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꼬르뷔제의 집합주택
유니뜨 다비따시옹
Unite d'Habitation of Le corbusier
♦유니뜨 다비따시옹은 어떤 건물인가?
♦근대건축의 집합주댁의 근대적 산물
♦유니뜨 다비따시옹의 건축적 특성
♦유니뜨 다비따시옹의 평가와 영향
♦유니뜨 다비따시옹의 일부 도면
♦느낀점
1.유니뜨 다비따시옹은 어떤 건물인가?
유니뜨 다비따시옹은 현대건축의 거장 르 꼬르뷔제가 45년전에 만든 예언적 고층 집합주거이다. 단일 건물속에 337세대의 주거와 시장,호텔,유치원,옥상정원 등의 공 동 공간을 담았다.1800 여명의 거주자들이 자연와 조화를 이룬 하나의 건물 속에서 생활하는 입체의 마을이다.
o꼬르뷔제의 5가지 건축 원리반영
ⅰ.개방된 지층 공간(필로티)
ⅱ.옥상 정원
ⅲ.자유로운 평면
ⅳ.가로의 긴창
ⅴ.자유로운 건물 정면
o구조적 특징
~커튼윌 구조의 건물에서 보이듯 건물의 전면에 긴창을 두어 기존건물에 약4배 의 실내채광을 확보,건물의 구조에 의해 경정되된 건물 형태에 자유로운 표현
가능
2. 근대건축의 대표적 산물로서의 집합주택 위니테
2차대전이 막 끝난 1945년 르 꼬르뷔제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남부의 항구도시 마 르세유에 건축될 새로운 주거형식에 대한 구상과 계획을 의뢰받게 된다. 이 의뢰는 향후 프랑스에 대규모로 건축될 공공주택의 적절한 유형을 개발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집합주택 위니테(Unit d'Habitation)의 계획은 7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 후에 비로소 실현된다. 이 위니테는 르 꼬르뷔제가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그림과 글을 통하여 줄기차게 제시하였던 많은 집합주택 계획안들 중에서 비로소 실현된 것이다. 또한 위니테는 그의 수많은 대형 집합주택 계획의 마지막 종지부를 찍는 것이기도 하였다.
1922년 처음으로 집합주택의 모델을 제시한 이후 1945년 위니테의 계획이 시작되기까지 23년의 세월동안 르 꼬르뷔제는 30여개가 넘는 집합주택 계획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들 중에서 실제로 실현된 것은 거의 없었으며, 1923년에 실현된 패삭(Passac)의 집합주택을 제외 한다면 위니테는 유일하게 실현된 계획안이었다. 결과적으로 집합주택에 관한 다양한 개념을 실현화하는 데 있어서는 르 꼬르뷔제는 불우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 위니테의 실현은 그 동안의 불우함을 모두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마르세유에 집합주택 위니테가 건축된 것은 근대건축의 진행과정과 20세기 주거환경의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위니Ep는 미스(Mies van der Rohe)의 철·유리건축과 함께 근대건축의 형식과 이념을 대변하는 20세기 건축의 가장 중요한 산물로서 인식되고 있다. 위니테는 근대건축의 지도자들이 주요 목표로 설정하였던 '이상적 공동사회로서의 집합주택'이 하나의 구체적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었고, 합리적이면서 보편타당한 가치를 가지는 '살기 위한 기계'로서의 주거환경이 실제로 구현된 것이었다. 위니테는 운동과 여가생활을 중시하는 20세기형 인간의 개인생활을 수용하고, 그들의 사회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근대화 된 공동 서비스까지를 제공하는 복합적 기능을 가지는 집합주거로서 제시된 것이었다. 또한 위니테는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건설과 유지·관리에의 경제성과 효용성, 그리고 고밀도의 환경을 유지하면서도 넓은 외부공간을 가지는 새로운 도시주택의 모델이었다.
또한 위니테는 굴뚝·갑판·객실·통로로 구성되는 증기여객선을 건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었다. 건축평론가 콜크혼(A. Colquhone)의 분석에 따르면, 위니테는 몇 가지 측면에서 현저하게 여객선의 형태를 재현하고 있는데, (1)필로티로 띄워져서 마치 물위에 떠 있는 배처럼 보이며, (2)바다에 떠 있는 상태와 마찬가지로 거주자 모두가 외부환경과 동일한 관계를 가지며, (3)단위주택과 복도로 구성되는 공간구성은 여객선의 객실과 통로의 구성과 동일하며, 또한 (4)옥상정원은 굴뚝을 비롯한 여객선의 상부구조와 같은 이미지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위니테는 르 꼬르뷔제가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에서 주장하였던 '기계'로서의 주거개념과 근대화된 공동체의 이념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최초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하게는, 위니테가 2,30년대에 건축가 자신이 계획한 '300만인을 위한 도시'와 '빛나는 도시' 등에서 제시하였던 집합주택의 모델들과 많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2,30년대에 르 꼬르뷔제가 제시한 집합주택은 두 가지 유형이었다. 하나는 선형주택( redent:set-backs)으로서 요철형(凹凸形)의 굴곡을 가지는 거대한 집합주택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중정을 둘러싸는 블록형 집합주택(immeubles villas)이었다. 위니테는 이 집합주택들과 여러가지 측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은데, 다만 외부공간을 둘러싸는 위요형(圍繞形) 배치방식에서 일자형(一字形)의 배치방식으로 전환되고 동시에 필로티에 의해서 주택이 대지와 유리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인 전환이었다. 젊은날 르 꼬르뷔제가 제시한 대규모 집합주택의 모델은 그가 그렸던 새로운 사회구조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그가 그렸던 사회에서 개인은 생물체의 세포와 같아서 그것의 질이 전체 사회의 질을 결정하였고, 동시에 개인적인 만족의 집합은 사회 전체의 만족으로 연결되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태양과 공기와 수목을 향유함으로써 충족될 수 있었고, 심신의 안락함은 적절한 채광, 통풍, 그리고 방음 등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인간을 담는 집합주택에서 역시 가장 커다란 중요성은 단위주택에 부여되었다. 그의 집합주택에 적용된 단위주택에는 독립주택의 공간요소가 모두 반영되어서, 취사·운동·취미·독서를 위한 공간이 모두 마련되었다. 따라서 그의 집합주택 개념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가졌던 개념 즉 모든 시설을 공유하는 공동주택이 아니라, 가족생활의 독립성이 보장되고 동시에 외부에는 충분한 위락시설이 있는 집합주택이었다. 이것은 당시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소극적인 주거개념으로 비추어졌으며, 따라서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개인공간을 집합화한 도시주택의 개념은 르 꼬르뷔제 뿐만 아니라 근대건축을 주도한 건축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개념이었다. 개인의 공간이 강조된 집합주택은 도시주택의 기본형으로 정착되어서 20세기 집합주택의 특징으로 지속되고 있다. 여기에 위니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3. 위니테의 건축적 특성
위니테는 17층의 높이를 가지고 1인에서부터 6인 가족까지를 수용하는 스물세 가지의 평면적 변형을 가지는 집합주택이다. 건물은 남북방향을 향해 배치되었으므로 단위주택은 동서방향으로 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배치방식은 당시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 성행하던 것으로서 아침저녁으로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는 이유에서 채택된 것이다. 태양의 고도를 계산해서, 여름에는 태양빛을 차단하고 겨울에는 빛을 받아들이는 차양 즉 브리즈·솔레이(brise-soleil)가 설치되었다. 주택의 공간계획에는 소위 '모듈라(Modulor)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단위주택의 폭은 약 4.5미터(2 모듈라)였고, 내부로의 길이는 약 15미터로 결정되었다. 이곳에는 350가구용의 단위주택이 마련되었으며, 전체 계획인구는 1,600명이었다. 7-8층에는 다양한 상업시설이 계획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복도는 3층마다 설치되었고 중복도 형식을 취하였으며, 길고 좁은 평면을 가지는 단위주택은 복층형의 단면형상을 가졌다. 건축가가 젊은 시절에 방문하였던 에마 수도원이나 2,30년대에 계획하였던 집합주택에서는 2층마다 설치된 편복도가 사용된 반면 위니테에서는 특이하게도 3층마다 설치된 중복도가 채용되었다. . 또한 단위주택이 복층형의 공간구성을 취하는 것은 그의 젊은 시절의 주거모델이었던 시트로한(Citrohan) 주택 이후 일관되게 제시되었던 것이다. 건물의 옥상부를 위락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건물의 위치하고 있는 지중해 연안이라는 사실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트랙 등 운동시설과 수영장, 유아원, 그리고 노천극장 등이 위치하여, 주민들은 지중해가 바라보이는 맑은 공기 속에서 운동하고 뛰놀 수 있게 되었다.
위니테의 건축은 르 꼬르뷔제 개인의 건축언어를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위니테를 통하여 르 코르뷔지에의 '창작 2기'를 특징짓는 몇가지의 건축언어가 새로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즉 위니테를 통하여 르 코르뷔지에는 브리즈·솔레이(brise-soleil)라고 불리는 차양시스템, 베통·브뤼(b ton brut)라고 불리는 거친 노출 콘크리트, 그리고 거대한 필로티 등 새로운 형태표현 수단을 새로이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1936년의 리오·데·자네이로(Rio de Janeiro)의 선형주택 계획과 1938년 알제이(Algiers)의 집합주택 계획 이후 르 꼬르뷔제의 주택에서 태양광을 수용하고 차단하는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유명한 브리즈·솔레이(brise-soleil)로 나타났으며, 위니테의 계획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차양의 목적은 겨울에는 태양광을 받아들이고 여름에는 이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와 함께 건축의 입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콘크리트를 거칠게 마감하는 수법은 당시의 건설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도출된 것이었다. 위니테의 건축에 참여한 군소 시공업체가 많다보니까 모든 부분에서 매끄러운 콘크리트 마감을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건축가는 역으로 거칠게 마감한 콘크리트 표면을 의장적 수단으로 사용할 것을 생각하였다. 결국 거푸집의 거친 표면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여 원시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는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빛과 어두움이 강조된 강력한 표면효과를 연출할 수 있었고, 전체 건축은 역사적인 유적처럼 강한 인상을 가질 수 있었다.
위니테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뺄 수 없는 것이 그의 새로운 비례체계인 모듈라 시스템이다. 르 꼬르뷔제의 모듈라는 "인간적 스케일에 부합하는 조화로운 칫수, 그리고 건축과 기계의 생산을 위해서 범세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제시된 것이다. 팔을 높이 들고있는 6피트 키를 가진 인간이 사변형의 내부에 서있고, 이것은 다시 황금비에 의해서 세분화된다. 좀더 작은 스케일은 피보나치(Fibonacci) 행렬에 의해서 또다시 섬세하게 나누어진다. 이 모듈라 시스템은 문 손잡이에서 방의 크기, 그리고 나아가서는 도시공간의 크기에 이르기까지를 규정하는 체계있고 질서잡힌 비례체계를 부여하려는 것이었다. 르 꼬르뷔제는 더 나아가서는 산업체에서도 이 체계를 준용하여 제품의 표준화를 시행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 모듈라 시스템은 건축가가 평생을 두고 추구하였던 순수주의(purism) 미학을 수리적인 수단을 통하여 구체화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 낸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수단이 아니고 건축적 질서를 자연이 지닌 질서체계에 버금가도록 승화시키기 위한 건축가 자신의 철학적 구도(求道)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 위니테에 대한 평가와 이후로의 영향
마르세유의 위니테는 1952년 완성되었다. 건축이 완성되기 이전부터 위니테는 건축가들의 엄청난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때로는 공격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르 코르뷔지에가 당시의 건축조례를 어겨가면서 건축할 수 있었던데 대한 일부 건축가들의 질투심의 결과였다. 또한 다른 건축가들은 이 건물이 정신질환을 유발한다고 모함하기도 하였다. 일반대중들의 거부반응 또한 상당하였다. 마르세유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실험대상이 될 수 없다면서 입주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건물은 상당 기간동안 비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수 년 동안 건물은 단지 기념물 정도로만 기능하였다. 건물은 하루에 수백 명씩이 방문하는 관광명소가 되었으며, 전시회나 회의 등이 개최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정상적인 입주가 진행된 후에도 7,8층에 계획된 공용시설 즉 식료품가게, 바(bar), 카페테리아, 담배가게, 미장원, 꽃가게, 우체국 등은 이용자가 없어서 운영될 수 없었다. 르 꼬르뷔제는 400세대 정도의 인구가 식료품가게 등 공용시설을 유지하기에 적합한 규모로 보았으나, 실제로는 예상대로 운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거주자들이 물건을 구매하거나 미장원 등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 얼마든지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1957년 낭트(Nante)에 건축된 위니테부터는 중간층에 공용시설을 설치하는 개념은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원래 르 꼬르뷔제가 생각하던 이상적 공동체로서의 위니테의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위니테는 유럽의 여기저기에 계속 건축되었다. 마르세유에 이어서 1955년에는 낭트에서 그리고 1957년에는 베를린의 주택전시회 인터바우(Interbau)의 일환으로 다시 실현되었으며, 프랑스의 브리에·앙·포레 (Briey-en-Foret)에도 건축되었다. 그런데, 마르세유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베를린에 건축된 위니테는 대성공이었다. 올림픽 스타디움이 내려다 보이는 매력적인 자리에 위치한 베를린의 위니테는 베를린의 중산계층에게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원칙을 중시하는 독일인의 의식구조와, 협소한 대지 내에 많은 사람을 수용해도 이를 감수해내는 독일인의 인내심, 그리고 깨끗한 환경에 대한 독일인의 선호의식 등이 개인주의적인 마르세유의 주민들과 달랐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일설에는 르 꼬르뷔제가 개인적으로 싫어했던 베를린 사람들이 그의 개념에 쉽게 동화되는 것에 격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계획의 관점에서 본다면 위니테는 상당한 취약점을 지니고 있는 집합주택이다. 저명한 도시역사가 멈포드(L. Mumford)의 말대로 위니테는 "집합주택으로 교묘하게 위장한 기념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위니테가 지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 즉 단위주택의 폭이 지나치게 좁고, 복도는 길고 어두우면서, 필로티 하부공간은 전혀 쓸모가 없고, 중간층에 위치한 상업시설은 전혀 사용되지 않으며, 옥상 테라스는 소금기 섞인 바람에 견디지 못하여 심하게 풍화되고 있으며, 서민을 위해서 계획된 주택이지만 실제로는 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등의 사실 때문이다.
이러한 약점과 그것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위니테가 근대건축 특히 근대의 주거환경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고층·고밀화를 지향하는 주거형식, 근대적인 개념의 공용공간, 충분한 태양과 맑은 공기를 수용하는 위생적인 환경, 이상적인 코뮤니티를 지향하는 건축형식 등 위니테가 함축하고 있는 주거개념은 2차대전 이후의 주거환경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위니테는 때로는 완전하게 복제된 모습으로 그리고 때로는 매우 변형된 모습으로 세계 각국에 재현되었다. 위니테를 통하여 세계의 많은 집합주택들은 콘크리트 타워, 옥상정원, 복층의 단위주택, 필로티, 브리즈·솔레이 등의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근대건축이 실패한 것이고 위니테가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 위니테가 함축하고 있는 형태와 관념 속에는 진정한 20세기의 시대정신이 담겨있다. 20세기의 주거환경이 지니는 문제가 스케일 감각도 없고, 공용공간에 대한 개념도 없으며, 녹지공간에 대한 배려도 없이 마구잡이로 양산되는 무미건조한 고층아파트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위니테와는 본질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비록 위니테가 주택의 모양을 한 기념물인지는 모르지만 위니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의 집합주택'과 항상 동의어로 인식된다.
5 느낀점
처음 이건물 유니뜨 다비따시옹을 접한건은 불가 몇 개월전 일이다
첨 정면 사진을 보고는 이건물이 세련되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수십 여년전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움찔 놀랬던 기억이 있다..겉에서 보이는 모습으로는 차분하고 조용한 모습이 언뜻 학교 같아 보이기도 하고 요양원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예전 스터디를 하면서 시트로안 주택이 요즘 우리 주면의 건축들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유니뜨 다비따시옹은 요즘의 우리의 공동 주택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잘나가는 브랜드 아파트 들이 소음이나 여러이유로
과감하게 1층을 없에는 대신에 그곳에 주민휴식공간을 만들어 인기를 얻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적이 있는데, 이미 수십년전에 예언이나 한 듯이 그런 건물이 만들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시트로안에서의 보이드 공간을 통한 수직 공간의 연결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유니뜨 다비따시옹 에서도 그 때의 느낌을 느낄수 있었다..
공간을 구획함에 있어 단순한 평면에서 머무르지 않고 수직적인 공간을 고려 하면 자연히 3차원적인 다이나믹한 공간이 이루어질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각레벨 별로 확실한 기능 분활을 통하여 보다 효율적인 공간을 만들어 가고 그런 공간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지켜 가면서 하나의 중심적인 공간을 두어 자연스럽게 동선을 유도 한는 방법에 대해 알수 있었다...
또한 동.서 로 길게 늘어진 형태의 끝이 창을 내어져있기 때문에 시선이 묶여지지 않고 개방 되어있으므로 외부와의 이질감을 줄이고 개방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두 방향의 개방은 자연히 많은 빛을 끌어들여 조망을 따져 볼때에도 상당히 유리하리라고 생각이 든다..
꼬르뷔제의 건축에 나타나는 옥상정원은 이전의 단독 주택이나 빌라와 비교 하자면
그 스케일부터가 커져 옥상;정원‘이라기 보다는 ’공원‘ 이라 해야 맞을 만큼 넓고 시원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단순한 생활 공간에 불과한 우리시대의 건축이 훨씬 이전의 과거로부터 추월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단위 주거
o기준형 단위 주거는 복층형 아파트가 서로 엇갈리게 맞물려 건물의 단면에서 세계의 층이 하나의 단위체로 묶여지게 됨
o단면 단위체의 중앙에는 실내 가로라 불리우는 복도가 있어 위와 아래에 놓이는 단위주거로 진입을 가능. 그러므로 진입복도는 3개층마다 하나씩 생겨나는 단면구조
o 단위주거들은 독신을 위한 것으로부터 8명의 자녀가 있는 가족을 위한 것까지 23개의 서로 다른 유형
유니뜨 다비따시옹
Unite d'Habitation of Le corbusier
♦유니뜨 다비따시옹은 어떤 건물인가?
♦근대건축의 집합주댁의 근대적 산물
♦유니뜨 다비따시옹의 건축적 특성
♦유니뜨 다비따시옹의 평가와 영향
♦유니뜨 다비따시옹의 일부 도면
♦느낀점
1.유니뜨 다비따시옹은 어떤 건물인가?
유니뜨 다비따시옹은 현대건축의 거장 르 꼬르뷔제가 45년전에 만든 예언적 고층 집합주거이다. 단일 건물속에 337세대의 주거와 시장,호텔,유치원,옥상정원 등의 공 동 공간을 담았다.1800 여명의 거주자들이 자연와 조화를 이룬 하나의 건물 속에서 생활하는 입체의 마을이다.
o꼬르뷔제의 5가지 건축 원리반영
ⅰ.개방된 지층 공간(필로티)
ⅱ.옥상 정원
ⅲ.자유로운 평면
ⅳ.가로의 긴창
ⅴ.자유로운 건물 정면
o구조적 특징
~커튼윌 구조의 건물에서 보이듯 건물의 전면에 긴창을 두어 기존건물에 약4배 의 실내채광을 확보,건물의 구조에 의해 경정되된 건물 형태에 자유로운 표현
가능
2. 근대건축의 대표적 산물로서의 집합주택 위니테
2차대전이 막 끝난 1945년 르 꼬르뷔제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남부의 항구도시 마 르세유에 건축될 새로운 주거형식에 대한 구상과 계획을 의뢰받게 된다. 이 의뢰는 향후 프랑스에 대규모로 건축될 공공주택의 적절한 유형을 개발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집합주택 위니테(Unit d'Habitation)의 계획은 7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 후에 비로소 실현된다. 이 위니테는 르 꼬르뷔제가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그림과 글을 통하여 줄기차게 제시하였던 많은 집합주택 계획안들 중에서 비로소 실현된 것이다. 또한 위니테는 그의 수많은 대형 집합주택 계획의 마지막 종지부를 찍는 것이기도 하였다.
1922년 처음으로 집합주택의 모델을 제시한 이후 1945년 위니테의 계획이 시작되기까지 23년의 세월동안 르 꼬르뷔제는 30여개가 넘는 집합주택 계획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들 중에서 실제로 실현된 것은 거의 없었으며, 1923년에 실현된 패삭(Passac)의 집합주택을 제외 한다면 위니테는 유일하게 실현된 계획안이었다. 결과적으로 집합주택에 관한 다양한 개념을 실현화하는 데 있어서는 르 꼬르뷔제는 불우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 위니테의 실현은 그 동안의 불우함을 모두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마르세유에 집합주택 위니테가 건축된 것은 근대건축의 진행과정과 20세기 주거환경의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위니Ep는 미스(Mies van der Rohe)의 철·유리건축과 함께 근대건축의 형식과 이념을 대변하는 20세기 건축의 가장 중요한 산물로서 인식되고 있다. 위니테는 근대건축의 지도자들이 주요 목표로 설정하였던 '이상적 공동사회로서의 집합주택'이 하나의 구체적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었고, 합리적이면서 보편타당한 가치를 가지는 '살기 위한 기계'로서의 주거환경이 실제로 구현된 것이었다. 위니테는 운동과 여가생활을 중시하는 20세기형 인간의 개인생활을 수용하고, 그들의 사회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근대화 된 공동 서비스까지를 제공하는 복합적 기능을 가지는 집합주거로서 제시된 것이었다. 또한 위니테는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건설과 유지·관리에의 경제성과 효용성, 그리고 고밀도의 환경을 유지하면서도 넓은 외부공간을 가지는 새로운 도시주택의 모델이었다.
또한 위니테는 굴뚝·갑판·객실·통로로 구성되는 증기여객선을 건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었다. 건축평론가 콜크혼(A. Colquhone)의 분석에 따르면, 위니테는 몇 가지 측면에서 현저하게 여객선의 형태를 재현하고 있는데, (1)필로티로 띄워져서 마치 물위에 떠 있는 배처럼 보이며, (2)바다에 떠 있는 상태와 마찬가지로 거주자 모두가 외부환경과 동일한 관계를 가지며, (3)단위주택과 복도로 구성되는 공간구성은 여객선의 객실과 통로의 구성과 동일하며, 또한 (4)옥상정원은 굴뚝을 비롯한 여객선의 상부구조와 같은 이미지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위니테는 르 꼬르뷔제가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에서 주장하였던 '기계'로서의 주거개념과 근대화된 공동체의 이념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최초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하게는, 위니테가 2,30년대에 건축가 자신이 계획한 '300만인을 위한 도시'와 '빛나는 도시' 등에서 제시하였던 집합주택의 모델들과 많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2,30년대에 르 꼬르뷔제가 제시한 집합주택은 두 가지 유형이었다. 하나는 선형주택( redent:set-backs)으로서 요철형(凹凸形)의 굴곡을 가지는 거대한 집합주택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중정을 둘러싸는 블록형 집합주택(immeubles villas)이었다. 위니테는 이 집합주택들과 여러가지 측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은데, 다만 외부공간을 둘러싸는 위요형(圍繞形) 배치방식에서 일자형(一字形)의 배치방식으로 전환되고 동시에 필로티에 의해서 주택이 대지와 유리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인 전환이었다. 젊은날 르 꼬르뷔제가 제시한 대규모 집합주택의 모델은 그가 그렸던 새로운 사회구조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그가 그렸던 사회에서 개인은 생물체의 세포와 같아서 그것의 질이 전체 사회의 질을 결정하였고, 동시에 개인적인 만족의 집합은 사회 전체의 만족으로 연결되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태양과 공기와 수목을 향유함으로써 충족될 수 있었고, 심신의 안락함은 적절한 채광, 통풍, 그리고 방음 등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인간을 담는 집합주택에서 역시 가장 커다란 중요성은 단위주택에 부여되었다. 그의 집합주택에 적용된 단위주택에는 독립주택의 공간요소가 모두 반영되어서, 취사·운동·취미·독서를 위한 공간이 모두 마련되었다. 따라서 그의 집합주택 개념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가졌던 개념 즉 모든 시설을 공유하는 공동주택이 아니라, 가족생활의 독립성이 보장되고 동시에 외부에는 충분한 위락시설이 있는 집합주택이었다. 이것은 당시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소극적인 주거개념으로 비추어졌으며, 따라서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개인공간을 집합화한 도시주택의 개념은 르 꼬르뷔제 뿐만 아니라 근대건축을 주도한 건축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개념이었다. 개인의 공간이 강조된 집합주택은 도시주택의 기본형으로 정착되어서 20세기 집합주택의 특징으로 지속되고 있다. 여기에 위니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3. 위니테의 건축적 특성
위니테는 17층의 높이를 가지고 1인에서부터 6인 가족까지를 수용하는 스물세 가지의 평면적 변형을 가지는 집합주택이다. 건물은 남북방향을 향해 배치되었으므로 단위주택은 동서방향으로 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배치방식은 당시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 성행하던 것으로서 아침저녁으로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는 이유에서 채택된 것이다. 태양의 고도를 계산해서, 여름에는 태양빛을 차단하고 겨울에는 빛을 받아들이는 차양 즉 브리즈·솔레이(brise-soleil)가 설치되었다. 주택의 공간계획에는 소위 '모듈라(Modulor)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단위주택의 폭은 약 4.5미터(2 모듈라)였고, 내부로의 길이는 약 15미터로 결정되었다. 이곳에는 350가구용의 단위주택이 마련되었으며, 전체 계획인구는 1,600명이었다. 7-8층에는 다양한 상업시설이 계획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복도는 3층마다 설치되었고 중복도 형식을 취하였으며, 길고 좁은 평면을 가지는 단위주택은 복층형의 단면형상을 가졌다. 건축가가 젊은 시절에 방문하였던 에마 수도원이나 2,30년대에 계획하였던 집합주택에서는 2층마다 설치된 편복도가 사용된 반면 위니테에서는 특이하게도 3층마다 설치된 중복도가 채용되었다. . 또한 단위주택이 복층형의 공간구성을 취하는 것은 그의 젊은 시절의 주거모델이었던 시트로한(Citrohan) 주택 이후 일관되게 제시되었던 것이다. 건물의 옥상부를 위락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건물의 위치하고 있는 지중해 연안이라는 사실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트랙 등 운동시설과 수영장, 유아원, 그리고 노천극장 등이 위치하여, 주민들은 지중해가 바라보이는 맑은 공기 속에서 운동하고 뛰놀 수 있게 되었다.
위니테의 건축은 르 꼬르뷔제 개인의 건축언어를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위니테를 통하여 르 코르뷔지에의 '창작 2기'를 특징짓는 몇가지의 건축언어가 새로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즉 위니테를 통하여 르 코르뷔지에는 브리즈·솔레이(brise-soleil)라고 불리는 차양시스템, 베통·브뤼(b ton brut)라고 불리는 거친 노출 콘크리트, 그리고 거대한 필로티 등 새로운 형태표현 수단을 새로이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1936년의 리오·데·자네이로(Rio de Janeiro)의 선형주택 계획과 1938년 알제이(Algiers)의 집합주택 계획 이후 르 꼬르뷔제의 주택에서 태양광을 수용하고 차단하는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유명한 브리즈·솔레이(brise-soleil)로 나타났으며, 위니테의 계획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차양의 목적은 겨울에는 태양광을 받아들이고 여름에는 이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와 함께 건축의 입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콘크리트를 거칠게 마감하는 수법은 당시의 건설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도출된 것이었다. 위니테의 건축에 참여한 군소 시공업체가 많다보니까 모든 부분에서 매끄러운 콘크리트 마감을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건축가는 역으로 거칠게 마감한 콘크리트 표면을 의장적 수단으로 사용할 것을 생각하였다. 결국 거푸집의 거친 표면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여 원시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는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빛과 어두움이 강조된 강력한 표면효과를 연출할 수 있었고, 전체 건축은 역사적인 유적처럼 강한 인상을 가질 수 있었다.
위니테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뺄 수 없는 것이 그의 새로운 비례체계인 모듈라 시스템이다. 르 꼬르뷔제의 모듈라는 "인간적 스케일에 부합하는 조화로운 칫수, 그리고 건축과 기계의 생산을 위해서 범세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제시된 것이다. 팔을 높이 들고있는 6피트 키를 가진 인간이 사변형의 내부에 서있고, 이것은 다시 황금비에 의해서 세분화된다. 좀더 작은 스케일은 피보나치(Fibonacci) 행렬에 의해서 또다시 섬세하게 나누어진다. 이 모듈라 시스템은 문 손잡이에서 방의 크기, 그리고 나아가서는 도시공간의 크기에 이르기까지를 규정하는 체계있고 질서잡힌 비례체계를 부여하려는 것이었다. 르 꼬르뷔제는 더 나아가서는 산업체에서도 이 체계를 준용하여 제품의 표준화를 시행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 모듈라 시스템은 건축가가 평생을 두고 추구하였던 순수주의(purism) 미학을 수리적인 수단을 통하여 구체화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 낸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수단이 아니고 건축적 질서를 자연이 지닌 질서체계에 버금가도록 승화시키기 위한 건축가 자신의 철학적 구도(求道)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 위니테에 대한 평가와 이후로의 영향
마르세유의 위니테는 1952년 완성되었다. 건축이 완성되기 이전부터 위니테는 건축가들의 엄청난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때로는 공격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르 코르뷔지에가 당시의 건축조례를 어겨가면서 건축할 수 있었던데 대한 일부 건축가들의 질투심의 결과였다. 또한 다른 건축가들은 이 건물이 정신질환을 유발한다고 모함하기도 하였다. 일반대중들의 거부반응 또한 상당하였다. 마르세유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실험대상이 될 수 없다면서 입주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건물은 상당 기간동안 비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수 년 동안 건물은 단지 기념물 정도로만 기능하였다. 건물은 하루에 수백 명씩이 방문하는 관광명소가 되었으며, 전시회나 회의 등이 개최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정상적인 입주가 진행된 후에도 7,8층에 계획된 공용시설 즉 식료품가게, 바(bar), 카페테리아, 담배가게, 미장원, 꽃가게, 우체국 등은 이용자가 없어서 운영될 수 없었다. 르 꼬르뷔제는 400세대 정도의 인구가 식료품가게 등 공용시설을 유지하기에 적합한 규모로 보았으나, 실제로는 예상대로 운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거주자들이 물건을 구매하거나 미장원 등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 얼마든지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1957년 낭트(Nante)에 건축된 위니테부터는 중간층에 공용시설을 설치하는 개념은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원래 르 꼬르뷔제가 생각하던 이상적 공동체로서의 위니테의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위니테는 유럽의 여기저기에 계속 건축되었다. 마르세유에 이어서 1955년에는 낭트에서 그리고 1957년에는 베를린의 주택전시회 인터바우(Interbau)의 일환으로 다시 실현되었으며, 프랑스의 브리에·앙·포레 (Briey-en-Foret)에도 건축되었다. 그런데, 마르세유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베를린에 건축된 위니테는 대성공이었다. 올림픽 스타디움이 내려다 보이는 매력적인 자리에 위치한 베를린의 위니테는 베를린의 중산계층에게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원칙을 중시하는 독일인의 의식구조와, 협소한 대지 내에 많은 사람을 수용해도 이를 감수해내는 독일인의 인내심, 그리고 깨끗한 환경에 대한 독일인의 선호의식 등이 개인주의적인 마르세유의 주민들과 달랐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일설에는 르 꼬르뷔제가 개인적으로 싫어했던 베를린 사람들이 그의 개념에 쉽게 동화되는 것에 격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계획의 관점에서 본다면 위니테는 상당한 취약점을 지니고 있는 집합주택이다. 저명한 도시역사가 멈포드(L. Mumford)의 말대로 위니테는 "집합주택으로 교묘하게 위장한 기념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위니테가 지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 즉 단위주택의 폭이 지나치게 좁고, 복도는 길고 어두우면서, 필로티 하부공간은 전혀 쓸모가 없고, 중간층에 위치한 상업시설은 전혀 사용되지 않으며, 옥상 테라스는 소금기 섞인 바람에 견디지 못하여 심하게 풍화되고 있으며, 서민을 위해서 계획된 주택이지만 실제로는 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등의 사실 때문이다.
이러한 약점과 그것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위니테가 근대건축 특히 근대의 주거환경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고층·고밀화를 지향하는 주거형식, 근대적인 개념의 공용공간, 충분한 태양과 맑은 공기를 수용하는 위생적인 환경, 이상적인 코뮤니티를 지향하는 건축형식 등 위니테가 함축하고 있는 주거개념은 2차대전 이후의 주거환경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위니테는 때로는 완전하게 복제된 모습으로 그리고 때로는 매우 변형된 모습으로 세계 각국에 재현되었다. 위니테를 통하여 세계의 많은 집합주택들은 콘크리트 타워, 옥상정원, 복층의 단위주택, 필로티, 브리즈·솔레이 등의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근대건축이 실패한 것이고 위니테가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 위니테가 함축하고 있는 형태와 관념 속에는 진정한 20세기의 시대정신이 담겨있다. 20세기의 주거환경이 지니는 문제가 스케일 감각도 없고, 공용공간에 대한 개념도 없으며, 녹지공간에 대한 배려도 없이 마구잡이로 양산되는 무미건조한 고층아파트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위니테와는 본질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비록 위니테가 주택의 모양을 한 기념물인지는 모르지만 위니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의 집합주택'과 항상 동의어로 인식된다.
5 느낀점
처음 이건물 유니뜨 다비따시옹을 접한건은 불가 몇 개월전 일이다
첨 정면 사진을 보고는 이건물이 세련되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수십 여년전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움찔 놀랬던 기억이 있다..겉에서 보이는 모습으로는 차분하고 조용한 모습이 언뜻 학교 같아 보이기도 하고 요양원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예전 스터디를 하면서 시트로안 주택이 요즘 우리 주면의 건축들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유니뜨 다비따시옹은 요즘의 우리의 공동 주택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잘나가는 브랜드 아파트 들이 소음이나 여러이유로
과감하게 1층을 없에는 대신에 그곳에 주민휴식공간을 만들어 인기를 얻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적이 있는데, 이미 수십년전에 예언이나 한 듯이 그런 건물이 만들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시트로안에서의 보이드 공간을 통한 수직 공간의 연결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유니뜨 다비따시옹 에서도 그 때의 느낌을 느낄수 있었다..
공간을 구획함에 있어 단순한 평면에서 머무르지 않고 수직적인 공간을 고려 하면 자연히 3차원적인 다이나믹한 공간이 이루어질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각레벨 별로 확실한 기능 분활을 통하여 보다 효율적인 공간을 만들어 가고 그런 공간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지켜 가면서 하나의 중심적인 공간을 두어 자연스럽게 동선을 유도 한는 방법에 대해 알수 있었다...
또한 동.서 로 길게 늘어진 형태의 끝이 창을 내어져있기 때문에 시선이 묶여지지 않고 개방 되어있으므로 외부와의 이질감을 줄이고 개방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두 방향의 개방은 자연히 많은 빛을 끌어들여 조망을 따져 볼때에도 상당히 유리하리라고 생각이 든다..
꼬르뷔제의 건축에 나타나는 옥상정원은 이전의 단독 주택이나 빌라와 비교 하자면
그 스케일부터가 커져 옥상;정원‘이라기 보다는 ’공원‘ 이라 해야 맞을 만큼 넓고 시원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단순한 생활 공간에 불과한 우리시대의 건축이 훨씬 이전의 과거로부터 추월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단위 주거
o기준형 단위 주거는 복층형 아파트가 서로 엇갈리게 맞물려 건물의 단면에서 세계의 층이 하나의 단위체로 묶여지게 됨
o단면 단위체의 중앙에는 실내 가로라 불리우는 복도가 있어 위와 아래에 놓이는 단위주거로 진입을 가능. 그러므로 진입복도는 3개층마다 하나씩 생겨나는 단면구조
o 단위주거들은 독신을 위한 것으로부터 8명의 자녀가 있는 가족을 위한 것까지 23개의 서로 다른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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