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성찬론 (손)

성찬의 전례에서 왜? 신부님은 성혈에 성체를 넣으실까??

작성자혼인잔치|작성시간09.01.14|조회수425 목록 댓글 11

성찬의 전례에서 왜? 신부님은 성혈에 성체를 넣으실까??

agua01

답변채택률 65.4%

2008.04.13 02:14
 

+ 찬미 예수님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영혼을 추구하는 가톨릭신자입니다.

 

질문:왜? 신부님은 성혈에 성체를 쪼개어 넣으실까?? 궁굼해요 ㅎㅎ

답변: 성체 쪼개기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 성체조각을 성혈에 넣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
한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하시는 미사 성제를 일반이 따라하면 독성죄의 큰 대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교회법으로 그것에 대해 엄격하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만큼 천주교회는 성사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함부로 따라 하지 마시길 권고합니다.

예수님은 조롱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제1379조
제1378조에 언급된 경우 외에, 성사의 집전을 가장하는 자는 정당한 형벌로 처벌되어야 한다.

제1381조

① 교회 직무를 도용하는 자는 누구든지 정당한 형벌로 처벌되어야 한다. ②임무의 박탈이나 종지 이후에 그것의 불법적 보유는 도용과 동등시된다.

 

 

 

 

출처 : 본인 교회법에서 발췌

신고

의견 1

re: 성찬의 전례에서 왜? 신부님은 성혈에 성체를 넣으실까??

2149404

답변채택률 50.7%

2008.04.13 09:12

독성 죄를 논하기 보다 기요사이는 매년 성 만찬때

온가족이 모여 가족 만찬 즉 파스카의

신비를 기억 하라고 권장 하고 있기도 합니다

 

혹시 님의 궁금증은 아래 글을 참고 하시면 좀 풀리실것 같기도 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성 바오로 (딸) 서원, 교보문고)에서 발췌

 

성체성사(聖體聖事)

할머니 성체성사를 말씀드리려다보니 “성사”가 설명되어야하고 또 성사로서의 “교회”가 이야기되어야 하며 교회의 역사와 소위 종교개혁까지 설명하다가 매우 중요한 성체성사는 지금에야 설명됩니다.  

 

성체성사란 우리주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가 모든 공생활을 마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그러니까 당신의 몸을 인류를 위한 단 한번의 희생 제물로 성부께 바치시기 전날 밤 앞으로 이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즉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보이는 그분의 몸(聖體)을 우리에게 주시는 표징(表徵)으로 주님께서 직접세우신 성사이며 우리 교회의 핵심성사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실 때는 하나의 동굴 즉 베들레헴 마굿간이 그분을 모셔들였지만 그분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오늘날에는 각 교회의 제단의 돌이 그분을 모셔들입니다. 그분이 탄생하실 때는 조그마한 아기의 모습으로 그분의 신성(神性)을 감추셨으나 이제 부활하신 그분께서는 보내주신 성령의 힘으로 사제로부터 축성되어 거룩하게 변화된 그분의 몸 즉 성체(聖體)안에서 그분의 신성을 감추시면서 그 안에 실제로 계십(現存)니다.

 

그분은 옛날 아브라함에게 직접 나타나시지 않고 환상으로 나타나시고(창세 15,1) 모세에게는 가시덤불의 타지 않는 불 속에 나타나셨듯이(출애 3,3-5) 그분이 부활승천 하신 후에는 전능하신 힘으로 밀떡 속에 감추시어 우리들에게 직접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 힘은 성령이십니다. 성경의 네 복음서(四福音書)를 읽어보면 서로 보궐(補闕)기록하였기 때문에 이 복음서에는 자세히 기록된 것이 저 복음서에는 아주 간단히 기록되었거나 아주 빠져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체성사에 관한 기록만큼은 네 복음사가가 모두 한결같이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성 바오로 사도는 더 풍부하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체성사(聖體聖事)가 우리의 절대 신앙 곧 믿음을 요구하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훗날 인간적인 척도로 하느님의 말씀을 감히 비판하고 반대하는 자들의 출현을 예견하였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우리주님께서 이 성체성사를 직접 세우신 말씀과 성서적 근거는 바로 이러합니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마태 26,28; 마르 14,22-23; 루가 22,17-19; 요한 13,26-27; Ⅰ고린 11,25-26)라는 말씀과 루가복음서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 Ⅰ고린 11,25-26)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계심(現存)을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증명해 보겠습니다.

 

- 첫째: 성체에 관한 주님의 약속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신 그 이튿날(요한 6,22)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당신의 몸에 관하여 예언하셨습니다.

 

이는 장차 그 성사에는 오천명 만이 아니라 수천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여해야 할 것이며 또 그 예(禮)는 언제 어디서든지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되어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함에서였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내 살이다”(요한 6,51)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요한 6,55)라고 하신 말씀은 비유이거나 또는 어떤 상징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문자 그대로 그 빵이 곧 예수님의 몸이시라는 것입니다.

 

성서 자유해석을 하는 사람을 위해 미리 말씀 드려야겠군요. 통상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시고는 반드시 다른 말씀으로 더 쉽게 풀이하시어 그들(제자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당신의 성체에 관한 말씀만큼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라는 유다인들에게는 오히려 강렬하신 어조로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한 6,53)라고 반복해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라며 여러 제자들이 떠나자 당신 친히 택하신 사도들에게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떠나가겠느냐?”(요한 6,66-67)고 오히려 반문하셨습니다.

 

비유라면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으시지요.

 

- 둘째: 예수님께서 직접 성체성사를 세우심에 관하여

할머니,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직접 세우심에 관하여 마태오, 마르꼬, 루가 등 공관 복음에 거의 일치된 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유다교의 과월절 첫날 양을 잡는 날 저녁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저녁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이 친히 세우셨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는 뒤에 말씀드릴 미사성제에서 더욱 자세히 설명을 올리겠습니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마태 26,26-28; 마르 14,12-26)라고 말씀하셨고 또 요한복음 6, 48-56에는 더욱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루가복음 22,19절에는 위의 모든 말씀과 함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성체성사에 관하여 개혁자 루터는 그대로 믿었으나(공존설)“츠빙글리(Zwingli : 파문된 신부)”같은 사람은 스위스 취리히에 그의 교회를 세우면서 “이는 내 몸을「뜻한다」”라고 해석하여 상징(비유)설을 주장하였고, “칼빈(Calvin)”은 “주 예수께서 몸으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고 영(靈)으로 임하신다”라고 엉뚱한 말을 하였으며 “칼슈타트”같은 사람은 아예 성체성사에 예수님께서 실재(實在)하심을 부정하였습니다. 이 같은 사람들은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24,35)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면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다행이 요사이 일부 개신교 교파 중에는 주일 성수때 주님의 성찬예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데 관하여는 부정적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오직 믿음 믿음, 성경 성경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네 복음서에 또 고린토 전서에도 뚜렷이 하신 말씀을 부인하고 있으니 도대체 그들은 어떤 성경과 어떤 복음을 믿는지 또 그 믿음은 과연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는 분명 주님의 계시진리를 어렵다고 배척하는 결과입니다. 또 전능하신 하느님의 계시를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 재보려는 오만입니다. 실지 행동으로는 믿지 않으면서도 입으로만 이를 믿는다고 한다면 이는 거짓입니다. 과연 가난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강보에 쌓여 울던 아기가 하느님이심을 우리는 모두 믿고 있지 않습니까? 이성을 초월하는 존재를 부정하는 소위 합리주의자들이 성체성사를 배척함은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가지만 성서의 진리를 믿고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을 외쳐온 그리스도의 성도가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말씀을 부인하거나 이 진리를 배척하도록 달리 해석하고 있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처음에 마르틴루터도 이것을 믿었습니다.

 

- 셋째: 성체를 받아 모심에 관하여(영성체에 관한 것)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명령하여 이 예절을 세상 끝날 까지 계속 실행하라 하셨습니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6)

 

주님의 이 명령을 사도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켰는지 살펴보면 성체교리에 대한 사도전래의 진정한 신앙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사도들이 다만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여 오늘날 개신교에서처럼 신자들에게 나누어주기만 했는지 아니면 그들이 문자 그대로 믿는 바대로 그 빵과 포도주를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축성하였는가를 보면 더욱 확실해 질 것입니다. 성체성사에 관한 마태오복음이 쓰여진지 약 18년 뒤에 성 바오로 사도의 다음과 같은 편지가 고린토 신자들에게 전달되어 낭독되고 이 말씀이 신약성서에 수록되었습니다.

 

우리(사제)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Ⅰ고린 10,16-17). 라고 하셨고 또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 그러니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Ⅰ고린 11,26-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도 그러셨겠지만 저도 이 성경구절을 수없이 읽었는데도 제가 개신교에 있을 때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만일 이 ‘빵’과 ‘포도주’가 다만 보통 ‘빵’과 ‘포도주’라면 그것을 좀 먹는다해서 어찌 ‘독성죄’나 ‘중죄’가 되겠습니까? 가톨릭 교회에서는 주님의 성체를 영하기 전 대죄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고해성사”를 받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합니다”(Ⅰ고린 11,28) 라는 성서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옛 교부들도 성체성사에 관하여는 사도 성 바오로와 일치하는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 1세기, 베드로사도의 제자 성 이냐시오는 “그노시스트”라는 이단파를 가리켜 “그들은 성체성사가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임을 신앙하고 고백하지 않음으로 성체성사를 폐기하였다” 라고 하였습니다.

 

- 2세기, 순교자 유스티노는 당시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에게 호교서를 올려 “우리는 이것을 보통 빵과 포도주로 받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살이됨을 알고 받아 모십니다. 우리는 성체가 예수의 참 몸이요 참 피로 알고 받아 모십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 3세기의 오리제네스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빠스카 예를 행하러 가면(미사) 그분은 당신 몸인 축성한 빵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요 또 당신 피를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 4세기의 성 치릴로는 예비자들을 가르칠 때 성체 교리에 관하여 “‘예수께서 친히’‘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라고 하신 이상 누가 감히 의심할 수 있으며 아니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가나안 혼인 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은 믿고, 포도주를 당신 피가 되게 하신 것은 어찌 믿지 못하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5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노(성 어거스틴, 성녀 모니카의 아들)는 새로 영세한 교우들에게 “여러분에게 성체교리에 대하여 강론하기로 약속하였으나 그 성체는 여러분이 지금 보기도 하고 또 간밤에 받아 모시기까지 한 것으로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합니다. 여러분이 본 제대 위의 빵은 한번 하느님의 말씀으로 축성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고 저 잔의 포도주는 한번 하느님의 말씀으로 축성하여 그리스도의 피가 된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솔직히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는 이 지구상의 그리스도교회 치고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심을 믿고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16세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시작된 일부 개신교 밖에는 없음을 분명 아셔야 합니다.

 

약 1000여년전 이미 갈라져 나간 그리스 정교회와 오늘날의 영국 감독교회(성공회) 그리고 곱트교회와 시리안 교회, 칼데안 교회와 아르메니안 교회등 가톨릭 교회와는 아무런 연락이 없는 동방교파들도 모두 성체교리를 전통적으로 확신하여 오는 것을 보아도 이 오묘한 교리가 사도 전래의 진정한 신앙임이 분명한데도 일부 교회에서는 아직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제가 이 정도인데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한 주님께서야 오죽이나 답답하시겠습니다?

 

할머니, 주님께서도 이렇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있지 않는 다른 양들도 있다”(요한 10,16) 또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요한 10,3)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성서에 몇 차례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라고 분명히 하신 음성을 그들은 아직은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믿음”이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다만 주님께서 장차 “그 양들도 데려올 때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요한 10,16) 라는 말씀이 머지않아 이루어지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남들은 하느님도 많고 주님도 많아서 소위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다고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 한분이 계실 뿐”(Ⅰ고린 8,5) 이기 때문에 그들 형제들과는 속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고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Ⅰ고린 10,17)

 

할머니, 오늘날 세상은 예수님께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것은 세상이 교만해서 보잘 것 없는 빵의 형상으로 나타나시는 우주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교만해서 영적인 눈이 멀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무시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특히 소위 개혁적인 신학을 한다는 사람들과 주님을 입으로만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장 무시당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체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를 바라볼 때 하늘과 땅의 모든 사랑을 결합시킨 우리 각자에 대한 예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오직 믿음으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그리고 성체 안에서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신데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미사성제

할머니! 위에서 말씀드린 성체성사는 잔치와 제사와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세 가지 내용을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잔칫상은 기쁨과 만남의 장소입니다. 잔치에 초대되면 누구나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올리며 동시에 축복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사입니다.

 

미사에는 크게 나누어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있으며 이 두 부분은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단 하나의 하느님 경배 행위를 이룹니다. 왜냐하면 미사에서 주님의 몸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의 식탁이 차려지며 이 식탁에서부터 가르침과 음식이 신자들에게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열심히 아니 너무도 열심하게 예배 특히 설교 시간에 참석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역시 매주일과 매 수요일(3일 예배), 매 금요일 예배에 빠지지 않았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가톨릭 교회의 미사성제 중 말씀의 전례에 해당되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미사 예절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거기에는 제관과 제물 즉 예수님의 몸과 피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또 식후 잔을 드시고 .....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Ⅰ고린 11,23-24) 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과 그분의 복음은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한결 같습니다.(히브 13,8) 따라서 미사는 그리스도의 말씀(루가 22,19; Ⅰ고린 11,24-25) 에 따라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이며 사제의 축복으로 빵과 포도주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는 교회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의 극치이며 완전한 찬미와 감사와 속죄 은혜를 구하는 제사로서 그리스도 신자 생활의 중심이며 우리 천주교회에서는 사제가 없는 곳에서는 공소라고 하는 곳에서 공소 회장 또는 수도자 또는 평신도에 의해 개신교에서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말씀의 전례(공소 예절)만 행하여집니다.

 

왜냐하면 성찬례를 거행하는 사제는 항상 성부 곁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기 때문에(히브 7,25; 9,24) 사제가 없이는 성찬례가 행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사 예식은 주님의 명에 따라 거행되어지는 예절이기에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비록 언어와 피부색은 달라도 전 세계 10억 5천만 가톨릭 신자들은 꼭 같은 예절과 꼭 같은 절차에 의해 바쳐지고 있습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하나의 교회는 2000년 동안 한결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까지도 그 어떤 누구에게서도 직접 “이 예(미사)는 이제 부터는 행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 빵과 포도주는 내 몸도 아니고 내 피도 아니며 오로지 나의 몸과 피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니 그저 1년에 한번 기념만 해라” 라고 쓰여졌다는 성경을 보지 못했으며 또 성령께서 누구에게든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개신교에 다닐 때 목회자들이 히브리서 9장 24-28절을 인용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인간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 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라는 말을 곡해하여 미사는 필요 없고...... 미사 때마다 예수님은 매번 죽어야 하나?..... 운운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약의 사제직의 예배와 예절로 추구하여서는 영생을 얻지 못한 바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는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라고 하시면서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루가 22,19) 고 하셨고 또한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사제권을 주시어 세상 끝 날까지 이 제사를 봉헌하도록 하셨습니다.

 

원래「인류가 있는 곳에는 제단이 있었고 제사는 하느님 공경을 위한 최대의 종교의식으로서 하느님의 권능을 승복한다는 뜻을 표현하는 공식 경신(敬神)행위 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바리아 산에서 육체적으로 죽으신 데 비해 최후 만찬 때는 빵과 포도주 속에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서 신비적인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이 최후 만찬과 십자가상의 죽음으로서의 봉헌이 우리 신앙 안에 들어와 미사 성제를 세우신 것입니다. 즉, 당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제사를 지속하도록 하셨으며 당신 권능으로 미사 성제가 당신 제사의 재현이 된다는 확약을 주셨습니다. 즉,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피와 물이 나와 성체와 성혈을 이룸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비가 미사 성제 안에 재현되고 이것은 미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셨습니다. 이미 최후 만찬 때 당신은 미리 제자들에게 십자가상의 제사의 제물을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미사도 희생이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제헌하신 것도 희생이므로 미사는 곧 희생 제이면서 기념제이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로 하여금 당신 수난에 일치하여 공동으로 참여케 하는 것입니다. 

이 미사 성제의 목적은 십자가상의 제사와 동일한 바 흠숭, 감사, 보속, 청원의 구원 제사입니다.

 


출처 : 김 안토니오 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성 바오로 (딸) 서원,교보문고)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혼인잔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4.21 (마태12:32) 인자는 말씀의 문자의를 상징하고 성령은 신령진리를 상징 합니다. 인자 즉 사람의 아들로서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고난받고 죽으셨습니다.(선지자들도 말씀의 문자의를 표징) 이는 유대인들이 말씀의 문자의를 그렇게 평소에 대우하였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이 죄는 용서를 받을수가 있습니다. 회개하면, 그러나 성령 즉 신령진리 자체에 대한 죄는 용서받을수가 없습니다. 신령진리는 성경말씀의 문자의에도 있고 그 문자의안에 모든 것을 지칭 합니다. 문자의에 있다는 것은 참된 교리를 뜻 합니다. 이 또한 신령진리 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온 참된 하나님 아들 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문자
  • 작성자혼인잔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4.21 의의 교리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두고 하나님이면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한분 하나님 두 위격을 뜻 합니다. 하나님 아들과 사람의 아들 이 양자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발출된 진리이기 때문에 아들로 총칭 됩니다. 아버지는 하나님, 아들은 고로 사람, 주님은 하나님이면서 사람 입니다. 즉 하나님자체이자 사람자체 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말하지 않고 사람 자체, 우리를 있게한 사람의 원형/원판으로서 사람이라 칭 합니다. 즉 이 사람도 하나님 입니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들은 보이는 하나님을, 비유하면 영혼과 육체와 같습니다. 한분 하나님 입
  • 작성자혼인잔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4.21 니다. 인자와 성령이 대비된다면, 인자는 문자의를 성령인 속뜻이 됩니다. 속뜻 즉 신령진리를 뜻 합니다. 이것을 부인하고 모욕하면 용서받을수가 없다는 것인데, 설명하면, 하나님 아들은 신령진리, 사람의 아들은 교리 또는 말씀의 문자의를 뜻하고, 후자는 괜찮으나 전자는 안된다고 한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것이라는 것, 그런데 요셉에게 왔다던가 로마 군병의 사생아라던가 또는 그저 사람의 아들이라던가 하면 이것이 성령훼방죄라는 것 입니다. 예수님이 또 신약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것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을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 교회, 기적이 하나님으로
  • 작성자혼인잔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4.21 부터 온것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그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질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이라고 믿어야지만 사람은 구원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인자는, 성경말씀자체 또는 말씀으로부터 온 교리를 뜻하여 문자의를 말하고 그 문자의로부터 온 것이다를 뜻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인간적인면을) 부인하는 것은 용서받을수가 있다는 것이나 속에 속한 것 즉 신성에 속한 것을 부인하는 것은 용서받을수 없다는 것이 성령훼방죄 입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서적에게 이도 적용 됩니다. 인간적인 측면에 속한 것은 부인할수 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을 부인하면 용서받을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 된다는 것이니, 스베덴보리 신학서적
  • 작성자혼인잔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4.21 에 대한 접근은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말하다보니 길어졌습니다. 근래에 천상의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이라는 책 때문에 스베덴보리 신학서적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그분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해서, 답변이 길어졌습니다. 결론은 성경말씀이든 스베덴보리 신학서적이든 사람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 입니다. 이는 분명히 사람에게 기회이나 그렇지 않은 극소수의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말씀 드린 것 입니다.
댓글 전체보기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
“가톨릭의 명품성(名品性)이 성장 가져와”/<월간중앙>2월호, 한국 가톨릭 인구 증가요소 분석
  2007/02/27 01:05, 조회 : 1,036

지난 10년 간 개신교 인구가 14만4천명 감소한 반면 가톨릭 인구는 74.4%나 증가했다는 통계청 발표(2006년 5월)는 한국 종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개신교 각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공개포럼을 통해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이유’에 대해 분석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가톨릭도 통계청의 발표를 뜻밖의 일로 받아들였고, 한국천주교협의회에서는 실제 등록신자 호적조사를 시행하기도 했다. 지난해 6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산하 한국사목연구소에서 발표한 ‘정부의 통계조사 결과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설명문’에서는 “최근 각종 언론과 여론조사기관에서는 한국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일반 국민의 긍정적 인식이 유효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며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증진에서 교회의 역할, 사회봉사와 사회복지분야에서의 헌신, 타 종교에 대한 개방성과 관용적 자세, 성직자들에 대한 신뢰도 등에서 신뢰할 만한 종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고 가톨릭 인구의 증가 요인을 분석했다.

가톨릭 인구의 증가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월간중앙> 2월호는 ‘한국 가톨릭이 부활하고 있다’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통해 가톨릭 인구의 증가 원인을 설명했다.

기사에서는 우선 가톨릭 집회의 엄숙함과 고요함 등 종교적 진지함을 주목했다.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K씨의 사례를 들어 “개신교가 열정적인 표현의 종교인 반면 가톨릭은 고요 속에서 자기 신앙을 돌아보는 묵상의 종교”라고 밝혔다. 또 미사 때 빵을 떼서 나눠먹는 성체(聖體)의식과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고해(告解)성사도 신도들로 하여금 종교인으로서의 감흥을 느끼게 해준다고 지적했다.

성직자들의 청렴성도 가톨릭 인구의 증가 원인으로 주목됐다. 신부와 수녀 등 가톨릭 성직자들은 주택을 소유하거나 개인 재산을 모으는 일이 없으며,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각 교구에서 곧바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헌금도 신부가 직접 손대지 못하고 신도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성직자의 생활비와 활동비도 규정에 따라 지급된다. 이 같은 규칙들을 근거로 한 청렴성이 신자들에게는 참다운 ‘종교다움’으로 느껴진다는 설명이다.

청렴성과 관련해 인천가톨릭대 오경환 명예교수는 “중요한 것은 가톨릭이 다른 종교보다 더 종교답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다른 종교에 비해 가톨릭이 일반인의 눈에는 좀 더 종교답게 비칠 구석이 있지 않을까 싶다”며 “그런 종교다움이 청렴성, 특히 성직자들의 청렴성에서 나온다고 본다”고 밝혔다.

헌금에 대한 철저한 비밀 유지도 또 다른 매력요인이다. 오 교수에 따르면 가톨릭에서는 어떤 경우든 헌금은 자발적으로 하게하며, 누가 얼마를 헌금했는지는 절대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헌금액을 공개하거나 헌금경쟁을 유발하는 어떤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전통 때문이다.

그 외 다른 종교에 대한 열린 태도도 가톨릭의 매력요인으로 주목되었다. 가톨릭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종교라 할찌라도 제각기 옳고 성스러운 것이 있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공식 선언했을 정도로 타 종교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전통적인 제례(祭禮)문제에 대해 1939년 이후 교황이 이에 대해 관대한 태도와 조치를 취했고, 한국 주교단에서도 1958년 이후 금지하는 항목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전통 제례를 용인해 왔다.

이 같은 가톨릭의 강점들에 대해 종교사회학자인 정재영 교수(실천신학대학원)은 ‘명품(名品)종교’란 이름으로 해석을 시도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각박해지는 세상과 인간관계 속에서 종교다운 종교, 즉 명품종교를 통해 마음을 위로받고 영혼의 안식처로 삼는데, 그런 차원에서 오랫동안 종교적 전통과 원칙을 지켜오는 가톨릭이 명품종교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명품성’ 외에 성직자들이 신도들에게 헌금이나 선교, 봉사활동 등에 자율성을 주고,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 등을 들어 ‘실용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결론적으로 “한마디로 명품은 명품이되 실용성과 접근성까지 가진 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며 때문에 “당연히 종교에서 어떤 영혼의 만족을 구하려는 현대인의 취향에 가톨릭이 잘 맞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조준영 eunbi@newspower.co.kr
ⓒ 2003-2006 뉴스파워

 

 

 

한국 가톨릭이 부활하고 있다 [조인스] 월간중앙에서 옮김 - 신앙때문에 필요한 자료
  글쓴이 : 농 부     날짜 : 07-02-19 20:36     조회 : 1284    
한국 가톨릭이 부활하고 있다 [조인스]
[심층진단] 조용한 대약진, 가톨릭의 힘 ①
‘맑은 영혼’에의 목마름인가?



“그들의 헌신에 감동했어요”



일산의 주부 K(43)씨는 새내기 가톨릭 신자다. 2006년 초 입교했다. 시아버지의 죽음이 계기였다.

“상을 당하면 누구나 경황이 없잖아요. 마침 시어머니가 가톨릭 신자세요. 성당 연령회(煉靈會)라고, 장례를 도맡아 치러주는 분들이 있다면서 새벽 3시쯤 연락을 했는데, 4시가 안 돼 그분들이 찾아왔어요. 병원에서 성당 영안실로 운구해 빈소를 차리고는 발인까지, 정말 모든 일을 다 해 줬습니다.”

그 과정에서 K씨 가족은 연령회원들의 성심(誠心)과 신심(信心)에 감동했다.

“발인 전까지 이틀 밤새 연령회원들이 빈소를 지키면서 기도해 주시는 거예요. 더욱이 병사하신 시아버님 시신을, 그 분들 중에는 제 나이 또래 젊은 여자분도 있었는데 자기 가족처럼 염해 주는 거예요. 맨손으로 거리낌없이 시신을 정성스럽게 닦는 것을 보고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고 놀랐어요.”

더욱이 장례비용 또한 염가의 실비(實費)만 들었다. 수고를 아끼지 않은 연령회원들은 그 어떤 사례도 받지 않았다. K씨 가족이 놀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가톨릭도 기독교인데 우리 전통 방식의 장례를 존중해 주는 거예요. 개신교보다 가톨릭이 더 엄격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연령회의 헌신적 도움에 감동한 K씨는 물론 남편과 두 아이 등 온 가족은 두말없이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K씨는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왕 종교를 가질 거라면 가톨릭을 택하라고 권유한다”고 말한다.

“사람들과 마주치고 어울리고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아파트 반상회조차 나가기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시아버님 일을 겪고 나서 처음 성당 미사에 갔는데 제가 생각했던 그런 분위기, 사람들이 모여 북적대고 하는 분위기가 아닌 거예요.”

“정말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 같았다”고 K씨는 기억했다.

“뭐랄까, 묵직한 바윗돌 같은 것이 제 마음을 꾹 눌러 진정시켜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미사 도중 몇 차례나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것이 좀 우습게 생각됐지만 웅장한 오르간 소리, 다 같이 기도문을 읽는 소리, 신부님의 말씀 등이 이어지는데, 여기는 세상과는 동떨어져 있구나, 내가 지금 뭔지는 몰라도 거룩한 곳에 와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성스럽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제가 말로 표현은 잘 못하지만, 정말 성스러웠어요.”

그러면서 K씨는 “다른 사람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덧붙였다.

“누가 미사에 나오고 안 나오고 하는 것에도 신경 쓰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각자의 신앙과 프라이버시가 잘 지켜지는 조용한 분위기여서 너무 좋았어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에서처럼 다른 사람과 비교나 경쟁할 일도 없고 눈치볼 일도 없다는 거, 그 점이 정말 좋아요. 오래된 신자분들 중에서는 그것이 가톨릭의 문제라고 하는 분도 있던데,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야말로 가톨릭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미사에 참석한다고 해서 곧바로 성당의 등록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K씨는 정식 등록신자가 되기 위해 6개월 넘는 교리공부 기간을 거쳐 지난해 가을에야 교적(敎籍)에 이름을 올렸다.

“남편은 한 번에 교리문답을 통과했는데 저는 창피하게도 한 번 떨어지고 재수해서 붙었어요. 그 과정도 지내고 보니 참 좋았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정식 등록신자가 됐다는 것이 뭔가 뿌듯하다, 내가 정말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 성당에 소속되는구나 하는 소속감이 생기는 거예요.”

“거룩하고 성스러워 좋아요”

K씨가 성당에 나가면서 특별히 과외로 하는 활동은 없다. 그는 “여전히 모르는 게 많고 배우는 단계여서 선뜻 어떤 다른 일을 맡아 하기가 겁난다”면서 “그러나 최소한 일요일 하루만은 성당에서 생활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적어도 성당 안에 들어서면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왠지 깨끗한 기분이 되는 것 같거든요. 신부님이나 수녀님을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껴요. 그분들은 항상 편안한 말투에 어떤 경우든 흥분하거나 큰 목소리를 내는 법이 없으세요. 모든 사람을 애정이 담긴 진지한 눈빛으로 공평하게 바라보는 것 같아 좋아요. 말 그대로 성직자 같아요.”

영화에서만 혹은 남들이 하는 것만 보던 고해성사를 직접 할 때는 가슴이 떨렸다고 한다.

“미사 때 빵을 떼어 나눠 먹는 성체(聖體)의식이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고해(告解)성사도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죠. 내가 정말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계기가 됐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서 한 번, 이웃과 언짢은 일로 다투고 나서 또 한 번 고해성사를 했거든요. 제 마음속 죄를 밖으로 꺼내 드러내는 것인데도, 그렇게 하고 나니 오히려 형언할 수 없는 뿌듯함이 드는 거예요. 놀라울 만큼 마음도 차분해지고요.”

“딱 잘라 가톨릭의 어떤 점이 좋다고 구체적으로 열거할 수는 없지만 열정보다 냉정, 마음속에 어떤 부담감도 갖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가톨릭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며 K씨는 정말 편안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종교라는 것, 신앙이라는 것이 결국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통해 영혼의 안정을 구하는 것 아니겠어요? 헌금도, 선교도, 봉사활동도 내 형편대로, 내 마음 내키는 만큼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이잖아요? 세상살이에 찌들고 마음 고생이 심한 분들에게 이왕이면 가톨릭을, 성당에 한번 다녀 보라고 권유하고 싶어요.”

K씨는 곧 남양주시로 집을 옮긴다. 이사하면 그쪽 지역 성당에 나가게 된다. 교적(敎籍)도 일산에서 전출(轉出)돼 남양주성당으로 전입(轉入)된다.

자기를 돌아보는 ‘默想의 종교’

“아, 내가 이제야 정말 거듭났구나, 저는 지금 그렇 게 느끼고 있습니다.”

서울 잠원동성당에서 만난 P(여·45)씨는 자리에 앉으면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핸드백에서 두 번 접은 A4 용지를 꺼냈다. 1, 2, 3…. 번호를 매긴 메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P씨는 먼저 자기의 신앙 이력부터 들려줬다.

 
▶가톨릭 신자들은 가톨릭을 가리켜 자기를 성찰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은 주요한 신앙행위다.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한 신자.
 
 
“친정 어머니가 개신교 권사이고,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랐고, 일찍부터 피아노를 배워 중·고교 시절을 거쳐 대학에 다닐 때까지 교회 피아노 반주를 맡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확신이 없어요. 내 신앙이 부족한가, 그렇게만 생각했죠.”

그러다 가톨릭 신자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서로 종교를 인정했고, 특히 남편이 가톨릭 신자이기는 해도 흔히 말하는 ‘나이롱(가톨릭에서는 ‘냉담자’라고 일컫는다)’이어서, 가정 내 종교갈등은 없었다. 그렇기는 해도 이따금 남편과 함께 성당 행사, 나아가 주일미사에도 참석하게 됐다.

“같은 기독교인데도 다가오는 분위기가 달랐어요.”

미사에 몇 번 참석한 뒤 그는 개종을 결심했다. 무엇이 그를 결단하게 했을까? 그는 메모 내용을 짚어가며 이야기했다.

“제가 ‘묵상(默想)’이라는 말을 자꾸 쓸 텐데, 바로 거기서 가톨릭의 진수를 느꼈다고 보면 됩니다. 처음 미사에 참석했을 때 피아노가 아닌 오르간 소리를 듣는데 가슴에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인간 내면에 새로운 힘을 주는 것 같은 울림이 전해지는 거예요. 세상의 그 어떤 악기도 따라갈 수 없는 전율을 일으키는 소리랄까, 그런 거였죠. 피아노와 달리 오르간은 그야말로 제 속으로 파고드는 깊이, 심오함이 있더군요. 저는 개신교가 열정적인 표현의 종교인 반면 가톨릭은 고요 속에서 자기 신앙을 돌아보는 묵상의 종교라고 생각해요. 교회에서는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부흥회 같은 때는 큰소리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거든요. 반면 가톨릭은 상대적으로 조용합니다. 차분히 가라앉아 있어요. 교회의 부흥회나 수양회처럼 열정이 가득한 모임과 달리 ‘피정(避靜)’이 있죠. 고요함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이에요. 그런 차이가 있어요.”

성당의 엄숙함과 고요함, 미사 분위기에서도 종교적 진지함을 느꼈다고 한다.

“말을 잘 못하는 저는 예배 때나 행사 때 공개적으로 기도하는 일이 왠지 거북했어요. 뭔가 말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야 하고, 남들 앞에서 ‘막힘 없이 기도를 줄줄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거든요.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는 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하나님 쪽이 아니라 사람들을 의식하는 어색함도 느꼈고요.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상황에 따른 기도와 기도문이 대개 정해져 있어요. 기도하기보다 기도문을 읽는다는 표현이 맞겠죠. 수천, 수백 년 동안 변함없이 내려온 기도문이랍니다. 그것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정말 하느님에게 기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고,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가족도 재산도 없이 묵묵히 성직에 봉사하는 수도자들의 모습도 P씨는 보기 좋았다고 한다.

“사람 속은 알 수 없지만, 일단 신부님이나 수녀님들 생활하시는 모습은 세상의 인간적인 욕심을 다 버린 것같이 성스러운 모습이에요. 자기 것을 쌓아 놓는 일도, 쌓아 놓을 필요도 없어 보여요. 2년, 4년 하는 식으로 임지(任地)가 바뀌기 때문에 무리하게 어떤 업적을 쌓을 욕심도 없어 보이고요. 그런 가운데 자신이 부여받은 일을 성실하게, 특히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해 나가는 모습에서 ‘아, 저분들은 확실히 일반인과 뭔가 다르구나. 종교인은 바로 저런 모습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된 지 2년, P씨는 “충만한 기쁨 속에 성당에서의 각종 활동과 봉사활동에도 열정적으로 나선다”고 말했다.

無宗敎 47%, 종교의 블루오션 한국

종교인들 사이에서 한국은 두 가지 종교적 특수성을 띠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하나는 세계 200여 국가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비신앙인이 많다는 점이다.

2005년 통계청 센서스 결과를 보면 전체 인구 4,800만 명 가운데 절반을 좀 넘는 53%가 종교 혹은 신앙을 갖고 있고, 47%는 그렇지 않다. 가톨릭이 지배하는 유럽과 남미, 개신교가 지배하는 미국, 이슬람이 지배하는 중동, 가톨릭과 이슬람이 혼재하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주요 종교, 그 나라 국민의 절대다수가 신앙하는 종교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지배적 종교가 없다.

다른 하나는, 그런 가운데 역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세계 거대종교로 일컬어지는 개신교와 가톨릭, 불교가 공존(共存)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평화 속의 공존, 곧 정치적 압박이나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화롭게 정립(鼎立)하면서 (선의의) 교세 확장 경쟁을 벌인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서 그렇지, 세계에서 이 같은 종교적 무풍지대 혹은 거꾸로 종교의 개척 여지가 많은 블루오션도 드물다.

이런 두 가지 이유로 한국에서의 특정 종교의 부침(浮沈)은 곧 그 종교와 현대인의 관계를 가늠해 볼 중요한 척도가 된다. 오늘, 메마른 현실에 지치고 각박한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이 그 마음의 안식처, 영혼의 쉼터로 삼고 싶어 하는 종교는 과연 어떤 것인가? 그 질문의 해답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 답은 무엇인가?

아무도 생각 못한 가톨릭의 약진

앞의 K씨, P씨의 사례는 이미 그 답을 던져주고 있다. 바로 가톨릭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서 더욱 조용히 가톨릭의 지평이 확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마른 땅으로 빗물이 스며들 듯 그 신자는 줄곧 늘어났고 교세는 다른 종교보다 훨씬 빠르고 넓게 확장됐다.

앞의 개인적 경험과 사례를 넘어 공식적인 큰 통계자료가 제시됐다. 그것은 그동안 많은 사람이 다른 종교보다 좀더 가톨릭을 받아들였거나 혹은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는,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던 현실을 드러나게 했다. 2006년 5월 정부(통계청)가 발표한 주택-인구총조사 결과다.

이 조사에서 가톨릭 신자는 10년 전에 비해 74.4% 증가한 514만6,000명으로 응답됐고, 불교 신자는 3.9% 늘어난 1,072만6,000명이었다. 반면 개신교는 10년 전보다 오히려 1.6% 줄어든 861만6,000명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통계 결과는 개신교 측이나 가톨릭 측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의외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난 20년간의 신자 증가율에서도 의미 있는 수치들이 도출됐다. 가톨릭 신자는 20년 전보다 175.9%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불교는 33.1%, 개신교는 32.3%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1,000만 성도를 넘어섰다’는 얘기가 나오던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의 선교 방식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그 행태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덜 적극적인 것으로 인식돼 왔다. 그럼에도 오히려 가톨릭 신자가 20년 전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나 그 증가율에서 다른 종교를 앞지르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통계청, 2005년 종교지도).

이 같은 통계 발표는 우리 종교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특히 가톨릭은 가톨릭대로, 개신교는 개신교대로 ‘왜 개신교 신자는 줄었는데 가톨릭은 늘어났는가’라는 제목을 놓고 분석과 연구, 반성과 대책에 부심했다. 그런 과정에 가톨릭 쪽에서는 신자의 증가라는 양적 측면을 뛰어넘는 또 다른 두 가지 특성이 새로 발견됐다. 먼저 하나는 공식 등록신자든 아니든, 일반인이 가톨릭에 대해 호감(이미지)을 갖고 있다는 추론이다.

“정부의 통계 발표를 계기로 한국천주교협의회(가톨릭 교회의 한국총본부 격)에서도 실제 등록신자 호적조사를 면밀히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470만 명이 안 돼요. 그러니까 정부의 조사치보다 48만 명가량 적은 거죠. 등록신자도 아닌 사람들이 ‘나는 가톨릭 신자’라고 응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 배영호 신부는 이런 분석과 함께 계속 말을 보탠다. 그의 분석을 더 들어보자.

“정부 통계에 그런 사람들까지 대거 포함된 결과 실제 우리 등록신자보다 숫자가 부풀려졌다고 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등록신자도 아니면서 그런 대답을 했을까?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것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심정적으로는 가톨릭에 기울어 있다, 가톨릭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됐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질적 특징은 타 종교 신자의 가톨릭 개종 현상이다. 이어지는 배 신부의 분석.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혹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옮기는 것은 어차피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 한 형제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 왔습니다. 마침 이번 정부의 통계를 계기로 그 부분도 따져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당에 신자로 등록할 때 입교 경위를 밝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가톨릭에 들어오게 됐는지, 전에 갖고 있던 종교는 어떤 것인지 소명하는 내용입니다. 이번에 등록신자 수를 세어보면서 그 입교 경위를 더불어 살펴보니 개신교 쪽에서 천주교 쪽으로 옮기는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국에서의 가톨릭 3대 役事

단순히 신자 수가 증가했다는 결과만으로 덮어놓고 ‘가톨릭이 일상과 현실에 지친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영혼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고 비약적으로 단언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가톨릭이 한국인의 눈길과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표현은 가능할 것이다. 세계 메이저 종교들이 공존하며 경합을 벌이는 한국에서 ‘얌전하고 조용한 줄만 알았던’ 가톨릭이 뜻밖에 다른 종교보다 활발한 확장세를 보이며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어쨌든 이번 정부의 통계조사 결과는 한국의 가톨릭이 (세계교회사와 한국교회사 어느 쪽에서 보든) 획기적인 또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톨릭 역사에서 한국은 선교사가 들어오지 않고 자체 학습과 선교를 통해 가톨릭의 복음화가 이뤄진,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축복의(가톨릭 입장에서 보면) 땅이라고 이야기 된다. 그것이 첫 번째 역사(役事)로 꼽힌다.

두 번째 역사는 지난해 정진석 서울대교구장이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된 일이다. 1969년 김수환 추기경이 서임된 이후 두 번째다. 가톨릭이 국교도 아니고, 전통의 불교와 개신교의 교세가 훨씬 앞선 나라인데도 추기경이 2명이나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가톨릭 세계에서 갖는 위상과 영향력을 상징한다.

여기에 통계조사 결과도 실제 가톨릭 신자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종교 또한 다양한 오늘의 한국인에게, 다른 종교를 제치고 다름 아닌 가톨릭이 ‘영혼의 쉼터’로 받아들여지거나 최소한 그렇게 인식된다는 점은 확실히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한 줄로 엮어, 우리는 그것을 ‘한국에서의 가톨릭의 부활’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오래전 자기 부패와 타락으로 털썩 쓰러졌던 가톨릭이 이제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한국 땅에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톨릭을 부활하게 하는가? 가톨릭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요인은 무엇일까? 애초 이 글은 그 질문의 답을 찾아나선 것이었다. 그 답을 찾기에 앞서 먼저 ‘가톨릭의 부활’이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부활인가 생각해 보자.

김영현_월간중앙 객원기자

 

 

 

 성체 성혈의 성사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눠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건네시자 그들은 잔을 돌려 가며 마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 22-24).

 

 

1. 예루살렘 시온 산의 다락방

예루살렘에 가 보면 멀리서 높은 탑 세 개를 볼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시온 산 위에 세워져 있는 교회탑이다. 바로 이 탑 아래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셨다는 다락방이 있다. 바로 이 다락방은 가톨릭 교회의 칠성사 중 다섯 가지 성사, 즉 성체 성사, 신품 성사, 견진 성사, 고해 성사, 병자 성사와 관련이 있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현재 프란치스코 수사들이 관리하면서 성지 순례객들을 맞아 최후의 만찬 성체 성혈의 미사를 봉헌한다. 나는 1995년 7월에 이곳을 순례단과 함께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다. 그 때 안 베다 신부님의 강론이 아직까지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은 그리스도께서 성체 성사를 세우신 것을 기념하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흠숭하고 공경하는 날이다. 마태오 복음에는 예수께서 성체 성사를 제정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성체 성사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면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것이며, 또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기념하는 제사이다.

 

우리가 믿는 성체와 성혈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온전히 살아계신 것이다.

성체 성사는 칠성사 중에서 가장 존엄하고 모든 성사 중의 성사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성사에서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지만 성체 성사에서는 그 은총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친히 계시기 때문이다. 또 성체 성사의 설정 과정을 볼 때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앞둔 최후의 만찬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성사인지를 알 수 있다.

 

2. 성체 성사의 설립

예수께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그 동안 정들었던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주시며 이 성체 성사를 세우셨다. 예수님은 이 중대한 예식을 세우시기 위해 미리부터 준비하셨다. 요한 복음 6장을 보면 예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6, 51)라고 하신 일이 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께서 드실 과월절 음식을 저희가 어디 가서 차렸으면 좋겠습니까?"(14, 12) 하고 묻자, 예수님은 그것을 차릴 방까지 일러 주시며 그 방에다 음식을 차리라고 하셨다. 이제 음식을 먹는 도중에 예수님은 빵을 들고 축복하시면서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14, 22) 하셨고 또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드시고는 "이것은 내 피이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14, 24)라고 하시며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하셨다.

 

바로 이러한 예식을 통해서 오늘날의 성체 성사가 성립된 것인데 이 성체 성사는 우리 가톨릭 교회의 가장 중요한 미사 성제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기념하는 최상의 보배이다. 성체 성사의 의미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자.

 

3. 성체 성사는 최상의 제사이다

예수께서는 이 성체 성사를 통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에 "나는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라고 하신 약속대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또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라고 말씀하셨다. 옛날 우리 나라의 심청이도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온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인류를 어둠과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당신 생명을 희생하신 것이다. 인당수의 제물로 곡식이나 짐승으로는 부족하여 사람 중에서도 처녀를 요구했듯이, 인간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서도 귀중한 인간의 봉헌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신 것이다.

 

우리는 매 미사 때 성찬 예식을 통해 이러한 사랑의 신비를 체험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최상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는 말과 글로 다할 수 없는 진리가 많다. 예수님은 인류에 대한 당신 사랑을 많은 말대신에 암시적이며 상징적인 만찬 예식을 통해 드러내신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로 구원받았지만, 신약에서 모든 인류는 파스카의 어린양으로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구원받았다. 즉 예수님은 빵을 들고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시고 또 포도주를 들고 "이것은 내 피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께서 파스카 축제의 어린양으로서 희생될 음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새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렇게 성체 성사는 예수님의 피로써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이다. 그러므로 성체 성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기념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모든 죄악과 죽음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감사드리는 예배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체와 성혈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우리는 이처럼 고귀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올바른 마음으로 모시도록 해야 한다.

 

사도 바오로가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1고린 11, 27)라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대죄를 짓고도 남의 체면 때문에 성체를 모신다든지, 준비도 안하고 장난스럽게 성체를 모셔서는 안 된다. 성체는 바로 예수님의 몸이다. 성당에 들어오면 먼저 성체를 향하여 공경을 표하고, 또 시간을 내어서 성체 조배를 해야 한다. 우리 신자들은 이 성체 안에서 영혼의 양식을 얻고 영적인 힘을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