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용성국 사람이요. 우리나라에는 28 용왕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사람의 태(胎)에서 났으며 나이 5세, 6세부터 왕위에 올라 만민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바르게 했소. 8품의 성골이 있는데 그들은 고르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소. 그때 부왕 함달파가 적녀국의 왕녀를 맞아 왕비로 삼았소.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4대 탈해왕] 중에서
한국 고대문헌에서 용은 신화의 단골손님이다. 신라에서 조선에 이르는 건국신화들을 살펴보면, 이제껏 한반도에 세워졌던 거의 모든 나라의 시조들은 대개 용의 자손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석탈해는 위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용성국(龍城國) 왕과 적녀국(積女國) 왕녀간의 소생이며 고려 태조 왕건은 작제건(作帝建)과 서해 용왕의 딸이 낳은 용건(龍建)의 아들이다.
또한 후백제의 시조인 견훤은 광주 북촌의 부잣집 딸이 지렁이와 교혼하여 낳았다고 하는데, 이 지렁이는 ‘지룡(池龍)’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의 국조 신화인 [용비어천가]는 조선을 건국하기까지의 여섯 시조를 해동육룡(海東六龍)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건국신화라는 것이 새로 세워진 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후대에 각색된 일종의 정치적 선전이라면, 용과의 혈연관계를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정통성을 인정받는 확실한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용이 왕권의 상징으로 통하게 된 이유는 용이 물과 기후를 관장하는 수신이므로 농경문화권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또는 용이 바다로부터 왔으며 신화 속에서 ‘해외’에서 온 존재와의 교통이라는 주제로 종종 등장하는 것을 들어 고대 한반도와 남방 또는 서역과의 연관성을 추측하기도 한다. 명백한 상상의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에는 용이 출현하였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바다에서 일어나는 기상현상인 ‘용오름’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용은 왕의 권위의 상징물로 궁중유물에 많이 등장한다. 흔히 발가락이 5개인 용은 황제, 4개인 용은 제후, 3개인 용은 재상을 상징하여 중국의 황제만이 5개를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실제 도상에서 그리 엄격하게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절에 있는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요, 굿판의 용은 비를 내리게 하는 용왕신이요, 민가의 대문에 붙은 용은 잡귀를 물리치는 영물이다. 어떤 고정된 정형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상상의 존재답게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국의 용이다.
글_편집실
불국사 대웅전 용조각
적룡(赤龍)
우현리 강서대묘 현실동벽 청룡도
화룡도(化龍圖)
적룡(赤龍)
용(龍) 1-3-1
실제로 왕건은 자신의 혈통을 증명하기 위해 용비늘 두 개를 국보로 간직했다. 이 용비늘은 조선시대까지 전해져 상의원(尙衣院) 내에 보존되어 있다가 명종 때 발생한 경북궁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1-3-2 용의 출현을 기록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명종 7년 8월 계사일(癸巳日)에 정주의 창고에 청룡이 날아들어와서 공중으로 올라갔는데 잠시 후에 창고에서 불이 났다.” -「고려사」 권53 지7 오행1 “공민왕 13년 정월 무자일 밤에 서남방에 붉은 기가 나타났는데 용과 같았다.”-「고려사」 권53 지7 오행1 “정의현에서 용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승천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수풀 사이에 도로 떨어져 오랫동안 빙빙 돌다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조선왕조실록」 세종 22년 1월 30일(癸酉) 기사
1-3-3 ‘용오름’은 대기의 활동으로 생기는 저기압성 폭풍의 일종으로 주로 적운층에서 일어나 매우 빠른 소용돌이를 발생시킨다. 국지적인 저기압이 갑작스럽게 바닷물을 감아올리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기다란 원통형 물체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지난 2001년 8월 25일 죽도 앞바다에서는 직경 20m 이상, 높이 500m 가량의 거대한 용오름이 발생해 멋진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사진)
까마귀_ 烏 태양의 화신. 신의 사자.
무질서. 흉조. 부정. 간신. 남성. 효도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가 없었다.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길,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고 아뢨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연오랑세오녀] 중에서
까마귀의 어원은 ‘가마고리’로, 이는 단순히 ‘검은 새’라는 뜻이다. 중국 고문헌 「회남자(淮南子)」에 보면, “해 속에는 웅크리고 앉아 있는 까마귀가 있고 달 속에는 두꺼비가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검은 까마귀가 태양의 본질을 상징하는 서조(瑞鳥)가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유력한 대답은 태양의 흑점이다.
1,600여년 전 황사로 하늘이 흐려져 태양을 맨눈으로 볼 수 있었던 어느날, 중국의 한 천문학자는 태양 표면에 있는 이상한 점을 관찰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태양은 붉은 색이었고 불과 같았다. 태양 내에 3개의 다리가 있는 까마귀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였다. 5일 후에 그것은 없어졌다.”
옛날에 태양이 10개나 떠서 사람들이 타죽고 산천초목이 타들어가자, 요임금은 예를 시켜 태양을 쏘아 떨어뜨리게 하였다. 태양이 떨어진 자리에는 거대한 황금색 세 발 까마귀가 화살에 꽂혀 죽어 있었다. 이 이야기를 묘사한 한나라 때의 석각(石刻)에는 거대한 나무에 태양 대신 까마귀가 주렁주렁 열린 모습이 새겨져 있다.
모든 닭이 금계(金鷄)가 아닌 것처럼, 모든 까마귀가 다 삼족오(三足烏)인 것은 아니다. 태양의 상징으로서의 삼족오 도상은 주로 일찍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 고분벽화나 고분에서 발견된 관장식에서 발견된다.
해와 달의 정령으로 알려져 있는 신화 속의 인물인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의 이름 속에도 까마귀의 편린이 남아있다.
그러나 고대 이후로 태양의 정기를 의미하는 까마귀의 상징성은 서서히 잊혀져 갔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까마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까마귀 울음소리는 죽음의 불길한 징조인데, 이렇게 된 이유는 까마귀가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신의 사자이며, 그 중에서도 주로 나쁜 소식을 알려주는 사자이기 때문이다. 신라 소지왕에게 간통과 반역의 음모를 알려준 것도 까마귀요, 저승 사자로부터 받은 적패지(赤牌旨)를 잃어버려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죽어가게 한 장본인도 까마귀이다. 제사를 지내고 난 후 젯밥을 대문 앞에 놓아두면 저승에 있는 조상에게 음식을 가져주는 이 역시 까마귀이다. 이렇게 보면 까마귀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임무를 띤 새이고 사람들이 이 새에게 뒤집어씌운 악감정은 까마귀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인 것이다.
글_유나영
각저총 현실천장벽화
고구려 금동투조금구. 삼국시대.
까마귀(烏) 1-5-1
이로부터 ‘까마귀날’과 ‘까마귀밥’의 습속이 생겨 정월 대보름의 행사는 까마귀가 궁중의 변괴를 예고한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1-5-2 적패지(赤牌旨)는 인간의 수명을 적어놓은 염라대왕의 책자로 제주도 서사무가 [차사본풀이]에 의하면 저승사자 강님이 이승으로 향하던 도중 까마귀에게 맡겼다가 잃어버리게 된다. 이 일로 횡재한 이는 뱀으로 적패지를 삼킨 후 9번 죽었다가도 10번 살아나는 끈질긴 생명을 얻게 된다. 또 이 일로 액을 당한 이는 솔개로 까마귀에게 도둑으로 몰려 서로 피터지게 싸운 후 지금까지도 원수지간이 되었다. 한편 적패지를 잃어버린 까마귀는 할 수 없이 자기 멋대로 사람의 수명을 외쳐대어 사람들의 생사를 엉망으로 만든다.
태극 太極 혼동. 근원. 하늘. 우주. 공존. 부귀. 명당
나전 이층농 장석. 20세기초.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아이들의 가위바위보 놀이와 같이, 서로를 쫓으며 끊임없이 도는 태극 도형은 우주가 음양의 대극 원리로 갈리며 만물을 생성해 나가는 원초적인 상태를 표상한다.
이는 모든 창조신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천지가 개벽하여 혼돈과 무정형의 상태가 하늘과 땅으로 나누어지는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주란(宇宙卵)이라는 신화적 상황으로 표현되는 것이 이것이다.
_ 보충참고 자료 하단
이러한 신화적 사고가 도가의 철학적 관념으로 발전하여, 태극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궁극적 실재로서 음양의 대립과 순환을 통해 만물의 생성을 지속해가는 하나의 원리가 되었다.
마치 하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칠 때 강마다 둥근 달이 존재하는 것처럼, 만물이 하나의 태극에서 나왔고 동시에 만물 하나하나 속에 태극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성리학의 우주론을 표상하고 있고, 지금은 국기를 통해 한민족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굳어졌지만, 사실상 태극 형태는 어느 특정 민족이나 종교에 국한되지 않은 매우 보편적인 상징체계이다.
아른하임(Arnheim, R.)은 심지어 태극이 기독교나 맑스의 변증법을 표상하는 마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일단 발화를 시작한 태극은 사상(四象), 즉 노양(老陽), 노음(老陰), 소양(小陽), 소음(小陰)으로 나누어지며, 다시 사상은 팔괘(八卦)로, 팔괘는 육십사괘(六十四掛)로 끊임없이 진화해 나가며 만물을 관장하는 기운을 이룬다.
또한 무극이 태극(無極以太極)이므로, 모든 원은 곧 태극이 된다. 청동기시대의 거울이나, 고인돌, 암각화에 새겨진 원은 그 자체가 태양이고 하늘이고 우주이며, 태극이기도 하다.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띤 태극 문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신라 감은사지 장대석에 새겨진 3태극과 미추왕릉에서 나온 신라 보검의 칼자루 장식에서 발견되는 3태극인데, 이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태극 문양이 형상화된 송나라 때의 「태극도설(太極圖說)」보다도 훨씬 거슬러 올라가는 연대이다.
이 3태극은 하늘, 땅, 사람의 삼재(三材)의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혹자는 이것이 단군 이래의 삼신사상(三神思想)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하며, 또 혹자는 중앙아시아의 고분에서 발견된 문양과 거의 같다고 하여 한반도와 서역의 태극사상이 연관성을 갖는다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특히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주로 그 기원을 단군세기에서 찾고 있다.
“기해원년 즉 B.C. 2182년에 우리 단군 임금께서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을 불러 신왕(神王)의 치화와 교화의 도(곧 신시(神市)의 치도)를 물으시니, 보륵은 엄지 손가락을 교환하여 오른손에 보태어 삼육대례(三六大禮)를 행하고 왕의 덕(德)과 이(理)로써 세상을 다스리기를 진언하였다.” - 행촌선생 이암 문정공, 「단군세기」 중에서
양손의 엄지 손가락을 겹치면 태극의 분할선이 눈 앞에 드러난다. 위의 글에서 을보륵이 말하는 삼육대례란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지낼 때 초배에는 세 번, 재배에는 여섯 번, 삼배에는 아홉 번 북을 두드리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 삼육대례의 표식이 바로 태극 문양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또한 이로부터 제례 의식이나 성전(聖殿), 사묘(祠墓) 등의 건축물과 문비(門扉)에 태극이 새겨지거나 그러한 의례에 쓰이는 악기, 특히 북의 양쪽 면에 태극을 그려넣는 풍속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까지 나타나는 태극은 주로 3태극, 혹은 4태극이다. 4태극은 주로 고구려와 백제의 유적에서 발견되는데 완전한 태극 형태라기보다는 파상문, 혹은 선형문에 가까운 모양이지만 부여와 공주의 산성, 또 익산 미륵사지 등에서 발견되는 파상무늬 기와 와당 내부에 나타난 문양은 거의 완전한 4태극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이후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까지는 3태극보다 2태극이 많이 나타나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다시 3태극이 많이 쓰였다. 특히 조선시대 충절과 효행, 또는 높은 공을 세운 공신의 무덤이나 집 앞에 세웠던 홍살문에 태극문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태극문에 유교적 관념이 짙게 배어 있음을 알려준다.
예로부터 태극문은 건축물, 민화는 물론 무속, 가구, 장신구 등에 광범위하게 쓰여왔다. 유교가 아무리 태극에 심오한 우주의 이치와 성리학의 세례를 부여했다고 하나 그 이전에 태극은 하나의 길상문이었던 것이다. 역리에 밝지않고 괘(卦)를 읽지 못해도 사람들은 그저 세상사가 음양의 이치에 합당하면 모든 것이 조화롭고 이를 통해 행복과 장수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태극의 순환과정]
엄지 손가락이 겹쳐져 나타난 태극의 분할선
계력도(季曆圖), 20세기 초
목인(안사순경전보). 조선시대
지장첩화(紙粧貼花) 반짇고리.19세기
석적(북의 일종), 조선시대
청화백자점성문면취병
글_유나영
음양의 기본원리를 반영한 태극의 기본형태
나전 이층농 장석. 20세기초.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반닫이 투각태함문 둥근 광두정. 19세기초
백자떡살. 조선시대
팔괘문경. 고려시대.
십이장무늬. 조선시대.
태극(太極) 1-1-1
천지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을 무렵, 우주의 형상은 거대한 계란과 같았는데, 중국인들의 조상 반고는 이 거대한 계란 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계란 속에서 무려 1만 8천년 동안 잠에 빠져 있다가 깨어나 도끼로 혼돈의 세계를 힘껏 내리쳤다. 그리하여 계란 속에 있던 맑고 가벼운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었으며, 나머지 무겁고 탁한 것들은 가라앉으면서 땅이 되었다. 이 ‘우주적 달걀(cosmic egg)’의 이야기는 전세계에 수많은 판본이 있는데, 힌두교의 성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그에 의하면 갈라진 알껍질 중 하나는 은이 되고 하나는 금이 되었다. 은이 된 알껍질은 땅이고, 금이 된 알껍질은 하늘이다. 바깥의 막이었던 것은 산이고, 안의 막이었던 것은 구름이고 안개다. 핏줄이었던 것은 강이며 그 안의 액체는 곧 바다가 되었다.
우주적인 알의 껍질은 공간에 서 있는 세계의 뼈대요, 그 안에 품고 있는 풍요한 생식력은 자연계의 역동성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