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UME I FANTINE
BOOK FIRST - A JUST MAN(올바른 사람)
CHAPTER XIII - WHAT HE BELIEVED(주교의 신앙)
We are not obliged to sound the Bishop of D- on the score of orthodoxy. In the presence of such a soul we feel ourselves in no mood but respect. The conscience of the just man should be accepted on his word. Moreover, certain natures being given, we admit the possible development of all beauties of human virtue in a belief that differs from our own. What did he think of this dogma, or of that mystery? These secrets of the inner tribunal of the conscience are known only to the tomb, where souls enter naked. The point on which we are certain is, that the difficulties of faith never resolved themselves into hypocrisy in his case. No decay is possible to the diamond. He believed to the extent of his powers. "Credo in Patrem," he often exclaimed. Moreover, he drew from good works that amount of satisfaction which suffices to the conscience, and which whispers to a man, "Thou art with God!" 로마 가톨릭교이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는 디뉴의 주교를 검증해 볼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순수한 성자 앞에 존경과 감사를 표하면 될 것이다. 올바른 사람의 양심은 그대로 믿어야 한다. 어떤 기질을 가진 사람이든 우리는 혹여 우리와 신앙이 다를지라도 그에게 인간의 모든 미덕이 내재되어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이런 교리에 대해서 또 이런 시니베 대해서 주교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마음 깊숙한 곳의 이런한 비밀은 인간의 영혼이 무덤에 들어 갔을 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어떠한 신앙상의 어려움에 부딪혀도 그는 결코 위선에 빠진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금강석에는어떤한 부패도 있을 수 없다. 그는 지고한 신앙을 가졌다. “나 주이신 아버지를 만나이다” 라고 그는 자주 부르짖었다. 게다가 그는 양심을 만족시켜 주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너는 주와 함께 있다.” 라고 말해 줄 만큼의 만족감을 적선에서 얻어 내고 있었다.
The point which we consider it our duty to note is, that outside of and beyond his faith, as it were, the Bishop possessed an excess of love. It was in that quarter, quia multum amavit,-because he loved much-that he was regarded as vulnerable by "serious men," "grave persons" and "reasonable people"; favorite locutions of our sad world where egotism takes its word of command from pedantry. What was this excess of love? It was a serene benevolence which overflowed men, as we have already pointed out, and which, on occasion, extended even to things. He lived without disdain. He was indulgent towards God's creation. Every man, even the best, has within him a thoughtless harshness which he reserves for animals. 여기에 적어 둬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교는 말하자면 신앙 외에, 그리고 신앙을 초월하여 과도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기주의와 현학적인 태도를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우리의 따분한 사회가 쓰기 좋아하는 이른바 ‘진지한 사람들’과‘근엄한 양반들’과 ‘분별 있는 사람들’ 에게 그가 모자란 사람이라는 비판을 받은 것은 그 때문, 즉 ‘그가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렀다. 이 과도한 사랑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들에 대한 넘쳐흐르는, 그리고 때로는 사물에까지 미치는 차분한 호의였다. 그는 평생 아무것도 멸시하지 않앗다. 그는 신의 창조물에 관대했다. 사람은 누구나, 가장 훌륭하다는 사람마저도, 동물에 대한 무의식적인 냉혹성을 마음에 지니고 있다.
The Bishop of D- had none of that harshness, which is peculiar to many priests, nevertheless. He did not go as far as the Brahmin, but he seemed to have weighed this saying of Ecclesiastes: "Who knoweth whither the soul of the animal goeth?" Hideousness of aspect, deformity of instinct, troubled him not, and did not arouse his indignation. He was touched, almost softened by them. It seemed as though he went thoughtfully away to seek beyond the bounds of life which is apparent, the cause, the explanation, or the excuse for them. He seemed at times to be asking God to commute these penalties. He examined without wrath, and with the eye of a linguist who is deciphering a palimpsest, that portion of chaos which still exists in nature. This revery sometimes caused him to utter odd sayings. 이러한 냉혹성은 많는 신부들에게 특유한 것이지만, 디뉴의 주교에게는 조금도 그런 것이 없었다. 그는 브라만교도의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동물의 혼이 어디로 가는지 아는가?” 라는 전도서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본 것 같았다. 겉모양의 추함도 본능의 약점도 그를 괴롭히거나 화나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것에 감동하고 가엾게까지 여겼다. 그는 깊이 생각에 잠겨, 그 원인과 설명 또는 변명을 표면의 삶을 넘어서 추구하려는 것 같았다. 때로는 주에게 그것의 변경을 구하는 것같이도 보였다. 그는 노여워하는 마음도 없이, 지웠다 다시 쓴 양피지로 된고서를 판독하는 언어학자의 눈으로, 아직 자연 속에 존재하는 혼돈의 양을 검토했다. 그러한 명상이 가끔 그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오게 했다.
One morning he was in his garden, and thought himself alone, but his sister was walking behind him, unseen by him: suddenly he paused and gazed at something on the ground; it was a large, black, hairy, frightful spider. His sister heard him say:- "Poor beast! It is not its fault!" Why not mention these almost divinely childish sayings of kindness? Puerile they may be; but these sublime puerilities were peculiar to Saint Francis d'Assisi and of Marcus Aurelius. One day he sprained his ankle in his effort to avoid stepping on an ant. Thus lived this just man. Sometimes he fell asleep in his garden, and then there was nothing more venerable possible. Monseigneur Bienvenu had formerly been, if the stories anent his youth, and even in regard to his manhood, were to be believed, a passionate, and, possibly, a violent man. His universal suavity was less an instinct of nature than the result of a grand conviction which had filtered into his heart through the medium of life, and had trickled there slowly, thought by thought; for, in a character, as in a rock, there may exist apertures made by drops of water. These hollows are uneffaceable; these formations are indestructible. 어느날 아침 그는 뜰을 산택하고 있었다. 뒤에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주교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땅 위의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털이 숭숭 돋은 시커먼 거미였다. 누이동생은 그의 말소리를 들었다. “가련한 녀석! 네 잘못은 아닐 테지만” 어떻게 그 같은 말을 참겠는가! 마치 신처럼 자비롭고 순수한 그의 말은 어쩌며 어린아이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유치함이라고 하자. 하지만 이 숭고한 유치함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치함이다. 개미 한 마리를 밟지 않으려고 비켜 다가가 발목을 뺀 일도 있었다. 이렇게 이 올바른 사람은 살고 있었다. 이따금 그는 정원에서 잠을 자기도 했는데, 그럴때면 그보다 더 존경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청년 시절과 장년 시절에 관한 이야기에 의하면 비행브위 예하는 열정적인 사람이었고, 아마도 격렬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의 바다같이 관대한 성격은 타고난 본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삶을 통해 그의 가슴속에서 걸러지고 사상을 편력을 통해 그의 마음속에 들어온 커다란 확신의 결과였다. 왜냐하면 사람의 성격도 바위처럼 물방울로 구성이 뚫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파인 것은 지울 수 없고, 그렇게 형성된 것은 부술 수 없다.
In 1815, as we think we have already said, he reached his seventy-fifth birthday, but he did not appear to be more than sixty. He was not tall; he was rather plump; and, in order to combat this tendency, he was fond of taking long strolls on foot; his step was firm, and his form was but slightly bent, a detail from which we do not pretend to draw any conclusion. Gregory XVI., at the age of eighty, held himself erect and smiling, which did not prevent him from being a bad bishop. Monseigneur Welcome had what the people term a "fine head," but so amiable was he that they forgot that it was fine. When he conversed with that infantile gayety which was one of his charms, and of which we have already spoken, people felt at their ease with him, and joy seemed to radiate from his whole person. His fresh and ruddy complexion, his very white teeth, all of which he had preserved, and which were displayed by his smile, gave him that open and easy air which cause the remark to be made of a man, "He's a good fellow"; and of an old man, "He is a fine man." 1815년에 그는 일흔다섯 살을 맞았다. 그러나 예순 살이 넘어 보이지 않았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고 풍채가 컸는데 그는 살이 찌는 걸 피하기 위해 걷기를 즐겼다. 허리는 비교적 꼿꼿했고, 걸음걸이는 당당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소한 것으로부터 무엇을 결론지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 16세는 나이 여든에 몸을 똑바로 하고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나쁜 주교였다. 비앵브뤼 예하는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일반 대중이 말하는 용모였으니, 하도 사랑스러워서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린아이 같은 괘활함은 이미 말했듯이 그의 매력 중 하나인데, 그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면 사람들은 그의 옆에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고, 마치 그의 온 몸에서 기쁨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그의 불그르름하고 싱싱한 얼굴빛이며, 웃을 때 드러나는 아직 하나도 빠지지 않은 하얀 이가 그의 외관을 솔직하고도 소탈해 보이게 했다. 성인이라면 ‘호인이다’ 라고 말하게 하고 늙은이라면 ‘호호아’라고 말하게 하는 그런 외관을 말이다.
That, it will be recalled, was the effect which he produced upon Napoleon. On the first encounter, and to one who saw him for the first time, he was nothing, in fact, but a fine man. But if one remained near him for a few hours, and beheld him in the least degree pensive, the fine man became gradually transfigured, and took on some imposing quality, I know not what; his broad and serious brow, rendered august by his white locks, became august also by virtue of meditation; majesty radiated from his goodness, though his goodness ceased not to be radiant; one experienced something of the emotion which one would feel on beholding a smiling angel slowly unfold his wings, without ceasing to smile. Respect, an unutterable respect, penetrated you by degrees and mounted to your heart, and one felt that one had before him one of those strong, thoroughly tried, and indulgent souls where thought is so grand that it can no longer be anything but gentle. 나폴레옹이 그에게 받은 인상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문득 그를 보고서 곱게 늙은 노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몇 시간만 지내보면 또 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풍채 좋은 농인의 모습에서 어딘가 모를 장엄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백발을 드리운 넓은 이마에서는 기품이 흘러나왔고, 그의 풍채에서는 늘 위험이 느꼈졌다. 사람들은 미소를 띤 천사가 날갯짓을 하는 것을 지켜봤을 때의 경이로움과 감동을 느꼈다. 마음속은 온통 그를 향항 존경심으로 물들고 한 생애를 살아가 위대한 영혼을 마주하는 감동이 일었다. 그와 같은 영혼을 마주하며 너무나 위대하여 강작하기보다는 너그럽다는 인상이 들 수밖에 없다.
As we have seen, prayer, the celebration of the offices of religion, alms-giving, the consolation of the afflicted, the cultivation of a bit of land, fraternity, frugality, hospitality, renunciation, confidence, study, work, filled every day of his life. Filled is exactly the word; certainly the Bishop's day was quite full to the brim, of good words and good deeds. Nevertheless, it was not complete if cold or rainy weather prevented his passing an hour or two in his garden before going to bed, and after the two women had retired. It seemed to be a sort of rite with him, to prepare himself for slumber by meditation in the presence of the grand spectacles of the nocturnal heavens. 기도와 성무, 자선 행사, 그리고 밭일, 검소, 환대, 우애, 체념, 믿음, 연구, 저술 등이 그의 나날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이 말은 아주 적절한데, 주교의 하루는 훌륭한 사상과 말과 행위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밤에 두 부인이 2층으로 올라가고 난 뒤 한두 시간 동안 춥거나 배가 내려 뜰에 나가지 못하게 되며 주교는 하루의 보람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밤하늘을 보며 명상을 하고 잠을 자는 것을 의심처럼 수행했다.
Sometimes, if the two old women were not asleep, they heard him pacing slowly along the walks at a very advanced hour of the night. He was there alone, communing with himself, peaceful, adoring, comparing the serenity of his heart with the serenity of the ether, moved amid the darkness by the visible splendor of the constellations and the invisible splendor of God, opening his heart to the thoughts which fall from the Unknown. At such moments, while he offered his heart at the hour when nocturnal flowers offer their perfume, illuminated like a lamp amid the starry night, as he poured himself out in ecstasy in the midst of the universal radiance of creation, he could not have told himself, probably, what was passing in his spirit; he felt something take its flight from him, and something descend into him. Mysterious exchange of the abysses of the soul with the abysses of the universe! 두 부인이 깊은 밤까지 잠에 들지 못하는 날이면, 뜰에서 사각사각하는 주교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곳을 거닐며 자신을 마주 대하고 명상을 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마음을 수양하고, 어둠 속에 깃든 성좌의 빛과 먼 곳에 있는 주님의 모습에 감동하며 갖가지 생각으로 마음을 채웠다. 이때 주교는 한밤의 꽃들이 전해 주는 향내를 맡으며 찬란히 비치는 별빛 아래 등불처럼 타오르는 가슴을 내밀고서 창조의 빛에 홀로 서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정신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쉽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가 자기 밖으로 흘러나가고, 무잇인가가 자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영혼의 심연과 자연의 심연이 그의 몸 안팎을 넘나들고 있었다.
He thought of the grandeur and presence of God; of the future eternity, that strange mystery; of the eternity past, a mystery still more strange; of all the infinities, which pierced their way into all his senses, beneath his eyes; and, without seeking to comprehend the incomprehensible, he gazed upon it. He did not study God; he was dazzled by him. He considered those magnificent conjunctions of atoms, which communicate aspects to matter, reveal forces by verifying them, create individualities in unity, proportions in extent, the innumerable in the infinite, and, through light, produce beauty. These conjunctions are formed and dissolved incessantly; hence life and death. 그는 주님의 위대함을 마음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미래의 염원과 더욱 알 수 없는 과거의 영원, 그리고 눈앞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무한한 힘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알 수 없는 것을 파헤치기보다 조용히 바라보았다. 미리엘 주교는 주님을 연구하지 않았다. 그에 빠져 있었다. 그는 원자의 믿을 수 없는 결합을 생각했다. 그것이 갖가지 형태를 만들고, 그러면서 힘을 얻고 통일감 속에서 개성을 드러내고, 불균형 속에서 균형을 이루고, 무한함 가운데서 무수를 만들어 내고, 빛으로 아름다움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런 결합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끊어진다. 삶과 죽음이 거기에 있다.
He seated himself on a wooden bench, with his back against a decrepit vine; he gazed at the stars, past the puny and stunted silhouettes of his fruit-trees. This quarter of an acre, so poorly planted, so encumbered with mean buildings and sheds, was dear to him, and satisfied his wants. What more was needed by this old man, who divided the leisure of his life, where there was so little leisure, between gardening in the daytime and contemplation at night? Was not this narrow enclosure, with the heavens for a ceiling, sufficient to enable him to adore God in his most divine works, in turn? Does not this comprehend all, in fact? and what is there left to desire beyond it? A little garden in which to walk, and immensity in which to dream. At one's feet that which can be cultivated and plucked; over head that which one can study and meditate upon: some flowers on earth, and all the stars in the sky. 주교는 시든 포도 덩굴 앞의 벤치에 앉아서 과일나무 사이로 별을 바라보았다. 몇 그루 나무와 헛간, 오두막이 늘어선 이 땅은 그에게 너무나 과분하고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바쁜 임무 속에서도 틈틈이 낮이면 밭일을, 밤이며 명상을 하는 온인에게 그 이상 필요한 것이 있을까. 하늘을 지붕으로 삼은 작은 울타리 안은 가장 높은 조화로움을 이루고서 주님을 흠숭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거기에 모든 것이 있었다.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산책을 할 수 있는 작은 뜰과 명상을 하기 좋은 끝없는 하늘, 발치에는 가꿀 것들이 머리 위에는 명상하고 연구할 것이, 땅에는 꽃들이 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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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FIRST - A JUST MAN(올바른 사람)
CHAPTER XIV - WHAT HE THOUGHT(그의 사상)
One last word. Since this sort of details might, particularly at the present moment, and to use an expression now in fashion, give to the Bishop of D- a certain "pantheistical" physiognomy, and induce the belief, either to his credit or discredit, that he entertained one of those personal philosophies which are peculiar to our century, which sometimes spring up in solitary spirits, and there take on a form and grow until they usurp the place of religion, we insist upon it, that not one of those persons who knew Monseigneur Welcome would have thought himself authorized to think anything of the sort. That which enlightened this man was his heart. His wisdom was made of the light which comes from there.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이러한 종류의 자질구레한 사실들은 특히 오늘날에는, 그리고 현재 유행하는 표현을 써서 말하면, 디뉴의 주교에게 어떤 ‘범신론자적인’ 모습을 부여할 수 있고, 그에 대한 비난이 될지 칭찬이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이따금 고독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싹트고 형성되어 종교를 대신할 정도까지 자라는 우리 시대 특유의 그 개인 철학 중 하나를 그가 품고 있었다고 딛게 할 수 있을 것이므로, 비앵브뉘 예하를 실제로 아는 사람들이라며 누구 하나 그러한 생각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나는 강조해 둔다. 이 사람을 비춰 주는 것은 사랑이었다. 그의 지혜는 거기서 오는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No systems; many works. Abstruse speculations contain vertigo; no, there is nothing to indicate that he risked his mind in apocalypses. The apostle may be daring, but the bishop must be timid. He would probably have felt a scruple at sounding too far in advance certain problems which are, in a manner, reserved for terrible great minds. There is a sacred horror beneath the porches of the enigma; those gloomy openings stand yawning there, but something tells you, you, a passer-by in life, that you must not enter. Woe to him who penetrates thither! Geniuses in the impenetrable depths of abstraction and pure speculation, situated, so to speak, above all dogmas, propose their ideas to God. Their prayer audaciously offers discussion. Their adoration interrogates. This is direct religion, which is full of anxiety and responsibility for him who attempts its steep cliffs. 온갖 사상이 난무하고 행위도 많다. 난해한 추론은 오류를 낳는다. 그가 정신을 신비로운 세계로 이끈 적은 한 번도 없다. 사도라면 대담해야 하지만 주교는 그래서는 안된다. 그는 위대한 정신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거나 깊은 생각에 빠지는 것을 경게했다. 의문의 문 앞에는 신성한 공포가 있다. 그 어두운 입구는 입을 떡 벌리고서 당신에게 절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속삭인다. 거기에 들어오는 자는 불행해진다. 천재들은 추상과 순수의 심연에 빠져든다. 그리고 갖가지 교리 위에서 신앞에 자신의 사상을 논한다. 그들의 기도는 연구의 결과이며, 질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것들은 불안함과 책임감으로 얼룩진 종교가 된다.
Human meditation has no limits. At his own risk and peril, it analyzes and digs deep into its own bedazzlement. One might almost say, that by a sort of splendid reaction, it with it dazzles nature; the mysterious world which surrounds us renders back what it has received; it is probable that the contemplators are contemplated. However that may be, there are on earth men who-are they men?-perceive distinctly at the verge of the horizons of revery the heights of the absolute, and who have the terrible vision of the infinite mountain. 명상에는 끝이 없다. 인간은 명상을 위해서는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그 자체에 빠져드는 것을 분석한다. 어떤 막을 수 없는 반대편의 힘이 그것을 현혹시키려고 든다. 우리를 에워싼 세계는 도리어 우리를 낱낱이 하헤치려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명사으이 저 끝 편에 높은 절대자의 고지를 뚜렷이 보고 무한한 산의 환영을 보는 자들이-과연 그것이 인간일까? - 있는 것이다.
Monseigneur Welcome was one of these men; Monseigneur Welcome was not a genius. He would have feared those sublimities whence some very great men even, like Swedenborg and Pascal, have slipped into insanity. Certainly, these powerful reveries have their moral utility, and by these arduous paths one approaches to ideal perfection. As for him, he took the path which shortens, -the Gospel's. 비앵브뉘 예하는 그런 사람에 속하지 않았다. 그는 천재가 아니었으며 그런 훌륭한 경지에 갈 생각이 없었다. 위대한 사람들, 그러니까 스베덴보니나 파스칼도 그런 경지에서 미끄러져 정신착란에 빠져을 것이다. 그런 명상은 정신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고, 그런 여정을 거치며 인간은 완전한 세계로 간다. 그러나 주교는 지름길, 곧 복음서를 선택했다.
He did not attempt to impart to his chasuble the folds of Elijah's mantle; he projected no ray of future upon the dark groundswell of events; he did not seek to condense in flame the light of things; he had nothing of the prophet and nothing of the magician about him. This humble soul loved, and that was all. That he carried prayer to the pitch of a superhuman aspiration is probable: but one can no more pray too much than one can love too much; and if it is a heresy to pray beyond the texts, Saint Theresa and Saint Jerome would be heretics. He inclined towards all that groans and all that expiates. 주교는 자신의 법의에 엘리야의 외투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사건 앞에 쉽사리 광휘를 뻗게 하지 않았고, 사물을 모아 한 덩이 불꽃을 만들려 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예언자 같은 면모는 없었다. 겸손한 그 영혼에게는 오직 사랑이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미리엘 주교의 기도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희망에 다라랐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랑은 아무리 커도 지나치지 않으며 기도 또한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서 이상으로 기도를 하는 게 이단이라면, 성녀 테레사나 헤에로니무스는 이단자인가? 주교는 괴로워하는 자에게 또 회개하는 자에게 몸을 구부렸다.
The universe appeared to him like an immense malady; everywhere he felt fever, everywhere he heard the sound of suffering, and, without seeking to
solve the enigma, he strove to dress the wound. The terrible spectacle of created things developed tenderness in him; he was occupied only in finding for himself, and in inspiring others with the best way to compassionate and relieve. That which exists was for this good and rare priest a permanent subject of sadness which sought consolation. There are men who toil at extracting gold; he toiled at the extraction of pity. Universal misery was his mine. The sadness which reigned everywhere was but an excuse for unfailing kindness. Love each other; he declared this to be complete, desired nothing further, and that was the whole of his doctrine. 그는 세상에 널리 퍼진 질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거서에 의문을 갖지 않고 오직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다. 하느님의 창조물들이 겪는 무서운 일을 그는 측은하게 여겼다. 주교는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고 그것을 전파하기 위해 애썼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선량한 사제에게는 위로를 구하는 슬픔이었다. 세상에는 황금을 얻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교는 위로를 하기 위해 일했다. 온 세계가 비참한 광산과 같았다. 곳곳에 숨겨진 고통은 그에게 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였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교의 말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들었다. 그의 말에는 그의 모든 교리가 담겨 있었다.
One day, that man who believed himself to be a "philosopher," the senator who has already been alluded to, said to the Bishop: "Just survey the spectacle of the world: all war against all; the strongest has the most wit. Your love each other is nonsense."-"Well," replied Monseigneur Welcome, without contesting the point, "if it is nonsense, the soul should shut itself up in it, as the pearl in the oyster." Thus he shut himself up, he lived there, he was absolutely satisfied with it, leaving on one side the prodigious questions which attract and terrify, the fathomless perspectives of abstraction, the precipices of metaphysics-all those profundities which converge, for the apostle in God, for the atheist in nothingness; destiny, good and evil, the way of being against being, the conscience of man, the thoughtful somnambulism of the animal, the transformation in death, the recapitulation of existences which the tomb contains, the incomprehensible grafting of successive loves on the persistent I, the essence, the substance, the Nile, and the Ens, the soul, nature, liberty, necessity; perpendicular problems, sinister obscurities, where lean the gigantic archangels of the human mind; formidable abysses, which Lucretius, Manou, Saint Paul, Dante, contemplate with eyes flashing lightning, which seems by its steady gaze on the infinite to cause stars to blaze forth there. Monseigneur Bienvenu was simply a man who took note of the exterior of mysterious questions without scrutinizing them, and without troubling his own mind with them, and who cherished in his own soul a grave respect for darkness. 어느 날, 자신을 철학자라 여기는 그 상원 의원이 주교에게 말했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 좀 보십시오. 모든사람이 싸움질을 합니다. 가장 강한 사람은 가장 똑똑한 사람이징. 당신의 그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비앵브뉘 예하는 대답했다. “그게 쓸모없는 말일지언정 영혼은 충만한 사랑 안에 있어야 합니다. 진주가 조개 속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교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그에 만족했다. 사람을 마음을 현혹하고 공폼감을 주는 힘과 알 수 없는 깊은 심연, 형이상학의 골짜기는 모두 마음 밖으로 밀어냈다. 사도에게는 신, 그리고 무신론자에게는 허무가 되는 그 심연-운명, 선과 악, 투쟁, 인간 정신, 동물들의 몽유병, 죽은 육신, 생존, 자아에 대한 애정, 본질, 실체, 영혼, 자연, 자유, 필연, 대천사들이 바라보는 난행한 문제들, 루크레티우스우와 마누, 성 바울, 단체가 응시한 무한과 그에 대적하는 무서운 심연 - 그 모든 것은 미뭐 놓았다. 비앵브뉘 예하는 그 신비로운 문제들을 밖에서만 볼 뿐 깊이 파헤쳐 정신을 어지럽히지 않았다. 그러나 신비의 어둠에 존경을 품고 있는 한 인간으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