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희의 한국어문화문법
문학박사 / 김인희
한국어문화문법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지 1년이 지났다. 중부대학교 최태호 교수의 『한국어문화문법』에 대한 책을 읽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강의실에서 같이 수강하는 대학원생들은 외국에서 온 원생들이 90% 이상이었다. 필자는 외국에서 온 원생들과 같이 공부하면서 가깝게 지내고 싶었다.
필자가 먼저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필자는 한국인으로서 외국인 원생들에게 여러 면에서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시(詩)를 배우고 시낭송 발표할 때 외국인 원생들이 필자에게 시를 녹음해 달라고 했을 때 필자의 목소리로 시낭송 녹음을 해주었다. 외국어 시험을 보고 종합시험을 볼 때도 지도 교수님의 허락을 받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자연스럽게 외국인 원생들과 친근해졌고 여러 번 점심 식사했었다.
외국인 원생들이 한국어가 어렵다고 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인들이 뜨거운 목욕탕에 들어가서 ‘아, 시원하다’라고 하거나 뜨거운 콩나물국을 먹으면서 ‘어, 시원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최태호 교수의 『한국어문화문법』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외국인 원생들의 어려움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외국인 원생들과 지내면서 한국어문화문법이 중요성과 필요성을 실감했다.
문화문법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영어로 Culture-Grammar라고도 하고 Ethos-Grammar라고도 한다. 문화를 문법에 적용하는 것, 혹은 관습이나 집단의 기질을 문법에 적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문화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문화 속에서 생성하고 사용한 언어를 아는 것이 언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어문화문법을 잘 알면 한국어를 잘 알고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필자는 한국어문화문법 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박경리의 <土地>에 나타난 한국어문화문법』을 연구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에 한국어문화문법을 검색하다가 전율했다. D에서는 필자가 카페에 탑재한 글이 첫 번째 자리에 있었다. N에서는 학술논문으로 필자의 논문이 공개되었다. 부족하다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뒤얽히고 쥐구멍을 찾아 숨고 싶었다. 그렇게 뒤척이며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에 대담하게 발자국을 남긴 것을 대견하다고 자위했다. 부끄러워하지 말자고 자위했다. 한국어문화문법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글을 쓰자고 다짐했다. 덕향문학회 편집국장으로서 회원들의 원고를 편집할 때마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나타내는 어휘에 사로잡혔던 기억을 되살렸다.
덕향문학회 회원들의 작품 속에 있는 한국어문화문법을 찾고 글을 쓰면서 어휘의 의미는 《국립국어원의 표준한국어사전》을 참고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한국어사전》에 없는 어휘나 관용구와 속담은 《우리말샘》을 참고했다. 최태호 박사의 『한국어문화문법』과 최기복 박사의 『인성 그리고 효』, 『빛은 꺾이지 않는다』가 밝은 등대가 되었다.
한류열풍의 기류를 타고 한국어의 위상이 급부상하고 있다. 한국어문화문법의 연구가 빛을 발할 절호의 기회다. 한국어, 그 순결한 언어로 내 아름다운 조국 대한민국을 노래하리라.
[한국어문화문법 차례]
| 번호 | 한국어문화문법 | 작가명 | 출처(작품명) |
| 1 | 경칩과 개구리 | 윤창기 | 경칩을 기다리며(詩) |
| 2 | 고무신(검정 고무신) | 홍성도 | 검정 고무신(詩) |
| 3 | 누룽지 | 최기복 | 누룽지의 전설(詩) |
| 4 | 다듬이(다듬이질) | 진은정 | 다듬이질 소고(詩) |
| 5 | 버선(버선발) | 이현애 | 벚꽃 연가(詩) |
| 6 | 상견례(相見禮) | 김인희 | 상견례(隨筆) |
| 7 | 서대문형무소, 심우장 | 강석희 | 심우장 가는 길(詩) |
| 8 | 서동과 선화 | 김종천 | 가을이다(詩) |
| 9 | 소쩍새 | 신영 | 소쩍새 우는 밤(詩) |
| 10 | 송편 | 황해숙 | 송편을 빚으며(隨筆) |
| 11 | 시조(시조창) | 윤경숙 | 연가를 쓰다(詩) |
| 12 | 요강 | 유순희 | 어머니(詩) |
| 13 | 월남전(베트남 전쟁) | 김종열 | 모내기 시절의 추억(詩) |
| 14 | 6·25 전쟁(한국전쟁) | 노인기 | 포화가 피워낸 붉은 장미(小說) |
| 15 | 정월 대보름 | 홍원표 | 정월 대보름(詩) |
| 16 | 찜질방 | 송일호 | 찜질방에서(詩) |
| 17 | 청국장 | 나영순 | 청국장이 끓을 때(詩) |
| 18 | 툇마루 | 이은순 | 그 여름(詩) |
| 19 | 한가위(추석) | 김성수 | 보름달처럼 가득 채우는(詩) |
| 20 | 효(孝) | 최기복 | 신효(新孝)의 미학(칼럼) |
1. 경칩과 개구리
경칩을 기다리며 / 윤창기 詩
경칩을 기다리며 윤창기 임인년 3월 경칩을 기다리는 개구리 떼 청개구리 황소개구리 금개구리 식용 개구리 똥개구리 왕왕거리며 울어댄다. 개구리는 웃고 있어도 울음으로 들리는 이유를 모른다. 누가 왕 개구리가 될까 초조한 관심 속에 멍들어 가는 민심 어째서 봄은 와도 꽃이 될 날은 아득하기만 할까 |
한국어문화문법 : 경칩과 개구리
「명사」 이십사절기의 하나. 우수(雨水)와 춘분(春分) 사이에 들며, 양력 3월 5일경이다. 겨울잠을 자던 벌레, 개구리 따위가 깨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시기이다. ≒계칩.
예문 : 입춘 추위에 선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말도 있지마는 엊그제 우수, 경칩 다 지나고 이제 내일모레면 청명이 성큼 다가오는데도…. ≪최명희, 혼불≫
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는 우수와 경칩을 지나면 아무리 춥던 날씨도 누그러짐을 이르는 말이다.
경칩은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로 우수(雨水)와 춘분(春分) 사이에 있다. 24절기는 기본적으로 태양의 궤도인 황도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정해지므로 양력 날짜에 연동된다. 경칩은 우수로부터 15일 추가되는 날로 대개 3월 5일이나 6일이다. 경칩은 얼음이 녹으면서 땅 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벌레들이 천둥소리에 놀라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다는 날이다. ‘경칩’이라는 말은 원래 계칩(啓蟄)이라는 말이었으나 기원전 2세기 중국 전한의 6대 황제였던 경제(景帝)의 이름이 유계(劉啓)여서, 황제 이름에 쓰인 글자를 피해서 쓰는 동양 전통에 따라 '계'자를 '놀랄 경(驚)'자로 바꾸어 '경칩'이라는 말로 변경되었다. (다음 백과 인용)
개구리 하면 청개구리에 관한 우화가 생각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알 만큼 잘 알려진 이야기다. 옛날에 어머니의 말을 거꾸로 행동하는 청개구리가 있었다. 엄마가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면 왼쪽으로 가고, 윗마을에 가서 놀라고 하면 아랫마을에 가서 놀았다. 어머니는 항상 아들 청개구리를 생각하면 속상하고 걱정이 되었다.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는 아들 청개구리를 생각하다가 ‘내가 죽은 후 무덤을 냇가에 만들면 안 되는데. 옳지, 내 무덤을 냇가에 만들라고 하면 산에 만들겠구나.’ 하고 어머니는 아들 청개구리를 불렀다. 그리고 어머니가 죽으면 무덤을 냇가에 만들라고 하고 숨을 거두었다. 아들 청개구리는 어머니를 잃고 슬피 울다가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어머니 말씀에 거꾸로만 행동해서 어머니를 걱정하게 했다는 것을 반성하고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서 어머니의 무덤을 냇가에 만들었다. 아들 청개구리는 비가 오면 어머니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걱정하며 슬피 울었다.
윤창기 시인 시 <경칩을 기다리며> 3연에 “누가 왕 개구리가 될까 / 초조한 관심 속에 멍들어 가는 민심 / 어째서 봄은 와도 / 꽃이 될 날은 아득하기만 할까”라고 했다. 시의 첫 행에 ‘임인년 3월’에서 임인년은 2022년이다. 2022년 3월 9일에 대선이 있었다. 시인은 경칩 절기에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개구리를 시제(詩題)로 경칩을 기다리는 시인의 시심(詩心)을 노래했다. 누가 왕개구리가 될까 던지는 의문 속에 멍든 민심을 달래줄 지도자를 간절히 기다리는 소망이 꽃이 될 날은 아득하기만 하다는 독백 속에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체념의 실루엣을 드리우고 있다.
본고를 쓰는 2025년 8월은 왕개구리가 퇴장하였다.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되었다. 윤 시인의 <경칩을 기다리며> 시의 마지막 행에서 꽃이 될 날은 아득하기만 하다는 허밍이 쓸쓸하다. 민심은 이리저리 시달리느라 온몸이 멍들었다. 시퍼렇게 멍든 가슴 부여잡고 다시 경칩을 기다린다. 간절한 소망이 꽃으로 피어서 아름다운 빛과 향기로 세상을 수놓을 날은 언제 올까.
2. 고무신(검정 고무신)
검정 고무신 / 홍성도 詩
검정 고무신 여산 / 홍성도 짚신에 길들여진 발 호강에 겨워 새끼를 감고 마른논에 지푸라기 축구공을 찬다 장날 구멍을 때운 검정 고무신이 펑크가 나도 하늘에 떠 있는 축구공의 꿈 내 소년의 기억 저편에 머문다 가난이 축복이었던 전설 질긴 타이어 코트사의 운명도 엿목판 위에 시(詩)가 되었던 추억도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울리면 넋을 놓았던 유년 검정 고무신은 내 로망이었다 |
한국어문화문법 : 검정 고무신
고무신 : 「명사」 탄성 고무로 만든 신. ≒고무화, 호모화.
관용구 : 고무신(을) 거꾸로 신다
(속되게) 여자가 사귀던 남자와 일방적으로 헤어지다.
예문 : 남자 친구가 군대에 가자마자 그녀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다른 남자를 사귀었다.
검정 고무신은 시인만의 로망이 아니다. 6·70년대를 살았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고무신에 대한 향수를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TV로 <검정 고무신> 만화영화가 방영된 적 있다. 국내 제작 만화영화로 검정 고무신의 시대적 배경은 1960년대 후반이고 공간적 배경은 서울 마포구에 살고 있는 대가족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가족 이야기다. 주인공 형제가 등장하는데 형 기철이는 중학생, 동생 기영이는 초등학생(국민학생)이다. 일반적으로 만화영화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데 어린 자녀들과 함께 필자도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즐겨 시청했다.
필자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때는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썼다. 필자는 꽃 그림이 있는 알록달록한 꽃고무신을 신었는데 남학생들은 대개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남학생들은 체육 시간에 축구할 때 검정 고무신을 신고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여름에는 방과 후에 학교 근처에 있는 냇물로 달려가서 물놀이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 검정 고무신에 물을 조금 담고 잡은 물고기를 넣어 두면 고무신 안에서 물고기들이 헤엄쳤다.
최태호 교수의 책 『한국어문화문법』을 읽고 ‘한국어문화문법’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다. 책에서 최 교수가 한국어문화문법의 예로 제시한 문장이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라는 문장이었다.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는 의미는 남자 친구가 군대에 갔을 때 여자 친구가 마음이 변하여 다른 남자를 사귄다는 의미이다. 최 교수는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라는 의미를 외국인 학생들에게 물으면 의미를 모른다고 했다. 한국의 고무신 문화와 군사문화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필자는 최 교수의 ‘한국어문화문법’ 이론을 받아들이고 연구하여 『박경리 <土地>에 나타난 한국어문화문법』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필자가 중부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대학원생의 90% 이상이 외국인이었다. 실제로 그들과 같이 수강할 때 한국어가 어렵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한국인이 뜨거운 목욕탕에 들어가서 ‘아, 시원하다.’하고 하는 경우, 뜨거운 콩나물국을 먹으면서 ‘어, 시원하다.’라고 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하여 필자는 최 교수의 ‘한국어문화문법’을 널리 알리고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외국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홍성도 시인은 <검정 고무신> 시를 쓰면서 유년 시절로 가는 타임머신을 타고 한껏 향수에 젖었으리라. ‘가난이 축복이었던 전설’이라는 시귀(詩句)가 절절하게 와닿는다. 지난 시절 돌아보면 가난했을지언정 불행하지 않았다. 물질문명이 넘치는 현실이 풍족하지만 행복의 무게는 가난했던 시절보다 무겁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홍 시인은 행복한 사람이다. 시를 쓰면서 검정 고무신을 신었던 유년을 떠올리며 로망이었노라 유유자적하며 허밍을 하고 있지 않는가. 홍 시인은 멋을 아는 풍류 시인이다!
3. 누룽지
누룽지의 전설 / 최기복 詩
누룽지의 전설 부근 / 최기복 무쇠 밥솥 아랫부분에 누워 열기에 굳어져 가는 육신을 고추 세워 본다. 익혀져 가는 밥알과 태워져 가는 누룽지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숨죽이며 기다리는 순간 내 유년은 지나고 보니 행운이었다. 고소한 누룽지 맛은 전설이 되고 고향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무심한 얼굴이 되었다. 고향을 묻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움은 유죄 가난은 무죄다. |
한국어문화문법 : 누룽지
「명사」 ① 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 ② 눌은밥
관용어 : 평생소원이 누룽지 - 기껏 요구하는 것이 너무나 하찮은 것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예문 : 그녀는 밥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닥닥 긁었다.
어제저녁 솥에 남아 있던 누룽지를 끓여서 한술 뜨고 난 을생은 넋을 놓아 앉아 있었다. ≪한수산, 유민≫
필자가 어렸을 때다. 아침에 부엌에서 어머니가 누룽지를 긁는 소리에 잠에서 깨곤 했다. 언니와 여동생과 셋이 한이불 속에서 자다가 어머니가 누룽지를 긁는 소리가 들리면 잽싸게 뛰어나가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누룽지를 세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 뭉쳐서 고사리 손안에 주었다. 누룽지에 얽힌 일화는 필자의 전유물이 아닐 것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가마솥에 밥을 하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진 포근한 향수라고 생각한다.
누룽지는 ‘깜밥’, ‘깐밥’, ‘깡개밥’, ‘깡개’, ‘누룽갱이’, ‘가마치’ 등의 사투리로 불린다. 필자가 어렸을 때 ‘누룽갱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실제 사전을 찾아보니 누룽지의 경기 방언이라고 나온다. 경기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에서도 사용한 방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당에서 천자문을 공부하던 학동들이 ‘하늘 천 따 지 가마솥에 누룽지’라고 떼창을 하는 모습은 누룽지에 대한 전설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가마솥에 눌은 누룽지에 물을 넣고 끓인 물을 숭늉이라고 했다. 온가족이 두레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은 다음 어머니가 커다란 대접에 떠온 숭늉은 구수한 맛이 났다. 누룽지가 많이 타면 숭늉의 색깔이 거무튀튀했고 누룽지가 많이 타지 않으면 우윳빛이 도는 숭늉이었다. 숭늉이 담긴 대접 바닥에는 물에 부른 밥알이 있었다. 숭늉을 마실 때 입안으로 들어오면 밥알도 같이 먹고 숭늉을 다 마신 후 대접 바닥에 있는 밥알은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나 배고픈 적은 없었다.
지금은 대부분 가정에서 전기밥솥에 밥을 짓는다. 가마솥밥 전문 식당이나 돌솥밥 식당에서 누룽지를 먹을 수 있다. 누룽지의 구수한 맛이 인기가 있어서 마트에서 포장된 누룽지를 살 수 있다. 더러는 다이어트 식품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고소한 누룽지나 숭늉을 즐길 수 있도록 가정용 누룽지 제조기가 판매되고 있다.
최기복 시인은 시 <누룽지의 전설> 3연과 4연에서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 숨죽이며 기다리는 순간 // 내 유년은 / 지나고 보니 행운이었다.”라고 노래한다.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칭얼대던 어린아이 적 시인이 보인다. 어머니는 행운의 여신이다. 세월의 뒤안길에서 그리움에 전율하면서 시인은 읊조린다. 그리움은 유죄라고. 그리움의 극치에 독자들도 눈시울을 붉힌다. 누룽지의 전설이 주는 감동이 이토록 절절한 그리움일 줄이야!
4. 다듬이(다듬이질)
다듬이질 소고(小考) / 진은정 詩
다듬이질 소고(小考) 진은정 사랑은 타악기의 리듬이다. 정(情)이 한(恨)이 되고 한(恨)이 정(情)이 되는 소리 닭이 횃대 위에서 기지개를 켜도 다듬이질 멈출 줄 모른다. 새벽 사립문을 밀고 들어오는 한량 그의 몸에서 나는 향수 내음 버선발로 뜨락을 내려서는 아낙의 눈길에서도 소리가 난다. 기다림의 분노가 일어도 밤새 엮인 통증으로 허리가 아파도 다소곳이 숙여진 아미 위에 어린 연민 아침나절 입고 나간 도포자락에서도 다듬이질 소리가 들린다. |
한국어문화문법 : 다듬이(다듬이질)
「명사」 옷이나 옷감 따위를 방망이로 두드려 반드럽게 하는 일. ≒다듬이, 다듬질. ‘다듬이’는 어간에 ‘-이’가 붙어서 명사로 된 것은 그 어간의 원형을 밝혀 적는다는 규정(한글 맞춤법 제19항)에 따라 ‘다드미’로 적지 않고 ‘다듬이’로 적는다.
▲ 다듬이 어원 : <다이<박언>←다-+-이
예문 : 다듬이질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다듬이질 소리만 날 뿐 집 안은 고즈넉했다. ≪송기숙, 녹두 장군≫
숨을 헐떡이며 열렬하게 매달린 할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은 다듬이질이 잘돼 늘 칼날처럼 차게 서슬이 서 있었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다듬이질은 천을 전래방식으로 다듬는 것이다. 다듬잇돌 위에 옷이나 천을 세탁한 후 풀을 먹여 손질하여 올려놓고 두 개의 방망이로 두드려서 천을 매끄럽게 펴고 단단하게 하는 것이다. 다듬이질은 우리나라의 생활풍습으로 운치 있는 정(情)과 한(恨)을 나타내기도 한다. 실제로 드라마나 문학작품에도 등장한다.
예전 우리나라 옷은 평면 구성으로 이루어져서 세탁할 때마다 바느질한 솔기를 뜯어내고 새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 과정에서 풀을 먹여 새 옷감과 같이 올이 바르고 윤기 있게 손질하는 다듬이질이 발달했다. 남녀 구별이 엄격했던 시대에 가족의 옷 손질과 바느질은 여인의 안목을 나타냈다. 철마다 가족의 옷을 정갈하게 세탁하고 짓는 일은 전적으로 여인의 몫이었다.
다듬이질이 필요한 의류는 겹옷이나 솜옷, 이불이었다. 주로 늦가을과 겨울철에 밤늦게 두 사람이 마주 앉고 다듬잇돌 위에 천을 올려놓고 하는 방망이질은 음률을 만들었다. 또한 고된 시집살이 하소연할 데 없는 여인은 쌓인 한(恨)을 다듬이질하면서 풀어냈다.
진은정 시인의 <다듬이질 소고(小考)>가 우리의 정서를 잘 나타냈다. 1연 ‘사랑은 타악기의 리듬이다. / 정(情)이 한(恨)이 되고 / 한(恨)이 정(情)이 되는 소리’가 그렇다. 시의 행간에 들어있는 사립문, 버선발, 도포자락 등의 시어(詩語) 또한 한국어문화문법 연구 자료이나 본지에서는 지면을 고려하여 다듬이질로 한정하기로 한다.
의생활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배운다. 섬유가 발달하고 세탁기와 다리미 등 편리한 가전제품이 있고 세탁소가 있어서 다듬이질이 사라지고 있다. 경제성장과 과학의 발달이 편리한 생활을 누리게 했다. 반면 잊혀가는 생활의 편린이 아쉽기만 하다. 필자의 뇌리에 유년 시절 대청에 앉아 다듬이질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한 컷의 사진으로 남아있는 건 천만다행이다. 또한 한국어문화문법의 연구는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의 문화를 고수하는 위대한 일이라는 자부심이 생긴다. 작정하고 나선 순례의 행보를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5. 버선(버선발)
벚꽃 연가 / 이현애 詩
벚꽃 연가 서향 / 이현애 유백색 피부에 홍조를 띠고 화들짝 놀라 맞이한 당신 그리움 담고 천변에 뿌리내린 채 봄은 또 그렇게 다가오나 봅니다 버선발로 달려 나아가 가슴을 여고 당신의 향기를 품으렵니다 흐르면 다시 올 줄 모르는 원성천 냇물의 푸념 수줍은 열정으로 달래며 혼잣말처럼 새기는 눌변 사랑은 병이고 이별은 약인가 봅니다 눈꽃 되어 흩어지는 계절의 연가 꽃잎들은 침묵의 언어에 그리움 담아 흩뿌립니다 낙화의 아픔보다 밟히는 쾌감을 선택한 순간 봄이 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냇물 위에 떠내려가는 꽃잎의 노래가 정겹습니다 |
한국어문화문법 : 버선(버선발)
「명사」 천으로 발 모양과 비슷하게 만들어 종아리 아래까지 발에 신는 물건. 흔히 무명, 광목 따위 천으로 만드는데 솜을 두기도 하고 겹으로 만들기도 한다.
속담·관용구 : ①버선 신고 발바닥 긁기 - 버선을 신고 발바닥을 긁으면 긁으나 마나라는 뜻으로, 요긴한 곳에 직접 미치지 못하여 안타까운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동의 속담> ‘신신고 발바닥 긁기’ ‘구두 신고 발등 긁기’ ‘목화 신고 발등 긁기’ ‘옷을 격해 가려운 데를 긁는다’ ‘옷 입고 가려운 데 긁기’ ②버선목이라 (오장을) 뒤집어 보이지도 못하고 - 버선목처럼 뒤집어 보일 수도 없어 답답하다는 뜻으로, 아무리 해명을 해도 상대편이 수긍을 하지 않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동의 속담>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이나’
버선은 발을 따뜻하게 하고 모양을 맵시 있게 하기 위하여 천으로 만들어 신는 물건을 말한다. 버선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삼국시대에는 고급 직물로 만들었으며 신분에 제한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계급에 상관없이 흰색 포의 버선을 신었다.
만드는 방법에 따라 솜버선, 겹버선, 홑버선, 누비버선, 타래버선으로 나뉜다. 솜버선은 솜을 두어 만든 버선이다. 겹으로 만든 버선의 수눅 양쪽에 솜을 고루 두어서 만드는데, 방한(防寒)과 맵시가 나도록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겹버선은 솜을 두지 않고 겹으로 만든 버선이다. 홑버선은 홑으로 만든 것으로, 속에 신은 버선의 더러움을 막기 위하여 덧신는 버선이다. 누비버선은 솜을 두고 누벼서 만든 것이다. 겨울에 방한용으로 신는데 세탁 뒤의 손질이 쉬워 실용적이다. 타래버선은 어린이용으로 예쁘게 만든 버선이다. 솜을 두어 누빈 뒤에 색실로 수를 놓고, 발목 뒤에 끈을 달아 앞으로 맬 수 있도록 한다.
버선은 한복이 지닌 유연한 곡선비와 조화를 이루어 여성의 자태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조지훈의 시 승무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에서 외씨보선은 외씨버선의 강원도 방언이다. 오이씨처럼 볼이 조붓하고 갸름하여 맵시가 있는 버선을 뜻한다.
이현애 님의 시 <벚꽃 연가>의 2연 “버선발로 달려 나아가 / 가슴을 여고 당신의 향기를 품으렵니다/ 흐르면 다시 올 줄 모르는 / 원성천 냇물의 푸념”을 읊조리노라면 버선발로 뛰어나와 사랑하는 임을 맞이하는 단아한 여인이 보인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원성천에 화들짝 방문 열어젖히고 연분홍빛 치마 이래 보일락 말락 새하얀 버선발로 뛰어나와 봄을 맞이하는 시인의 시심이 향기롭다.
필자에게 각인된 버선은 어머니의 장독대에 있다.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처럼 가운데 배가 불룩한 어머니의 장 항아리에는 창호지를 외씨버선 모양으로 오려내고 ‘장맛이 꿀맛 같읍소서!’라는 손글씨가 굵직하게 쓰여있었다.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었으리라. 해마다 모내기 철이 되면 품앗이 일꾼들 밥을 지으면서 할머니는 ‘네 엄마 장맛은 꿀맛이구나!’ 하고 간장에 밥을 비벼 먹었다. 장마철마다 장독대 돌아가며 봉숭아꽃과 과꽃을 모종하던 어머니가 눈에 선하다. 비췻빛 가을 하늘 아래 선홍빛 과꽃을 보면서 가을을 예찬하던 어머니가 어제 본 듯 선명하다.
이 시인처럼 임을 맞아 버선발로 달려 나갈 일을 기다린다. 바람에 별이 스치는 밤, 찬연하게 빛나는 별 하나를 만나는 날이 오면 버선발로 달려가서 품에 안으리라.
6. 상견례(相見禮)
상견례(相見禮) / 김인희 수필
상견례 장소인 한정식 식당은 분위기가 조용하고 편안했다. 사돈댁에서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깥사돈, 안사돈, 며느리, 언니 네 가족이었다. 아들의 안내에 따라 차례로 남편과 나, 아들, 딸이 앉았다. 맞선을 보듯 한 사람씩 마주 앉았다. 아들이 “저희 가족을 먼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아무개, 어머니 아무개 그리고 누나 아무개입니다.”라고 소개를 마친 후 며느리가 예쁜 목소리로 “저희 가족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아무개, 어머니 아무개 그리고 언니 아무개입니다. 대학생 동생은 참석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깥사돈께서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았다, 비 피해는 없나 등 일상적인 인사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다소 경직된 남편은 바깥사돈의 인사에 응수하면서 긴장을 푸는 눈치였다. 이어서 안사돈께서 나를 보면서 “이 서방에게 어머니께서 글을 쓰는 문인이라고 들었어요. 올해 박사학위를 받으셨다고 하더군요. 꿈을 위해 노력하고 결실을 맺은 훌륭한 분을 사돈으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하면서 막힌 담을 허물었다. 나는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로망인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사돈댁에 비하면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지요. 좋은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사돈께서 아들을 가리켜 ‘이 서방’이라고 호칭할 때 기분이 좋았다. 나는 며느리를 몇 번 만났는지라 친숙하여 이름을 불러 호칭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안사돈께서 언짢으셨으려나, 후회막급이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는 중간에 음식이 들어왔다. 음식은 코스요리로 상차림 할 때마다 매니저가 음식을 먹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대화가 멎으면 숟가락 소리, 음식 먹는 소리, 간간이 호흡소리만 들렸다. 어려운 자리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
한국어문화문법 : 상견례(相見禮)
「명사」 ① 공식적으로 서로 만나 보는 예. ②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서로에게 동등한 예를 갖추어 마주 보고 하는 인사. ③ 『역사』 새로 임명된 사부(師傅)나 빈객(賓客)이 처음으로 동궁(東宮)을 뵙던 의례(儀禮).
상견례라 하면 대개 ①에 나온 뜻대로 '공식적으로 서로 만나 보는 예'를 뜻하는 것으로, 관계자끼리 정식으로 첫 대면을 하는 자리를 말한다. 대개 결혼식 전에 신랑 측 가족과 신부 측 가족이 서로 처음 만나는 자리를 뜻하지만, 그 외에도 어떤 단체에 새로 들어온 사람과 기존 구성원들이 인사하는 자리, 학교에서 입학식 이후에 선후배 간에 서로 인사하는 자리, 노사 합의를 위해서 사측과 노조 측이 공식적으로 대면하는 자리, 외교를 위해 실무자들이 마주하는 자리 등 여러 상황이 있다.
김인희 작가(필자)의 수필 <상견례>에 나오는 상견례의 의미는 결혼식 전에 신랑 측 가족과 신부 측 가족이 서로 처음 만나는 자리를 뜻한다. 결혼으로 맺어지는 두 집안의 중대사에 앞서 두 집안의 가족이 직접 대면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두 집안의 가정 예절과 분위기 등 집안의 내력과 가족사를 알고 인륜지대사를 맺는 격식 있는 자리이다. 두 집안의 오가는 대화를 통해서 인격과 됨됨이를 알 수 있고 음식을 먹는 행위 속에서 몸에 밴 예의범절을 볼 수 있다. 상견례 때 신랑과 신부는 물론 두 집안 가족 모두 언행을 주의해야 한다. 김 작가의 글 중에 “대화가 멎으면 숟가락 소리, 음식 먹는 소리, 간간이 호흡소리만 들렸다. 어려운 자리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라는 부분에서 상견례의 묵중함을 느낄 수 있다.
필자의 수필 <상견례> 전면에 상견례 장소로 가는 과정에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여 결례를 범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을 잘 드러냈다. 성인이 된 딸이 부모에게 인터넷에서 찾은 상견례 예절을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부분이 신선했다. 시골에서 사는 필자 가족이 서울 강남에 사는 사돈 내외를 처음 만나는 날, 낭중지추처럼 팽팽한 긴장감으로 진땀 나게 했다. 사돈 내외도 긴장한 빛이 역력한 모습을 보고 자식을 둔 부모 마음은 매일반이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된 아들과 딸이 결혼하여 새 가정을 이루는 위대한 일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어렵게 식사했다.
옛말에 ‘화장실과 처가는 멀수록 좋다’라는 말이 있다. 옛날 가옥의 구조를 보면 집 안에 화장실과 우물이 동시에 있었다. 재래식 화장실은 냄새와 오염으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화장실을 본채에서 멀리 배치한 이유 중 하나다. 옛날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는 외척을 멀리 두는 것이 일반화된 문화였다. 요즘에는 맞벌이하는 자녀 부부의 아이를 외가에서 돌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제 ‘화장실과 처가는 멀수록 좋다’라는 말보다 ‘화장실과 처가는 가까울수록 좋다’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사돈지간에 이웃사촌처럼 가깝게 지낸다고 자랑삼아 말하는 사람을 본다. 자주 만나서 식사하고 노래방에 가서 즐겁게 지낸다고 한다. 필자에게 그런 일은 언감생심이다. 필자는 사돈 내외분의 연락처를 노트에 따로 적어두고 휴대전화에 저장하지 않았다. 휴대전화에 저장하면 본의 아니게 카톡이나 SNS를 통해 사생활을 보게 되는 일이 생길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며느리를 통해 사돈 내외 안부를 전해 들으면서 삼가 조심하고 있다. 사돈댁을 가까이하지 않는 마음은 예를 지키고 귀한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깊은 뜻이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에 감읍할 따름이다.
7. 서대문형무소, 심우장
심우장 가는 길 / 강석희 詩
심우장 가는 길 강석희 겨울소처럼 웅크린 북정마을 좁다란 골목길은 처마마다 고드름 그 예리한 그림자는 일본군의 창검인 양 귀퉁이가 무너진 제국의 헐거운 빗장마저 거칠게 부수었다 그리고 님은 울었다 하늘 맞닿은 북정마을 높다란 골목길에 옛 향기가 일렁인다 서슬 시퍼런 시절 서대문형무소 외로운 주검을 허리춤에 질끈 동여매고 예까지 힘겹게 오름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실낱같은 역사의 끝으로 오롯이 묶였기 때문이리라 님은 또 울었다 울어서 향기를 남겼다 아, 쉬이 지나가기엔 골목길이 좁구나 |
한국어문화문법 : 서대문형무소, 심우장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던, 일제 강점기 때의 형무소다. 1907년에 착공되었으며, 1923년에 ‘서대문형무소’, 1967년에 ‘서울 구치소’로 바뀌었다. 1987년에 경기도 의왕시로 옥사가 이전되었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감옥 건물과 사형장이 우리나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심우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의 유택(遺宅). 만해 한용운 심우장이라고도 한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성북동). 1984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4월 8일 사적 제550호로 승격지정되었다. 한옥 중에서도 특이하게 남향(南向)이 아닌 북향(北向)으로 된 한옥이다. 남향이 아닌 이유는 한용운 본인이 남향으로 하면 돌건물(조선총독부)이 보인다는 이유로 당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있는 산비탈에 있는 북향터를 사저로 잡아 짓게 되었다고 알려져 왔지만 만해의 딸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한용운 시인은 1919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이었다. 경찰서에 연행되어서 꿋꿋한 기개와 정연한 논리로 응대하였으며 일부 겁에 질려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민족대표들을 질타하였다. 1926년 발표한 『님의 침묵』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최초의 근대시인, 최고의 시민문인, 저항시인으로 위치하게 하였다. 노년에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경제적 고난 속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창씨개명 반대와 학병 출전 반대운동을 펼치며 꿋꿋한 지조와 절개를 잃지 않았다.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사랑하는 까닭’, ‘당신을 보았습니다’ 등이 유명하며 낭송가들에 의해 낭송되고 있다.
강석희 시인의 시(詩) <심우장 가는 길>은 만해 한용운 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5연 “서슬 시퍼런 시절 / 서대문형무소 외로운 주검을 / 허리춤에 질끈 동여매고 / 예까지 힘겹게 오름은 / 산 자와 죽은 자가 / 실낱같은 역사의 끝으로 / 오롯이 묶였기 때문이리라”에서 시어(詩語) 서슬 시퍼런 시절, 서대문형무소, 실낱같은 역사 등에서 한용운 님을 생각한다.
한용운 시인이 살았던 심우장에 가면서 강 시인은 ‘님은 울었다’, ‘님은 또 울었다’라고 시를 쓴다. 그 님이 한용운 시인인가. 강 시인인가. 필자는 그 님이 한용운 시인이요 심우장 가는 좁은 골목길에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울부짖는 강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서슬 시퍼런 시절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던 님을 떠올리며 님의 침묵을 기억하는 시인이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통곡하고 있는 건 아닌지···.
8. 서동과 선화
가을이다 / 김종천 詩
가을이다 벌뫼 / 김종천 폭염의 골짜기 건너 뭇별들 자지러지는 계절 산비탈 함초롬히 구절초가 하얗게 미소 지을 때 강변 갈대밭 불타오르는 그리움에 서로 부둥켜안고 전율한다 가을이다 사랑하기 딱 좋은 계절이다 누가 사랑을 서동과 선화의 전유물이라 했나 낮에는 꽃 따라 밤에는 별 따라 사랑 찾아 떠도는 집시 가을밤 서늘하게 낙하하는 별똥별 잠 못 이루는 집시 충혈된 눈에 그렁그렁 맺히는 이슬 가을이 떨고 있다 사랑이 울고 있다 |
한국어문화문법 : 서동과 선화
서동은 백제 30대 왕인 ‘무왕’의 다른 이름이다. <서동요>를 지었다.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로 알려졌다. <서동요>를 계기로 백제의 무왕의 왕비가 되었다.
서동설화는 백제의 제30대 왕인 무왕(武王)에 관한 이야기. 어머니가 용과 관계하여 태어났다는 탄생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사연, 금으로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된 경위, 왕이 되어 미륵사를 건립하게 된 계기 따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서동요는 백제의 서동이 지은 향가. 신라의 선화공주를 사모하여 경주의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여 선화공주를 아내로 얻었다는 내용으로, 4구체로 되어 있으며 ≪삼국유사≫ <무왕조(武王條)>에 실려 있다. 서동요의 내용은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 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 (善化公主 主隱 他 密只 嫁良 置古 薯童房乙 夜矣 夘乙 抱遣 去如)”이다.
김종천 시인은 시 <가을이다>의 4연과 5연에서 “가을이다 / 사랑하기 딱 좋은 계절이다 // 누가 사랑을 / 서동과 선화의 전유물이라 했나”라고 노래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시어(詩語)로 택했더라면 독자들의 감동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시인은 가을을 사랑하기 딱 좋은 계절이라는 반전으로 독자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사랑이 서동과 선화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김 시인이 ‘서동’과 ‘선화’를 등장시켰기 때문에 독자의 사랑에 대한 기대치가 크고 높아졌다. 백제의 무왕이 어린 시절 마를 파는 서동이었다.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로 가서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서동요’를 지어 신라의 아이들로 하여 노래로 부르게 했다. 서동요를 듣고 진노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쫓아냈을 때 서동은 기다렸다가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았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백제와 신라가 적대국으로 대치하고 있을 때 맺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의 주인공이었다.
김 시인은 한 편의 시(詩)로 사랑에 대하여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깨닫게 했다. 불가능의 벽을 넘어 사랑을 쟁취한 서동과 사랑을 믿고 동행한 선화공주의 사랑이 아름답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하며 바라고 믿고 참아주며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른다고 노래하면서 사랑의 정의를 찾아 집시처럼 떠도는 시인을 알고 있다. 그 시인에게 김 시인의 <가을이다>를 들려주고 싶다.
9. 소쩍새
소쩍새 우는 밤 / 신영 詩
소쩍새 우는 밤 海霧 / 신영 앞산 진달래 바짝 마른 가지마다 선홍빛 울음 머금을 때면 밤마다 뒷산 소쩍새 애절하게 운다 유년 시절 봄마다 넘던 보릿고개 밥상에 둘러앉은 가족들 아버지 고봉밥 옆에 자식들 밥 나란히 놓여있다 어제 밥을 많이 먹어 체했다고 서둘러 부엌으로 가는 어머니 물 한 바가지 들이켜고 호미를 찾는다 그때 어머니는 체한 게 아니다 당신의 보리밥을 덜어 자식들 밥그릇 채우고 밭고랑에 앉아 소쩍새 되어 울었다 태양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저녁 소쩍소쩍 식탁에 앉아 처연한 울음소리를 듣는다. 못난 자식에게 전부를 주고 홀연히 떠난 어머니 자식이 그리워 찾아오셨을까. 기름진 음식 놓인 식탁에 앉아 허기진 그리움에 눈물이 고인다. |
한국어문화문법 : 소쩍새
‘소쩍새’는 한 단어 안에서 뚜렷한 까닭 없이 나는 된소리는 다음 음절의 첫소리를 된소리로 적는다는 규정(한글 맞춤법 제5항)에 따라 ‘소적새’나 ‘솟적새’로 적지 않고 ‘소쩍새’로 적는다.
소쩍새는 현대시, 고전시, 소설, 수필에 자주 등장한다. 소쩍새는 접동새, 두견새, 불여귀, 귀촉도 등으로 불린다. 사실 새들은 생김새가 각각 다르지만 문학에서는 같은 상징으로 사용한다. 소쩍새는 밤에 우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슬픈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소쩍새에 대한 슬픈 전설이 있다. 어느 아홉 명의 남동생과 첫째 딸이 있는 집에 새엄마가 들어왔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새엄마는 똑똑하고 예쁜 첫째 딸이 마음에 안 들었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데 예쁘고 똑똑한 이 첫째 딸이 이웃마을 부잣집 도령과 혼인하기로 약속했다. 자식 열 명 있는 집에 재혼으로 들어온 자신과 비교하면서 질투심에 미치도록 불탔다. 혼수 물품으로 신랑 될 도령 집에서 이 첫째 딸 집으로 선물을 보내왔다. 큰 궤짝, 옷장, 비단 꽃신을 본 새엄마가 눈이 돌아서 나무짝에 이 딸을 넣고 잠가서 불 질러 버렸다. 이 불이 다 사그라들고 남은 잿더미에서 새가 한 마리 날아올랐다. 그런데 새엄마가 너무 무서워서 낮에는 못 울고 밤에만 와서 울었다. “소쩍소쩍 동생들아, 괜찮니?”라고 말하듯이.
소쩍새에 대한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옛날에 며느리를 몹시 구박하는 시어머니가 있었다. 며느리에게 밥을 안 주려고 작은 솥에 밥을 하라고 했다. 며느리는 훌쩍 쩍 울면서 작은 솥에 밥을 해서 시어머니의 밥상을 차려주고 자신은 누룽지를 긁어먹었다. 그 모습을 본 인색한 시어머니는 더 작은 솥에 밥을 하라고 시켰다. 작은 솥에 밥을 한 며느리는 누룽지도 먹지 못하고 물로 배를 채웠다. 결국 배가 고파서 죽은 며느리의 혼이 새가 되었다. 새의 울음소리가 소쩍소쩍하고 들리는 건 ‘솥이 적다 – 솥쩍 솥쩍 – 소쩍소쩍’이라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소쩍소쩍 울음소리를 듣고 ‘많은 쌀을 밥 해 먹기에 솥이 적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풍년이 든다고 했다.
신영 시인의 <소쩍새 우는 밤>에 소쩍새가 등장한다. 1연 “앞산 진달래 / 바짝 마른 가지마다 / 선홍빛 울음 머금을 때면 / 밤마다 뒷산 소쩍새 애절하게 운다”, 4연 “그때 어머니는 체한 게 아니다 / 당신의 보리밥을 덜어 자식들 밥그릇 채우고 / 밭고랑에 앉아 소쩍새 되어 울었다”에 소쩍새가 등장하고 5연에서는 소쩍소쩍 처연한 울음소리가 담겨있다.
기름진 음식이 놓인 식탁에 앉아있는 시인은 허기진 그리움에 몸서리치며 울고 있다. 세월이 이만치 나앉아 있어도 ‘어머니’는 그리움의 표상이다. 생애 가장 기쁜 순간에 부르고 싶은 이름은 어머니다. 가장 슬프고 아픈 순간에 어머니 품에 안겨 실컷 울고 싶다. 어머니!
10. 송편
송편을 빚으며 / 황해숙 隨筆
송편을 빚으며 예진당 황해숙 고유의 명절 추석이 다가왔다. 해마다 맞이하는 추석이건만 옷매무새를 여민다. 백옥처럼 흰 쌀가루를 뜨거운 물로 익반죽한 후 송편을 빚기 시작한다. 송편 소로 녹두와 깨를 준비했다. 하얀 반죽 덩어리에서 덜어내어 동글동글하게 작은 공을 만들었다가 엄지손가락으로 구멍을 파듯이 매만지면서 작은 그릇처럼 오목하게 만든다. 그 안에 숟가락으로 소를 퍼 넣고 소가 밖으로 나오지 않게 검지손가락으로 살며시 눌러주면서 송편 입을 꼼꼼하게 봉한다. 쟁반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송편을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찜기에 베보자기를 깔고 하나씩 서로 간격을 조금씩 떼어서 나열했다. 송편이 익으면서 서로 붙어버리면 예쁜 모양이 일그러지니 몇 번 더 찌는 수고를 감내하더라도 조금씩 떼어놓아야 한다. 송편을 빚을 때마다 독백하곤 한다. 우리 조상님들은 어쩌다가 이토록 예쁜 떡을 만들 생각을 하셨을까. 농본주의 사회에서 가을은 그야말로 부지깽이라도 일손을 보태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도 조상님들은 손이 많이 가는 송편을 빚어서 감사를 올리고 후손들에게는 미풍양속을 전해주었다. 쌀가루에 쑥을 넣어 반죽하면 쑥 송편이 되고, 호박가루를 넣어 반죽하면 노란색의 송편이 된다. 송편 안에 넣는 소도 재료에 따라 천차만별이니 이보다 정성이 들어가고 아름다운 떡이 있을까. |
한국어문화문법 : 송편
「명사」 멥쌀가루를 반죽하여 팥, 콩, 밤, 대추, 깨 따위로 소를 넣고 반달이나 모시조개 모양으로 빚어서 솔잎을 깔고 찐 떡. 흔히 추석 때 빚는다. ≒ 송병.
속담 :송편으로 목을 따 죽지 - 칼도 아닌 송편으로 목을 딸 노릇이라는 뜻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로 몹시 억울하고 원통함을 이르는 말. <동의 속담> ‘거미줄에 목을 맨다’
예문 :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박경리, 토지》
송편은 추석에 먹는 절식의 대표 음식이다. 세계적으로 추석에 먹는 떡은 거의 보름달 보양인데 송편은 추석의 절식인데도 보름달을 닮지 않았다. 송편에 관한 옛 문헌을 조사해 보니 추석에 송편을 빚는다는 기록은 주로 근대 문헌에 보인다. 조선 후기인 1849년에 발간된 《동국세시기》에는 추석 때면 햇벼로 만든 햅쌀 송편을 먹는다고 나온다. 그리고 1925년에 발행된 《해동죽지》에도 추석이면 햅쌀로 송편을 빚는다고 적혀 있다. 한자로는 특별히 그냥 송편이 아니라 햅쌀로 빚은 송편이라는 뜻에서 ‘신송병(新松餠)’이라고 표기했다.
실제 옛 문헌에는 추석이 아닌 다른 명절에 송편을 빚었다는 기록이 더 많다. 19세기 초반 무렵의 문집인 《추재집》에는 정월 대보름에 솔잎으로 찐 송편을 놓고 차례를 지낸다는 글이 있고, 《동국세시기》와 같은 무렵의 풍속서로 주로 한양의 풍속을 적은 《열양세시기》에서도 2월 초하룻날 떡을 만드는데 콩으로 소를 넣고 솔잎을 겹겹이 쌓아 시루에 찐 후 농사일을 준비하는 노비에게 먹인다고 했다. 바로 노비송편이다. 사실, 추석 때 송편을 빚는다고 한 《동국세시기》에도 2월 초하룻날 빚는 송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다. 광해군 때 팔도 음식을 기록한 허균의 《도문대작》에서는 송편을 봄에 먹는 떡이라고 했다. 영조 때의 문인 이의현은 세시음식으로 정월에는 떡국, 대보름에는 약식을 먹으며 삼짇날에는 송편을 먹었다고 했고 정약용도 봄에 송편을 빚는다는 시를 지었다. 인조 대 이식은 《택당집(澤堂集)》에 초파일에 송편을 준비한다고 적었다. 조선시대 관혼상제의 의식을 기록한 《사례의》에도 5월 단오에 시루떡이나 송편을 만든다고 했으며 6월 유두절에 송편을 빚는다는 기록도 있다.
추론해 보면 예전에는 계절에 관계없이 특별한 날이면 송편을 빚어 먹던 민족의 대표 음식이었는데 근대에 접어들면서 햅쌀을 거둔 추석에 올벼로 송편을 빚은 것으로 설날과 추석을 대표 명절로 인정하면서 송편이 추석 때 먹는 떡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해숙 수필가의 작품 <송편을 빚으며>에 작가의 고운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송편을 만드는 과정을 문학적인 감성으로 잘 표현하여 독자로 하여 감동을 배로 느끼게 한다. 그리고 바쁜 농번기에 정성이 가득 들어가고 손이 많이 가는 송편을 만들었다는 것을 잔잔하게 묘사함으로써 우리 조상들이 바쁜 중에 여유를 만끽하고 바쁠수록 여백을 즐길 줄 아는 멋스러운 민족임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작가의 삶의 연륜이 문학 속에 스며들어 씨실과 날실로 곱게 짠 순백의 옥양목을 보는 듯하다.
필자는 추석에 송편 빚는 것을 즐겨한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결혼하기 전에는 어머니와 마주 앉아서 송편을 빚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필자의 하늘에 영롱한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 딸이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무한한 축복이 담긴 따뜻한 말씀이었다. 결혼 후에는 시댁에서 시어머님과 마주 앉아서 송편을 빚었다. 송편을 빚는 긴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고정 자세로 앉아서 송편을 빚느라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뻐근하기는 했지만 즐겨했다. 시어머니께서 들려주시는 사연들을 꿰맞추어 한 편의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었다.
친정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다. 시어머니께서 작년 봄에 입원하셨기 때문에 작년 추석에는 송편을 빚지 않았다. 편한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늘 하던 일을 하지 않아 마음이 텅 빈 것 같아 허전했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풍양속은 지켜야 하고 자손 대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그 노선에 필자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 힘주어 주먹을 쥔다.
11. 시조(시조창)
연가를 쓰다 / 윤경숙 詩
연가를 쓰다 윤슬 / 윤경숙 아랫배에 힘을 주고 목으로 뽑아 올린 연가 물속의 잉어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잉아걸이 선율이 초장과 중장을 타고 종장으로 넘어가는 장단 깊은 속 소리 배자로 뱉어낼 때 시조창에 울고 웃는 객석과 무대 그 깊은 소리를 어떻게 써야 시가 될까 문학 강의실에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소리 죽은 사물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받아 적으면 그것이 바로 시가 된다는 말 화분에 시든 화초 화사한 꽃으로 피어 연가를 부르기까지 몇 날 며칠 끙끙 앓는다 혼신으로 뽑아내는 소리 가락보다 자음과 모음을 조탁하는 일이 이리도 어려울 줄이야 |
한국어문화문법 : 시조(시조창)
시조 : 『문학』 고려 말기부터 발달하여 온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6구 4음보의 기본 형태를 가진 평시조와 파격의 엇시조, 사설시조로 나뉜다. 시조창: 『음악』 조선 시대에 확립된 3장 형식의 정형시에 반주 없이 일정한 가락을 붙여 부르는 노래. 조선 영조 때의 가객(歌客) 이세춘이 만든 것으로, 평시조·중허리시조·지름시조·사설지름시조 따위로 나뉜다.=시조.
시조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에 걸쳐 정제된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이다. 3장 45자 내외로 구성되며, 유학자들의 정신과 정서를 표출하기에 적합한 형식이었다. 보통 장구장단이나 무릎장단에 맞추어 시조창으로 노래하는데, 조선후기에는 관현악 반주를 동반하고 전문가객이 노래를 전담하는 가곡창으로 발전했다. 김천택이 당시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시조들을 수집하여 『청구영언』을 편찬한 이래 가집과 시조집이 속속 편찬되었다. 20세기에 들어 노래를 하지 않게 되어 음악적 특성은 사라졌지만 문학 갈래로서의 특성은 현대시조로 이어지고 있다. 시조의 기본형식은 다음과 같다.
초장 - 3·4 V 4·4
중장 - 3·4 V 4·4
종장 - 3·5 V 4·3
초장 –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중장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종장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 오백 년 도읍지를》
시조창(時調唱)은 문학으로서의 시조를 노래로 공연하는 방식을 말한다. 시조창은 민속악으로 쉽게 배울 수 있어 여러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오늘날까지 광범위하게 불리는 노래다.
윤경숙 시인의 시 <연가를 쓰다> 2연과 3연을 보면 “물속의 잉어 미끄러지듯 / 떨어지는 잉아걸이 선율이 // 초장과 중장을 타고 / 종장으로 넘어가는 장단”이라는 표현이 있다. 시인은 시조창의 대가답게 시의 행간에 시조의 형식과 시조창의 가락을 심었다. 잉아걸이는 각시조와 굿거리 사설시조 및 일부 사설시조에는 물속의 잉어처럼 미끄러지듯 음이 떨어지는 가락이 있는데 이를 잉아걸이라고 지칭한다.
윤 시인의 시조창을 들은 적이 있다. 한복을 입은 쪽진 머리의 윤 시인이 청아한 목소리로 시조창을 할 때 아름다운 자태에 반하고 애절한 소리에 사로잡혀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한때 ‘우리의 것이 소중한 것’이라고 했던 유행어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한류열풍의 기류에 윤 시인의 시조창을 띄운다. 얼쑤.
12. 요강
어머니 / 유순희 詩
어머니 유순희 향한리 집이 보이는 산언덕에는 어머니가 누워 있다. 그리도 그리워 고향 그리워 시집와서 시집살이 힘들었을 텐데 없는 살림에 여섯 개 도시락 싸느라 장아찌 박사가 되었고 시냇가 빨래터 방망이로 얼음 깨서 손 호호 불며 빨래 빨고 아들 타령에 셋째 딸 낳고 요강 뚜껑으로 어깨를 맞아 멍이 드는 이야기에 눈물을 삼킨다. 동김치 익는 날이면 고구마 한 솥단지 삶아 나누어 먹는 것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수채화로 다가온다. |
한국어문화문법 : 요강
「명사」 방에 두고 오줌을 누는 그릇. 놋쇠나 양은, 사기 따위로 작은 단지처럼 만든다. 한자를 빌려 ‘溺罁/溺釭/溺江’으로 적기도 한다. ≒설기, 수병, 야호.
속담 : 요강 뚜껑으로 물 떠먹은 셈 - 별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꺼림칙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예문 : 여인은 잠깐 눈을 뜬 새에 볼일을 봐야겠다는 듯 엉덩이를 까고 요강 위에 주저앉았다. 쇠 요강을 두드리는 힘찬 오줌 소리가 쏴 하고 쏟아져 나왔다. ≪최인호, 지구인≫
요강은 예로부터 오랫동안 생활용품으로 사용되던 생활의 필수품이었다. 요강을 만든 재료에 따라 신분의 차등을 두었다. 여자의 혼수품 중에 놋요강과 놋대야가 들어있었다. 요강은 방에 비치하고 사용하는 것이었으나 여성이 가마로 여행하거나 이동할 때 휴대하고 사용했거나 의료용으로 사용했다. 요강은 재료에 따라 도기 요강, 자기 요강, 유기 요강, 목칠기 요강 등 다양하게 만들어 사용했다.
필자가 수년간 국립부여박물관 전시실 유물해설을 했다. 그때 백제시대 유물 중 호자(호랑이 모양 변기)라는 유물이 있었는데 용도는 소변 용기였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귀족이 이동할 때 하인이 옆에서 호자를 들고 있었다고 하니 백제시대 귀족이나 왕족이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오늘날 병원에서 사용하는 의료용 변기와 흡사한 모양으로 된 요강도 있어서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즘은 주거문화가 많이 바뀌어 수세식 변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요강은 중환자실이나 일부 시골에서 사용한다. 예전에 주거문화는 화장실이 건물과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몸이 불편하거나 겨울에는 소변을 보러 화장실까지 거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하여 마루나 방 안에 요강을 놓고 사용했다.
필자도 어렸을 때는 겨울밤에 화장실에 가지 않고 마루에 있는 요강을 이용했다. 어머니는 아침에 요강을 들고 가서 화장실에 붓고 수도에서 깨끗이 닦아서 거꾸로 엎어놓고 물기를 제거했다. 저녁에 다시 마루에 두어 가족들이 추운 밤에 화장실까지 수고를 덜어주었다. 아침에는 요강이 소변으로 가득 차서 넘칠 위기에 있었던 기억도 있다.
유순희 시인의 <어머니>에 등장하는 요강은 유년의 향수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한(恨)이 깃들어 있다. 5연에서 “아들 타령에 / 셋째 딸 낳고 요강 뚜껑으로 어깨를 맞아 / 멍이 드는 이야기에 눈물을 삼킨다.”에서 멍든 어머니의 눈물을 떠올리게 한다.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다운 것인가. 어머니의 멍든 한(恨)과 요강에 가득 채운 눈물마저 그립기만 하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큰댁에 일이 있어서 큰어머니와 사촌 오빠가 출타하면 할머니께서는 필자를 데려가서 같이 잠을 잤다. 밤에 소변을 보려고 일어나려고 부스럭거리면 할머니께서 윗목에 있는 요강을 손으로 두드리면서 “요강 여기 있다.” 하고 위치를 알려주셨다.
13. 월남전(베트남 전쟁)
모내기 시절의 추억 / 김종열 詩
모내기시절의 추억 해언 / 김종열 국민학교 시절 꼬막손 모내기 월남전에 보상받은 논 서 마지기에 꼬막손에 쥐어진 한 줌 모 즐거움에 한 땀 한 땀 느려터진 동작에 부모님은 어떤 생각하고 있었을까? 가을 추수 걱정되어도 기대는 하늘이다 함박웃음에 한시름 놓아 보지만 부모님의 엷은 미소는 추억으로 묻혀버리고 보릿고개 유년시절 부모님의 근심 걱정 남의 이야기가 되어도 그립기만 한 옛 추억의 퍼즐 조객들 참 고맙다 |
한국어문화문법 : 월남전(베트남전쟁)
「명사」 『정치』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벌인 전쟁.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군 및 이들을 지원하는 미국군과 싸워 이겨 1969년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미군 철수 후 1975년에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짐으로써 남북이 통일되었다. = 베트남 전쟁.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의 요청으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32만여 명의 한국군을 파병했다. 한국군을 파병하게 된 이유는 정치적, 경제적, 안보적 요인 등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대외적으로 미국과의 관계, 경제 발전, 안보 강화 등 목적이 중심에 있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한국은 경제적 지원을 받아 6·70년대 산업화와 경제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비교해 보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전쟁은 유엔군이 참전하고 베트남전쟁은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았다. 전쟁 당시 한국과 베트남은 남북으로 갈라진 남북 분단전쟁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한국전쟁은 무승부로 볼 수 있는 휴전이지만 베트남전쟁은 공산주의의 승리였다. 두 전쟁 모두 중국과 소련의 개입했으며 한국전쟁과 달리 베트남전쟁은 도미노이론이 발생하여 주변국이 모두 공산화되었다. 한국전쟁은 공산주의가 일으켰지만 베트남전쟁은 민주주의가 일으킨 전쟁이고 한국전쟁에서는 미군이 끝까지 남아 싸웠지만 베트남전쟁에서는 미군이 철수했다. 베트남은 통일이 되었지만 한국은 아직도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김종열 시인의 시 <모내기시절의 추억>을 읊조리노라니 1연 “국민학교 시절 꼬막손 모내기 / 월남전에 보상받은 논 서 마지기에”에서 월남전이 등장한다. 무논에 허리를 구부리고 한 손에 모를 한 움큼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떼어 모를 심던 시절이 생각난다. 김 시인의 시에서 ‘월남전에 보상받은 논 서 마지기’에 방점을 찍는다. 누가 월남전에 다녀왔을까. 논 서 마지기는 목숨값이었으리라. 월남전은 베트남의 역사라고 치부하겠지만 월남전의 영향이 미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 역사의 단면이다. 일제강점기 36년 치욕과 압박에서 해방된 지 5년 만에 다시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을 겪었다. 대한민국의 허리에 철책선을 두른 채 국가를 재건하고 경제를 살리고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전념하던 시기였다.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고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들이 가서 오일 머니를 벌었다. 21C MZ 세대들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채 한 세기도 되지 않은 역사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헌신하고 희생한 애국지사들,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국군장병들과 학도병들의 희생, 베트남전쟁 파병에서 흘린 피, 독일 탄광에서 생사에 노출된 채 지하 갱에서 일하던 광부가 흘린 땀과 시체를 닦았던 곱디고운 간호사들의 눈물이 오늘의 선진 대한민국을 건설했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14. 6·25 전쟁(한국전쟁)
포화가 피워낸 붉은 장미 / 노인기 소설
전쟁은 누구의 승리도 없이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협정이 서방 강대국들에 의해 체결되었다. 뼈아픈 분단의 역사만 간직한 채 그로부터 60년이 흘렀다. 한국 정부는 6.25 60주년 기념으로 미국을 비롯한 유엔 연합군 참전 용사들을 초청했다. 이미 세월이 많이 흘러 그때 당시 용사들은 대부분 작고하여 생존하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노인기, 포화가 피워낸 붉은 장미 부분 발췌》 상흔의 흔적들이 가득한 느티나무에 바람이 분다. 노파의 구부러진 발걸음처럼 힘겨워 보였다. 떼가 반쯤 떨어져 나간 어느 초라한 무덤 앞에 파란 눈의 노신사가 묵념하듯 서 있다. 나이는 많이 들어 보였지만 그래도 어딘가 고매한 기품이 풍겨 나왔다. 신사는 누구와 얘기하듯 제법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의 마음속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그 이름! 그가 잠든 무덤 앞에서도 끝내 소리 내어 불러 보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신사가 다녀간 이름 없는 무덤 앞에 지금까지 한 번도 놓인 적이 없는 붉은 장미꽃이 놓여있었다. 《노인기, 포화가 피워낸 붉은 장미 부분 발췌》 |
한국어문화문법 : 6·25 전쟁(한국전쟁)
6·25 전쟁(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이 선전포고 없이 선전포고 없이 대한민국을 기습적인 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이 넘게 이어진 비극적인 동족상잔이었다. 휴전 이후 7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적대적 대치 상태는 풀리지 않고 있다.
6·25 전쟁은 36년간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지 5년 만에 겪은 전쟁이었다. 6·25 전쟁은 북한의 공산주의와 남한의 민주주의의 대전으로 38선 이북의 북한에는 소련이 주둔하고 38선 이남의 남한에는 미국이 주둔하여 냉전의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 발발 이후 낙동강에 교착하게 되었고 유엔군이 북한군을 뒤에서 공격하여 섬멸하고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자 1950년 9월 인천에 상륙하여 북한군의 후방을 타격하고 서울을 수복한 군사작전이다. 1·4 후퇴는 6·25전쟁 때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후 북으로 진격해 가던 중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인해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포기하고 퇴각한 사건이다. 6·25 전쟁으로 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으며 남북 관계 진전에 따라 상봉이 이뤄졌으나 지금도 애타게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다. 전쟁 1세대 이산가족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는 시점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 정책이 시급하다.
학생들이 6·25 전쟁이 북침인지 남침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어 충격을 금치 못한 일이 있었다. 학교 교과 과정에 역사 교육은 필수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다. 아랍 진영에 전쟁이 발발하면 유학생들이 공항으로 달려간다고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국으로 가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하여 공항으로 가고 상대국 학생들은 국가의 부름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달려간다고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읊조리며 가슴에 깊이 새긴다.
노인기 소설가는 중편소설 <포화가 피워낸 붉은 장미>에 “전쟁은 누구의 승리도 없이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 협정이 서방 강대국들에 의해 체결되었다. 뼈아픈 분단의 역사만 간직한 채 그로부터 60년이 흘렀다. 한국 정부는 6.25 60주년 기념으로 미국을 비롯한 유엔 연합군 참전 용사들을 초청했다. 이미 세월이 많이 흘러 그때 당시 용사들은 대부분 작고하여 생존하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라고 6·25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노인기 작가의 작품을 통하여 일촉즉발의 전장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 흐르는 인류애에 감동하고 이념의 차이로 인하여 등을 돌리고 상처를 받는 아픔에 신음한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지금도 총을 들고 대치하고 동족의 청춘을 생각하고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는다. 휴전, 아직도 끝나지 않은 6·25 전쟁 속에서 대한민국은 매년 6·25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작가는 뼈가 시리도록 아픈 역사, 동족상잔의 선혈이 낭자한 접전지에 붉은 장미를 피워냈다. 작가의 역사의식에 깊이 고개를 숙인다.
15. 정월 대보름
정월 대보름 / 홍원표 詩
정월 대보름 平心 / 홍원표 정월 열 나흗날 겨울 산골 큰 마당에 보름달이 환하게 웃는구나 우리 인생도 정월 대보름처럼 웃음꽃 활짝 피어나게 달님께 소원을 빌어보자 어머니가 만든 상원 절식 오곡밥 먹고, 부럼 깨서 귀밝이 이명주 마시며 쟁반 같은 달님께 한해 액운 달집 쌓아 불태우고 건강과 행복 소원 빌어 우리 인생 환한 둥근 보름달처럼 자비(慈悲)한 마음 염원하며 웃음꽃 활짝 피고 살아보자 |
한국어문화문법 : 정월 대보름
「명사」 『민속』 음력 정월 보름날을 명절로 이르는 말. 새벽에 귀밝이술을 마시고 부럼을 깨물며 약밥, 오곡밥 따위를 먹는다. =대보름날.
속담 : 정월 대보름날 귀머리장군 연 떠나가듯 - 멀리 가서 떨어지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예문 : 정월 대보름에는 달맞이를 하며 소원을 빌기도 하였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너나없이 그해 들어 처음으로 동산에 떠오르는 둥근달을 보고 농사를 점쳤다. ≪최명희, 혼불≫
정월 대보름은 한국의 대표적인 명절이다. 음력 1월 15일은 새해의 첫 보름날로 농경사회였던 시절에 마을 공동체로 1년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날이었다. <삼국유사>의 <기이> 편에 정월 대보름에 대하여 최초로 기록이 나타난다. 절식으로 오곡밥과 나물 반찬, 귀밝이술을 먹고 달맞이, 달집태우기, 지신밟기, 쥐불놀이 등 전통행사가 전해진다. 여름 더위를 막아보려는 더위팔기와 부스럼이 생기지 않도록 껍데기가 단단한 과일을 깨무는 부럼깨기를 했다. 정월 대보름은 마을 전체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명절이다.
유년 시절 정월 대보름 전날 밤에 집집마다 밥을 얻으러 다니는 풍습이 있었다. 필자의 마을에서는 ‘밥을 훔치러 다닌다’고 했다. 또래별로 삼삼오오 큰 양푼을 들고 이집 저집 부엌으로 숨어들어서 부뚜막에 있는 밥과 찬장에 있는 나물 반찬을 듬뿍 담아와서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었다. 같은 집 부엌에서 오빠들이나 언니들과 만날 때가 있었지만 사이좋게 나누어 가져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안방에는 어른들이 계셨지만 나무라지 않았고 그러려니 하고 눈감아 주고 어느 집이고 밥과 반찬을 넉넉하게 해 두었다.
마을 어른들께서는 넓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빙 둘러서서 윷놀이를 했다. 남자애들은 언덕에 올라 연날리기를 했다. 정월 대보름날 저녁때가 되면 어른들은 윷놀이를 끝내고 윷과 멍석을 정리하면서 ‘이제 농사 준비해야지’ 하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남자애들도 연날리기를 마치고 연줄을 끊어 연을 멀리 날려 보냈다. 정월 대보름을 지내고 나면 모든 놀이도 끝내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에 순종했다.
홍원표 시인은 시 <정월 대보름>을 통하여 우리의 미풍양속을 소환했다. 3년과 4연에 “어머니가 만든 상원 절식 / 오곡밥 먹고, 부럼 깨서 / 귀밝이 이명주 마시며 // 쟁반 같은 달님께 / 한해 액운 달집 쌓아 불태우고 / 건강과 행복 소원 빌어” 정월 대보름의 절식과 행사를 담았다. 쟁반같이 둥근 달님에게 건강과 행복을 빌어보자는 시인의 청유에 얼씨구 좋다고 어깨춤을 추면서 동참하고 싶다.
한국어문화문법에 대한 자료를 찾고자 고심하던 중 덕향문학 시인들의 작품에서 빛나는 어휘를 발견하고 감탄했다. 덕향문학 강의실에서 촌철살인 할 수 있는 글을 쓰라고 역설하신 최기복 교수님의 카랑카랑한 달변이 오버랩된다. 청출어람이다. 그 스승의 그 제자들에게 갈채를 보낸다.
16. 찜질방
찜질방에서 / 송일호 시인
찜질방에서 德仁 / 송일호 열기가 턱에 닿는 찜질방에서 솔가지 타는 냄새 숨 막히는 절정이 삶의 열정이 된다. 턱에 와닿는 열기에 물기에 젖는 알몸의 환희 머물다가는 인생이 뜨겁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한 것은 아니거늘 고단한 여정에서 차고 더운 윤회를 배운다 한잔의 냉수가 행복이다 |
한국어문화문법 : 찜질방
「명사」 황토, 맥반석 따위를 바른 방에서 높은 온도의 공기로 땀을 내도록 한 곳. 약 40∼80℃의 더운 공기를 유지하며 휴게 시설과 사우나를 갖추고 있다.
찜질방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한증막(汗蒸幕)은 조선 시대부터 있었는데, 이는 숯이나 도자기를 굽고 남은 가마 속에 남는 열로 찜질하는 것으로 찜질방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현대에도 산속에 있는 숯막은 때마다 숯을 굽고 열기가 남은 가마를 산 아래 주민들에게 돈을 받고 찜질방으로 제공하는 곳이 많다. 핀란드와 러시아의 사우나도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역사가 깊으며 개인 별장(다차)에서도 따로 사우나방을 만들어 사우나를 즐기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었다는 것을 덧붙인다.
맥반석 계란, 식혜, 수정과, 냉커피, 팥빙수, 큰 곳은 라면, 국, 덮밥 같은 식사류를 파는 곳도 있다. 분식집 수준으로 다양한 메뉴를 내놓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치킨을 파는 곳도 있다. 특히 맥반석 달걀과 식혜 조합이 유명하다. 일반 식혜와는 달리 플라스틱 물병에 얼음을 넣어 담아주기 때문에 매우 시원해서 찜질 후의 갈증을 달래기에 딱 알맞기 때문이다. 맥반석 계란은 찜질방 하면 나오는 대명사 격이며 간단히 요기하는데 알맞고 특히 상술한 식혜와 같이 먹으면 출출함과 목마름이 모두 해결된다. 이마나 머리로 계란 깨는 것도 유명하다. 이상하게 밖에서 맥반석 계란을 먹으면 찜질방에서 느꼈던 맛이 안 나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리고 과자나 아이스크림도 당연히 있으며 구슬아이스크림,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파는 경우도 상당히 있다. 그 외에 카페 메뉴인 커피나 머핀 등을 파는 경우도 있다.
외국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가이드북 등에는 Korean spa(Jjimjilbang)이라고 해서 저렴한 숙소의 한 형태로 나와 있으며, 한국에 오면 한 번쯤은 찜질방에 가 볼 것을 권하기도 한다. 덕분에 서울특별시의 명동 등 번화가에 있는 찜질방은 한국인보다도 일본인(특히 아줌마)이 많다.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오면서 중국인이 많이 보이는 추세로 전환되었다. 외국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가이드북 등에 찜질방이 있다는 말이 솔깃하다. 한국의 찜질방 문화가 곧 한국어문화문법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송일호 시인의 시 <찜질방에서> 1연을 보면 “열기가 턱에 닿는 찜질방에서 / 솔가지 타는 냄새 / 숨 막히는 절정이 / 삶의 열정이 된다.”라는 부분에서 찜질방을 잘 묘사했다. 시인의 필력이 독자로 하여 찜질방이나 대중목욕탕 사우나실에 앉아 있는 착각을 하게 한다. 열기가 턱에 닿는 찜질방에서 숨 막히는 절정이 삶의 열정이 된다는 메타포에 전율한다. 송 시인은 최기복 교수의 문학강의실 수강생답다. 시의 행간에 삶의 경륜을 담은 깊이가 그렇다. 생활 속에서 시제(試題)를 찾는 시인의 눈은 매의 눈이다. 무생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붓의 터치가 강하고 활동하는 생명력이 그렇다. 촌철살인(寸鐵殺人)할 문인이 되리라 믿고 그의 앞날을 주목할 참이다.
필자는 대중목욕탕 사우나실과 찜질방을 좋아하지 않는다. 필자는 폐쇄된 공간에 가면 호흡이 가쁘고 힘들어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편안한 복장으로 마주 앉아서 맥반석 달걀을 먹고 식혜를 마시는 일은 대환영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필자로서 좋은 사람들과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행복을 몇 배로 얻을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말이 난 김에 좋은 사람들과 찜질방 만남을 주선해야겠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일상에서 일탈을 꿈꾸게 한 송 시인께 감사드린다.
17. 청국장
청국장이 끓을 때 / 나영순 詩
청국장이 끓을 때 나영순 한 번쯤 저렇게 끓고 싶다. 어머니의 가슴을 파고들던 어린 기억처럼 누군가를 위해 끓고 싶다. 또 그런 날을 꼭 한 번 기다리고 싶다. |
한국어문화문법 : 청국장
「명사」 ①장의 한 가지. 삶은 콩을 더운 방에서 띄워 반쯤 찧다가 소금과 고춧가루를 넣어 만드는데, 주로 찌개를 끓여 먹는다. ≒담북장. ②메줏가루에 쌀가루, 고춧가루, 생강, 소금 따위를 넣고 익힌 된장.
속담: 청국장이 장이냐 거적문이 문이냐
못된 사람은 사람이라 할 수가 없고 좋지 아니한 물건은 물건이라 할 수 없다는 말.
예문: 아랫목에서 이불을 덮고 며칠 지낸 콩 소쿠리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그러면 엄마는 이불을 걷어내고 짚 속에서 발효된 콩을 주걱으로 뒤적이면서 청국장이 잘 떴다고 하면서 웃었다. 그날 저녁부터는 밥상 한가운데 큼지막한 뚝배기에 청국장이 가득 담겼다. 《김인희, 겨울 동화》
청국장(淸麴醬)은 한국의 전통음식이다. 과거에는 고려장(高麗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두를 쪄서 항아리에 짚을 깔아 그 위에 넣고 발효시킨 콩을 담가서 만든 청국장을 다른 채소와 함께 끓인 요리이다. 된장은 메주를 이용해서 담그지만 청국장은 메주를 이용하지 않으며 특유의 강한 냄새로 잘 알려져 있다.
청국장은 발효식품으로 건강에 좋다고 알려졌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물론 특유의 강한 냄새로 개인차가 있다. 혹자는 청국장의 냄새가 지독하여 먹지 않는다고 한다. 혹자는 아파트에서 청국장을 끓이면 환기가 잘되지 않아 며칠 동안 청국장의 냄새가 집안에 배어있지만 가족이 좋아해서 요리한다고 한다.
요즘은 주로 식당에서 청국장을 먹는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해마다 어머니가 집에서 직접 청국장을 만들었다. 당시 시골 농촌 마을에서는 웬만한 식재료는 자급자족했었다. 필자에게 청국장은 단지 음식만이 아니라 유년 시절의 추억이다. 어머니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다. 고향에 대한 향수이다. 청국장의 지독한 특유의 냄새만큼 코끝이 찡하도록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하여 많은 사람이 청국장을 먹고 지독한 냄새를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 옛날이여!
나영순 시인도 <청국장이 끓을 때>에서 ‘어머니의 가슴을 파고들던 / 어린 기억처럼 / 누군가를 위해 / 끓고 싶다.’라고 말한다. 시인의 뜨거운 사모곡을 듣는다. 시인 또한 청국장이 되어 끓고 싶은 것이다. 청국장이 되기까지 오랜 기다림이 있어야 하듯 시인도 누군가를 위해 끓을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느 날 시인의 지독한 향기에 취해 비틀거리고 싶다. 오늘은 좋은 사람과 마주 앉아 청국장을 먹고 싶은 날이다.
18. 툇마루
그 여름 / 이은순 詩
그 여름 명불허전 / 이은순 맴맴 매미는 멋들어지게 한여름 낮에 통곡하듯 울어제친다. 새벽 논두렁에서 피를 뽑고 허기진 어머니는 매미의 자장가 소리에 맞춰 단잠을 주무신다. 근육이 다 말라 늘어진 팔뚝을 목숨처럼 쟁취하고 나오지 않는 젖무덤을 파헤쳐 어머니의 단잠을 깨운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매미가 거세게 울었다. 어머니는 단잠에서 깨시고 나는 어머니의 부채에 단잠을 실었다. 쌔근쌔근~ 어머니 팔은 빠질세라 연신 살랑살랑 춤을 추고 나는 몰랐다. 내가 깰 때까지 어머니의 부채는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뜨거웠고 유난히 시원했었다는 것을... 아비 없이 5남매를 품고 사신 어머니 어찌 그리 사셨소 다 내어주신 어머니의 영혼을 왜 이리 일찍 거두어 가셨는지... 나는 낮잠을 자지 않는다. 몇 날 며칠을 지새워도 나는 낮잠을 자지 않는다. 어머니가 없는 그 여름이 그리워서일까? 단잠을 깨운 죄책감에서 일까? 여름이 되면 고향집 툇마루 어머니의 팔베개가 사무치게 그립다. 어머니가 없는 툇마루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고스톱판이 되어가고 지친 나그네의 쉼터가 되어가는데 더 이상 그 여름이 내게는 오질 않는다. 선풍기는 방마다 쌩쌩 드넓은 거실엔 에어컨이 빵빵 각자의 방에서 살 부대끼지 않고 추운 여름을 지내고 있다. 세상이 변했다. 나도 변했다. 끈적끈적 부비부비도 싫다. 나의 여름은 이제 사라져 간다. 그 해 그 여름이 점점.... |
한국어문화문법 : 툇마루(退마루)
「명사」 『건설』 툇간에 놓은 마루. ≒퇴.
예문 : 안채와 바깥채에 있는 마루에는 이미 손님들로 꽉 차 있어 우리는 툇마루에서 술상을 받았다.
한걸음 더 : ‘툇마루’는 순우리말과 한자어로 된 합성어로서 앞말이 모음으로 끝난 경우, 뒷말의 첫소리 ‘ㄴ, ㅁ’ 앞에서 ‘ㄴ’ 소리가 덧나는 것은 사이시옷을 받쳐 적는다는 규정(한글 맞춤법 제30항)에 따라 ‘퇴마루’로 적지 않고 ‘툇마루’로 적는다.
툇마루는 목조 건축물의 고주와 평주 사이 튓간에 놓인 마루를 의미한다. 마루는 바닥이 지면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서 그 밑으로 통풍이 가능하고 외벽의 일부가 개방되어 있거나 개폐가 쉬운 공간을 말한다.
우리나라에 마루가 존재하였다는 최초의 기록은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부여조(扶餘條)의 “음식을 먹는 데에는 조두(俎豆)를 쓰고 사람들끼리 모이는 데에는 벼슬 높은 이에게 절하고 잔을 씻어서 술을 권하여 읍하고 사양하면서 마루에 올라가고 내려온다.”라는 기록이다. 고구려에 관해서는 『후한서』 · 『삼국지』 · 『양서(梁書)』 · 『위서(魏書)』 · 『주서(周書)』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등에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마루에 대한 기록은 『신당서』 「동이전」 백제조, 『후위서(後魏書)』 · 『조선부(朝鮮賦)』 등에 있다. 익산 미륵사지 · 임강사지 등의 주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통일신라에서는 마루의 존재를 입증하는 감은사(感恩寺) 금당지(金堂址)가 발굴되어 당시 마루구조의 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상류계층의 마루장식을 규제하는 기록이 있다(마루는 통치의 장소). 조선시대에는 이익(李瀷)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침어판청조(寢於板廳條)에 제주도에서 마루가 중요한 거처실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루는 그 사용과 기능에 따라 대청, 마루방, 쪽마루, 튓마루, 누마루 등으로 분류한다. 상방·도장방 등도 마루의 종류에 속한다. 대청은 일반적으로 상류주택에 있는 것을 지칭하며 안방과 건넌방, 사랑방과 건넌방 혹은 누마루 사이에 있는 비교적 큰 공간이다. 마루방은 바닥과 천장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온돌방과 겉과 바닥만 마루구조고 된 공간으로 그 기능은 대부분 수장공간이다. 툇마루는 각 방과 대청 등에서 마당이나 기단으로 연결되는 공간으로 각 방을 연결시키는 기능이 있다. 쪽마루는 튓마루와 같은 기능을 툇기둥 없이 동바리가 귀틀을 지탱한다. 누마루는 보통 상류주택에서 사랑채의 가장자리 칸에 위치한다. 우리나라의 마루는 지역적인 특성에 따라 유형을 달리한다.
이은순 시인의 시 <그 여름> 4연 “어머니가 없는 툇마루는 / 동네 아주머니들의 고스톱판이 되어가고 / 지친 나그네의 쉼터가 되어가는데 / 더 이상 그 여름이 내게는 오질 않는다.”에 툇마루가 등장한다. 유년의 시인은 툇마루에 누워 어머니의 부채에 단잠을 잤다. 어머니가 없는 툇마루는 이색적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시대가 변하여 거실에서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찬바람을 만들고 방마다 선풍기가 찬바람을 쌩쌩하게 전달하고 있다. 어머니의 부채질 바람과 비교할 수 없는 추운 여름을 지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가 없는 툇마루의 색다른 풍경에 시인의 여름이 사라지고 있다. 시인의 여름은 어머니의 부채 바람이 있었던 그 여름이다. 그 여름이 사라지고 있다고 서글프게 사모곡을 읊조리고 있다.
필자의 툇마루는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을 소환한다. 마당에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바람에 대지의 열기가 토방을 타고 툇마루까지 올라오던 그해 여름이 생생하다. 작은 앉은뱅이책상에 여름방학 숙제를 했다. 마루 천정에 있는 제비집에서는 갓 부화한 새끼 제비들이 입을 크게 벌리고 울고 어미 제비는 바쁘게 나다니며 먹이를 물어다 주었다. 담장 둘레에 있는 가중나무에서는 매미가 여름을 노래했던 그 여름이 그립다.
땅거미가 내려올 즈음이면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밥을 지었다. 둥근 밥상에 보리밥이 가족 수만큼 놓이고 열무김치와 감자찌개가 전부였던 밥상이었다. 아버지의 너털웃음과 우리들의 조잘대는 소리가 곁들인 반찬이 되었던 그 여름이 몹시 그립다. 이 시인의 시(詩)에서 툇마루에 대한 한국어문화문법을 쓰다가 가슴을 파고드는 그리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19. 한가위(추석)
보름달처럼 가득 채우는 / 김성수 詩
보름달처럼 가득 채우는 聖泉 / 김성수 모두 행복할 수 있을까 불가능이라 말하며 체념해야 할까 조금만 양보하면 되는데 쉽지 않다 알지만 행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불꽃 튀기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 애쓰고 수고하는 삶이 안타깝지만 가치 없는 삶이라 말할 수 없는 것 덕분에 이만큼 할 수 있었다 연휴를 맞이하며 숨을 돌린다 숨 막히는 세상 속에서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걸을 수 있는 우리 작은 선물이 되어 서로에게 위로를 준다 만나면 좋은 시간 서로 그리워하며 감사를 나누는 한가위 추석이 있어 행복하고 보름달처럼 가득 축복을 채운다 |
한국어문화문법 : 한가위
「명사」 우리나라 명절의 하나. 음력 팔월 보름날이다. 신라의 가배(嘉俳)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 따위의 음식을 장만하여 차례를 지낸다. =추석.
예문 : ①진짜 한가위는 우리 손으로 우리 땅에 농사를 지은 쌀로 송편과 술을 빚는 날일세. ≪문순태, 타오르는 강≫ ②추석이 가까워 오는 하늘에는 좀 이지러지기는 했으나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박경리, 토지≫
추석의 시초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이를 인용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 제3대 왕 유리 이사금 때 서라벌 도성(6부) 안의 부녀자를 두 파로 나누고 두 명의 공주로 하여금 각 파를 이끌게 하여 백중(음력 7월 15일) 다음 날부터 한 달 동안 삼을 삼아 음력 8월 15일, 즉 추석 당일 가윗날에 한 달 간의 성적을 심사해서 진 편이 이긴 편에 한턱 내고 모두 노래와 춤을 즐기며 놀도록 한 것에서 유래를 찾는다.
왕은 여섯 부를 정한 후, 이를 두 패로 나누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어 편을 짜고 패를 나누어 가을 7월 16일부터 날마다 일찍이 큰 부(部)의 마당에 모여 길쌈을 시작하여 을야(乙夜: 밤 10시경)에 끝내게 하고,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다소를 심사하여 지는 편은 술과 밥[酒食]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한다. 이어서 가무(歌舞)와 백희(百戱)가 벌어졌으니 이를 가배(嘉俳)라고 한다.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기를 '회소, 회소(會蘇會蘇)'라 하여 그 음조가 슬프고 아름답거늘 후세 사람이 그 소리로 인하여 노래를 지어 이름을 회소곡(會蘇曲)이라 했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1 유리 이사금 9년조(서기 32년)
한가위 또는 추석(秋夕)은 전통적으로 가장 큰 명절이다.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과 같은 의미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추수감사절은 ‘추수를 끝내고 감사하는’ 의미이고 추석은 ‘추수를 앞두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국에는 추석과 같은 큰 명절에 고향을 방문하는 문화가 있다. 매년 천만 단위의 민족대이동으로 극심한 교통정체가 발생한다. 과거에는 도시에 살고 있는 자녀들이 지방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가는 풍습이 있었다. 요즘에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도시에 있는 자녀 집으로 이동하는 신풍습이 생겼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더위도 가시고 햇곡식이 나서 곳간도 마음도 풍요로운 한가위 무렵이야말로 1년 중 가장 좋을 때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새겼다.
성천 김성수 시인은 <보름달처럼 가득 채우는> 시 4연에서 “만나면 좋은 시간 / 서로 그리워하며 감사를 나누는 / 한가위 추석이 있어 행복하고 / 보름달처럼 가득 축복을 채운다”라고 노래한다. 한가위에 가족을 만나면 좋은 시간이다. 서로 그리워하며 감사를 나누고 보름달처럼 둥근 축복을 가득 채운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고 문화가 변하더라도 한가위(추석) 명절의 아름다운 전통문화는 지켜야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한다. 추석에 온 가족이 모여 덕담을 나누고 자손들과 둘러앉아 송편을 빚고 음식을 먹는 풍습은 자자손손 대대로 지켜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는 효(孝)와 자녀를 사랑하는 자(慈)가 가정과 사회를 아름답게 지켜왔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 우뚝 서게 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길이길이 이어가야 한다. 한가위(추석)도 면면히 이어가야 할 아름다운 문화요 역사이다.
20. 효(孝)
효 / 최기복 칼럼 <신효(新孝)의 미학> 중에서
이 시대의 효를 공급자와 수요자의 관계로 규정한다면 직계 존비속 간의 주고받는 수급관계이다. 용역의 제공자는 비속이고 수요자는 존속이다. 더불어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 간의 관계로도 규정지을 수 있다. 여기에 합당한 가족제도는 대가족 제도이다. 대가족 제도하에 가부장은 절대 권력자로 군림한다. 명령은 추상같고 불호령은 절대적이다. 가장으로부터 쫓겨나면 생계는 물론이요 불효자라는 낙인이 찍혀 사회의 낙인이 찍히고 사람 구실을 할 수 없게 된다. 하여 신체발부수지부모불감훼상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 ‘내 몸의 털 한 개 피부조차 부모로 받은 것이기에 상하게 하면 불효’라는 효경 구절을 통해 생명윤리의 기조를 설파한 것이 좋은 예다. // <신효(新孝)의 미학> 중 부분 발췌 신효의 시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의 영역에 도전장을 낸 컴퓨터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개와 고양이 하고 지내는 것보다 무한대의 지식과 오락이 탑재된 컴퓨터에 눈을 뗄 수 없게 되고 휴대폰을 24시간 움켜쥐고 살게 되면서 사물 인터넷의 시대로 시대 상황이 옮겨졌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컴퓨터 영역은 다시 인공지능을 탑재하게 되고 탑재된 인공지능은 사람 노릇을 대신하게 되면서 효문화는 지리멸렬하게 된 것이다. 한때는 컴퓨터 자판의 키로 대신했던 소통이 명령어를 삽입하면 인공지능이 척척 해결해 주는 시대가 지금 목도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를 우리는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로 명명한다. // <신효(新孝)의 미학> 중 부분 발췌 |
한국어문화문법 : 효(孝)
「명사」 어버이를 잘 섬기는 일.
제사를 지내는 것은 미풍양속으로 효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관용구 : 효(를) 보다 - 자녀나 며느리들에게서 효도를 받다. =효도(를) 보다.
속담 : ①효부 없는 효자 없다 - 며느리가 착하고 시부모께 효성스러워야 아들도 효도하게 된다는 말. ②효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 꽃이 핀다 - 효성이 극진하면 어떤 조건에서도 자식 된 도리를 다할 수 있다는 말. <동의 속담> ‘효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 풀이 난다’ ③효자가 악처만 못하다 - 아무리 못된 아내라도 효자보다 낫다는 뜻으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남자에게는 자식보다 아내가 더 중요하다는 말.
효(孝)에 대해서 챗 GPT나 AI를 통해 검색하면 충청효교육원 최기복 원장님의 글이 나온다. 십수 년 동안 효(孝)와 인성(人性) 교육 선두 주자로 고지를 향하여 묵묵히 경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효와 인성의 표상이며 충청남도 시·군에 분원을 개원하고 가정에 가장의 자리를 만들고 효를 안착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참 스승과 제자 사랑을 부르짖으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떠받치고 인성 교육을 주창하고 있다.
최 원장의 효와 인성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이기를 거절한 참담한 현실을 통탄하며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현 교육을 사람이 우선인 인성 교육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선거 때마다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목소리 높이다가 당선되면 언제 그랬냐는 태도로 돌변하는 정치권 인사들과 다르다. 한 푼 지원받지 못해도 사비를 털어 효 인성 지도사를 양성하고 해마다 커리큘럼을 업그레이드하여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최 원장의 효는 사전에 박제된 효가 아니라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효다. 21세기 MZ세대들에게 수혈할 수 있는 최첨단 IT 시대에 맞춘 효(HYO)는 ‘Harmony of Young & Old’의 효다. 대가족, 핵가족, 나노 가족, 독거 가족, 사물인터넷 가족, 4차 산업혁명시대의 기족으로 변천해 오면서 효문화도 시대의 요구에 상응해야 한다고 주창하고 이론을 세우고 있다. 한국효단체총연합회 대표회장인 최 원장에게 붙여진 효통령이라는 별칭이 적격이다.
최 원장의 효와 인성에 대한 이론과 주장은 그의 저서 『효 이야기』, 『인성 그리고 효』, 『빛은 꺾이지 않는다』에 잘 나타나 있다. 본고에서는 지면상 최 원장의 이론을 소개하지 못하여 안타까운 마음에 저서를 소개한다.
효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상 중 하나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충효(忠孝) 사상이 깊게 뿌리내렸다. 효는 시공을 초월하고 이념과 종교를 초월하여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한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 면면히 이어온 효를 볼 수 있다. 신라시대 과거제도에 『효경』이 과거 시험과목으로 있었다. 효를 주제로 한 설화가 많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고려시대에는 효행자를 우대하고 상품을 하사하는 등 많은 특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신분을 해방시켜 주거나 관리로 특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충효 사상이 조선시대를 통괄하는 사상이었다. 충과 효를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시대가 바뀌고 문화도 변하면서 국가의 기반과 다름없었던 충효 사상이 희미해졌다. 대가족제도의 미풍양속이 사라지고 내로남불이 팽배해졌다. 가정에서 밥상머리 교육이 사라지고 학교에서는 스승 공경과 제자 사랑보다 입시를 우선시하였다. 효를 상실한 가정과 인성을 잃은 학교는 흔들리고 청춘들은 좌표를 설정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효와 인성이 답이다. 효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며 역사학자였던 아널드 토인비는 한국의 효사상과 경로사상, 가족제도에 대한 설명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토인비는 대한민국의 가능성을 효에서 찾았으며 부모 존중하는 마음을 극찬했다고 했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져가야 할 한 가지는 한국의 효라고 했다. 효의 가치를 되새긴다.
한류열풍이 대세다. K-pop, K-스포츠, K-드라마, 한국어가 세계 속에 대한민국을 우뚝 세웠다. 가장 한국적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고유문화를 계승하고 미풍양속을 널리 알려야 한다. 대한민국 역사와 문화를 주름잡았던 효 문화를 되살려야 한다. K-효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새로 쓸 때다. 효,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효가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