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주민의 정서로 이국풍경을 묘사한 가곡,
모리스 라벨의 <마다가스카의 노래>
근대 프랑스 작곡가 라벨(Maurice Ravel:1875-1937)의 작곡 팔레트는 오페라, 발레음악, 관현악곡, 협주곡, 피아노곡, 가곡 등의 거의 모든 음악장르를 포괄하고 있다. 음악통계 사이트 월드캣 카탈로그(WorldCat catalog)에 의하면, 라벨은 육십 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생애동안 2,000여 곡을 남겼다. 이 많은 작품 라이브러리에서 단연 돋보이는 장르는 피아노곡으로, 오늘날 그의 음악 이미지 또한 피아니스트 혹은 피아노 음악가로 평가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라벨은 여러 장르에서 그만의 독창적이고 탁월한 작곡기법을 구사하여 타인이 범접할 수 없는 깊고 풍부한 음악성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그를 피아노 작곡가로 국한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차라리 그를 전(全)방위적 천재 작곡가로 부르는 편이 더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라벨의 작품세계에서 성악작품이 가지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으며 그 숫자도 서른 일곱 곡으로 적은 편이다. 게다가 그 중 열 한 곡은 민요의 전통적인 멜로디를 가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벨의 성악곡들은 매우 특별하고 가치가 있다. 그의 성악곡들은 명확함, 까다로움, 재치, 위트, 화성적 풍부함, 그리고 선율적 예민함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인간의 목소리와 악기들의 어울림이 매우 다양하고 독특하다. 또한 기존의 프랑스 멜로디(가곡) 양식을 한 단계 뛰어넘어 표현과 형식미를 더욱 확대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가곡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특징은 가사가 매우 명료하게 울린다는 점이다. 이는 작곡가가 프랑스 시의 창법(唱法)을 면밀하고 정확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며 이에 적절하면서 유동적인 반주부의 리듬처리가 시의 운율을 효과적으로 살려내고 있고, 여기에 풍부한 화성의 울림이 결합되어 라벨 특유의 독창적인 성악스타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라벨의 가곡들은 그 가사로 선택되는 시들이 매우 다양하다. 그 시들은 프랑스 당대의 상징주의 시인들에 국한되지 않고 16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여러 시인들을 망라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 16세기 프랑스 최고의 시인으로 숭앙받는 롱사르(Pierre de Ronsard:1524-1585)의 고전적 서정시에서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1842-1898)의 상징주의까지, 신고전주의 시인 빠르니(Evariste de Parny,1753-1814)의 이국적 정서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여류 문학가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1873-1954)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이르고 있다.
라벨 가곡의 또 다른 특징은 이국적 문화와 관련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볼레로:Bolero>를 통해 스페인의 민속 춤곡을 빛나는 관현악 작품으로 승화시킨 라벨은 가곡에서도 스페인의 정취를 많이 투영시키고 있다. 오페라 <스페인의 한때:LHeure espagnole>에는 바스크와 스페인 민속 선율이, <뒬씨네 공주에게 마음이 끌리는 돈키호테:Don Quichotte a Dulcinee>에서는 스페인풍의 독특한 댄스 리듬이, 연가곡집 <셰헤라쟈드:Sheherazade>에서는 동양적인 정서가 나타나 있다. 또한 그 외에 여러 다양한 나라들의 민속선율과 정서를 성악곡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5개의 그리스 민요:Cinq melodies populaires>에서는 그리스의 민속음악이, <하바네라 형식의 보칼리즈:Vocalise-Etude en forme de Habanera>에서는 카리브해의 민족정서가, <에브레끄(헤브라이) 노래:Chanson hebraique>와 <히브리의 두 개의 노래:Deux melodies hebraiques>에서는 이스라엘의 고대음률이, 그리고 <마다가스카의 노래:Chansons madecassese>에서는 아프리카의 토속음악과 식민지 백성의 정한(情恨)이 작품에 반영되었다. 또한, 그가 1910년에 작곡한 <민요집:Chants populaires>에서는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헤브라이 민속선율을 완벽하게 융화시켜 각 나라의 독특한 민속 분위기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바오바브(Baobab)나무의 고장이며,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나라인 마다가스카는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 인도양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이 국가는 일찍이 7세기 경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무슬림국가가 되었다. 마다가스카의 원주민들은 말레이계에서 이주해 왔으며 그런 관계로 동남아시아와 같은 문화권으로 간주되고 있다.
대항해 시대에 포르투갈 탐험가인 디오고 디아스(Diogo Dias)가 인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 섬을 사웅 로렌초(Sao Lourenco)라고 명명하여 지배해 오다가, 1666년 프랑스의 프랑소아 카롱(Francois Caron)이 <프랑스령 동인도 회사>를 차렸다. 프랑스는 원주민들의 국가인 메리나(Merina)왕국을 멸망시키고 영국과 쟁탈전을 벌여 1896년 마침내 식민지배 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마다가스카 주민들은 프랑스에 참전하여 수많은 목숨을 잃기도 하였는데, 이윽고 1958년에 말라가시(Malagasy)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잠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후 지금은 민주 공화정을 유지하고 있다. 마다가스카는 열대 농산물과 광물자원이 풍부하지만 백여 년 간의 식민지배와 20세기의 정치적 불안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다.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지배 이데올로기는 <제국주의>였다. 서양 열강들이 아시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 지역에 진출하여 정치.경제적으로 그들을 속박하고 그 자원을 침탈하여 자국의 번영을 꾀하였다. 19세기의 아프리카는 일부 독립국을 제외하고 유럽 8개국이 분할하여 지배하고 있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이른바 횡단정책과 종단정책이라 하여 아프리카 전체를 자국의 영향아래 두려고 하였는데, 그 경쟁의 끝자락에 놓여있던 나라가 바로 마다가스카였다. 이 섬나라는 일찌감치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사하라 지역과 연결되어 프랑스 제국주의를 확대하는 전초(前哨)가 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본국 넓이의 열 세 배나 되는 땅을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는 마다가스카의 원주민 왕국을 멸망시켰고 수십 만 명의 백성들을 학살하였다. 식민 초기단계부터 수많은 고초와 불행을 겪었던 마다가스카의 자결권(自決權)을 당시 세계 시선은 무시하였다. 그러나 일부 프랑스의 지성인들은 조국의 식민경영에 대해 반감을 품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라벨 또한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정부의 식민정책에 반발하였다. 1차 대전 당시 자원하여 입대하였을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하고 사회정의에 솔선했던 그는 약소민족들을 위한 여러 작품들을 지으면서 간접적으로 자국의 식민정책을 비판하였고,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마다가스카의 노래>인 것이다.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도(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1925년 4월, 작곡가 라벨은 미국인 예술후원자인 엘리자베스 스프라그 쿨리지(Elizabeth Sprague Coolidge)로부터 플륫과 첼로, 피아노, 여성 독창을 위한 실내악 곡의 의뢰를 받았다. 라벨은 그 당시 18세기 서정시인 포지 드 파르니(Evariste de Forge de Parny:1753-1814)의 의 시집 <마다가스카의 노래:Chansons madecasses>를 읽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이 시집에서 세 개의 시를 골라 그 의뢰에 응했다.
혼혈 시인 파르니는 마다가스카섬 동쪽의 프랑스령 작은 섬 부르봉(Ile de Bourbon:오늘날의 레위니옹Reunion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파리에서 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원주민인 에스더 렐리브르(Esther Leli vre)와 사랑에 빠졌고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내력이 있는, 교양이 있고 개방적 성향의 위인이었다. 그는 마다가스카에 가 본 적이 없었으며, 그 나라의 언어인 말라가시(Malagasy)어 또한 몰랐다. 그러나 마다가스카 주민들이 수 차례 부르봉섬에 왕래할 때 그들과 교우하면서 그 나라의 여러 상황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는 마다가스카를 비롯한 프랑스령 식민지에서 자행되고 있었던 차별과 억압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관점이 그의 사회적 입지와 상속에 좋지 않은 영향을 가져온다는 점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파리에 있던 동창생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다.
파르니의 초상
"노예상태에 놓인 원주민들을 볼 때마다 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채찍 소리와 쇠사슬 끄는 소리가 나의 귀를 괴롭혔고 나의 가슴에 박혔다. 나는 이 곳에서 폭정과 노예제 밖에는 볼 것이 없다. 매일같이 사람들이 말과 같은 것으로 교환되었다. 이러한 이상한 광경들로 내 자신이 익숙해진다는 것에 참을 수가 없다."
문학도였던 그는 이 핍박받는 나라를 위하여 노래 가사를 지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열 두 곡의 <마다가스카의 노래>는 시인 파르니의 노예제 반대에 대한 강한 의지가 들어 있다.
출판된 시집에는 다음과 같은 서문이 쓰여져 있다.
"마다가스카의 왕자들은 죄수들을 유럽에 팔아 넘기는 데 반대하여 무기를 들고 맞서 싸웠다. 우리(백인)들이 없었다면 이들은 평온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좋은 기술과 선량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타인에게 호의적이었고 그들이 가진 것들을 나누었다. 해안에 사는 외부인들은 경계하고 조심스러웠으며 기민하였다. 마다가스카 사람들은 천성이 온화하였다. 남자들은 게을렀고 여인들은 일을 하였다. 그들은 음악과 춤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였다. (중략) 그들은 시를 남기지 않았다. 그들의 시는 길게 늘어진 산문체였다. 그들의 음악은 단순하였으나 달콤하고 가끔 우수가 넘쳤다."
만년의 라벨은 이 시를 입수하자마자 건강의 악화를 무릅쓰고 창작에 몰두하였다. 작곡가는 열 두 편의 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의 세 편을 골라 <마다가스카의 노래>라는 연가곡을 만들었다. <마다가스카 토인들의 노래>라고도 불리우는 이 음악은 라벨 스스로 "성악이 주요한 파트로 등장하는 4중주곡"이라고 말했듯이 성악 라인에 큰 비중을 둔 실내악적 성악곡이다. 성악 부분은 감각적이고 극적인 방법으로 강하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곡의 가사는 에 의하고 있으며, 강대국에 의한 제국주의와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곡은 1925년에 파리에서 제인 바토리(Jane Bathori)에 의해 초연되었는데, 초연 당시 프랑스는 모로코의 독립운동을 저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체 세 곡의 초연은 1926년에 이루어졌다.
마다가스카의 부인들
일찍이 화가 고갱(Eugene Henri Paul Gauguin:1848-1903)이 남태평양의 <타히티:Tahiti>섬에 기거하며 주민들의 삶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마치 서양인의 식민지배를 성찰하고 때묻지 않은 원주민의 삶을 동경하듯 그린 수백 점의 그림에서 우리는 프랑스의 지성인이 실현하고자 했던 공존과 화합의 높은 정신적 자세를 느낄 수 있다. 사려깊은 실존인으로 세기말과 1차대전의 격동기를 살았던 또 하나의 지성인 라벨이 식민지 원주민의 정서에 동감과 연민을 느끼며 그들의 피맺힌 역사를 치유하는 하나의 걸작 성악곡을 이 세상에 내어 놓은 것이다. 이 노래 속에서 그는 "백인을 믿지 마시오(mefiez-vous des blancs)"라고 외치고 있다.
<마다가스카의 노래> 초판 악보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