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로부터 내 얼굴을 숨길 것이며, 내가 그들의 끝이 어떠한지를 보리라. 이는 그들이 매우 비뚤어진 세대며, 믿음이 없는 자녀임이라(신 32:20).
보라,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그 안에 정직함이 없느니라. 그러나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는 것은 1) 진리의 지식을 알기 위해서, 2) 실족하지 않기 위해, 3) 거짓 교리에 대항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지 않는 상태에서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자기 의'와 관련한 시험에 곧 부딛치게 되는데 욥이 빠졌던 혼란과 같은 혼란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성경의 어떤 곳에서는 사람의 의는 가치없다고 되어 있고 어떤 곳에서는 사람의 의를 보시고 인정해 주십니다.
어떤 단어가 성경에서 처음 사용된 용례는 아주 중요합니다. 구약에 '믿음'(faith)라는 단어가 몇번 등장하는지, 어떤 경우에 쓰였는지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믿음'이 등장한 구절은 위에 제시한 대로 신명기 32:20로서 그 구절에서는 부정적으로 쓰였습니다. "매우 비뚤어진 세대며 믿음이 없는 자녀"라는 것을 책망하는 데서 믿음을 언급했습니다. 두번째로 소선지서 중의 하박국서 2:4에서는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가르칩니다.
'자기 믿음'이란 '에녹의 믿음', '노아의 믿음', '아브라함의 믿음', '다윗의 믿음', 이런 구약 성도 각 개인의 믿음을 말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하나로 합쳐서 부를 이름이 구약 시대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그들이 구원받은 근거들이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예비함으로 구원을 얻었고 노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거나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노아는 할례를 받거나 안식일을 지킨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받은 적이 없으며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쳤더니 그의 의를 인정받았고 신약에서는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고 두려움으로 행하여 방주를 예비함으로 자기 집안을 구원하였으니, 그것을 통하여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에 의한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이삭을 제물로 드렸으니, 그 약속들을 받은 자가 그의 독생자를 드린 것이라(히 11:17).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믿음이 우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 구속을 믿고 단번에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걸렸고 그 완성 단계에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기 믿음'(아브라함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디모데가 바울로부터 전수받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는 달랐습니다.
또 어릴 때부터 네가 성경을 알았으니, 그 성경은 너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할 수 있느니라(딤후 3:15).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갔고 사람들에게는 은사들을 주셨다.”고 하셨느니라(엡 4:8).
'사로잡힌 자들', 즉 나사로(눅 16장)나 다윗, 아브라함(아브라함의 품, 눅 16장), 노아, 다니엘, 욥 같은 구약 성도들이 '음부'(스올)에 사로잡혀서 지하 낙원(paradise)이라는 곳에 머물렀는데 주님께서 지하세계를 통과하시면서 그들의 혼들을 사로잡아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게 될수 있었던 것은 낙원에 있던 구약 성도들은 '어린양의 보혈'이 뿌려지기까지만 거기 머물도록 되어 있었고 때가 되어 주님이 죽으시자 그들은 해방되어 셋째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은혜로 구원을 받는 이 신약 은혜 복음은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주의 천사'를 마므레 평지에서 만난 것은 사실이고 그 주의 천사는 구약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었습니다.
주께서 마므레 평지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더라. 그가 그 날 더울 때에 장막 문에 앉았다가,(창 18:1)
야곱은 주의 천사를 만나 밤새 씨름했으며 모세도 주의 형상(예수 그리스도)의 뒷모습을 보았고, 여호수아는 주의 군대대장 곧 만군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용광로 불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었습니다. 다니엘 또한 주의 천사를 목격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구약 성도들이 주의 천사를 보았고 특별히 에녹은 300년 동안 주와 동행했으니 그 구절을 '주의 천사'로 해석하면 홍수 이전의 날들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모양으로 땅에 자주 오고 가셨음을 짐작케 합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창 5:22)
그들은 주의 천사 곧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보라, 내가 보니, 네 사람이 풀려서 불 가운데서 걸어다니고 있는데, 그들이 다치지도 않았으며, 그 넷째의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도다.” 하더라(단 3:25).
'하나님의 아들'이 종종 사람들 앞에 나타나시곤 했기에 이방인인 느부캇넷살 왕조차 단번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이 구절을 개역성경은 이유없이 '신들의 아들'로 변개시켰습니다. 느부캇넷살이 이교도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없다고 생각해서인데 기원전의 이교도들은 현대 신학박사들에 비해 '하나님의 아들'이나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에 대해 더 박식했습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으며 발라암도 잘 압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이 그녀에게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아뢰기를 “주여, 주께서는 의로운 민족도 죽이시려나이까?(창 20:4)
이렇게 구약 시대의 이방인들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알고 있는데 그들은 왜 그분을 믿고 단번에 구원을 못 받았느냐 하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직 그분이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나셔서 그 몸에 하나님의 피를 담고 죽어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피가 흘려지지 않으면 죄사함이 없다.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그의 피로부터 몸된 교회가 탄생할텐데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된) 교회'는 구약 시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장차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지만 이방인들이 '교회'가 된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또 말씀하셨도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의 보존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 내가 또한 너를 이방인들에게 빛으로 주리니 네가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되리라(사 49:6).
예수 그리스도가 '이방인들의 빛'으로 주어지는 것은 꼭 신약 교회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천년왕국 때도 그렇게 된다. 천년왕국이 오면 사 49:6은 완벽히 이루어질 것이다. 교회시대인 지금은 부분적으로 성취되었고 일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빛으로 돌아왔다. 구약 선지자들은 교회시대를 보지 못하고 천년왕국을 곧장 예언하곤 했다. 교회시대를 예언할 때는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고난에 대해서 주로 예언했다.
내가 너를 이방 가운데 흩어 버리고 나라들에 너를 분산시키며 네 더러움을 네게서 소멸하리라(겔 22:15).
정리하자면, 구약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그들은 '자신의 의'를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쳐주시면' 구원받아 죽으면 낙원에 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불완전한 자기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온전케 되었고 그 순간 그들은 셋째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모든 구약 성도의 혼이 셋째 하늘로 올라가 거기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기 위해 낙원에서 대기해야 했지만 신약 그리스도인은 전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그의 혼은 정결케 되고 영은 거듭나며 하나님의 양자가 됩니다. 죽음을 기다릴 필요없이 구원이 확실해집니다.
너희는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 되는 영을 받았으므로 그에 따라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신약 성도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구약 유대인들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듭나지 못했고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과 거리가 있는 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경우는 '우리 민족의 창시자인 아버지'라 부를 때 뿐이었습니다.
그때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옵고,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오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눅 11:2).
바이블빌리버(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교회는 주기도문을 습관적으로 예배 시작이나 끝에 암송하지 않습니다. 간혹 그렇게 실행하는 자칭 바이블빌리버들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잘못 쓰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 아버지'로밖에 하나님을 부를 수 없는 구약 백성의 기도, 혹은 대환란 때의 하나님의 종들(유대인)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제, 오 주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우리의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만든 작품이니이다(사 64:8).
너희는 너희 아비의 일들을 행하는도다.”라고 하시더라. 그때 그들이 주께 말하기를 “우리는 음행을 통하여 나지 아니하였으며, 우리에게는 한 분 아버지가 계시니,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니(요 8:41)
계속해서 유대인들은 '우리의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 말을 위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민족적으로도 상관이 없게 되기에 오히려 영적으로 마귀의 씨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제도 개신교회에서 목사가 까운 입고 두 손 들고 거룩한 척 가장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주의 백성들을 축복해 주시옵고...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은 결국 유대 종교를 흉내낸 것으로 그 자들은 구약 성전을 모형으로 재현해서 '성전 놀이'를 하고 있는 서기관과 제사장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개신교가 등장하기 1천년 전부터 있었는데 '로마 카톨릭'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실제 제사까지 재현했는데 짐승 제사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매주 잡아서 정기적으로 십자가에 처형하고 살과 피를 뜯어 먹는 짓을 합니다. 그것을 미사(mass)라고 부르는데 지독한 신성모독이며 율법의 금기사항(피를 마시지 말라)입니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의 믿음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며 구원얻은 자의 신분도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것입니다. 구약 성도들보다 더 큰 특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요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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