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 교제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교제’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는
‘동업자, 제휴자, 동료, 친구, 배우자, 분배자’라는
뜻을 가진 ‘코이노노스’(κοινωνός)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으며
‘동료의식, 교제, 사귐, 공동체, 공유, 참여, 사귐, 상호교류, 우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동사형은 ‘코이노네오’ (κοινωνέω)인데
‘남과 나누다, 공유하거나 교제를 나누다, 동업자가 되다, 제휴하다, 동참자가 되다’라는 의미이다.
‘코이노네오’ (κοινωνέω)는 히브리어 '하바르' 이다
뜻은 ‘하나로 만들다, 연결하다, 함께 묶다, 부부가 되다, 동맹하다, 붙다, 쌓아 올리다, 친교하다’ 라는
뜻을 가진 ‘하바르’(ב ר ח )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으로
이를 알파벹의 뜻을 조합하면 진리가 없는 자는 ‘죄가 거하는 집으로 시작하다’
그리고 진리가 있는 자는 ‘생명이 거하는 집으로 시작하다’라는 의미이다.
또한 ‘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교제의 의미는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서로 사귀어 가까이 지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과 가까이 사귐’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마치 범죄조직에 들어가면 죽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그 정도의 결속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헤브라 : הברח’ – 하바르 : ברח‘의 명사형)가 되어…’(욥 34:8)
라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어
하나가 되면(ברח, κοινωνέω), 그가 바로 악한 자가 되는 것이다.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사람들 사이의 영원한 결속, 매우 깊고 깨드리기 어려운 연합을 언급할 때 사용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결혼이나 상업적인 계약을 맺은 사람들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계약 당사자들 사이의 결속은 그 계약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됩니다.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욥 34:8)"
여기에서 '사귀며'란 단어라 헬라어 '코이노니아'의 한국어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칠십인역(기원전 3세기-1세기 경에 이루어진 성경번역본으로
예수님 시대에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많이 사용했다)'이라 불리는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위의 구절에서는 악인들, 범죄자들 사이의 결속을 언급하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 시대 상황에 맞추자면 마피아나 불량배들 사이의 결속을 말할 때 동일하게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범죄조직에 한번 몸 담게 되면 이정의 결속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들이 감사하며 받는 축복의 잔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κοινωνία)이며,
성도들이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κοινωνία)이다(고전 10:16)는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사귀어 하나된(κοινωνία) 상태(union Christ)를 말하는 것으로
더 이상 뗄래야 뗄 수 없는 결합의 관계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이 경우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완전히 헌신된 사람들 사이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두 마리 소가 함께 묶여서 일하는 경우로 이 상황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한 마리가 방향을 바꾸면 다른 소도 함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한 마리가 멈추면 다른 소도 경로를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깨드릴 수 없는 결합입니다. 이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고후 8:1-4)"
여기서 '참여'가 '코이노니아'를 번역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입니다.
바울은 여기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에 대해 로마서 15잘 26절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코이노니아'는 자신들이 극히 가난한 중에도 고통당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마게도냐 성도들의 불타는 열망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이 극심히 가난하며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에게 매우 친밀한 사랑과 형제애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비록 적을지라도 그들이 가진 것을 예루살렘에 보내는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 불러일으키는 깊은 사랑과 헌신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초적이고 실질적인 방법,
즉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신이 가진 마지막 하나까지 주는 것으로 명백히 드러납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에 나오는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 공동체-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정서적, 물질적 연합-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제'와 '통용'이라는 두 단어는 모두 '코이노니아'란 한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서로 완전히 헌신하는 공동체를 이루었음을 봅니다.
이것이 분리된 개인을 하나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이루시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이런 연합이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이것은 모든 부분에서 온전히 헌신된 성도들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위한 헌신입니다.
이것은 자원을 나누는 헌신입니다. 이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정서적 결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사도는 우리가 본(호라오 : ὁράω) 영원한 생명과
들은(아쿠오 : ἀκούω) 생명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그 목적이 우리와 사귐(κοινωνία) 있게 하려 함이요,
그 사귐(κοινωνία)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κοινωνί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요일 1:3).
그러므로 성도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 내 말이 죽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서로 교제(κοινωνία)하는 자이며,
생명의 양식을 함께 나누는 자이고 오직 하나님께 진리의 말씀을
구하고 받고 흘리는 일(프로슈케 : προσευχή)에만 전념하는 자인 것이다(행 2:42)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남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직접 보고, 직접 듣고, 직접 만지고, 직접 동행하며 기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단순한 신학이 아니라 만남의 증언입니다.
요한일서 1장 3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여기서 "사귐"은 헬라어 코이노니아입니다. 생명을 나누는 깊은 교제입니다.
요한일서 1장 5절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한일서 4장 8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