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시초(南行詩抄)
3월에는 조선일보에 <남행시초(南行詩抄)>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3월5일에는 <창원도(昌原道), 6월에는 <통영(統營)>, <고성가도(固城街道)>, 8월에는 <삼천포(三千浦)> 등이었다. 이 시들은 백석이 조선일보를 떠나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발표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2월 9일경에 다시 통영쪽으로 여행을 한 느낌도 받으나 속단할 수는 없다.
남행시초는 그 여정이 삼랑진에서 마산(馬山)으로 오는 길목인 창원도(昌原道)에서 시작하고 있다. 창원은 교통의 요지로 고추와 고구마가 유명한 곳이며 사방으로 작은 산들이 둘러 쳐진 곳이었다.
창원도(昌原道)
― 남행시초(南行詩抄) 1
솔포기에 숨었다
토끼나 꿩을 놀래주고 싶은 산허리의 길은
엎데서 따스하니 손 녹히고 싶은 길이다
개 데리고 호이호이 회파람 불며
시름 놓고 가고 싶은 길이다
궤나리봇짐 벗고 따ㅅ불 놓고 앉어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은 길이다
승냥이 줄레줄레 달고 가며
덕신덕신 이야기하고 싶은 길이다
덕거머리총각은 정든 님 업고 오고 싶은 길이다
궤나리봇짐 : 개나리 봇짐. 양쪽 어깨에 매는 봇짐
따ㅅ불 : 땅에 피우는 막불
덕신덕신 : 덩실덩실, 흥겹게. 사람이나 동물들이 떼로 모여 움직이는 모양
덕거머리 총각 : 장가들 나이가 지난 사내로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총각
차창에서 바라본 창원도의 길에서 산길을 따라 한없이 가고 싶다는 백석의 소망이 표출되고 있다. 그리고 덕거머리 총각인 자신은 벌써 그 님을 업고 오고 싶다고 여행의 숨은 의도를 밝히고 있다.
창원군을 지나 기차편으로 마산에 도착했다. 마산은 당시에 두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본인이 주로 사는 남쪽의 신마산(新馬山)이 있고 북동쪽에는 한국인들이 사는 구시가지인 구마산(舊馬山)이 있었다. 구마산은 어항(漁港)을 끼고 있으며 선창가도 있어 배를 이 곳에서 탔다. 선창에서 배를 타고 서너 시간 가면 통영이 나온다. 서울서 오면 마산에 아침 10시 ~ 11시 사이에 도착하여 점심을 사 먹고 오후 2시가 넘어서 통영가는 배를 타면 초저녁에 통영에 도착한다.
통영에서 백석은 그의 유명한 세 번째 <통영(統營)> 詩를 발표했다.
통 영
― 남행시초(南行詩抄) 2
통영장 낫대들엇다
갓한닙쓰고 건시한접사고 홍공단단기한감끈코 술한병바더들고
화룬선 만저보려 선창갓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압헤
문둥이 품바타령 듯다가
열닐헤달이 올라서
나루배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낫대들었다 : 장이 열리자마자 나아가 대들 듯이 구경하였다
건시 : 곶감. 마른 감
홍공단단기 : 붉은 공단 댕기
화룬선 :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기선
가수내 : 여자아이. 가시내라고도 함
판데목 : 경상남도 통영의 앞바다에 있는 수도 이름으로 1932년 해저터널이 완성된 곳
‘서병직氏 에게’ 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통영장에 뛰어들다시피 하여 유난히 관심이 많은 장거리에서 물건을 구경하는 백석의 독특한 취미를 보여준다. 당시 장날에는 나병환자들이 거지타령을 많이 했다. 그 곳에는 주막집도 있어 처녀들이 밥을 먹으러 들어가곤 하는데 이를 따라간 백석은 문둥이 품바타령을 듣다가 밤에는 통영의 유명한 명소인 판데목 다리 아래를 음역 17일날 (양력으로 1월 11일) 지나갔다.
서병직은 1910년생으로 당시 명정동에 살았다. 부산의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통영에서 일찍 장가를 들어 살고 있었는데 뚜렷한 직업이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통영에서 다시 진주나 삼천포로 가는 길목인 고성(固城)은 경남 중앙 남부에 자리잡은 작은 고을이었다. 통영에서 버스로 1시간 넘게 걸리는 이 곳을 백석은 거닐면서 고성장(固城場) 가는길을 생각했다.
고성가도(固城街道)
― 남행시초(南行詩抄) 3
고성(固城)장 가는 길
해는 둥둥 높고
개 하나 얼린하지 않는 마을은
해발은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
빨갛고 노랗고
눈이 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창 피었구나
가까이 잔치가 있어서
곱디고운 건반밥을 말리우는 마을은
얼마나 즐거운 마을인가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웃고 살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얼린하지 않는 : 얼씬도 하지 않는.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는.
시울은 : 환하게 눈이 부신.
건반밥 : 잔치 때 쓰는 약밥.
이 詩의 압권은 백석의 감탄하는 구절을 들 수 있다.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창 퓌엿구나 ”
이 구절을 생각해 보면 백석은 1월에 통영을 방문했고 2월말이나 3월초에도 통영으로 여행을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만큼 백석은 사랑하는 란을 생각하며 통영을 위시한 남해안의 작은 도시들을 다시 방문하여 그의 시정을 진하게 읊었으리라. 시를 통해서 한 여인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 시인 백석의 모습은 그만큼 순수한 면을 보이고 있다.
기후가 매우 따뜻한 삼천포는 비도 많이 오고 참대(竹)를 비롯한 난대성 식물도 많아 통영 등과 함께 겨울에도 따뜻한 날씨의 연속이다. 눈이 간헐적으로 내리나 한겨울에 국한된다. 백석은 삼천포에 대한 눈의 기록을 남행시초의 마지막 시<삼천포(三千浦)>로 나타내고 있다.
삼천포(三天浦)
― 남행시초(南行詩抄) 4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하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
볏짚같이 누우런 사람들이 둘러서서
어느 눈 오신 날 눈을 치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러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
츠고 : 치고.
기르매 : 길마. 짐을 실으려고 소의 등에 얹는 안장.
백석은 식민지 시대의 항구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가난이 남아 있는 항구의 마을을 그는 이렇게 사랑했던 것이다.
백석은 또한 일본에서의 해변가를 여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기억한 시가 있었다. 바로 1936년 3월에 발표되었던 <이두국주가도 : 이즈노 구니또 미나또 가이또)> 였다. 일본의 해안가를 둘러본 여행은 졸업때의 겨울방학에 했지만 그는 2년 뒤에 남해안을 여행하면서 당시의 추억을 새로이 되살려 감회를 적었다.
백석의 <남행시초>는 바로 통영에도 알려졌다. 그래서 백석은 통영과 특히 가까운 시인으로 인식되어졌다. 한 때 란의 부탁을 받고 선창가에서 백석의 동태를 감시했던 서정귀는 그 때 이후 항상 ‘화이트스톤(White Stone), 화이트 스톤’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백석의 시를 지적해 가며 장난을 란에게 걸어왔다고 한다. “후에 백석은 천금이와도 편지 왕래를 몇 번하면서 사귀었다.”고 란(박경련) 여사는 필자에게 말했다. 그 때는 란이 결혼한 이후였다.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1 / 송준 / 도서출판 지나 / 1994
3월에는 조선일보에 <남행시초(南行詩抄)>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3월5일에는 <창원도(昌原道), 6월에는 <통영(統營)>, <고성가도(固城街道)>, 8월에는 <삼천포(三千浦)> 등이었다. 이 시들은 백석이 조선일보를 떠나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발표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2월 9일경에 다시 통영쪽으로 여행을 한 느낌도 받으나 속단할 수는 없다.
남행시초는 그 여정이 삼랑진에서 마산(馬山)으로 오는 길목인 창원도(昌原道)에서 시작하고 있다. 창원은 교통의 요지로 고추와 고구마가 유명한 곳이며 사방으로 작은 산들이 둘러 쳐진 곳이었다.
창원도(昌原道)
― 남행시초(南行詩抄) 1
솔포기에 숨었다
토끼나 꿩을 놀래주고 싶은 산허리의 길은
엎데서 따스하니 손 녹히고 싶은 길이다
개 데리고 호이호이 회파람 불며
시름 놓고 가고 싶은 길이다
궤나리봇짐 벗고 따ㅅ불 놓고 앉어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은 길이다
승냥이 줄레줄레 달고 가며
덕신덕신 이야기하고 싶은 길이다
덕거머리총각은 정든 님 업고 오고 싶은 길이다
궤나리봇짐 : 개나리 봇짐. 양쪽 어깨에 매는 봇짐
따ㅅ불 : 땅에 피우는 막불
덕신덕신 : 덩실덩실, 흥겹게. 사람이나 동물들이 떼로 모여 움직이는 모양
덕거머리 총각 : 장가들 나이가 지난 사내로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총각
차창에서 바라본 창원도의 길에서 산길을 따라 한없이 가고 싶다는 백석의 소망이 표출되고 있다. 그리고 덕거머리 총각인 자신은 벌써 그 님을 업고 오고 싶다고 여행의 숨은 의도를 밝히고 있다.
창원군을 지나 기차편으로 마산에 도착했다. 마산은 당시에 두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본인이 주로 사는 남쪽의 신마산(新馬山)이 있고 북동쪽에는 한국인들이 사는 구시가지인 구마산(舊馬山)이 있었다. 구마산은 어항(漁港)을 끼고 있으며 선창가도 있어 배를 이 곳에서 탔다. 선창에서 배를 타고 서너 시간 가면 통영이 나온다. 서울서 오면 마산에 아침 10시 ~ 11시 사이에 도착하여 점심을 사 먹고 오후 2시가 넘어서 통영가는 배를 타면 초저녁에 통영에 도착한다.
통영에서 백석은 그의 유명한 세 번째 <통영(統營)> 詩를 발표했다.
통 영
― 남행시초(南行詩抄) 2
통영장 낫대들엇다
갓한닙쓰고 건시한접사고 홍공단단기한감끈코 술한병바더들고
화룬선 만저보려 선창갓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압헤
문둥이 품바타령 듯다가
열닐헤달이 올라서
나루배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낫대들었다 : 장이 열리자마자 나아가 대들 듯이 구경하였다
건시 : 곶감. 마른 감
홍공단단기 : 붉은 공단 댕기
화룬선 :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기선
가수내 : 여자아이. 가시내라고도 함
판데목 : 경상남도 통영의 앞바다에 있는 수도 이름으로 1932년 해저터널이 완성된 곳
‘서병직氏 에게’ 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통영장에 뛰어들다시피 하여 유난히 관심이 많은 장거리에서 물건을 구경하는 백석의 독특한 취미를 보여준다. 당시 장날에는 나병환자들이 거지타령을 많이 했다. 그 곳에는 주막집도 있어 처녀들이 밥을 먹으러 들어가곤 하는데 이를 따라간 백석은 문둥이 품바타령을 듣다가 밤에는 통영의 유명한 명소인 판데목 다리 아래를 음역 17일날 (양력으로 1월 11일) 지나갔다.
서병직은 1910년생으로 당시 명정동에 살았다. 부산의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통영에서 일찍 장가를 들어 살고 있었는데 뚜렷한 직업이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통영에서 다시 진주나 삼천포로 가는 길목인 고성(固城)은 경남 중앙 남부에 자리잡은 작은 고을이었다. 통영에서 버스로 1시간 넘게 걸리는 이 곳을 백석은 거닐면서 고성장(固城場) 가는길을 생각했다.
고성가도(固城街道)
― 남행시초(南行詩抄) 3
고성(固城)장 가는 길
해는 둥둥 높고
개 하나 얼린하지 않는 마을은
해발은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
빨갛고 노랗고
눈이 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창 피었구나
가까이 잔치가 있어서
곱디고운 건반밥을 말리우는 마을은
얼마나 즐거운 마을인가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웃고 살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얼린하지 않는 : 얼씬도 하지 않는.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는.
시울은 : 환하게 눈이 부신.
건반밥 : 잔치 때 쓰는 약밥.
이 詩의 압권은 백석의 감탄하는 구절을 들 수 있다.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창 퓌엿구나 ”
이 구절을 생각해 보면 백석은 1월에 통영을 방문했고 2월말이나 3월초에도 통영으로 여행을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만큼 백석은 사랑하는 란을 생각하며 통영을 위시한 남해안의 작은 도시들을 다시 방문하여 그의 시정을 진하게 읊었으리라. 시를 통해서 한 여인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 시인 백석의 모습은 그만큼 순수한 면을 보이고 있다.
기후가 매우 따뜻한 삼천포는 비도 많이 오고 참대(竹)를 비롯한 난대성 식물도 많아 통영 등과 함께 겨울에도 따뜻한 날씨의 연속이다. 눈이 간헐적으로 내리나 한겨울에 국한된다. 백석은 삼천포에 대한 눈의 기록을 남행시초의 마지막 시<삼천포(三千浦)>로 나타내고 있다.
삼천포(三天浦)
― 남행시초(南行詩抄) 4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하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
볏짚같이 누우런 사람들이 둘러서서
어느 눈 오신 날 눈을 치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러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
츠고 : 치고.
기르매 : 길마. 짐을 실으려고 소의 등에 얹는 안장.
백석은 식민지 시대의 항구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가난이 남아 있는 항구의 마을을 그는 이렇게 사랑했던 것이다.
백석은 또한 일본에서의 해변가를 여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기억한 시가 있었다. 바로 1936년 3월에 발표되었던 <이두국주가도 : 이즈노 구니또 미나또 가이또)> 였다. 일본의 해안가를 둘러본 여행은 졸업때의 겨울방학에 했지만 그는 2년 뒤에 남해안을 여행하면서 당시의 추억을 새로이 되살려 감회를 적었다.
백석의 <남행시초>는 바로 통영에도 알려졌다. 그래서 백석은 통영과 특히 가까운 시인으로 인식되어졌다. 한 때 란의 부탁을 받고 선창가에서 백석의 동태를 감시했던 서정귀는 그 때 이후 항상 ‘화이트스톤(White Stone), 화이트 스톤’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백석의 시를 지적해 가며 장난을 란에게 걸어왔다고 한다. “후에 백석은 천금이와도 편지 왕래를 몇 번하면서 사귀었다.”고 란(박경련) 여사는 필자에게 말했다. 그 때는 란이 결혼한 이후였다.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1 / 송준 / 도서출판 지나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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