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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개국 황제는 정신병자?!

북위를 개국한 영웅 탁발규, 그가 정신병을 앓게 된 이유는?
태조 탁발규와 북위
선비족이며 북위의 개국 황제. 조부는 대나라를 세운 황제였기 때문에 탁발규는 어린 시절을 황궁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가 6세 때 전진(前秦) 황제 부견이 대를 멸망시키고, 탁발규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유랑하게 된다. 당시 나이는 어렸지만, 어린 나이에도 성격이 완강했고, 망한 조국을 반드시 부흥시키겠다며 와신상담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비수지전으로 전진의 정권이 전복되고, 짧게나마 통일되었던 북방은 다시 군웅할거의 시대를 맞는다. 탁발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386년 우천에서 부락대회를 열고 왕위에 오른다. 같은 해 4월, 탁발규는 스스로 위왕을 칭하고 국호를 위로 바꾸는 데, 이것이 북위의 시작이다. 탁발규는 부락의 분열 상태를 잠재우고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각 부를 통일하고 영토 확장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남정북전을 겪으며 탁발규의 세력은 대적할 자가 없이 강력해졌다
정권이 안정되자 탁발규는 본격적으로 대외 확장에 나서며 북방 통일의 꿈을 키웠다. 그는 세력이 강대했던 독고부족을 합병하고, 숙적 철불부를 물리치는 한편, 황하 이북의 광대한 후연 영토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세력을 키운 그는 평성에 도읍을 정하고 중앙집권국가의 길로 나아간다. 그는 유교를 국가 통치의 근본으로 삼고, 농업 생산성 증대에 힘쓰는 등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서 국가의 기초를 닦아나갔다. 이로서 거대한 북위 제국이 완성되며 중국의 남북조시대가 열린다.
북위 평성 도읍터
황제의 변화와 기행
나라의 기반을 닦은 개국 황제의 리더십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다. <위서 태조기>는 탁발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황제는 근심하거나 번민하면서 수일씩 음식을 먹지 않거나 잠을 자지 않았다. 기뻐하다가도 순식간에 분노하였으며, 주위의 사람들을 믿지 아니하였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혼자서 중얼거리는데, 마치 옆에 귀신이라도 있는 듯 하였다. 성정이 포악하여 싫어하는 자는 모두 해하거나 죽였다. 황제는 대신들의 낯빛이 변하거나, 호흡이 고르지 않거나, 발걸음이 고르지 않거나, 언사가 바르지 않으면 싫어하여 때려죽이고, 죽은 자들은 모두 천안전 앞에 늘어놓으니, 황제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탁발규는 걸핏하면 대신들을 죽일 뿐 아니라, 심지어는 수레에 오른 후 칼로 앞에서 수레 끄는 자의 머리를 찌르곤 했다. 수레꾼이 칼에 찔려 쓰러지면 곧바로 다른 사람이 뛰어나와 죽은 자를 대체하고 황제는 다시 죽이는 식이었는데, 그가 출행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죽는 자가 수십 명이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이 어쩌다 한순간에 흉폭한 괴인으로 변한 것일까? 후세 사람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다. 누군가는 그의 성정이 원래부터 포악했다고 하고, 누군가는 그가 오랑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정상인을 기준으로 탁발규를 평한 것이나, 사실 희대의 영웅이었던 탁발규의 변화는 고의가 아니었다. 그는 매우 심각한 정신분열을 앓고 있었다.
정신분열의 원인
그렇다면 탁발규가 정신분열증을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내외부적 요인으로 그 이유를 분석한다. 위진남북조 시기는 청담과 공론이 지배하던 ‘현학’의 시기였다. 사람들의 사상은 공허했고, 속세를 벗어나 청정과 향락에 이르려 했다. 이러한 풍토 속에 ‘오석산’이라는 약물 복용이 유행했는데, 응황, 석종유, 청자석, 주사, 백석영 등이 주성분이었다. 이 성분들은 인체에 치명적인 수은, 납등을 다량 함유하고 있으며, <본초강목>에서도 독성이 있다고 적고 있는 물질이다. 탁발규는 이 약물을 복용하다 중독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약물의 복용을 처음 제창한 것은 위나라 때의 청담가 하안으로,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큰 유행으로 퍼졌다. ‘오석산’을 복용하면 정신적으로 즐거워지고 평소의 몇 배에 달하는 쾌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오늘날의 마약과도 비슷해 오래 복용하면 중독되기 쉬워 위험한 물질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약물의 위험성을 거의 자각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신체를 건강하게 해주고 장수하게 해준다고 믿었다. 결국 ‘오석산’의 장기복용이 탁발규에게 정신분열증이 발병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또 다른 요인은 외부에서 찾을 수 있다. 탁발규는 전장에서는 혁혁한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했지만, 막상 북위를 세운 후에는 난제의 연속되는 상황을 맞는다. 북위는 중원에 세웠으나 여전히 선비족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탁발규로서는 한족 황제처럼 정권을 휘어잡기가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둘러싸고 옥죄는 듯한 제약이 가해졌으며, 황제의 지위도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탁발규의 형제 탁발의와 목릉부 수령 목숭은 탁발규의 영토 확장을 도우며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이다. 그러나 개국공신으로 승상에 오른 탁발의는 목숭과 함께 황위를 빼앗기로 모의하고 황궁 주위에 매복 무사들을 두어 황제를 암살하려 한다. 이 사실이 발각된 후, 탁발규는 두 사람을 처단하려 했지만 지지기반이 약한 탓에 이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서부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 당장 이들을 벌할 수도 없었다. 이 사건으로 탁발규는 권력에 큰 위협을 받았으며, 대신들에 대한 의심도 한층 심해졌다.

탁발 선비족의 발상지, 알선동
403년, 탁발규는 호사스럽다는 죄명으로 평원태수와 그 가족을 몰살했다. 407년 7월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 상산왕을 죽이고, 옷차림이 화려하단 이유로 사공유악을 죽인다. 408년에는 원한을 품고 있었던 막제와 그 가족을 몰살한다.
이게 그치지 않고, 탁발규는 후관을 만들어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정탐했다. 통치집단 내부의 극렬한 모순은 탁발규 자신이 극도의 모순에 휩싸이게 했고, 이러한 상황 속 극도의 긴장과 걱정도 그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쳤다.
아들에게 살해당해 생을 마감
탁발규의 정신분열증도 결국 아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탁발규는 젊었을 적에 모후의 여동생 가하씨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처로 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편이 있음을 이유로 태후가 반대하자, 탁발규는 몰래 사람을 보내 가하씨의 남편을 죽이고 가하씨를 자신의 비로 삼았다. 탁발규가 가하씨 사이에서 낳은 청하왕 탁발소는 어려서부터 포악하여 사람을 때리기 좋아하였다. 또한 남을 발가벗기고 돼지와 개를 죽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탁발규는 아들의 행실에 무척 화가 나 우물 속에 아들의 머리를 밀어 넣고 죽기 직전에 살려주기도 했다.
409년의 어느날, 탁발규는 뜬금없이 가하비에게 욕을 퍼붓고 그를 궁 안에 가두어 죽이려 하였다. 가하비는 아들에게 구조 요청을 하였고, 16세의 아들 탁발소는 천안전으로 쳐들어가 아버지를 단칼에 베어 죽였다. 탁발소는 39세를 일기로 허무하게 아들의 손에 세상을 떠났다.
또 다른 야사에는 이러한 기록도 있다. 황제는 용한 무당으로부터 예언을 듣게 되는데, “청하(淸河)”를 멸하고 “만인(萬人)”을 죽여야 화를 면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말을 듣고 탁발규는 청하 일대에 군사를 보내 사람들을 살육하고는, 만여 명을 죽였으니 화를 면했다고 여긴다. 나중에 탁발규에는 애첩이 한 명 생기는데 그의 이름이 바로 ‘만인’이었고, 그가 청하왕의 칭호를 가진 아들 탁발소과 사통한다. 이에 어머니가 죽음의 위기에 몰린 데다 자신의 행각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한 탁발소는 부왕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는 내용이다. 죽음 직전의 탁발소는 무녀가 했던 예언이 다시 한 번 떠오르지 않았을까.
출처 http://user.qzone.qq.com/622008594/blog/120930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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