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산송 문제의 심화와 정약용의 풍수 인식
풍수집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신 재 훈, 건국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논문내용의 일부입니다.
1) 사마광, 정이천, 장횡거, 주희의 풍수관과 葬論
먼저 사마광은 요즘 사람들이 음양과 금기로 인해 날짜와 장지를 지나치게 따진다고 비
판하면서 풍수설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드러냈다. 그는 葬師(地師를 뜻함)를 동원해 길지와
길일을 따지는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면서 길한 땅과 시간을 점쳐주는 이들은 오직 돈을 바
라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자신의 형이 음양술의 허구성을 비웃은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
는 풍수설을 기반으로 한 당시의 장례 풍습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족인이 말하길 근처에 장생이란 자가 있는데 좋은 지사이다. 여러 현이 모두 그를 쓴다. 형
이 곧 장생을 불러 2만전을 허락하였다. 장생은 시골의 농부로 대대로 지사를 했는데 농부들의
장사를 했는데 소득이 불과 천전이 안 되었다.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형이 말하길 너는
능히 나의 말을 사용할 수 있으니 나는 너로 하여금 장사에 나의 말을 쓰지 않으면 장차 다른
지사를 구할 것이다. 장생이 말하길 오직 명하시면 듣겠습니다. 이에 형이 자기의 뜻으로 세월
과 일시 및 광의 깊고 낮음과 넓고 좁음을 스스로 처리하였다.47)
이처럼 사마광은 일찍이 음양가들은 많은 사람들 미혹에 빠뜨리는 세상의 근심거리라고
혹평하면서48) 음양에 입각한 풍수설을 비판하고 일정한 날짜와 장지로 장례가 족할 수 있
46) 『풍수집의』의 선유들의 장론에 대한 연구는 이화, 「조선조 풍수신앙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에
대략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이를 참고하되 대체로 원문을 참고하여 내용을 본고의 취지와 부합하도록 재구성하였다.
47) 정약용, 『풍수집의』, 司馬光葬論
“族人曰 近邨 有張生者 良師也 數縣皆用之 兄乃召張生 許以錢二萬 張生 野夫也 世爲葬師 爲野人葬 所得不過千錢 聞
之大喜 兄曰 汝能用吾言 吾俾爾葬 不用吾言 將求他師 張師曰 惟命是聽 於是 兄 自以己意 處歲月日時及壙之淺深廣狹”.
48) 정약용, 『풍수집의』, 司馬光葬論
“吾嘗疾陰陽家立邪說以惑衆爲世患 於喪家尤甚 頃爲諫官 嘗奏乞禁天下葬書”.
다고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였다.
한편 신유학의 鼻祖로 평가받는 정이천은 전술했듯이 택지를 정할 때 땅의 미악을 판별
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음을 그의 장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이천 역시
땅 색의 빛과 윤기, 초목의 무성은 증험에 불과므로 땅의 아름다움을 볼 뿐이지 음양가의
화복을 보기 위함은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다.49) 그러면서 택지의 방위로 미혹되고 날의
길흉을 결정하는 것은 혼란스럽다고 하면서 지리서는 가장 의리가 없다고 해 자신은 풍수
의 화복설에 미혹되지 않았음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50) 즉, 장사를 치룰 때 자연환경을 고
려할 필요는 있지만 자손의 화복을 위해 날짜와 장지를 점치는 당시의 음양가적 풍수설을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51) 장횡거 역시 매장을 할 때 풍수와 산강이 있어야 하지만 의리는
전혀 없다고 하면서 풍수설의 화복설을 배격하고 있다.52)
마지막으로 주희는 장론에서 당시 풍수가들이 말하는 바를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다.
다만 풍수는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는 자식된 마음으로 편안한 곳에 매장하고 싶은 바램
에 그쳐야 한다고 보고 있다. 즉 “大抵擇地而葬 人情也”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좋은
땅을 골라 부모를 장사하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므로 굳이 배척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다. 그러나 주희 역시 부귀를 구하기 위해 좋은 장지와 날짜를 잡으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 같은 중용의 차원에서 주자는 정이천이 말한 인정에 의한 ‘바람이 순하
고 땅이 두터운 곳(風順地厚之處)’를 알지 못해도 옳지 않은 것이고 알고도 그 이치를 따르
지 못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말한다.53)
이들의 풍수론과 매장관을 정리하면 대체로 당시의 음양가의 명당과 길일을 쫓는 풍속을
비판하되 땅의 미악을 판단하고 좋은 장지에 부모를 매장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수용하
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자손이 부모의 장지를 통해 복을 받으려고 정작 부모의 장
례를 제대로 치루지 못하는데 이르며 협잡꾼에 불과한 地師의 말에 현혹되어 많은 재물을
잃어버리는 당대의 풍속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9) 정약용, 『풍수집의』, 程伊川葬論
“卜其宅兆 卜其地之美惡也 非陰陽家所謂禍福者也”
“然則曷爲地之美者 土色之光潤 草木之茂盛 乃其驗也”.
50) 정약용, 『풍수집의』, 程伊川葬論
“惑以擇地之方位決日之吉凶不亦泥乎”
“世間術數多 惟地理之書最無義理 祖父葬時 亦用地理人 尊長皆信 唯先兄與某不然”.
51) 이화, 앞의 논문, 87쪽.
52) 정약용, 『풍수집의』, 張橫渠葬論
“葬法 有風水山岡 此全無義理”.
53) 이화, 앞의 논문, 89~90쪽.
2) 정약용의 풍수론
정약용의 풍수론 역시 선유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특히 여재의 장론에 주
를 붙이면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장례의 기간과 택지의 본 뜻이 풍수설의 길흉설과 다르고
본의가 다르다는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고 있다. 그의 견해는 7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 장
사의 기한은 풍수서인 葬書에서 말하는 예와 다르고 예기에서 장사의 기한을 정한 이유와
달라 습속을 해친다는 것이다. 둘째는 풍수서에서 말하는 장사의 때와 길흉 관계는 전혀
일치하지 않고, 셋째는 장사지내는 때는 고례에 본래 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살폈다. 넷째로
는 장수와 후손의 끊어짐은 장사지내는 때와 葬地로 정할 수 없다는 견해를 보이며 다섯째
로는 묘의 지형은 편안함이 중요하며 길흉과 자손의 부귀와는 관계가 없다고 논증했다. 여
섯 번째로 관직이나 녹봉의 차이는 장지와 관련이 없다고 말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풍수서
인 장서의 길흉으로 인해 습속이 잘못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54) 대체로 정약용은 장례
의 기한을 점치고 장지를 후손의 복을 위해 정하는 습속에 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장례의 기한은 조문을 하기 위한 기간이란 본 뜻을 밝히고55) 장지는 조상의 체백을 편안히
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56)
사마광의 장론에 대해서 정약용은 “우리 동쪽은 비록 3개월 내에 장사해도 이를 ‘權窆’
(좋은 장지를 구할 때까지 가매장하는 것)라 하고 길지를 구하면서 遷葬을 도모한다고 당시
의 습속을 비판하고 있다.57) 즉, 길지와 길일을 찾기 위해 장례 기일을 미루고 가매장을 하
거나 천장하는 습속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정이천과 주희의 장론에 대해서는 정이천과 주희의 장론은 모두 人情에 의한 것임을 강조
하고 있다.58) 즉, 정이천과 주희가 풍수설에 유연한 태도를 보이면서 땅의 형세와 동기감응
론에 긍정적 입장을 보이는 것은 자연환경적으로 좋은 장지와 좋은 날짜에 장사를 지내고자
하는 ‘인정’과 관련 있는 것이지 풍수설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란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정약용의 풍수관은 『풍수집의』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俟菴風水論”에서 더욱 총체
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그의 풍수관은 풍수설에 대한 비판을 넘어 당시의 장례 풍속
54) 정약용, 『풍수집의』, 呂才葬書
“此則貴賤不同 禮亦異數 欲使同盟同軌 赴弔有期 量事制宜 遂爲常式 法旣一定 不得違之 故先期而葬 謂之不懷 後期而
不葬 譏之殆禮 此則葬有定期 不擇年月 一也... 葬書敗俗 一至於斯 其義七也”.
55) 정약용, 『풍수집의』, 呂才葬書
“此則貴賤不同 禮亦異數 欲使同盟同軌 赴弔有期 量事制宜 遂爲常式 法旣一定 不得違之”.
56) 정약용, 『풍수집의』, 呂才葬書
“上利下利 蔑爾不論 大墓小墓 其義安在 及其子孫 富貴不絶”.
57) 정약용, 『풍수집의』, 司馬光葬論
“吾東雖三月而葬 名之曰權窆 更求吉地 以圖遷葬”.
58) 정약용, 『풍수집의』, 朱晦菴葬說
“大抵擇地而葬 人情也 今但命之曰山水環合”.
에 대한 비판과 사회문제인 산송과 효도에 대한 관념을 비판하고 있어 흥미롭다.59)
먼저 선행 연구자인 이화가 밝혔듯이 정약용의 풍수관은 “非禮, 非孝子之情”으로 요약할
수 있다.60) 이는 당시의 장례 풍속이 예와 효도의 관념에 어긋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우선 지금의 장례 풍속은 부모를 매장하면서 복을 구하는 것으로 고
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으면서 『효경』의 “옛 사람은 그 宅兆를 점쳤다”는 구절을 인용
해 예를 합리화했다고 비판하였다.61) 즉,『주례』의 昭穆法과 周公의 족장법으로 장사를 지
내면 충분한데 왜 길지를 구하는지를 물으면서 당시 사람들이 예의 본질을 상고하지 않으
면서 효도를 빙자해 풍수설에 입각한 잘못된 장례 풍속을 지키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이는 정약용의 효자론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부모의 죽음을 이용해 자신이
나 가문의 중흥을 꾀하려 한다는 점에서 장례와 효자 선정의 풍속은 동일한 맥락에서 정약
용에게 비판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얼마나 큰 일인가. 그런데 감히 딴 뜻을 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저 효자란 사람들은 부모의 죽음을 이용하여 세상을 진동시킬 명예를 도둑질하고 있
으니, 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그런데 저 효자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째서 기필코 꿩ㆍ잉어
ㆍ사슴ㆍ자라ㆍ눈 속의 죽순만을 즐겨 찾는단 말인가. 또 호승(胡僧)이나 우객(羽客 도사(道士))
처럼 용(龍)이 내려오고 호랑이가 호위하여야만 효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야말로 부
모를 빙자하여 명예를 훔쳐 부역(賦役)을 도피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들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62)
이처럼 <효도론>에서 정약용은 부모의 죽음을 이용해 터무니없는 이야기와 과장된 행위
를 꾸며내 자신과 집안의 영달을 꾀하려는 당시 효자 선정의 폐해를 논술하면서 잘못된 효
도 관념을 비판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례 풍습에서도 부모의 상을 슬퍼하고 그 시
신을 편안하고 좋은 곳에 정성스럽게 매장하려고 명당과 길지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장례를 통해 자신의 부귀와 영달을 꾀하려고 하는 전도가 뒤바뀐 당시 사람들의 효
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특히 효도론과 풍수론에 보이는 정약용의 비판 대상은 효행과 장례에 있어 당대인들이
59) 정약용, 『풍수집의』, 鄭漢奉徑地粹言
“葬親者 溺信風水 至侵占他山 伐人塚 棄人祖父母骸骨 怨連訟結 抵死求勝 至於傾家敗業 而地終不可得 福應尙遠 禍應
至近 何其愚一至此”.
60) 이화, 앞의 논문, 93쪽.
61) 정약용, 『풍수집의』, 呂才葬書
“今人多引孝經 謂古人亦卜其宅兆 蓋未深考乎古禮也”.
62) 정약용, 『다산시문집』제11권, <논>, 효자론
晉文公之言曰父死之謂何 或敢有他志 彼或乘此之時 而因以盜其震世之名 尙亦何哉 且人之嗜好不同也 有嗜羊棗者 有嗜
昌歜者 有嗜芰者嗜蜜者嗜芋者 人之嗜好不同也 何孝子之父若母 必唯雉鯉麕鼈雪中之笋 是嗜是索耶 又必降龍伏虎 若胡
僧羽客之爲 然後方可謂之孝子乎 是其藉父母以沽名逃役 飾奸言以欺君者也 不可不察.
그 안에 내재되어 있어야 할 효심은 사라지고 효심을 나타내는 행위에 두는 관념이었다.
그는 <효도론>에서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효행을 드러내 자랑하고 이를 알면서도 효행이라
고 떠받들어주는 당시 시속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풍수의 음양
설에 대해 터무니없는 믿음을 가지고 많은 돈을 낭비하고 산송에 휘말리는 행태와 비교할
때 매우 유사한 부분이다.
이와 같이 정약용은 ‘사암풍수론’에서 그의 이러한 현실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지향하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먼저 조선 후기 당시에 풍수를 신앙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단적으로 “예와 효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풍수설의
허구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63) 즉, 지사들이 말하는 길지에 조상의 몸을 묻어 지하
에 남은 조상의 혼백을 통해 자손의 복록생육이 번창하고 넘친다면 이런 땅은 그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터인데 왜 지사 스스로 취하지 않고 卿相之門으로 달려가느냐는 것이다.64)
또 당시 지사들이 남의 집에 족보를 보고 그 산소의 위치와 분묘가 위치한 산지의 형태
를 보고 자신의 영리를 위해 거짓말을 지어내 산소를 옮기게 하거나 장지를 불합리하게 선
택하게 하는데 이를 알지 못하고 그대로 믿는 당시의 현실을 개탄하였다. 즉, 본래 장지를
점치고 길일을 바라는 것은 『효경』에서 말한 “자리의 징조를 점쳐서 편안히 두는 것”에
입각한 것인데 지금은 본말이 전도되어 자리를 점치는 것에 효심은 사라지고 자신이나 자
신의 가문이 부귀해지고 영달하려는 사욕에서 우러나오게 된 당시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법에 대한 고민 없이 체면이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당시의 풍습을 활
용해 자신의 집안을 높이거나 경제적인 이득을 노리고 산송을 벌이는 사족층과 풍수설을
맹신하고 이에 경도되는 일반 백성들의 잘못된 장례 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정약용이 『풍
수집의』를 저술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맺음말
살펴본 것처럼 정약용은 조선후기에 성리학적 종법질서에 편입해 폭넓게 수용되어 산송
과 천장 등의 사회문제를 양산하게 된 풍수지리설의 묘지풍수에 입각한 장례 풍속을 비판
63) 이화, 앞의 논문, 94쪽.
64) 정약용, 『풍수집의』, 사암풍수론
“地師旣得此巨寶 胡爲不自私以陰葬其父母 顧乃趨而獻之於卿相之門也”.
하고 성리학적 예학에 입각한 장례 풍속을 밝혀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정
약용은 기본적으로 예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서건학의 『독례통고』를 저본으
로 하여 선유 26인의 葬論과 자신의 견해를 담은『풍수집의』를 저술하였다. 이는 정약용
이 고증학적 접근방식을 통해 올바른 장례 풍속을 확립하고자 한 시도였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당시 풍수설에 대한 비판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1차적으로
비합리적이며 미신적인 음양가에 경도된 풍수설을 명분으로 영리를 취하기 위해 사족들과
일반인을 속이는 지사들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당시 커다란 사회문제로 자리 잡게 된 산송
갈등과 천장 문제의 원인이었고 사대부와 경제적으로 성장한 향임과 향리 등은 풍수설을
이용해 집안의 체면과 경제적 이권을 노리는 산송을 지루하게 진행했다. 사례를 통해 살펴
보았듯 조선 후기의 산송은 풍수설에 입각한 명당과 길지로 인한 분쟁이었으나 그 이면에
는 해당 지역의 기득권과 경제적 요인이 내재된 권력지향적인 투쟁이었다. 때문에 이 문제
는 점차 조선후기 사회에서 사회적 문제를 복잡하게 포함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그 결과 정약용과 같은 지식인은 이러한 문제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풍수설에 대한 잘못
된 인식과 효도 관념에 대한 본말 전도에 대해 개탄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증학적
방식을 통해 예를 회복하려 한 시도인 『풍수집의』와 같은 저서를 지었을 것으로 예상된
다. 여기서 정약용은 기본적으로 매우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보이면서 당시 성리학적 부계
질서와 효도관념에 편승하여 장례 문화에 만연해있던 풍수설 중 미신적인 부분인 음택풍수
와 동기감응설을 학문적으로 고증하여 이것이 미신이며 혹술임을 밝혀내려고 하였다.
또 장례에서 효의 본질인 부모의 몸과 영혼을 편안히 하고 그 슬픔을 표현한다는 기본
정신이 퇴색된 현실을 비판하면서 『효경』의 기본정신과 『주례』의 장례 문화로 돌아갈
것을 기원했다는 점을 『풍수집의』를 통해 재확인 할 수 있었다. 향후 산송과 천장 등 조
선후기의 장례 풍습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또한 요망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