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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이다. 14시간짜리 기차여행이다. 그것도 낮에 떠나는.
우리가 떠나기로 했던 그날 밤, 표는 없었다.
미리 전 도시인 마드리드에서 예매를 했어야 했지만 그러기엔 우리의 여행경험은 턱없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예측할 줄 모르는 바보들이었다.
역무원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 잠시후 다음날 떠나는 낮기차표를 사고야 말았다.
다른 대안은 없었다.
아, 유럽에서의 하루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리는구나!
낮기차여행은 우리에게는 그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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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느라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야 했던 잠많은 우리는 일단 두시간 정도 잠을 더 자주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며]
스페인의 국철 Talgo열차는 정말 쾌적하다.
유리창 밑부분에서 섭씨 20도 정도로 맞추어진 알맞은 온도의 바람이 실내를 춥지도 덥지도 않게 조절하고 있으며 객차별로 상영하는 영화와 개인에게 지급되는 이어폰 등 각종 편의 시설이 우리를 만족케 했다.
좌석도 아주 훌륭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고속버스나 기차의 의자는 뒤로 제끼면 뒤의 공간이 줄어들어 뒷사람의 거동을 제한하기 십상이다.
앞사람이 여행의 편의를 즐기고 있는 동안 뒷사람이 불편을 고스라니 감내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 스페인 탈고 열차의 좌석은 승객이 뒤로 의자를 제낀 만큼 엉덩이 부분이 앞으로 빠져나가 뒷사람에게 주는 피해를 거의 없게 하는, 독창적이고 합리적인 구조였다.
유럽인들의 사고의 단면이 아닐까 싶었다.
기차칸마다 달려있는 모니터에서는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고 수시로 열차의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거기에 뜨는 정보에 의하면 탈고 열차는 최고 시속이 160km 쯤 되었는데 정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차 속도가 그렇게 되어보이지 않았는데 160이라니까 놀랐고, 그 정도 속도에서도 실내 정숙성과 승차감을 유지하는 스페인 철도의 기술력에 또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탈고 열차 안의 모니터. 각종 영화상영 및 열차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기차에서는 제목을 알 수 없는 허리우드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는데 죠셉은 저거 재미있는 거라며 신이 나서 이어폰을 끼고 시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이어폰을 빼들더니 낭패라는 듯이 말했다.
"제길, 스페인어로군."
영화는 친절하게도 더빙되어 있었다.
그냥 '그림'만 보는 수 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보니 풍광또한 이채롭다.
땅은 바위를 갈아 놓은듯 푸석해 보이고(그렇다고 먼지가 날릴 정도는 아니다) 수목들은 곧게 자라지 못하고 땅에 푹 퍼져있다.

멀리 펼쳐진 지평선과 가끔씩 나타나는 바위산 계곡들.
곳곳에는 인공조림을 한 흔적이 역력한데 그 사이를 작은 국도가 지나가기도 한다.
특이한 점은 차선이 보이지 않는다.
스페인의 국토는 광활하고 황량하기까지 한데 별다르게 농업을 하고 있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기후 탓으로 자라는 작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인구대비 영토비율이 높아 굳이 고되게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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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네이버 백과사전 편을 살펴보았다.
[스페인의 기후는 대체로 여름에 심한 건조상태를 나타내는 지중해성 기후이다. 레온 지방과 지중해 쪽의 무르시아 지방은 강수량이 적어 연간 400mm 이하이다.
내륙지방도 강수량이 적은데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심하여 국지적으로는 스텝 또는 사막과 같은 경관을 나타낸다.
건조한 기후조건 때문에 일반적으로 식생에 부적당하여 민둥산과 다갈색 토양의 대지가 주를 이루며 북부의 산지에서만 삼림을 볼 수 있다.
전국토 중 경지는 11%, 초원은 18%, 산림지대는 56%이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농사짓는 풍경을 볼 수가 없었구나. 어쩐지 건조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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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풍경은 지평선이 펼쳐지고 드문드문 나무와 외딴 곳에 앙증맞은 집이 나타나는 정도이다가도 지루하지 않게 구릉과 제법 위세를 갖춘 산맥이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외로운 스페인의 들판]
만일 이 넓은 땅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데려온다면 어떻게 될까?
저 땅위에 오렌지, 올리브 나무가 자라고 스페인이 농업의존도가 지금보다 세배는 높아지고 엄청난 양의 농산물을 세계 각국에 수출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근면한 우리나라 농부들 때문에 말이다.
갑자기 마드리드 루까스 민박 아저씨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천만명은 세계로 나와야 한다"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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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시 나갈까보다.

[탈고 열차의 식당칸의 모습]
식사를 하러 카페테리아 칸에 왔다.
그곳은 여느 스페인의 타베르나 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흥청거리는 분위기가 난다.
참 이 나라 사람들 국민성이란... 어딜가도 놀 분위기가 형성이 되니. 심지어 기차의 식당칸도 분위기 좋구나.
뭔가 골라보려 메뉴판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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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메뉴판을 보고 있는지 3분정도 지났다.
아직도 죠셉과 나는 메뉴판을 보고있다.
도무지 뭘 시켜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어보았는데 바텐더의 말로는 선뜻 고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평소에 많이 들어보았던 Tortilla(또띠야)하고 Lomo y queso라는 것을 시키고 죠셉은 콜라, 나는 Cerveza(맥주)를 시켰다.


[카페테리아에 온 대니와 죠셉]
결론을 말하자면 또띠야는 실패, 로모는 대성공이었다.
한입 먹어본 죠셉의 로모는 정말 좋았다.
나는 또띠야를 억지로 먹다가 밑에 한 1/4을 남기고 말았다.
나도 로몬지 저거 시킬걸.
게다가 먹을 것을 시키고 맥주를 먼저 한모금 마시다가 피같은 술을 다 흘리고 말았다.
아주 오늘 먹을 운이 없구나. 가난한 여행자라 다시 시키지도 못하는데.
맘같아서는 흘린 맥주를 후루룩 다 마셔버리고 싶었다.

[맥주를 흘리고 아쉬워하는 대니. 바닥에 흐른 '피'같은 저 술좀 보라]
사실 기차안에서 열몇시간씩 있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지루하고 몸을 못움직여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 된다. 우리는 지루함을 타파하기 위해 여러가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차에서 일기를 쓰는 건 기본이죠]

[죠셉의 카메라 셔터에 비친 내 모습찍기 놀이. 생각보다 많이 어렵답니다!]

[그라나다의 사진이 가득 찍힌 내 카메라 찍기 놀이]

[때로는 유리창에 비친 우리모습을 찍기 놀이. 밤이 되면 탈고 열차 유리는 반사유리로 바뀌더라구요~]
마드리드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바르셀로나행열차로 갈아탔다.
기차는 달리고 또 달려 어느덧 산악지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점점 이베리아 반도가 시작되는 피레네 산맥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었다.
고산준령을 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차는 시속 110km 이상을 유지하며 꾸준히 달리고 있었다.
열차가 산을 오르는 탓으로 기압차가 발생해 귀가 멍해왔다. 침을 계속 삼켜야 했다.
그런데 산악지대에 볼것이 없으리라는 일반적 생각과는 달리 마드리드-바르셀로나 사이에는 훌륭해보이는 도시와 유적이 많았다.
높게 솟은 교회의 탑이며 저 멀리 산위에 건축된 성벽 등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많았다.
내가 지금 기차가 아닌 렌트카로 여행을 하고 있다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니의 일기 中에서...
'기차를 타고 달리며.
Zaragoza(사라고사)**라는 도시가 보인다.
지금 오후 6시 50분 현재까지 기차 안에 있다.
어제 예매하면서 하루를 날렸다고 생각했다.
밤기차로 숙박비를 아끼고 대도시 바르셀로나의 명승지들을 하나씩 답파해 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어 여행에 치명적인 실수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그라나다 발 바르셀로나 행 관광열차'를 탄 느낌이다.
너른 평야에 덩그러니 서있는 노란 지붕집을 지나 언덕에 홀로 서있는, 아무도 살지 않는 돌집을 뒤로 한채 언젠가는 꼭 한번 내려서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스페인의 대지여, 너 아름답구나.'

[풍력발전을 하고 있는 스페인의 농촌지역. 곳곳에 집단적으로 설치된 풍력발전기는 관광객들에게 짜릿한 시각적 즐거움을 안겨준다. 저걸 가까이서 꼭 보고 싶었다]

[조금 많아진 모습]
나는 내 평생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다시는 둘러보지 못할, 더없이 소중한 풍광들을 내 눈을 통해 가슴에 아로새기고 있었다.

[발데페냐스 역]

[퀘로 역. 벌집무늬 노란벽과 파란 문이 인상적이다]

[만자나레스 역. 역시 파란 테두리의 문과 시계가 예쁜 역. 어디에서 저런 미적 감각이 나오는 것일까][모두들 웬만한 지도를 뒤져서는 나오지도 않는 작은 역들이다. 저기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나는 머릿속으로 다음 여행은 '스페인의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를 렌트카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 저 많은 유적들을 다 볼 수 있을 테니까.

[스페인의 들판에 가득 피어있는 이름모를 들꽃]
또 낮에 바르셀로나까지 기차타고 가게 된 것에 대한 후회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낮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그라나다에서 바르셀로나까지의 기차 여행이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