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신론 [汎神論, pantheism]
요약
신(神)과 전우주(全宇宙)를 동일시하는 종교적·철학적 혹은 예술적인 사상체계.
본문
신과 전우주 사이에 질적인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신론과는 다르다. 범신론은 신비적인 종교감정이나 자연에 전하는 시인의 감정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논리정연한 이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8세기 영국의 사상가 J.톨런드에 의하여 도입된, 그리스어(語)의 '전체'를 의미하는 pan과 '신(神)'을 의미하는 theos를 결합한, pantheism이라는 술어의 번역어이지만, 신에 대한 세계의 상대적 독립을 인정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두 가지 범주(範疇)로 나누어진다.
즉 도가(道家) 사상이나 스토아학파 철학에서처럼 독립을 인정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범신론과, 《우파니샤드》나 스피노자의 경우처럼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좁은 의미에서의 범신론이 그것이다. 역사상 가장 일관성(一貫性) 있는 전형적인 범신론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볼 수 있다.
1striver (2003-07-03 12:14 작성)
범신론은 모든 개념, 사물, 생물 마다 각각의 신이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돌에는 돌의 신이, 고등어에는 고등어의 신이 있는 셈이죠. 나아가 각각의 돌과 각각의 고등어가 모두 신이라는 혹은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으로 확대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만유재신론과 구별되어야 합니다.범신론은 각각 다른 신이지만, 만유재신론은 모든 사물에 유일한(혹은 특정한) 신의 일부 혹은 전체가 깃들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만유재신론은 특히 유일신론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유일신이 만유 즉 만물에 깃들어 있음을 주장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판'(모든)과 '데오스'(신)의 합성어에서 유래되었다. 이것은 우주(宇宙)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종교관과 세계관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맨 처음 영국의 자연신론자인 죤 톨란드(John Toland, 1670-1722)가 "소시니안주의의 참 모습"(Socinianism Truly stated, 1705)이라는 소 책자에서 사용한 말인데, 그는 "범신론"(Pantheism, 1720)이란 책에서는 "신(神)은 우주의 마음이나 정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러한 개념은 인도의 일원론적 철학들에서 소급되지만, 아레오바고스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특히 독일의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 에크하르트(eckhart)의 기독교적 저서들을 통해서 전해 내려온다. 오늘날 신학에있어서 범신론은 하나님이 '초인적'(招人的, supra-personal)이라면서 하나님의 인격성(人格性)을 공격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표현하는 어떤 개념이나 용어를 무한히 초월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과 동일시 되어 있지 않고 세상을 끝까지 창조하신 분으로 나타나 있다. '인격'이란 말이 하나님께는 완전한 말은 아닐지라도 그러한 표현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는 말이기는 하다. 즉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다. 오늘날 과학의 영향 하에서 기독교 유신론(有神論)에 대한 가장 비판적인 점은 하나님을 어떤 원인적 과정이나 원자 이론과 동일시하고,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과 그가 통치하시는 피조물인 자연 질서 간의 성경적 구분을 무시하는 위험이다. 창조, 하나님을 보라.
내용출처 : www.jcross.net
yho5958 (2004-07-11 04:19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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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평
Pantheism범신론(汎神論):
조물주와 우주를 동일시 하며 조물주가 곧 우주이며 우주가 곧 조물주 라는 사상.
'톨란드'는 '만물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신이다'고함.
'존슨'은 우주와 신을 혼동하는 사상을 말하고 신을 비 인격적인 것으로 삼고 신과 피조물 사이의 구별을 흐리게 추월신 대신 우주 편재의 신을 말하며 인간적 신적 자유를 배제하고 임음.
'스피노자'는 만물을 필연적으로 신의 본성을 지니게 된다 했음.
범신론은 여러 형태가 있는데 모호하고 불분명한 사상도 있음.
'괴테'에게는 모호하게 스피노자와 유사한 점이 있음.
근대에는 제퍼스이 대표격.
인도의 베다경 우파니샤드(바라문교의 법서)의 사상은 신만이 실재이며 현실세계는 신가운데 매몰,소멸되어 버린다는 무우주론적 범신론이 그 하나임.
다음,
신을 ㅜ자연과 동일시하되 자연의 힘,맹목적 충동(소펜하워의 주장),본능적 지성의 힘(E.하르트만),이성적 정신(헤겔)등을 말하는 것이 있음.
브라마:梵이라 역됨.
인도의 정통 사상인 바라문교의 범서에 나오는 인격적 창조의 신.
불교,힌두교,자이나교의 범신론사상은 윤회설과 같이 이어져 오는 사상으로 자연 만물은 모두 신 또는 같다는 사상으로 윤회한다고 보는것.
그러나 붓다는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함.
http://blog.naver.com/papapac/150005018514
유일신론은 범신론과 초월신론을 넘어서 - 김경재(한신대교수)
범신론의 반대는 초월신론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는 '신론'(神論)이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일반적으로 동양의 고등종교에선 '신론' 이 별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이유는 신론이란 결국 지고한 존재, 거룩한 존재, 궁극적 존재, 또는
초월적 존재를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인간 이성과 논리로 따져 말한다는 것인데,
절대 초월자를 인간의 이성적 논리와 언어로 말하기 어렵다는 깨달음이 동양의
고등문화 속에는 일찍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도(道)라고 이름 할 수 있는
도(道)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명명(命名)할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도덕경 첫 구절에서 말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둘째 이유는 설혹 말하더라도 동양종교 일반에서는 지고한 '궁극적 실재'가
우주 시공간 저 멀리 초자연계에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 또는 만유
가운데 이법(理法), 생명력 또는 존재의 바탈로서 내재(內在)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어서 서양학문의 눈으로는 범신론적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범신론은 결국 신이 만유 가운데 내재함을 강조하는 내재신론(內在神論)이다.
흔히 소박하게 잘못 이해하는 기독교인들은 범신론(汎神論)과 대조되는 신론이
유일신론 인줄 아는데, 범신론의 반대는 초월신론(超越神論)이다. 초월신론이란
글자 그대로 궁극적 초월자로서 신은 시공간적으로 우주만물을 완전히 초월하고
있으며, 인과론적으로도 세계와 신은 직접적 관계가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절대자 초월신은 '말씀'으로 이 세계를 창조했으며, 피조세계와 창조주이신
절대초월자 사이엔 '질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창조자와 피조자를
혼동하거나 뒤섞는 논리는 절대 금물로 삼고 있다. 뉴톤물리학이 지배하던
17세기와 헬라 플라톤 철학이 지배하던 중세기 전반기 시대에 그러한
초월신론이 기독교가 증언하는 유일신론이라고 혼동하여 잘못 이해하던 시기가
있었다.
유일신론은 임마누엘의 하나님 체험
그런데 성경을 좀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단순히
'초월'만 하는 것이 초월신이 아니라 '만물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시면서 만물
속에 임마누엘' 하시는 '내재'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편
104편은 이렇게 노래한다 : 주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어 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께서 주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시 104:29-30).
성경의 하나님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고 흔히 말한다. 임마누엘이라는
히브리단어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사 8:8).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하나님은 플라톤 철학이 말하는 것 같은 저 멀리 이데아세계에
계시는 '초월신'이 아니다.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동행 하시며, 어머니가
아이를 낳고 품에 안아 기르고 보호하고 양육하듯이, 피조물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셨다(사 46:4).
만유 안에, 만유를 통하여, 만유 안에 계시는 유일하신 하나님
이러한 성경적 유일신 신관은 마침내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놀랍게도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고백되고 있는데, 에베소서 4장 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하나님도 한 분 이십니다. 그 분은 만유의 아버지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엡 4:6).
그렇다. 성경의 신관은 유일신관이다.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다. 그런데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은 단순한 우주의
이법(理法)이거나 도(道)이거나 무극이나 태극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그리고 그 한 분뿐이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만유와 혼동될 수 없다. 그래서 그 한 분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공간적 초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만유 곧
모든 피조물을 넘어서 계신 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하나님,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은 당신의 전지전능을 과시하기 위하여
세상임금처럼 높은 보좌에 앉아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분이 아니다. 참으로
자유하시고 절대초월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매우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은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와 함께 일하시며, 만유를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분이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에베소서 4장 6절이 똑바로 증언하고 있듯이, 성경이
증언하는 유일신 하나님은 '만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신관은
만유와 하나님을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지만, 범신론시비가 두려워서 '만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굳이 감추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참다운 유일신 하나님만이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는 자유'를 누리시는 영광의 하나님임을 기독교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신 신앙은 범신론, 초월신론, 내재신론을 모두 넘어선다
위에서 언급한 진리적 계시신앙을 성경 속에서 확인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 범신론, 초월신론, 내재신론 따위의 서양신학 신론이나 종교학이
말하는 여러 형태의 '신에 관한 인간적 담론'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
생명력 지닌 역동적 신앙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우리생명이 충만해지기를
원한다(엡 3:19)'. 하나님의 영적 임재 안에서 우리의 속 생명이 강건해지고,
화평과 희락과 정의와 진리 안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한다.
성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우리 피조물은,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식물이 태양을 등지고서는
살아갈 수 없듯이 인간의 심령은 하나님을 지향하도록 존재론적으로
창조되었다고 했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본인이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아니하든
인간은 이미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의 햇빛 안에서 조명 당하고 있는 것이다.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이 햇빛처럼 비추고 있는 것을 영안으로 본 성
프란시스는 해와 달과 별과 바람을 형제와 자매라고 부를 수 있었다. 질병과
고난과 죽음까지도 선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들임을 깨달았다. 바울도
저 유명한 로마서 8장 마지막 구절에서 그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롬 8:37-39).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설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이요…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행 17:25,28)라고 갈파하고 있다.
어거스틴과 프란시스와 사도바울의 신앙체험 속에는 요즘 기독교인들처럼
범신론이 무서워서 경계심을 갖는 그런 유약한 모습은 털끝만큼도 찾아 볼 수
없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좀더 담대한 기독교 신앙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알고 보면 세상 모든 것은
기독자의 것이요, 기독자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신론과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과 우주적 그리스도
기독교의 기독교다움은 유일신관을 신앙하되 독특하게 '삼위일체적 유일신관'을
지닌다는 점에서 같은 뿌리의 유일신관 일지라도 이슬람교나 유대교와는 다른
것이다. 삼위일체적 유일신관이란 한분 하나님을 신앙하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부르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삼위일체신관은 비유하건데 태양과 빛과 열로서 상징할 수 있다. 태양은
광원으로서 무한한 에너지를 쏟아내며 만물을 비춘다. 태양의 광원은 성부
하나님에 해당한다고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저기 우주공간에 태양이 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태양광선 곧 빛이 쏟아져 나와 우리 눈과
살갗에 닿기 때문이다. 이것이 말씀 즉 로고스요, 그 정점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신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몸이 되어 충만하게
머무는 것을 보고 느꼈다(골 2:9).
빛이 있는 곳엔 광열이 동반하여 광합성 작용을 일으켜 생명체를 육성한다.
사랑의 에너지요 진리의 에너지이다. 이것을 성령이신 하나님이라 부른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함으로 인해 새로운 피조물이 됨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의 광원과 광선과 광열, 곧 해와 빛과 열은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지
못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는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동시에 느꼈다. 성령의 강림체험을 하는 때에도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던 것이다. 삼위일체적 유일신관이란 '살아계신
하나님, 역동적 하나님'체험을 교리로서 정리한 것이다.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도들을 통하여, 성도들과 함께 일하신다.
그것을 하나님나라 운동이라 부른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힘으로 땅 위에 이룩하는 복지사회는 아니지만, 역사속의 고난과 아픔과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는 진리와 사랑으로 굳세게 싸워나가는 성도들의 피땀 없이 거져
오는 값싼 싸구려 왕국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몰역사적이거나 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를 심판하고 동시에 완성하면서 오는 것이기에 역사를 통하여
오고 역사자체가 구원됨을 통하여 온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 위에
임한다고 성서는 말한다.
'우주적 그리스도'란 단순한 '교회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오늘 세상 한
복판에서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의 세상 안에서의 의미 있고 창조적 일들을
통하여 진행되고 있는 '생명의 왕국'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이다. 하늘과 땅을 화해하시고 통일하시는 그리스도가 오늘도 일하고
계심을 믿고 생활과 직장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나가는 믿음을
말한다. 유일신 신앙이란 범신론이나 초월신론을 뛰어넘어 우주에 충만한
위대하고 고귀한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