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묵상]
2026년 6월 14일 (일)
[녹]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 탈출 19,2-6ㄱ
제2독서 로마 5,6-11
복음 마태 9,36-10,8
“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사람들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톨스토이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첫째는 지금 여기,
둘째는 옆에 있는 사람,
셋째는 그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바로 내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옆의 사람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때로는 미워하면서 내 옆에서 밀어냅니다.
다른 것이 더 좋다면서 밀어내기도 합니다.
또 나와 같지 않다고 밀어냅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것들이,
내 안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본당 교우,
그밖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귀할까요?
지금 그 귀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먼 훗날에 그들이 내 옆에 있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의 경우도
부모님께서 주님 곁으로 가신 뒤에야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되어 행복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귀함을 보지 못했음에 후회하게 되었고,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가장 귀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었고, 예
수님께서 직접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마태 9,36)고 시작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연민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지금 상처받고 억눌린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타락한 종교, 정치 지도자들을 통해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율법의 무거운 짐만 지웠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착한 목자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들이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명의 사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완벽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함이
더 많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 특별히 로마에 세금을 가져다
바치는 세리 마태오도 있었고,
로마에 무력으로 항거하던 민족주의자
열혈 당원 시몬도 함께 있었음을 봅니다.
이렇게 지향점이 다른 사람을 제자로 뽑으시고,
심지어 당신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완벽한 의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나약함과 실패의 가능성까지
품고 있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특히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잊어버리고,
대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곤 합니다.
내가 지금 기쁘고 행복한 것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래서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탈출 19,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은 언제나 준비되어 계시지만,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준비됨을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에 있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너는 하느님을 믿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나는 매주 성당에 다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그러면 하느님께
기도 많이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그 사람은 더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기도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할 모든 준비를 마치셨고,
또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움직임이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주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26년 6월 15일 월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38-4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동태 복수법’을 다시 이야기하십니다.
이 율법은 받은 상처를 똑같이 되돌려주려는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수가 점점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울타리였지요.
범죄와 형벌 사이의 균형을 지키고, 폭력이 늘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최소한의 정의였습니다.
법은 대체로 잘못한 만큼 벌을 받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나아가 법정의 논리를 넘어,
인간 마음의 깊은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
는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악인’은 일상에서
우리를 모욕하고 상처 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굳이 “오른뺨”(5,39)을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폭행이 아니라
남을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잡이가 상대의 오른뺨을 때리는 것은
손등으로 치는 것으로, 당시 노예나 하인을 향한
모욕과 하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5,39)라고 하십니다.
이는 굴욕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모욕이 우리 안에서 증오가 되어 커지지
못하게 하라는 초대입니다.
모욕을 사랑이나 선의로 꺾어
버리겠다는 결심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라는 말씀도, 천 걸음을
가자는 이에게 이천 걸음을 가 주라는 말씀도,
굴복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선의를 끊임없이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억압의 한 걸음을,
사랑의 두 걸음으로 지워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러합니다.
아무리 잘못해도 용서받고 위로받으며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고자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처럼 삽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6년 6월 16일 화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43-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레위 19,18)라는 율법의 핵심을 그대로 인용하시면서도,
인간이 그 계명의 뜻을 축소하여 ‘원수는 미워해도 된다.’라고
암묵적으로 해석한 부분을 정면으로 깨뜨리십니다.
본디 레위기의 문맥은 원수를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웃’의 범위를 ‘친구’로,
‘자기 사람’으로 점점 좁혀 왔지요.
그러면 사랑은 이해관계에 따른 윤리가 되어
그 이해관계에서 밀려난 사람을 배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라는 낱말을
민족이나 정치의 범주로 제한하시지 않고,
개인의 삶에서 나를 적대시하는 존재 전체로 확장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라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이르십니다.
기도는 악과 원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으로 악을 ‘압도’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의 바탕을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품으신 선의에서 찾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분의 차별 없는 자비가 곧 하늘 나라의 질서입니다.
세리나 이방인도 자기편은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의 질서를 따르는 제자는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
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 나옵니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는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기보다,
하느님의 선의가 친구와 자기 사람을 넘어
모든 사람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경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하느님을 닮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6년 6월 17일 수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경고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여기서 ‘의로움’은 단순히
도덕적인 품행을 뜻하지 않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의로움이 ‘하느님을 향한 길’이 아니라 ‘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무대’로
어떻게 바뀌는지를 꿰뚫어 보십니다.
인간은 늘 인정 욕구에 목마르고
그 욕구를 채우고자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제법 있지요.
유다 사회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그분을 향한 경건한 삶을 가다듬어 왔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들도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고
끊임없이 가르치고는 하였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선행이 ‘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될 때, 하늘의 상급은 사라지고 땅의
인정만 남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지 마라.”(6,2)라는 말씀은
과장이면서도 정확한 풍자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앙은 과장된 자기 연출의 유혹과 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선자’는
그저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면을 쓰고 경건함과 올바름을 연기하는 사람이며, 종
교 행위나 교회 제도로 자신의 삶과 명예를 챙기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향하여 서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사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제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합니다.
기도는 회당의 중심이 아니라,
집 안 가장 깊은 방에서 홀로 시작됩니다.
단식은 인정받거나 혜택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며
삶에서 조용히 하느님을 찾는 행위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서 세상의
그 무엇이 그리 가치 있겠습니까.
사람과 세상 눈치를 보다가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결과일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6년 6월 18일 목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0,7-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마태오 복음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6,8)라는 선언에 이어 주님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그러니 이는 불안이나 부족함을 달래고 채우려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심을 바탕으로 한 신뢰의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6,9)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아버지로서 친밀함을 동시에
붙드는 고백이자 외침입니다.
이러한 친밀함은 개인에서 시작되지만 “저희”라는
복수형 표현 안에서 공동체로 확장됩니다.
그다음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 중심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6,9)는
하느님 스스로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시는
종말론적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서도(에제 36,23 참조),
백성이 현재의 삶에서 그분의 이름을 존중하는
자세를 포함합니다(이사 29,23 참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태 6,10)는
구약의 야훼 통치 사상을 재해석한 종말론적 청원으로,
이미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뜻이 …… 이루어지게 하소서.”(6,10)는 순종의 윤리로,
앞선 두 청원을 더욱 간절히 요청하는 백성의 호소가 됩니다.
이어지는 청원들은 인간의 삶을 다룹니다.
“일용할 양식”(6,11)은 모호한 내일의 잔치가 아닌,
오늘 하루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가리킵니다.
잘못의 용서는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조건이 됨을 강조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6,13)는
삶의 시련에 주저앉지 않게 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그리하여 악에서
구해 달라는 마지막 청원이 이어지지요. 결
국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주권과 자비 앞에
인간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조용히 봉헌하며 내맡기는 기도가 됩니다.
우리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주님의 기도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6년 6월 19일 금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25-30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오늘 복음은 재물에 대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방향을 묻는 말씀입니다.
“좀과 녹”(마태 6,19)은 당시 현실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이미지였지요.
‘좀’은 값비싼 옷감을 갉아먹고, 그
리스 말에서 ‘먹어 치우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녹’은, 곡식이나 금속이 썩고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당시에는 흙벽돌로 집을 지었는데 도
둑이 쉽게 뚫고 들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도 덧붙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표현에서 땅의 보화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쌓아 두는 행위 자체가 언젠가는 잃어버릴 운
명을 지녔다는 것이 예수님의 판단입니다.
반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6,20)라는
표현은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성전을 재건한, 이
른바 제2성전기 유다 문헌에서
자주 나타나는 사상입니다(토빗 4,8-9 참조). 선
행은 하느님께 드리는 보화이며, 마지막 때에
그 보화가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라는 사상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미래의 시간을 향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물으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보물은 다만 소유물을 뜻하기보다 삶의 중심,
곧 욕망의 방향을 뜻합니다. 마
음은 자기가 쌓아 둔 것을 향하여 기울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이어지는 눈의 비유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읽힙니다.
눈이 건강하면 온몸이 밝다는 말은
도덕적 은유이기도 합니다.
유다 전통에서 ‘좋은 눈’은 관대함을,
‘악한 눈’은 인색함과 시기를 뜻하였습니다.
결국 빛과 어둠의 문제 또한 시선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재물을 향하여 고정된 눈은 어두워지고,
하느님을 향하여 열린 눈은 밝아집니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맡길 수는 없지요.
사라질 것들을 너머 마지막까지 붙들 수 있는 가
치에 우리 삶을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6년 6월 20일 토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24-34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어조로 인간의 가장 깊은 불안을 들추어내십니다.
“목숨”은 먹고 살아야 하는 구체적 생존을 가리킵니다. 예
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불안으로 삶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삶에 대한 염려는 삶을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새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삶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새는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않지만,
하늘의 아버지께서 먹이시지요.
여기서 초점은 노동을 부정하며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먹이고 입히는 주체가 누구인지 묻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6,27)라고 물으십니다.
불안과 걱정은 우리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고
우리 삶을 소진할 뿐입니다.
이방인들과는 다르게
제자들은 참된 것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
(6,33)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의로움은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이
정확히 알려 줍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7,12).
신앙은 주어지는 오늘을 건네받는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 삶은 나의 노력이나 걱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누군가가 먹고 입는 문제로 힘들어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의 의로움을
우리 서로가 챙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지는 오늘을 걱정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야겠습니다.
적어도 먹고 입는 것 정도는 걱정하지 않게 서로 챙기면 좋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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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거창한 일이 아니더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배려와 나눔,
진심 어린 기도가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도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기쁨의 일꾼으로
살아가시길 기도드립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