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삶에 다가가라」 - 빌 존슨 -
*주기도문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하나님의 뜻은 단지 이렇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아주 기초적이지 않은가? 신선하지 않은가?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뜻이 지금 바로 이곳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사는’ 방법이요, 삶이 변하고 사고의 틀을 부수는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소망을 비밀로 감추지 않으셨다. 그는 하늘의 현실이 반역으로 찢겨진 이 땅을 침노하여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모두 나아오기를 원하고 계신다. 하늘에 있는 기쁨, 평안, 지혜, 건강, 온전함,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모든 좋은 약속들이 이 땅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사업에, 그리고 우리 학교에 마음껏 펼쳐지길 바라신다. 하늘에 없는 것들, 즉 아픔과 질병, 영적인 속박과 죄는 여기서도 없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신자들에게 맡겨진 사명이요, 내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 된 많은 교회들이 이전보다 더 마음과 힘을 모아야 할 일이다. 우리는 마귀의 일을 멸하러 왔다. 이렇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라(렘 6:19).”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도구라고 말할 때 자주 주춤거리게 됨을 나는 이해한다. 교회 역사상 지적인 부분을 너무 높인 나머지 믿음으로 사는 삶의 방식을 완전히 무시했던 적이 종종 있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회의와 의심에 빠지도록 유혹을 받았다. 신학을 존중한 반면 신앙적인 면은 경시되었다. 학구적인 자세는 가장 먼저 초자연적인 체험을 몰아내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의 생각으로 무엇을 믿을지를 결정하지 않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신약에서 구원이 의미하는 단어에는 치유, 축귀, 죄 사함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천국은 인간 전체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가져오며 우리는 지금 당장 그 현실에 다가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애 동안에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들이 …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주님은 자신의 신성을 내려놓으셨다.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으로서 기적을 행하셨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 주시고 우리로 따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셨다면 우리 모두는 상당히 감명을 받겠지만 그를 따라하려는 마음은 결코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할 뿐 아니라 더 큰 일도 하라고 우리를 내보내신 사실을 보여주셨다는 점을 깨닫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워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요구하신 일을 하실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부르심의 성격이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이상을 하도록 요구받았다. 할 수 있는 일에만 계속 매달릴 때 우리는 결코 그 부르심에 응할 수 없다.
*우리 각자의 위에는 하늘이 열려있다. 이는 초신자로부터 가장 성숙한 신자에 이르기까지 다 포함한다. 하나님의 집이 된다는 말은 아버지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갖고 계신 모든 권세를 우리가 다 갖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의 ‘집’, 즉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육신이 되기 위한 신분과 능력을 전부 받았다. 바로 이 순간 그리스도인으로서 완전한 자유와 천국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지옥의 문은 대적에게 동의할 때마다 우리의 생각 가운데 있다. 우리가 인본주의적 관점이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적인 지혜에 동의할 때 우리는 대적에게 능력을 부여한다. 마귀적인 세력에게 힘을 실어줄 때 우리 삶에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케 하는 그의 권세가 흘러나가는 문이 서게 된다. 등골이 오싹하겠지만 성경은 이 말이 사실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표는 하늘과 항상 발을 맞추고, 우리 생각은 천사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를 띠고 자유롭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하늘 문이 되도록 하는데 있다. 이런 일들이 그냥 우리 마음에 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동의할 때에만 일어난다.
*이해되는 범위 안에서만 살 수 없다. 그렇다면 더 이상 성장이나 진보가 있을 수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되 우리는 늘 똑같은 길로만 간다. 불가능한 상황으로 나아가 답할 수 없는 의문을 갖게 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삶의 한 부분이고 그래서 그 삶을 ‘믿음’이라 부르는 것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신비의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올 계시의 중간에 끼어있다.
*생각을 새롭게 하기위해 우리는 다르게 생각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르게 살아야 한다. 즉 성령의 능력 주심을 새롭게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은 또한 설명을 하거나 정의를 내리거나 혹은 말로 묘사할 수 있기에 앞서 어떤 것에 순복함을 뜻한다. 성경적으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인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이해하기 때문에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해한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지적인 부분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않더라도 받아들이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을 읽을 때 읽는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성경적인 학습은 먼저 영에서 일어나고 성령께 순종할 대 우리의 영은 정신에게 알려주고 이 때 비로소 지적인 깨달음이 온다. 하지만 순종하기 위해 이해가 먼저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다 알지 못하면서도 성령의 계시나 충동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깨달음은 보통 체험 속에서 얻어진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이런 기도를 드렸다. “오, 하나님, 제 뜻을 가져가 주시옵소서!” 아마도 우리가 한 기도 중 가장 어리석은 기도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뜻과 의지를 평가절하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의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이다. 우리의 의지는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버리시면서조차 그것을 묵살하지 않으셨다. 우리들은 주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산 진주다. 독립적인 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인형이며, 프로그램이 된 장난감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연인이 되고 주님과 기꺼이 동역하는 동역자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과 동역할 때 우리의 생각과 말 그대로 역사의 진행 방향을 바꾼다.
*우리가 종종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고 종종 생각한다. 마치 우리 마음에서 나온 건 모조리 쓸어버리시는 야만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정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소원에 매료되신다. 주님은 무엇이 우리를 활기 넘치게 만드는지 보고 싶어 하신다. 그렇다. 주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를 알고 계시지만, 주님과의 사이에서 우리가 자신을 열어 놓을 때만 친하게 지내실 수 있다. 이때 쾌감이 흘러 나오고, 우리의 꿈과 소원이 주님과의 대화와 관계가운데 스파크를 일으키며, 참된 동역이 시작된다.
오랜 세월 난 성경이 말하는 소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시편 37편 4절은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