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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투스, 인간은 변할수 있는가?

작성자은혜의 날개|작성시간26.06.10|조회수432 목록 댓글 1

 중요한 종교적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언제나 우리의 사회적 형성이다. 우리의 생각과 확신들은 우리의 의식의 표면에서 떠다닌다. 

우리는 생각하는 피조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이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의사 결정이 우리의 윤리적 행위를 형성한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해 배웠다면, 우리는 사회경제적 구조와 심리적 현실들 역시 우리를 심원하게 형성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는 모두 빈곤이나 풍요 혹은 권력 관계에 의해 형성되며,부모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강력하다.

 그런데 프랑스의 반사적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런 현실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그가 `아비투스`(habitus)라고 부르는 보다 깊은 다른 동기를 지적한다.

 부르디외는 진정으로 우리를 형성하는 지식은 우리의 지적 지식이라기 보다는, 보다 철저하게, 우리 자신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신체적 지식`, 즉 우리의 몸이 지니고있는 "성향들의 체계"다.

 이 지식은 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훈련된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의 일을 수행하는 방식을 포함해 사회적 관습들에 의해 형성된다. 특히 부르디외는 우리의

식탁 매너, 즉 우리가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방식을 지적한다. 우리는 아주 이른 시기에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배운다. 그로 인해 그것은 우리의 두번째 본성이 된다.

 아비투스는 이야기들에 의해, 즉 우리의 문화를 떠받치는 큰 이야기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가족과 공동체의 작은 이야기들에 의해 강화된다.

 아비투스는 모범을 통해, 즉 우리의 삶에 대해 권위를 지니는 부모와 동료와 롤 모델들을 통해 더 많이 형성된다. 무엇보다도 아비투스는 반복에 의해, 즉 어떤 일들을 거듭해서 행함으로써 습관적이고  반사적이고 우리의 몸에 내재되는 순전한 신체성에 의해 형성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우리는 몸으로 배운다. ---가장 진지한 사회적 금지 명령은 지성이 아니라 마치 `메모리 패드` 처럼 취급되는 몸에 전해진다.---어떤 상황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고, 하지 말아서는 안 되는 다른 일들이 있다. 

 이 것은 가르쳐진 것이 아니라 흡입된 지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습득하는배움이다. 

 철학자 제임스 스미스가 부르디외를 따라 지적하듯이, `아비투스는 모호하고 암시적이고 교활한 방식으로 몸에 작용해 전인의 방향을 정하는 구체적인 교육에 의해

습득되고 학습된다.` 아비투스에 대한 학습에는 신체적 움직임(운동감각)과 상상력의 개입(시학)이 포함된다. 아비투스는 우리의 정체에 대한 가장 심원한 의식을 이룬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확신, 충성, 혐오를 형성한다. 또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리고 죽일(혹은 죽이지 않을) 것인가 하는 궁극적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답을 형성한다.

 부르디외에게 아비투스는 심원하다. 때때로 그는 아비투스가 사실상 고정된 인간의 자아의 일부라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자발적이고 고의적인 변화에 의해  영향받을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종교적 회심을 포함해 많은 형태의 변화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부르디외는 조심스럽게 아비투스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인정한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때때로 그들이 통제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생각하고 논의할 시간이 거의 없었던, 그리고 위협적인 힘과 상상하기

어려운 위험에 반응했던 상황속에서---그들이 자신들의 애초의 형성을 반영하지 않은 비인습적인 방식으로 행동했음을 보임으로써 이것을 알려준다. 

 그들은 제니퍼 글렌시 "신체적 불순응" 이라고 불렸던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이 그럴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적어도 한동안이라도, 종교적 변화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운동의 참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종교적 변화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이교도들의 생각만이 아니라 몸의 태도와 반사적 행동까지 변화시키려고 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리교육과 세례 이후에도 신자들의 사회적 반사적 행동 안에 심원한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연속성의 배선은 아주 단단했으나 완전히 굳어 있지는 않았다. 변화는 `유심론`에 사로잡혀 있는 역사가와 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으나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신체적 불순응은 가르쳐질 수 있었다.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배선을 어설프게 고치면서 혹은 심지어 훨씬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배선을 변경하면서 그 공동체의 회원이 되고자 했던 이들의 아비투스를 다음 두 가지 수단을 통해 변화시키려 했다.

하나는 가르침과 교제를 통해 후보자들의 행위를 다시 형성했던 교리교육 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아비투스가 육체적 우아함을 통해 시행되고 표현되었던 공동체의 궁극적인 반형성적인 행위인 예배 였다. 

기독교 공동체들이 이처럼 배선의 변경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공동체의 회원이 되고자 했던 이들의 삶 속에서 그들을 뒤흔들고, 충격을 주어 삶을 흐뜨러뜨리고, 하나님과 그들 자신과 세상을 보는 대안적 방법에

대한 비전을 제공했던 무언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알렌크라이더(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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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슬이 | 작성시간 26.06.10 아멘아멘!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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