가중되며 그 강도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긴장이 종종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수감자들은 그동안 끊임없이 구타 장면을 목격해 왔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스스로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충동이 커진다. 나 자신의 경우만 보더라도 배고프고 피곤한 상태에서 화가 나면 저절로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때가 많았다. 나는 언제나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 있었다. 왜냐하면 밤새로록 화로에 불-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 환자를 위해 막사 안에 불을 피우도록 허락했다-을 지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낸 중에서 가장 목가적이었던 시간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헛소리를 하거나 잠을 자고 있는 한밤중이었다.
[영문판_64p, I could lie stretched out in front of the stove and roast a few pilfered potatoes in a fire made from stolen charcoal. But the following day I always felt even more tired, insensitive and irritable.
While I was working as a doctor in the typhus block, I also had to take the place of the senior block warden who was ill. Therefore, I was responsible to the camp authority for keeping the hut clean-if "clean" can be sued to describe such a condition. The pretense at inspection to which the hut was frequently submitted was more for the purpose of torture than of hygiene. More food and a few drugs would have helped, but the only concern of tghe inspectors was whether te dirty, ragged and verminous blankets of the patients were tucked in neatly at their feet. As to the fate of the inmates, they were quite unconcerned. If I reported smartly, whipping my prison cap from my worn head and clicking my heels, "Hut number VI/9 52 patients, two nursing orderlies, and one doctor," they were satisfied. And then they would leave. But until they arrived-often they were hours later than announced, and sometimes did not come at all-all I was forced to keep; straightening blankets, picking up bits of straw which fell from the bunks, and shouting at the poor devils who tossed in their beds and threatened to upset all my efforts at tidiness and cleanliness. Apathy was particularly increased among the feverish patients, so that they did not react at all unless they were shouted at. Even this failed at times, and then it took tremendous self-control not to strike them. For one's own irritability took on enormous proportions in the face of the other's apathy and especially in the face of the danger(i.e., the approaching inspection) Which was caused by it. [번역판_117p, 나는 난로 앞에 몸을 쭉 뻗치고 누워서는 슬쩍해 온 감자 몇 알을 역시 훔쳐온 숯불에 구워 먹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는 한층 더 피로감을 느꼈으며, 감각이 둔해지고 마음이 초조해졌다. 발진티푸스 한자 막사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을 때, 나는 병으로 쓰러진 고참 관리인 대신 그가 하던 일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나에게는 막사를 항상 ‘청결’-그런 상황에서도 ‘청결’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며-하게 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 막사 안에서 검열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수시로 행해지는 행위는 위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수감자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다. 환자들에게 음식이나 약 몇 알 더 주는 것이 도움이 되련만 검열관은 복도 중간에 지푸라기가 떨어져 있지 않는지, 이가 득실거리는 더럽고 다 떨어진 담요가 한자 발밑에 곱게 개어져 있는지에만 간심을 주었다. 수감자들의 운명?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빡빡 깎은 머리에서 모자를 잽싸게 벗는 것과 동시에 발뒤꿈치에서 찰카닥하는 소리를 내면서 “막사 번호 VI/9, 환자 52명, 간호사 1명, 의사 1명, 이상 없음” 이라고 하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막사를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오기 전까지는-온다고 한 시간보다 몇 시간씩 늦게 오거나 아예 안 올 때도 있었다-나는 담요를 정리하고, 침상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고, 침상에 누워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애써서 깨끗하게 해놓은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불쌍한 녀석들에게 소리를 질러대야만 했다. 고열에 시달리는 환장에게서는 무감각 증세가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지 않으며 전혀 반응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때로는 이것조차 실패로 끝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을 때리지 않기 위해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해야 했다. 다른 사람이 무감각한 것을 보면, 특히 그 때문에 위험한 상황(예를 들어 검열이 임박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보면 걷잡을 수없이 화가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다. 발진티푸스 환자 막사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을 때, 나는 병으로 쓰러진 고참 관리인 대신 그가 하던 일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나에게는 막사를 항상 ‘청결’-그런 상황에서도 ‘청결’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하게 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 막사 안에서 검열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수시로 행해지는 행위는 위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수감자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다. 환자들에게 음식이나 약 몇 알 더 주는 것이 도움이 되려만 검열관은 복도 중간에 지푸라기가 떨어져 있지 않은지, 이가 득실거리는 더럽고 다 떨어진 담요가 환자 발밑에 곱게 개어져 있는지에만 관심을 두었다. 수감자들의 운명?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영문판_65p, In attempting this psychological presentation and a psycho-pathological explanation of the typical characteristics of a concentration camp inmate, I may give the impression that the human being is completely and unavoidably influenced by his surroundings. (In this case the surroundings being the unique structure of camp life, which forced the prisoner to conform his conduct to a certain set pattern.) But what about human liberty? Is there no spiritual freedom in regard to behavior and reaction to any given surroundings? Is that theory true which would have us believe tghat man is mo more than a product of many conditional and environmental factor-be they of a biological, psychological or sociological nature? Is man but an accidental product of these? Most important, do the prisoners' reactions to the singular world of the concentration camp prove that man cannot escape the influences of his surroundings? Does man have no choice of action in the face of such circumstances?
We can answer these questions from experience as well as on principle. The experiences of camp life show that man does have a choice of action. There were enough examples often of a heroic nature, which proved tha apathy could be overcome, irritability suppressed. Man can preserve a vestige of spiritual freedom, of independence of mind, even in such terrible conditions of psychic and physical stress. We who lived in concentration camps can remember the men who walked through the huts comforting others, giving away their last piece of bread. [번역판_119p,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이 지니고 있던 전형적인 심리적 특징에 관한 문제를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 소개하고, 정신병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독자들은 인간은 철저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이런 경우, 주변 환경이 수용소 생활의 유일한 구조가 되며, 이것이 수감자들에게 일정한 유형의 행동을 하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어떤가? 어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아무런 정신적 자유도 없단 말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이론, 즉 인간의 여러 조건과 환경적인 요인-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성격으로 이루어진-이 만들어낸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일까? 인간은 이런 여러 요소들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제수용소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수감자들이 보인반응이 인간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는 이론을 입증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자기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단 말인가? 이론은 물론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을 통해서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입중해 주는 예(이런 이야기는 종종 영웅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수용소에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