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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VC_7월 2일(화) 2장. Communication that blocks Compassion

작성자Frida|작성시간24.07.02|조회수15 목록 댓글 0

2장 Communication that blocks Compassion 연민을 방해하는 대화

Do not judge, and you will not be judged. For as you judge others, so you will yourselves be judged.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당신도 평가받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그것으로 당신 스스로도 비판받을 것이다. - Holy Bible, Amttew 7:1(마태복음 7:1)

 

Certain ways of communication alienate us from our natural state of compassion. 어떤 대화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연민이라는 자연스런 상태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In studying the question of what alienates us from our natural state of compassion, I have identified specific forms of language and communication that (I believe) contribute to our behaving violently toward each other and ourselves. I use the term life-alienating communication to refer to these forms of communication.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연민이라는 자연스런 상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가를 연구하는 과정에 나는 특별한 형태의 말과 대화 방식을 알아냈다. 그 특별한 방식의 말과 대화는 내가 믿기에 우리가 서로 서로 폭력적으로 행동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 형태라고.

 

Moralistic Judgments(도덕적 판단)

One kind of life-alienating communication is the use of moralistic judgments that imply wrongness or badness on the part of people who don't act in harmony with our values. Such judgments are reflected in language: "The problem with you is that you're too selfish." "She's lazy." "They're prejudiced." "It's inappropriate." Blame, insults, put-downs, labels, criticism, comparisons, and diagnoses are all forms of judgment.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의 한 종류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들의 행동을 틀렸다거나 나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한 판단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나타난다. “당신이 갖고 있는 문제는 너무 이기적이라는 것이야” 그녀는 게으르다. 그들은 편파적이다. 그건 당치도 않다. 비난, 모욕, 비하, 꼬리 붙이기, 비판, 비교 그리고 분석들은 모두 판단의 형태들이다.

 

The Sufi poet Rumi once wrote, "Out beyond ideas of wrongdoing and right-doing, there is a field. I'll meet you there." Life-alienating communication, however, traps us in world of ideas about rightness and wrongness-a world of judgments. In the world of judgments, our concern centers on "who is what." It is a language rich with words that classify and dichotomize people and their actions. When we speak this language, we judge others and their behavior while preoccupying ourselves with who's good, bad, normal, abnormal, responsible, irresponsible, smart, ignorant, etc. Long before I reached adulthood, I learned to communicate in an impersonal way that did not require me to reveal what was going on inside myself. 수피(이슬람교의 한 신비주의적 분파의 지도) 시인 루미는 한 때 썼다. “옳은 일, 그런 일 저 너머에 들판이 있네. 나는 거기서 당신을 만나리라.”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는 우리를 가둔다. 옮음과 그름에 대한 생각의 세계로 우리를 가둔다. 판단의 세계. 판단하는 세계에서는 우리의 관심은 그 사람이 무엇인지 집중한다. 언어에서는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많다. 사람들과 그 행동들을 분류하고(갈라치기 하고) 이분법적으로. 우리가 이와 같은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우리가 몰두하는 동안에, 누가 옳고 그른지,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누가 책임감 있고 누가 책임감 없는지, 누가 똑똑하고 무지한지를 따지면서 다른 사람과 그들의 행동을 판단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내가 성인이 되기 오래 전부터 나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나타내지 않는 방식으로 대화했다. 그 방식을 내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식이었다.

 

When I encountered people or behaviors I either didn't like or didn't understand, I would react in terms of their wrongness. If my teachers assigned a task I didn't want to do, they were "mean" or "unreasonable." If someone pulled out in front of me in traffic, my reaction would be, "You idiot!" When we speak this language, we think and communicate in terms of what's wrong with others for behaving in certain ways or, occasionally, what's wrong with ourselves for not understanding or responding as we would like. Our attention is focused on classifying, analyzing, and determining levels of wrongness rather than on what we and others need and are not getting. 내가 어떤 사람들이나 행위들에 부딪혔을 때, 내가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나 이해 못하는 행위에 부딪혔을 때 나는 그들이 잘못 됐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만약 나의 선생님들이 내가 원하지 않는 숙제를 냈다면, 그들은 ‘나쁘거나’ 또는 비합리적인 사람이라 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도로에서 내 앞에 가로 막는다면, 내 반응은 ‘저 바보’ 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생각하고 대화한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된 것이 있나 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반응하지 못할 때. 우리의 관심은 집중된다. classifying하고, 분석하고 그리고 잘못한 정도의 레벨을 정하려고 한다. 우리가 또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는 있지만 얻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쏟지 않고.

 

Thus my partner wants more affection than I'm giving her, she is "needy and dependent." But if I want more affection than she is giving me, then she is "aloof and insensitive." If my colleague is more concerned about details than I am, he is "picky and compulsive." On the other hand, if I am more concerned about details than he is, he is "sloppy and disorganized." It is my belief that all such analyses of other human beings are tragic expressions of our own values and needs. They are tragic because when we express our values and needs in this form, we increase defensiveness and resistance among the very people whose behaviors are of concern to us. 그러므로 내 파트너가 더 많은 애정을 원하면, 내가 그녀에게 주는 것보다. 그녀는 결핍이 있고 의존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만약 더 많은 애정을 원한다면, 그녀가 나에게 주고 있는 것보다, 그러면 그녀는 냉정하고 무감각(둔)하다고 한다. 만약 내 동료가 나보다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는 “까다롭고 강압적이라고” 한다. 반면에 내가 동료보다 더 세밀한 부분에 신경 쓰는 사람인 경우에 그 동료는 ‘일처리가 꼼꼼하지 못하고 산만한 사람’이 된다. 더 디테일한 것에 신경 쓰는 성격이라면 “그는 일처리가 꼼꼼하지 못하고 산만하다.” 라고 말할 것이다. 내 믿음은 모든 그런 다름 사람들의 분석은 비극적인 표현이다. 내 자신의 가치와 욕구의 비극적인 표현이다. 그들은 비극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가치들과 욕구들을 표현하면,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은 방어막과 저항을 증가시킨다.

 

Or, if(할지라도, 양보 구분) people do agree to act in harmony with our values, they will likely do so out of fear, guilt, or shame because they concur with our analysis of their wrongness. We all pay dearly when people respond to our values and needs and not out of a desire to give from the heart, but out of fear, guilt, or shame. Sooner or later, we will experience the consequence of diminished goodwill on the part of those who comply with our values out of a sense of either external or internal coercion. They, too, pay emotionally, for they are likely to feel resentment and decreased self-esteem when they respond to us out of fear, guilt, or shame. 또는 혹시 그 사람들이 우리의 가치관들에 대해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두려움이나, 죄책감 또는 수치심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나쁜 행위라고 내가 분석한 것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에 따라 하는 것이다. 즉, 그들이 마음에 우러나서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모두 대가를 치른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가치나 욕구에 따라서 행동한다면,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행동이 아닌,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경험할 것이다. 줄어든 친밀감의 결과를, 그 사람들은 우리의 가치관에 동조했다. 외부적인 또는 내부적인 강압감에 의해. 그들은 또한 감정적으로 대가를 치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노와 낮아지는 자존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분노와,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반응할 때는.

 

Furthermore, each time others associate us in their minds with any of those feelings, the likelihood of their responding compassionately to our needs and values in the future decreases. It is important here not to confuse value judgments and moralistic judgments. All of us make value judgments as to the qualities we value in life; for example, we might value honesty, freedom, or peace. Value judgments reflect our beliefs of how life can best be served. 더욱이 그들이 우리와 관계할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 그러한 느낌이 든다면, 연민으로 반응할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미래로 갈수록 우리의 욕구나 가치에 대해서 연민으로 반응할 가능성을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치 판단과 도덕적 판단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가치 판단을 내린다. 우리 인생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정직, 자유, 평화에 대해서 가치 판단을 내린다. 가치 판단들은 우리의 믿음을 반영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인생이 가장 잘 충족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믿음들을 반영한다.

 

We make moralistic judgments of people and behaviors that fail to support our value judgments; for example, "Violence is bad." People who kill others are evil." Had we been raised speaking a language that facilitated the expression‎ of compassion, we would have learned to articulate our needs and values directly, rather than to insinuate wrongness when they have not been met. For example, instead of "Violence is bad," we might say instead, "I am fearful of the use of violence to resolve conflicts; I value the resolution of human conflicts through other means." The relationship between language and violence is the subject of psychology professor O.J. Harvey's research at the University of Colorado. He took random samples of pieces of literature from many countries around the world and tabulated the frequency of words that classify and judge people. His study shows a high correlation between frequent use of such words and frequency of incidents. 우리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도덕주의적 판단’을 내린다. 우리의 가치 판단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과 행위들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한다. 예를 들면 “폭력은 나쁘다.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사람들은 악한 인간이다.” 우리가 자랐더라면,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에서 자랐더라면, 연민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권장하는 사회에서 자랐더라면, 우리는 더 뚜렷하게 우리의 욕구나 가치들을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들을 그들의 욕구를 충족 받지 못했을 때 잘못되었다고 돌려서 말하지 않고. 예를 들면 ‘폭력은 나쁘다.’ 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는 다른 수단들을 사용해서 인간들 사이의 폭력을 해결하는 것에 더 가치를 둔다.’ 언어와 폭력사이의 관계는 심리학자 하비 교수의 주제였다. 그는 콜로라도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무작위 샘플을 뽑아냈다. 각 나라들의 문학 작품으로부터. 그리고 단어들의 빈도수를 도표화했다. 사람들을 분류하고 판단하는 단어들을 대상으로 했다. 그의 연구는 보여준다. 높은 상관관계를. 그러한 단어들의 사용 빈도수와 폭력 사건의 빈도수 사이에

 

It does not surprise me to hear that there is considerable less violence in cultures where people think in terms of human needs than in cultures where people label one another as "good" or "bad" and believe that the "bad" ones deserve to punished. In 75 percent of the television programs shown during hours when American children are most likely to be watching, the hero either kills people or beats them up. 아래와 같은 사실들을 듣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훨씬 더 적은 폭력이 있었다고 사람들이 인간의 욕구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문화에서 살아갈 때, 사람들이 서로 서로 “선” 또는 “악”과 같이 서로 서로 레이블을 붙여 가는 사회보다는. 그리고 나쁜 사람들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사회들 보다는 사람들의 각자의 욕구에 대해서 생각하는 문화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덜 폭력적이라는 것을 듣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75%의 TV 프로그램들, 미국의 아이들이 가장 많이 보는 시간대의 75% TV 프로그램들은 영웅이 사람들을 죽이거나 그들을 때리는 장면이다.

 

Classifying and judging people promotes violence. 사람들을 분류하고 판단하는 것은 폭력을 증가시킨다.

This violence typically constitutes the "climax" of the show. Viewers, having been taught that bad guys deserve to be punished, take pleasure in watching this violence. At the root of much, if not all, violence-whether verbal, psychological, or physical, whether among family members, tribes, or nations-is a kind of thinking that attributes the cause of conflict to wrongness in one's adversaries, and a corresponding inability to think of oneself or others in terms of vulnerability-that is, what one might be feeling, fearing, yearning for, missing, etc. We saw this dangerous way of thinking during the Cold War. Our leaders viewed the U.S.S.R. as an "evil empire" bent on destroying the American way of life. Soviet leaders referred to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as "imperialist oppressor" who were trying to subjugate them. Neither side acknowledged the fear lurking behind suck labels. 이와 같은 폭력은 보통 그 프로그램의 클라이막스를 구성한다. 시청자들은 나쁜 사람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가르침을 배우기 때문에 이와 같은 폭력을 시청하면서 즐거움을 가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많은 것들의 뿌리에는, 물론 다는 아니지만, 폭력은 그것이 언어적이든, 심리적이든, 신체적이든, 또는 가족 안에서 일어나든, 종족이나 나라 사이에서 일어나든, 그 뿌리에는 갈등의 원인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는 생각이 있다. 그것이 말이든, 심리적이든, 물리적이든, 가족이든, 종족이든, 국가든 아래와 같은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갈등의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기인한다고 하는 생각.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민감성-즉, 어떤 사람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열망하는지, 무엇이 바라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위험스러운 사고를 미·소 냉전기간 동안에 보았다. 우리(미국)의 지도자들은 U.S.S.R 을 악의 제국으로 보았다. 미국인들의 삶을 파괴하려고 열중하는.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미국을 제국주의 침략자로 언급했다. 그들은 소련을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고. 어느 쪽도

 

Making Comparisons

Comparisons are a form of judgment. 비교는 판단의 한 형태이다.

Another form of judgment is the use of comparisons. In his book How to Make Yourself Miserable. Dan Greenburg demonstrates through humor the insidious power that comparative thinking can exert over us. He suggests that if readers have a sincere desire to make life miserable for themselves, they might learn to compare themselves to other people. For those unfamiliar with this practice, he provides a few exercises. The first one displays full-length pictures of a man and a woman who embody ideal physical beauty by contemporary media standards. Readers are instructed to take their own body measurements, compare them to those superimposed on the pictures of the attractive specimens, and dwell on the difference. This exercise produces what it promises: we start to feel miserable as we engage in these comparisons. By the time we're as depressed as we think possible, we turn the page to discover that the first exercise was mere warm-up. 다른 판단의 형태는 비교의 사용이다. 그는 제안했다. 그의 책 ‘당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법’ 에서 그린버그는 유머를 통해 비교의 해로운 힘을 보여줬다. 비교하는 생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해로운 힘이 될 수 있음을 유머를 통해서 보여줬다. 만약 독자들이 그들 스스로 비참해지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을 배우면 된다고 했다. 이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는 몇 가지 연습 문제를 제공한다. 첫 번째는 어떤 남자와 여자의 전신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상적인 육체 골격을 가지고 있다. 보통의 미디어 기준으로. 그리고 독자들에게 자신의 신체 치수를 재서 사진 속 모델의 치수와 비교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차이점에 대하여 생각해보라고 한다. 독자들은 그들 자신의 몸을 측정해 보기를 요청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사진 속 이상적인 몸매들과 비교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차이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한다. 이 연습은 약속한 것을 낳는다. 우리는 비참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가 비교에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비참해졌다고 생각할 때쯤, 우리는 페이지를 넘긴다. 그리고 발견한다. 이 연습은 단지 워밍업이었다는 것을.

 

Since physical beauty is relatively superficial, Greenburg next provides an opportunity to compare ourselves on something that matters: achievement. He turns to the phone book to give readers a few random individuals to compare themselves with. The first name he claims to have pulled out of the phone book is Wolfgang Amadeus Mozart. Greenburg lists the languages Mozart spoke and the major pieces he had composed by the time he was a teenager. The exercise then instructs readers to reflect on their own achievements at their current stage of life, to compare them with what Mozart had accomplished by age twelve, and to dwell on the differences. Even readers who never emerge from the self-induced misery of this exercise might see how powerfully this type of thinking blocks compassion, both for oneself and for others. 육체적인 미는 상대적으로 피상적이다. 그린버그는 성취에 관련된 어떤 것을 비교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는 전화번호부 책을 독자들에게 넘겨준다. 독자들은 몇 명의 개인들을 무작위로 뽑는다. 비교할 사람들. 가장 먼저 뽑은 이름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였다. 그린버그는 모짜르트가 말했던 구사했던 언어 목록들을 든다. 그리고 그는 10대 시절 작곡했던 작품들을 열거한다. 그리고 그 연습문제는 독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성취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모짜르트와 같은 나이에 이뤄놓은 일들. 그리고 12살 무렵 모짜르트와 성취와 본인들이 해 놓은 일을 비교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연습 문제를 통해 스스로 빠진 고통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독자들일지라도 알 수 있게 된다. 얼마나 강력하게 이와 같은 타입의 사고가 연민을 막는 건지에 대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Denial of Responsibility(책임 부인)

Our language obscures awareness of personal responsibility. Another kind of life-alienation communication is denial of responsibility. Communication is life-alienating when it clouds our awareness that we are each responsible for our own thoughts, feelings, and actions. The use of the common expression‎ have to, as in There are some things you have to, whether you like it or not," illustrates how personal responsibility for our actions can be obscured in speech. ‘have to’ The phrase makes one feel, as in "You make me feel guilty," is another example of how language facilitates denial of personal responsibility for our own feelings and thoughts. In her book ‘Eichmann in Jerusalem’, which documents the war crimes trial of Nazi officer Adolf Eichmann, Hannah Arendt(1906~1975) quotes Eichmann saying that he and his fellow officers had their own name for the responsibility-denying language they used. 그녀의 책 ‘Eichmann in Jerusalem’, They called it Amtssprache, loosely translated into English as "office talk" or "bureaucratese." For example, if asked why they took a certain action, the response would be, "I had to." "If asked why they "had to", the answer would be, "Superiors' orders." "Company policy." "It was the law." 우리의 언어는 개인적인 책임감의 자각을 흐리게 한다.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 방법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생각, 느낌, 행동에 책임이 있다는 의식을 흐리게 한다. 또 다른 대화법은 책임 부인이다. 대화는 소외된다. 그것인 우리의 의식을 흐릿하게 할 때. 우리는 각자 우리 자신의 생각, 느낌, 행동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makes one feel’ 같은 표현은 "You make me feel guilty," 와 같은 일반적인 표현법은, ‘당신은 ~해야 한다’ 와 같이 사용될 때, 당신이 그것을 좋아하건 않건, 표현한다. 얼마나 우리 행동들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들이 대화에서 모호하게 될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이. 이런 표현은 얼마나 언어가 우리 자신의 느낌들과 생각들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감을 부인하는지에 대한 또 다른 예가 된다. 이라는 책에서, 이 책은 전쟁 범죄자들의 재판을 다룬 것이다. 나찌 독일 장교인 아돌프 아이히만 전범 재판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말을 인용한다. ‘그와 그의 동료 장교들은 그들 자신만의 용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그들이 사용한 책임을 부인하는 말에 대한 그들 자신의 말. 그들은 그것을 ‘암트스프라헤’라고 불렀다. 영어로 느슨하게 번역하면 ‘사무 용어’, ‘관료 용어’ 정도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그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라고 요청받았을 때, 그들이 들은 말은 “I had to” 였을 것이다. 그리고 왜 그것을 “had to” 해야 했느냐고 질문을 받으면 답변은 “상사의 명령”, “회사 정책”, “그것은 법이다” 등 이었을 것이다.

 

We deny responsibility for our actions when we attribute their cause to factors outside ourselves: 우리는 책임감을 부인한다. 우리들의 행동들에 대해. 우리가 그들의 원인을 우리 외부의 요인들에 돌릴 때.

 

Vague, impersonal force- " I cleaned my room because I had to." 막연하고, 일반적인 힘 - 나는 내 방을 청소했다. 해야 하기 때문에.

 

Our condition, diagnosis, or personal or psychological history- "I drink because I am an alcoholic." 우리의 조건, 진단, 개인적 또는 심리적 내력 - 나는 알콜 중독자라서 술을 마신다. 나는 마신다(술을) 왜냐하면 나는 알콜 중독자이니까.

 

The actions of others - "I hit my child because he ran into the street." 다른 사람들의 행동들 - 나는 내 아이를 때렸다. 왜냐하면 그가 찻길로 뛰어 들어서.

 

The dictates of authority - "I lied to the client because the boss told me to." 권위자의 지시 - 나는 고객에게 거짓말을 했다. 왜냐하면 상사가 그렇게 하라고 나에게 말해서.

 

Group pressure - "I started smoking because all my friends did." 집단 압력: 나는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모든 나의 친구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Institutional policies, rules, and regulations - 'I have to suspend you for this infraction because it's the school policy." 제도적인 정책이나, 규칙들, 그리고 규제들 - 나는 너를 정학시켜야 한다. this infraction에 대해, 왜냐하면 그것은 학생 정책이기 때문이다.

 

Gender roles, social roles, or age roles - "I hate going to work, but I do it because I am a husband and a father." 성역할, 사회적 역할, 나이 역할 - 나는 일하러 가는 것이 싫다. 그러나 나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남편이고 아버지이니까.

 

Uncontrollable impulses - "I was overcome by my urge to eat the candy bar." 참을 수 없는 충동 - 나는 그 충동을 참을 수 없어서 캔디 바를 먹어 버렸다.

 

Once, during a discussion among parents and teachers on the dangers of a language that implies absence of choice, a woman objected angrily, "But there are some things you have to do whether you like it or not! And I see nothing wrong with telling my children that there are things they have to do, too," Asked for an example of something she "had to do," she retorted, "That's easy! When I leave here tonight, I have to go home and cook. I hate cooking! I hate it with a passion, but I have been doing it every day for twenty years, even when I've been as sick as a dog, because it's one of those things you just have to do." I told her I was sad to hear her spending so much of her life doing something she hated, because she felt compelled to, and I just hoped that she might find happier possibilities by learning the language of NVC. I am pleased to report that she was a fast learner. 한 번은 학부모들과 선생님들과의 토의시간 동안에 나는 선택의 부재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 얘기했다. 그 과정에 한 여성이 화난 표정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우리는 일이 있다. 그것을 좋아하건 하지 않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항변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아이들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그녀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그건 쉽죠”, 나는 오늘 집에 가면 식사 준비를 해야 해요“ 저는 밥하는 게 지겨워요. 정말 싫거든요. 하지만 나는 20년 동안 매일 해 왔어요. 내가 아플 때조차도.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였으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듣게 되어 슬프다고. 그녀의 인생에서 그렇게 그녀가 싫어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 온 것에 대해 듣게 되어 슬프다고 말했다. 그녀는 싫어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해야 하기 때문에 했다고 했다. 나는 단지 원했다. 그녀가 더 행복할 확률을 발견할지 모른다고 NVC 언어를 배우는 것에 의해. 나는 말하게 되어 기쁘다. 그녀가 빠르게 배우는 편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We are dangerous when we are not conscious of our responsibility for how we behave, think, and feel. 우리는 위험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책임을 의식하지 못할 때, 어떻게 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대해.

 

At the end of the workshop, she actually went home and announced to her family that she no longer wanted to cook. The opportunity for some feedback from her family came three weeks later when her two sons arrived at a workshop. I was curious to know how they had reacted to their mother's announcement. We can replace language that implies lack of choice with language that acknowledges choice. The elder son sighed. "Marshall, I just said to myself, "Thank God!" Seeing my puzzled look, he explained, "I thought to myself, maybe finally she won't be complaining at every meal!" Another time, when I was consulting for a school district, a teacher remarked, "I hate giving grades. I don't think they are helpful and they create a lot of anxiety on the part of students. But I have to give grades: it's the district policy." We had just been practicing how to introduce language in the classroom that heightens consciousness of responsibility for one' actions. I suggested that the teacher translate the statement "I have to give grades because it's district policy" to "I choose to give grades because I want. . ." he answered without hesitation, "I choose to give grades because I want to keep my job," while hastening to add, "But I don't like saying it that way. It makes me feel so responsible for what I'm doing." "That's why I want you to do it that way." I replied. Thinking based on "who deserves what" blocks compassionate communication. 워크숍이 끝날 때 쯤, 그녀는 실제로 집에 가서 그녀의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그녀는 더 이상 식사 준비 하지 않겠다고. 그들 가족으로부터의 피드백을 받을 기회는 3주 후에 왔다. 그녀의 두 아들들이 워크숍에 왔을 때. 나는 궁금했다. 그들(가족들)이 그들의 어머니의 선언(밥을 하지 않겠다는)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궁금했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적은 언어를 선택을 허용하는 언어로 바꿀 수 있다. 큰 아들이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선생님, 저는 그 때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고 속으로 말했어요.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보자 그는 설명했다. 엄마가 드디어 밥 먹을 때마다 이런저런 불평을 하지 않겠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했거든요. 한 번은 내가 교사들과 상담할 때였다. 한 교사가 말했다. 나는 성적으로 평가하는 일이 싫어요. 제가 생각할 때는 그것이 학생들에게 도움 될 것 같지 않고, 또는 학생들 편에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 같아서요. 그러나 나는 점수를 주는 평가를 해야 해요. 그것은 교육청 방침이거든요. 마침 우리는 연습하고 있는 중이었다. 교실에서 어떤 언어를 도입할 것인가? 어떤 행동들에 대해 책임감을 높일 수 있는 언어를 연습하는 것. 나는 이 선생님에게 “교육청의 방침 때문에 성적 평가를 해야만 한다.” 는 표현을 “나는 ~을 원하기 때문에 성적 평가를 하기로 선택했다.. 로 바꿔서 말해보라고 제안했다. 그 교사가 진술한 “나는 평가하기 위해 점수를 주어야 해요. 왜냐하면 그것이 교육청 정책이기 때문이에요” 대신 “나는 평가하기 위해 점수를 주어야 해요 왜냐하면 나는 ~을 원하기 때문이에요.” 그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나는 점수를 주기로 선택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직책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는 이렇게 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이렇게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훨씬 더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바로 그게 그런 방식으로 당신이 하기를 원하는 이유입니다. 라고 내가 대답했다.

 

I share the sentiments of French novelist and journalist George Bernanos when he says. I have thought for a long time now that if, some day, the increasing efficiency for the technique of destruction finally causes our species to disappear from the earth, it will not be cruelty that will be responsible for our extinction and still less, of course, the indignation that cruelty awakes and the reprisals and vengeance that it brings upon itself. . . but the docility, the lack of responsibility of the modern man, his base subservient acceptance of every common decree. The horrors that we have seen, the still greater horrors we shall presently see, are not signs that rebels, insubordinate, untamable men are increasing in number throughout the world, but rather that there is a constant increase in the number of obedient, docile men. We can never make people do anything.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억지로 하게 할 수 없다. ‘누구는 무엇(상이나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고방식은 연민의 대화를 막는다. 나는 프랑스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조르쥬 베르나노스의 말에 공감한다.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만약 언젠가 파괴 기술의 증가하는 효율성에 의해 우리 종이 마침내 지구에서 사라지는 때가 오게 되면, 그것은 어떤 잔혹성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 잔혹성이 우리 종의 멸망을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 그리고 더 더욱 아니다. 잔혹성이 일깨우는 분노와 그 분노가 일으키는 복수 등이 우리 종의 멸망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오히려 순종성, 현대인들의 책임감에 대한 결여, 부당한 명령에 대한 비굴한 순종 등이 오히려 지구 종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보아 온, 그리고 앞으로 보게 될 더 큰 공포는 반항자들이나 불복종자들 등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이 증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들이 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George Bernanos(조르주 베르나노스)

 

Other Forms of Life-Alienating Communication 삶을 소외시키는 다른 형태의 대화 방법들

Communicating our desires as demands is yet another form of language that blocks compassion. A demand explicitly or implicitly threatens listeners with blame or punishment if they fail to comply. It is a common form of communication in our culture, especially among those who hold positions of authority. My children gave me some invaluable lessons about demands. Somehow I had gotten it into my head that, as a parent, my job was to make demands. I learned, however, that I could make all the demands in the world but still couldn't make my children do anything. This is humbling lesson in power for those of us who believe that, because we're a parent, teacher, or manager, our job is to change other people and make them behave.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로 전하는 것도 연민을 막는 의사 표현 방법이다. 강요로서 우리의 욕구를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연민을 방해하는 언어의 형태이다. 강요는 구체적 또는 묵시적으로 화자를 위협한다. 비난 또는 벌을 가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순응하지 않으면. 이것은 우리 문화에서 흔한 대화 형태이다. 특히 권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아이들이 나에게 강요에 관한 귀중한 교훈들을 주었다. 어쨌든 내 머리 속에는 부모로서 어떤 생각이 들어가 있었다. 내가 할 일은 강요하는 것이고. 하지만 나는 배웠다. 내가 살아가면서 요구는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아이들에게 어떤 것을 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것은 겸손한 교훈이다. 우리가 부모로서, 선생님으로서, 관리자라서 다른 사람들을 바꿀 수 있고, 그들에게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겸손한 교훈이다.

 

Here were these youngsters letting me know that I couldn't make them do anything. All I could do was make them wish they had-through punishment. Then eventually they taught me that any time I was foolish enough to make them wish had complied by punishing them, they had ways of making me wish that I hadn't! We will examine this subject when we learn to differentiate requests from demands-an important part of NVC.The concept that certain actions merit reward while others merit punishment is also associated with life-alienating communication. This think is expressed by the word deserve as in "He deserves to be punished for what he did." It assumes "badness" on the part of people who behave in certain ways, and it calls for punishment to make them repent and change their behavior. 여기 젊은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게 알게 해 주었다. 내가 그들을 억지로 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그러면 결국은 그들은 나에게 가르쳤다. 내가 충분히 어리석을 때마다(내가 벌을 줌으로써 그들이 순응하게 했다는 것에 대해), 그들은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방법들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나중에 이 주제에 대해 조사할 것이다. 우리가 부탁과 강요의 차이에 대해 배우게 될 때-이것은 NVC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그런 행동을 했으니 처벌받아 마땅하다.’ 라는 문장에서처럼 ‘마땅하다’ 는 말로 표현된다. 어떤 행동들은 상을 받을 만하고 어떤 행동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와 연관이 있다. 이 생각은 단어 ‘deserve'로 표현된다. “그는 그가 한 행동으로 벌을 받아 마땅하다.’ 라는 문장과 같이. 그것은 가정한다.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의 쪽에 ‘나쁜’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벌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정하다. 그들을 후회하게 만들고 그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면 벌을 줘야 한다고 가정한다.

 

Life-alienating communication has deep philosophical and political roots.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는 깊은 철학적, 정치적 근원들을 가지고 있다.

I believe it is in everyone' interest that people change, not in order to avoid punishment. but because they see the change as benefiting themselves. Most of us grew up speaking a language that encourages us to label, compare, demand, and pronounce judgments rather than to be aware of what we are feeling and needing. I believe life-alienation communication is rooted in views of human nature that have exerted their influence for several centuries. These views stress humans' innate evil and deficiency, and a need for education to control our inherently undesirable nature. Such education often leaves us questioning whether there is something wrong with whatever feelings and needs we may be experiencing. We learn early to cut ourselves off from what's going on within ourselves. 나는 믿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은 사람들이 변할 때이다. 단지 벌을 피하기 위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변하게 되면 그들 스스로에게도 이익이 오기 때문에 변할 때 모든 사람의 이익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랐다. 언어들을 얘기하면서. 그 언어들은 우리로 하여금 꼬리표를 붙게 하고, 비교하고, 요구하고, 도덕적 평가들을 내리는 언어였다.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자각하게 하기 보다는. 나는 믿는다.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는 뿌리박혀 있다고. 인간성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고. 그것들은 수세기 동안 우리에게 영향을 끼쳐 오고 있다. 이와 같은 견해들은 강조한다.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악과 부족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본성을 관리하기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런 교육은 자주 우리에게 의문을 남긴다. 우리가 경험하는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욕구들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Life-alienating communication both stems from and supports hierarchical or domination societies, where large populations are controlled by a small number of individuals to those individuals, own benefit. It would be in the interest of Kings, czars, nobles, and so forth that the masses be educated in a way that renders them slave like in mentality. The language of wrongness, should, and have to is perfectly suited for this purpose: the more people are trained to think in terms of moralistic judgments that imply wrongness and badness, the more they are being trained to look outside themselves-to outside authorities-for the definition of what constitutes right, wrong, good, and bad. When we are in contact with our feelings and needs, we humans no longer make good slaves and underlings.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는 모두 유래한다. 그리고 지원한다. 위계적이고 지배적인 사회구조를 지속해 나가는 데에. 대규모 군중들은 조종된다. 소수의 개인들에 의해, 그리고 소수의 개인들의 이익을 위해 조종된다. 왕이나, 황제들, 귀족 등은 대중들이 정신적으로 노예처럼 사고하는 것이 통치하기가 더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교육 받도록 하고 싶어 한다. ‘틀렸다’ 거나 ‘해야만 한다’ 또는 ‘안 하면 안 된다’ 와 같은 말들은 이러한 목적에 아주 적합한 언어이다. 'should, and have to' 와 같은 선악의 언어들은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완벽한 것들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 판단으로 생각하기로 훈련받을 때, 도덕적 판단이란 잘못되었거나 나쁘다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도덕적 판단으로 점점 더 많이 훈련받을수록 사람들은 외부에서 찾도록 훈련받는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에 대한 판단 기준을 외부에서 찾는다. 특히 외부 권위자들에게서. 우리가 우리의 느낌들과 욕구들과 연결을 하게 될 때, 우리 인간들은 더 이상 좋은 노예들과 온순한 하인이 되지 않는다.

 

Summary 요약

It is our nature to enjoy giving and receiving compassionately. We have, however, learned many forms of life-alienating communication that lead us to speak and behave in ways that injure others and ourselves. One form of life-alienating communication is the use of moralistic judgments that imply wrongness or badness on the part of those who don't act in harmony with our values. Another is the use of comparisons, which can block compassion both for others and for ourselves. Life-alienating communication also obscures our awareness that we are each responsible for our own thoughts, feelings, and actions. Communicating our desires in the form of demands is yet another characteristic of language that blocks compassion. 연민으로 주고받는 것을 즐기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배워왔다. 많은 종류의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의 형태들을.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우리 스스로도 헤치게 되는 대화 형태이다. 삶을 소외시키는 방식 대화의 한 형태는 도덕적 판단의 사용이다. 그것들은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의 가치관과 조화롭지 않은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는 것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또 다른 삶을 소외시키는 방식을 비교의 사용이다. 그것은 연민을 막는다.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막는다.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는 또는 우리의 의식을 흐릿하게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각들, 느낌들, 그리고 행동들에 대해 각자 느껴야할 책임감에 대한 자각을 흐릿하게 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강요하는 형태로 대화하는 것은 또 다른 언어 특징이다. 우리의 공감을 막는 언어 특징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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