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를 그저 신학자나 인문철학자로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칸트의 시대(1724~1804)에는 과학이 인문과 자연으로 정확히 나뉘기 전의 상태였습니다. 이는 50~60년대 한국에서도 물리,화학과가 문리대에 속해있던 것을 기억하시면 이해하기 편할 것입니다.
암튼 초창기의 칸트로서는 시공간과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는 자신의 철학적 기반이 너무 취약하다는 것을 느낀듯 합니다. 그가 학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최초의 논문제목이 <자연사와 천체이론>이었던 것만 봐도 그의 학문적 편력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칸트가 자신보다 1세기 정도 앞서태어난 위대한 자연철학자 뉴톤의 <자연과학의 수학적 원리>, 즉 일명 '프린키피아'로 더 유명한 이책을 감명깊게 읽고 느꼈을 '우주에 대한 합리적 설명의 단초'를 화두로 붙잡고 있었던 듯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한의학을 시작할 때에 한동석 선생님의 '우주변화의 원리'나 금오선생님의 '유심론적 사고'에서 작은 화두를 넘겨받는 경우와 비교하면 되겠지요.
그 후 칸트는 뉴톤니즘의 절대객관성을 떠나, 자신만의 사유세계를 가지기 시작합니다.
얼마후 도달한 세계는 동시대에 쏟아져나오는 과학적 성과물들의 홍수 속에서,
오늘날에야 그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하는 만델브로트의 '프랙탈적 사고'를 철학에 도입하기도 합니다.
프랙탈이라함은 '색즉시공 공즉시색', '일즉다이고 다즉일'이라는 불교의 화엄사상이나 한의학의 기반이된 도가적 사상과 그맥을 같이하는 사상입니다. '전체속에 일부가 있으나 그 일부에는 또한 전체를 내포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지요.
칸트가 자신의 주관적 사유를 시작한 단계까지 말씀드렸습니다.
아시다시피 칸트의 주된 화두는 주로 '신의 존재'에 관한 실존적 사유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신'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시공간의 원리'는 상당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칸트의 고뇌가 촉발된 대표적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스베덴보리의 꿈'이지요.
1760년 4월 25일, 네델란드의 한 저명인사의 미망인이 한 금 세공사에게 죽은 남편이 갚지않은 빚을 청구 받게 됩니다.
그 미망인은 자신의 남편이 그럴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고 분명 빚을 갚았을 것이라고 믿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죽은 영혼과 대화한다는 스베덴보리에게 찾아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녀를 도와주기로 약속하고 며칠 후 꿈에서 그녀의 남편과 대화한 내용을 들려줍니다.
그것은 그녀가 분명 완전히 비워진 것으로 알고 있는 장농한구석에 은밀한 칸막이가 ?대어져 있으며
그 칸막이를 뜯어내면 빚을 갚고 받았던 영수증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 과연 실제로 그러한 은밀한 칸막이가 있었고 이렇게 하여 찾아낸 그 영수증은 당시 유럽상류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않습니다.
'스베덴보리'라는 시령자 (영혼을 보는 사람이라는 뜻)는 본래 스톡홀름의 궁정신부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최고의 학부를 나와
스웨덴 왕립학술원 회원까지 얻은 저명한 과학자인데, 천문학에서 시작된 그의 과학적 관심이 결국에 '뇌'로 옮겨지면서,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고민하던 중에 영혼과 대화하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동양의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 동양에서도 기수련의 경지에 이르신 스님이나 도가수련자들이 특별한 초능력(투시능이나 천리안등)을 획득하는 것으로도 설명이 됩니다. 사실, 과학적인 견지에서도 낡은 뉴톤적 사고에서는 불가능한 이러한 일들이 현대의 스티븐 호킹의 세계에 들어가면,
현실의 시공적 차원을 뛰어넘는 현상들이 가능하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이를 두고 '벌레구멍이론(worm hole theory)'라 합니다.
암튼, 이 일로 저명한 과학자인 스베덴보리는 철저한 신지학자이며 '기독교 천국주의자'로 바뀌며 영혼의 세계를 전파하는 전도자가 됩니다. 실제로 그가 펴낸 책에는, 꿈에서 경험한 천국과 지옥을 묘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암튼, 이 일로 칸트는 과학이라는 합리론과 기독교적 유신론자들 사이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한 화두를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칸트가 깨달음의 일성으로 내 뱉은 말이 바로 '순수이성비판'입니다.
- 순수이성비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의 깨달아 아는 능력, 즉 오성(悟性)을 강조하며 시작합니다.
아이작 뉴톤의 <프린키피아>가 일으킨 센세이션에서 보듯이 그 당시 서양철학사조는 합리적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최대공약수를,
밖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 즉, '페노메논(phaenomenon)'에만 국한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순수이성'의 영역에 '페노메논(phaenomenon)'과 더불어, 인간의 오성(悟性)이 인식하는 영역인
'누메논(noumenon)'을 그의 형이상학적 담론(談論)체계에 끌어들임으로서 위에서 언급한 '스베덴보리의 꿈'을
단순히 속임수나 기만 또는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순수이성비판>에는 '우주론적 신(神) 증명', '자연신학적 신 증명', '존재론적 신 증명'을 출두시키고
인간의 순수한 이성을 통한 철저한 비판이 가해집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 순수이성의 영역에서 증명될 수 없다고 해서 또한 반박될 수 없다
"순수이성의 영역 속에서 신(神)의 실존에 대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신은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신은 없다'는 주장은 그것의 반대주장만큼이나 독단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은,
거기 누군가 이성의 순수사변을 통해 모든 것의 근원 근거로서의 최고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도 통하는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일부 양방의사들이 한의학을 '증명 불가능하다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마치 사기와 기만, 속임수인 것으로 몰아대는 태도'와는 매우 비교되는 합리적 사고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일부 양방의사들 중에는 그가 성취한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걸맞지 않을 만큼이나 천박스런 우주관(宇宙觀)을,
유독 한의학에 퍼부어 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외과위주로 발전한 서양의학이, 세브란스(severance)란 이름에서 보듯이 '자르고(sever)' 닦아주는 수준의 행위에 커다란 철학이 필요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암튼, 칸트의 최종결론은 결국 "순수이성의 영역에서 증명될 수 없다고 해서 또한 반박될 수 없다"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한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칸트는 그가 한때 열광했던 뉴톤적 '시공의 절대성'이라는 모순을 뛰어넘어,
인간의 오성(悟性)이 작용하는 상대적 시간과 상대적 공간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칸트 자신이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라 부를 만큼이나 혁명적인 것으로 서양철학 세계내외에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절대성의 철학에서 개발되는 서양의학의 치료제중에서 가장 부작용이 적다는 아스피린조차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한 위출혈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있음은 생명의 세계에 적용된 절대성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돌이켜 근세과학의 흐름을 살펴보면, 아인슈타인은 그의 <일반상대성원리>에서 중력이 시공간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하면서,
아파트 1층의 시계가 15층의 시계보다 늦게 간다는 과학적 사실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물론 두 시계가 다 기능적으로는 정확한 시계임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우주비행을 하고 온 지구인이 자신의 시계로는 1년이 지난 후에 돌아와 보니 자신의 아들이 자기보다도 더 많이 나이 먹어있더라는 아이러니를 읽어보신 적 있으시지요?!).
아마도 아인슈타인이나 그의 동시대 과학자들도 앞선 시대를 살다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읽을 수 있는 이러한 예지에
찬사를 보냈을 것입니다.
스티븐 호킹의 세계로 들어서면, 관점이 더욱 파격적입니다.
우주의 모든 점 하나 하나가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참으로 혁명적인 과학적 사실들이 입증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둥그런 공위의 모든 점이 자신을 중심으로 볼수 있는 것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우주의 차원은 시공간의 4차원이 아닌 5차원이상의 세계이므로 3차원의 구형은 그저 비유입니다.
이를 통해 태양이, 아니 온우주가 지구둘레를 돈다는 천동설은 다시 참이 될 수 있다는 과학적 사실의 증명입니다).
이는 우주생명체 하나하나가 그를 중심으로 우주를 구성해내고 우주를 해석하며 진화해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주 속에는 소우주가 있고 그 소우주는 전체우주를 닮아 있다.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象)한 것이요 발이 모난 것은 땅을 상(象)한 것이라. 하늘에 사시(四時)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四肢)가 있다. 하늘에는 오행(五行)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오장(五臟)이 있다. 하늘에는 육극(六極)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육부(六腑)가 있다"
<동의보감 신형편>.
- 맺음말
과학이 없이도 큰 어려움이 없이 살아가던 시절, 우리 선조들은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지구생명체가 엄청난 절명의 위기 (배금주의, 생태계를 위협할 정도의 과학공해, 동물의 멸종, 약물의 남용과 영양과잉) 에까지
가지 않고, 순자연(順自然)하며 조화로운 삶을 영위했던 것을 돌아보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비만이 가장 무서운 질병의 하나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부족에서 오는 병에 못지 않게 과잉에서 오는 병의 무서움을 일깨워 줍니다.
이는 영양물의 형성(形盛)을 추구하다보니 반대로 기쇠(氣衰)하게 되는 한의학의 체용(體用)이론을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과학이란 그저 우주를 보는 하나의 담론체계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일부 서양과학자나 서양의학자들이 마치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는 미신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세상을 보는 눈을 과학이라는 안경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유비추리(類比推理)'와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는 간단한 원리가 세상을 보는 더 투명한 안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20세기 최고의 대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조셉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철학>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출처 : http://blog.empas.com/dotodt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