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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니엘

성서의 비밀 - 4

작성자주영성|작성시간26.06.13|조회수80 목록 댓글 0

잠 18:14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루아흐 이쉬 : 사람의 영

루아흐 나카 : 상한 영

 

사람은 영(루아흐)으로  이기려니와 이라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다.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병 = 마할레(명남)는 할라 [2470:아프다, 병들다]에서 유래했으며, '병, 질병'을 의미한다.

1. 할라(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약하다, 병들다, 아프다'를 의미한다.

2. 할라는 '간절히 원하다, 간청하다, 호의를 구하다'를 의미한다.

 

능히 이기려니와 = 쿨(동사)은 기본어근, '담고있다, 포함하다, 부양하다, 준비하다, 제공하다, 감당하다'를 의미한다

 

그런데 영이 상해 있다면 큰 문제이다.

 

상하면 = 나카 : 상한, 치다, 두들겨 패다, [나케 5218],

나카는 [나카 5217]에서 유래했으며, '맞은, 상처 받은, 괴로워하는, 고통 받는'을 의미한다.

나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치다, 때리다, 채찍질하다'를 의미하며, 비유적으로 '몹시 괴롭히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치다, 두들겨 패다‘라는 의미로 전쟁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루아흐 영이 있지 않으면 상한 영이 자꾸 치는 영이 된다. 사람의 영은 절대 치는 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전쟁은 아예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전쟁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허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화력을 동원한다.

주님이 해가 지기 전에 너는 화를 풀라고 하시는 이유가 계속 무지에 갇혀있으면 네 영이 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병이란 삶을 훈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병에 걸리면 훈련을 하지 못한다.

훈련을 하지 못하면 신의 성품에 참여할 길이 없다.

병은 훈련하지 않겠다고 하는 순간 나타나지만 사라질 것으로 허상이다. 실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병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내가 훈련하지 않겠다고 하는 순간, 훈련하지 않는 유익을 구하려는 순간 병이 찾아온다.

훈련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사실 내 속에 있는 깊음 속의 무지이다. 이것 때문에 전쟁을 한다.

‘내가 왜 계속 훈련 해야 해? 내가 왜 모자란 자야?

내가 왜 불완전한가? 내가 왜 죽어야 해?’ 이것 때문에 모든 전쟁을 한다.

 

이쉬 : 사람, 남편 – from 

에쉬 : 불 , (신성)부터 (형상)까지 가는 것

 

상한 영의 반대가 사람의 영이다. 그러니까 상한 영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보지 않으신다.

우리에게는 사람의 영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진정한 화력을 사용한다. 이쉬는 에쉬 에서 나온 말이다.

알렢은 바브 ו 가 비스듬히 눕고 하늘의 요드 י 가 있고 땅의 י 요드가 있는 글자이다.

 

ו 바브 : 위로부터 내려오는 계시, 빛, 못 

י 요드 : 하나님의 손, 능력

 

하늘의 요드, 하나님의 손이 땅에 나타나는 것이다. 여호와의 손이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것이다.

바브는 한줄기 빛, 계시이다.

계시가 하늘과 땅의 통일을 이루어내는 것이 알렢이다.

 

쉰 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 즉 에쉬는 알렢부터 쉰까지 간다는 의미이다.

알렢부터 쉰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는 존재가 사람이다.

하나님의 손이 일 하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우리에게는 이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런데 하나님의 손(요드,י)은 사람의 삶 속에 항상 붙어있다고 한다. 이것이 이쉬(איש)이다.

손은 반드시 우리 몸에 붙어있다. 내 손이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손이 모든 능력이고 하나님의 힘이다. 이 하나님의 손이 항상 사람에게 붙어있다는 것이다.

그게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대해서 목말라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고,

하나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 같이 느끼는가?

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고 가까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이 느끼는가?

 

하나님의 손이 중앙에 항상 붙어 있는 사람

알렢부터 쉰까지, 하나님의 신성을 훈련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겠다, 이 길을 가는 사람 이쉬이다.

 

이쉬는 직역하면 ‘남편’이다.

그리스도가 너의 남편이라는 말은 남편과 내가 하나 되었다는 것은 내가 이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이쉬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세워지는데 까지 간다는 말이다.

 

이것을 결정하면 하나님의 손이 그 중앙에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알렢부터 쉰까지 알렢은 히브리 알파벳 첫 번째 글자이고 쉰은 21, 22번째 글자이다.

이 중간에 20개의 알파벳이 있다. 이 모든 훈련 과정을 하나님의 손이 하신다. 이것이 이쉬이다.

 

하나님의 손으로서 이 땅에 나타나신 분이 예슈아이시다.

그분의 이름 첫 글자가 י 요드이다. 요드가 하나님의 형상을 실제화 시키기 위하여 나타나셨다.

우리는 예수라고 두 글자만 발음을 한다.

그러나 마지막 아인도 발음해야 한다. 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실제화 시키는 관점, 그런 눈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손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지에 대한 눈이 떠지게 된다.

그 길이 열린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다른 종교에도 있다.

 

다른 종교에 없는, 다른 종교에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형상 되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만이 닮아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것을 예슈아라고 한다.

 

이쉬는 사람이다.

우리가 알렢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결정인지를 알아야 한다.

바로 그 이쉬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에쉬 이다.

 

에쉬 : 불

 

신성이 형상이 되기로 결정을 하면 불이 된다. 여호와는 진정한 불이시다.

병이란 하나님의 형상 되도록 훈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하신다

 

비유의 말씀이 사실 내 안에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 형상으로 훈련 받지 않고

거저 먹으려고 하는 게으름이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 병을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병이 있는 모든 사람이 게으르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지에 갇힌 죄 때문에 병이 온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병이 있다. 사람의 악한 근본에는

훈련 받지 않고 내가 평안하려고 하는 근본적인 악이 있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병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루아흐 이쉬가 되면, 사람의 영이 되면 그것을  이기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쉬는 믿음으로만 된다. ‘나는 하나님의 신성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될 것이다,

나는 이 길을 갈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결정하고, 그렇게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예슈아가 내가 신성에서 쉰까지 가는 것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구원자로 나타나신다.

그분이, 그리스도가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손이 되어서, 내 속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 이쉬이다.

 

그분이 내안에 계시다는 것만 믿고, 전혀 신의 성품에 참여할 생각도, 형상을 세울 생각도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쉬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큰 축복이다.

옆 사람에게 선포하라. ‘당신이 이쉬가 된 것은 지상 최대의 축복입니다.’ 아멘.

 

그래서 모든 병들은 우리가 이쉬의 영을 가질 때 다 떠나가게 된다.

모든 병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죽을 때까지 주님 곁으로 갈 때까지 이 훈련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오늘날 이 훈련이 정말 되지 않는다면 주님이 다 되었으니까 올라오라고 하시는 소리이다.

그러면 가면 된다. 이쉬가 되는 것은 이렇게 큰 축복이다.

 

잠 18:15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깨달은 자의 마음은 지식을 사고, 지혜로운 자들의 귀는 지식을 찾는다.)

 

카나 : 사다  ‘깨달은 자의 마음’은 지식을 산다. 지식을 사야 한다.

깨달은 자들만이 지식을 산다. 지식을 살 줄 아는 자들은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다.

 

 베트는 ‘--안에’, 또는 ‘집’이란 뜻이 있다.

히브리 사람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쓴다. 이 베트(ב) 안에서 모든 역사가 나오게 되어 있다.

오로지 베트 안에서 모든 역사가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실 때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모든 게 나오게 하신다.

일을 하신 후에 집을 짓지 않으신다. 집을 먼저 짓고 나서 그 안에서 모든 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토라의 시작은 베트로 한다. 그리고 토라의 마지막 글자는 이스라엘, 라메드(ל)이다.

 

이스라엘 - י 하나님의 손으로 형상이 신성이 되기 위해서 훈련하는 존재

 

엘은 신성을 훈련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이스라엘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갔다 다시 돌아오는 중에 얍복강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다.

앞으로 야곱의 삶은 신의 성품을 훈련하겠다는 것이다.

 

그전까지 야곱의 삶은 안목의 정욕으로 살았다. 라헬이 정말 예뻤을까?

다윗이 옥상 위에서 밧세바를 보고 처음 한 말이 ‘예쁘다’이다. 주위 여인보다 밧세바가 정말 예뻤을까?

(밧세바의 결론은 하나님의 씨앗을 잉태한다)

그리스도우리 삶 속에서 내 눈이 보는 것은 가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훈련을 반드시 해야 한다.

안목의 정욕에 대한 훈련을 해야 하는데 엄청 예쁘다는 소리가 나오면 그것은 내가 허상을 보는 것이다,

가짜를 보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내가 보는 것을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예쁜게 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쉬를 보고 예쁘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쉬들이 훈련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신다.

‘심히 아름답더라’, 반드시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이 아름답지 않고 내가 잘못 보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이스라엘은 이 훈련을 하는 존재이다. 야곱이 그 전에는 예쁜 것만 쫓아가다가 얍복강에서 다 죽게 되었다.

예쁜 것만 쫓아다닌 이유는 예쁜 것이 있어야 자기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자기를 죽이려고 오고 있다. 샬롬이 없다.

그 때 주님이 씨름을 하셨다고 한다. 그때 주님의 결론이 ‘얘는 안되겠다’고 해서 주님이 그냥 가시려고 한다. 

그런데 야곱이 거기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이것이 야곱의 기사회생이다. 신성을 훈련하겠다.

이때 이후로 야곱의 모든 자식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로 자라나게 된다.

이때 이후로 야곱은 바로를 축복하는 자가 된다.

신성을 훈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이스라엘. 엘은 신성을 훈련하는 것이다.

 

베이트 : 집  훈련하는 자들이 이 집 안에 모이게 된다.

옛날 고대인들은 동쪽을 위쪽에 쓴다. 오늘날 지도는 북쪽을 위에 둔다.

그래서 성경에서 오른쪽으로 가라는 것은 남쪽으로 가라는 소리이다. 그래서 동서남북이다.

성경에서 북쪽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곳이다.

왜냐면 모든 역사의 진행은 북쪽으로 진행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쪽은 신비하고 감추어져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나타내 주는 북극성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바알쯔폰에서 진을 친다.

 

출 14: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으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알쯔폰 : 바알스본 –북쪽에 있는 바알 

피하히롯 : 바알스본- 자유의 입구

 

바알은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금 비하히롯, 피 하히롵, 자유의 입구에 다다랐는데

그것을 유혹하고 방해하는 것이 바알쯔폰이다. 북쪽의 바알이다. 바알은 항상 북쪽을 주관한다.

미래에 무엇이 올 것인가? 여기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미래에 무엇이 올 것인지가 궁금하고

미래에 무엇이 올 것인지를 알아야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에게는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

북쪽이 깜깜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좌가 북쪽에 있다.

그런데 이것이 깜깜한 것을 이용해서 바알이 거기에 자리 잡고 있다. 우상숭배는 다 여기서 나온다.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 깜깜한가? 이 북쪽이 깜깜하다면 바알쯔폰에게 먹히기 쉽다.

불안하니까 나도 모르게 바알쯔폰에게 가 있다. 자유 할 수가 없다.

피 하히롵, 자유의 입구로 가지 못하고 바알쯔폰에게 가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이스라엘의 상황이다.

 

우리는 다 애굽에서 나왔다. 이제 여러분의 북쪽이 깜깜한가? 환한가?

환하다면 앞으로 인류 역사 속에 무엇이 있을 것 같은가? 내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무엇이 환한가? 환하다고 믿고 싶은가? 이것을 환각의 세계라고 한다.

환타지 세상이라고 한다. 실제로 우리는 환타지에서 살고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미지를 만들어서 그렇게 믿고 있다.

 

우리가 히브리어 의미를 공부하면서 계속 하는 것이 우리의 이미지, 허상을 깨는 것이다.

이것을 깨면 진짜 비전이 생긴다. 이것을 깨면 하나님의 창조물을 볼 수 있다.

이것을 깨면 내 필름이 사라진다. 우리는 세상이 무엇인지 모른다. 

세상에 대해서 환타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나를 위해서 변화되는 것이 미래라고 생각한다.

통일은 언제 되는가? 나를 위해서 내가 통일을 바라고 있다.

내 마음을 위해서 세상이 변화되는 것이 미래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언제 오실까? 나를 위해서. 지금 나를 공격하는 악한 세상에 언제 주님이 오실까?

끝장내실 주님이 언제 오실 것인가?

나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환타지 세상이 있는 한 북쪽은 깜깜하다.

다 바알쯔폰으로 가게 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변하는 게 미래가 아니라 내가 변하는 것이 미래이다.

세상은 아무 상관이 없다. 세상은 하나님이 다 선하게 창조해 놓으셨다.

내가 세상을 다 악하다고 해놓았기 때문에 그게 변하는 것을 미래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히브리어 의미에서 베트가 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베트는 다 시작이다. 베레쉬트, 시작이다. 베트 안에 다 있다.

베트를 떠나서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환각 속에서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변하는 것을 미래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변할 필요가 없다. 내가 만들어낸 세상은 다 사라진다. 다 없어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들었다 실패했으니 다시 해야겠다고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다.

우리는 나의 세상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나의 환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토라는 말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미래가 아니다.

네 마음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미래가 아니고 네가 변하는 것이 미래다.

그러면 내가 변화된 뒤에는 환한 미래가 펼쳐지게 된다.

 

베트 다음이 김멜, 달렡, 헤이, 바브, 자인,,, 환해진다. 이것이 내가 변화되는 것이다.

만약 타브까지 다 알고 있다면 바알쯔폰으로 갈 위험은 하나도 없다.

여러분들이 기대했던 미래와 완전히 다르다. 베트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내가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타브, 십자가에 가서 모든 것이 완성되어지면 마지막이 된다. 하나님이 이걸 시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바꾸는 것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다. 세상은 바꿀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나를 바꾸기 시작하셨다. 

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미래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자유의 입구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가 말씀하신 의미를 배우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북쪽의 보좌를 가지고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인류의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이것을 주관하시는 분,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 만 왕의 왕이시다. 만주의 주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 계속 바알쯔폰이 되시라고 한다.

바알쯔폰의 유혹은 ‘내가 너를 위해서 세상을 바꿔주겠다’고 한다.

‘돈이 없냐? 마중 물처럼 좀 가져와라, 내가 너를 위해 다 바꿔줄게.

누가 널 괴롭히느냐? 사진 붙여 놓고 표적에 칼을 던져라, 그대로 되게 해줄게.’ 세상을 바꿔주겠다고 한다.

 

얼마나 오늘날 우리 주님을 바알쯔폰, 북쪽의 바알로 앉으시라고 우리가 강요하는지 모른다.

오늘 우리 속에 깊은 회개가 있어야 한다. ‘주님, 내가 온통 세상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바뀌겠다고 결단합니다. 주님, 나에게 오십시오, 이쉬가 되겠습니다.

내 가운데로 오십시오, 주님을 세상으로 오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나의 가운데로 오셔서 주님이 사십시오. 주님이 아니면 가능성이 없는 자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이제 시작하십시오. 베트 하십시오, 베레쉬트 하십시오. 나는 당신 안에 있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할 때 I believe in Him, I believe 베트(ב, in) Him이라고 하는 것이다.

베트가 없으면 믿을 수도 없다. 베트 안에 다 있다.

그것이 성경에서 집을 중요시하는 이유이다. 집은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시작은 또한 정확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 집안에 모든 알파벳을 담아놓으셨다.

 

바르 : 아들 - 이 ב 집의 ר 머리, 

베레쉬트 는 ‘태초에’이다. 베레쉬트 안에 바르 בר, 집의 머리, 아들, 집을 짓는 머리, 집을 주관하는 머리가 들어있다.

첫 두 글자이다. 토라의 첫 단어가 바르이다. 토라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 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그가 진노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길을 잃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는

“너희들의 길에 진노(아프) 분노가 있다는 것이며 이 분노 때문에 너희가 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에게 입맞추라”

는 것이다. 아들이 너희의 무기라고 하는 것이다. 이 아들이 바로 ב 베트를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바르는 또 곡식, 양식이라는 뜻도 있다. 아들이 양식이고 곡식이다.

 

잠 11:26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바르 : 곡식, 양식, 아들

 

요셉이 생각나야 한다. 요셉이 곡식을 팔았다. 그래서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한다.

요셉은 곡식을 판 것이 아니라 바르를 사게 만드는 것이다, 아들을 내놓지 아니한 자, 곡식 대신 아들로 읽어 보라.

 

‘아들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다.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할 것이로다.’

 

판다는 것은 사게 만드는 것이다. 요셉은 아들을 사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곡식이냐면 알곡의 운명은 갈아져서 가루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샤바르 : 부서지다. 갈아지다. 아들의 운명은 부서지고 갈아지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곡식을 사게 한다는 표현은 부서지고 갈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이 형상의 집을 위해서 부서지고 갈아지신다. 이것을 바르라고 한다.

토라에서 요셉의 일은 곡식을 사게 만드는 것이다. 주님을, 아들을 사게 만든 것이다.

 

벤 : 아들 

바나 : 세우다. 건축하다.

 

벤도, 바르도 아들이다. 그런데 아들의 역할이 다르다.

바르는 머리 됨을 강조한 것이고, 벤의 눈(נ,ן)은 일관된 규정을 의미한다.

집에 대해서 아주 신실한 것이다. 규정은 바꾸지 않는다. 이것이 벤이다.

 

벤은 바나, 세우는 자에서 온 단어와 동의어다.

벤의 동사형이 바나이다. 빌딩을 세우는 자는 반드시 규정에 신실해야 한다. 모든 세우는 자의 특징이다.

아들이라는 말로 벤이 더 광범위하게 쓰인다. 왜냐하면 아버지 안의 모든 것에 신실하게 세워놓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인성이 신성으로 변화되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느냐에 대한 모든 규정들을 신실하게 세워놓았다.

그것이 세상을 붙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규정이다.

 

우리가 우리 성품을 자기 마음대로 훈련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이 어떤 규정을 세워 놓으셨는지 잘 몰랐다.

우리가 아들에 대해서 많이 얘기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아들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빵집에서 빵을 만들 때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는다.

아들은 신성을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겠다는 집이다.

온 우주가 그 집이다. 우주를 내 마음대로 보거나 해석하지 말라.

온 우주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집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떻게 내가 어떻게 훈련되어야 하는지 모든 규정을 세우신 분이 바로 아들이다.

그래서 주님이 나한테 와서 배우라고 하신다.

 

그런데 주님에게 오는가? 교회에 오는 것을 주님에게 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아니다. 주님이 그 규정을 다 세워 놓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인자 : 벤 아담 (사람의 아들) 이다.

 

벤 아담은 아담을 세우는 자이다. 어떻게 신성을 닮아가느냐에 대한 집을 세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집으로 들어가면 신의 성품이 되어서 나오는 것이다

 

이브리 – 건너가다, בר아들의 ע 관점

 

히브리는 아들을 소유하는 관점이다. 우리는 계속 그 아들을 보는 눈을 키우고 있다.

아들을 보게 되면 아들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인간은 보는 것을 얻는다.

 

에벤 : 돌

벤, 아들 앞에 알렢, 신성이 붙으면 돌이 된다.

우리 주님이 모퉁이돌이 되신다. 그래서 성전을 돌, 에벤으로 짓는다.

알렢은 신성, 베트는 집이다. 신성한 집을 짓는다. 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에는 ‘예루살렘의 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유명한 속담이 있다.

예루살렘의 웬만한 돌들은 2000년, 3000년 된 돌들이다. 돌 천지이다.

모든 역사 속에서 인간들은 다 사라져 갔지만 돌들은 그것을 다 보고 있다.

통곡의 벽이라고 한 것도 이 돌은 모든 눈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돌들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고 솔로몬 때의 돌들이 지금도 거기에 있다. 모리아산의 돌은 아브라함 때의 돌이다.

 

신성의 집을 짓는 신실함이 에벤이다.

에벤은 보석이다. 우리는 십계명을 돌판에 새긴다고 하지만 유대인들은 사파이어 판에 새겼다고 한다.

계시록에 가면 예루살렘에 보석이 나온다. 히브리 말로 하면 에벤, 돌이다.

 

하나님의 속성이 집을 짓지 않으려는 자들과는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발견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려고 하면 먼저 집을 지으려고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렇게 성전을 지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길, ‘얘들아, 그 집이 아니야’ 그래서 성전을 허무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당신의 육신 된 몸을 말씀하시고, 너희 몸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신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베트하고만 주님은 관계하신다. 집을 짓고자 하지 않는 자와는 주님이 상관하지 않으신다.

 

샤칸 : 거주하다. 거하다.

‘쉐키나의 영광’에서 ‘쉐키나’는 거주한다는 말이다.

샤칸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집이 없으면 거주한다는 말은 생기지 않는다.

쉐키나의 영광은 하나님의 형상 ש을 적용하는 것 כ 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계속 적용하는 곳이 바로 집이다.

 

우리는 알렢부터 타브까지 집에 갖다 놓아야 한다.

내 삶 속에 이것을 가지고 형상으로 변해가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집을 짓는 자를 아들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주님이 나타나셔서 다 지어 주신다.

내가 지어야 할 것 같지만 나는 실상 짓지도 못한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그 옆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밖에 없다. ‘주님 잘하시네요!!’

그런데 우리는 그 집 짓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 80평, 주님, 90평이요’ 한다.

그러니까 주님이 그게 아니라고 하신다.

주님의 집에서의 하루가 세상 궁궐에서의 천 년보다 더 낫다고 다윗은 노래했다. 그 기쁨이 내 것이 되길 축복한다.

 

김멜- 숫자값 3

사람이 달려가는 모양이다. 히브리어의 세번째 글자이다. 숫자 3을 뜻한다.

하나님의 숫자 3을 이해할수 있는 결정적인 알파벳이다.

왜 두다리가 나타날까? 자유의지가 김멜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이다.

사람이 집을 짓고 나면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등장시키신다.

자유의지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두 다리가 중요하다. 어떤것을 목적하려면 두 다리가 자세를 제대로 잡아야 한다.

처음 싸움의 승패는 두 다리가 자세를 어떻게 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다리가 자세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실제적으로 자유의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자유의지의 핵심은 선택이다. 무엇을 선택하는가?

나는 무언가를 제대로 볼수 도 없고, 허상이며 잘못된 것을 보는데 무엇을 선택하라는 것인가?

 

자유의지의 핵심은 하나님을 보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많이 착각한다. 나에게 선과 악을 선택하라는 줄 안다.

그래서 내가 선을 선택하는 줄 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하는 선이 선이 아니다.

내가 무언가를 악으로 규정하면 그것이 진짜 악일까?

자유의지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이게 없으면 인간은 어둠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자유의지의 첫번째 키는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서 나를 죽이는 것이다.

자유의지의 파워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없다. 능력이고 파워이다.

사실 자유의지를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다. 그것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작성자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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