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휘었다 다시 일어서는 보리와 같이 나도 꺾이지 않고 살아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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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Barley Bending
Sara Teasdale
Like barley bending |
휘는 보리처럼
사라 티즈데일
바닷가 낮은 들 |
시공(時空)의 무상함(Vanitas)과 존재의 필멸성(必滅性:Memento Mori)으로 인해 인간의 생애는 그 자체로 고통의 연속이고 시련의 바다이다. 일찍이 석가모니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인간의 네 가지 고통, 즉 태어나고 늙고 병들며 죽는 숙명적 고통에 대한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 물음을 풀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벌레와 같은 존재이며 바다 위에 떠다니는 작은 배와 같다. 고통과 시련은 인간에게 그림자처럼 다가와 그 육신과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 누구도 이 엄정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보다 더 참기 힘든 사실은 그 고통과 시련들이 인간 행동의 결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 운명의 신이 부여한 거부할 수 없는 책무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병을 얻거나 사고를 통해 일찍 생을 마감한다. 비록 천수(天壽)를 다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은 수많은 운명의 침범과 도전을 당한다. 여기에 인간의 죄악과 실수로 인한 고통들이 덧붙여진다.
고통과 시련을 없애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저 인간은 그 쓴잔을 맛보고 매운 채찍을 달게 받을 뿐이다. 참고 인내하며 어렵고 힘든 시절을 지나갈 따름이다. 여기에 휴머니티가 발동한다. 고통을 당하는 이의 곁에 서서 누군가가 위로하고 격려하며 삶의 의욕을 되살려 준다. 시련의 당사자에게 다가서는 발걸음과 붙잡은 격려의 손은 그의 고난을 반으로 줄여준다. 옛 속담에 "고통을 나누면 반이고, 즐거움을 함께 하면 두 배가 된다"고 하였듯이 말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고난과 시련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도록 격려하고 고취하는 글이 많이 있어 왔다. 그런데 대체로 이 글들은 자연을 모티브로 한 것들이 많다.
겨울의 모진 추위를 소나무가 감내하듯, 의연하게 고통을 참도록 하라,
밤이 아무리 춥고 어두워도 머지 않아 따뜻하고 밝은 태양이 온 누리를 비출 것이다.
고통을 참은 조개가 영롱한 진주를 만든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
위의 시는 이 격언들에 하나의 메시지를 더하고 있다.
바로 "휘었다 다시 일어서는 보리와 같이 나도 꺾이지 않고 살아가겠다"라는, 자신과 이웃에게 전하는 격려의 메시지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듯 자연은 인간의 가장 좋은 위로자이며 무언의 동반자이다. 겨울의 찬바람 속에서 인간들을 단련시키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궁핍과 갈증을 미리 경험하게 한다. 인간은 자연의 시험을 치루어가면서 주어진 상황을 극복할 힘을 기르며 그 자연의 넉넉한 품안에서 위로의 감로수를 맛본다. 무엇보다 자연 속의 여러 대상들은 인간의 처지를 투영시켜 공통된 정서로 연관지을 수 있는 감정이입(Sympathy)의 존재들이다.
정인성 작, <봉화 춘양의 겨울서정>
위의 시에서 시인이 택한 공감의 대상은 바로 보리이다. 예로부터 밀과 보리는 내한성(耐寒性) 작물로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보리와 밀, 호밀(라이보리)과 메밀, 트리티케일(Triticale) 등 수 많은 맥류(麥類)가 인류를 배불려 주었다. 그 중에서 특히 가을철에 파종하여 이듬해 봄에 거두어 들이는 가을보리 종류들은 한겨울의 얼어붙은 땅을 견뎌내는 강인한 생명력과 의지의 표상으로 알려져 왔다. 눈 덮인 들녘, 아직 한파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을 때 푸릇푸릇한 새싹을 세상에 내놓는 보리의 꿋꿋한 모습은 뭇 인간들의 나태와 박약함을 꾸짖고 있다.
보리는 여러 문학과 예술작품에서 그와 같은 이미지로 다가오고 있다.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포항에서 문단활동을 하다 작고한 한흑구(韓黑鷗) 님은 생전에 <보리>라는 수필을 남겼다. 여기에 앞에서 말한 보리의 기백과 의지가 웅변적으로 잘 묘사되고 있다.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논과 밭에는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면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중략) 물도 흐르지 않고 다 말라 버린 갯강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 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들도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그 많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고 찌푸리고 있는데,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도 솔잎 끝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하략) "
빈센트 반 고흐 작, <까마귀 나는 보리밭>
그러나 보리가 마냥 시련을 극복한 의지의 상징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와즈(Auvers Sur Oise)에 머물 때 여러 개의 보리밭 그림을 남겼다. 그의 보리밭은 모두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내놓은 그림이다. 한흑구의 수필과는 상반되게, 그 그림들에 나타난 보리는 좌절과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특히 <까마귀 나는 보리밭>에서 까마귀는 작가의 고독과 번민을 강하게 반사하고 있으며 꼿꼿이 서서 굴복을 거부하는 보리의 물결은 그의 강한 투쟁의지와 그 결말의 비극을 암시하고 있다. 고흐의 보리는 한 불우하고 의지력있는 예술가가 온몸으로 겪고 좌절한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한탄하였다.
"내 영혼을 갉아먹는 지독한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사랑이 있어야 할 곳에 파멸만 있는 현실에 넌더리가 난다. 이렇게 소리치고 싶다. 신이여,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
황금찬(黃錦燦) 시인의 시 <보리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나온다.
보리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Everest)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불랑(Mont Blanc)은 유럽,
와스카라(Huascaran)는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Kilimanjaro)가 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코리아의 보리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가다.
그 옛날 우리 민족이 당했던 봄철 기근과 굶주림, 그리고 그 한 많은 절망과 몸부림을 이 시에서 밝혀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류 화가 이숙자(李淑子)는 보리를 시련의 극복과 종결의 이미지로 승화(昇華)시켜 내고 있다. 그녀가 그린 <보리밭>연작은 눈부시고 역동적이며 풍요롭다. 그녀의 보리밭 그림에서는 고통의 밤과 역경의 겨울을 지난 승리와 환희의 표상으로 보리가 표현되고 있다.
이숙자 작, <청맥, 끝없이 펼쳐진...>
위 시의 이미지와 부합되는 보리는 바로 한흑구와 이숙자의 작품 속 보리이다. 이 두 사람의 보리는 추위를 이겨낸 자연의 위대한 승리를 보여주며 또한 우리 민족의 강인함과 거침없는 기백을 암시해 주고 있다. 우리가 위의 시와 두 사람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불굴의 의기와 정신이다. 보리의 이미지 속에서 희망을 보는 사람만이 보다 나은 미래를 엮어갈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여류 시인 사라 티즈데일(Sara Teasdale:1884-1933)은 간결하고 강렬한 서정시를 통해 주목받은 작가이다. 그녀는 결혼 생활에 실패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나 그가 지은 시들은 생명의 찬미로 가득 차 있다. 그녀의 생애와 그 시의 상반된 모습을 보면서 인생이란 그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여전히 그녀가 추구한 불굴의 예술혼은 수많은 그녀의 시 속에서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