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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초신자를 위한 요한계시록 강해 34강(계 10:1~11)

작성자ourdailybread|작성시간18.02.16|조회수190 목록 댓글 0

내가 보니, 다른 힘센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구름으로 옷입고 머리에 무지개가 있으며, 얼굴은 해와 같고 그의 발은 불 기둥 같더라.


이 천사는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 개입하여 나타나는 특별한 천사인데 그 정체가 누구인지 궁금해지지만 이제 전개할 설명을 통해 여러분은 그가 누구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천사의 외모는 여느 천사들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천사가 이런 모양새로 나타나는 경우는 계시록이든 성경의 다른 책들이건 없다. 첫째, 그는 구름으로 옷입고 있으니 이것은 이 천사가 거인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이하의 묘사에서도 이 천사는 거인으로 비춰진다. 


"다른 힘센 천사가" 이 천사는 그동안 대환란의 심판과 관련하여 각각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던 그 천사들과 별개의 존재인 것이다. 그는 일곱 나팔을 부는 천사들보다 힘센 자이다. 


주께서는 의를 사랑하고 죄악을 미워하셨나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께서 주께 기쁨의 기름을 부어 주의 동료들보다 우위에 두셨나이다.”라고 하셨느니라(히 1:9).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 낮아지셨지만 그가 겸손해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주의 동료들보다"(하나님의 아들들보다: 천사들이나 성도들) 높이셨다. 주께서는 하늘의 군대 대장인 미카엘보다 강한 분이신데 이는 그가 우리 "구원의 대장"(히 2:10)이시며 "주의 군대 대장"(수 5:14)으로서 이 세상을 정복하여 철장 아래 통치하실 분이다. 그래서 주께서 대환란 중에 공중에 현현하신다면 그 분은 사람들에게 "힘센 천사"(주의 천사)로 보일 것이다. 


구름으로 옷입고 머리에 무지개가 있으며 이 모습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받으신 모습과 흡사하다.


그가 아직 말하는 중인데, 보라, 빛나는 구름이 그들 위를 덮더라. 보라, 구름 속에서 음성이 있어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표식인데 주께서 인간들에게 나타나실 때는 항상 구름 속에서 말씀하시곤 했다. 시내 산에서 그랬고 초림 때 있었던 변화산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또 주님께서는 구름과 함께 올라가셨다가 구름과 함께 오실 것이다. 또한 구름으로 옷입었다는 것은 이 천사가 구름처럼 거대한 외관을 하고 내려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한 번 드려지셨고, 두 번째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죄 없이 나타나시리라(히 9:28).


초림 때의 예수 그리스도는 출생부터 초라하게 말구유에 오셨고 그 분은 평범한 목수로 계셨으며 나사렛 사람으로 알려지셨다. 주님께서는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주께서 죄인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했다. 다시 말해서 초림으로 오신 주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거물"로 인식되지 않았다. 주께서는 비난받고 거부당하고 멸시당하셨다. 


이는 그가 그 앞에서 연한 싹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것이며, 그는 모양도 우아함도 없으시니 우리가 볼 때에 그를 흠모할 아름다움도 없음이라(사 53:2).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나 연한 싹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초라한 생물이다. 슈퍼 스타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설과 뮤지컬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심히 왜곡시킨 창작물이다. 예수님은 슈퍼 스타로 오시지 않았으며 앞으로 천년왕국 때 그 분은 정말 스타가 되시겠지만 그러나 연예인 같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스타가 아닌 철장으로 지상 왕국들을 다스리는 두려운 통치자가 되실 것이다. 


이제, 10장에서 주님이 주의 천사의 모양으로 지상에 현현하시는 장면이 맞다면 여기서 주님은 지상에 남은 거민, 특히 유대인들에게 각별한 메시지를 주고 계신 것이다. 세상이 점점 작아지고 있고 주님의 권세는 점점 커지고 있으며 이제 사탄과 적그리스도의 치하도 깨질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이 출현으로 명시하고 계신 것이다. 


머리에 무지개가 있다고 했는데 무지개는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무지개가 구름 속에 있으리니, 내가 그것을 보고 하나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시더라(창 9:16).


보통 무지개는 비가 내린 다음 날이 맑아지면서 뜨게 되어 있다. 노아의 때에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생물들과 맺으신 자비의 언약을 증거하는 표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천사의 무지개가 가리키는 것이 이른 비와 늦은 비(실제적인 소나기)와 관련된다고 보는데 즉, 두 증인이 휴거되고, 마찬가지로 환란 성도들이 같이 휴거되는 그 환란후 휴거가 있고 나서 복된 비가 내릴 것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그 복된 소나기가 그치고 나면 이 천사가 내려오고 그의 머리 위에 무지개 언약이 보일 것이다.


앉으신 분의 용모가 벽옥과 홍보석 같으며, 그 보좌를 두른 무지개는 에메랄드같이 보이더라(계 4:3).


무지개는 아무 데나 쓰이는 상징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영광에 독점적으로 주어지는 표시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의 보좌를 두른 무지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또한 뒷받침할 것임이 자명하다. 이 천사가 무지개 후광을 둘렀기 때문에 일반적인 천사가 아닌 것이며 그가 주의 천사, 곧 예수 그리스도의 천사적 현현인 것은 거의 확실하다. 


얼굴은 해와 같고 그의 발은 불 기둥 같더라 이 모습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적인 외모인데 우리는 이미 계 1장에서 예수님이 재림 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지 보았던 바 있다.


그의 발은 용광로에 달군 듯한 빛나는 놋 같고,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계 1:15).


그리스도의 발에 대한 묘사가 계 1:15, 그리고 본문이 퍼펙트하게 일치한다. 얼굴은 왜 해와 같은 것인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의의 태양"으로 나타나실 것을 저 사람들에게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태양이 그의 날개에 치유를 가지고 솟아오르리니, 그리하면 너희는 나가서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자라리라(말 4:2).


태양은 신랑방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경주하는 강한 남자처럼 기뻐하는도다(시 19:5).


주님은 태양과 비견되는 모습으로 재림하시는데 태양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진 존재다. 첫째, 그것이 없으면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을 수 없고, 그래서 주님께서 창조주요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점을 잘 대변해 준다. 둘째, 태양은 그 열기로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다. 또 너무 밝기 때문에 쳐다볼 수 없다. 주님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 태양은 사정없이 태워버리는 심판이 될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해처럼 빛나리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3:43).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면 그때 성도들 또한 예수님처럼 해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고전 15:41). 


그들 앞에서 변형되시니 그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의 옷은 빛처럼 희어지더라(마 17:2).


그리고, 마 17:2에서는 매우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이 해처럼 빛난다고 묘사하고 있으니 계 10:1에 직접적으로 대칭되는 구절이다. 


그의 손에는 작은 책이 펴 있고 오른쪽 발은 바다를, 왼쪽 발은 땅을 밟고서


그의 손에 들린 이 작은 책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성경에서 보통 하늘의 책이라고 할때 성경 66권 자체를 가리킨다. 좀더 각별한 의미를 부각시켜서 생명의 책, 행위들을 기록한 책, 그런 식으로 나가기도 하지만 생명의 책이라는 것도 결국 성경의 일부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하늘에 많은 책들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책들 중의 책이요, 책들의 제왕은 66권 성경일 수 밖에 없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시 12:6).


하늘에는 영광과 존귀를 받는 한 권의 책이 있다. 이 책에 견줄 수 있는 책은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밑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권위 있는 한 권의 성경에 필적하고자 인간들은 많은 가짜 종교 경전들을 생산해 냈지만 모두 예비 주자에도 못 들고 탈락해 버렸다. 구약 외경들, 몰몬경, 교리와 성약, 코란, 바가바드 기타, 사자의 서, 모두 실격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안에는 진짜 계시와 예언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경전들은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책들이다. 


그래서, 이 작은 책이 성경 자체이거나 성경 중의 어떤 책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냥 책이 아닌 "작은 책"이라 했기에 이것은 요한계시록 자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계시록이 아니라면 그 다음 가능성은 다니엘서일 것이다. 


오른쪽 발은 바다, 왼쪽 발은 땅, 이것은 내가 이 천사를 거대하다고 인정한 또 한 가지 이유가 된다. 평범한 인간의 크기라면 어지간한 롱다리라 할지라도 이렇게 서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당연히 바다는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갔다 하면서 해변에 수미터에서 수십미터까지 파도의 긴 궤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본문에 묘사된 바와 같이 서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신장이 어마어마하게 큰 존재라면 한쪽 발은 해수에 입수하고 다른 쪽 발은 마른 땅을 밟고 서 있을 수 있다. 


그가 서 있는 바다는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 남극 북극해, 어떤 바다인가? 계시록의 문맥상 지중해를 가리킨다. 지중해는 이스라엘과 밀접한 바다이고 예언적으로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부활한 로마 제국의 내해이기도 하다. 


"지중해"(Mediterranean sea)라는 말은 땅 한 가운데 있는 바다라는 뜻이며 성경에서는 지중해를 "대해"(the great sea)라고 부르는데 이스라엘 지파들은 이 대해를 세로 기준선으로 삼아서 영토를 분배했었다. 


이 천사가 서 있는 모습은 지중해 해변에서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서 있는 방향이 중요한 이유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방향이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주적인 북쪽(셋째 하늘)에서 출발하실 것이고 이 지상에서는 팔레스타인 땅의 북쪽인 아마겟돈(에스드라엘론 평원: 므깃도 골짜기)에서 시작하여 사해 쪽으로 방향을 잡으실 것이다. 재림과 관련된 모든 현상은 북쪽이 남쪽보다 우선한다. 


이는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나 남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시 75:6).


그래서 이 천사도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과 같은 방향에 맞춰 남쪽에 대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자가 포효하는 것처럼 큰 음성으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 일곱 천둥이 소리를 발하더라.


이 사자는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그 울부짖는 사자(벧전 5:8)가 아닌 유다 지파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주님은 사자왕으로 이 땅에 내려오실 것이며 그를 환영하지 않는 모든 원수들을 사자가 이빨과 발톱으로 찢듯이 산산조각 내실 것이다(아마겟돈 전쟁).


그 장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기를 “울지 말라, 보라, 유다 지파의 사자인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책을 펴고 또 그 책의 일곱 봉인을 떼리라.”고 하더라(계 5:5).


주님과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 군사들은 사자 같이 용맹하게 싸워서 24시간 안에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온 2억의 UN군을 도륙된 시체로 바꿔놓을 것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마치 사자 곧 젊은 사자가 먹이를 놓고 으르렁거릴 때 목자의 무리가 그를 대적하여 불려 와도 사자가 그들의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의 떠드는 소리에 굴하지도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만군의 주도 시온 산과 그 언덕을 위해 싸우려고 내려오시리라(사 31:4).


사자는 옛부터 맹수의 제왕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다른 글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사자가 가장 힘이 세서 그런 게 아니라 맹수들 중에서 가장 품격과 위엄이 있고 또 그 으르렁대는 포효 소리가 가장 우렁차기 때문에 호랑이보다 사자를 더 놓게 쳐주는 것이다. 사자가 포효하는 소리는 MGM사의 영화 로고에도 들어가 있다. 


이 힘센 천사는 그냥 천사처럼 말하지 않고 사자처럼 포효하는 소리로 외친다. 이 목소리를 듣는 자는 누구라도 "아, 예수님이 곧 오시겠구나"를 절감하게 될 정도의 우렁찬 포효인 것이다. 


그가 외칠 때 일곱 천둥이 소리를 발하더라 여기서 일곱 천둥은 실질적으로 음성을 발하고 있다. 우리말 문맥상 천둥이 음성을 발한다고 하면 의미가 부자연스러울 수 있으니까 소리로 번역을 한 것이다. 4절에 가서 보면 일곱 천둥이 말을 했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이것이 음성이었음을 알게 된다. 


네가 하나님과 같은 팔이 있느냐? 네가 그와 같이 음성을 천둥처럼 낼 수 있느냐?(욥 40:9).


하나님의 음성은 천둥과 같아서 인간이 육신의 귀로만 듣는다면 진짜 천둥 소리와 잘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영적 안목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적 천둥과 초자연적 하나님의 음성 천둥을 구별할 수 있다. 우리가 환란전휴거될 때 듣게 될 하나님의 음성은 온 세상에 울려퍼질 천둥 소리 같지만 주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이리 올라오라"는 위엄있는 음성으로 들릴 것이다.


나는 3절의 일곱 천둥 소리가 울리는 현상을 요한복음 12장과 연관시키고자 한다. 


아버지시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니,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나기를 “내가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였고 또다시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시더라. 그때 곁에 서서 그 음성을 들은 무리가 말하기를 “천둥 소리였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한 것이라.”고도 하더라(요 12:28-29).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혼이 고뇌에 찬 상태에서 아버지의 이름에 영광을 돌렸을 때 하늘에서 천둥 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주님 곁에 있던 무리들은 그 음성을 들었고 그들 중 일부는 소리가 아닌 음성이라고 확실히 인지했다. 이 장면에 이어서 주님은 이 세상 통치자 마귀의 몰락을 예언하신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제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리라(요 12:31).


사탄은 이 심판 선고가 내려지고 2천 년의 교회시대가 경과했음에도 아직 형의 집행을 받지 않은 유예 상태로남아 있다. 사탄은 아직 이 세상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다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사탄의 몰락과 체포라는 사건을 재림을 위해 남겨두고 아직 그 카드를 쓰지 않으신 것이다. 


그래서, 10장에서 일곱 천둥이 발하는 소리는 요 12장의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과 관련이 있고 아마 거기서 속행되어 이어진 다른 메시지들일 수 있다. 


그 일곱 천둥이 소리를 발할 때 내가 막 기록하려는데, 하늘에서 한 음성이 내게 들리며, 말하기를 “일곱 천둥이 말한 것들을 봉인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이 메시지들은 지금 교회시대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대환란에 처한 자들에게, 특히 그 끝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에게 뭔가를 전달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게 뭔지 나는 모르겠고 성경이 "봉인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했는데 무리수를 써서 알아내려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벧후 1:21).


우리가 접하고 보는 66권의 성경은 두 가지 프로세스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 손까지 들려주셨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에게 성령을 통해 발설하게 하셨다. 기록하기에 앞서서 그들은 예언을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많은 것들 가운데 특별히 일부를 선별하셔서 책으로 기록하게 하셨다. 그것이 문서화되어서 우리에게 넘어온 66권의 성경이다. 성문화되지 않은 많은 예언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실종된 예언들"을 찾아서 공부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간혹 성경의 최종권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은 에녹서니 구약 외경이니 심지어 동양의 비기참서들을 끄집어 내서 성경과 견주려고 한다. 그런 짓들은 성경을 더 잘 알게 해주는 것이 아닌 더 모르게 하는 지식 파괴 행위다. 성경에 견줄 수 있는 예언의 책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에녹서, 많은 사람들이 초기 교회의 영지주의 위작 문서 중의 하나인 이것에 큰 개런티를 주면서 뭔가 유용한 예언들을 찾아내려고 헛수고한다. 여러분이 진리에 대해 알고자 하면 그런 종이 쓰레기에 시간 낭비할 게 아니라 바른 하나님의 말씀, 한글킹제임스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기 바란다. 


"봉인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것은 이 음성들이 휘발되어 아예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 천둥 소리들은 "대외비 문서"로 분류되어 성경 독자들로부터 치워졌을 뿐, 하늘나라 기록 보관소 어딘가에는 계속 존재한다. 여러분이 정말로 그 음성에 대해 궁금함을 참을 수 없다면 하늘나라로 갈 때까지 기다려 보라. 


또 내가 본 그 천사가 바다와 땅 위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고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신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을 두고 맹세하기를 “더 이상 지체하지 않을 것이라.


이 천사는 인간들 앞에서 한 가지 맹세를 하고 있다. 이 맹세의 내용은 간단한데 재림이 지체되지 않고 곧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재림을 실행하는 주체는 천사나 천사장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지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는 이 천사는 하나님을 두고 인간들에게 맹세하고 있는 것이다. 재림을 언제 실행할지에 대한 권한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다. 누구도 하나님께 더 빨리, 더 천천히 하시라고 충고할 수 없는 것이다. 


자,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지상 재림이 앞으로 100년 쯤 후에 있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50년 후에 있다고도 여기지 않는다. 주님은 정말로 곧 오실 것이고 그 분의 지상 재림보다 7년 이상 앞서서 교회를 하늘로 취해 가실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는다"는 보장과 약속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솔직히 아니다. 우리는 이미 2천 년 동안이나 주님께서 재림을 유예하신 것을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여기서 몇년 더 지체된다 해서 거듭난 크리스찬들이 하나님께 불만을 가질 것은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보다 앞선 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신실한 성도들도 그들의 생애 중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강력히 소망했으나 그 희망이 불발되고 결국 그들은 먼저 무덤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놓치지 않을 그런 처지의 사람들, 즉 대환란 막바지에 놓인 그 자들에게는 저 음성이 가뭄의 단비처럼 달콤하게 들릴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 24:13).

이는 우리가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들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되기 때문이라(히 3:14).


또 한 가지, 내가 본문으로부터 떠올리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환란후휴거"와 "지상재림"이 분리된 두 사건이라는 데서 나오는 말이다. 


또 주께서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시리니, 그들이 하늘 이편 끝에서 저편 끝까지 사방에서 그의 택하신 사람들을 함께 모을 것이라(마 24:31).


마 24:30-31을 두고 일부 세대주의자들은 환란전휴거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완전히 틀린 해석이다. 마 24장은 이스라엘에 초점이 맞춰진 대환란 스토리이지 그 안에 교회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이 부분을 보고 개신교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은 지상 재림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 역시 완전히 엇나간 해석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것을 보면 그 일이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3).


왜 그 개신교 학자들이 잘못 해석한 것인가, 24:33에서는 이 일들이 지상 재림이 아니라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 일이 가까이, 문들 앞에" 온 것은 맞지만 대환란이 100% 끝난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환란후휴거가 발생하면 그 뒤에 이어질 지상 재림도 "곧 문들 앞에 이른"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계 12장에서 보겠으나, 두 증인과 환란 성도들이 휴거되면서 주님이 공중에 나타나서 그들을 내려다보신다면(계 14장)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은 이것이 곧 재림이요, 모든 상황이 종료된 것으로 잠시 착각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3년 반 동안 비가 안 내렸던 상황이 풀려서 늦은 비, 이른 비가 내리고 적그리스도의 드높았던 권위와 권세가 순간 바닥으로 추락하며 남은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회개하기 때문(슼 12장)이다. 


그러나 주님이 흰 말을 타고 올리브 산에 내려오시기 전까지는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그 사이를 견디지 못하고 느슨하게 행동하다가 공연히 목숨이 날아가면 억울하니까 주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의 천사로 내려오셔서 힌트를 주시는 것이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긴장 풀지 마라. 최종 보스(아마겟돈 전쟁)가 뒤에 남아 있어. 다만, 환란이 끝날 날이 조만간 올 것이니 마지막 힘을 내라"


일곱째 천사가 소리를 내는 날들에 그가 나팔을 불게 되리니, 그때에 하나님의 신비가 그분께서 자기의 종들인 선지자들에게 선포하신 것과 같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더라.


일곱째 천사의 나팔은 명백히 지상 재림의 나팔인데 이는 일곱째 봉인, 일곱째 호리병과 같은 의미에서 그렇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신비가...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천국의 신비"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는 천국의 신비들이 너희에게는 알도록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마 13:11).


천국은 이 시대 신비적인 형태로 감추어졌고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그 신비는 매듭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 땅에 "지상 천국"이 수립될 때 구약 성경에 빼곡히 예언된 메시아 신정 국가의 신비가 다 풀릴 것이다. 다시 말해 이 "하나님의 신비"란 것은 구약 성경에 나오지 않는 생소한 새로운 것이 아니란 뜻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구약 전체에 걸쳐 말씀해 놓으신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주님이 다윗의 보좌에 앉아 천년왕국 통치를 하신다는 그 유서깊은 예언이 마침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자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얼마동안 부는가 하는 점이다. 잠시 불다 마는 게 아니라 그 천사는 "소리를 내는 날들" 동안 분다. 며칠인지는 모르지만 그 천사는 여러날 동안 나팔을 부는 것이다. 아마 정해진 기간이 있을 것인데 나팔절에서 장막절까지 이르는 칠일의 기간과 상관 있을 수 있다. 


여호수아서 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죄악 세상으로 예표되는 여리코 성을 함락시키는 데 있어 특이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성을 공격하지 않고 7일 동안 성 주위를 돌기만 하다가 칠일째 초자연적 방법으로 성벽이 무너지면서 들어갔다. 그리고 칠일 동안 백성의 무리 앞에 주의 궤가 앞서 가면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런 점을 참고한다면 지상 재림을 앞두고 여러 날 동안 들리는 그 나팔 소리는 칠일 동안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정도로 의미가 성립될 수 있다면 "지상 재림의 그 날"은 감추어진 비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시간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르나니, 심지어는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오직 나의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주님께서 엄중히 단속하며 말씀하신 "그 날과 시간"은 계 14장의 "인자의 알곡 추수"와 관련된 환란후휴거의 날인 것이 확실하다. 지상 재림의 날은 사실 교리적으로 비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장막절에 내려오셔야만 한다. 그래야 천년왕국 기간 동안 모든 이방인들이 장막절을 재림의 날로 기리며 그 날 예루살렘에 와서 경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치러 온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남아 있는 자도 각기 그 왕, 만군의 주께 경배하러, 또 장막절을 지키려고 해마다 올라올 것이라(슼 14:16).


여기에 아주 특별하고 중요한 교리가 등장한다. 천년왕국에 들어간 모든 민족의 대표자들은 주의 절기 한 가지를 지키기 위해 일년에 한 번씩 예루살렘으로 와야 한다. 그 절기는 유월절이 아니요 오순절도 아니다. 장막절이 지켜야 할 절기로 남는데 이는 주님께서 그 절기 날에 맞춰서 지상 재림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문제는 초등학생 수준의 사칙 연산만 할줄 알아도 다 짚어낼 수 있는 사항이다. 적그리스도가 공개적으로 등장하는 날, 그는 7년의 환란 기간을 시작할 것이다. 거기서 7년이라는 기간을 카운팅하면 재림의 날이 된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헷갈리는 구절이 떠오를 것인데 보도록 하자.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단축시켜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떤 육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나, 주께서 선정하신 그 택함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단축하셨느니라(막 13:20).


여기에 "그 날들을 단축"한다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성경을 피상적으로만 보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7년 환란 기간 중에 일부가 잘려 나가고 줄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어이 없는 해석에 이르고 말았다. 왜 내가 어이없다고 말하는지 아는가? 적어도 후3년 반의 경우에는 그 일수까지 철저히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광야로 도망하였는데 그곳에는 그들이 그녀를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부양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녀를 위하여 마련해 놓으신 곳이 있더라(계 12:6).


1,260일에서 마이너스 30일, 60일 정도 임의로 줄어들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고무줄 같은 가변성을 포함한 일자가 되어야지 저렇게 고정적으로 언급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 피난민들은 1,260일 동안 광야로 가서 거기에서 천사들의 부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날들은 단축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막 13:20을 계 12:6에 적용해서 모종의 기간을 커트하는 순간 두 구절 간에 상호 모순과 충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내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이 두 구절은 상호 어긋나지 않는다. 막 13:20에서 말씀하는 "단축"의 개념은 7년 환란 기간의 일수 자체를 조절한다는 게 아니다. 관건은 "환란후휴거"인데 그 휴거가 7년의 끝무렵 언제 있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나도 대충 6개월 안쪽으로 후3년 반 끝에 있을 것이라고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개념을 근거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날과 시간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르나니, 심지어는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오직 나의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그 날과 시간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르나니, 정녕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며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사람들이 환란후휴거의 날과 시간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텐데 짐작가는 것은 있지만 확실하지 않으니까 언급하지 않겠다. 힌트만 드리자면 그 중 하나의 이유는 적그리스도가 때와 법을 변개할 것이라는 부분(단 7:25)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환란 기간 중 해와 달이 1/3씩 어둡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래서 지상의 기존 시간 체계가 뒤틀리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실 이 휴거의 날을 모른다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들도 환란성도들과 똑같은 적용을 받는다. 여러분이 휴거에 대해 이리저리 알아보고 연구를 좀 해 봤다면 이스라엘의 봄절기들과 교회의 휴거가 상관이 있다는 가설들을 접했을 것이다. 주로 유월절 혹은 오순절을 교회의 휴거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고 많이 이야기한다. 예수님께서 꼭 그 절기들과 일치하게 공중 재림하셔야 되는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는 가정 하에 환란전휴거는 대체로 3-6월 사이에 일어날 가능성이 가을 절기보다는 훨씬 크다. 가을 절기, 특히 나팔절을 휴거에 관련짓는 해석가들도 많은데 나팔절은 환란후휴거와 직결되는 절기로서 우리의 휴거와 사실상 무관하다. 


이런 논란들이 그치지 않는 것 자체가 교회 시대의 크리스찬들 역시 휴거의 날과 시에 대해 끝까지 인지하지 못한 채 그 때를 맞이하리라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휴거의 날을 꿰 맞추기 위해 사사로운 성경 해석과 멋대로 예언하는 사람들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또 내가 하늘로부터 들은 그 음성이 내게 다시 말하여 이르기를 “가서 바다와 땅 위에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펴 놓은 작은 책을 가지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라고 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집어서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겠지만 네 입에는 꿀처럼 달 것이라.”고 하더라.


여러분이 이 본문을 한번 묵상하고 나서 로마 카톨릭과 결탁한 형식적 개신교인들이 우리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게 퍼붓는 모함과 비방에 대해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 자들은 이 땅에 정확무오한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다. 나는 그 말씀이 현존한다고 믿는 사람이고 말이다. 나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그 말이 위선이요, 거짓말이라고 맹공을 퍼붓는다. 내 손 안에 있는 한글킹제임스 성경은 양날 가진 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훼손된 성경과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성경을 알고 계시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도 두 가지를 구별한다. 거듭나지 않은 형식적 개신교인들은 아무리 신학을 했더라도 영적인 분별력이 전무하기에 무엇이 진짜 성경이고 가짜 성경인지 판별할 능력이 없다. 


그 자들이 우리 같은 바이블빌리버를 공격하다가 험담할 재료가 떨어질만 하면 우리를 <문서 숭배자>라는 식으로 비방한다. 문서 숭배자라는 뜻은 우리가 성경의 내용이 아닌 종이로 된 성경책 자체를 숭앙하는 책 숭배자라는 비방이다. 터무니없는 소리인 것이 나는 이제까지 성경을 쓰다가 낡거나 또는 연구와 구령할 때 쓸 목적이 있으면 한 다스 넘게 성경을 새로 샀지만 그 성경들 자체가 하나님이라 믿어서 새 걸로 바꾸기가 죄송하다고 그 앞에 절한 적이 없다. 나는 성경"책" 숭배자가 아니라 그 책 안에 있는 철자들과 구두점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내용들을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말씀 숭배자인 것이다. 


나는 책 숭배자가 아니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매주 일요일마다 태양신 바알의 전당에 모여 과자 조각 예수를 입에 물듯이 그렇게 성경을 뜯어서 그 종이를 씹어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이 말씀은 단순한 책이 아니며 그 안에 꿀과 젖과 사과와 고기, 단단한 음식이 들어 있는 진짜 음식이 가득한 책이라는 것이다. 나는 말씀의 만찬(한글킹제임스성경)을 먹기를 거부하고 메뉴판만 휙휙 넘기면서 "KJV는 맛없게 생겼는데, 다른 걸 주문하자고(NIV), 아니, 이것도 별로군, 저걸 주문해 볼까(개역개정, 흠정역), 이런 식으로 제대로 먹지도 않을 거면서 성경 품평이나 일삼는 까다로운 개신교 식객들과 같지 않다. 


나는 이 말씀이 오류와 불순물 없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었고 그 말씀을 내 혼에 적용해서 섭취한다. 이것은 내 속사람의 실질적인 음식이며 이 음식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 정체성은 유지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자, 정말 이 작은 책이 22장으로 구성된 그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면 아이러니한 것이 하나 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을 아직 전달받고 있는 와중에, 그 중간도 채 오지 않은 계 10장에 이미 천사의 손에는 완전한 요한계시록이 들려 있는 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완벽하게 보존될 수 없고 보존된 적도 없다는 그들의 확신을 강화시키기 위해 역사적 근거를 운운한다. 이를테면 "성경의 장과 절은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중세 시대 이후 생겼다"는 식이다. 그건 맞다. 성경의 장과 절은 원래 없었고 주님 초림 당시에도 사람들은 장과 절 없이 통으로 된 각각의 두루마리로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다니엘서 같은 식으로 구분해서 읽었다. 하나님께서 장절을 나중에 주셨다 해서 그것이 영감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인가? 그렇다면 왜 성경의 장절들은 헤아릴 수 없이 풍부한 계시적 의미들을 갖고 있는가? 신구약 성경의 장절을 나눈 최초의 성경은 1560년 제네바 성경인데 그 이전에는 없었던 엄청난 진리의 계시가 갑자기 튀어나왔다고 믿으란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가 첫 발을 떼기도 전인 창세기 1:1 당시 이미 장과 절까지 완벽하게 구비된 66권의 성경을 "알고 계셨다". 나는 "갖고 계셨다"라고까지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그 성경을 미리 알고 계셨고 그 세부적인 형태까지 다 아셨다. 그러니 무슨 문제가 있는가? 성경의 장과 절이 500~600년 전이 아니라 10년 전에 나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면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꼭 먹기를 바라셨을까? 그 요구 사항은 요한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크리스찬들에게도 같이 적용될 것이 분명한데 우리는 이 책을 왜 먹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시니라(잠 30:5).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의심없이 있는 그대로 다 믿을 수 있다. 믿는 것은 곧잘 먹는 것에 비교되곤 한다. 주님께서 사용하신 비유에 따르면 인자를 믿는 사람은 인자의 살과 피를 먹는 것과 같다. 먹는다는 행위가 믿음과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방법은 우리가 성경을 찢어서 먹는 게 아니라 그 안의 내용을 의심없이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고 하시더라(눅 4:4).

썩는 음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는 음식을 위하여 일하라. 인자가 너희에게 그것을 주리니,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를 인치셨기 때문이라.”고 하시니라(요 6:27).


여러분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현재 소지하고 있는가? 소지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한글킹제임스 성경을 정말로 믿고 있는가? 믿는다는 것은 음식물이 목구멍을 통과하여 위장으로 내려갔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소화라는 화학 작용을 일으키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삼키지 않고 입에만 머금고 있다가 뱉아 버리면 안 된다. 또는 먹다가 오바이트 해서 다시 게워 버려도 안 된다. 반드시 씹어서 삼키고 소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지 말씀이 여러분에게 유익함을 줄 수가 있다.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는 30분에서 1시간이면 끝나지만(식사 시간이 긴 라틴권 사람들은 2시간씩 먹기도 하지만) 소화는 그 몇 곱절 오래 걸린다. 8시간에서 그 이상 걸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먹는 것은 여러분이 "먹겠다, 안 먹겠다"는 의지를 발동해서 하는 것이지만 일단 음식물이 식도를 넘어간 다음 여러분이 소화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가벼운 운동이나 소화제를 먹는 정도 외에 별반 없다. 즉, 목구멍 넘어간 다음에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얘기가 되겠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인간적인 과업으로 오해하고 있다. 지식적으로 무엇을 많이 암기, 습득하고 성경의 단어들과 문장들을 암송하고, 자, 물론 암송은 매우 바람직하고 또 중요한 훈련이다. 내가 거리 설교를 시작했던 8-9년 전 그때 나는 한킹 암송을 거의 안 한 상태였다. 어떤 구절이 어디에 있는지 좀처럼 감이 없었고 그래서 지금처럼 성경 강해 글을 쓴다거나 강의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그때 나는 많은 복음 관련 성구들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로마서와 요한복음을 단락별로 암송하다가 조금 더 발전시켜서 한장, 두장, 그 이상씩 암송했다. 그게 시간 낭비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의미없는 반복을 한 것이 아니라 유의미한 목적, 곧 이 말씀들을 잘 간직해서 설교할 때 풀어놓겠다는 의식을 갖고 한 것이므로 그 말씀들은 공중으로 날아가지 않고 내 마음 속에 보관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 암송을 하는 것도 중요는 한데 그렇다고 여러분이 슈퍼 컴퓨터 두뇌를 가진 게 아닌 이상 성경의 책들을 통으로 외울 수는 없다. 나는 아직도 어떤 요절들이 어디쯤에 있는지는 대충 아는데 "아, 그 구절은 요한복음 몇장 몇절이야" 그렇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수학공식 암기하듯이 성경 몇장 몇절이 뭐뭐가 있고, 그렇게 암기하는 게 아니라 그 내용, 그 말씀 자체를 마음판에 새기고 잊어먹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소화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다면 반드시 소화 작용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내 마음이 내 안에서 뜨거워 내가 묵상할 동안 그 불이 탔으니 그때 내가 내 혀로 말하였나이다(시 39:3).

사람이 가슴에 불을 품었는데 옷이 타지 않을 수 있겠느냐?(잠 6:27)


계 3장에서 라오디케아인들의 문제는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그들의 애매한 영적 상태에 있었다. 그들이 말씀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마음 속에 말씀이 가득하다면 불이 타듯이 열기가 올라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말씀을 마음에 품은 크리스찬이라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볼때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답답함과 간절함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렇게 살다 지옥간다는 한 마디 하지 않고서는 가만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이 말씀을 간직한 자의 뜨거움이다. 구령자와 거리 설교자들은 이 뜨거움이 없이 하루도 사역할 수 없다. 


라오디케아인들은 차갑지도 않은 상태였다. 차갑다는 것은 이제 말씀이 속에서 고갈되기 시작해서 새로이 섭취할 필요가 있는 허기진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섭취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66권 말씀 모두가 우리의 영적 활동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허기진 사람은 속이 허하고 차가운 상태인데 그는 자기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알고 예전에 했던 대로 성경을 펼 것이다. 라오디케아인들은 이전에 배고파 본 적이 없고(있었다 해도 까마득한 옛날) 사회복음이나 자유주의라는 가짜 음식으로 적당히 배불러 있다. 그것들은 음식이 될 수 없는 불량식품인데 음식이라 생각하고 계속 입에 쳐넣고 있는 상태다. 개역성경과 개역개정을 보는 자들도 그것이 음식인지 똥인지 된장인지 알지 못하고 일단 배불러 보겠다고 계속 입에 집어넣는 사람들인데그들이 오늘날 대형교회, 중형교회, 개척교회 예배당을 메우고 있다.


성경이 다른 종교 경전들과 다른 특별한 것 하나가 있는데, 물론 차이점들은 많지만 여기서 말할 차이점은 이것이다. 


"배에는 쓰겠지만 입에는 달다" 이 말을 거꾸로 뒤집은 우리 속담이 있다. "양약은 입에 쓰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의 상식,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통념을 뒤집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거꾸로 적용하고 있어서 제대로 된 성경 공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성경 공부 자체가 "쓰디쓴 것", 곧 수고와 노력을 동반하는 고된 노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신학교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구하는 것, Ph. D를 받는 것, 원어를 공부하는 것, 이런 것들을 고된 수고라고 생각하고 그 고생 끝에 존경받는 목사 어르신이 되는 것을 "고진감래"라 생각하는 것 같다. 


자, 나는 서울대를 가기 위해 고진감래의 사자성어를 이마에 붙이고 공부하는 그런 일을 성경 공부와 같다고 취급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신학교 학위를 따기 위해 억지로 성경을 공부하고 있다면 그것은 한참 번지수가 틀린 일이다. 성경 공부는 노동이 아니라 안락한 쉼이요 노는 것이다. 여러분이 진정 이 세상에서 "놀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재미를 만끽하는 특이한 일"을 찾고 싶다면 신학교 문을 두드릴 게 아니라 곧장 <한글킹제임스성경>을 펼치고 공부를 시작하면 된다.


그녀에게는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도 예수의 발 앞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듣고 있더라. 그러나 마르다는 접대하는 일이 많아서 경황이 없더라. 그러므로 그녀가 와서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 동생이 접대하는 일에 나 혼자만 남겨 놓은 것을 개의치 아니하시나이까? 그녀에게 말씀하셔서 나를 도와주라고 하소서.”라고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며 수고하고 있으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못하리라.”고 하시더라(요 10:39-42).


당신이 해야 하는 성경 공부는 "예수의 발 앞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이 성경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평가하려고 건방진 폼을 잡지 말고 말씀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 입 다물고 먼저 들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 노동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경 공부는 마르다의 케이스이다. 그들은 사람들과 논쟁하고 토론하고 세미나 하고 이 신학 이론과 가설이 맞니 틀리니 옥신각신하는 것이 "성경 공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 분명히 말하지만 "소화작용"의 일환이다. 여러분이 말씀을 배부르게 먹었다면 영적 전쟁의 현장에 나가서 열심히 뿌리고 사용하는 그것이 소화시키는 일이다.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나가서 소화시킬 것은 없는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배꼽 시계에 "충분" 표시가 뜨기까지 꾸준히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적립하고 있었다. 마르다 같은 사람은 잠시 반짝 열성을 내다 끝나지만 마리아는 길고 오래 가는 평생 사역자의 길로 준비되는 케이스다. 


말씀을 소화시키는 과정에 "쓴 것"이 개입된다고 본문은 말씀한다. 입에는 꿀처럼 달았으나 배에는 "무엇처럼"이라는 건 없지만 문맥상 대단히 썼던 것이 분명하다. 말씀을 소화시키는 것이 왜 쓴 것인가? 여러분이 말씀을 자기 안에만 간직하고 표면화시키지 않는다면 이 쓴 경험을 할 일이 평생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선데이 크리스찬들은 말씀의 달콤함을 경험할 일도 없지만 말씀 때문에 배가 쓰라리고 아파볼 경험도 할 일이 없다. 그들은 아예 말씀을 먹는 것부터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바른 말씀을 집어서 먹었다면, 삼켰다면 그 말씀은 여러분에게 뭔가를 시킬 것이다. "너는 저 사람들에게 이것을 말하라, 저것을 말하라. 이렇게 저렇게 경고하고 꾸짖으라" 그런 작업 지시가 내려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결과를 기대한 적 없는 크리스찬들은 "저는 이 말씀들이 달콤했기 때문에 결과를 예상하지 않고 단순히 먹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이런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죠?"라고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여러분이 말씀을 발설하지 않고 속에만 숨겨둔다면 그 "영적 복통"은 점점 심해져서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 4:12).


말씀은 관상용이 아니라 사용되기 위한 것이다.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기에 가만히 한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 말씀이 지나가는 곳, 위치하는 곳을 소독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며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기운을 공급하고 말씀을 믿지 않는 자연인들에게 양심의 찔림을 주는 작용을 한다. 그런 작용이 일체 일어나지 않는 성경이 있다면(이를테면 개역, 개역개정, NIV, NKJV) 그 성경은 죽은 성경이다. 


10 그리하여 내가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책을 가져다가 먹으니, 내 입에는 꿀처럼 다나 먹고 나니 내 배에는 쓰더라.

11 그때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과 왕들 앞에서 다시 예언해야 하리라.”고 하더라.


여러분이 성경을 먹고 성경과 하나가 된다면 그때 형식적 교인들과 세상 죄인들은 여러분에게 "광신자"라는 딱지를 붙일 것이다. 그렇게 손가락질 당하는 빈도수가 높아질수록 여러분은 말씀의 순환 과정(먹고 소화시키고 먹고 소화시키는)을 원활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1절에서 좀 이상한 말씀이 나오는데 평범하게 이해하기에 난망한 구절이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사도 요한이 A.D.2000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이 땅에 와서 다시 예언해야 된다는 결론이 난다. 물론 나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쪽을 택하는데 "네가 많은 백성들과...예언해야 하리라."는 서술 안에는 어떤 난해하고 함축적인 상징이 아닌 평범한 사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천사가 요한에게 "너는 앞으로 다시 예언해야 될 거야"라고 했다면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다른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될 거라는 얘기다. 역사적으로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이후 팟모 섬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 지역에 은거하다가 조용히 소천했다. 그는 계시록 기록 후 특별히 눈에 띄는 활동 없이 조용히 노년을 보내다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구절에서 확실히 선택해야 한다. 이 천사가 요한의 여생 중에 이루어지지 않을 허튼 예언을 했다고 믿던지, 아니면 이 진술이 요한의 생애를 건너뛰어 주님의 지상 재림 직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던지.


분명히 알아야 된다. 사도 요한이 "많은 백성들과..."의 사건을 경험하는 일은 계시록 작성 이후 결코 발생하지 않았던 것을 알아야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성경의 "단단한 음식"이 제공되기 때문에 영적인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차라리 몰라도 상관이 없다. 내가 적그리스도와 유다 이스카리옷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온라인에서는 "저 자가 유다의 환생을 주장한다네, 하 하 하"라고 하는 비웃음의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을 실족시킬 생각으로 그 어려운 주제의 성경 구절을 들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은 거듭났더라도 영적인 수준이 바닥인 사람들이라서 조금만 어려운 말씀과 부딛치면 금방 실족하는 자들이었다. 진리는 진리 그대로 선포해야 하지만 연약한 자들을 고려하지 않고 실족시키는 방향으로 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계시록 강해의 제목 자체가 "초신자를 위한"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기도 하므로 11절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 한다. 또 여러분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억지로 이해하라고 말하지 않겠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이 땅에 와서 민족들 앞에서 예언해야 하는 책무를 부여받았다. 물론 요한은 이 시대 크리스찬들과 마찬가지로 변화된 육신, 능력 있는 몸을 갖고 내려올 것이기에 모세와 엘리야의 케이스와는 많이 다르다. 따라서 요한이 환란 기간 중 이 땅에 내려와 무슨 전파 사역을 하더라도 환란 성도들이나 14만4천 유대인들처럼 목베임 당할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그 외의 더 세부적인 사항들, 그가 언제 내려오느냐, 얼마 동안 예언하느냐, 어디서 사역하느냐, 사역하다가 또 휴거되는거냐 등등의 문제는 "나도 모르겠다". 성경이 말씀하신 것은 <요한이 환란 기간 중 이 땅을 방문한다>는 것까지만 있으니 그 이상의 상상력으로 멀리 나가지는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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