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te D'habitation(1947-1952)- Le Corbusier
2차대전이 막 끝난 1945년 르 코르뷔지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남부의 항구도시 마르세유에 건축될 새로운 주거형식에 대한 구상과 계획을 의뢰받게 된다. 이 의뢰는 향후 프랑스에 대규모로 건축될 공공주택의 적절한 유형(類型)을 개발해 달라는 요구와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집합주택 위니테(Unit d'Habitation)의 계획은 7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 후에 비로소 실현된다. 이 위니테는 르 코르뷔지에가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그림과 글을 통하여 줄기차게 제시하였던 많은 집합주택 계획안들 중에서 비로소 실현된 것이다. 또한 위니테는 그의 수많은 대형 집합주택 계획의 마지막 종지부를 찍는 것이기도 하였다. 1922년 처음으로 집합주택의 모델을 제시한 이후 1945년 위니테의 계획이 시작되기까지 23년의 세월동안 르 코르뷔지에는 30여개가 넘는 집합주택 계획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들 중에서 실제로 실현된 것은 거의 없었으며, 1923년에 실현된 패삭(Passac)의 집합주택을 제외한다면 위니테는 유일하게 실현된 계획안이었다. 결과적으로 집합주택에 관한 다양한 개념을 실현화하는 데 있어서는 르 코르뷔지에는 불우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 위니테의 실현은 그 동안의 불우함을 모두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마르세유에 집합주택 위니테가 건축된 것은 근대건축의 진행과정과 20세기 주거환경의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위니테는 미스(Mies van der Rohe)의 철·유리건축과 함께 근대건축의 형식과 이념을 대변하는 20세기 건축의 가장 중요한 산물로서 인식되고 있다. 위니테는 근대건축의 지도자들이 주요 목표로 설정하였던 '이상적 공동사회로서의 집합주택'이 하나의 구체적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었고, 합리적이면서 보편타당한 가치를 가지는 '살기 위한 기계'로서의 주거환경이 실제로 구현된 것이었다. 위니테는 운동과 여가생활을 중시하는 20세기형 인간의 개인생활을 수용하고, 그들의 사회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근대화된 공동 서비스까지를 제공하는 복합적 기능을 가지는 집합주거로서 제시된 것이었다. 또한 위니테는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건설과 유지·관리에의 경제성과 효용성, 그리고 고밀도의 환경을 유지하면서도 넓은 외부공간을 가지는 새로운 도시주택의 모델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위니테는 르 코르뷔지에가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에서 주장하였던 '기계'로서의 주거개념과 근대화된 공동체의 이념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최초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하게는, 위니테가 2,30년대에 건축가 자신이 계획한 '300만인을 위한 도시'와'빛나는 도시' 등에서 제시하였던 집합주택의 모델들과 많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2,30년대에 르 코르뷔지에가 제시한 집합주택은 두 가지 유형이었다. 하나는 선형주택( redent: set-backs)으로서 요철형(凹凸形)의 굴곡을 가지는 거대한 집합주택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중정을 둘러싸는 블록형 집합주택(immeubles villas)이었다. 위니테는 이 집합주택들과 여러가지 측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은데, 다만 외부공간을 둘러싸는 위요형 배치방식에서 일자형의 배치방식으로 전환되고 동시에 필로티에 의해서 주택이 대지와 유리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인 전환이었다. 젊은 날 르 코르뷔지에가 제시한 대규모 집합주택의 모델은 그가 그렸던 새로운 사회구조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그가 그렸던 사회에서 개인은 생물체의 세포와 같아서 그것의 질이 전체 사회의 질을 결정하였고, 동시에 개인적인 만족의 집합은 사회 전체의 만족으로 연결되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태양과 공기와 수목을 향유함으로써 충족될 수 있었고, 심신의 안락함은 적절한 채광, 통풍, 그리고 방음 등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인간을 담는 집합주택에서 역시 가장 커다란 중요성은 단위주택에 부여되었다. 그의 집합주택에 적용된 단위주택에는 독립주택의 공간요소가 모두 반영되어서, 취사·운동·취미·독서를 위한 공간이 모두 마련되었다. 따라서 그의 집합주택 개념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가졌던 개념 즉 모든 시설을 공유하는 공동주택이 아니라, 가족생활의 독립성이 보장되고 동시에 외부에는 충분한 위락시설이 있는 집합주택이었다. 이것은 당시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소극적인 주거개념으로 비추어졌으며, 따라서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개인공간을 집합화한 도시주택의 개념은 르 코르뷔지에 뿐만 아니라 근대건축을 주도한 건축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개념이었다. 개인의 공간이 강조된 집합주택은 도시주택의 기본형으로 정착되어서 20세기 집합주택의 특징으로 지속되고 있다. 여기에 위니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구조
1) 필로티
철근 콘크리트나 철골 구조의 발달로 구조체로서의 벽이 유지하고 있었던 기능적 필연성을 제거하고 콘크리트와 철골기둥으로 구조체를 대신 할 수 있게 했다. 이 같은 발달은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여 지면을 완전히 해방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끌어 주었고 이 같은 생각은 꼬르뷔제의 경우 상당히 일찍부터 나타내고 있었다. 1920년 이전에 이미 꼬르뷔제는 지면으로부터 4-5m 위에 조립한 격자 위에 얹은 도시계획을 구상하고있었으며 이후의 도시계획에서 선언한 "지면에서의 해방"은 그 구성의 결론이다. 시트로앙 주택계획 에서는 가구의 다리와 같은 필로티가 "거주하는 상자"를 지탱하고 있는데 이러한 건축은 지구 위의 어디서나 응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호상도시"로까지 확대 될 수도 있었다.
1929년에 이르자 꼬르뷔제는 이같은 구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하여 모든 지면은 사람들의 활동과 식물은 할애되어야 하며 일과 거주를 위한 공간은 지면 위에 자리잡으면 된다고 제안했다.
2) 자유로운 평면
위니테는 17층의 높이를 가지고 1인에서부터 6인 가족까지를 수용하는 스물세 가지의 평면적 변형을 가지는 집합주택이다. 지금까지 건축평면은 구조벽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14-1945년에 걸쳐 꼬르뷔제는 건축의 참된 유연성을 추구하였다. 즉 내부공간 의 구성을 사용자의 자유에 맡긴다는 사고방식은 1932년 알지에의 오뷰계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고 바이센호프주택에서 꼬르뷔제는 가 이동식 칸막이를 도입해서 야간에는 거실을 3개의 작은 침실로 바꿀 수 있게 처리했는데, 이 작품에서 나타난 자유로운 평면의 개념은 단지 주거공간에 참다운 가동성을 확보한다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그의 공간적이고 조형적인 의지를 관철시키는 방법이 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주택의 공간계획에는 소위 '모듈라(Modulor)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단위주택의 폭은 약 4.5미터(2 모듈라)였고, 내부로의 길이는 약 15미터로 결정되었다. 이곳에는 350가구용의 단위주택이 마련되었으며, 전체 계획인구는 1,600명이었다. 7-8층에는 다양한 상업시설이 계획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복도는 3층마다 설치되었고 중복도 형식을 취하였으며, 길고 좁은 평면을 가지는 단위주택은 복층형의 단면형상을 가졌다. 건축가가 젊은 시절에 방문하였던 에마 수도원이나 2,30년대에 계획하였던 집합주택에서는 2층마다 설치된 편복도가 사용된 반면 유니테에서는 특이하게도 3층마다 설치된 중복도가 채용되었다. 이러한 유니테의 복도체계는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가인 긴스버그(M. Ginzburg)의 작품에서 영향받은 것이라고 유추하는 사람이 많다. 르 코르뷔제가 1928년 모스크바를 방문하였을 당시에 그곳에서 건축 중이던 긴스버그의 나르콤핀(Narkomfin) 아파트를 살펴보았고, 따라서 그곳에서 중복도 형식의 복도개념을 취하였을 것이라는 유추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건축가 자신이 계획한 카르타주 주택(Villa Carthage)에서 이미 중복도를 시도하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르 꼬르뷔제의 새로운 시도는 긴스버그의 작업을 살펴봄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또한 단위주택이 복층형의 공간구성을 취하는 것은 그의 젊은 시절의 주거모델이었던 시트로안(Citrohan) 주택 이후 일관되게 제시되었던 것이다.
2.환경
1)건물의 배치
건물의 배치는 남북방향을 향해 배치되었으므로 단위주택은 동서방향으로 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배치방식은 당시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 성행하던 것으로서 아침저녁으로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는 이유에서 채택된 것이다. 태양의 고도를 계산해서, 여름에는 태양 빛을 차단하고 겨울에는 빛을 받아들이는 차양 즉 브리즈․솔레이가 설치되었다.
2) 옥상 정원 실현
옥상테라스의 장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꼬르뷔제는 주로 실용적인 이유를 들었다. 그에 의하면 옥상테라스의 장점은 눈이 많은 북유럽 지방의 경우 눈 이 녹아 흐르는 물의 누수의 위험 없이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인데 이때 물이 집의 중심을 향해 흐를 수 있지만 이 물은 주택 내부에서 오르는 열이 있기 때문에 동결의 위험은 없게 된다. 여기에 엷은 층의 흙을 덮어둘 경우 옥상테라스는 언제나 적당한 습기가 유지되어 식물이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주거공간을 추위와 더위로부터 완전히 차단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이 같은 옥상 테라스의 초기개념은 이후의 작품인 사보아 주택에 이르러서는 보다 조형적인 세계로 귀결되어 선박의 이미지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유럽각지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옥상이나 샹디갈의 사무동과 회의동 옥상에서와 같이 “빛 아래 집합된 입체의 교묘하고도 장려한 연출"로 승화되어 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풍요하게 해주고 있다. 건물의 옥상부를 위락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건물의 위치하고 있는 지중해 연안이라는 사실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트랙 등 운동시설과 수영장, 유아원, 그리고 노천극장 등이 위치하여, 주민들은 지중해가 바라보이는 맑은 공기 속에서 운동하고 뛰놀 수 있게 되었다.
3)채광방식
꼬르뷔제의 채광방식은 크게 4가지 시야에 틀달기, 조도의 조정, 일사의 조정, 상호관입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채광방식을 결정하고 그것을 물리적인 장치로 구체화 시킨 이면에는 본질적으로 공간적인 요구가 있었고, 거기에 대한 탐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니테에는 유명한 브리즈․솔레이(brise-soleil)로 나타났으며, 유니테의 계획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차양의 목적은 겨울에는 태양광을 받아들이고 여름에는 이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와 함께 건축의 입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채광방식을 결정하는데 어느 한 두 가지의 요소만 고려해서 그 방법을 사용했다고 할 수는 없다. 여러 가지 디자인요소가 서로 위계다툼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와, 4가지의 분류방법에 속하지 않은 애매한 경우가 나타나는 작품도 있다. 그렇지만 꼬르뷔제가 실내의 어떠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서 디자인 요소로서의 외부조건인 빛을 조절하는 채광방식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알아 볼 수 있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4) 자연형 환기와 통풍
유니테에서는 3개층에 하나씩 복도가 있고 모든 아파트가 건물의 반대편 복도에 개구부를 가진 복층형이다. 발코니에는 구멍이 뚫린 난간벽이 있어 통풍을 촉진시키며 차양을 위한 거대한 브리즈 솔레이가 있다. 르 꼬르뷔제는 건물 아래부분을 필로티로 개방하여 통풍이 가능하게 하였다. 이 장소는 여름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쾌적한 곳이 된다.
3.입면
마르세이유 주거단지는 강인한 다리로 굳건하게 서있는 인체의 이미지를 보다 더 구체화시키고 있다. 양쪽 단부의 입면과 종단면을 보면 이러한 이미지가 곧바로 떠오름을 알 수 있다. 블레이크 (1960)는 이 건물을 다리가 강인하면서도 경쾌하게 움직이는 권투선수에 비교하였다.
유니테의 입면은 꼬르뷔제의 건축형식 중 자유로운 건물 정면(Le Facade Livre)을 들 수 있다. 꼬르뷔제의 경우 파사드란, 회화의 화면과 마찬가지로 항상 개구부와 비개구부로 질서가 부여되어야 하는 면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꼬르뷔제의 차양방식에서 나타났던 브리즈․솔레이(brise-soleil)로서 입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콘크리트를 거칠게 마감하는 수법은 당시의 건설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도출된 것이었다. 위니테의 건축에 참여한 군소 시공업체가 많다보니까 모든 부분에서 매끄러운 콘크리트 마감을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건축가는 역으로 거칠게 마감한 콘크리트 표면을 의장적 수단으로 사용할 것을 생각하였다. 결국 거푸집의 거친 표면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여 원시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는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빛과 어두움이 강조된 강력한 표면효과를 연출할 수 있었고, 전체 건축은 역사적인 유적처럼 강한 인상을 가질 수 있었다.
7층과 8층 사이에 위치한 쇼핑센터는 외부로 표현이 되어 있는데, 지면으로부터 격리되어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쓸모가 있을지도 의심을 받았다. 또한 이 주거단지에 사는 1600명의 주민을 위한 공용시설들, 즉 체육관, 식당, 옥상 정원들의 시설들이 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에 담는 것, 이것이야말로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의도한 바이다. 교외로의 확산현상(Sprawl)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보다 큰 사회 단위에 대한 공동참여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위니테는 굴뚝·갑판·객실·통로로 구성되는 증기여객선을 건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건축평론가 콜크혼(A. Colquhone)의 분석에 따르면, 위니테는 몇 가지 측면에서 현저하게 여객선의 형태를 재현하고 있다.
(1)필로티로 띄워져서 마치 물위에 떠 있는 배처럼 보임
(2)바다에 떠 있는 상태와 마찬가지로 거주자 모두가 외부환경과 동일한 관계를 갖음
(3)단위주택과 복도로 구성되는 공간구성은 여객선의 객실과 통로의 구성과 동일
(4)옥상정원은 굴뚝을 비롯한 여객선의 상부구조와 같은 이미지를 갖음
4. 위니테에 대한 평가와 이후로의 영향
마르세유의 위니테는 1952년 완성되었다. 건축이 완성되기 이전부터 위니테는 건축가들의 엄청난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때로는 공격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르 코르뷔지에가 당시의 건축조례를 어겨가면서 건축할 수 있었던 데 대한 일부 건축가들의 질투심의 결과였다. 또한 다른 건축가들은 이 건물이 정신질환을 유발한다고 모함하기도 하였다. 일반대중들의 거부반응 또한 상당하였다. 마르세유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실험대상이 될 수 없다면서 입주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건물은 상당 기간동안 비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수 년 동안 건물은 단지 기념물 정도로만 기능하였다. 건물은 하루에 수백 명씩이 방문하는 관광명소가 되었으며, 전시회나 회의 등이 개최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정상적인 입주가 진행된 후에도 7,8층에 계획된 공용시설 즉 식료품가게, 바(bar), 카페테리아, 담배가게, 미장원, 꽃가게, 우체국 등은 이용자가 없어서 운영될 수 없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400세대 정도의 인구가 식료품가게 등 공용시설을 유지하기에 적합한 규모로 보았으나, 실제로는 예상대로 운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거주자들이 물건을 구매하거나 미장원 등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 얼마든지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1957년 낭트(Nante)에 건축된 위니테부터는 중간층에 공용시설을 설치하는 개념은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원래 르 코르뷔지에가 생각하던 이상적 공동체로서의 위니테의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위니테는 유럽의 여기저기에 계속 건축되었다. 마르세유에 이어서 1955년에는 낭트에서 그리고 1957년에는 베를린의 주택전시회 인터바우(Interbau)의 일환으로 다시 실현되었으며, 프랑스의 브리에·앙·포레 (Briey-en-Foret)에도 건축되었다. 그런데, 마르세유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베를린에 건축된 위니테는 대성공이었다. 올림픽 스타디움이 내려다 보이는 매력적인 자리에 위치한 베를린의 위니테는 베를린의 중산계층에게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원칙을 중시하는 독일인의 의식구조와, 협소한 대지 내에 많은 사람을 수용해도 이를 감수해내는 독일인의 인내심, 그리고 깨끗한 환경에 대한 독일인의 선호의식 등이 개인주의적인 마르세유의 주민들과 달랐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일설에는 르 코르뷔지에가 개인적으로 싫어했던 베를린 사람들이 그의 개념에 쉽게 동화되는 것에 격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계획의 관점에서 본다면 위니테는 상당한 취약점을 지니고 있는 집합주택이다. 저명한 도시역사가 멈포드(L. Mumford)의 말대로 위니테는 "집합주택으로 교묘하게 위장한 기념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위니테가 지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 즉 단위주택의 폭이 지나치게 좁고, 복도는 길고 어두우면서, 필로티 하부공간은 전혀 쓸모가 없고, 중간층에 위치한 상업시설은 전혀 사용되지 않으며, 옥상 테라스는 소금기 섞인 바람에 견디지 못하여 심하게 풍화되고 있으며, 서민을 위해서 계획된 주택이지만 실제로는 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등의 사실 때문이다.
이러한 약점과 그것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위니테가 근대건축 특히 근대의 주거환경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고층·고밀화를 지향하는 주거형식, 근대적인 개념의 공용공간, 충분한 태양과 맑은 공기를 수용하는 위생적인 환경, 이상적인 코뮤니티를 지향하는 건축형식 등 위니테가 함축하고 있는 주거개념은 2차대전 이후의 주거환경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위니테는 때로는 완전하게 복제된 모습으로 그리고 때로는 매우 변형된 모습으로 세계 각국에 재현되었다. 위니테를 통하여 세계의 많은 집합주택들은 콘크리트 타워, 옥상정원, 복층의 단위주택, 필로티, 브리즈·솔레이 등의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근대건축이 실패한 것이고 위니테가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 위니테가 함축하고 있는 형태와 관념 속에는 진정한 20세기의 시대정신이 담겨있다. 20세기의 주거환경이 지니는 문제가 스케일 감각도 없고, 공용공간에 대한 개념도 없으며, 녹지공간에 대한 배려도 없이 마구잡이로 양산되는 무미건조한 고층아파트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위니테와는 본질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비록 위니테가 주택의 모양을 한 기념물인지는 모르지만 위니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의 집합주택'과 항상 동의어로 인식된다.
Le corbusier(1887 ~ 1967)
위니테 다비타시옹(1046-1952)
size
길이 137m, 폭 25m, 높이 70m
mass 형태
직사각형의 box 형태, 조각적으로 역동성있게 처리
입면계획
외부에서 보면 중앙의 상가는 2층 높이의 수직 루버에 의해 그 위치를 알 수 있음.
구조계획
한 지붕 밑에 1600명의 인구를 수용하는 대담성, 직사각형의 변형(주거와 복도)된 그리드에 맞추어 기둥이 배열
사용재료
철근콘크리트
모듈 및 그리드
건물의 설계는 직사각형의 모듈로 되어있으며 내부공간에서는 인체의 모듈이 적용됨.
빛의 처리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이 실내 깊숙이까지 비추어짐.
내부공간
중복도 형식 취하며 각주호로 진입 23개의 다른 유형이 있는 각각의 주거단위는 부엌이 중심으로 되어 있음. 거실은 위층까지 개방되어 있음.
외부공간구성 : 접근성, 주변외부 공간
24m×165m의 넓이를 가진 옥상 테라스의 다른부분은 성인의 사회활동을 위해 계획되어 있다.
context : 접지, 주변환경 대지와의 관계
도시주변이 급속히 개발되어지는 대도시의 경우 주거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고층집합주거 블록을 건설
기능처리 : 기능구성 및 배치
주거기능, 상업기능, 공용시설 - 체육관, 식당, 옥상정원
▶마지막으로 느낀 점
저번 학기 수업 때 처음 접했었던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이번 스터디를 통해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
그저 르 코르뷔제의 작품이고, 집합주택으로 유명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학기 설계 과제가 집합 주거이기 때문에, 다비타시옹을 다시 깊게 공부하고 싶어졌다.
다비타시옹은 우선 형태는 단순한 박스 형태이지만, 입면에서 보았을 때는 빨강, 노랑, 파랑으로 기존의 백색만을 거의 사용하는 코르뷔제의 작품들과는 약간은 달랐다. 또, 유니트를 조가조각 끼워 넣은 듯한
블록의 느낌을 주었고, 하층부는 필로티로 띄워 답답한 느낌을 덜어주었다.
또, 다비타시옹의 특징인 중복도를 사용하고, 상가를 두고, 옥상정원, 필로티를 사용한 것 등이 현재에 보아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아 건축을 공부하는 데에 있어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다.
하지만,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라 많은 찬사를 받은 작품이여서 이제까지 그저 좋은 작품이었다고만 생각했던 터라 다비타시옹의 자료를 보면 비평한 글이 지금은 약간 더 머리에 남는 것 같다.
여러 곳에 집합주택을 세웠지만, 성공한 것은 거의 없다는 점과 다비타시옹도 그 당시에는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 시대에는 적절하지 못한 작품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다비타시옹은 현재 집합 건축을 공부하는데 있어 길을 제시해 준 작품이고, 이번 스터디를 통해 앞으로 남은 과제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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