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로마서

킹제임스 성경 로마서 강해_11(롬 9:1-24)

작성자ourdailybread|작성시간14.05.23|조회수388 목록 댓글 1

 

 

9장은 사도 바울이 교회시대에 일시적으로 버림받은 상태에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 6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의 영적 씨, 이삭과 야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7절 이하에서 '에서'와 '파라오'의 사례를 들어 어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을 설명하는데, 칼빈주의는 여기서 완전히 빗나갑니다. 9장에서 언급된 인물들의 선택과 버림받음은 창세기 1:1 이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하나님의 상호 관계를 통해 '시간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볼때 칼빈주의 체계는 성경이 아닌 순전한 '철학적 추측' 하에 "만일에...면 어떠하겠는가?"란 가정법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이것은 칼빈이 전통을 성경보다 우위에 놓고 판단하는 로마 카톨릭 신학체계를 따랐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칼빈같은 이단자만이 모든 신학 체계를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 기원이나 가정, 가설과 더불어 시작함으로써 세워나갑니다. 모든 이단이 그런 식으로 시작됩니다.

 

<로마서 9:1-24>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노니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나에게 증거하는 것은

2 내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것이라.

3 육신에 따른 내 형제들,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랐겠노라.

4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주심과 하나님을 섬김과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조상이며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히 송축받으실 하나님이시라. 아멘.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에서 난 사람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7 또 아브라함의 씨라 하여 다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오직 이삭에게서 난 자만이 너의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이는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씨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이때쯤에 내가 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신 것이라.

10 그뿐 아니라 리브카도 한 사람, 곧 우리 조상 이삭에 의하여 잉태하였는데

11 (아직 자식들이 나지도 아니하였고 또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을 때에 택하심을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르시는 그분에 의해서 있게 하시려고)

12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고 하셨으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 함과 같으니라.

14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비를 베풀 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내가 가엾게 여길 자를 가엾게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러므로 원하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요, 달리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니라.

17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너를 세웠으니 이는 내가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이고 또 내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또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9 그러면 네가 내게 “어찌하여 그분께서 여전히 잘못을 찾고 계시며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하였느냐?”라고 말하리라.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음을 받은 것이 지은 이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할 수 있겠느냐?

21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

22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나타내시고 또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을 심히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시며

23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된 자비의 그릇들에게 그의 영광의 풍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면 어찌하겠느냐?

24 곧 우리에게니 그가 우리를 부르셨으되 유대인들 중에서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셨느니라.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노니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나에게 증거하는 것은

2 내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것이라.

3 육신에 따른 내 형제들,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랐겠노라.

4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주심과 하나님을 섬김과 약속들이 있고

 

1-2절, 바울은 '선한 양심'(행 23:1, 딤전 1:19), '거리낌 없는 양심'(행 24:16), '순수한 양심'(딤후 1:3)으로 하나님을 섬겨 왔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것은 동족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입니다.

그는 '큰 부담'과 '슬픔'으로 동족인 이스라엘의 당시 처지(A.D.70년 예루살렘 파괴 임박)와 성령 안에서 바라본 그들의 미래(2천 년 동안 이방을 떠돌며 구원받지 못함)를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고전 2:16)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그분께서 슬퍼하시는 것을 같이 슬퍼하고(마 23:37) 원하시는 것을 같이 원하게 됩니다(롬 11:26).

 

3절, 바울의 이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일정 부분 '모세'와 유사하며 이스라엘 민족의 흩어짐과 고난을 대변하는 모형적 인물임을 짐작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대환란 때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도입니다. 자세한 것은 사내아이(계 12:5)와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났다는 표현을 같이 연구해 보면(고전 15:8) 주의 기름부음 받은 이가 14만4천과 연관되고 사도 바울이 이 첫열매들(계 14:4)의 모형을 이룬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거든 간구하오니 주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서 나를 지워 버리소서.” 하니,(출 32:32)

 

4절, 문자 그대로의 '이스라엘인들'(유대인과 히브리인들)을 말합니다(렘 34:9). '양자 됨'(adoption)은 이스라엘 민족과 관해서 언급될 때는 그들이 조상으로 말미암아 혈통적으로 선택받은 민족이 된 것을 말합니다. 신약 교회 성도의 '양자 됨'과는 다른 형태인데(롬 8:15,23) 그들도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언약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하신 언약들, 모세와 맺은 '팔레스타인의 언약'을 포함합니다(출 34:27). 하나님께서는 아직 히브리인들과 맺을 한가지 언약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신약(new testament)의 부속인 새 언약(new covenant)를 맺어 그들에게 마음의 할례를 주는 것입니다(렘 4:4; 31:31, 히 8:8).

그들은 '율법'과 '하나님을 섬김'(성막)과 약속들(유업)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영원히 버림받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5 조상들도 그들의 조상이며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히 송축받으실 하나님이시라. 아멘.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에서 난 사람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7 또 아브라함의 씨라 하여 다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오직 이삭에게서 난 자만이 너의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이는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씨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라.

 

5절, '조상들도 그들의 조상', 신구약 성경은 유대인에 의해서 기록되었고 히브리어 마쏘라 원문은 유대인에 의해 보존되었습니다. 신약 또한 유대인의 이름을 가진 왕(제임스 왕)에 의해 영어로 보존되었습니다.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셨다, 그분은 다윗 왕가의 혈통인 마리아의 태에서 나셨고 그래서 정통 이스라엘 왕이 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예루살렘에서 천년 동안 유대인들 가운데서 통치하실 것입니다.

 

6절, '이스라엘에서 난 사람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이 말씀을 보자마자 올커니, 하고 '신약 교회가 곧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신학적 궤변을 들고 나오는 대체신학자들은 본문을 부주의하게 읽은 것입니다. 본문은 이방인 교회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고 이삭의 자손들이 정통 이스라엘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물려받는 팔레스타인 땅과 상관이 없게 됩니다. 오늘날 이스마엘 자손이라는 자들이 유대인을 쫓아내고 팔레스타인 땅의 권리를 찾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7절, '아브라함의 씨라'(히 2:16, 사 63:16) 하여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약속의 자녀'인 이삭만 이스라엘의 정통 계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인하여 네 눈에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말한 모든 것에 있어 그녀의 음성에 경청하라. 이는 이삭 안에서 난 자가 네 씨라 불릴 것임이라(창 21:12).

 

그렇기 때문에 '모슬렘'을 유대교, 기독교와 더불어 '아브라함의 축복'을 공유하는 3대 종교로 말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인데 모슬렘은 구약을 악용해서 이스라엘의 축복을 아랍인들에게 돌린 '도둑이요 강도'인 마호메트가 만든 모조품입니다(요 10:1). 

 

8절, 계속 언급되는 '자녀'는 이 땅에 어떤 신약교회,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던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양자'인 한 민족 이스라엘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저한 예표이고 이삭의 계보에 속한 자는 영적으로 말해서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과 같습니다.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이때쯤에 내가 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신 것이라.

10 그뿐 아니라 리브카도 한 사람, 곧 우리 조상 이삭에 의하여 잉태하였는데

11 (아직 자식들이 나지도 아니하였고 또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을 때에 택하심을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르시는 그분에 의해서 있게 하시려고)

12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고 하셨으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 함과 같으니라.

 

9절, 구약에서 '기적적인 출생'으로 태어난 인물 중 대표인 '이삭'은 그의 생애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예표로 가득 차 있습니다.

10-11절, 칼빈주의의 '창세전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구원론을 무너뜨리는 구절이 나오기에 주목해서 살펴야 합니다.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그들이 행할 일들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을 모르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셔서 열두 지파의 아비가 되게 하셨고 에서는 내보내셨습니다. 그렇다고 에서가 지옥에 가고 야곱은 구원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선택'은 암시되지도 않았고 단지 '이스라엘의 장자권'과 관련해서 에서는 배제되었다는 말입니다.

 

12절,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창 25:23)고 하신 대로 이루어졌는데 참된 예언이란 이처럼 '수학적 정확성'에 따라 반드시 성취되는 예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참 예언들은 2천년 이상 흘렀더라도 꼭 이루어지게 되어 있고 그것이 '노스트라다무스'나 '마야의 예언' 같은 무가치한 성경 모조품들과 성경을 구분하는 결정적 차이입니다.

 

13절,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에 대한 이유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들이 태어나고 자라서 행할 선악 간의 모든 일들을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말 1:2-3, 신 7:9-10).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야곱과 에서에 대해 아무것도 미리 결정하신 바 없으며 또, 에서를 미워하셨다고 해서 그가 지옥에 가도록 정해놓으신 것도 아닙니다. 그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길 육신적인 사람이었고 주님은 그것을 미리 아셨다는 말입니다.

 

14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비를 베풀 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내가 가엾게 여길 자를 가엾게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러므로 원하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요, 달리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니라.

17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너를 세웠으니 이는 내가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이고 또 내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또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9 그러면 네가 내게 “어찌하여 그분께서 여전히 잘못을 찾고 계시며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하였느냐?”라고 말하리라.

14절, 이제까지 언급한 바, '한쪽을 미워하였고, 한쪽은 사랑하였다'에 대해 혹시 오해가 있을까 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셔서 주의 일에 크게 사용하시고 어떤 사람은 일에서 제외하시는 것, 즉 '사람을 들어 쓰시는 주님의 선택'에 모순이 전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일에 합당한 사람을 들어 쓰시는데 이는 주께서 모든 사람의 속을 미리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철저히 사람을 선별해서 쓰시지 않았다면 성경은 오류 투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15절,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이 말씀은 '은혜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분명 이 구절은 "아무 이유없이 누구를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이 구절에 '이유없이 그렇게 하신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라는 식의 사사로운 주석을 덧붙이고 한술 더 떠서 그것을 영원한 구원에 연결짓는다 해도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의 모든 선함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할 것이며 내가 네 앞에 주의 이름을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자비를 보일 자에게 자비를 보이리라.” 하시니라(출 33:19).

 

16절, '원하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며...', 이 말 역시 칼빈주의자들이 극도로 악용하기 때문에 신경써야 합니다.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해야' 하고 그래야 은혜가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문자적, 교리적으로 향하는 대상은 이삭, 야곱, 에서, 파라오처럼 성경의 역사적 인물들이 각기 인생의 과정에서 주님의 선택을 받아 '사역했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영적으로 신약 성도에게 적용해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자비를 보여주시고 베풀기 원하시는데' 주께서 각 개인들에게 예수를 영접할 수 있는 기회와 상황을 적절히 주십니다. 누구도 그 한계를 뛰어넘어서 '순수하게 자기 의지의 행위로써', 구원을 성취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도 자기 의지로 '하나님께 강요해서, 강제로 그분이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할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칼빈주의의 '주권적 섭리 운운'과는 상관없이 구원 자체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상식적 진리입니다.

 

17절,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출애굽 당시 모세 오경도 존재하지 않았고 어떤 문서화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상황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하나의 인격체로서 언급되는데 이런 구절을 보면 성경 변개자들은 속이 뒤집힙니다. 그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수호하는 사람들을 '성경 우상숭배'라고 곧잘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경책'의 파피루스를 숭배하는 사람은 사실 배교자들입니다. 그들은 시내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높이 평가하고 오리겐의 신화적 칠십인역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합니다. 문서를 우상숭배하는 것은 그들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토록 보존되었다고 성경대로 믿습니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7).

오 주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세워졌나이다(시 119:89).

 

18절, 다시 한번 주님께서는 '원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신다'고 천명하시는데 주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이유는 분명히 그가 마음에 악한 계획을 품고 이스라엘을 핍박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의 '완악한 마음' 상태는 스스로 초래한 '자업자득'이었지 선한 생각을 품었는데 주님께서 악을 행하게 하신 게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은 주님께서 영문도 모르는 파라오를 몰아붙여서 그가 완악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것입니다.

 

19절, 우리는 이미 살펴봤기 때문에 오해하지 않지만 성경을 억지로 푸는 무식한 사람들(벧후 3:16)이 이런 성경 구절을 보고 칼빈주의나 어거스틴 신학 같은 헛된 것을 지어낼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다시 강조합니다.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음을 받은 것이 지은 이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할 수 있겠느냐?

21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

22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나타내시고 또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을 심히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시며

23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된 자비의 그릇들에게 그의 영광의 풍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면 어찌하겠느냐?

24 곧 우리에게니 그가 우리를 부르셨으되 유대인들 중에서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셨느니라.

 

20절, '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라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옥으로 보내진 칼빈주의 체계의 지옥 간 죄인에게서 나오는 항변이 아닙니다. 지옥에 간 모든 시대의 죄인들은 그런 변명을 할수 없습니다. 어떤 죄인도 창세 전의 주권적 선택과 섭리에 의해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기술한 본문의 '선택'은 전부 시간 속에 일어난 쓰심이었지 영원한 선택이나 유기가 아닙니다.

 

21절,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하고 있는데(렘 18:1-10) 인간이 가장 낮은 흙, 곧 바다 진흙(시 139:15)에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인간을 그릇으로 대비해서 설명합니다.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은 영원 전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흙도 없었고 그릇도 없었는데 다시 강조하지만 9장 전체의 '선택'이라는 단어는 시간 속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22절, '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은 역시 다시 강조하지만 '시간 속에서' 나타났고 악인들이 진노의 그릇이 된 과정을 보면, 파라오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에 정죄받듯이 이유가 있습니다. 

23절, 이 구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하여 '신약적 구원'을 받은 '자비의 그릇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 속에서 일어난 부르심과 선택이지 근거없이 된 것이 아닙니다.

24절,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셨다', 이 시대의 구원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받아 지체가 되는 구원입니다(롬 10:12).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고전 12:13).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예루살렘의화평 | 작성시간 15.01.19 대체신학이 뭐에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