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라는 말은 대개 좋은 일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다.
누군가의 병이 나았을 때,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막혔던 길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그제야 감사라는 말을 꺼낸다. 마치 감사는 좋은 소식 뒤에 따라오는 작은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그렇게 늦게 도착하는 감정이 아니다. 성경은 감사의 자리를 훨씬 더 깊은 곳에 둔다. 상황보다 깊은 곳, 감정보다 깊은 곳, 심지어 삶의 형편보다 더 깊은 곳에 감사의 뿌리를 내린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말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모든 상황 속에서.
해가 비치는 날뿐 아니라 비가 내리는 날에도.
기도가 응답된 것처럼 보이는 날뿐 아니라, 하늘이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에도.
이 말 앞에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멈칫한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하라니. 인생에는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 억울한 일도 있고, 오래도록 설명되지 않는 실패도 있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도 있고,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은 배신의 기억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
어떻게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할 수 있을까.
성경은 그 대답을 억지 웃음에서 찾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쉽게 말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감사의 가장 깊은 뿌리를 한 가지 사실에서 찾는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있게 하셨다는 것.
감사는 거기서 시작된다.
감사의 가장 깊은 자리
하박국은 감사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그가 바라본 들판에는 열매가 없었다. 무화과나무는 무성하지 않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었다. 감람나무에는 소출이 없었고, 밭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우리에는 양이 없었고, 외양간에는 소가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생활이 조금 불편해진 정도가 아니었다. 당시 농경 사회에서 그것은 삶의 바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내일의 식탁이 사라지는 일이었고, 가족의 생존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땅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나무는 침묵했고, 외양간은 비어 있었다.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쉽게 말할 수 없다. 감사하겠다고, 기뻐하겠다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하박국은 그 자리에서 고백한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의 감사는 환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환경은 감사의 근거를 하나씩 지우고 있었다. 감사할 이유를 찾으려 하면 오히려 감사할 수 없는 이유들만 눈앞에 쌓였다.
그런데도 하박국은 감사했다.
그는 상황보다 더 깊은 곳을 보고 있었다. 무너진 밭보다, 비어 있는 외양간보다, 사라진 열매보다 더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었다. 그의 감사는 조건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솟아난 것이었다.
진짜 감사는 조건에서 나오지 않는다.
존재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더 깊은 자리로 내려간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바라본다. 자신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묵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말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다윗은 자신이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아무렇게나 조합된 결과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모태에서 그를 지으셨다. 그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은 그를 보셨다.
물론 사람의 탄생 이야기는 언제나 깨끗하고 완전하지만은 않다. 그 안에는 인간의 죄와 실수가 개입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축복받지 못한 임신 속에서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버림받은 이야기 속에서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폭력과 아픔의 기억 속에서 생명을 얻는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복잡하다. 어떤 탄생은 불완전해 보이고, 어떤 시작은 상처투성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실수와 죄가 생명의 마지막 설명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허락과 계획 없이 이 땅에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 사람의 이야기가 아무리 깨어져 있어도, 하나님은 그 깨어진 이야기 속에서 생명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 생명은 우연이 아니다.
생명의 탄생 자체를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수억 개의 정자 가운데 단 하나가 난자를 만난다. 그 하나가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만일 다른 하나가 난자를 만났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조금 다른 버전의 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태어났을 것이다.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리.
다른 성격.
다른 기질.
다른 생각.
다른 삶.
그 수많은 가능성의 바다 속에서 하나님은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하셨다.
그 사실 앞에서 사람은 조용해진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지금 이 이름으로, 이 얼굴로, 이 몸과 이 기질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감사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있게 하셨다.
그것이 감사의 첫 문장이다.
나를 받아들이는 믿음
그러나 사람은 자기 자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미워하기도 하고, 자신의 성격을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어떤 기질은 너무 예민하다고 느껴지고, 어떤 조건은 불공평하다고 느껴진다. 어떤 출발점은 너무 늦었고, 어떤 배경은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속에서 오래된 질문들이 들려온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을까.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못했을까.
왜 내게는 저런 재능이 없을까.
왜 내 삶은 이런 자리에서 시작되었을까.
그 질문들은 평소에는 조용히 숨어 있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고개를 든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서랍을 열었을 때 먼지가 피어오르듯이, 그 질문들은 다시 떠오른다.
그러나 믿음은 그 자리에서 다른 말을 듣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수로 나를 만드시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 수는 있다. 내가 선택한 조건이 아닐 수는 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출발점일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를 지으셨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땅을 고르지 않았다. 제비뽑기로 각 지파의 기업이 정해졌다. 어떤 땅은 넓어 보였고, 어떤 땅은 척박해 보였을 것이다. 어떤 지파는 마음에 들었을 것이고, 어떤 지파는 아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땅은 우연히 떨어진 땅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 주신 땅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한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 주신 구역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내 삶의 자리, 내 몸, 내 기질, 내 조건, 내 출발점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무력한 태도도 아니다. 이것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지으셨고, 나를 이 자리에 두셨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
나의 삶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곳에서 감사가 시작된다.
관점이 인생을 결정한다
자신의 존재를 감사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삶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진다.
같은 컵에 콜라가 반쯤 담겨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반밖에 없네.” 다른 사람은 말한다. “아직 반이나 남았네.”
콜라의 양은 그대로다. 바뀐 것은 컵이 아니라 시선이다.
인생도 그렇다. 사건 자체가 우리 인생의 전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가나안 정탐꾼들이 그랬다. 열두 명은 같은 땅을 보았다. 같은 포도송이를 보았고, 같은 성읍을 보았고, 같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 땅은 포도 한 송이를 두 사람이 메고 와야 할 만큼 풍성한 땅이었다.
그러나 열 명은 그 땅을 악평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들이 본 거인들을 더 크게 보았다. 약속의 땅을 보고도 두려움을 말했다. 풍성함을 보고도 위험을 말했다. 같은 현실 앞에 섰지만 전혀 다른 해석을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같은 사건 속에서 절망을 본다.
어떤 사람은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환경 자체보다 그 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요셉이 배운 하나님의 시각
요셉의 인생은 그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는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미움은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형들은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았다.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집에서 그는 종이 되었다.
그는 성실했다. 보디발의 집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성실함이 곧바로 보상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요셉의 인생은 한동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누군가 어두운 방 안에서 그의 삶의 불을 하나씩 꺼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어둠의 시간을 지나며 요셉은 하나님의 시각을 배웠다. 그는 사건만 보지 않았다. 사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 요셉은 자신을 팔았던 형들을 다시 만난다. 그 순간 요셉은 과거를 복수의 재료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형들의 죄를 하나하나 꺼내어 그들 앞에 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말을 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리고 다시 말한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요셉은 형들의 죄를 부정하지 않았다. 형들은 실제로 그를 팔았다. 그 배신은 실제였고, 그 상처도 실제였다.
그러나 요셉은 그 위에서 일하시는 더 큰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다. 인간의 악한 선택 위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는 길을 열고 계셨음을 보았다.
그는 사건 자체보다 사건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이것이 믿음의 해석이다.
고난 속에서 배우는 감사
예레미야애가도 같은 길을 걷는다.
예레미야는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초와 재난을 기억했다. 쑥과 담즙 같은 시간을 기억했다. 마음은 낙심되었다. 가슴에는 무거운 돌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는 고난을 가볍게 말하지 않았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이었다. 무너진 것은 무너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예레미야는 고난 자체를 바라보다가, 그 고난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보았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지만 끝나지 않았다. 아직 진멸되지 않았다.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무거운 멍에조차 하나님의 허락과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고난을 단순한 저주로만 보지 않는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배운다. 자신을 배운다. 믿음을 배운다.
그리고 어느 날 알게 된다. 고난은 나를 끝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허락된 시간이었다는 것을.
십자가를 앞두고 드린 감사
감사의 완전한 본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셨다. 그 자리에서 떡을 드셨고, 잔을 드셨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다.
그 감사의 자리 뒤에는 배신이 있었다. 체포가 있었다. 조롱이 있었고, 채찍이 있었고, 십자가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다.
자신이 팔릴 것을 아셨다.
제자들이 흩어질 것을 아셨다.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아셨다.
십자가의 고통도 아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감사하셨다.
유월절 만찬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 밤하늘에는 니산월의 보름달이 떠 있었을 것이다. 성전에서는 어린양들의 피가 흘러 수로를 따라 기드론 시내로 내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피가 흐르는 시내를 건너가셨다.
그분은 알고 계셨다. 자신이 바로 그 어린양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자신이 곧 찢기고 부어질 것을. 그러나 그 길 끝에 구원이 있음을.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면서도 감사하셨다.
그 감사는 상황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다. 고통이 좋아서 드리는 감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는 감사였다. 십자가 너머에 있는 구원을 보는 감사였다.
감사는 좋은 상황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언어다.
모든 감사의 뿌리
결국 감사는 이렇게 깊어져 간다.
먼저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가 있다.
그 감사는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감사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감사가 깊어질 때, 우리는 마침내 범사에 감사하는 자리로 나아간다.
감사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와 믿음의 문제다.
내가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 사람.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고, 나를 보셨고, 나를 이 자리에 두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 내 삶의 모든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
그 사람은 결국 감사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다시 우리에게 말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모든 감사는 여기서 출발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있게 하셨다는 것.
내 삶이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감사는 더 이상 조건의 언어가 아니다.
감사는 존재의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