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루어지지 못한 짝사랑에도 무슨 수든 보답이 있게 마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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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imes With One I Love
Walt Whitman
Sometimes with one I love |
이따금 사랑하는 이와
월트 휘트먼
이따금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
가을이 되면 옛 사랑이 그리워진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미처 피지 못하고 시든 꽃과 같아 아련하고 애잔하다. 가을 저녁 바라보는 고운 단풍잎은 청춘의 시절이 이미 가버렸음을 깨닫게 한다. 길가다 멈춘 발길에 붉은 편엽(片葉)이 하울 하울 떨어지면, 지나간 시절 사귀었던 이의 옛 사연이 흩어지는 듯 하여 마음이 처연하고 착잡하다.
젊은 시절에 누구나 사랑을 앓고 연애에 방황하던 때가 있지 않았겠는가? 사내들은 서툴고 겸연쩍은 고백에 퇴짜를 맞아 몇 날 동안 잠을 못 자며 괴로워하기도 하고, 연인의 문간에 서성대며 속을 끓여보기도 했고, 사랑의 긴 헌사를 글로 적어 그녀의 책가방에 접어 넣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처녀들은 잘 생긴 남자애의 모습을 훔쳐보며 가슴에 발갛게 연정을 새기기도 하고, 어쩌다 받은 분홍빛 연서(戀書)를 동무와 같이 읽어보며 마음을 설레기도 하였고, 연애 시절이 되어서는 하고 싶었던 이야기 죄다 잊어버린 채 반벙어리로 조바심만 태우다 그이를 그냥 보내기도 하였을 것이다.
카우프만(Angelika Kauffmann) 작, <아모르와 프쉬케:Amor und Psyche>
그런 풋풋한 세월이 지나 우리는 그러그러한 이들과 짝을 맺었고 지금껏 큰 일없이 살아왔다. 그러나 일상의 진애(塵埃)와 생애의 고경(苦境)에서 점차 첫 사랑의 기억을 묵혀 버렸다. 그 첫 설렘을 잊었다는 것은 우리의 가슴에 청춘의 생동감을 잃고 살았다는 것과, 이제 다시는 꿈으로도 그 청년시절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첫 사랑의 사연을 한 두 자락 발굴하여 또 다른 젊은 기분으로 삶의 발걸음을 옮겨야 할 것이다.
첫 사랑의 추억은 마치 예전에 책갈피에 넣어 두었던 마른 잎을 은연중에 발견하는 것과 같다. 이외로 그 '마른 잎'은 나의 주변에 있고 내 생활 속에 있다. 옛 앨범의 사진에서 만나기도 하고, 대학시절 레포트용지에 써 놓았던 글귀에서 발견하기도 하며, 또 더러는 동창녀석이 모임 때에 던져준 옛 연인의 소식에서 찾아내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의 사진과 한 줄의 글귀, 바람같이 날아온 반가운 소식들이 나의 끊어진 청춘의 맥을 다시 이어주곤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 옛 시절의 생각의 호수에 빠진다.
예술가와 문인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감성이 섬세하고 예지력이 풍부하여 사랑에 깊이 빠지고 절망이나 고뇌에 쉽게 시달린다. 예술의 신이 그들에게 재능과 함께 내려 준 천형(天刑)인 그 예술적 감수성은 그들을 영예스럽게도 하나 그들의 생애를 고달프고 슬프게 만든다. 주체할 수 없는 그 천재들의 에너지는 세상의 모든 기쁨과 고뇌를 자신의 예술혼으로 껴안으며 끊임없이 사랑과 동경의 대상을 청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사랑을 만나고 더 쉽게 실연 당한다. 숱한 연애와 좌절을 통해 그들의 창조적 정신은 꽃피워지고, 그로 말미암아 후세에 길이 남을 걸작들이 탄생하였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the:1749-1832)는 젊은 시절 숱한 여인들과 사귀며 염문(艶聞)을 뿌렸다. 그로 인해 많은 여인들이 상처를 받았고, 그 또한 좌절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의 인격은 성숙해졌고 그의 작품들은 농익어졌다. 그는 25세 때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을 썼고, 40줄에 들어서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를 써서 그간의 질풍노도(疾風怒濤) 시절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그가 뿌렸던 열정과 사랑의 결실들은 대작 <파우스트:Faust>에서 초월적인 인류애와 휴머니즘으로 승화되었다. 바이런(Lord Byron)의 사랑행각은 괴테보다 더하였다. 그는 동시에 여러 여인을 사랑하지 않았다. 한 상대에 열정을 구한 후 다른 여인을 쫓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했다. 그가 여인을 갈아치울 적마다 영국인들은 그를 비난했으나, 그의 호색(好色)편력은 주옥같은 시로 남았다. 낭만시대의 작곡가 베를리오즈(H.Berlioz:1803-1869)는 영국인 여배우 해리엇 스미드슨(Harriet Smithson)을 열렬히 사랑하였으나 그녀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그는 사무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몇 날을 걸려 마차를 타고 찾아갔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이후 그녀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 그는 그의 대표작 <환상 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에서 당시의 심리적 정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아프레모프(Leonid Afremov) 작, <무제 4>
위의 시를 지은 저자 휘트먼이 초년시절 어떤 여인을 만났고 또 어떠한 경험을 겪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알다시피 그는 엄격한 퀘이커 교도였으며, 가난한 생활 속에서 검약하고 신실하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분명히 첫 사랑의 추억이 강하게 마음에 새겨졌고, 이제 그 옛날 기억을 되새겨보며 위의 짤막한 시를 지었던 것이다.
시인은 이루어지지 못한 짝사랑에도 분명히 보답이 주어진다고 말한다. 연인에 대한 사무친 사랑이 좌절된 후 사람들은 끝없는 괴로움과 막막한 상실감에 빠진다. 식음을 전폐하거나 가출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생명을 끊어버리기도 한다. 그렇듯 실연의 괴로움은 죽음보다 더 하며 인생 전체를 가늠할 정도로 그 비통함도 극에 달한다.
세월이 흘러 그 사랑의 상처가 아물 무렵, 예전의 맹목적 몰입은 시들고 희석된다. 그러나 마치 꽃이 떨어진 후 열매가 돋아나듯, 그 상처 속에서 새롭게 정화(淨化)된 아름다운 추억들이 그의 마음에 자리한다. 그는 첫 사랑의 아픔으로 삶이 보다 풍요로워지고 따뜻해졌다. 젊을 때의 사랑과 그 실패의 일들이 값진 보석으로 보답되어 돌아간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단서 조항이 있다. 첫사랑의 기억을 오롯이 삶의 한 아름다운 인연으로 삼기 위해서는 사랑을 고백할 당시 열정적인 연정(戀情)으로 상대방을 감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내던질 만큼의 치열한 사랑의 고백을 하지 않고서는 후일 그 사랑을 잃고 났을 때 아무런 감동이나 교훈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름지기 뜨겁게 불타 올라야 하며, 정열과 헌신으로 매진해야 한다. 사랑의 열정이 다 타버려 재만 남게 될 때라야 그 치열했던 여름날의 일들은 곱고 귀하게 갈무리되어 후일의 좋은 추억으로 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