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원래 아르센 벵거를 원했다. 그것이 초기 계획이었다. 그러나 벵거는 당시 부임할 수 없었고, 대신 정중하게 한 사람을 추천했다. 바로 필립 트루시에였다. 그는 여러 면에서 벵거의 ‘미니 버전’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프랑스인이고, 마른 체형에 안경을 썼으며,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프랑스 하부 리그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았고, 아프리카에서도 오랜 기간 활동했다.
일본은 트루시에를 임시 감독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벵거는 끝내 일본에 오지 않았고, 대신 트루시에가 일본 축구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오늘날 일본이 유럽 강호들과 대등하게 맞서는 모습이 놀랍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일본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빠르게 발전했는지를 생각하면 더 경이로운 일이다.
트루시에는 1998년 일본 대표팀에 부임했다. 그의 임무는 단 하나였다.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국으로서 일본을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그가 떠나며 남긴 유산은 오늘날 일본 축구의 기반이 됐다. 이제 일본이 이번 대회에서 8강 후보로 거론되는 것도 절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당시 트루시에가 마주한 일본은 과거에 묶여 있었다. 선수단은 노쇠했고, 일본 사회 특유의 관습과 위계질서에 깊이 얽매여 있었다. 당시 최고의 선수는 나카타 히데토시였다. 그는 막 세리에A의 페루자로 이적한 상태였지만, 대표팀 동료들은 그를 ‘나카타-상’이라 불렀다. 즉 ‘나카타 씨’라는 의미였다. 문제는 호칭과 형식적인 소통 방식이 경기 중에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대표팀은 마치 일본의 일반 직장처럼 엄격한 위계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초기 훈련의 대부분은 의사소통에 관한 것이었다. 팀은 그저 ‘괜찮다’라는 말밖에 할 줄 몰랐다. 경기 중 ‘가!’라고 외치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우리는 매번 ‘나카타-상’이라고 부를 시간이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했다.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려 하면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마치 모든 문이 닫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선수들이 서로에게 명확하게 지시하고, 공을 두고 ‘예’, ‘아니오’를 말하는 훈련까지 해야 했다. 동시에 내가 일본 문화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해야 했다.”
트루시에의 개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참패를 겪은 뒤, 트루시에는 기존 베테랑 선수들을 과감히 제외하고 23세 이하 대표팀을 중심으로 재편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망주들을 빠르게 끌어올리며 팀의 체질을 바꾸는 데 집중했다. 문화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 자신이 ‘게릴라식 방법’이라고 부른 방식까지 동원했다.
부르키나파소에서 전지훈련을 마친 뒤, 선수들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보보디울라소에서 열리는 경기까지 합승 택시를 타고 이동하게 했다.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스스로 적응하고 버티게 하려는 의도였다. 레바논에서 열린 아시안컵 원정은 일본 축구가 완전히 달라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트루시에는 카타르와의 조별리그 경기를 앞두고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경기 이틀 전, 선수들에게 자유 시간을 줬다. 보통은 중국 식당이나 일본 식당에 함께 가곤 했지만, 이번에는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하지만 자유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트루시에는 호텔로 돌아가 모든 식당을 닫게 했고, 선수들이 팀 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금지했다. 대신 프런트 데스크에 요청해 선수들에게 현지 식당과 장소를 안내하도록 했다. “그들이 베이루트를 직접 경험하길 원했다. 팀이 아닌 한 개인으로서 원하는 곳에서 먹고, 자유롭게 행동하고, 거리를 돌아다니게 했다.”
팀 정장이나 축구복밖에 없어서 처음에는 밖에 나가기를 꺼리는 선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트루시에는 선수들을 두세 명씩 짝지어 택시나 현지 버스를 타고 나가도록 했다. “선수들은 각자 다른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그것은 그들이 인간적으로 성장할 기회였다. 새로운 모험이었고, 새로운 이야기였다. 경험은 그들의 시야를 넓혀주었고, 성격에도 신선한 변화를 불러왔다. 그 이후로 선수들은 더 활기차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파리에서 열린 경기에서 당시 세계 챔피언 프랑스 상대로 0대5로 참패한 것이다. 트루시에는 곧바로 훈련 방식을 바꿨다. 선수들에게 고의로 반칙 하도록 지시하는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이 역시 일본 사회에서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트루시에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선수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이미 패배를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들은 일주일 내내 공식 만찬에 초대된 손님처럼 경직된 태도를 보였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고, 긴장을 풀지 못했다. 거대한 경기장에서 그들은 작고 두려워 보였다. 상대를 지나치게 존중한 나머지 싸워보기도 전에 정신적으로 이미 패배한 상태였다. 나는 그들이 강팀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열등감을 없애야 했다.”
그래서 트루시에는 더 거친 현실을 받아들이게 했다. 훈련 캠프에서 선수들에게 유니폼을 잡아당기는 연습을 시키고, 팔꿈치와 어깨를 사용하는 몸싸움, 강한 태클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거친 플레이를 꺼리던 선수들도 결국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나는 그들이 경기장에서 짓밟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벌써 25년 전의 일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네덜란드를 상대로도 치열하게 맞서고, 엔도와 미토마와 같은 핵심 선수들이 빠진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일본은 모두 트루시에가 만든 팀의 영향 덕분이다. 트루시에는 일본 축구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의 문화 자체까지 바꿔놓았다.
감독직을 마치며 일본 축구협회는 트루시에에게 1955년산 샤토 페트뤼스 한 병을 선물했다. 와인은 지금까지도 개봉되지 않은 채 그의 지하 저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이 넘어야 했던 산을 상징하는 하나의 트로피처럼 여긴다고 말한다.
2002년 당시 일본에 있었다는 것은 마치 런던에서 펑크 문화가 탄생하던 순간을 지켜보는 것과도 같았다. 트루시에의 팀은 경기력 면에서 기대를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젊은 세대의 반항과 변화의 중심이 되었다. 선수들은 머리를 화려하게 염색했고, 기성세대처럼 옷을 입지도 않았다. 이러한 자유분방함은 보수적인 일본 사회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오사카에서는 튀니지를 꺾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약 900명(대부분 학생)이 도톤보리강 다리에서 뛰어내렸고, 시즈오카현 미드라노웨어에 위치한 대표팀 미디어 센터가 공개되자 선수들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약 5,000명이 몰려들었다. 터키전에는 46,000명의 관중이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했고, 경기 후에는 “Allez Nippon”을 외치며 응원을 이어갔다. 그러고는 쓰레기를 정리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트루시에는 일본의 다음 세대 재능을 적극적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인물이었고, 초기에는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일본 축구협회는 그의 철학을 받아들였다. 일본의 경제력은 유소년 축구 육성의 발전할 수 있게 했고, ‘캡틴 츠바사’와 같은 만화도 클럽과 학교에서 축구를 대중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본 축구협회에는 여전히 2050년 월드컵 우승이라는 장기 계획이 존재하며, 모리야스 하지메 체제의 연속성도 유지되고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 그보다 더 오래 재임 중인 감독은 프랑스의 디디에 데샹뿐이다. 다만 일본이 카메룬, 덴마크, 콜롬비아, 스페인, 독일 등을 상대로 인상적인 승리를 거뒀지만, 아직 16강을 넘지 못했다는 점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편, 이제 71세가 된 트루시에는 현재 와인 생산에 더 집중하고 있지만, 오래된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네덜란드전 무승부를 평가하면서도 여전히 일본이 마지막 단계를 넘기 위해서는 특유의 ‘존중과 위축’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보고 있다.
“기술적, 전술적으로 일본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유럽 최정상 팀들을 상대할 때는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후반전은 일본이 신체적 대응과 속도에서 준비가 되었을 때, 어떤 상대와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현재 일본은 볼 컨트롤, 전술 조직력,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현대적인 축구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제 다음 단계는 높은 수준의 경기에서 신체적, 정신적 강인함을 더 끌어올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