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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나, 그리고 삶

철학과 삶_ 몸인 세계, 세계인 몸 : 사르트르의 몸의 존재론

작성자솟대|작성시간10.05.14|조회수634 목록 댓글 0

몸인 세계, 세계인 몸

: 사르트르의 몸의 존재론

 

이 논문은 새한철학회의 논문집,

<철학논총 제54집>에 실려 있음

 

 

 

 

 

 

 

 

   몸은 오래 세월동안 사람으로부터 무시되거나 숨겨져 왔다. 그 뿌리에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한가지 믿음이 있다. 특히 유럽 문화 속에서는 그런 믿음이 오래 전에 형성되어, 긴 세월동안 지속 되어 왔기 때문에 몸을 무시하거나 숨기는 것이 숨을 쉬듯 자연스럽다. 몸에 관한 그리스의 유산과 기독교의 전승은 학문과 종교로 생활 속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제도가 되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듯 자연의 법칙처럼 확고하게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다. 그 탓으로 몸은 사람들이 모이는 어떤 자리에도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금기사항이 되고, 그 화제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경멸받아 왔다. 아니면, 몸은 은밀하게 수군 되거나 끼들 거리는 속삭임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 믿음은 플라톤으로부터 유래한다. 플라톤은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이 세계를 현상계라고 불렀으며, 마음이 인식하는 이데아를 예지계라고 불렀다. 현상계는 말 그대로 생성․소멸하고,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이며, 일시적이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하며 진리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못하다. 반대로 예지계는 영원․불멸하고, 그렇기 때문에 완전하며, 진리이고, 아름답다. 우리는 현상계 속에서 이데아를 상기하게 되고, 이데아를 통해 예지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현상계에 매달려 있다면, 즉 몸이 욕구하는 대로 이끌린다면 우리는 이데아의 세계를 알지 못하게 된다. 플라톤의 생각은 중요한 부분에서 피타고라스를 따르고 있는데, 피타고라스의 생각이나 믿음의 뿌리에는 그리스 종교인 올피즘(Orphism)이 투영되어 있다.

   올피즘은 인간의 영혼은 신적이며 불멸이나, 끊임없이 신체라는 감옥에 윤회․전생하도록 저주받았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 윤회․전생으로부터 벗어나 신의 세계로 회귀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동안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 노력은 신적 세계를 끊임없이 사모하면서 영혼을 순화시키는 것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피타고라스도, 플라톤도 모두 이 같은 신화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요소가 피타고라스에게는 종교적 실천으로 강하게 나타났다면, 플라톤에게서는 철학적 아포리아를 건너는 신화적 징검다리로서 나타나고 있다. 올피즘의 이런 구성은 유대이즘이 기독교로 바뀔 때, 기독교 속으로 플라톤의 옷을 입고 어떻게 유입되었는가 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가 살펴본 그리스 사유에서 몸은 긍정되기보다 부정된다. 올피즘에서 몸은 저주받은 영혼의 감옥이며, 현세의 욕망에 이끌려 윤회전생의 사슬을 끊지 못하게 하는 악령이다. 플라톤에게 몸은 현상계에 갇혀 예지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오류의 원천이며, 참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다. 몸에 관한 그리스인의 이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은 기독교라는 세월의 강을 건너면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실천으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 것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새롭게 등장하여 빠르게 확산되는 자연과학을 바탕으로 신화적이고 신학적인 생각(형이상학적 사변)을 끊어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신념을 가졌던 근대인도 몸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생각이나 신념에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베이컨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사변을 끊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으로 분석과 종합의 방법을 주장한 데카르트는 분석의 방법의 최종 단계에서 ‘Cogito ergo Sum’을 발견하였다. 당대의 회의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인식의 확실성을 마련하고자 한 데카르트의 시도는 의식의 자기 확실성을 확보하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그것은 결국 몸을 연장 실체로 환원시키는 데 이르게 된다.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실체의 설정은 인간이 마음과 몸의 통일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부딪쳐 해결할 길 없는 마음과 신체의 이원론을 세우고 만다.

   형이상학적 사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인식의 확실성을 의식에 세운 데카르트의 모델은 이후 인식론의 중요한 틀을 형성한다. 그러나 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몸을 단지 감각의 담지체로 환원시키는 결정적인 단초를 마련한 것이기도 하다. 데카르트가 인식의 확실성을 본유관념에 둔 것에 반대하여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로크는 데카르트가 암시적으로 남겨 둔 감각의 담지체로서의 몸을 전면에 드러낸다. 로크는 본유관념이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의 인식은 경험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하면서, 경험의 출발을 인간의 감각에 둔 것이다. 감각의 담지체가 바로 몸이다. 이후 몸은 인식의 출발인 감각으로서만 암시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인식의 출발이 감각이고, 감각이 수동적인 기능 밖에 없다면 인식이 성립하는 발생론적 과정을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로크 이래의 영국 경험론은 이 과정을 여실히 보여 준다. 감각이 인식으로 바뀌는 첫 관문에 지각이 있다. 실제로 감각과 지각은 구별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만 구별이 가능하다. 감각은 신체에 가깝고, 지각은 마음에 가깝다. 지각은 신체와 마음의 사생아다. 지각되지 않는 어떤 감각도 감각일 수가 없다. 감각이 없는 지각도 지각일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어찌되었건 감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경험론에서 인식의 성립조건인 지각의 단계부터 심적인 과정이 나타난다. 우리가 심리학이라 부르는 것은 지각의 발생론적 과정으로 설명된 마음의 터전에 발을 딛고 있다. 감각에서 출발하는 인식은 관념연합이나, 기억을 떠나 설명할 수가 없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플라톤의 이원론의 근대적 모습처럼 보인다. 몸은 여전히 인식에 있어서 이차적일 뿐이다. 데카르트를 비판한 로크 이래의 경험론도 몸을 단순히 감각의 담지체로 보는 점에서 특별히 나아진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인식의 확실성을 세우고자 한 근대인의 노력은 몸을 연장 실체의 일종으로 보거나 감각의 담지체로 보면서 몸이 사물과는 달리 행위를 통해 인간의 삶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만다. 이는 인간의 삶의 모습으로서의 세계가 단순한 사물의 세계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세계는 몸이 사물 속에서 활동하면서 사물을 몸의 연장으로 확대시킬 때 비로소 나타나는 의미의 세계이다. 그런 까닭에 몸이 사물의 세계에 있는 하나의 사물로 생각된다면, 몸이 살면서 구체화시키는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데카르트가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방법적 회의’를 통해 ‘코기토’를 발견하는 순간 세계와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코기토’를 절대 확실성의 토대로 깨닫는 순간 ‘코기토’는 이미 세계 없이 존재하는 유령이 된다. 그와 같은 코기토는 사유에 의해서 ‘연장’을 그 본성으로 지니는 세계를 인식한다. 그 세계는 몸과는 관계없이 오로지 수학적-물리적 인식능력으로서 기능하는 마음에서만 파악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며 몸으로 부대기는 삶 속에 그런 세계는 없다. 그 세계는 오로지 이념의 세계, 추상의 세계, 생활세계의 한 양태(지식의 세계)로서만 존재한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우리의 구체적 삶의 세계는 이론적으로 분석된 몸의 파편인 감각에서만 잠시 반짝일 뿐이다. 데카르트가 확립한 ‘생각하는 자아’와 ‘물체적 사물’은 그 후의 <자연과 정신>이라는 구분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그 구분 속에는 진정한 자아도 세계도 없다. 몸이 없는 자아(의식)가 없듯이, 몸이 없는 세계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데카르트의 세계 이해는 그 이후의 경험적, 실증적, 과학적 사유가 가지는 일반적인 관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데카르트의 세계 이해는 근대에 등장한 몸에 대한 관심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몸은 근대에 들어와서 관찰과 실험의 대상이 된다. 사람의 몸은 대상으로서의 신체가 되어 해부되고, 다시 기계적으로 결합된다. 다빈치의 해부도에서 우리는 몸에 대한 근대인의 해부학적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이후에 몸에 관한 이해는 늘 관찰의 대상으로서 나타난다. 몸에 관한 대상적, 해부적 관심은 삶의 세계를, 설명할 수 없는 물자체로 만들거나, 물질로 이루어진 관리하고 통제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신념을 더욱 강화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우리는 근대 이후에 강화된 물질적, 기계적, 경험적, 실증적, 과학적, 인식론적 세계 이해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몸에 관한 이해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우리는 새로운 몸에 관한 이해를 위한 중요한 출발점으로서 사르트르의 입장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사르트르를 선택한 것은 몸에 관한 철학적 해석을 시도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사르트르가 있고, 그의 입장이 여타와 극단적이리만치 선명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의 전체이다. 이 말은 인간을 마음과 몸으로, 몸과 세계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음을 말한다. 사르트르는 분리하거나 고립시켜 생각할 수 없는 전체를 분리하거나 고립시키는 일을 ‘추상’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인간에 관한 생각을 할 때 대체로 추상적 사고에 익숙해 있는 셈이다. 특히 마음과 몸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습관은 이미 지적한대로 오랜 세월에 걸쳐 종교적(신학적), 형이상학적 사고로 굳어졌으며, 인식론적(과학적) 사고에 의해 강화 되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삶의 구체적인 지침인 도덕관념이나, 현실을 엮어내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관념의 배후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가 인간을 구체적(전체적)인 상으로 그려낼 수 없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신념으로 자리 잡은 추상화된 사고방식 때문일 것이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인간과 인간의 삶을 추상화하는 사고방식의 전형은 과학적, 대상적, 상대적, 인식론적인 사고이다. 그런 까닭에 추상적 사고를 깨뜨리고 구체적인 사유를 통해 인간과 인간의 삶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은 ‘존재론’이다. 이것이 󰡔존재와 무󰡕의 「서론」이 ‘존재의 탐구’인 까닭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의 탐구>에서 ‘인식론적’인 문제로 생각해 왔던 ‘존재’를 다시 ‘존재론적’ 문제로 바꾼다. 존재론적 문제로 바꾸는데 사르트르가 선택한 중요한 개념은 데카르트가 발견한 코기토이다. 사르트르는 데카르트가 ‘존재’물음의 토대인 코기토를 인식론의 토대로 삼았기 때문에 코기토가 갖는 존재론적 의미를 간과하게 되었다고 본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존재’에 관한 논의의 세부적인 사항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몸을 설명하기 위한 토대로서 ‘대자존재’와 ‘대타존재’의 상호관계를 밝히면서, 마음과 몸, 몸과 세계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존재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존재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의식’이며, 이 의식의 근원적 모습이 전반성적 코기토이다. ‘반성 이전의 코기토(pre-reflective cogito)’에는 사르트르의 데카르트, 후설, 그리고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다. 데카르트는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한 토대로서 ‘코기토’를 발견했지만 코기토의 기능적 면으로부터 세계의 존재를 증명해야하는 문제로 넘어가면서 ‘실체론적 오류’에 빠졌으며, 후설은 데카르트가 저지른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의식의 기능적인 면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의식 안에 갇히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하이데거는 코기토를 통하지 않고 현존재의 자기이해에 의해 존재의 해명을 시도했지만 자기이해의 탈자적(脫自的) 성격을 설명할 수 있는 끈이 없다. 사르트르의 이와 같은 비판은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확장시킨 그의 ‘의식’개념 속에 압축되어 있다.

   사르트르는 의식을 ‘항상 어떤 존재의 의식이며, 그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의 의식’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의 앞부분은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cogito ergo sum'을 확보하고, 이 명제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이다. 또한 데카르트는 이런 생각하는 활동을 묶어 ’사고(thought)‘라고 하면서, 사고를 이해(understanding), 의욕(willing), 상상(imagination) 뿐만 아니라 감정(feeling)과 동일한 것이라고 하였다. 데카르트가 의식의 확실성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식이 어떤 실재하는 대상이 없이도 지각하고, 상상하고, 느끼는 것이 의식되는 한에 있어서 이러한 경험을 가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의 대상을 제거하고 나면 어떤 경우에도 의식을 의식(경험)할 수가 없다. 의식은 오직 ’지각한다‘, ’판단한다‘, ’추리한다‘, ’상상한다‘, ’의욕한다‘, ’느낀다‘는 등으로만 존재한다. 의식이 이처럼 구체적인 활동으로만 존재한다면, 무엇을 지각하고, 무엇을 판단하며, 무엇을 추리하고, 무엇을 상상하며, 무엇을 의욕하고, 무엇을 느끼지 않고서 어떻게 구체적인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의식의 대상으로서 ’무엇‘이 없다면 의식은 없다. 후설은 데카르트가 간과한 이 점을 ’의식은 항상 ~에 관한 의식‘이라고 지적한다. 의식은 의식의 대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대상도 또한 의식의 지향적 활동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사르트르는 후설의 이 점에 관한 통찰을 높이 산다.

   그런데, 의식은 대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측면만 강조된다면, 의식은 물화되고 말 것이다. 의식이 대상과 만나 대상 속에 완전히 흡수되어 대상이 되지 않고 의식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의식이 대상에 관한 의식(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때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을 괄호를 동원하여 ‘의식(의) 의식’으로 표현한 것은 대상의식이 곧 자기의식임을 아는 것이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사르트르의 이런 궁여지책에는 데카르트 이래 인간의 자기 확신의 궁극지점에 자기의식이 있음을 확인해 왔음에도, 자기의식이 인식론적 주체이거나 문법상의 주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들어 있다. 이 비판에 사르트르의 창의성이 있고, 의식(의) 의식을 ‘전반성적 코기토’라고 부른 까닭이기도 하다.

의식은 존재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대상의 의식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대상의 의식에서 자기를 의식하는 활동은 의식이 의식하는 대상이 ‘아니(否)’라는 방식으로서만 자기를 확인한다. 다시 말하면 의식은 자기가 의식하고 있는 대상과 같지 않다는 것으로서만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이다. 물에 붉은 색소를 풀면 붉은 물이 되지만, 그렇다고 물과 색소가 서로 침투하여 똑 같아졌다는 말은 아니다. 붉은 물도, 물과 색소가 서로 뒤섞이지 않은 채 여전히 물은 물이고, 색소는 색소일 뿐이다. 이처럼 의식은 존재를 현상토록 하는 의식으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의식과 존재의 현상이 뒤섞여 자체 동일성(identité)을 이룬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여전히 의식은 의식이고, 현상은 현상일 뿐이다. 그래서 의식(의) 의식인 자기의식은 대상을 의식하고 있는 의식이 대상이 ‘아니다’라고 하는 방식으로서만 자기를 의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의 ‘의식’을 자기의식으로 확인하는 방식은 ‘반영reflet-반사reflétant’로서 하나이면서 둘인 모습으로서만 상호 증지(證智)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전반성적 의식의 이와 같은 모습은 인간존재(Human Reality)의 전체 모습이 아니라 순간적인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존재의 전체 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존재와 자기와의 관계에서 오로지 ‘아니다’라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그래서 존재와 자기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무(無)의 심연을 만드는 자유로만 존재하는 인간존재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르트르는 ‘아니다’라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인간은 오직 ‘사건’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사건이란 하나의 상황 속에 던져져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말한다. 즉 ‘나는 선생이다.’라든가, ‘너는 학생이다.’라는 모습이다. 내가 선생일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해서, 어떤 성장과정과 교육과정을 거쳐, 어떤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선생으로 존재함은 또한 바로 ‘이’ 세계에 던져져 있으며, 어떤 ‘하나’의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의식 혹은 대자의 ‘사실성’이라고 부른다.

   대자의 사실성은 ‘아직 있지 않는 것(미래)’을 향한 대자의 기투(초월)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주어진 것’은 대자가 자신의 존재를 기투(企投)할 때, ‘아니다(초월)’라고 해야 할 자유가 처해있는 상황이다. 사르트르는 사실성으로 주어진 것을 “나의 자리(場所)이며, 나의 몸이며, 나의 과거이며, 타자의 지시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의 나의 지위이며, 마지막으로 타자에 대한 나의 근본적인 관계”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결코 하나만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깊게 얽혀 있는 하나의 그물망이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아파트 안에서 서성이며 숨 막혀 하는 것은 스페인 여행을 꿈꾸기 때문이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스페인 여행을 꿈꾸는 것은 나를 옭아매고 있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내가 어떤 변화를 꿈꿀 때, 바꾸어야 할 ‘무엇인가(주어진 것)’가 바로 나의 자리이다. 나의 과거란 “육개월 전에 내가 선택한 의복이며, 내가 세운 집이며, 내가 작년 겨울에 쓰려고 기도(企圖)했던 책이며, 내 아내이며, 내가 아내에게 한 약속이며, 나의 자식들이다.” 나는 그것으로 존재한다.

   환경이란 나를 둘러싼 온갖 도구와 사물을 가리키다. 이 환경 속에 나는 나의 자리를 갖는다. 내가 환경 속에 나의 자리를 가지면 환경은 ‘나의 환경’이 된다. 나의 환경이 되고서야 비로소 환경은 ‘좋은’ 환경이 될 수도 있고 ‘나쁜’ 환경이 될 수도 있다. 환경은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며, 나로 말미암아 환경은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이 환경이 바로 나의 상황을 구성한다. 스페인 여행을 꿈꾸는 나에게 온갖 도구(공항, 항공시간표, 여행안내서, 지도)와 이미 나의 것으로 발견되는 것(나의 국적, 나의 인종, 나의 외모), 마지막으로 온갖 도구와 이미 나의 것으로 발견되는 것을 의미 있게 만드는 타자가 나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층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나의 위치와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사실성이 ‘주어진 것’을 벗어나 ‘아직 주어지지 않은 것’을 향해 기투하는 자유의 토대가 된다.

이 ‘사실성’이,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대중에게 소개하기 위해 행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강연에 나타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을 제외한 존재는 존재하기 위해 본질이 먼저이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만은 본질이 아니라 그 실존이 우선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본질을 지닐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서 어떤 신분을 실현(연기)하면서 살지 않을 수 없다. 즉 내가 선생이기 위해서는 선생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선생이라는 역할의 본질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선생의 ‘사실성’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단지 선생의 본질을 흉내 낼 뿐이다. 그 흉내가 나를 선생이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선생이라는 신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 우연적이다.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자기의식은 대상의식에 의해 존재한다.’는 말은 결국 자유로서의 인간존재가 전체적이며 구체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존재론적 필연성이다.

   인간존재는 어떤 본질이나, 사실성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의 신분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가 결코 ‘~인 바의 것이 아니기’(超越) 때문에 나는 ‘~인 바의 것’으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 바의 것’이 타인의 눈초리 앞에 긍정적이냐 혹은 부정적이냐에 따라서 나는 ‘~인 바의 것’이 되기 위한 노력을 전혀 달리 할 수 있다. 즉 내가 ‘~인 바의 것’을 나라고 계속 주장하거나 확인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도 ‘~인 바의 것’일 수 없다고 부정할 수도 있다. 이처럼 사건으로서 존재하는 구체적인 인간존재의 핵심에는 또한 ‘타자’가 함께 존재한다. 말하자면 인간존재가 신분을 수행하는 행동을 통해 존재하는데 타자가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는 말이다.

   나 이외의 모든 존재는 나에게 지향되는 ‘무엇’이다. 그것은 나의 세계 속에 있으며, 어떤 경우도 나의 세계를 손상시킬 수 없다. 그들은 모두 나의 눈초리에 의해 세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타자는 이와 달리 나에게 눈초리를 던지며, 내 주변의 존재로부터 나의 세계를 빼앗아 자기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존재이다. 타자는 내 세계 속에 구멍을 내고, 내 세계를 유출시켜 결국에는 내 세계의 저편에 있는 그 자신의 세계 속에 나를 존재 시킨다. 타자의 세계 속에 존재 하는 ‘나’는 그의 세계 속에 있는 다른 존재와 다를 바가 없다. 나는 타자의 세계 속에 있는 ‘나’에 관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타자의 눈초리 아래에 있는 ‘나’는 개성을 지닌 ‘인격’으로, ‘자아(Ego)’로 존재한다. 나는 타자의 눈초리 밑에서 ‘나’를 살지만, 나는 결코 그의 세계 속에 있는 내가 어떠한 자이며, 내가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모른다. 오히려 나는 타자의 세계 속에 있을 ‘나’를 반성적으로 나에게 현전시킨다.

   “가령 내가 질투 때문에, 흥미 때문에, 또는 나쁜 버릇 때문에, 문짝에다가 귀를 꼭 대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이때 나는 나의 행동을 비정립적(non-positional)으로 의식한다. 말하자면 나의 행동에 대해 반성적이 아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일차적으로는 나의 행동에 대해 비정립적이다. 어떤 순간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고 느껴져 주변을 둘러본다. 그런데 실제로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 순간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리를 피하거나, 변명을 할 것이다. 내가 부끄러워하여 자리를 피하거나 변명하고 하는 것은 ‘문짝에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 나’ = ‘비열한 인간’으로 타인의 눈초리 아래에 있는 나의 ‘인격’이며, 나의 ‘자아’이다. 나는 반성에 의해 타인의 눈초리 아래에 있는 나의 모습을 대상처럼 확연하게 인식할 수 있다. 나는 ‘비열한 나’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다본다. 나의 ‘인격’이나 ‘자아’는 타자에게 대상인 한에 있어서 나에게도 대상처럼 현전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비반성적으로 내 안에서 ‘인격’이나 ‘자아’를 발견할 수는 없다.

   ‘비열한 인간’은 어떤 건물, 복도, 복도의 불빛, 복도 주변에 있는 여러 사물들, 방문과 더불어 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비열한 인간’으로 대상화된다는 것은 그냥 문짝에다 귀를 붙이고 있는 육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문짝에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 자리, 그 환경과 더불어 비로소 ‘비열한 인간’이 된다. 이 말은 몸은 항상 그 몸이 행동하는 환경 속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지시한다. 몸은 환경 속에서 행동할 때 이미 하나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 세계가 ‘비열한’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몸은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 있으며, 그 관계는 하나의 구체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나의 행동은 어떤 경우에도 나 자신에게 대상화된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타인의 시선 속에 대상으로 실추할 때 그 행동은 대상화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행동이 대상화되는 가장 원초적인 까닭은 우리의 몸이 타인에게 대상성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 몸이 온갖 기구나 장애의 대상적 통일 속에 포착되기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르트르의 ‘존재론’의 전체적인 골격을 몸을 이해하기 위한 구도 속에 재조명했다. 실제 사르트르의 몸에 관한 설명은 ‘존재론’의 다른 구도에 지나지 않는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는 의식이 곧 몸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늘 의식할까. 실제로 우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몸을 의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보다는 그 몸으로 부대끼는 사물들을 의식하기가 십상이다. 예를 들면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이때 나는 내 몸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상을, 컴퓨터를, 모니터 위에 나타나는 문자만을 본다. 나는 글 쓰는 행위를 통해 만나는 사물에 의해 전반성적으로 내 몸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보고 있는 눈을 볼 수는 없다. 나는 손이 닿아 있는 한에 있어서 그 손에 닿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의 몸은 사물과의 관계 속에 단 한 번도 인식되지 않는다. 사물을 보고 있는(사물이 보여지는) 혹은 사물을 만지는(사물이 만져지는) 순간 나의 몸(눈이나 살)은 바로 거기에 그렇게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글을 쓰면서 ‘거기에, 책상 앞에’, ‘거기에, 의자 위’에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사물들이 있는 ‘거기에-존재함’이다.

   사르트르는 몸과 사물과의 일차적 관계를 의식을 설명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설명함으로써 의식과 몸의 관계가 실존(존재) 관계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우리가 무엇을 ‘지각 한다’고 말한다면, 지각하는 의식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창밖의 나무’나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기 때문이다. 달리 무엇을 ‘상상 한다’고 말하면, 상상하는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사물들을 보지 않고 ‘선녀’나 ‘도깨비’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마음(의식)이 홀로 어떻게 ‘지각 한다’거나 ‘상상 한다’거나 하는 이름을 얻을 수 있을까. 단지 ‘지각 한다’거나 ‘상상 한다’고 하는 이름은 그 마음(의식)이 만나는 대상에 따라 주어진 허울에 불과하다. 몸은 의식이 대상과 만나는 접점이다. 그러니 ‘바람에 흔들리는 창밖의 나무’를 지각함으로써, ‘흔들리는 창밖의 나무’에서 도깨비라는 허상을 봄으로서 나는 내 몸(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의식이 대상을 통해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처럼, 몸은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 존재 모습을 나타낸다.

   몸을 분석해서 다섯 가지 감관으로 나누고 각 감관이 인식하는 대상의 영역을 나누어 감각을 설정하는 것은 몸을 사물처럼 관찰하고, 이론으로 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감관이나 감각은 바로 몸이 사물과 관계를 맺는 바로 거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몸을 대상처럼 인식하여 몸을 육체(오관)로 관찰하고, 몸을 그 육체가 대상과 관계 맺어 생기는 심리적 사건을 표출하는 신체(지각)로 설명하는 것은 ‘심리학자의 몽상’이 만들어 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감관은 우리의 몸이 하나의 세계 속에 몸담고 있으면서 사물들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감관은 감각되는 여러 대상들과 동시적으로 거기에 존재한다. 굳이 말한다면 사물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대로가 바로 감관이다. “<보는 것>은 보이는 모든 대상의 집합”인 것처럼 말이다.

   의식은 결핍이다. 의식은 결핍이기 때문에 의심으로, 지향으로, 초월로 존재한다. 의식은 몸과의 실존(존재)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몸이며, 의식은 몸이기 때문에 의식의 결핍은 몸의 욕구나, 욕망이 된다. 의식이 자기 존재를 확보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대상을 지향한다면, 몸은 자신의 욕구(욕망) 때문에 능동적으로 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상황’으로서 초월(구성)한다. 의식이 즉자존재를 의미의 세계로 만들듯이, 몸은 환경세계를 욕구(욕망)에 따라 사물의 연관을 세계로 구성하며, 그 구성이 몸이 선택한 상황이 된다. 그런 까닭에 몸은 단순히 사물들의 한 가운데 있으며, 주어진 사물에 수동적으로 관계 맺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몸은 사물들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으며, 사물에게 질서를 부여하고 하나의 상황을 존재시킨다. 달리 말하면 몸은 주변의 모든 사물의 의미를 나타나게 하는 중심이다. 그러나 그 중심은 사물 속으로 녹아들고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사물들 밖에 없다.

“그런 뜻에서 나의 몸은 세계의 표면에 어디에나 존재한다. 나의 몸은 거기에, 즉 보도(步道)에 자라나고 있는 관목이 가로등(街燈) 불빛 밑에 가리워져 있다는 사실 가운데 존재함과 아울러, 저기에, 즉 다락방이 육층 창문 위에 있다는 사실 가운데에도, 또 달리는 자동차가 트럭의 저쪽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 가운데에도, 또 가로(街路)를 가로질러 가는 저 여자가 카페의 테라스에 걸터앉아 있는 이 남자보다도 작아 보인다는 사실 가운데에도 존재한다. 나의 몸은 세계와 넓이를 같이하고 있고, 온갖 사물을 통하여 모든 방향으로 살포되어 있음과 동시에, 그들 사물이 다 같이 지시하고 있는 이 유일한 점에 집약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몸은 우리가 사용 하는 모든 사물의, 그 사물을 사물답게 만드는 세계의 숨어있는 중심이다. 아니, 오히려 몸이 세계이며, 세계가 곧 몸인 것이다. 몸이 세계 전체에 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대자로서의 몸은 하나의 상황 속에 존재할 수 있다. 이렇지 않다면 대자로서의 의식은 현실 속에 자기를 개입(engagé)시킬 수 없다. 내가 몸으로 엮인 세계를 존재시킬 수 없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없다.

   몸이 상황 속에 있다는 말은 내가 환경 속에 있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산다는 말과 같다. 하이데거는 도구의 존재는 도구가 사용되는 순간에 가장 잘 드러난다고 한 바 있다. 즉 망치의 존재는 사용되지 않은 채 창고 속 도구상자 안에 놓여 있을 때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진틀을 벽에 걸기 위해, 혹은 부서진 의자를 고치기 위해 못을 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망치는 망치질을 하는 순간에 자신의 적재적소를 만난 것이고, 이 적재적소에서 다른 도구와 연관을 맺으며 그 도구가 지시하는 전체와 맞물려 들어가며 하나의 세계를 드러낸다. 사르트르는 도구의 분석에 동의하지만 도구의 도구적 성격은 오히려 몸의 존재와 관련이 있음을 더 강조한다. 바꾸어 말하면, 도구의 도구성은 몸의 행위 속에서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글을 쓰기 위해 볼펜을 쥐고 있다. 볼펜의 도구적 본성이 사용되는데서 드러난다면 내가 그 볼펜으로 글을 쓰는 행위 속에서 비로소 볼펜은 존재 의미를 갖는다. 쓰는 행위에 있어서 나는 나의 몸(손)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볼펜을 포착할 뿐이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볼펜을 사용하는 것이지, 볼펜을 잡기 위해 내 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는 순간 나는 나의 손으로 존재한다. 그때 나의 손은 내가 지향하는 내 존재의 가능 속에 드러난 모든 것을 지시하고 있다. 그 지시 가운데에 나의 세계(글을 쓰는 행위와 그 행위가 지향하는 미래 사이에 놓여있는 세계)가 있다. 볼펜의 도구성은 오히려 몸의 도구 아닌 도구적 성격에 의존한다.

   우리는 이제 몸을 하나의 준(準)-사물처럼 포착하는 신체나 완전히 사물처럼 대상화한 육체로서는 몸=세계, 세계=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몸을 대상화하여 객관화시켜 실증하려고 한다면, 구체적인 몸뿐만 아니라 세계조차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사르트르의 대자존재로서의 몸은 이를 잘 밝혀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몸을 신체나 육체로서 포착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타자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몸은 어떤 경우에도 전반성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타자의 시선은 우리의 존재 깊이 침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의식=몸을 신체나 육체로 파악하게 한다. 사르트르가 ‘몸의 제삼의 존재론적 차원’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를 말한다. 그 몸은 대자존재로서의 몸이 아니라 타인의 눈초리 속에 대상으로 물화되어 존재하며, 타인의 눈초리 속에 갇힌 나의 몸을 내가 되짚어 파악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몸이다. 내 몸이 나에게 타자처럼 존재하게 된다. 나의 대타존재-몸은 그렇게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 몸은 실제의 몸이 아니라 하나의 환영처럼 존재한다.

   남의 방문 앞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나의 모습이 타자에게 들켰을 때, 나는 타자의 눈초리 속에 갇힌 나를 반성적으로 포착한다. 그것은 내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타자의 눈초리 앞에 있는 나의 ‘인격’이며, 나의 ‘자아’이다. 나는 타자의 눈초리 안에 갇힌 나의 인격과 자아를 알 수 없다. 타자는 내가 무엇인지에 관한 비밀을 쥐고 있는 자이다. “타자는 ‘나’를 존재시키고 또 바로 그 때문에 ‘나’를 소유한다. 그 소유는 나를 소유한다는 의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또 이쪽으로서는, 나의 대상존재를 승인하는 동안에, 나는 타자가 그와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체험한다.” 그 체험은 타자의 눈초리 안에 갇혀 있는, 그래서 내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타자에-대해서-거기에-있음’ 즉 ‘남의 방문에 귀를 기울이는 나, 곧 나(의) 몸’이다. 이 대사적(對私的)인 몸이 바로 ‘비열한 인간’으로서의 ‘나(인격)’이다.

   타유화(他有化, alienated)되어 있는 ‘나’는 결정적으로 언어로서 대상이 된다. 남의 방문에 귀를 기울이는 나, 곧 나(의) 몸은 ‘비열한 인간’이라는 말로서 하나의 대상이 되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나는 ‘비열한 인간’이라는 말에 의해 하나의 심적인 사실을 갖게 된다. 이 사실은 타자가 나를 이해한 방식이며, 나를 대상으로 파악하게 하는 근거이다. ‘비열한 인간’이라는 말 속에 ‘남의 방문에 귀를 기울이는 나, 곧 나(의) 몸’은 은밀하게 갇혀 있다. 방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을 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비열하다.’라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은 특별한 설명이 없는 한 왜 그가 비열한 사람인지를 알 수 없다. ‘저 사람은 비열하다.’는 말은 그 순간까지 아무런 내용도 지니지 못한다. 그래서 듣는 사람은 ‘왜 그가 비열한가?’라고 물을 것이며, 어떤 사람을 비열하다고 주장한 사람은 ‘남의 방문에 귀를 기울이는 나, 곧 나(의) 몸’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몸은 언어 속에, ‘비열한 인간’이라는 ‘인격’속에 갇히게 된다. 나는 한 사람의 눈초리를 의식하는 순간 타인의 눈초리 속에 있는 나를 무엇보다 먼저 포착한다.

   타자는 먼저 나를 인식하는 자로 존재하며, 그 뒤에야 나는 나에게 눈초리를 던지는 타자를 비로소 그 신체에 있어서 포착한다. 타자의 신체는 나에게 일차적으로 나의 세계 속에 있는 다른 도구-사물과 마찬가지로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지만, 곧 타자의 신체는 나와 마찬가지로 모든 도구-사물의 중심임을 깨닫게 된다. 실제로 도구-사물은 처음부터 다른 신체를 겨냥하고 있다. 도구-사물은 이미 만드는 사람을 지시하며, 만드는 사람이 도구-사물에 부여한 용도에서 그 도구-사물을 사용할 사람을 지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도구-사물은 측시적(側視的)이고, 이차적인 배치 속에 다른 사람의 신체를 미리 지시하고 있다. 도구-사물의 지시는 도구-사물 자체가 속했거나 속할 수 있는 세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도구-사물에서 이미 세계에 존재하는 타자의 몸을 깨닫고 있다. 이 지점에 오면 이미 사르트르가 말하고자 하는 대타존재-몸이 곧 대자존재-몸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대자존재로서의 내 몸이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의 모든 사물에 확장되어 있듯이, 타자의 몸은 타자가 몸담고 있는 모든 사물(환경)에 하나의 세계로서 은밀하게 퍼져 있다. 내가 누구를 만나러 사무실에 찾아 갔는데, 그가 잠시 외출하고 사무실에 없다. 내가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사무실은 그 사람의 몸을 나에게 드러낸다. “예컨대, 이 안락의자는 <그가-걸터앉는-의자>이며, 이 책상은 <그가-그 위에서-글을 쓰는-책상>이며, 이 창문은 <그가--보는-온갖-대상을-비치는-빛이-거리로-해서-흘러들어오는-창문>이다. 그리하여 이 집의 주인의 몸은 어디에서나 조묘(粗描)되어 있어서, 이 조묘는 대상-조묘이다. 하나의 대상이 어느 순간에나 그 실질로서 이 조묘를 채우(滿)고자 찾아 올 수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집의 주인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는 다른 곳에 있다. 그는 부재이다.” 실제로 이 부재조차 <거기에-있음>의 하나의 구조이다. 대자존재-몸에서 모든 사물이 나를 지시하는 한 나의 몸이듯이, 대타존재-몸도 모든 사물이 타자를 지시하는 한 역시 타자의 몸이다.

   사르트르가 제시한 하나의 비유는 환경세계 속에 있는 도구-사물이 어떻게 나와 다른 사람의 몸이 함께 얽힐 수 있는가를 다른 각도에서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내가 어떤 공원 안의 벤치에 앉아있다고 해보자. 나는 벤치에 않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본다. 그리고 잔디에 설치된 조각상과 조각상 위에 앉아 있는 새를 바라본다. 정적과 풍경이 내 기분을 좋게 한다. 나는 그 환경세계 속에 편안과 기쁨, 그리고 휴식이라는 나의 세계를 열고 있다. 갑자기 맞은 편 길에 누군가가 나타나 지나가고 있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그 사람은 내 풍경 속의 다른 사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그는 계속해서 길을 가지 않고 길옆에 놓여 있는 맞은 편 벤치에 앉고,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를 발견하고 나를 쳐다본다. 그가 나를 쳐다보는 순간, 나는 조금 불편하다. 그가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더 불편하다. 왜 그런가. 그가 나를 바라보는 것은 나도 그의 세계 속에 있는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풍경 속에 배치된 사물이라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 환경 속에 있는 사물-대상의 전체 곧 내 몸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열고 있는 존재일 수가 없다. 그 사람은 나와 그 사이에 펼쳐진 거리(내가 펼친 세계의 공간)를 부정하고, 나의 우주를 붕괴시키는 자로서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이다. 공적 공간 속에 놓여 있는 도구-사물(환경세계)은 항시 나 뿐만 아니라 측시적으로 타자를 지시하기 때문에 항시 나는 타자에 의해 나의 세계를 빼앗길 수 있다. 타자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르트르는 대자존재-몸과 마찬가지로 타자존재-몸도 파악한다. 즉 타자의 몸도 나에게 하나의 종합적인 전체로서 파악된다. “(1) 나는 타자의 몸을 지시하는 하나의 전체적인 상황에서 출발하지 않고서는 결코 타자의 몸을 포착할 수가 없으리라. (2) 나는 타자의 육체의 어떤 하나의 기관을 고립시켜서 그것만을 지각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항상 또는 생활의 전체로부터 출발하여 개개의 기관이 나에게 지시되는 그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사물을 보듯이 타자의 봄을 볼 수 없다. 타자의 몸은 타자가 활동하는 공간과 그 공간 속에 있는 도구-사물을 통해서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다. 타자의 몸을 타자의 육체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타자의 몸은 사물처럼 바라보는 육체에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다. 대상처럼 포착 되는 육체는 결코 몸처럼 하나의 세계를 보여줄 수 없다. “예를 들면, 거닐고 있는 한 사람의 남자를 보자. 워낙 나는 시간․공간적인 하나의 총체(가로-차도-보도-상점-자동차 등등)에서 출발하여 그의 보행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러한 시간․공간적인 총체의 어떤 몇몇 구조가 이 보행의 <앞으로-올-뜻>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래에서 현재에로 감으로써 이 보행을 지각한다.” 내게 현재와 미래 사이에 펼쳐진 공간이 세계이듯이 타자도 현재와 미래 사이에 자신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나는 그의 미래를 그의 의식이나, 마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으로 파악한다. 나는 그의 미래를 내가 보고 있는 시간․공간적인 총체에서 이해한다. 그 총체에서 나는 비로소 그의 몸을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몸으로 이해하는 육체는 몸의 필연적인 조건이지만, 내 몸이 바로 지금 있는 이 육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연적일 뿐이다. 내가 하나의 몸=세계로 존재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 있는 이 육체일 필요는 없다. 몸은 “보통 의복․화장․머리를 깎는 일․수염을 깎는 일․표정 등등에 가리워져 있다.” 그러나 “얼굴․감각기관․현전 따위의 이 모든 것은 타자가 어떤 가문, 어떤 계급, 어떤 경우 등등에 속한 자로서 자기를 존재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그러한 타자에 대한 필연성의 우연적인 형태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사르트르의 몸에 대한 설명의 파격적인 창의성은 바로 이와 같이 몸을 육체로서 이해하지 않은데 있으며, 의식=몸, 몸=세계를 그 자신의 존재론으로서 설명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사르트르의 몸=세계 이론에 관한 이해를 위해서 사르트르를 비판하는 입장을 하나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사르트르의 이론이 갖는 창의성은, 실제로 사람들이 이미 지니고 있는 상식적이거나, 이론적인 편견에 의해 오해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검토를 위해 우리 사회에 번역되어 소개되어 있는 자너의 사르트르 비판을 간단히 정돈해보고자 한다. 사르트르의 ‘몸’의 이론에 대한 자너의 비판은 사르트르의 몸에 관한 입장을 네 가지로 정리한 후, 이 입장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자너의 오해를 이해하기 위해 그 세세한 부분을 다 검토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문제점을 지적하는 자너의 핵심적인 점을 부각시키고 지적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자너의 사르트르 비판의 핵심이 사르트르의 ‘몸’에 관한 논의를 ‘신체’나 ‘육체’에 관한 분석의 관점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너는 사르트르가 데카르트 식의 이원론의 함정에 빠져 있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즉 데카르트의 사유와 연장(이원론)이 사르트르에게 대자와 즉자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 비판의 핵심에 있는 즉자에 대한 자너의 이해는 거의 오해에 가깝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즉자는 인식론 상에 등장하는 ‘물자체’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사르트르에게 즉자란 온전한 긍정성이며, 그것이 있는 바의 것이지 있지 않는 바의 것이 아닐 수조차도 없는 존재를 뜻할 뿐이다. 이는 존재와 무, 즉자존재와 대자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의 극명한 대비을 위해 설정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대비된 두 개념은 인식론 상에서 관계 맺는 상대적인 개념(주관-객관)이 아니며, ‘현상=존재’라는 존재론적 관계 속에 함께 나타나는 두 지점을 일컫는 것에 불과하다. 자너가 끊임없이 후설의 지향성 이론을 언급하며, 사르트르가 이를 그릇되게 해석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도 즉자 존재에 관한 그의 오해에 기인한다.

   몸에 관한 자너의 잘못된 이해는 「지시관계의 중심으로서의 신체」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자너는 “‘되돌아 지시함’ 이 가능한 것은 바로 신체 그 자체가 ‘사물들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즉 신체는 그 신체 주위에 질서 지어져 있는 다른 사물들과 똑같은 유형의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이다.”고 전제하면서 곧 바로 사르트르의 분석이 시각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한다. 일견 맞지만 뒤의 설명을 따라 가보면 사르트르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르트르의 ‘되돌아 지시함’은 몸이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없고, 도구-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되돌아 지시됨으로 비로소 알려 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특히 시각의 분석에 치중해 있다는 자너의 지적은 사르트르가 비판한 감관과 지각에 대한 분석의 의도에 완전히 빗나가 있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감관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하나의 감관이 각각의 대상 영역을 지니며, 각각의 지각을 갖는다고 믿는 것을 심리학이 만든 몽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자너는 사르트르가 부정한 그 토대 위에서 사르트르를 비판하는 관점을 세우고 있다. 사르트르가 보여주고자 한 몸은 신체와 같으면서 다르다는 사실도 간과되고 있다.

자너는 세 번째 비판의 초점도 몸에 대한 이해를 신체로 제한하고 있으며, 신체의 차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자너는, 사르트르의 주장이 대자존재-몸과 대타존재-몸이 한 선상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며, 제삼의 존재론적 차원의 몸이라는 것은 나와 타자 사이에서 나타난 대자존재의 반성적 모습이며, 대자존재의 반성 속에 타자가 깊숙이 개입되어 나를 타자처럼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대타존재-몸의 양상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통찰하지 못했다고 지적할 수 있다. 네 번째 비판은 의식=몸의 사르트르의 이론을 데카르트의 ‘의식’ 이론으로 환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기의식의 확실성만을 주장하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결과는 세계 없는 추상적 자아를 낳게 되고, 의식의 섬 속에 갇힌 추상적 자아는 자기를 넘어서 자기와 같은 의식 존재로 건너갈 수 있는 통로를 갖지 못한 채 유아론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의식-존재라는 것은 확실하나 타자가 의식-존재라는 것은 증명할 길 없다. 자너의 사르트르 비판의 요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의 ‘몸’과 타자의 ‘몸’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하지 않은 결과이다. 그리고 자너는 의식=몸을 신체라고 보기 때문에, 타자의 ‘몸’을 말하면서 신체 속에 있는 주관성을 주목하기 때문에 나온 비판이기도 하다. 사르트르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앞선 분석이다.

   우리가 자너의 사르트르 비판을 주목한 것은 몸=세계, 세계=몸이라고 주장하는 사르트르의 관점이 오랜 시간동안 우리를 지배해 온 사유방식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손쉽게 오해받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자너처럼 사르트르의 많은 부분에 동조적인 사람도 이와 같은 편견의 강을 건너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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