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는 신분의 차별이 없다 ​

작성자CRYSTAL™|작성시간26.06.19|조회수18 목록 댓글 1

약 1:9-11/ 교회 안에서는 신분의 차별이 없다

 

야고보서 1장 [개역개정]

0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묵상 / 약 1:9-11)

◆ 낮은 형제와 부한 형제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야고보서 1:9-10)

‘낮은 형제’란 어떤 사람들일까?

야고보서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향한 서신서임을 감안할 때,

당시 로마 사회에서 상품처럼 사고팔던 노예를 상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예가 없었던 유대 사회 내에서도 사회적으로 귀족에 해당하는 존귀한 사람들과

종으로 사는 비천한 사람들이 있었다. 

당연히 부유한 사람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다.

전자는 존중받았고, 후자는 멸시받았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계급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과는 확연히 다른 언어 생활, 문화, 관습, 제도를 가진 하나님 나라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교회의 신비와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한 사람이다.

교회는 세상이 매긴 신분과 귀천의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서 그 어떤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도 만들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이다.

이 명령의 연장선에서 볼 때,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병폐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마치 계급처럼 구분 짓는 의식이다.

교회 안에도 세상과 다름없는 계층이 존재한다고 믿는 이런 의식은

겉은 매우 종교적이지만 속은 세속화되는 주범이 되었다.

오늘 본문은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권면한다.

늘 겸손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이들에게 ‘높음을 자랑하라’는 말씀은 매우 역설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만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성도의 신분을 자각하고,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거룩한 자부심을 가지라는 일깨움이다.

다음의 역사적 일화는 교회 안에서 세상의 신분이 어떻게 전복되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에 마부였던 엄귀현은 조선의 왕손이었던 이재형 대감의 말을 몰며 오랫동안 그를 섬겼다.

워낙 성실하게 자신을 보필하는 엄귀현에게 감동한 이재형은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친근하게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귀현이 대담하게 왕손을 향해 복음을 전했다.

"나리, 황송하오나 오늘부터 예수를 믿으소서. 그래야 나리도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사옵니다."

감히 상놈의 신분으로 왕족인 자신에게 훈수하는 듯한 태도에 내심 괘씸하고 화가 난 이재형은

“예수를 믿으면 마부 신세라도 면한단 말이냐?”라며 빈정댔다. 그러자 엄귀현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나리, 예수 믿는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마부 신세를 면하려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마부 노릇을 더 잘하려고 믿습니다. 나리께서 예수를 믿으신다면 저는 평생 나리의 마부로 기쁘게 섬기겠습니다."

이재형은 이 대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저 천한 마부를 저토록 당당하고 온유하게 만드는가?’

후에 이재형은 먼저 예수를 믿은 아내의 권유와 나라를 잃은 울적한 심경이 맞물려 예배당에 발을 들였고,

결국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했다.

세월이 흐른 후, 이재형은 종로에 있는 승동교회에서 열린 연합 사경회에 참석했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전도했던 마부 엄귀현을 만난 것이다.

당시 엄귀현은 봉화현교회의 ‘영수(領袖)’로 시무하고 있었다.

영수는 초기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가 부족하던 시절,

장로 안수를 받기 전 단계에서 교회의 설교와 행정 전반을 도맡아 이끌던 평신도 최고 지도자 직분이었다.

예배당 앞줄에 근엄하고 거룩하게 앉아 기도하는 엄귀현의 모습을 본 이재형은 무척 반가웠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이재형은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형님, 이렇게 만나니 반갑구려. 내게 전도하던 엄가 아니시오!"

왕손이었던 이 대감이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자 엄귀현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나리, 저를 형님이라 부르다니요, 황송하옵니다. 그런데 나리께서도 드디어 예수를 믿으십니까? 할렐루야!"

세상의 신분 제도를 뛰어넘어 양반과 마부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형제’로 마주하는

이 감동적인 광경을 보며, 주위에 있던 성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사회에서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천민과 백정들이 교회 안에서는

동등하게 존중받는 하나님 나라의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이후 이재형 왕손은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고,

엄귀현 영수가 주선한 예배에서 축도를 담당할 만큼 두 사람은 평생 아름다운 동역자로 살았다.)

세상의 지위가 높다고 해서 교회에서 대접받으려 해서는 안 되며,

사회에서 비천한 대우를 받았을지라도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선포된 신분을 확인하며 당당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교회다.

세상에서의 신분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침 안개처럼 허무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옛날의 왕들조차 전쟁에서 지면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하곤 했다.

중국 춘추시대의 기록인 [오월춘추]에 따르면,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 왕 부차에게 패배한 후 목숨을 구걸하여 노예가 되었다.

그는 마부로 전락하여 부차가 수레를 탈 때마다 인간 발판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부차가 중병에 걸렸을 때는 의심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

부차의 대변을 직접 손으로 찍어 먹으며 병을 진단하는 극단적인 굴욕까지 감내했다.

이 일로 부차의 완벽한 신임을 얻어 고국으로 풀려난 구천은,

그 치욕을 잊지 않으려고 매일 쓴 쓸개를 맛보며 복수의 칼을 갈았고,

결국 20년 만에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부차를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유래다.

한 나라의 제왕조차 상황이 바뀌면 남의 똥을 찍어 먹는 노예로 추락하는 것이 세상의 권세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 세상의 신분이 조금 잘 나간다고 해서 형제들 앞에서 우쭐댈 이유가 전혀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혀 다른 가치와 기준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오직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겸손하게 형제자매를 섬기며,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마땅한 봉사를 하자.

하나님 아버지,

저를 허무한 세상의 신분에 매이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다운 거룩한 자부심과 올바른 복음적 의식을 가지고,

내 곁의 형제자매들을 온전히 사랑하며 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출처] 약 1:9-11/ 교회 안에서는 신분의 차별이 없다|작성자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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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CRYSTAL™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9
    그렇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고 계급화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성경(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개혁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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