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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법문

[스크랩] 불교학 연구회 17호 - 『지관대의󰡕에 나타난 담연 사상의 특색 /이 병욱(고려대 강사)

작성자妙法蓮華經|작성시간12.03.14|조회수142 목록 댓글 0

 

『지관대의󰡕에 나타난 담연 사상의 특색

                                                



이 병욱(고려대 강사)


Ⅰ. 서론: 담연 사상의 일반적 성격


형계담연(荊溪湛然, 711~782)은 당나라시기에 침체한 천태종의 세력을 일으키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담연은 화엄종과 선종이 득세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천태종의 장점을 널리 알리려고 하였다. 따라서 담연의 사상에는 화엄종과 선종에 대항하려는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담연 사상의 특징에 대해 다음의 5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1) 첫째, 『법화경』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2) 천태의 교판론은 5시8교로 정리되는데, 『법화경』은 화법사교(化法四敎)의 하나인 원교(圓敎)에 속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담연은 『법화경』이 화법사교와 화의사교(化儀四敎)를 초월하는 위치에 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는 천태종의 핵심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법화경』이 그만큼 우월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다른 종파보다 천태종이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성구설(性具說)을 확립하였다는 점이다.3) 일념에 삼천 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은 천태지의가 주장한 것이지만, 이 일념삼천설을 통해서 천태종의 독자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한 것은 담연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음에 삼천 가지가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악의 요소도 담고 있다는 성악설(性惡說)의 측면도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점은 다른 종파에는 없는 천태종의 독자적 측면이라고 담연은 주장한다.

셋째,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4) 담연은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진여(眞如)을 중심으로 하는 사유방식을 수용했고, 천태종의 사상을 화엄사상과 결합함을 통해서 더욱 정교하게 다듬으려고 시도했다.

넷째, 천태종의 수행법인 십승관법(十乘觀法)을 근기에 따라 구분하였다는 점이다.5) 그래서 상근기의 사람은 십승관법의 첫 번째 항목만 닦으면 되고, 중근기의 사람은 7번째 항목까지만 수행하면 되고, 하근기의 사람은 10가지 항목을 모두 닦아야 한다고 한다. 이는 실천수행의 측면을 명확히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법은 실천적 성향의 선종에 대항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섯째, 이관(理觀)과 사관(事觀)의 구분이다.6) ‘이관’은 일념심을 관조해서 원융삼제(圓融三諦)의 이치를 그대로 관조하는 것이고, ‘사관’은 분석의 도구를 통해서 간접적인 방법으로 ‘원융삼제’의 이치를 관조하는 것이다. 담연의 이관과 사관의 구분은 산가파(山家派)와 산외파(山外派)의 논쟁을 일으키는 단서가 되었다.

한편, 이 논문에서는 담연의 저술 가운데 『지관대의(止觀大意)』를 중심으로 담연 사상을 검토하고자 한다.7) 『지관대의』에서는 앞에서 소개한 5가지 특징 가운데 ‘이관’과 ‘사관’의 구분이라는 항목을 제외한 4가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논문에서는 그 가운데서 『법화경』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과 ‘성구설’을 확립했다는 점에 대해서 더 자세히 살펴보고, 기존의 연구에서 아직 지적하지 않은 점을 밝히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법화경』을 아주 높게 평가했다는 점과 관련해서는 『지관대의』에서 담연은 『법화경』과 원돈지관(圓頓止觀)을 하나로 보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래서 담연은 원돈지관이 법화삼매(法華三昧)의 다른 이름이라고까지 주장한다. ‘법화삼매’는 원래 원돈지관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이제는 이것이 원돈지관과 대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2장에서 설명함].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십승관법을 해석할 때 『법화경』의 「비유품」과 연결시키는 대목에서 분명히 나타난다[4장에서 설명함]. 담연의 사상에서 『법화경』을 중시하는 점은 기존의 연구에서 밝혀진 것이지만, 『법화경』과 원돈지관을 연결시키는 내용까지는 아직 밝히지 못하였다. 

그 다음으로 두 번째 ‘성구설’을 확립했다는 점과 관련해서 담연이 『지관대의』에서 독자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을 입체적으로 밝히기 위해서 『지관대의』를 중심으로 해서 『금강비(金剛錍)』와 『시종심요(始終心要)』의 내용도 아울러 검토하고자 한다8)[3장에서 설명함]. 이 논문에서는 기존의 연구를 넘어서『지관대의』와 『금강비』와 『시종심요』를 통해서 담연의 성구설의 특징을 검토하고자 한다.  

 

Ⅱ. 『법화경』을 강조하는 시각:『법화경』과 원돈지관의 결합


담연은 『법화경』과 원돈지관(圓頓止觀)을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천태지의의 경전해석의 관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 자세한 내용을 살펴본다.

우선, 담연은 원돈지관이 법화삼매(法華三昧)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한다.9) 그리고 담연은 원돈지관의 십승관법(十乘觀法)을 설명할 때 『법화경』의 「비유품」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원돈지관과 『법화경』의 내용은 하나로 해석된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5방편과 십승의 관법[軌行]은 곧 원돈지관(圓頓止觀)을 말하는 것이니 [원돈지관은] 완전히『법화경』에 의지한 것이다. [따라서] 원돈지관은 법화삼매(法華三昧)의 다른 이름[異名]일 따름이다. 만약 이 원돈지관의 삼매를 닦고자 한다면 원교의 십승관법을 갖추어한다. [그 때서야] 바야흐로 원행(圓行)이라 이름한다. [『법화경』의] 「방편품」의 가르침은 문장이 비록 간략하지만, 「비유품」의 큰 수레의 비유라면 [내용전달에는] 충분하다.10)


또한, 담연은 『법화경』과 십승관법을 연결시키는 것[법화삼매]이 천태종의 전통이라고 주장한다. 천태종의 이론은 용수(龍樹)로부터 시작되었고, 혜문(慧文)은 시조가 아니라 다만 천태종의 조사 가운데 한 사람일 따름이고, 남악혜사(南嶽慧思)와 천태지의(天台智顗)에 이르러 법화삼매로 인해서 이론과 실천의 체계가 갖추어졌다고 담연은 말한다. 천태지의는 모든 경전을 해석할 때 오중현의(五重玄義)로 열 가지 의미가 드러나게 해석하여 이론과 관법(실천)이 서로 통하게 하였다고 한다. 담연은 이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태종[今家]의 교문(敎門)은 용수(龍樹)가 시조가 되고, 혜문(慧文)은 다만 옆에 있으면서[시조가 아님] 안으로 관조하여[內觀] 보고 들었을 따름이다. 남악(南嶽)과 천태(天台)에 이르러 다시 법화삼매(法華三昧)로 인해서 다라니(陀羅尼)를 일으키고, 의문(義門)을 개척하고 관법(觀法)을 두루 갖추게 하였다. 그리하여 [천태는] 모든 경전을 해석할 때 오중현의[五重]로 십의(十義)를 현묘하게 해석하여 관법과 융통하게 하였다.11)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내용은 『지관대의』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담연의 다른 저술에서도 발견된다. 담연의 저술인『금강비(金剛錍)』에서도 담연은 십승관법이 법화삼매의 근본임을 밝히고 있고, 이 법화삼매로 인해서 정인불성(正因佛性), 연인불성(緣因佛性), 요인불성(了因佛性)이 활용되고 드러나며, 이러한 점이『법화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12) 

그리고 앞에서 말한 ‘오중현의’는 석명(釋名), 출체(出體), 명종(明宗), 변용(辨用), 판교(判敎)이다. 그리고 열 가지 의미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먼저 도리가 고요하고 인식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할 수 없고 의논할 수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둘째, 천태종의 교판론인 5시8교를 통해서 모든 불타의 가르침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셋째, 경전과 논서의 내용이 모순되고 어긋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에는 사실단(四悉檀)을 사용해서 의미를 통하게 한다. 넷째, 집착하려는 마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다섯째, 가르침을 바르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수행경지를 파악하는 데 불타의 가르침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혼동하지 않게 한다. 여섯째, 구절에 대한 해석을 자유롭게 창의적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단락의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곱째, 단락과 절을 나눌 때, 단락과 단락의 연결, 절과 절의 연결을 원활하도록 한다. 여덟째, 문장을 해석할 때 문장의 당연함에 의지한다. 아홉째, 번역한 말은 의미가 통하고 모양새가 옹색하지 않게 잘 선택한다. 열 번째, 구절을 해석할 때 이관(理觀)을 제시해서 관법(觀法)과 연결되도록 한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리(道理)가 고요하여 [대상이] 사라져서 생각할 수 없고 의논할 수 없음을 먼저 밝힌다. 하나의 고요한 이치[一寂理]는 나눌 수 없는 것이지만 [방편으로] 나누고 [이 이치는] 모든 체(諦)를 벗어나기도 하고[離] 나열하기도 한다[開]. 말하자면, 4가지 사제(四諦)이고, 7가지 이제(二諦)이며, 5가지 삼제(三諦) 등이다. 그리하여 [2제, 3제, 4제 등으로] 체(諦)의 숫자가 늘거나 줄거나 간에[若開若合] 방편[權]과 진실[實]의 도리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한다. 둘째, 교문(敎門)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는] 빙빙도는 가르침[槃: 돈교와 점교]과 우뚝 솟은 가르침[峙: 삼장교․통교․별교․원교]을 바로 잡고, 비밀스러운 가르침[비밀교]과 드러난 가르침[부정교]을 망라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점교, 돈교, 부정교, 비밀교, 삼장교, 통교, 별교, 원교이다. 이 8교(八敎)의 의미를 안다면, [부처님이] 한 시대 동안 육성으로 가르치고 교화한 도(道)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경전과 논서가 모순되고 말과 의미가 서로 어긋난다. 그래서 [서로] 마음을 통하게 할 수 없고 널리 알지 못하게 한다. [이처럼] 옛날부터 집착해서 논쟁하는 것이 대(代)를 이어서 그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천태종[今]에서는 사실단(四悉檀)의 의미를 활용해서 모든 막힘을 트이게 하고, 긍정[拔]과 부정[擲]이 자유롭다. 넷째, 집착을 잘 깨뜨리는 것이다. [이는] 모든 구절을 잘 활용해서 집착하려는 마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깨뜨릴 대상인 번뇌[惑]는 단순구조[單]와 복합구조[複]로 이루어져 있으니[具足] 말 없이 [번뇌를 깨뜨림을] 추구해야 한다. 다섯째, 법문을 바르게 적용한다. [그 내용을 자세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수행의 지위를 결정하는 데는 가르침[敎]에 의지하게 하며, 닦음[修]에는 방편이 있어서 수행에 의지하게 한다. 그리고 증득함에는 단계가 있으므로 현인(賢人)의 경지와 성인(聖人)의 경지를 혼동하지 않게 하여 증상만(增上慢)의 허물을 면하게 한다. 여섯째, 한 구절을 종(縱)과 횡(橫)으로 자유롭게 해석하지만, 계통[綸緖]과 순서[次第]를 따라서 분명하게 장(章)을 이룬다. 일곱째, 장(章)을 나누고 단락을 구분할 때 내용[鉤銷: 갈고리와 큰 호미]이 서로 이어지게 한다. 그래서 문세(文勢)를 트이게 하고 법도[冠帶]가 생기게 한다. 여덟째, 경전의 문장을 해석할 때 의미가 이치의 당연함[理當]을 따르도록 한다. 아홉째, 번역한 말[方言]은 그 이름과 의미가 옹색하지 않게 한다. 열째, 하나 하나의 구절에 이관(理觀)을 제시해서 관법[觀]과 연결되도록 한다[消通]. 그래서 경전의 내용이 심인[印心]과 합하여서 수행을 이루게 하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보배만을 세게 하지는 않는다. 만약 『법화경』을 해석할 경우라면, 방편과 진실, 근본과 자취를 더욱 잘 알아야 수행이 설 것이다. 이 『법화경』만이 묘(妙)라고 불릴 수 있으니 이것에 의지해야만 관법[觀]의 의미가 설 수 있다.13)

  

이상 소개한 10가지는 불교학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준다. 이 10가지는 3종류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경전의 문헌학적 해석을 모색하면서도 둘째, 그것이 공허한 훈고학적 해석으로 연결되지 않고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며, 셋째, 5시8교라는 천태교판론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 번째 내용에서『법화경』을 예를 들고 있는 것을 통해서 『법화경』을 강조하는 담연의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Ⅲ. 성구설(性具說)의 새로운 관점: 관불사의경(觀不思議境)의 해석


담연의 관불사의경 해석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3장에서는『지관대의』,『금강비』, 『시종심요』를 연결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장에서는 우선 담연의 관불사의경 해석은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담연은 마음[心]과 성품[性]을 구분하고 있는데, 마음은 삼천 가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고, 성품은 삼제(三諦)를 간직하고 있으며, 이 성품에 간직되어 있는 삼제는 삼관(三觀)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면 자세한 내용을 살펴본다.

담연은 『지관대의』에서 관불사의경을 관조하는 대상과 관조하는 쪽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마하지관』의 구분법이 아니고 『유마경현소』의 구분법이다. 그러면서 마음에 강조점을 두면서 이 마음에 모든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 담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근기가 닦는 일법(一法)은 관불사의경이다. [觀不思議境에서] ‘불사의경’이 관조하는 대상[所觀]이 되고, 관(觀)이 관조하는 쪽[能觀]이 된다. 관조하는 대상은 어떤 것인가? 현실세계[陰界入]는 물질[色]과 마음[心]을 벗어나지 않고, 물질은 마음으로 생겨난 것이어서 전체세계[全體]가 마음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삼계에는 다른 존재가 없고 다만 한 마음이 지은 것이다”고 하였다. 이 만들어 내는 주체[能造: 마음]가 모든 존재, 곧 번뇌가 있는 것[漏], 번뇌가 없는 것[無漏], 번뇌도 아니고 번뇌가 없음도 아닌 것[非漏非無漏] 등과 원인[因], 결과[果], 원인과 결과도 아닌 것[非因非果] 등을 간직하고 있다.14)


  한편,『지관대의』에 나타난 관불사의경(觀不思議境)의 해석에서 화엄사상의 영향이 엿보인다. 그래서 담연은 모든 마음과 인식의 대상[塵]과 국토는 그 근본에서 보자면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므로 동일한 것이지만, 현상세계에서 보자면 분명히 다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 하나의 마음에 모든 마음이 들어 있고, 하나 하나의 대상에 전체의 대상이 들어 있으며, 하나 하나의 마음에 모든 대상이 들어 있고, 하나 하나의 대상에 모든 마음이 들어가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현상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관점에서 담연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근본에서는 동일하지만 현상에서는 다르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일즉일체(一卽一切)는 천태지의의 『마하지관』에서도 나타나는 것이지만, 『마하지관』에서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표현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15) 그에 비해 담연은 ‘일즉일체’와 무자성(無自性)을 연결시켰고, 이러한 대목은 화엄사상의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16)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 하나의 마음에 모든 마음이 들어 있고, 하나 하나의 티끌[인식의 대상: 境]에 모든 티끌[境]이 들어 있으며, 하나 하나의 마음에 모든 티끌[境]이 들어 있고, 하나 하나의 티끌[境] 가운데 모든 마음이 들어 있으며, 하나 하나의 티끌[境] 가운데 모든 국토[刹土]가 들어 있다. 모든 국토[刹土]와 티끌[境]도 다시 이와 같다. 모든 존재와 모든 티끌[境]과 모든 국토[刹身]는 그 근본은 분명히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다. 자성이 없는 것[無性]이 본래모습[本來]이지만 사물[物]에 따라 변하다. 그러므로 상입(相入: 無自性)하지만 사(事)가 항상 나누어진다[근본에서는 동일하지만 현상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의 몸과 마음과 국토[刹土]와 티끌[境]이 두루 하다. 모든 부처와 중생의 경우도 그렇다. 하나 하나의 몸과 국토도 그 근본이 항상 동일한 것이지만 어찌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다르게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이처럼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다르기 때문에 번뇌의 연[染緣]과 청정한 연[淨緣]으로 갈리게 된다.17)


그리고 담연이 말하는 일념삼천설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담연의 『금강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금강비』에서 담연은 일념삼천설을 설명하고 있다. 담연은 일념이 삼천 가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이구삼천(理具三千)’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성품 속에 삼천 가지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지, 실제로 삼천 가지가 성품 안에 들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러한 삼천 가지는 성품 가운데 이치[性中理]이다. 이 삼천 가지는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상(實相)이기 때문이다. 성품과 삼천 가지의 관계에서 보자면, 성품은 삼천 가지와 함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잡되지 않으며, 성품은 삼천 가지에서 벗어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품이 삼천 가지와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실상의 존재방식이라는 것이 담연의 주장이다.18) 이 내용에 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내[담연]가 말한다. 천태종[一家]에서 주장한 불사의경(不思議境)은 일념 가운데 이치로 삼천을 갖추는 것이다[理具三千]. 그러므로 생각 가운데 원인과 결과, 범부와 성인, 대(大)와 소(小), 의보(依報)와 정보(正報), 자(自)와 타(他)가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변한 곳이 삼천 가지가 아님이 없다. 그러나 이 삼천 가지는 성품 가운데 이치[性中理]이므로 있음[有]과 없음[無]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있음과 없음이 저절로 드러난다[自爾]. 그 까닭은 무엇인가? 모두 실상(實相)이기 때문이다. 실상은 원래부터 모든 존재[諸法]를 갖추었다. 모든 존재는 원래부터 그러하고, 성품은 본래부터 무생(無生)이다. 그러므로 비록 [모든 존재에는] 삼천 가지가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성품은 삼천 가지와] 함께 하지만 잡되지 않으며, [성품은 삼천 가지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삼천 가지와] 구분되지 않는다. 비록 [성품은] 하나하나에 두루 하지만 또한 있는 곳이 없다.19) 

  

또한 『지관대의』에서 담연은 심(心)과 성(性)을 구분하고 있다[앞의 『금강비』의 인용문에서도 心과 性의 구분을 암시하고 있다]. 앞의『금강비』의 설명곧 일념에 삼천 가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이구삼천(理具三千)’에 따른다면, 마음[心]은 모든 가능성 곧 삼천 가지 가능성을 간직하게 된다. 이 마음을 담연은 변하지 않지만 연(緣)을 따르는 것[不變隨緣]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품[性]은 인연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내용은 변하지 않는 것[隨緣不變]이라고 한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관조할 때 심성(心性)을 관조하는 것이라 이름한다. 연(緣: 외부의 조건)을 따르지만 변하지 않으므로 성품[性]이라 하고, 변하지 않지만 연(緣)을 따르므로 마음[心]이라 한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 말하기를 “심성(心性)을 관조할 수 있는 것을 최상의 선정[上定]이라 이름하고, 최상의 선정을 제일의(第一義)라 이름하며, ‘제일의’를 불성(佛性)이라 이름하고, ‘불성’은 비로차나(毘盧遮那)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 ‘비로차나’의 성품에 3가지 불성을 갖춘다. 비로차나가 두루 하기 때문에 3가지 불성도 두루 하다.20)

이러한 설명을 가지고 『시종심요』에 적용하면 담연의 관불사의경 이해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담연은 『지관대의』에서 심(心)과 성(性)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마음[心]은 『금강비』의 설명을 추가한다면 삼천 가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理具三千]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을 『시종심요』에 적용할 수 있다. 우선,『시종심요』에서는 성품에 삼제(三諦)가 간직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시종심요』에서는 마음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앞에서 설명한『지관대의』의 내용[心과 性의 구분]과 『금강비』의 내용[마음이 삼천 가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을 빌려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마음[心]은 삼천 가지를 가능성으로 간직하고 있고, 성품 속에 3제가 간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설명이 허용된다면, 이는 천태지의의 관점과는 구분되는 것이고, 따라서 담연의 독자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시종심요』에서 성품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자.


대저 삼제(三諦)는 천연(天然)의 성덕(性德)이다. 중제(中諦)는 모든 존재를 통괄하는 것이고, 진제(眞諦)는 모든 존재를 없애는 것이며, 속제(俗諦)는 모든 존재를 세우는 것이다. [삼제 가운데] 하나를 들면 곧 3가지가 되는 것이어서 [이 삼제에] 앞뒤의 순서[前後]가 없다. [이 삼제는] 중생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것이고, [새롭게] 만들어서 얻은 것이 아니다. 슬프다! 비밀스럽게 간직된 것이 드러나지 않는구나. [그 원인은] 대개 삼혹(三惑: 無明․塵沙․見思)에 의해서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명’은 법성(法性)을 가리고, ‘진사’는 교화하는 작용[化導]를 장애하고, ‘견사’는 공적함[空寂]을 막는다. 그러나 이 삼혹이란 것도 근본에서 생겨난 허망스런 존재일 따름이다[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21) 


나아가 담연은『시종심요』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중생의 성품 안에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지만, 중생은 망상으로 인해서 이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삼관(三觀)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삼관으로 인해서 3가지 미혹을 깨뜨리고, 그래서 3가지 지혜를 증득하며 3가지 덕(德)을 얻는다고 말한다. 담연은 『시종심요』에서 삼제와 삼관에 대해 간략하지만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시종심요』의 문장으로 보아서는 삼관과 삼제는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이지만, 구분하자면 삼제는 중생의 성품 안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고, 삼관은 중생의 성품 안에 있는 삼제를 끌어내는 것이다. 삼관의 역할에 대해 담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때 부처님[大覺慈尊]이 한숨을 쉬며 탄식하며 말하기를 “진여계(眞如界) 안에는 중생과 부처라는 가명(假名)을 끊었고, 평등한 지혜 안에는 자기[自]와 남[他]이라는 형상이 없지만, 다만 중생이 망상(妄想)으로 인해서 스스로 증득하지 못하고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지 못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삼관을 세우고 삼혹(三惑)을 깨뜨리며 삼지(三智)를 증득하고 삼덕(三德)을 이루었다. 공관(空觀)은 견사(見思)의 미혹을 깨뜨려서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하여 반야의 덕(德)을 이루는 것이다. 가관(假觀)은 진사(塵沙)의 미혹을 깨뜨려서 도종지(道種智)를 증득하여 해탈의 덕을 이루는 것이다. 중관(中觀)은 무명(無明)의 미혹을 깨뜨려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증득해서 법신의 덕을 이루는 것이다.22)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담연의 관불사의경 이해는 마음과 성품을 구분하고, 마음은 삼천 가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고, 성품은 삼제를 간직하고 있으며, 삼제는 삼관을 통해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담연은 관불사의경의 내용을 『법화경』의 「비유품」에서 “그 수레는 높고 넓었으며, …… 도량에 이르렀다 [其車高廣 乃至道場]”고 말하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23)


  

Ⅳ. 십승관법과 『법화경』의 결합


담연은 『지관대의』에서 원돈지관과 『법화경』을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는 십승관법과 『법화경』을 연결시키는 대목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십승관법의 첫 번째 항목인 관불사의경과 『법화경』의 「비유품」을 연결시킨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고, 나머지 9가지 항목(2개의 항목은『법화경』의「비유품」과 연결시키지 않았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담연이 십승관법과 『법화경』의 「비유품」과 연결시킨 대강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추론된다. 높고 넓은 수레에 여러 가지 장식품으로 꾸미고 빠르게 달리며 여러 사람이 수레를 호위하고 이 수레를 타고 사방을 돌아다닌다는 점을 십승관법의 의미에 비유한 것인데, ‘높고 넓은 수레’는 십승관법의 핵심인 관불사의경에 비유하였고, 나머지 7가지는 관불사의경의 보조적 위치에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한편,『지관대의』에서는 상근기는 관불사의경 하나만 닦으면 되고, 중근기는 2번째 항목에서 7번째 항목을 닦으면 되며, 하근기는 10가지 항목 모두를 다 닦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체관의『천태사교의』에서 십승관법과 『법화경』을 연결시키는 것도 담연의 주장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담연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① 자비의 마음을 일으킨다[起慈悲心]


관불사의경에서 깨닫지 못했으면 발심(發心)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그 내용은 사홍서원(四弘誓願)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생이 끝이 없으나 모두 구원하기를 서원하고, 번뇌가 무수히 많지만 모두 끊기를 서원하며, 가르침이 끝없이 많지만 모두 알기를 서원하고, 부처님의 도(道)가 가장 높은 것이지만 궁극에는 이 도를 이루기를 서원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홍서원을 통해서 홀연히 깨달음을 얻는다. 담연은 이 대목을 『법화경』의 「비유품」에서 “수레의 덮개를 마련한다[張設幰蓋]”고 말한 것에 결부시키고 있다.24)


② 마음을 편하게 한다[安心]


마음을 편하게 하는 대목은 두 단락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총괄적인 것[總]이고, 다른 하나는 부분적인 것[別]이다. 총괄적인 것부터 살펴보자. 법계(法界)가 편안히 머무는 곳[所安]이 되고, 고요히 비추는 것[寂照]이 편안히 하는 쪽[能安]이다. 여기서 고요하다는 것[寂]의 의미는 번뇌와 생사의 본래 성품이 청정함을 아는 것이고, 비춘다는 것[照]의 의미는 본래의 성품이 공(空)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번뇌와 생사도 ‘법계’라고 이름한다. 이 법계에는 체(體)와 용(用)이 서로 드러나는데, 법계가 ‘체’이고, ‘용’은 고요히 비추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부분적인 것[別]을 살펴본다. 앞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고 했지만, 중생의 시작 없는 습성[無始習性]이 같지 않기 때문에 어떤 중생은 그 마음이 더욱더 어두워지고 산란해진다. 그래서 중생의 근기[성품]에 따라서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담연은 안심(安心)의 내용을 『법화경』의 「비유품」에서 “붉은 베개[수레 안에 있는 것]를 잘 둔다[安置丹枕 卽車內枕也]”고 말한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25)


③ 모든 번뇌와 미혹을 완벽하게 깨뜨린다[破法遍]


부처님의 가르침에 여러 가지 구분이 있어서 8만4천 가지로 구분할 수 있지만, 무생(無生)이 불타의 가르침에서 으뜸이 된다. 파편법(破法遍)은 이 무생문(無生門)에서 모든 번뇌와 미혹을 완벽하게 깨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무생문’에서 다른 가르침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파법편의 내용을 『법화경』의 「비유품」과 연결시켜서 “그 빠르기가 바람과 같다[其疾如風]”고 말하고 있다.26)  


④ 막히고 트인 부분을 안다[識通塞]


비록 생사와 번뇌가 막힌 부분[塞]이고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이 트인 부분[通]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다시 한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트인 부분에서 다시 막힌 부분이 생기면 이 막힌 부분은 반드시 깨뜨려야 할 것이고, 막힌 부분에서 트인 부분을 얻었다면 이 트인 부분은 잘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편의 장수[將]가 도적[賊]이 된다면 우리편의 장수라 할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고, 도적이 우리편의 장수가 된다면 이 장수를 공격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면 막힌 것이 되고 막힌 부분을 깨뜨리면 트인 부분이 된다. 이러한 논법에 따르면, 막히고 트인 것을 구분하는 데 한 가지 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의 마음을 쓰는 것에 따라 막히고 트인 것의 구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식통색(識通塞)에 대해 담연은『법화경』의 「비유품」에서 “붉은 베개[수레 바깥에 있는 것]를 잘 둔다[安置丹枕 卽車外枕也]”고 말한 것과 연결시킨다.27)


⑤ 도품으로 다듬는다[道品調適]


앞에서 소개한 ‘파법편’을 두루 해보았는데도 이치에 대해 더욱 어두워진다면, 7가지의 도품(道品)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듬어야할 것이다. 7가지의 도품은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이다. 이 가운데 사념처는 몸, 느낌, 마음, 법(法)에 대해 삼제(三諦)의 이치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담연은 정의한다.   

그러면 몸을 관조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몸은 물질[色法]이므로 법성색(法性色: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보는 물질세계)이 다음과 같다고 관조한다. 하나의 색(色)이 전체의 색(色)이고[一色一切色], 전체의 색이 하나의 색이며[一切色一色], 하나와 전체를 관조하며[雙照一一切], 하나와 전체가 아니라고 관조한다[雙非一一切]. 따라서 주관과 객관이 둘이지만 둘이 아니고, 삼제와 삼관이 3가지이지만 3가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一]와 전체[一切]를 관조하는 측면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둘이지만, 하나[一]와 전체[一切]가 아니라고 관조하는 측면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제와 삼관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앞의 관불사의경에서 설명한 것이다. 사념처의 나머지 3가지와 도품의 나머지 6가지는 이 내용에 근거해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품조적(道品調適)에 대해 담연은『법화경』의 「비유품」에서 “커다란 흰 소의 수레가 있다[有大白牛等]”고 말한 것과 연결시킨다.28)


⑥ 조도(助道)로 다스린다[助道對治]


앞에서 소개한 6가지가 바른 수행[正行]인데, 이 바른 수행을 하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현상의 악[事惡]이 이치의 선[理善]을 덮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치의 선[理善]은 법계에 항상 머무는 것이고, 현상의 선[事善]은 현상의 6바라밀이며, 이치의 악[理惡]은 미세한 무명이고, 현상의 악[事惡]은 6바라밀을 막는 번뇌이다. 그리고 이 6바라밀을 막는 번뇌는 탐욕[慳貪], 파계의 마음[破戒], 성냄[瞋恚], 게으른 마음[懈怠], 어지러운 생각[亂想], 어리석음[愚癡]이다.

한편, 수행자가 지관을 수행하기 때문에 6가지 현상의 악[事惡]이 현재의 순간에 드러난다. 이처럼 6가지 악을 간직하고 있지만 안으로 뛰어난 법[勝法: 佛性]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스스로 이 뛰어난 법과 항상 상응한다고 말한다. 만약 이 뛰어난 법과 상응한다면 법신(法身)과 같을 것이고, 장소를 가릴 것 없이 가르침이 중생의 근기에 맞을 것이다. 만약 이 뛰어난 법과 잠시 상응한다면, 다시 현상의 악[事惡]을 일으켜서 도무지 이러한 이치의 선[理善]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처가 되는 것과 중생이 되는 것은 서로 방해가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먼저 현상의 6바라밀[事度]을 닦아서 현상의 악[事惡]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현상의 악이 사라지면 이치의 선[理善]은 생겨난다. 이 때문에 수행자는 이치의 선[理善]이 밝아지는 것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담연은 조도대치(助道對治)의 내용을『법화경』의 「비유품」에서 “또한 하인이 많은데 이들이 모시고 있다[又多僕從 而恃衛之]”고 말하는 대목과 연결시키고 있다.29)


⑦ 수행단계를 안다[知次位]


하근기는 장애가 두터워서 바른 수행[正行]과 도움이 되는 수행[助行]으로도 지혜가 밝아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증상만(增上慢: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잘못 생각하는 교만)의 허물을 일으킨다. 그래서 자신이 부처의 경지와 같다고 생각하거나, 아직 얻지 못한 경지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증득하지 못한 경지를 증득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때에는 수행의 단계를 알아서 자신의 경지를 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담연은 지차위(知次位)의 내용을 『법화경』의 「비유품」에서 “수레를 타고 사방에 노닌다[遊於四方]”고 말하는 대목과 연결시키고 있다.30)


⑧ 역경과 순경을 감당한다[安忍]


앞에서 수행의 단계를 알았다고 해도 역경(逆境)과 순경(順境)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안인(安忍)의 수행이 필요하다. 원돈(圓頓)의 수행인이 처음에 수행단계 가운데 외범(外凡: 오품제자위)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바깥에서는 명리(名利)가 유혹하고, 수행자의 마음에서는 과거생(過去生)의 장애가 꿈틀거린다. 설령 ‘과거생’의 장애가 얇아진다고 해도 외부의 ‘명리’는 그럴수록 더욱 거세어진다. 그래서 수행자는 중생에게 둘러싸여 자신의 수행을 놓치게 된다. 이 때에는 수행자는 더욱 노력해서 내부와 외부의 유혹을 넘어서야 한다. 그리하여 수행단계 가운데 내범(內凡: 十信의 단계)의 지위에 들어가게 된다.31) 그리고 안인(安忍)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담연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는 다르게 『법화경』의 「비유품」과 연결시키고 있지 않다.


⑨ 불법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離法愛]


앞에서 설명한 안인(安忍)의 경지가 상사위(相似位)인데, 이 지위에만 오로지 머문다면 이것이 법애(法愛)이다. 만약 수행해서 ‘법애’를 벗어난다면 이는 동륜(銅輪: 전륜성왕)의 지위에 도달한 것인데, 이것이 10주(十住)이다. 이 경지에서는 백계(百界)에 몸을 나누어 나타낼 수 있고, 하나[一]와 전체[多]가 서로 즉(卽)할 수 있다. 10주의 첫 번 째 단계인 초주(初住)의 단계는 이미 『화엄경』의 「현수품(賢首品)」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32)

이처럼, 이법애(離法愛)의 경지를 『화엄경』의 「현수품」에 근거해서 말하는 점에서 담연의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법애’에서도 담연은 『법화경』의 「비유품」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다. 



Ⅴ. 결론


이 글에서는 『지관대의』에 나타난 담연 사상의 특색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담연사상의 특징은 5가지이고, 『지관대의』에서는 그 가운데 2가지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그 내용은 기존의 연구에서 아직 지적하지 못한 점이다. 우선, 담연이 『법화경』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점이 『지관대의』에서는 『법화경』과 원돈지관(圓頓止觀)을 연결시키고 있는 점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담연이 ‘성구설’을 확립하였다는 점은 『지관대의』를 중심으로 『금강비』와 『시종심요』를 종합해 볼 때, 마음[心]과 성품[性]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이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2장에서는 담연이『지관대의』에서『법화경』과 원돈지관을 연결시키고 있는 대목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담연은 원돈지관이 법화삼매(法華三昧)의 다른 이름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원래 ‘법화삼매’는 원돈지관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천태지의의 『마하지관』을 보면, 원돈지관은 25방편, 4종류 삼매, 10경10승관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법화삼매는 이 가운데 4종류 삼매의 한 가지였다. 그러던 것이 담연에 와서는 법화삼매가 원돈지관이라고 하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 이는 담연이 그만큼 『법화경』을 중시한다는 점과 통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담연은 천태지의가 모든 경전을 해석할 때 이론과 실천을 서로 통하게 한 대목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 자세히 말하자면, 천태지의는 오중현의(五重玄義)로 사용해서 열 가지 의미가 드러나게 하였고, 그래서 이론과 실천이 서로 통하게 하였다고 담연은 말한다. 이 열 가지 의미의 큰 줄거리는 경전의 문헌학적 해석을 추구하면서도 경전의 이해가 수행과 연결되도록 추구한다는 점이고, 여기에다 5시8교라는 천태교판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점을 추가할 수 있다.

3장에서는 담연의 관불사의경 해석[性具說]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담연은 마음과 성품을 구분하고 있는데, 마음은 삼천 가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고, 성품은 삼제(三諦)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삼제는 삼관(三觀)을 통해서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지관대의』, 『금강비』, 『시종심요』를 연결시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담연은 『지관대의』에서 관불사의경을 관조하는 대상과 관조하는 쪽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천태지의의 『유마경현소』의 구분법을 받아들인 것이다. 관조하는 대상인 마음은 모든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을 그의 다른 저술『금강비』에 맞추어서 보면, 일념(一念)이 삼천 가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이구삼천(理具三千)’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지관대의』에서 담연은 심(心)과 성(性)을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면, 마음[心]은 모든 가능성 곧 3천 가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고, 성품[性]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성품에 대해 『시종심요』에서는 삼제(三諦)가 간직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마음은 삼천 가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고, 성품은 삼제를 간직되어 있다는 주장으로 정리된다. 나아가 『시종심요』에서는 삼제(三諦)와 삼관(三觀)을 구분하고 있다. 삼제는 중생의 성품 안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고, 삼관은 중생의 성품 안에 있는 삼제를 끌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4장에서는 십승관법 가운데 9가지를 소개하고[한 가지는 3장에서 소개하였음], 그것과 『법화경』의 「비유품」과 연결시킨 대목에 대해 검토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7가지와 연결시키고 있고, 나머지 2가지와는 연결시키고 있지 않다. 하지만 크게 보아서 담연이 원돈지관과 『법화경』을 연결시키고, 그 구체적 증거로서 십승관법의 내용과 『법화경』의 「비유품」을 연결시키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다음의 한계점이 있다. 담연의 관불사의경 해석을 검토할 때, 『지관대의』, 『금강비』, 『시종심요』를 중심으로 하였는데, 다른 문헌도 더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담연의 십승관법 이해가 천태지의의 십승관법 이해와 차이점이 있는 대목이 있는데, 그 세밀한 차이점에 대해서도 밝히지 못하였다. 이 논문의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주제어 

법화삼매(法華三昧, fa-hua san-mei), 『시종심요(始終心要, Shih-chung hsin-yao)』, 오중현의(五重玄義, wu-ch'ung hsüan-i), 삼제(三諦, san-ti), 삼관(三觀, san-kuan), 십승관법(十乘觀法, shih-sheng kuan-fa)


Chan-jan's Thoughts in Chih-kuan ta-i (止觀大意)




                             Lee, Byung-Wook


This paper aims at proving the characteristic of Chan-jan's thoughts in Chih-kuan ta-i(止觀大意). It is divided two part. At first, Chan-jan says that yuan-tun chih-kuan(圓頓止觀) and Fa-hua ching(法華經) are the same. So he suggests that yuan-tun chih-kuan(圓頓止觀) is an alias of fa-hua san-mei(法華三昧). Accoding to Chan-jan, the theory and practice are completed by fa-hua san-mei(法華三昧). This point is appeared concretely in that Chan-jan connects shih-sheng kuan-fa(十乘觀法) and Fa-hua ching(法華經).

At second, Chan-jan presents a new viewpoint hsing-chü shou(性具說). Chan-jan divides hsin(心) and hsing(性). Hsin has three thousand possibility and hsing has san-ti(三諦). This san-ti(三諦) in hsing is appeared through san-kuan(三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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