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누구에게 있느냐? 슬픔이 누구에게 있느냐? 다툼이 누구에게 있느냐? 불평이 누구에게 있느냐? 까닭없는 상처가 누구에게 있느냐? 충혈된 눈이 누구에게 있느냐?
술에 빠진 자들에게 있으며, 혼합된 술을 찾아다니는 자들에게라.
술은 붉고 잔에서 빛을 내며 매끄럽게 내려가나니, 너는 술을 쳐다보지도 말라.
그것은 마침내 뱀처럼 물며, 살모사처럼 쏘리라.
네 눈이 타국 여인을 볼 것이요, 네 마음이 패역한 것들을 발설하리라.
정녕, 네가 바다 한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꼭대기에 누운 자 같으리라.
네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나를 쳤어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나를 때렸어도 나는 감각이 없었도다. 내가 언제 깨어날까? 내가 그것을 다시 찾으리라.” 하리로다(잠 23:29-35).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구약, 율법서와 선지서를 구원 교리로 취하지 않고, 사도 바울의 은혜 복음만을 구원의 근거 구절들로 취합니다. 구원 교리는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여기서 빗나가면 교리 체계를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지키지 않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데 구약 이스라엘은 지켜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계명을 무시하고 살아도 되는 것이겠습니까? 십계명은 지키면 땅에서 육신이 병들지 않고 복받을 수 있는 법입니다. 안식일만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기 때문에 예외이긴 하지만 안식일도 일주일에 하루는 휴식을 취하라는 명령으로, 연약한 육신 하에 있는 죄인은 정기적으로 휴식하지 않으면 오래 살 수가 없습니다. 안식일도 우리가 교훈으로 취할 수는 있지만 지켜야 하는 구원의 교리는 아닙니다.
이렇다 보니 어떤 그리스도인은 신약만 구원 교리라는 말을 오해해서 구약을 통째로 무시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많지만 음주 문제는 자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살펴보아야 합니다.
위에 언급한 잠언 구절들은 구약에서 음주에 대해 교훈으로 주신 말씀인데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받아 당대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되었음에도 술과 여자 때문에 말년에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솔로몬 왕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자전적 체험>으로 음주의 폐해를 가르치는 구절입니다. 교리로 취하지는 않는다 해도 우리는 이 의미에 유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신구약에서 가르치는 술에 대한 공통적 교리는 습관적 음주는 생을 망치는 것이니 시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당한 음주를 보편적으로 권면하는 교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즐거운 음주 생활을 하라고 권하는 구절로 오인되는 곳이 신명기에 하나 있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돈으로 살지니,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나 네 마음에 드는 것을 구하여 거기서 주 너의 하나님 앞에서 먹고 너와 네 가족과 더불어 즐거워할지니라(신 14:26).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년에 한번 술을 마시라는 허가인데 일반 백성은 마실 수 있지만 제사장은 성막에서 항상 섬기기 때문에 포도주나 독주가 금지되어 있습니다(레 10:9). 그리스도인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격이 아니라 제사장 격에 해당합니다. 베드로전서 2:9은 우리가 신약 제사장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만인제사장이라고 말하는데 성경 교리가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음주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실로 적용된다(교훈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14:26을 근거 삼아 술을 끊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으로 화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는 구절에서 허가를 끄집어 냈습니다.
그러면 신약에서 음주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역시 우리의 구원 교리와는 상관없이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잘 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셋째 날에 갈릴리 카나에서 혼인식이 있었는데 예수의 모친도 거기에 있더라.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혼인식에 초대되었는데
그들에게 포도주가 부족하므로, 예수의 모친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하니(요 2:1-3)
그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나 (그 물을 떠 온 종들은 알더라.)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신랑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나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었다가 사람들이 마신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는데 당신은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간직해 두었도다.”라고 하더라(요 2:9-10).
이 구절은 많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술에 대한 문제로 실족케 하는 걸림돌 구절이 되어 왔습니다. 본문의 영적 교훈과 교리는 발효된 포도주와는 정반대로 새포도주 곧 포도즙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고의로 오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제기하는 의문점은 단순합니다. 2장 9-10절이 의문 제기의 대상입니다. 기원 초의 팔레스타인에는 포도즙을 혼인잔치에 제공할 정도로 기술이나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불가불 발효된 것을 마셨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의 하나입니다.
두번째로는 현대의 관습적 의미를 적용해서 오래 묵은 술이 좋은 것이라는 의미를 본 구절에 덮어 씌웁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를 주관했던 그 사람은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었다가"라고 말했는데 그 좋은 포도주란 잘 발효된 고급 와인이었다는 식으로 독해합니다. 참으로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성경 본문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좋은 포도주는 발효되지 않은 것이었기에 파라오조차 그것을 즐겼습니다. 왕들이 마실 정도면 좋은 포도주는 포도즙이 아니겠습니까?
술 맡은 책임자가 자기 꿈을 요셉에게 이야기하였는데 말하기를 “보라, 내 꿈에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포도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는 것 같았는데 꽃이 피고, 그 포도송이에 익은 포도가 열렸더라.
파라오의 잔이 내 손에 있어, 내가 포도를 따서 파라오의 잔에다 즙을 짜서 그 잔을 파라오의 손에다 주었노라.” 하니,(창 40:9-11)
창세기는 한때 이집트 역사와 문화에 정통했던 모세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했는데 이집트 역사에 소상히 알지 못하면 창세기의 이런 구절을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포도주는 포도 송이에서 바로 따서 즙을 짜서 바로 마시는 포도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포도즙을 당시 사람들은 "술"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새 포도주"라 하지 "새 포도즙"이라 하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도 포도즙을 wine이라 부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성경이 주스와 술의 차이를 몰라서 그렇게 혼동했다고 착각하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새것"(신약)과 "구약"(구약)을 구분하기 위해서 그렇게 일관성있게 "술"로 표기한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붓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쏟아지고 그 가죽 부대도 망가지리라.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부어야 하리라.”고 하시더라(막 2:22).
새 포도주는 <포도의 순수한 피>라고도 불리우며 역시 실질적으로 송이에서 바로 짠 즙입니다.
소의 버터와 양의 젖과 어린양들의 기름과 바산에서 기르는 숫양들과 염소들과 기름진 밀알로 먹이셨으며, 또 너는 포도의 순수한 피를 마셨도다(신 32:14).
신 32:14는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카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족하게 마시게 될 새 포도주를 말합니다. 그곳의 포도 송이는 엄청나게 크기에 한국과 비교가 안됩니다.
또 그들이 에스콜 시내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 한 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그들이 둘 사이에 막대기로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도 가져왔더라(민 13:23).
포도 한 송이가 어찌나 크던지 한 사람이 들지도 못하고 가지채로 베어서 막대기로 꿰어 장정 두 사람이 메고 와야 했습니다. 포도 한 송이가 몇 kg 나가기에 이렇겠습니까? 그러니 그곳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새 포도주를 배터지게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나 누리던 호사였는데 그들은 카나안에서 파라오 부럽지 않게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배교했기에 그런 복을 제대로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 축복은 천년왕국 때 가서 이루어질텐데 주님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제부터 내가 너희와 함께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그 날까지 이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더라(마 26:29).
"새 것"은 요엘 3:18의 새 포도주와 같은 것으로서 재림 때 팔레스타인 땅은 온 땅이 새 포도주를 흘려낼 것입니다.
그 날에 산들이 새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에는 젖이 흐를 것이요, 유다의 모든 강들에는 물이 흐를 것이며 주의 집에서 샘이 흘러나와 싯팀 골짜기에 물을 대리라(욜 3:18).
새 포도주는 간과하고 넘어갈 게 아니라 천년왕국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누릴 축복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어 있고 주님께서 흘리신 하나님의 피는 당연히 "영원히 새 것"이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사용합니다.
주의 만찬에는 포도즙이 사용되어야 하는데 발효된 것을 쓰면 의미를 무시한 게 됩니다. 여기서 잘못 반론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언급해야 하는데 간단히만 합니다.
포도주스에 대해서 트집잡는 경우입니다. 대부분 오늘날 교회는 포도즙의 수급 어려움 때문에 저렴한 포도주스를 사용하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포도주스는 순수한 포도즙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물을 타서 희석시킨 것입니다. 게다가 인공 첨가물들과 색소도 들어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포도주스는 포도즙의 의미와 다르기에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엄격히 말하자면 포도즙을 써야 할 것입니다만 이것은 형편에 따라 주스를 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을 해야겠는데 포도즙을 못 구해서 못 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그렇다고 진짜 발효된 포도주를 사서 쓸 수도 없으니 간편하게 포도주스를 사용합니다.
사실 이런 논란의 이유 중 하나는 그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 중에 근본주의의 엄격한 금주 명령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있어서 "술의 해방"을 크리스챤들에게 선포하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가 묻어 있습니다.
우리가 신구약에 살펴보았듯이 음주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피해야 할 사항 중 하나입니다. 주의 만찬에 발효된 것을 들여놓는다면 세상 종교들, 카톨릭과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바울 서신서에서 음주에 대한 교리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앓는 질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
이와 같이 집사들도 신중하고, 일구이언하지 아니하며,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딤전 3:8)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비난받을 것이 없고 자기 고집대로 아니하며, 쉬 화내지 아니하고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딛 1:7)
이 정도로 압축할 수 있는데 "조금씩 쓰라"에 대해서는 예외 사항인데 먼저 살펴봅니다. 이 구절은 알콜 성분이 함유된 치료약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병원에서는 알콜 성분이 들어간 약들이 많이 사용됩니다. 그것들은 술이 아니라 치료를 위한 약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음주를 권하는 게 아니라 위장병을 낫게 하기 위해 포도주를 약으로 쓰라는 것입니다.
양식과 염치가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가까운 약국에 가서 소화제를 한 첩 사서 먹으면 될 것을 자기 소화 불량이라고 해서 내려가라고 맥주, 소주, 와인을 홀짝거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23을 근거로 해서 그런 실행을 정당화한다면 그 양심이 온전치 못할 것입니다. 유감이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약 교회의 직분자들, 집사들과 목사들은 "술에 인박이거나 술을 즐겨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교회법이고 마땅히 지켜야 할 준칙입니다. 목사가 술을 즐기면 감독의 직분에 대한 자격이 없습니다. 물론 많은 요즘 목사들은 이 명령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술을 즐기며 집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디모데전서 5:23이나 신명기 14:26을 근거로 해서, 또는 더 심각한 멍청이들은 마태복음 11:19, 누가복음 7:34를 근거로 해서 예수님도 술을 즐기셨으니 나도 마셔도 된다고 주장하고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이 구절들은 지금 넘어가겠지만 상식적으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주정뱅이였겠습니까?
"술을 즐기지 마라", 이 구절을 최소한의 음주는 하라고 해석하는 양심들에 화가 있을 것입니다. 술은 조금 즐기건 많이 즐기건 횟수가 거듭되면 곧 즐기는 것입니다. 억지로 마셔야 하는 사람들 말고 스스로 찾아다니며 즐긴다면 즐기는 것입니다.
"술에 인박이지 마라", 술을 즐기는 단계가 더 중독으로 넘어가면 마침내 인박이게 되는데 술을 즐기고 인박인 자들은 외적으로 볼때도 그런 사람으로 티가 나고, 대부분 그런 사람들은 성령 충만이 아닌 알코올 충만한 채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 자들에게 교회를 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음주는 신약 구원 교리와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경건을 해칠 수 있는 해로운 물건이기에 그리스도인은 멀리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