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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강론말씀

2026.06.21 일 오전미사 최상훈 티모테오 주임신부님 강론 말씀

작성자이순자 유스티나|작성시간26.06.21|조회수35 목록 댓글 0

 

2026.06.21 일 오전미사

 

최상훈 티모테오 주임신부님 강론 말씀

 

오늘 제의방에 들어가서 제가 제의를 입고 있는데 우리 복사 중에 한 명이 신부님 오늘 강론 짧아요?” 마음의 부담이 크게 오는데 어떻게 할까요? 준비하는 대로 갈까요?

남자분들은 월드컵 때문에 잠을 잘 못 주무셨나요? 자 가봅시다.

오늘도 시네마 천국처럼 여행을 떠나보는 겁니다.

 

오늘 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서입니다.
예레미아는 좀 특이한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오늘 내용은 그 유명한 이 예레미야의 5가지 고백록 중에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레미야처럼 인간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었나 아마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왕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레미야를 향해서 삿대질을 하고 돌을 던지고 다리를 걸며 온갖 욕을 다해 댑니다. 예레미야는 두려움을 느끼는 겁니다.

상황은 이런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태평성대인 시절입니다. 그런데 야훼 하느님이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 백성에게 가서 전하여라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다라는 것을 선포하라는 겁니다.
안 됩니다.” 그리고 도망을 갔어요.

그러나 예레미아는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의 영에 이끌려서 그 백성들 앞에서 예루살렘은 멸망한다라는 것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개떼같이 몰려들어서 예레미야를 구석으로 몰아세우고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히브리어지만 마골-밋사빕(Magor-missabib)” 하고 예레미야를 몰아세웁니다. 이 표현은 뭐냐 하면요. 마고르는 두려움입니다.
밋사빕은 사방에서 틈도 없이 온갖 것에 둘러싸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굳이 우리 사자성어로 표현한다면 사면초가(四面楚歌)’.
그 두려움이 빠져나갈 틈 없이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옥죄어 오는 거예요. 집단 따돌림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 보면은 예레미야는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가엾은 어머니, 왜 저를 낳으습니까?”라고 자기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그 두려움과 공포가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표현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느님에 대한 열정, 그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얘기하는 장면이 오늘 1독서의 내용입니다.
그 공포, 그 두려움, 거기서 헤어난 예레미아!


그런데 그 내용을 그대로 복음에 들어와 보니까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생각했던 거예요.
제자들이 겪게 될 상황을 미리 아셨던 것입니다. 구세주라고 불렸던 예수라는 사람은 이제 골고타를 걸을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가장 비참하고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죽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미리 그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요. 그것도 세 번씩이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얘기합니다.


들어보시죠.

그러니 너희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는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육신을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참새도 먹이지 않느냐 나는 너희들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어두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계속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당할 그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힘을 주는 내용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도대체 제자들은 왜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아마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받는 것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 이 복음이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과연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지 그들은 두려워했을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그 당시 사람들이 누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제자들은 세상 때문에 세상을 향해서 두려움에 떨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게 심리학적 접근이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인간학을 전공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두려움에 붙여진 존재라는 것.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려움에 노출되고 두려움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
두려움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가장 확실한 두려움은요,
어떤 대상이나 경험에 의해서 두려움이 축적된 겁니다.
예를 든다면 어릴 때 폭력적인 아버지와 거기에서 상상도 못하는 공포 속에서 어린 날을 지내야 했다면 그 트라우마로 계속 나를 지배하고 나이를 이렇게 먹었어도 가끔씩 떠오르는 공포와 두려움이 나를 휩쌉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습니다. 과거에 어떤 공포의 대상,

내가 저녁 어스름에 우리 집에 가려면 반드시 공동 묘지를 지나야 해. 그때 느꼈던 그 공포 그 두려움 어떤 대상 때문에 어떤 상황 때문에 느끼는 그런 것이 있겠죠.
그러나 사실 이것보다도 인간은 더 큰 두려움에 붙여진 존재입니다.

그것은 무슨 두려움이냐 하면 인간으로 존재함으로써 두렵습니다.
이것을 내재적인 두려움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생기는 순간부터 인간은 두려움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상황을 정리해 보시죠.

어머니 뱃속에 양수 속에서 헤엄치면서 가장 편하고, 가장 안온한, 가장 적당한 온도와, 가장 평화로운 상태에서 지낸 그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 탯줄이 잘려지고 엄마와 분리를 경험하겠죠.
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인간은 누구나 분리 불안과 공포를 느끼겠죠.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면서 울게 되는 것이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두려움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인간,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내가 존재하면서 느끼는 불안감, 공포, 두려움 이것이 우리 뼛속에 우리 핏속에 내재된 두려움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닌 사람 계십니까?

나는 무서운 게 없어, 나는 두려운 게 없어, 한 가지도 두려운 게 없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이 하느님이에요. 그 분이 하느님입니다.

 

저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건강이 약해지고 어떤 사람과 관계가 어그러지고, 내가 계획했던 그런 원대한 포부가 실패하고 오랫동안 해오던 일이 흔들리면서 느끼는 두려움.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죠. 이제 끝났어. 나는 실패했어.
나는 실패한 인생이야 라는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나이가 이렇게 먹었는데 나는 80-90이 되어서 내 노후를 살아갈 그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어.

그 공포 그 두려움.


결정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느끼는 공포는 소멸의 두려움. 나는 이 세상에서 없어질 거라는 거.
한 줌의 흙처럼 먼지처럼 나는 잊혀질 거라는 거. 그 고통 그 두려움.

 

제가 두 달 전에 건강 검진을 했어요. 성모병원을 가야죠 당연히.

건강 검진을 하는데 가기 이틀 전부터 두려운 거예요. ‘안할까?, 하지 말까?’

그 이틀 전부터 무엇을 무슨 검사를 받을까? 어디까지 받을까?
CT에서 혹시 그게 나오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

하여튼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 잊혀짐에 대한 두려움.

 

여러분, 여러분 인생에서 느끼는 이 두려움과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여러분은 어떻게 이겨내십니까? 어떻게?

자유를 만끽하면서 ! 좋다라고 얘기하십니까?
무엇으로 어떤 것으로 이 공포와 두려움을 해결하십니까?

어떤 이는 취미 생활에 집중을 할 수 있겠죠. 재미있는 것에 오락에 빠져들 수 있겠죠.
어떤 이는 술, 과도하게 술을 먹어보는 거예요. 어떤 이는 약물에 의존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그 기간 공포를 잊는 시간이 짧다는 거.

 

어제 그저께 어제인가요? 뉴스에 나왔어요.

서울 한복판 강남에서 어떤 여자가 거품을 물고 쓰러진 거예요.
사람들이 출동을 했죠. 봤더니 그 여자 가방 속에는 프로포폴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프로포폴이 뭡니까? 프로포폴이 뭐예요?
잘은 모르지만 우리 내시경을 할 때 맞는 주사예요. 수면 내시경 할 때 맞는 주사예요.
인간은 이렇게 그 두려움과 그 공포와 그 고난을 몰아내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사용할 거예요.
그러나 놀랍게도 그 기운이 떨어지면 곧바로 찾아오는 더 큰 공포가 우리를 짓누릅니다.

신기하죠. 잠시 있는 순간 행복하고 좋아요.
그런데 그 약효가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 더 큰 압력이 나에게 가해지며 우리는 느낄 수 있잖아요.
그 공포...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성경은 인간이 그 공포를 그 두려움을 언제나 곧장 승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달려들면 그 공포와 불안이 한꺼번에 싹 없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기다렸구요,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헤맸어요.
이스라엘은 유배의 강가에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바벨론 강 기슭에 앉아 눈물 짓노라 하고 그들은 울었어요.
엘리야는 지쳐 쓰러졌고, 욥은 까닭 모를 고난 속에서 울부짖었습니다.
오죽하면 시편의 저자는 깊은 구렁 속에서 울부짖었어요. 깊은 구렁 속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내려가는 두려운 시간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가지는 믿음이 무르익는 역사입니다.
두려움이 한꺼번에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두려움 가운데 하느님께 우리의 시선이 향할 때 놀랍게도 우리의 믿음이 더 풍부해지고 강해지는 순간이라는 것이죠.
내려가는 그 두려운 시간이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는 놀라운 체험의 시간이라는 거.

이것을 터득하는 것, 이것을 배워 나가는 것, 이것을 신앙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가는 그 두려운 시간에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만나는 거예요.

그러므로 신앙은 두려움과 절망을 느끼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두려움,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시계입니다.
내가 세상 속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내가 믿는 그 자비의 은총의 하느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시는 시간이구나.
그것을 놓쳐버리면 우리는 공포에 짓눌려 사는 거겠죠.


더 나아가 더 밑으로 더 구렁텅이로 바로 이 순간 내가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이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신다는거.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은 우리는 두려움의 시간에 당장 롸잇 나우(Right now)’ 가 아니더라도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시잖아요.

 

너희들은 참새보다 귀하지 않으냐 나는 너희들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어놓았다.”
얼마나 뿌듯한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두렵다 하더라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께 경외심을 갖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오늘 미사의 주제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빠질 것인가 두려움을 극복할 것인가 그것은 내가 하느님께 대한 시선의 문제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교우님들 두려워하지 마시고, 그리고 일어나세요.
결코 창조주 하느님은 여러분을 내팽기치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우리에게 주는 화두 같은 말씀을 기억합시다. 아멘.

 

 

** 주임신부님의 강론 내용과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을 수 있습니다. 양지하시고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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