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 속 내 집에 편안히 있을 때, 나는 그리스와 로마의 자랑을 짓밟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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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Bye
Ralph Waldo Emerson
Good-bye, proud world! I'm going home:
Good-bye to Flattery's fawning face;
I am going to my own hearth-stone,
O, when I am safe in my sylvan home, |
잘 있거라
랄프 왈도 에머슨
잘 있거라, 오만한 세계여! 나는 집을 가련다:
아첨으로 아양떠는 얼굴;
난 내 집으로 돌아가련다.
오, 숲 속의 내 집에 편안히 있을 때, |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1803-1882)은 미국의 시인이자 수필가이며 강연가이다. 그는 보스턴(Boston)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과 하버드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스물 여섯 살의 나이로 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맹신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삼년 만에 목사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이후 미국의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 운동을 주도하여 사회의 물의를 일으켰다. 에머슨은 교회에서 신봉하는 기적이나 원죄설을 부인하고, 인간은 스스로 노력하여 도덕적으로 살아가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의 사상과 교의(敎義)는 지금까지 찬반의 격론이 벌어지고 있으나 에머슨 자신은 태도가 진지하고 사상이 논리적이었다. 그는 기독교 주류로부터 배척당하였다.
에머슨은 이후 기독교를 대체할 사상을 찾기 위해 자연을 관찰했고 서양의 여러 고전들을 독파했으며, 힌두교와 조로아스터교, 불교와 유교, 도교에 두루 몰입했다. 서양의 사상으로는 신플라톤 학파의 영향이 가장 컸고, 동양종교에서는 힌두교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러한 가운데 워즈워스(Wordsworth)와 콜리지(Coleridge)를 만났으며, 문필가 칼라일(Carlyle)과는 40년 이상 편지를 주고받으며 철학과 종교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그는 보다 사색에 몰두하기 위해 보스턴 교외의 콩코드(Concord)로 이사하여 그 곳을 초월주의자들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 곳에 당대의 자연주의자, 문필가, 사상가 등이 모였는데, 그 중에는 알코트(Amos Bronson Alcott),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호오손(Nathaniel Hawthorne)이 있었다. 그는 콩코드에서 초월주의자들의 선언문인 <Nature>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모교인 하버드 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생명이 없으며, 교회는 인간이 직접 신(神)과 교감하는 데 방해되는 존재"라고 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두 번째 배척을 받았다. 그는 비록 제도권에서 멀어졌지만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는 초월주의자들의 기관지인 <The Dial>의 편집장을 맡아보면서 기독교 기성세력들과 이른바 '기적(Miracle)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후에 젊은 초월주의자 파커(Theodore Parker)가 이어받아 185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전국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점차 초월주의 논쟁은 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져 갔다.
그의 강연은 논리정연하고 비평적이어서 그는 본격적으로 강연가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의 강연은 종교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노예제도를 반대하였고 미국의 물질주의에 대해 맹렬히 비판했으며, 미국의 팽창주의를 경계하였다. 에머슨은 또한 생활주변의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강연을 했으며, 청중들은 그의 강연에 심취하였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과학과 공업이 일어나기 시작할 무렵, 모교 하버드 대학은 다시 그를 받아들였다. 이 즈음에 더욱 과격한 새로운 종교적 사상을 가진 자들이 나타나 기독교에 더욱 위협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반하여 에머슨의 사상은 덜 과격했다. 그는 기독교를 비난하기보다 인간의 위대함, 인간의 가능성을 믿으라는 주장으로 많은 미국인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는 일흔 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콩코드 숲 슬리피 할로우(Sleepy Hollow) 묘지에 묻혔다.
콘코드(Concord) 지방의 월든(Walden) 호수
위의 시는 에머슨이 남긴 가장 유명한 시 중의 하나이다. 이 시에서 그는 세속의 오만함과 자연의 순수함을 대비시킨다. 인간의 그 어떤 지식과 학문도 자연의 초월성을 능가하지 못했다. 사람은 세속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으나 세속은 변덕스럽고 가식으로 가득했다. 그에 비해 자연의 개체들은 순수하고 거룩하게 보였다. 시인 에머슨은 이 자연계의 구성원들을 인격적이며 초월적인 영혼, 즉 Over-Soul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사색을 통하거나 통찰력으로 초월적 영혼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 인식은 진리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런 까닭에 숲은 그 존재들이 넘치는 신성한 장소가 된다.
그러나 에머슨의 초월론은 '모든 자연과 사물 속에 신이 존재한다'는, 이른바 범신론(汎神論)과는 큰 차이가 있다. 초월론은 기독교 신앙에 충실하나, 범신론은 그 신앙과 배치(背馳)된다. 초월론에서 자연의 각 개체들은 신의 계시를 품고 있고 진리와 사랑을 표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신, 또는 신의 모상(模像)은 결코 아니며, 다만 신의 창조의지와 구원행위를 느끼고 접할 수 있는 객체일 뿐이다. 초월론은 또한, 자연을 통한 사색이 진리를 가르칠지언정 진리를 마음 속에 발현시키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진리는 자연 만물을 통해 투영될 뿐이고, 이것이 신의 섭리와 결부될 때만이 신앙체험으로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머슨의 초월론은 "부처는 내 마음속에 있다"는 불교의 수행과정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김병종 작, <天地人>
이러한 자연친화적인 신앙관은 13세기 초 수도사였던 성 프란치스코(St.Francisco)의 자연관과 일맥상통한다. 프란치스코는 자연의 모든 요소들을 초월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개체로 보았다. 그는 태양을 형제로 달을 자매로 일컬으며, 꽃에게 인사하고 새를 모아 강연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자연관을 통해 하늘과 땅, 초월자와 인간, 그리고 천상의 진리와 자연의 이치를 하나로 통하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자연론적 구원관은 성 클라라(St.Clara)와 성 안토니오(St.Antonius)에게로 이어졌고, 그 경향이 한동안 끊어졌다가 오늘날에 들어와 관상(觀想)수도원의 명상철학으로 계승되고 있다.
장미정 작, <무의식의 정원>
시에서 에머슨은 우리에게 영원한 존재의 본향(Camp Ground)인 자연으로 회귀하기를 권유한다. 미혹과 허상으로 가득한 세속은 마치 대양에 떠 있는 자그마한 배처럼 불안하고 가변적인 세상이다. 그러니 외투를 벗어 던지듯 사념과 미련을 과감히 탈피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순수함와 거룩한 경지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에게 세속에 빠진 인간들은 더 이상 인격적이지 않고, 화려한 궁정과 거리는 신이 창조한 세상과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오직 숲 속 언덕에 몸을 맡겨 온종일 노래하고 즐기면 신의 창조 섭리와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숲 속에 거처를 만든 자연인은 그리스의 문예와 로마의 번영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제도와 규범보다 더 인간에게 절실한 것은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지속적으로 명상하는 여유와 자세인 것이다. 에머슨은 그것을 실천했고 그 안에서 안식과 진리를 찾았다. 우리도 에머슨과 소로우가, 프란치스코와 안토니오가 그러했듯 소나무 그늘에 발뻗고 앉아 저녁별이 성스럽게 비추이는 숲 속에서 초월자가 베푸는 향연을 즐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