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문화산업’ 비판
Ⅰ. 머리말
Ⅱ. 문화산업과 비판이론
Ⅲ. 아도르노 비판이론에서의 문화산업 : 문화산업과 여러 사회적 요소들과의 관계 고찰
ⅰ. 정치
ⅱ. 경제
ⅲ. 인간
Ⅳ. 문화산업에 관한 논의에서 비판이론의 의의와 한계 그리고 보완점
Ⅴ. 맺음말
참고문헌
Ⅰ. 머리말
산업화 시대 이후로 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욕구가 커짐에 따라 그 들의 수요에 발맞추고자 많은 기업들이 이익의 창출 수단으로 문화를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고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문화산업이 비대화, 복잡화되는 원인을 낳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문화산업 행태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만 정작 뚜렷한 비판의 대상을 파악하지도 못한 체 현상에 대한 피상적인 비판만이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을 중심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는 문화산업에 대한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그 비판의 실체를 명확하게 하고자한다.
문화산업은 문화 생산물이나 서비스가 문화발전에 대한 관심보다는 상업적, 경제적 고려에 입각한 전략 하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생산, 판매되는 현대의 산업 형태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그 말을 쓴 이후로 널리 회자되었다. 그들은 문화가 사고 팔리는 사물로 변해버린 사태, 즉 문화가 상품화된 사태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 용어를 쓰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문화산업이란 문화의 퇴보를 의미하며, 그 산업화 방식이 인간의 소외를 유발시키는 현상이다. 말하자면 문화산업이란 용어는 그들이 문화의 철학적·정신적 가치의 퇴보라고 보았던 대중문화의 특징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지, 문화의 산업적 생산과 판매라는 새로운 제도적 유형의 출현이 갖는 사회적 함의를 연구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상품으로서의 문화생산’이라는 새로운 현상에 대한 관점을 시사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대중문화 연구가 보여준 심미적 또는 현상 기술적 수준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아도르노 이후 문화산업에 관한 많은 논의들이 오고 갔는데, 이 논의들 중에서 가장 대립적인 입장은 자유주의 경제학적 입장과 정치경제학적 입장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적 관점을 취하는 사람들은 문화산업을 옹호하면서, 문화산업이 문화발전과 문화의 민주주의적 실현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문화상품이나 서비스를 소비자의 의사에 반해 강매한다는 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며, 문화산업으로 대중이 다량의 문화 정보 및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창조적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대중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개발도상국들의 경우 종속의 위험성은 있으나 문화산업에 따른 생산능력을 확보하게 되면 오히려 탈집중화현상을 가져와서 문화적 도약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등의 입장을 펴고 있다. 이에 반해 정치경제학적 관점을 취하는 사람들은 문화산업의 산물이란 이윤 획득을 목표로 하여 문화산업의 생산 주체에 의해 하나의 상품으로 대량 생산되어 시장 판매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들은 문화산업이란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위한 생산 영역에 따른 결과물로 간주하여, 문화 생산물의 생산에 자본주의적 생산원리와 생산관계가 침투하며 그 소비양식에서는 소외현상이 나타나서 기존 체제를 강화하는 이념을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상품의 대량 생산과 시장 판매에 연결된 자본주의적 생산 원리 등에서 연유하는 문화산업의 역효과를 비판한 것이다.
본 논문의 일차적 목적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갖는 문화산업의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함에 있다. 이를 위해서 먼저 Ⅱ장에서는 문화가 산업화되어 갈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 전개과정을 추적해 볼 것이다. Ⅲ장에서는 이러한 전개과정들 속에서 문화산업이 관계 맺고 있는 여러 사회적 요소들에 대해서 좀 더 심층적으로 알아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기반 이론으로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을 채택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갈 것이다. 그중에서도 <계몽의 변증법>의 한 부분인 「문화 산업 : 대중기만으로서의 계몽」을 이 논의에 주축으로 삼고자 한다.
논문의 이차적 목적은 문화산업의 문제적 상황의 파악 후 그에 알맞은 해결책을 제시함에 있다. 이를 위해서 문화가 여러 사회적 요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파생되는 문제점, 문화산업과 인간의 물화라는 문제점 등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이 또한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끌어 가겠지만 그의 비판이론은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 문제점을 지적받게 된다. 따라서 Ⅳ장에서는 그의 이론이 갖는 한계점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이론이 갖는 약점을 함께 보완하고 좀 더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보고자 한다.
Ⅱ. 문화산업과 비판이론
전(前)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는 경제적 · 정치적 · 종교적 권위에 결박되어 있었다. 18~19세기에 전통적인 후원양식과 국가통제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사회집단, 사회계급, 사회제도가 등장하면서부터 이러한 속박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다. 이 속에서 문화와 문화생산은 진정으로 자율적인 영역을 확립했다. 일단 문화가 그 나름의 독자적 영역을 확립하자마자, 문화의 가치는 더 이상 후원자 또는 시장의 가치가 아니며, 보다 광범위한 자본주의체계와 그 정치문화의 가치도 아니게 된다. 그것은 오히려 보편적이고 인간주의적이고 해방적인 논리와 관련된다. 그리하여 문화는 '저항적'이 된다. 즉, 문화는 자본주의경제의 탈 인간화 논리에 맞서는 하나의 '저항'이다. 그리하여 문화는 현존하는 현실에 대항하는 가치, 희망, 열망을 표현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의 특징도 그리 오가지는 못한다.
부르주아 계급이 문화 제도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 분석에서 주요한 개념 중의 하나인 '공공영역'은 호르크하이머에 의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에게서 공공영역은 문화 제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그러한 문화 제도를 통해 공적인 정보와 논쟁의 구조를 조직화하는 데 성공했고, 또 국가행위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제도화하고자 했다. 공공영역의 성장은 전(前) 부르주아적 제도와 문화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을 확보하고자 분투한 독특한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고도로 중앙 집중화된 경제와 정체(政體)를 발전시키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은 공공영역의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상충하는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산출한다. 그리하여 강조점은 더 이상 자율적인 개인개념이 아니라 현존 사회의 지배적 규범에 대한 전반적 순응에 두어진다.
자본주의의 경제적·정치적 논리는 불가피하게 공공영역의 쇠퇴를 가져온다. 근대자본주의의 사회구조는 더 이상 개인의 가치와 자유를 보장하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제도에 의해 특징지어지지 않는다. 자율적 개인은 사라진다. 새로운 사회통합 양식이 '문화산업(culture industry)'이라는 개념에 기반하여 제기된다. 문화산업은 자본주의 경제 원리를 축으로 하여 집단적으로 조직화된 하나의 구조로, 개인들을 수동성과 순응주의의 상태로 효과적으로 사회화하는 고도로 합리화된 문화생산 체계를 말한다. 문화산업은 공공영역의 파멸로부터 발전한다.
과학 기술과 매스 미디어의 성장은 이전 시기에는 부유한 계층이 가졌던 문화에의 독점권을 일반 대중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적 삶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결론에 반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가의 성장은 노동 계급에게 그들의 문화를 성장시킬 기회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것은 의사문화(議事文化)를 널리 퍼뜨리는 상업적인 자본의 힘이 정복한 공간을 열어놓은 것이다. 그것의 독소적인 효과에 종속된 모든 사람들 안에 저항을 약화시키고 손상시키면서 말이다. 이러한 의사문화는 이른바 고급문화를 전유하면서 그것에 대한 숭배를 통해 그 요소들을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된 문화상품으로 변형시킨다. 라디오를 통한 고전음악의 전송이나 교향곡 연주를 위한 콘서트는, 이제 그 작품이 가지는 구조의 특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무슨 악기가 사용되었는가, 콘서트 좌석에 따른 입장권이 얼마인가의 차이가 우리의 주의를 끈다. 예술에 대한 우리의 진정한 경험이 이제 값을 매기는 문제로 가치절하된 것이다.
아도르노는 문화산업과 관리되는 사회의 특징을 동일성의 원리의 지배와 순응, 상품의 표준화와 반복으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특징들이 문화산업의 대표적인 미디어인 라디오와 텔레비전, 영화를 통하여 대중을 의존적이고 순응하는 인간으로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미국에 체류하던 기간에 접했던 미국 문화를 연구하면서 문화산업의 이러한 특징들을 보았다.
먼저 라디오 전송 음악의 성격을 '산만한 듣기'와 '인용을 통한 퇴행적인 듣기'에서 찾은 그는, 라디오가 독일에서 파시즘의 선전 매체로서 독재자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음악의 물신적 특성과 청취의 퇴행"(On the Fetish Character in Music and the Regression of Listening)과 라차르스펠트와 함께 한 라디오 조사 연구의 보고서 "라디오 심포니"(The Radio Symphony)에서 그는, 라디오가 소위 '진지한' 음악을 유포한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그 작품의 질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듣는 개인들은 점점 더 집중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듣게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라디오는 고도로 조직화된 기계장치로서 음악작품의 감각적인 세부, 클라이맥스와 같은 고립된 계기들을 전달함으로써 청취자의 듣는 습관을 퇴행적으로 만들고 작품의 전체와 부분간의 변증법적인 관계들을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라디오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송되는 음악은 의미 있는 전체로서 음악의 구조적인 완결성은 즉각적인 만족을 제공하는 '히트 곡조'를 읊조리는 것으로 격하된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라디오 음악의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개인들은 이제 조각난 상품으로 변형된 라디오 음악을 통해 수동적인 수용방식, 즉 예측가능하고 안전을 바라는 무엇인가를 해주는 대상을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현대 매스 미디어의 선두 주자인 TV에 대한 그의 연구는 주로 미국 TV의 드라마를 예로 들면서 분석하고 있다. 먼저 TV 극의 심리학적인 접근은 그 극의 다층위적인 구조에 초점을 두어야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관객에 대한 효과는 공개된 메시지에 의해서 보다 숨겨진 의미에 대한 고려 없이는 연구될 수 없다. 문화산업은 그것이 전달하려는 것을 동시에 다양한 심리학적인 층위에서 관객들을 사로잡기 위해 조직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전형적인 텔레비전 드라마의 진부한 형식들의 표준화와 변화에 개방적이지 않은 특성과 그것의 효과는 모두 이미 계산되고 결정된 것이다.
이와 같은 아도르노의 라디오 음악과 TV드라마에 대한 분석은 현대를 사는 우리가 매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음악과 드라마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공중파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음악은 다양한 메뉴를 제공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표준화되어 있다. 누구의 노래는 다른 것과 비슷하고, 때로는 대중가요의 시작 부분을 고전 음악의 주요 주제에서 인용하기도 한다. 이는 아도르노가 비판한 문화산업의 특질인 반복과 인용, 표준화의 예들인 것이다. 또한 텔레비전 드라마에 있어서도 '예쁜 여자=착한 여자'의 공식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이러한 스테레오타이핑은 드라마의 숨겨진 메시지를 통해 시청자의 의식을 표준화된 도식 안으로 환원시킨다. 그러한 스테레오타입이 문화산업의 현재의 위치에서 물화되고 강력해질수록 우리는 현실을 보는 통찰력을 잃게 되고 눈먼 수동적인 희생자가 될는지 모른다고 아도르노는 경고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도구적 이성에 의해 '총체적으로 관리Verwaltung; administration되는 사회'라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관리라는 개념은 도구적 이성에 의해 보편자의 이름으로 개별자를 통제하는 지배 형태를 의미한다. 효율성을 위한 철저한 관리는 인간을 기능으로 전락시키고 개인의 자율성과 비판적 반성을 없애버린다. 따라서 관리란 비판적 이성이 파괴된 결과 나타난 권력, 지배 및 통제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적 사회 질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아도르노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잠재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잠재적인 전체주의로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대중의 거센 저항과 반발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도구적 이성의 원리가 인간 존재의 정신과 내면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게 관철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오늘날 대중매체에 의해 생산되고 유포되는 대중문화와 대중예술이 인간의 정신 속에 동일성 원리를 실현시키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개념적 도식을 통해 동일성원리가 외적 자연을 지배하고 등가성에 의한 교환 원리를 통해 사회관계 내에서 동일성 원리가 관철된다고 한다면, 대중매체를 통해 대량 생산되고 소비되는 오늘날의 대중문화와 대중예술은 사람들의 내적 본성에 작동하여 모든 사람이 동질적으로 사고하고 반응하며 행위 할 수 있게 만드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다시 말해 동일화의 도구로서 대중문화는 한 사람도 빠져 나갈 수 없게 대중을 포섭하고 통제함으로써 기존의 지배관계와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아도르노는 오늘날 문화가 철저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일종의 비즈니스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보통 '문화산업론'이라는 표현을 쓸 경우에, 이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의해 대변되었던 비판이론의 대중문화론을 지칭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문화경제학이나 예술경제학 등에서 아주 중립적인 의미로 문화산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문화산업이란 궁극적으로는 인간 주체의 내면적 자연, 그러니까 인간의 감정, 충동, 욕망, 본능, 상상력, 육체 등에 대해서 외적 자연에 가했던 것과 똑같은 폭력을 가함으로써 동일성 원리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지배의 수단이다.
문화산업 비판론은 마르크스주의가 상부구조로 파악하는 문화영역에 경제가 결합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지적에서 출발한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가 미국의 대중문화를 문화산업의 대표적 현상으로 파악한 이유는, 미국에서 문화의 생산과정이 조직되지 않은 삶의 양식에서 벗어나 상품처럼 계획되고 생산되는 사회변화가 먼저 등장했기 때문이지, 모더니즘 전통에 기반을 둔 구대륙의 고루한 지식인의 양키문화에 대한 혐오의 표현은 아니다. 문화산업 비판론은 대중문화 대 고급문화, 대중의 취향 대 조작된 취향이라는 이분법 틀에서 대중문화란 조작된 취향에 불과하다는 의고적 태도를 표명하는 테제가 아니다. 문화산업 비판론은 대중문화 비판론이 아니라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가로질러 횡단하는 사회적 힘에 대한 비판론이다.
문화산업의 지배 하에서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차이는 형식적 차이에 불과하다. 문화가 조작된 것인가 아니며 욕망의 표현인가 하는 반사적 대립에 대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이분법보다는, 욕망의 표현과 조작을 패러독스한 관계로 만드는 문화 과정에 대한 비판이 더 중요하다. 문화 산업 비판론은 대중문화의 옹호와 모더니즘에 기반을 둔 미학의 규준들의 옹호 사이의 양자택일이 아닌, 문화를 위협하고 있는 타율성의 논리에 맞서는 문화의 자율성 회복을 문제 삼는다.
예술과 대중문화가 문화산업의 논리에 동일하게 노출되어 있기에, 자율성 회복의 가능성 역시 예술과 대중문화 양자에게 부여되어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예술이 선험적으로 자율성 획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자율성은 선험적 재단이 아닌 성취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의 지배는 계몽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전개된 경제적 이성이 제국주의적으로 확장된 결과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문화산업 비판과 이성중심주의적 계몽비판은 동일한 문화틀로 작동하며, 자율성 회복은 계몽 이후의 성향. 즉, 탈 근대적 상황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
Ⅲ. 아도르노 비판이론에서의 문화산업 : 문화산업과 여러 사회적 요소들과의 관계 고찰
ⅰ. 정치
아도르노가 생각하는 문화산업은 우리에게 친숙한 예전의 것들에 새로운 특질을 융합시킨다. 그렇게 파생된 것들 안에서 대중들에 의해 소비되도록 재단되고, 소비의 본성을 결정하는 생산물은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기술적인 능력, 경제적인 그리고 행정 관리적인 집중에 의해 가능해진다.
자유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의 이로운 점 가운데에, 개인을 위한 자유가 증대되었다는 명제를 취하고 있다. 단지 부유한 사람들의 자유였던 개인의 주거와 이동의 자유는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대중들의 영역이 되었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에서 보수당의 이미지를, 2차 대전 후 개인의 사는 집에 대한 소유권을 통해 재산 소유(property - owning),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의 소유를 개인의 자유의 확장과 비슷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대중 매체의 발전은 이전에는 특권적인 소수집단만의 영역이었던 문화 상품들과 예술 작품에 대중들이 접근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이것은 일터에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근대적인 삶의 풍요로운 개인화가 아니다. 그들은 근대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개인’의 유형을 하나의 고립된 -비록 대중화되었으나- 단자(Monad)로, 결과적으로는 집단적인 세력의 힘에 보다 도움이 되는 고립된 단자로 보았다. 진정하게 개인적인 것은 르 꼬르뷰제의 ‘거주하기 위한 기계’의 하나로 완비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긴밀한 상호작용으로부터 한 사람의 개인성이 나오는 것이다. 개체성은 사회성의 산물이고 개인들이 서로를 변화시키면서 또 그러한 변화 안에서의 사회적인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아도르노는 근대의 주택 재산권이라는 주장은 단지 그와 같은 유기적인 모델에 대한 안티테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근대적 도시가 생기게 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긴급함으로 인해 만들어졌고, 방대한 노동자 군단을 산업 행위의 중심으로 이동시키기 손쉽게 하고, 그들의 임금과 월급을 소비하는 소비자로서 대중에게 노동의 생산물을 사도록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도시 주택 프로젝트는 개인을 영속시키기 위해 고안했다. 하나의 작은 위생적인 주거지 안에 상상의 독립적인 유닛(unit)이 그를 자본주의의 절대적 권력(힘)에 더욱 공헌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자유와 개인주의에 대한 요구를 낳고 다른 유형의 사회 즉 전체주의, 공산주의 등등과 그들을 대비시킨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자유와 개인주의에 대한 요구를 낳고, 전체주의, 공산주의 등의 다른 유형의 사회와 대비된다는 주장들을 거부한다. 모더니티는 개인을 잠식했고 자유와 자율성이라는 개념은 거의 소멸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소위 공산주의적인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그러하다. 아도르노는 사회가 긍정적인 의미에서 시간을 넘어 개선되고 발전한다는 생각이 환상이며 거짓말이라는 생각을 고집하면서, 부정적인 진보가 존재했고, ‘새총으로부터 메가톤급의 폭탄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상의 발전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기술의 역사는 자연으로부터 인간이 소외되는 역사이고, 자연을 착취하고 통제하기 위해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노력의 역사이다. 자연에 대한 지배는 억압적인 사회 질서의 발전을 통해 성취된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적대적인 관계가 점점 발전되고 세계적이 될수록 자유와 저항이 실천될 수 있는 여지의 형식들은 점점 희미해진다. 아도르노의 어두운 전망에서는, 20세기 사회는 개인을 거의 소멸시켰다. 그것의 마지막 피난처가 아카데미와 학자들 사이에서의 동업자와 같은 특권을 가진 그룹 - 가장 중요하게는 근대 예술가들 그룹과 같은 - 의 중심에서 발견되었다. 진지한 근대 예술은 세계에 대한 전체주의적인 압박에 대해 저항의 모델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러한 저항을 부식시키는 과정이 문화의 생산과 수용의 총체주의적인 기관을 통해서, 대중문화, 대중음악, 영화, 책과 엔터테인먼트를 통해서 계속 진행되었다. 문화산업은 심지어 진지한 예술의 찌꺼기를 자신의 분쇄기로 빨아들여, 그것의 재료를 갈아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된 다른 상품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문화 상품의 재료로 삼는다.
ⅱ. 경제
문화는 패러독스한 상품이다. 문화가 완전히 교환 법칙에 종속되면 문화는 더 이상 교환 불가능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 문화가 맹목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되면 문화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다. 그 때문에 문화가 선전과 혼합되는 것이다. 독점 상태에서 선전의 의미가 없어질수록, 선전은 더욱 전능해 진다. 여기에는 충분한 경제적 동기가 있다. 사람들은 분명 문화산업 없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화산업에 물린 소비자들은 더 이상 아무 감동도 할 수 없게 된다.
문화산업은 “자본의 보편적인 법칙”으로부터 탄생한다. 자본의 법칙은 그 내부에 독점화를 유발하는 경향을 포함하고 있다. 비판대상으로서의 문화산업은 문화의 상품화 일반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의한 문화산업의 독점화 경향이며, 독점화된 문화산업이 유발하는 정치적 효과이다. 문화산업은 전통적인 엘리트에 의한 문화독점과 구별되는 새로운 문화독점 현상을 빚어낸다. “현대의 문화독점 기업은 몇몇 비슷한 유형의 기업들과 함께 대부분이 겪은 해체와 분산의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은 경제 분야의 하나이다.”
문화산업의 독점화와 이로 인한 문화생산의 독점은 두 가지 독점을 낳는다. 그 하나는 문화상품 공급의 독점이며 또 다른 독점은 문화상품이 유통되는 중요 통로인 매체의 독점이다. 문화산업은 문화상품의 공급 독점과 매체를 독점할 때 독점 자본으로서의 성격을 완수한다. 이중적 의미로 독점화된 문화산업은 탈정치적인 듯 보이지만, 은폐된 정치 효과를 발휘한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개인에게 권한이 부여되었다고 이야기된 것은 실체로는 개인들의 철저한 동일함(sameness), 순응(sonfornity)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문화적 생산물의 소비는 그 같은 결과를 이룬다. 사람들이 구입하는 문화상품은 본질적으로 여타의 상품들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상품들을 지배하는 같은 법칙 - 사용가치보다는 교화가치가 지배하는 법칙 - 에 따라 이익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독점 자본주의단계에서, 자본주의는 생산, 재원, 에너지, 그리고 상호의존적인 제작의 단위를 연결시키는 하나의 방대한 시스템이다. 문화 산업 자체는 거로 의존하는 이러한 시스템의 부분이고 문화 상품과 소비자들 간의 관계는, 마르크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소비자와 모든 상품들과의 관계를 특징하는 물신주의(fetishism)에 가담하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들은 스스로 엔터프라이즈를 구성하고 마케팅, 프로모션 그리고 배급으로 잘 조직된 시스템에 종사한다.
문화라는 것은 자유롭고 재능 있고 창조적인 창안자들에 의해 자기 표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할리우드 영화사나 주요 방송사들과 같이 마케팅, 광고 그리고 배급 같은 그들의 복합적인 시스템을 가진 방대한 문화 생산자들의 조직들은 단지 이질적인 소비자 대중들을 자유로운 창조적인 개인들의 문화 생산물과 연결시키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문화산업의 ‘변명’에 불과하다. 그러한 견해에서 자본과 규모의 집중은, 단지 소비자들이 독립적으로 생산된 것을 즐길 수 있기 위한 물질적인 조건들을 주재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일 뿐이다.
ⅲ. 인간
인간의 정신적 미성숙은 문화산업에 의해 더욱 촉진된다. 문화산업의 과제는 이런 사회를 위해 인간을 심리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문화산업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대중조작을 위해 생긴 것으로 새로운 것을 수용하고 소화할 수 있는 감수성을 퇴화시킨다. 문화가 대기업의 관리품목이 되면서 교양은 붕괴되고 문화는 중립화(Neutralisieren)된다. 이리하여 달리 될 수 있다는 생각이나 느낌이 생겨날 여지마저 파괴시켜버린다. 주체의 자율성은 파괴되고 전체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거리유지도 불가능하게 된다. 세계는 조망할 수 없는 것이 되면서 개인의 의식 속에서 세계는 상실되며 이에 따라 개인의 통일된 인격도 해체된다. 대중은 자율적 인간이 아니라 순응과 종속의 주체들로 구성되어 표준화 된 상품과 사이비 개성을 원할 뿐이다.
아도르노의 비동일성 테제는 동일성 사유에 대한 비판으로 출발한다. 아도르노는 ‘사유하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이다.’라는 헤겔의 테제를 따른다. 아도르노의 동일성 사유 비판의 핵심은 동일성 사유의 지배 계기(Herrschaftsmoment)와 그 것의 실체화(Hypostaseirung)에 있다. 지배 계기는 개념적 사유가 “동일하지 않은 어떤 것이라도 동일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자기 외부의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항상 자신만을 동일시하는 동일화의 순환을 의미한다. 동일화하는 사유는 개념의 논리적 동일성을 통해 대상화에 이르는데, 이때 “단순히 실제의 사유 과정에서 상정될 뿐인 어떤 사태 자체가 확고한 것, 불변적인 것으로서 존재한다는 원칙을 실제화 한다.” 비동일성 사유는 동일성의 강압, 대상화 작용 속에 응고된 에네르기를 파괴(논리적 강압성을 파괴)하는 것, 개념의 자족성을 제거하는 것으로서 개념적 사유에 의해 환원되지 않는 것의 고유한 의미와 질적 계기, 경험의 다양성에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비동일성 사유로의 방향 전환”은 개념이 잘라버린 것, 개념에 의해 분리되어 있는 것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한다. 아도로노의 비동일성 강조는 동일성의 대립 개념의 성격보다는 동일성의 한계 개념적 성격을 갖는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비동일성 역시 개념의 매개 없이 파악할 수 없다. ‘개념 없이 어떠한 사유도 있을 수 없다.’, ‘개념을 가지고 개념 없는’ 것을 인식한다는 아도르노의 사유에서 동일성 계기는 필연적으로 전제되며 제거될 수 없다. 비동일성은 따라서 동일성에 대한 “긍정 - 유토피아적 대항 개념”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티센의 지적처럼 헤겔의 형식인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에 대한’ 기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기억 방식은 헤겔의 경우처럼 전체의 계기로서 동일화 운동에서 절대로 지양되지 않는다. 오히려 개념의 동일화 운동의 지양에 제한을 강조한다. 아도르노에게 비동일성이란, ‘개념의 동일화 운동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어떤 것’, 동일성 사유에 의해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일성 사유 비판은 동일성 강압에 의해 지양된 “비동일서에 대한 일관된 의식”을 말한다.
아도르노의 비동일성 개념을 문화의 영역에 적용시킨다면, 문화에서 비동일성은 다른 문화와의 관계에서 특정 문화가 갖는 문화적 고유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문화도 실제로 동일한 문화는 아니다. 왜냐하면 전통적 의미의 문화는 특정한 국가와 민족이 역사적으로 형성한 총체적인 삶의 방식으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 나라의 문화 역시 타문화의 둘레로부터 경계되고 구분된다. 한 사회의 문화 간 관계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문화적 차이를 인지하게 된다. 아도르노의 시각에서 각 문화의 고유성(비동일성)은 대중문화의 획일성으로부터 보호되어야만 한다. 차이로서, 특수자로서 타문화에 대한 “차이에 대한 반성”, “(타문화의) 동등성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도르노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러한 차이에 대한 반성 없는 문화 획일화는 결국 세계주의, 문화 민주주의 이름 아래 감행되는 단일 문화 체제로의 적응 요구이자 타문화의 문화적 탈주제화와 가치 획일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런데 어떤 문화도 독자적인 문화적 고유성만을 주장할 수 없다. 문화 자체는 문화 접촉, 접변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이러한 문화적 개방성의 특징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홀은 ‘현대 민족은 모두 문화적 혼성체들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사회적 삶의 스타일이 국제 여행, 이미지나 장소의 시장화, 인터넷 통신망 등에 의해 연결될수록 문화적 정체성은 더욱 특정 시간이나 장소, 역사 및 전통들로부터 떨어져나가고 있으며, 모든 고유한 전통과 구별되는 정체성들은 혼합어로 번역될 수 있다고 본다.
Ⅳ. 문화산업에 관한 논의에서 비판이론의 의의와 한계 그리고 보완점
아도르노가 보기에 문화산업의 이데올로기는 한마디로 돈벌이다. 다시 말해 문화산업의 실천 전체는 “이윤 동기를 정신적인 구조물에다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관리되는 세계에서 문화산업은 더 이상 중립적인 입장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문화산업은 사람들이 겨우겨우 감당해 나가는 가혹한 삶의 조건을 부단히 연습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떤 것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문화산업의 총체적 연관성은 총체적인 사회적 기만과 일치한다.” 결국 문화산업의 총체적인 효과는 반계몽의 효과이다. 인간의 자기 보존을 위한 계몽인 기술적 지배가 오히려 대중을 기만하고 옭아매 속박하는 수단이 되었다. 문화산업은 오락적 영역을 그 소박성을 탈색시켜 상품으로 개조하고, 예술을 소비 영역으로 어설프게 전환시킴으로써 그 자체의 영역을 확대하는 등 오락을 매개로 대중을 조종한다. 대량 생산된 오락은 타락한 영민함이나 부적당한 호소, 도덕적 도피로 가득 차 있어서 정말로 머리나 가슴을 감동시킬 만한 것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문화산업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대중의 취향을 저질화 시킨다는 점보다, 취향을 너무 자극하여 무디게 만들어서 마침내 죽게 만든다는 것이다. 새로운 자극은 과거의 것보다 더욱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시장원리에 따라, 갈수록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으로 채워지는 영화들은 이런 사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문화산업은 그 현존 형식의 비밀인 “사회적인 위계질서에 대한 순응”을 드러내며, 그것에 동화하지 않는 자는 사회적으로 무기력해지고 아웃사이더가 되기 때문에 어떤 신체적인 위협 없이도 개인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진다. 문화산업의 상품 생산자들은 굳이 일부러 소비자의 수준을 낮게 잡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소비자의 평균 취향에 맞추어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평균 취향에 맞추어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평균 취향에 맞추어 만들어진 상품은 어느 누구의 개성에도 완전히 들어맞기는 힘들다. 이는 삶의 몰개성화로 이어진다. 이처럼 대중을 기만하는 문화산업에 의한 개성의 말살과 욕구체계의 왜곡, 획일화 현상 등은 주체의 자율성을 박탈하고 자유의 영역을 축소함으로써 대중지배의 수단으로 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대중문화비판의 핵심이다.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에서 ‘영화’는 모든 미학을 이데올로기적인 목적, 즉 관객/청중을 하나의 소비자로 재생산하려는 대표적인 체계의 하나로 자리한다. 그의 사상적 맥락에서 영화는 일반적으로 미학의 주제로 간주되기보다는 오히려 문화사회학과 이데올로기 비판의 영역에 속한다. 아도르노는 영화가 상품일 수 밖에 없다는 논리에 부가해 그것이 미학적 영역에서 상품의 구조를 재생산한다는 점, 즉 이미지와 이미지의 지시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영화의 ‘미적 경험’은 도구적 이성과 모방적 경험 간의 화해를 제시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아도르노는 특히 유성 영화의 등장으로 음성, 이미지, 음악의 허구적이 동일성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으며, 그것의 완벽한 자기 동일성에 의해 전체 서계에 대한 긍정성이 강화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아도르노의 핵심적인 공격 지점은 현실을 올바르고 정당한 현실이라 하면서 현실을 덮어 가리고, 그것의 현재적 상태를 영원화하는 기능을 하는 ‘총체로서의 존재’라는 사유방식이다. 아도르노는 현실은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현실을 동질적 실체 즉 어떤 단일한 통일적 원리의 표현으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는 거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아도르노는 ‘차이의 복권’을 통해서 ‘전체는 지리다’라는 헤겔의 정리를 뒤집어 ‘전체는 허위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총체성의 범주의 우월성이라는 개념과 근본적으로 결별하고 있다. 사회 현실에 대한 진실된 지식을 막는 사물화의 이데올로기적 베일을 걷어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러한 지적은 이론적 한계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참다운 예술은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존재 자체로서 인간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는 세계의 방향에 저항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예술은 사회적 참여활동을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분명한 선동적 커뮤니케이션으로서 또는 분명하고 일관된 어떤 목적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으로서 그 자체를 형성하는 것을 거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비판적 힘이란 예술이 아닌 어떤 무엇을 대변하는 기능을 거부한 상태이며, 나아가 예술작품 자체이다. 예술은 기존 세계가 바로 진리라는 잘못된 욕구에 대하여 강력하게 제동을 건다. 바로 여기에서 예술의 진리 내용이 결정된다. 예술이 가상으로서 자리매김 되면서 획득하게 되는 예술 작품의 진리 내용은 현실에 대하여 대조적인 상을 제공하며, 그리하여 예술은 진실에 기여하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도르노의 문화산업 비판이론은 대중문화 또는 문화산업이 만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그것의 위험성을 비판하고,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는 고급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예리한 측면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정한 한계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도르노의 새로운 논거인 쇤베르크의 무조적(無調的) 혁명은 부르주아의 조성 체계의 전체적인 법칙으로부터 실제로 음악적 재료들을 해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상부구조 자체의 혁명으로서 그것의 자유로운 추동력은 유지될 수 없다. 무조성은 새로운 음악적 도그마로 위치하며, 그것의 역동적 원칙은 다시 예측 가능한 닫힌 구조로 빠져듦으로써 정적으로 변하고 만다. 벅-모스는 아도르노의 ‘동일성의 함정’을 지적하면서 아도르노의 시도가 철학 내의 혁명에서 실제로 동일한 운명에 굴복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리고 반체계의 그의 원칙이 그 자체 체계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아도르노의 가차 없는 부정성의 전체적인 요점은 사회 내에 존재하는 지배의 구조와 물화의 구조를 반복하는 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부정적 의식만이 현실을 재생산하지 않고 비판적인 것이 될 수 있으며, 그 자체의 비동일성을 통해 사회적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 딜레마가 존재한다. 비동일성을 경험하는 능력이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철저한 부정성’의 유지는 새로움을 새로움으로 경험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은 역설적으로 전체적인 것에 도달하며, 그때에 그것은 ‘정지 상태’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글에 대해 아도르노가 비평적 응답으로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고급 예술과 문화산업은 둘 다 자본주의라는 상처를 지니고 있다. 양자는 변화의 요소를 포함한다. 양자는 통합된 자유의 찢어진 반쪽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합쳐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문구는 거꾸로 아도르노 자신에게 돌아갈 수도 있다. 만약 쇤베르크와 헐리우드 영화가 똑같이 둘이 합쳐질 수 없는 완전한 자유의 찢어진 반쪽이라면, 왜 대중문화에만 아무런 진리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아도르노는 대중예술에서는 어떠한 자유도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이데올로기만 존재한다고 보았던 점은 확실하다. 이러한 점에서 아도르노는 ‘대중문화가 진리 내용을 지닐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비판의 여지를 남긴다.
아도르노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세부적인 논의를 비껴가면서, 환원 불가능한 이질성을 지닌 각각의 요소를 추상적 관념이라는 냉혹한 다림질로 훼손시키는 범죄자인 대중문화를 음울한 눈으로 바라본다. 대중은 문화상품의 선택에 있어서만 어느 정도 자발성을 나타낼 뿐 문화상품의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는 전체 사이클을 관장하지 못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면, 대중문화의 일방성과 대중의 수동성을 지적한 아도르노의 견해는 타당하다. 하지만 아도르노 자신이 이미 지적했듯이 대중은 어느 정도 계몽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 또한 단순히 조작 가능한 종류의 것이 아닐 것이다. 현대인은 단순한 지배욕보다는 오히려 황홀감 속에서 몰입욕을 충족시키기를 원하는 성향도 나타내기 때문에,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미학적’인 몰입욕의 대상은 완전히 억지로 떠맡겨졌다기보다는 어떤 부분에서는 대중의 자발성이 개입되었을 여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소비자들의 의식은 이중적이다. 그들은 문화산업의 제품 전체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들의 태도는 불신, 의심과 의혹으로 나타난다. 고급예술과 문화산업을 완고하게 이분화 하는 것은 그 자신이 다시 하나의 닫힌 체계를 생산해내는 ‘잘못된 종합적 전체’가 될 수 있다. 통합된 자유의 찢어진 반쪽들은 서로 어울리지는 않으나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율성의 정도 또는 무기력함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고급예술과 문화산업은 예술이라는 고리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둘은 후기 자본주의에서 심미적 생산의 분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유사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파악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또한 마르쿠제는 “계급사회가 오랜 세월 동안 차단해 온 자유를 향한 본능”을 그 근거로 들면서, 에로스의 복권을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 해방될 수 있으며 유토피아는 실현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그러한 저항이 진실로 다른 사회를 만들어 낼 가능성에 대해 훨씬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마르쿠제가 행하고자 했던 저항 운동과 혁명에 대해 아도르노의 지지가 약했던 것은 아마 당시부터 사회적으로 만연해 가고 있는 나르시시즘을 목격했기 때문이며, 나르시시즘에 기인한 저항은 사회적 총체성에 대해서 단순한 병리적인 저항이 될 뿐이라는 점은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수용자가 현실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문제를 잊고, 의식의 주체적 ․ 비판적 힘을 상실함으로써 잠정적으로 더 좋은 기분을 느끼도록 고안된 문화상품 속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찾아내기는 힘들다. 비판이론이 목표하는 사회는 ‘현실 속의 지상 천국’을 선전하는 프로그램들의 요구를 통해서는 결코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비록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철저한 부정이 ‘기계적 부정’으로 되어 그 자체가 하나의 억압적인 틀로 되지 않는가라는 점이 아도르노 사상의 한계로 지적되고 있지만, 현실 사회의 부정적 모습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끊임없이 일관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아도르노의 통찰은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보아도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다고 본다.
오늘날의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이론은 다음과 같은 관점을 견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이데올로기 개념의 확장이다.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단지 계급적 이익 또는 경제적 이익의 이념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도르노의 이론이 '지배'라는 넓은 개념을 통하여 펼쳐지듯이, 성 차별, 인종 차별의 이데올로기까지도 비판하여야 한다. 아울러 신념의 체계들 뿐 만아니라 이미지들, 상징들, 내러티브까지도 분석하는 것을 포함하여야 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의 확장은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대중문화와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기능하는지에 대한 탐구의 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며, 어떻게 이미지들과 상징들이 대중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성(sex), 인종(race) 그리고 계급적 이데올로기적 표현들의 일부를 구성하는지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켈러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다각적인접근(multiperspectival approach)'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로,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경쟁 이데올로기들을 분석하고 그 사회적 그룹들과 그들의 입장을 분석하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헤게모니'와 같은 그람시적인 개념을 빌려올 수 있다. 그리하여 미디어 문화가 일련의 지배적인 가치들과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들 그리고 문화적인 형식들을 어떻게 헤게모니를 가진 기획으로 하나의 공유된 합의를 통해 개인들을 편입시키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비판적 사회이론이라는 틀거리 안에서 정치 경제학과 텍스트의 분석 그리고 청중의 수용에 관한 연구를 결합하는 메타이론적인 견지를 가진 아도르노의 기획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의 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자와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자본의 이해관계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자본은 수요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소비를 추구하도록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의식을 주조한다. 즉 자본은 대량생산된 물질적 패키지와 이미 짜여진 각본 내에서 욕구를 충족하도록 개인들을 부추긴다. 그러나 앞에서의 질문처럼 대중은 항상 그 지배되고 관리되는 대중문화를 통한 지배계급의 전략에 무력하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대중은 나름대로 대중문화 안에서 지배적 헤게모니의 힘에 저항하는 문화적 실천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는 근본적인 사회적 갈등을 문화적 차원에서 재생산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배와 저항이 대립 경합하는 투쟁의 영역이다. 대중문화에 관한 통찰은 비판적인 대중문화의 실천이 현대 대중문화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지배 헤게모니적 힘을 탐색해 드러내 비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저항하는 대항 헤게모니를 찾아내 북돋아 줌으로써 진정으로 인간 해방적인 대중문화를 창조하는 데 일조를 해야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아도르노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그의 '비동일성의 사유'에 대한, 비판적 사유에 대한 의미를 축소시키지는 않는다. 아도르노가 살았던 시대보다도 더 많은 미디어가 현재의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라디오 음악과 TV드라마에 대한 분석은 현대를 사는 우리가 매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음악과 드라마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공중파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음악은 다양한 메뉴를 제공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표준화되어 있다. 누구의 노래는 다른 것과 비슷하고, 때로는 대중가요의 시작 부분을 고전 음악의 주요 주제에서 인용하기도 한다. 이는 아도르노가 비판한 문화산업의 특질인 반복과 인용, 표준화의 예들인 것이다.
아도르노의 문화산업 비판이론은 올바른 대중문화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하는가라는 실천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의 비판은 유토피아적인 전망을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탐색하여 그 기저에 흐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을 분석하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이론을 통해 대중문화의 상품들에서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21세기에 우리가 접하고 있는 문화산업의 상품들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바로 여기에 아도르노의 비판적 사유가 가지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아도르노의 비판이론과 그에 입각한 대중문화이론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무런 모순도 없이 지배계급의 이익과 빈틈없이 결합되어 있으며, 대중문화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이에 의해 대중의 요구와 취향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아도르노의 이론이 완벽하게 현대 문화 현상을 비추고 있다고 단언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이론이 현대의 문화산업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치료하기 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분명히 확신할 수 있다. 특히 아도르노의 라디오 음악과 TV 드라마에 대한 분석은 현대를 사는 우리가 매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음악과 드라마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공중파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음악은 다양한 메뉴를 제공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표준화되어 있다. 누구의 노래는 다른 것과 비슷하고 때로는 대중가요의 시작 부분을 고전 음악의 주요 주제에서 인용하기도 한다. 이는 아도르노가 비판한 문화산업의 특징인 반복과 인용, 표준화의 예들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문화가 어떻게 변질되고 왜곡되어 권력에 이용되는가에 대한 자각을 통해 우리는 문화 권력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인형이 아닌 주체적 인식 능력을 갖추고, 스스로 사고 할 줄 아는 진정한 문화인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부조리한 사회 현상들에 대하여 저항과 비판의 움직임이 수반되어야 한다. 무조건적인 비판이 아니라 이유가 타당하고 합리적인 비판 활동을 통해 권력을 가지려는 자들이 쉽게 문화를 통해 사회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현대는 문화산업을 통해 손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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