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레 미제라블_영문판

[레 미제라블_Volume 1_BOOK 5_Chap 2_5월 3일(금)

작성자Frida|작성시간24.05.03|조회수94 목록 댓글 0

VOLUME I FANTINE

          BOOK FIFTH - THE DESCENT(전락)

                           CHAPTER II - MADELEINE(마들렌 씨)

 

He was a man about fifty years of age, who had a preoccupied air, and who was good. That was all that could be said about him. Thanks to the rapid progress of the industry which he had so admirably re-constructed, M. sur M. had become a rather important centre of trade. Spain, which consumes a good deal of black jet, made enormous purchases there each year. M. sur M. almost rivalled London and Berlin in this branch of commerce. Father Madeleine's profits were such, that at the end of the second year he was able to erect a large factory, in which there were two vast workrooms, one for the men, and the other for women. Any one who was hungry could present himself there, and was sure of finding employment and bread. 그는 쉰 살쯤 먹었는데 늘 진지한 생각에 잠긴 온화한 사내였다. 그에 대해 말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뿐이다. 마들렌씨가 고안한 신기술 덕분에 몽트뢰유 쉬르 메르는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검은 구슬의 수요가 높았던 스페인에서는 해마다 주문량을 막대하게 늘렸다. 몽트뢰유 쉬르 메러는 그 거래량만으로도 런던이나 베를린이 부럽지 않는 수준이었다. 마들렌 씨의 사업은 점차 커져서 2년이 지났을 때는 큰 공장이 새로 들어섰고, 두 개의 대형 작업장을 두어 남자 직공과 여자 직공을 따로 일하게 했다. 가난한 사람은 그 누구라도 그 공장에서 일자리와 빵을 얻을 수 있었다.

 

Father Madeleine required of the men good will, of the women pure morals, and of all, probity. He had separated the work-rooms in order to separate the sexes, and so that the women and girls might remain discreet. On this point he was inflexible. It was the only thing in which he was in a manner intolerant. He was all the more firmly set on this severity, since M. sur M., being a garrison town, opportunities for corruption abounded. 마들렌 씨는 남자에게는 선한 의지, 여자에게는 순결함,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성실함을 요구했다. 그는 남녀 작업장을 따로 두어서 처녀나 기혼 여성이 정절을 지킬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그 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가 타협하지 안하는 유일한 것이 바로 그런 규칙이었다. 몽트뢰유 쉬르 메르는 군 주둔지에 있었기 때문에 타락할 여지가 많았고 그는 더 엄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However, his coming had been a boon, and his presence was a godsend. Before Father Madeleine's arrival, everything had languished in the country; now everything lived with a healthy life of toil. A strong circulation warmed everything and penetrated everywhere. Slack seasons and wretchedness were unknown. There was no pocket so obscure that it had not a little money in it; no dwelling so lowly that there was not some little joy within it. Father Madeleine gave employment to every one. He exacted but one thing: Be an honest man. Be an honest woman. As we have said, in the midst of this activity of which he was the cause and the pivot, Father Madeleine made his fortune; but a singular thing in a simple man of business, it did not seem as though that were his chief care. 그가 이 도시에 온 것은 주민들에게 행운이자 하늘의 은총이었다. 마들렌씨가 오기 전에는 모든 것이 정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황성한 산업 덕분에 곳곳에 활기가 흘렀다. 모든 것은 잘 갖춰지고 반듯했다. 가난과 실업은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리 미천한 사람의 주머니에도 푼돈은 들어 있었다. 아무리 가난한 집안에도 작은 기쁨이 있었다. 마들렌 씨는 누구에게나 고용의 기회를 주었다. 단, 정직성은 철저히 살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마들렌 씨는 그 지역을 산업 기반의 주축으로 만들면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그런데 그는 사업가임에도 불구하고 돈벌이에 치중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He appeared to be thinking much of others, and little of himself. In 1820 he was known to have a sum of six hundred and thirty thousand francs lodged in his name with Laffitte; but before reserving these six hundred and thirty thousand francs, he had spent more than a million for the town and its poor. The hospital was badly endowed; he founded six beds there. M. sur M. is divided into the upper and the lower town. The lower town, in which he lived, had but one school, a miserable hovel, which was falling to ruin: he constructed two, one for girls, the other for boys. He allotted a salary from his own funds to the two instructors, a salary twice as large as their meagre official salary, and one day he said to some one who expressed surprise, "The two prime functionaries of the state are the nurse and the schoolmaster."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느나 자기 일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1820년에 그는 자기 명의로 라피트 은행에 63만 프랑을 예금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돈을 예금하지 전에 벌써 시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백만 프랑 이상을 사용했던 것이다. 시의 자선병원은 큰 어려움 없이 운영되었다. 그는 침대를 열 개 더 기부했다. 몽트뢰유 쉬르 메르는 험한 지대와 낮은 지대가 골고루 있었다. 그가 사는 낮은 지대에는 초등학교가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그는 학교 두 개를 더 세워 주고, 교사들에게는 봉급의 갑절이 되는 수당을 자기 돈으로 챙겨 주었다. 모든 사람이 놀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보모와 교사 관리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He created at his own expense an infant school, a thing then almost unknown in France, and a fund for aiding old and infirm workmen. As his factory was a centre, a new quarter, in which there were a good many indigent families, rose rapidly around him; he established there a free dispensary. At first, when they watched his beginnings, the good souls said, "He's a jolly fellow who means to get rich." When they saw him enriching the country before he enriched himself, the good souls said, "He is an ambitious man." This seemed all the more probable since the man was religious, and even practised his religion to a certain degree, a thing which was very favorably viewed at that epoch. He went regularly to low mass every Sunday. 그는 그즈음 프랑스에서는 보기 드문 시설인 보육원을 세우고, 늙고 병든 노동자들을 위한 구제 기금을 조성했다. 그의 공장은 도시의 중심이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이주한 새로운 동네가 급속히 커져 갔다. 그는 거기에 무료 약국을 세웠다. 그가 사업을 시작하였을 때 사람들은 “한몫 단단히 챙기려나 보지.” 하고 얕보아싿. 하지만 그가 돈을 모으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쓸 때는 “야심이 대단한데?” 하고 말했다. 그런 말들은 그가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그것은 남에게 좋은 평판을 듣기 때문에 더 그럴 듯하게 여겨졌다.

 

The local deputy, who nosed out all rivalry everywhere, soon began to grow uneasy over this religion. This deputy had been a member of the legislative body of the Empire, and shared the religious ideas of a father of the Oratoire, known under the name of Fouche, Duc d'Otrante, whose creature and friend he had been. He indulged in gentle raillery at God with closed doors. But when he beheld the wealthy manufacturer Madeleine going to low mass at seven o'clock, he perceived in him a possible candidate, and resolved to outdo him; he took a Jesuit confessor, and went to high mass and to vespers. 주변인들을 모두 경쟁 상대로 삼을만큼 경계심이 강한 그 지방의 대의원은 그의 신앙심에 불안을 느꼈다. 그는 제정 시대의 입볍의회 의원으로 오트랑트 공작, 곧 푸셰라는 이름의 오라토이오회의 사제와 친구였다. 그는 속으로는 신을 비웃었다. 그런데 부유한 사업가 마들렌이 7시 독송 미사에 참례하는 것을 보자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로 생각하고는 그를 깎아 내리려고 마음 먹었다.

 

Ambition was at that time, in the direct acceptation of the word, a race to the steeple. The poor profited by this terror as well as the good God, for the honorable deputy also founded two beds in the hospital, which made twelve. Nevertheless, in 1819 a rumor one morning circulated through the town to the effect that, on the representations of the prefect and in consideration of the services rendered by him to the country, Father Madeleine was to be appointed by the King, mayor of M. sur M. Those who had pronounced this new-comer to be "an ambitious fellow," seized with delight on this opportunity which all men desire, to exclaim, "There! what did we say!" All M. sur M. was in an uproar. The rumor was well founded. Several days later the appointment appeared in the Moniteur. On the following day Father Madeleine refused. 그는 예수회 신부를 고해신부로 정한 뒤 대미사와 저녁 기도에 출석했다. 그 시대의 양심이라 성당의 종탑을 향한 경쟁과도 같았다. 그 대의원의 경쟁심 덕분에 주님과 가난한 사람 모두 덕을 보았다. 그 역시 자선병원에 침대를 두 개 기부했기 때문이다. 기부로 들어온 침대는 모두 열두 개가 되었다. 그런데 1819년의 어느 날, 이런 소문이 돌아싿. 마들렌 씨가 지사의 추천과 이 지역에 끼친 혁혁한 공로로 국왕으로부터 몽트뢰유 쉬르 메르의ㅡ 시장을 임명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흘러운 그에게 야심가라고 부르던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몽트뢰유 쉬르 메르의 민심은 흥분에 휩싸였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며칠 두 관보에 자세한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마들렌 씨는 이튿난 사퇴했다.

 

In this same year of 1819 the products of the new process invented by Madeleine figured in the industrial exhibition; when the jury made their report, the King appointed the inventor a cheval‎ier of the Legion of Honor. A fresh excitement in the little town. Well, so it was the cross that he wanted! Father Madeleine refused the cross. Decidedly this man was an enigma. The good souls got out of their predicament by saying, "After all, he is some sort of an adventurer." We have seen that the country owed much to him; the poor owed him everything; he was so useful and he was so gentle that people had been obliged to honor and respect him. His workmen, in particular, adored him, and he endured this adoration with a sort of melancholy gravity. 그해에 마들렌 씨의 새로운 기술로 만든 제품이 공업박람회에 출품되었다. 심사 위원의 보고를 받은 국왕은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 5등 훈장을 수여했다. 도시는 다시 훙분에 휩싸였다. “그래, 그는 큰 걸 노렸어. 바로 훈장!” 하지만 마들렌 씨는 훈장도 사양했다. 마들렌 씨는 왜 모든 것을 거부했을까?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틀림없는 사기꾼이야.”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지역 전체가 그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는 도시 전체와 따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으로 모두가 그를 존경했다. 그의 온화한 인품과 바른 태도 때문에 사람들을 그를 따라싿. 특히 공장 직원들의 충성심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When he was known to be rich, "people in society" bowed to him, and he received invitations in the town; he was called, in town, Monsieur Madeleine; his workmen and the children continued to call him Father Madeleine, and that was what was most adapted to make him smile. In proportion as he mounted, throve, invitations rained down upon him. "Society" claimed him for its own. The prim little drawing-rooms on M. sur M., which, of course, had at first been closed to the artisan, opened both leaves of their folding-doors to the millionnaire. They made a thousand advances to him. He refused. 그가 부자라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교계 인사들은 시내에서 그에게 마들렌 씨라고 부르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공장 직원들과 마을 아이들은 그를 마들렌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는 그렇게 불리는 것이 좋았다. 몽트뢰유 쉬르 메르의 작은 살롱은 처음에게 그에게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그에게 문을 활짝 열었다. 여기저기서 초대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모든 부탁을 거절했다.

 

This time the good gossips had no trouble. "He is an ignorant man, of no education. No one knows where he came from. He would not know how to behave in society. It has not been absolutely proved that he knows how to read." When they saw him making money, they said, "He is a man of business." When they saw him scattering his money about, they said, "He is an ambitious man." When he was seen to decline honors, they said, "He is an adventurer." When they saw him repulse society, they said, "He is a brute." “아마 무식해서 나서지 못하는 모양이야. 어디서 굴러 왔는지도 모를 사람이잖아. 상류 사회에 나가려 해도 교양이 있나, 지식이 있나. 그가 글을 안다는 증거가 없잖아.” 그가 돈을 버는 것을 보고 장사꾼이라고 했다가 자선하는 것을 보고 사기꾼이라고이라고 하고 이제 상류사회 입문을 거절하자 무식하다고 욕을 해댔다.

 

In 1820, five years after his arrival in M. sur M., the services which he had rendered to the district were so dazzling, the opinion of the whole country round about was so unanimous, that the King again appointed him mayor of the town. He again declined; but the prefect resisted his refusal, all the notabilities of the place came to implore him, the people in the street besought him; the urging was so vigorous that he ended by accepting. It was noticed that the thing which seemed chiefly to bring him to a decision was the almost irritated apostrophe addressed to him by an old woman of the people, who called to him from her threshold, in an angry way: "A good mayor is a useful thing. Is he drawing back before the good which he can do?" This was the third phase of his ascent. Father Madeleine had become Monsieur Madeleine. Monsieur Madeleine became Monsieur le Maire. 그가 몽트뢰유 쉬르 메르에 온 지 5년 째 되던 1820년, 그가 도시에 끼친 공로가 혁혁하므로 국왕은 다시 그를 시장에 임명했다. 그는 사퇴를 원했으나 지사가 만류했다. 각 고장의 명사들이 찾아와 그를 설득했고, 민중은 줄을 서서 탄원을 했으며 모두가 진정으로 그를 원했으므로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가 결단을 내린 것은 한 서민 노파의 강한 호소 때문이었다. 그 노파는 문 앞에 서서 매섭게 외쳤다. “훌륭한 시장이 필요해요. 당신은 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서 도망치려고 합니까?” 그것은 그에게 세 번째 출세와 같았다. 마들렌 아저씨는 마들렌 씨가 되었고, 이제는 마들렌 시장님이 되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