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묵상]
2026년 6월 7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 신명 8,2-3.14ㄴ-16ㄱ
제2독서 1코린 10,16-17
복음 요한 6,51-58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
영적 고전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의
저자인 월터 J. 취제크 신부님은 1940년 위장 이주노동자로
소련에 잠입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습니다.
강제노동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그분은 비밀리에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3년 만에 미국으로 귀환하기까지의 긴 세월 속에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지 5년 만에 다시 드린 어느 날의 미사를
신부님은 잊지 못했다고 회고합니다.
건포도로 만든 미사주와 부엌에서 간신히 구한 빵,
위스키 유리잔과 회중시계 뚜껑을 성작과 성반 대신
사용해 봉헌한 그 미사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강제노동 수용소라는,
인간의 존엄이 철저히 짓밟히던 자리에서
이루어진 그 미사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거룩한 양식이 그들의 참된 생명이었습니다.
그들을 지탱한 힘은 더 많은 음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을 붙들고 계심을 깨닫게 해 준 성체였습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은 단순히
생존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신앙을 형성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길러낸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우리는 살기 위해 매일 양식을 먹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성찬례에서 우리가 먹는 양식은
단순한 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마음과 삶의 방식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 양식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갈망하는
굶주림을 채우며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빚어 갑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요한 6,5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 10,16)
‘살과 피’는 성경에서
한 인간의 생명과 존재 전체를 뜻합니다
.(마태 16,17; 1코린 15,50; 히브 2,14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그분의 생명 전체,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 안으로 초대하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장 일상적인 빵과 동일시하며,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요한 6,51)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그분이 우리의 일상과 배고픔 속으로
들어오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빵을 매일 먹어야 하듯이
, 성체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며
우리는 이를 통해 그분과 점점 더 일치하게 됩니다.
성체는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화합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이 우리를 형성하듯이,
영적 양식인 성체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빵을 먹는 사람은
그분과의 친교 안에 머무릅니다.
우리는 성찬례에 참여함으로써
개인의 영적 성장 안에서 성체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동시에 공동체적으로도, 성찬례에 참여하는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이라도 한 몸입니다”(1코린 10,17)라는
진리 안에서 상호 일치와 친교의 형제애를 살아가게 됩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서로 나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서
로에게 형제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양식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그 빵이 오늘 우리의 삶이 되게 합시다.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
2026년 6월 8일 월요일 [녹]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12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 설교는 군중과 제자 모두를 향한,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시작하고
또한 끝맺습니다(마태 4,25; 7,28-29 참조).
산상 설교는 특정 민족이나 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보편적 가르침입니다.
먹고사는 문제, 울고 웃는 문제, 그리하여 이 삶을
그토록 모질게도 살아 내야 하는 까닭을 담고 있습니다.
행복 선언은 현재 상태를
미화하거나 치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함, 슬픔, 무력함, 굶주림이라는
인간의 낮은 자리를 들추어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5,3)은 하느님 나라를
억지로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부족함을 견디며 하느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가난은 유다의 쿰란 공동체가 말하던
‘영 안에서 낮아진 이들’과도 닿아 있습니다.
그들은 유배의 고통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 내며,
자신의 힘 없음이 오히려 하느님을 향한 기회이자
초대가 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행복 선언이 그리는 현실의
‘슬픔’은(5,4 참조) 역사 속 이스라엘이 겪은
상실과 폐허가 된 시온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렇기에 이 선언은 현실이 팍팍하여 가난과
힘겨움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을 향합니다
. 힘이 없기에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약하고 부드럽기에 ‘온유’합니다(5,5 참조).
‘의로움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은(5,6 참조)
단순한 윤리적 욕망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정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실을 고통스럽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는 삶을(5,7-9 참조) 꿋꿋이 살아 내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박해받는 이들에게(5,10 참조)
약속된 하늘 나라는, 세상이 짓밟은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마지막으로 뒤집어 주실 새로운 질서가 됩니다.
그 질서가 가리키는 행복은 현실의 찬란한 성공이 아니라,
상처의 한가운데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존재에게
주어지는 ‘조용한 회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기어이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어이’를 붙들고 살아 내는 신앙인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6년 6월 9일 화요일 [녹]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3-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는 행복 선언으로 인간의
부족함을 드러내신 뒤, 곧바로 신앙인의
정체성을 한 번에 규정하십니다.
신앙인은 가난해도, 부족해도 이미
“세상의 소금”(마태 5,13)이고 “세상의 빛”(5,14)입니다.
이 말씀은 격려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선언입니다.
소금과 빛은 스스로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른 이를 향합니다.
소금은 녹아 사라지며 맛을 내고,
빛은 어둠을 밝혀 다른 이들이 볼 수 있게 합니다.
소금은 고대 세계에서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었습니다.
정화하고, 보존하며, 제물과 함께 바쳐졌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소금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로
이 ‘부자연스러움’을 통하여 경고합니다.
제자들이 행복 선언에서 드러난 삶의 방식,
곧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로움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소금이지만 소금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이 쓸모없음은 도덕적 실패라기보다,
자기 본성과 정체성을 배반한 결과입니다.
빛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두는 행위는
제맛을 잃은 소금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는 것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5,16)를 찬양하게
하려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서 6장이 말하는 위선적인
드러냄(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등경 위의 빛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끝내 숨겨지지 않아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소금과 빛이 되었으니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보다,
‘무엇을 위한 마음’을 지녀야 할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자 빛인, 자연스러운 오늘의 ‘나로서’ 살아갑시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6년 6월 10일 수요일 [녹]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7-19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세히 보면
기존 율법을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을
이루려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이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무너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 본디 의미를 끝까지 찾아, 목적지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말씀은
‘참된 의미를 밝힌다’는 뜻으로,
율법을 철저히 따르거나 빈틈없이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가 뜻하고 의도하는 바를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율법의 규범과 실천은 늘 그대로 이어 오지만,
더 이상 형식적으로 되풀이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고, 율법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18 참조).
그러나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5,18)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는 희생 제사와 관련된 율법들처럼
율법의 어떤 규정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전히 이루어져 더 이상 필요하지 않지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처럼 어떤 규정들은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됨을 뜻합니다.
신앙인은 율법의 본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유연성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기든 지키든,
누구나 하늘 나라를 향하여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5,19 참조).
율법은 단죄의 도구가 아니라 하늘 나라로 초대하고자
하는 하느님 자비의 도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삶의 질서이며,
그 질서는 예수님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의 논리로 다시 정리됩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율법을 어기는 이에게도 율법의 이름으로
사랑과 연민과 자비를 전하였으면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6년 6월 11일 목요일 [홍]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바르나바 성인은 키프로스의 레위 지파 출신이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본디 이름은 요셉이며(사도 4,36 참조) 마르코 성인의
사촌(콜로 4,10 참조)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칭송받는 바르나바 사도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뒤
자신의 재산을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60년 무렵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0,7-13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
”(마태 10,7)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치유와 자비의 손길이
이제 제자들의 손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은 이성적 설명이나
설득보다 구체적 치유와 자비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제자들이 행하는 기적은 하늘 나라의 선물이므로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데
빠른 인간 세상의 논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지요.
복음의 논리는 값이 없기에 값진 것이고,
그 기쁨은 대가가 없기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제자들은 가난하게 파견됩니다.
금, 은, 돈, 자루, 두 벌 옷, 신발,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 파견된 이를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제자들은 기꺼이 약한 모습으로 길 위에 서며,
그 자체가 하느님만을 신뢰한다는 예언자적 표지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10)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이에게 의지하고 대가를 요구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늘 나라의 일꾼에게 필요한 것을
책임지신다는 충실함을 드러냅니다(6,25-26 참조).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마을에 들어가면 “마땅한”(10,11)
사람을 찾아내 한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기준은 도덕적 완전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응답하는
능동적이고 열린 마음입니다.
‘마땅한 사람’의 열린 태도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가난한 제자가 먹거리와 머물 곳을
찾을 수 있는 하나뿐인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서로 열려 있고
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당신 나라의
부유함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파견되어야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6년 6월 12일 금요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복음묵상]
마태오 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리십니다.
이 감사의 내용은 역설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을”(마태 11,25) 감추시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하늘 나라, 곧 치유와 자비,
새로운 시대가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 낯선 일일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11,25),
곧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세상을 읽어 내지 못합니다.
켜켜이 쌓아 온 삶의 방식과 그에 따라 이미 몸에 밴
자기만의 논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철부지들”(11,25)이 그 세상과 가깝습니다.
어린아이는 약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받아들이는
법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이해가 아니라 신뢰가 먼저
일어나는 자리, 그곳이 철부지의 자리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11,27).
이는 단순히 권력 선언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친교를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친교는 아들이 계시해 주려는
이에게만 열립니다. 25절에 나오는 ‘드러내다’는
그리스 말에서 ‘계시’의 동사형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계시하시고자 하는 대상은 “철부지들”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 밝히 드러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거나 더 많이
노력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다는 것은 관계의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나아가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가능합니다.
내 눈의 들보를 들어내 사람을, 세상을,
그 고유함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6년 6월 13일 토요일 [백]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성모 신심에 대한 공경은 17세기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요한 외드 성인의 노력으로 점점 보편화되어,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서 거행되기 시작하였다.
비오 12세 교황은 1942년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게 하였다.
처음에는 8월 22일에 선택 기념일로 지냈는데,
996년 교황청 경신성사성 교령에 따라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에 의무 기념일로 지내게 되었다.
[복음묵상]
루카 2,41-51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해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성가정의 발걸음은 오늘 복음에 나오
동사 “가곤 하였다.”(루카 2,41)가 암시하듯
되풀이되는 경건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이 익숙한 리듬은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됩니다.
유다 전통에서 ‘성인의 책임’을 묻는 나이에
까운 열두 살에 예수님께서는 유다 전통의 익숙함을 끊고
성전에 머물기를 ‘선택’하십니다.
이는 부모의 실수라기보다는, 성년의 문턱에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결단이지요.
부모가 예수님을 찾아 헤맨
‘사흘’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인
‘사흘’을 미리 보여 줍니다.
성전의 율법 교사들 사이에 앉아 계신
소년 예수님의 모습은 뒷날 수난 직전 성전에서
펼쳐질 율법 교사들과의 논쟁을 미리 보여 주며,
주님 수난의 큰 슬픔을 마주하게 될 독자들을
미리 준비시키는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슬픔이나
고통 너머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
이 질문은 애타게 아들을 찾던 부모에게는 차갑지만,
믿는 모든 이에게는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을 넘어
신성한 하느님의 자리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신앙의 원형을 보여 줍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 ‘사흘’의 시간을 통하여 저만치 멀리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 삶 한가운데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
아차리고 있는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자렛으로 내려가시어 부모에게
순종하시며 일상을 보내십니다.
가장 신성한 순간과 가장 평범한 순종이 교차하는 지점,
그곳이 바로 우리의 삶이고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하느님 현존의 자리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세상의 양식은
잠시 우리의 허기를 채워 주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은
우리 영혼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몸의 필요를 채우는 데는 익숙하지만,
정작 마음과 영혼의 양식은 놓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번 한 주간 생명의 빵이신 주님 안에서
평화와 기쁨,
그리고 풍성한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