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바라볼 여유가 없다면 가엾은 삶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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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sure W. H. Davies What is this life if, full of care,
No time to stand beneath the boughs,
No time to see, when woods we pass,
No time to see, in broad daylight,
No time to turn at Beauty's glance,
No time to wait till her mouth can,
A poor life this if, full of care, |
여유(가던 길 멈춰 서서)
W. H. 데이비스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만일 근심에 가득차,
나뭇가지 아래 가만히 서서 양이나 소처럼,
숲을 지날 때 다람쥐가 도토리를,
환한 대낮에 마치 밤하늘처럼,
미녀의 시선을 마주보며,
그녀의 눈동자가 시작했던 미소를 그녀의 입이,
가엾은 삶이리라, 만일 근심으로만 가득차, 번역 : 김경훈 |
(출처) ‘데이비스’의 시집 <Songs Of Joy and Others>
일상에 쫓기고 삶의 무게와 마음의 견고함에 밀려, 여유를 갖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우리에게 여유가 더욱 소중한 것일지 모른다. 많은 시인과 명상가들이, 그 가만히 있음과 조용히 바라봄의 여유를 이야기한다.
세상은 항상 번잡하고, 주위는 온통 소란스럽다. 굳고 메마른 땅 위에서 행인들은 하늘을 쳐다볼 겨를도 없이, 앞만 바라보며 줄달음친다. 잠시 쉬면서도 미쳐 마치지 못한 일을 생각하며, 식사를 거르면서 업무에 시달려야 한다. 주어진 처지에서 힘겹게 살아가지만, 여전히 미래는 불안하고 현실은 고달프기만 하다.
장욱진 작, <새> (1989)
그러나 인생을 바쁘게 사는 이들이나, 느긋하게 삶을 관조(觀照)하는 이들이나, 삶은 공평하다. 그 누구에도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어도 내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면 그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길을 가다가 멈추어 서서 파란 하늘을 한 번 쳐다보는 여유, 투명한 햇살 속에 별빛처럼 반짝이는 시냇물을 들여다보는 여유가 필요한 오늘날이다.
부산에서 백년어(百年魚) 서원을 운영하고 있는 시인 김수우 님은 여유(餘裕)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이 풀어내고 있다.
"한가함과 너그러움은 남는 마음, 곧 여유입니다. 소란스럽고 복잡한 일상은 남겨둔 마음이 없는 탓입니다. 시간을 남겨두고 자리를 남겨두고 마음을 남겨두는 것, 그건 아무리 황급한 중이라도 애정이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배려이기 때문이지요, 생각에 꾀가 많을 때는 여유를 갖기 어렵습니다. 여유는 순수한 매력입니다. 뿌리는 끝없이 치열하지만 푸른 그늘로 우리에게 한가로움을 보여주는 나무에게서 여유의 참 모습을 배웁니다. 주는 자는 늘 넉넉하고 제 것을 챙기는 자는 늘 모자라기 마련, 풍요한 내면의 법칙을 다시 헤아려 앞주머니 속에 넣어둡니다."
한자(漢字)의 '一(일)'자는 옆으로 드러누워 있고, 아라비아 숫자 '1(일)'은 똑바로 서 있다. 즉, 하나는 수평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이다. 똑같은 '하나'를 의미하지만, 동양은 수평적으로, 서양은 수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동양과 서양의 인식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즉 숫자를 표현하는 방법을 통해 동양의 여유로움과 한가함 속에서 펼쳐지는 편안한 논리와, 서양의 직선적이고 다급한 사고 논리를 극명하게 대조할 수 있는 것이다. 동양의 한일 자는 직선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약간 굽어져 있다. 위와 아래로 굽이치는 글자이다. 목표로 나아가되 중간에 풍류도 즐기고 여유도 가지는 모양새이다. 그러나 서양의 일은 직선으로 되어 있고 화살표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 형상 안에는 어떤 여유나 여백도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수평의 미학을 즐겨왔다. 집의 규모를 따질 때 '몇 칸 짜리'인지를 물었다. 넓은 공간을 구획하여 담을 쌓고 문을 내었다. 위아래가 없는 주택에서 사람들은 온유하고 화락한 생활을 하였다. 불과 백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2층 짜리 가옥은 손가락을 헤아릴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은 수직형 건물 일색이다. 수평형 건물이 여유 속에서의 교류를 뜻한다면, 수직형 건물은 경쟁 속에서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풍스런 한옥에서 머물 때 평안함을 느끼는 반면, 마천루 옥상에서 밖을 내다볼 때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난 세기와 금세기의 산업화와 정보화는 우리 인간들을 풍요하게 만들어 주었다. '풍요(豊饒)'라는 말은 곡식을 많이 거두어 배불리 먹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 의미를 증명해 주듯, 우리 주변에는 온갖 상품과 물산들이 넘쳐나고 있다. 상품만이 아니다. 인터넷과 종이신문 등을 통해 하루 동안 우리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뉴스와 정보들은 엄청나다. 거기에 광고지와 거리의 현수막, 홍보우편물까지 합치면 가히 어마어마한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TV를 볼라치면 백여 개의 채널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물품을 구입하려 하면 수십 개의 창이 번갈아 뜨며 서로 자기들의 상품을 택하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정보가 넘치다보니 새롭게 익혀야 할 지식도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고 이제는 정보 통신기기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풍요로움을 얻은 대가로 보다 더 귀중한 가치들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 분실물 들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여유이다. 여유(餘裕)는 '남을 여'와 '넉넉할 유'가 합쳐진 단어이다. 남는다는 말은 물질과 정신의 양면을 포함하는 의미이고, 넉넉하다는 말은 느긋하고 관대하며 한 박자 쉬어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여유를 어느 새인가 도둑맞고 살아간다.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선택버튼을 누른 뒤 단 5초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커피 배출구를 열다가 커피를 쏟기도 한다. 단 1분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무단횡단을 하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을 촉박하게 누리고 살면 보다 여유 있게 남은 시간을 쓸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다.
버스나 지하철은 인간을 먼 곳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개발된 문명의 이기이다. 그런데 정작 시민들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느라 뛰어다니고 기다리며 속을 태운다. 인터넷의 속도가 우리나라만큼 빠른 곳은 없다. 그런데도 네티즌들은 화면이 빨리 바뀌지 않는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직장인들은 업무와 대인관계로 항상 바쁘고 불안하다. 그래서 점심이라도 느긋하게 즐겨야 할텐데, 고작 편의점에 들러 옹송그린 채 패스트푸드를 입 속으로 우겨 넣는다. 이래서는 사는 재미가 없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인생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잠시 하이테크한 삶을 놓고 인간 본연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요사이 그런 삶을 실천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도보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아내가 정성 들여 싸 준 도시락을 먹는 이들도 가끔 보인다. 어떤 이들은 인터넷을 멀리 한 뒤 여유를 찾았다고 말한다. 주말 농장을 경영하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이들도 계속 늘어난다.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몸을 써서 활동하는 것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고 보람되고 즐겁게 만든다. 시간을 여유있게 쓰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부지런하고 더 지혜로운 이들이다. '여유있는 시간'이란 주어진 시간을 잘 쪼개어 타인보다 더 많은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주체적이고 생산적으로 관리하기에 이들은 독서도 하고 운동도 즐기며 다른 이들보다 더 느긋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제 우리 현대인들은 물질문명의 다급한 파고(波高)에서 빠져 나와 자신의 실존과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인간은 이 시대의 객체가 아닌, 엄연한 주체자로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이 시를 지은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William Henry Davies)는 영국에서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 사람이었다. 그는 두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생계가 막연했던 어머니는 재혼을 하여 세 명의 자식을 먹여 살렸다. 그는 열다섯 살 때에 학교를 졸업한 후 동료들과 함께 상점을 터는 등 나쁜 짓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그를 그림 액자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어 일을 시켰으나, 그는 일이 지겨워 여러 곳을 전전하며 보낸 후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그는 방랑자처럼 가축을 실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오가며 품삯 노동자 일을 하였으며, 이후 미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어떤 때에는 구걸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계절 노동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1896년에 알래스카 유콘(Yukon)의 클론다이크(Klondike) 지방에서 엄청난 금맥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곳으로 갔다. 숱한 떠돌이와 시한부 인생들이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들 중 극히 일부는 큰 성공을 얻을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일꾼들은 사고로 생을 마감하거나 무일푼으로 되돌아갈 뿐이었다. 당시의 정황을 알려 주는 영화가 찰리 채플린이 제작한 <황금광 시대:The Gold Rush>이다. 그는 그 곳에서 열차 바퀴에 치여 왼쪽 다리를 끊어내는 비극을 당했다. 실의에 빠져 죽음을 몇 차례 시도한 끝에 결국 고향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 그는 목발에 의지하면서 런던의 구제소에서 걸인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외발 장애인이 구걸을 하는 것은 힘들었다. 궁여지책으로 자신이 미국생활 때부터 틈틈이 지었던 시들을 여러 장 인쇄하여 집집마다 다니며 팔고 다녔다. 하지만 대부분 문간에서 그의 시들은 외면당했고, 실의에 빠진 그는 시들을 불에 태워 버렸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알아챈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시집 <영혼의 파산자:The Soul's Destroyer>가 출판되었다. 시집이 날개돋힌 듯 팔리면서 그의 명성과 함께 생활의 풍요도 찾아와, 런던의 한 신문사 主筆의 도움으로 농장이 딸린 집을 얻어 생활하며 <화물선 방랑자의 자서전:The Autobiography of a Super-Tramp>을 집필하였다. 이 작품이 비평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관심을 끌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들고 인세를 받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이후의 삶을 런던에서 보내며 1923년에 스물 세 살의 헬렌 페인(Helen Payne)과 결혼하였고, 문인들과 교류하며 수많은 시를 집필하였다. 만년에는 부인과 함께 교외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일흔 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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