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지식'은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있으나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니라.』(고린도전서 13:13)
'진리의 지식'은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3:1에 『내가 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들로 말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내는 놋이나 시끄러운 꽹과리가 되고』 고린도전서 12장의 마지막 구절이 『오히려 너희는 최상의 은사들을 열망하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더 좋은 길을 보여 주리라.』 최상의 은사는 바로 ‘사랑’이다.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 『내가 예언의 은사가 있어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 최고의 엘리트였으며, 셋째하늘까지 갔다 왔던 인물이었다. 바울은 여러 가지 은사도 있었을 것이고, 일곱 신비, 일곱 부활, 일곱 침례, 영원한 심판, 휴거, 대환란, 천년왕국, 영원시대 이런 교리적인 지식들뿐만 아니라 영적인 지식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도 바울이 성경의 모든 지식을 잘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진리의 지식'을 머리로만 취해서 많이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지금 자신에게 이 말씀을 적용시키고 있다.
고린도전서 13:3절에 『또 내가 내 모든 소유를 주어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일들은 대단한 희생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일도 사랑 없이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사랑이 없어도 신비와 지식을 알고, 믿음의 역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할 수 있다. 육신적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가장 많았고, 은사 또한 많았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된다. 믿음의 역사 가운데 우리는 능력을 행할 수도 있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 계명의 목적대로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가식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딤전1:5)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끼칠 수 있으나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도 받을 게 아무것도 없게 된다. 사랑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면 모두 허공을 치는 메아리인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사랑의 항목이 15가지가 나온다. 고전13:4-7에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높은 지식인 성경적 지식이 사랑으로 연결 되지 아니하면 자기변명과 자기변호를 하게 된다.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그는 자신을 영성으로 포장을 했다. 그래서 높은 지식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해서 다른 사람을 자꾸만 넘어뜨리고 실족시키게 만든다. 높은 지식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되고, 자신은 사랑 없이 하는 것인 줄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이 잘하고 있는 줄로 착각까지 한다. 지식은 전심전력하여 쌓아야 하는 8가지 중에 세 번째 단계에 속한다. 베드로후서 1:5-7에 『이뿐만 아니라 너희가 더욱 전심전력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지식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세 번째 단계이다. 지식 다음에 참 많은 것들을 쌓아 올려야 되고 마지막으로 완성된 것이 사랑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해서 판단만 하고 정죄만 하게 된다. 성령의 열매에서도 사랑이 첫째로 나온다. 갈라디아서 5:22-23에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그러한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 성경의 어떤 부분을 보더라도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 간과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눈을 바로 떠서 올바로 직시하라.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잘 바라보라. 나는 ‘진리의 지식’을 붙들고 있다는 그 한 가지 자부심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나는 '진리의 지식'을 쌓고 있다는 그 자긍심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안 보일 수 있다. 최고의 ‘진리의 지식’을 가진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3-14에 『형제들아, 나는 내가 붙잡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다만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에 손을 뻗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푯대를 향해 좇아갈 뿐이라.』 로마서13:8에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어떤 빚도 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이룬 것이니라.』 로마서13:10에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권면하고 있다.
'진리의 지식'은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율법은 사랑을 통해서 완성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죄인들을 위해서 내어주심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시고 확증하셨다. 그 완성된 사랑을 주님께서 풍성히 부어주시고 계신다. 그 사랑으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게 하기 위함이다. 주님께서 그 사랑을 주시지 않으면 따라가지 못한다. 스스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된다. 주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실천은 내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지 않고, 다른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른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주님이 지고가신 그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는 그 고백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사랑은 엉터리며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은 최고의 가치를 사랑으로 말씀하신다. 인간의 로맨스나 휴머니즘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가장 큰 실천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죄인들의 몸값으로 내어주신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랑은 육신적인 사랑이다. 육신적인 사랑은 결코 진정한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물론 자선이나 구제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도 해야 할 필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하려고 하는데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 완성이 아니라 시작인데 그것을 궁극적인 추구와 완성으로 봤기 때문에 '진리의 지식'을 영적성장으로 연결시키지를 못한다. 요한복음14:21에 『나의 계명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께 사랑을 받으리라. 또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 사람에게 나 자신을 나타내리라.”고 하시더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 계명을 마음에 심어놓고 빼앗기지 않는다. 요한복음 14:23-24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들을 지키리니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며, 또 우리도 그에게 와서 우리의 거처를 그와 함께 정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나의 말들을 지키지 아니하느니라.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바른 성경'을 가지고 바른 '진리의 지식'을 먹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내 안에서 얼마나 소화시키고 실천하고 있는가의 부분인데 이것은 주님과 내가 어떤 교제를 나누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분과 어떤 생명의 교제를 나누고, 또 그분의 생명을 어떻게 내가 누리고 있으며, 또 그분과 사랑을 어떻게 나누고 있느냐는 것이다. 주님과 사랑의 교제 가운데 빠진 여인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주님으로 부터 돌이킴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지만 늘 함께 했던 제자들은 주님으로 부터 돌이켰다. 그러나 그분과 사랑을 나눌 줄 알았던 여인들은 결코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랑에서 눈을 돌이키면 어떻게 되는가? 그 때부터 문제가 발생하는데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불만과 불평이 싹트기 시작한다. 마치 극단적 비평가가 되어 비판을 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가 허물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을 감싸 안고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상대방이 변화되기를 인내하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이것이 주의 사랑이 강권하는 내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의 현장이다.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셨다, 정말로 비참한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다른 사람의 허물이 문제로 보이겠는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 풍성함을 체험하는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간다. 거기서 떨어질까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며 주님과의 교제를 계속 유지해 나간다. 그런데 주님과의 관계를 지식으로 맺으려니 그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문제는 말씀으로 판단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지식과 사랑은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성경은 야고보서 3:13에 『너희 가운데 현명하고 지식을 갖춘 자가 누구냐?』고 질문하고 계시며, '진리의 지식'을 갖춘 자가 어떤 자인지 설명을 해준다. 『그는 선한 행실을 통하여 지혜의 온유함으로 자신의 행함을 나타내 보일지니라.』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주님은 계명을 지키는 것을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매우 칭찬하신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 주님께서는 칭찬해 주신다. 더 나아가서 그 말씀을 가지고 실행을 한다면 높이 칭찬해 주신다.
그러나 때로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일 수도 있다. 그 계명을 붙들고 겉으로는 지키고 있으나 내 안에서는 영적 공허함이 가득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함으로 하고 있는지 혹시나 그것이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은 아닌지 마음의 동기를 살펴봐야 한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영적분별력이다. 나의 영광과 나의 자랑을 위해서 주님을 섬기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육신의 성향으로 섬긴 모든 일들에는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이해타산이란 것은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기대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억울한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육신으로 한 일들은 결국 주님과 무관한 일이 된다. 그러므로 '진리의 지식'은 오직 '사랑'으로만 완성 될 수 있다.
출처: 생명침례교회 20/10/11 오후설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