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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손)

[연옥]연옥과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작성자혼인잔치|작성시간09.04.06|조회수5,579 목록 댓글 0

죽음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은 극도의 열심으로 위안을 삼으려 했다. 성직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이 영생의 문제에 대해 안심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체계에서는 사후의 연옥이라는 곳과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고대나 현대 어느 때를 보든지 이교도에서는 죽음 당시에 축복받은 자들이 가는 곳에 합당치 않았던 죄인에게 사후에도 일말의 희망을 남겨 두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중간 지대가 만들어 졌는데, 연옥에서의 고통을 통해서 현세에서 씻겨지지 않았던 죄가 사후세계에서 깨끗이 되며 결국 지복(至福)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에서 철학자들은 연옥의 교리를 가르쳤는데, 그 중 한 명인 플라톤은 죽은 자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 말하면서 최후의 구속에 대한 희망이 있음을 주장했다. 심판받은 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땅 밑의 심판의 장소를 먼저 통과해야만 하며 그 곳에서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고, 의인으로 판정된 사람들은 즉각 천상의 장소로 옮겨져서 그들이 인간의 형상을 입고 살았던 것과 똑같이 세월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연옥에 대한 교리는 이교도 로마에도 있었는데, 연옥의 고통은 면할 길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버질(Virgil)은 연옥에서의 갖가지 고통을 다음과 같이 시로 읊었다.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손발이 묶인 채 기어다니며
    하늘을 볼 수가 없었도다.
    그들의 죄는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으며
    더러움은 혼 속에까지 남아있도다.
    그들은 뿌리 깊은 악의 유골을 입고 있으며
    추잡한 죄의 얼룩이 얼굴마다 나타나 있도다.
    따라서 갖가지 고통이 부과되는구나
    어떤 이들은 바람에 표백되도록 매달려 있고
    어떤 이들은 물 속에,어떤 이들은 불 속에 빠져 있도다.
    모든 찌꺼기와 녹이 사라질 때까지.
    깨끗해진 몇몇 사람들은 낙원으로 올라가
    광대한 들판에서 호흡하도다.
    자기가 범했던 각각의 죄들로부터
    오랜 세월 후에 깨끗해진 그들은 행복하도다.
    그들의 습관적 죄로부터의 어떤 얼룩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순수한 혼의 정수만이 남아 있구나!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연옥의 교리는 이집트에서도 가르쳐 졌는데 이 교리가 대중들에게 일단 받아들여지면 성직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대중들을 착취하는 것이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성직자들의 기도는 연옥이라는 개념 하에 이루어 졌고, 어떤 기도도 성직자들의 기도 없이는 완벽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어떤 성직자들도 특별 보수가 없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교도의 성직자들은 과부의 집을 범했으며, 상을 당해 슬퍼하는 친척들의 여린 감정과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영원히 행복하길 기원하는 그들의 소망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했다.


어느 지역을 보든지 사후의 기도의 공통적인 특징은 수혜자에게 비용을 지우는 것과 그 비용을 갈취하는 것이다. 아일랜드 국민들을 괴롭혔던 것들 가운데 하나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죽은뒤에 정기적으로 드려야 하는 특별 기도였는데, 그들은 이를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다.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장례의식에도 많은 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상을 당한지 한 달 뒤에 있는 고인을 위한 소위 “한 달 후의 기도”를 시작으로 계속되는 성직자의 방문 때문에 아주 비싼 댓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에서도 이것과 매우 유사한 의식이 있었다. 뮬러(Muller)의 『도리아의 역사』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는데, 그는 “아리고스 사람들은(Argives) 사람이 죽은 뒤 13일째 되는 날에 죽은 자들의 안내자인 머큐리(Mercury) 신에게 제물을 드렸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도에서도 스랏다(Sradd'ha)의 의식이나 장례의식이 고인의 명복을 위하여 숱하게 치루어 졌는데 그 비용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게다가 그런 의식을 효험있게 하기 위해서는 죽기 전에 당사자가 가축이나 땅, 금, 은 등 그 밖의 다른 재물들을 헌납해야 했으며, 만일 그가 쇠약해서 그럴 기운이 없다면 그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이 대신해야 했다. 어디를 보든지 경우는 마찬가지이다. 아시아틱 저널(Asiatic Journal)은 타타르 말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뜻하는 구르유미(Gurjumi)를 소개하면서, 그 비용은 매우 비싼 것이라고 말했다. 쉬다스(Suidas)는 “그리스에서 최고로 비싼 의식은 텔레트(Telete)라고 불리는 신비스러운 의식인데, 플라톤에 따르면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위해 치루어 지는 것으로서, 악인이 죽은 뒤에 책임지게 될 모든 죄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는 의식”이라고 말했다. 이집트에서는 장례의식과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의 댓가로 성직자들에게 돈을 주어야 했는데 그 돈은 하찮은 양이 아니었다. 윌킨슨(Wilkinson)은 “성직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장례의식을 위해 많은 비용을 치르도록 유도했으며, 생필품도 겨우 구할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고인을 위한 의식에 드는 비용을 구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시체를 썩지 않도록 하는 데에만 은 한 달란트, 영국 화폐로 250파운드가 필요했으며, 그 외에도 장지 매입에 거대한 액수의 돈이 필요했고, 고인의 혼을 위한 의식과 기도를 위해서도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또 “여러 의식은 신전에서 죽은 자들을 위해 한 명 또는 여러 신들 [오시리스(Osiris)나 아누비스(Anubis), 그밖의 아멘티(Amenti)와 관련된 신들]에게 드려진 것과 유사한 기도를 포함한 것이었다. 그러한 기도는 낭독되기도 했는데, 친지들과 친구들은 조객으로 참석하였다. 성직자들의 기도 중간에 조객들의 기도가 삽입되기도 했다. 장례의식을 수행하는 성직자는 폰티프스(Pontiffs)의 등급에 의해 선정된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표범가죽 옷을 입었다. 땅 속으로 내려지기 전에 치러지는 여러 의식들은 보다 하급의 성직자들에 의해 행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여하튼 그들은 유가족이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한 시시때때로 그러한 의식을 계속해 주었다. 연옥과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라는 것이 이교도들에게 그렇게 작용했다면 그것과 똑같은 교리가 로마 카톨릭에서 작용하는 바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교도 성직자들이 일반인들을 착취했듯이 카톨릭의 성직자들도 그러했다. 연옥의 교리는 순전히 이교도적인 것이며 성경적 관점에서 비추어 볼 때 결코 옳지 않은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들의 죄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리일진대 또 죄를 씻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반면에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합이 없이 죽었으므로 죄사함과 의롭다함과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다른 방법으로 죄를 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이 있는 자마다 영생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으며” 결코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죄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향해 성경에서 보여 주는 하나님의 법령은 취소할 수 없는 것이다.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함에 있게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움에 있게 하라.” 따라서 연옥에 대한 교리는 순수하게 이교도적인 사기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죄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 사후에도 구속이 있다고 믿도록 속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재산과 구원을 동시에 잃게 하는 것이다.

 


이교도들은 연옥의 물과 바람을(버질의 시에서 나타나듯이) 죄의 얼룩을 깨끗하게 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교황 그레고리 이래로 카톨릭의 연옥에서는 불이 죄를 정결하게 하는 주요 수단이 되어 왔는데, 바알 신의 불처럼 강력하고 죄를 씻는 힘이 있다는 연옥의 불은 로마 카톨릭이 바로 담무즈 혹은 조로아스터교, 즉 고대 배화교(拜火敎)와 연결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세례를 통한 중생, 의로워 지기 위한 행위,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고행, 피 없는 제사, 극도의 종교적 열심, 연옥,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등의 교리가 모두 바빌론에서 끌어 온 것으로서 로마 카톨릭의 전반적 제도는 바빌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로부터 종교개혁을 통해 우리가 분리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피로 죄사함을 얻었으며 그의 은혜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자비로운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는 없으신 분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카톨릭의 폭정의 노예였던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동시에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자유 안에서 굳게 서게 되는 것이다.

http://www.biblemaster.co.kr/home/index.php?category=2&cate=0&index=2&pag=view.php&cate2=14&no=1610&pa=14_01

 

 

(마태12:32)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성공회 질문 답변

an Korean Anglican FAQ blog

별세자를 위한 기도에 대해



 


전에 인도해주신 관계로 지금은 성공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청년입니다.

예배중에 별세자를 위한 기도와 관한 의문이 있어.. 여쭙니다.

개신교에서 성도의 교통이라는 말과는 달리 상통이라는 말을 씀으로 의미가 죽은성도까지 확대된다는 얘기를 들은거 같은데..

별세자를 위한 기도와 관한 성공회의 신학적 근거를 좀 얻어 들을수 있는지요?

항상 이 사이트를 통해 여러모로 좋은 지도 받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주님의 평화

제가 어떤 식으로 성공회로 형제님을 인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성공회 안에서 함께 신앙 생활을 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좋은 질문 주셨는데, 게으름을 피워 대단히 미안합니다.

“별세자를 위한 기도”에 대해서는 성공회 안에서도 의견과 해석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들은 천주교의 주장과 다른 개신교의 주장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먼저 살펴보고,
성공회의 이해를 알아볼까요?

 

 

1. 천주교의 이해 - 연옥 교리와 관련하여

 

천주교에서는 “별세자를 위한 기도”가 곧바로 “연옥 교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옥에 떨어질 정도는 아니지만 완전한 구원을 받기에는 부족한 사람들을 위한 처소로서 연옥이 있는데, 여기에 있는 분들은 연옥에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이승에서 살고 있는 분들이 가도와 봉헌을 하면 마침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주장의 성서적인 근거는 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치지만 천주교에서는 제 2경전으로 보고 있는 마카베오하 12장 40절-45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죽은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그 내용입니다. 그리고 연옥은 대체로 세례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를 위한 곳(림보)”(limbus infantium)과 구약성서의 “신앙 선조들을 위한 곳”(limbus patrum)이 있지요.

 

 

2. 개신교의 이해

 

개신교 종교개혁 처음에는 별세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곧바로 천주교의 연옥교리와 결부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 기도를 인정하면 곧 연옥 교리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있을까봐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성서의 근거도 빈약한 것이었습니다(마카베오서는 외경으로 간주하므로). 그리고 믿음은 그 개인 당사자의 것이므로, 다른 사람의 공력과 봉헌으로 이룬다면 이는 곧 개신교의 원리였던 “믿음에 의한 구원”에 위배되어 “공덕에 의한 구원”(종교개혁자의 천주교 비판 방법)이 될 위험이 있으므로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별세자를 위한 기도는 여러 개신교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지요.

 

 

3. 그렇다면 성공회의 이해는 어떠한가?

 

성공회는 종교개혁 당시부터 천주교의 “연옥 교리에 대하여” 분명히 반대하고, 이는 무익한 교리와 관습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성공회 39개 신앙신조 22조). 그러나 별세자를 위한 기도의 관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현재도 많은 성공회 기도서는 이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주교의 이해와는 전혀 다릅니다. 성공회는 이러한 이해의 기초를 죽은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와 더불어 “사도신경”의 “성도들의 상통”(communio sanctorum)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별세한 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즉 주님께는 죽음의 개념이 우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신 기적을 통해서 볼 때도, 그것은 사람들이 슬피 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주님 보시기에 “잠 자는 것”일 뿐이었습니다(마태 9:24). 게다가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마태 8:22) 이 때 죽은 자들은 누구를 말합니까? 우리 육체의 생리적 상태가 죽음을 판단하는 근거가 아니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죽음은 여전히 신비에 가려져 있지만 우리의 상식적인 이해와 주님께서 죽음에 대한 이해는 달랐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도들의 상통”(혹은 통공)(communio sanctorum)에서 별세자를 위한 기도의 근거를 찾습니다. 이는 쉽게 말하자면 성도들의 교제 혹은 친교라고 할 수 있겠는데, 문제는 “성도”에 대한 해명입니다.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이 “성도”(saints)는 지금 이 세계에 살아있는 신자들과 이 세상에서는 돌아가셨지만 부활을 기다리는 모든 별세한 신자들을 포함한다고 봅니다.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부연하자면, 이 때 별세한 신자들을 위한 기도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도로 그분들의 죄가 덜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자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듯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례가 끝나고 나서 사제는 “별세한 신자들의 영혼이 평안히 안식하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찬례의 모든 과정 속에 지금까지 이 세상에 왔다가 돌아간 모든 신자들과도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그 안에서 친교를 나누었다는 뜻이지요.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난 사람들(별세자)들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는 그 모든 일이 하느님의 크신 종말사건 속에서야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셔서 “음간”(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셨다고 부활하셨다는 신비로운 사건도, 이것이 “음간”에 대한 정체에 대한 질문으로 꼬리를 물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이 이 어둠의 세계까지 알려지고 그 빛으로 그 죽음의 세계에 속해 있던 영혼들이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릴 것이라는 보편적 구원사의 한 징후를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문제들은 모두 종말의 사건과 관련이 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주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의 한 귀퉁이만 붙잡고 아주 조금 이해할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어떤 “교리적인 확정적 진술”도 하느님의 크신 진리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위에서 시도하려 했던 제 답변도 이런 교리적인 진술을 피하려 했지만, 여전히 인간의 이해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잘 인용하는 라틴어 신학 경구를 들어 마치겠습니다.

Deus ab omni compositione vera et reali liber est.

거칠게 번역하자면 “하느님은 우리의 어떤 헤아림으로부터도 자유로우시네” 쯤 되겠네요

 

주낙현 신부 합장

 

 

연옥교리는 구약성경 마카베오 하권 12장 41절부터 45절 사이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으며 유다 민족이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희생 봉사하던 것은 역사적 문서로도 충분히 인정되는 사실입니다.


개신교에서는 마카베오서를 성서에서 빼어 버렸으니, 당연히 연옥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숨은 일을 모두 드러내시는 주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Ⅱ마카베오 12,41-45)


그러나 16세기의 소위 종교 개혁자들은 이 구절 속에 대사 문제가 함축되어 있고 이것을 소위 면제부 사건으로 끌고 가려면 이 성서의 몇 구절을 바꾸어서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판단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되 하여간 마카베오서 모두를 성서에서 없애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음험한 자가 반대편의 증인을 암살하듯이 예수님의 기적으로 부활한 나자로를 살해하여 예수의 전능의 증거를 없애 버리려던 당시 유다인의 심술과도 같다” 는 혹평을 받고 있습니다.

 


(님이 원하는 연옥에 관해 함축되어있다고 여기는 성경구절을 올려 드립니다)

“누가 너를 고소하여 법정으로 끌고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어 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마태 5,25).


- “주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유혹에서 건져내시고 악인들은 심판 날까지 계속 벌을 받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특히 육체의 더러운 욕망에 빠져 사는 자들과 하느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자들을 벌하실 것입니다”(Ⅱ베드로 2,9).


- “그리스도께서는 갖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은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Ⅰ베드로 3,19-20).


-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가 죄짓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라면 하느님께 간구 하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 죄인을 살려주실 것입니다. 사실 죽을죄가 있습니다.” (Ⅰ요한 5,16).


-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 16,27)


- “심판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Ⅰ고린도 3,13)


-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 할 것이다”(마태 5,26).


- “산 사람 모두에게 너그럽게 은덕을 베풀 것이며 죽은 사람에게도 은덕을 베풀어라”(집회 7,33).


그러나 사실 연옥이란 말은 확실히 명시적으로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연옥에 관한 교리도 성서에 분명하게 써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연옥에 관한 믿음은 오래되었고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성서의 분명한 가르침'에 뿌리박고 있음만은 분명합니다. 연옥에 대한 믿음은 또한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 성덕이 필요하고 용서받은 죄에 대하여는 현세적 벌이 있다는 교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연옥이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 이 죽음 속에서 맞는 하느님과의 해후의 순간으로서 정화되는 만남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연옥이 있다고 믿는다고 해서 모두 천당에 가는 것도 아니고 연옥이 없다고 믿는다 해서 모두 지옥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연옥이란 하느님께서 아주 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선하지도 않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만드신 일종의 반 지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는 죽은 이들의 위하여 기도드리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략..


(기왕 소개 할 바엔 교부들의 증언과 오늘날 개신교의 증언도 말씀드리겠습니다.)


* 교부들의 증언


연옥에 관한 교부들의 증언은 너무도 많아서 여기 저명한 것들만 골라 세기별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 1세기: 성 야고보 사도의 경본, 성 마르코의 경본, 초대교황 베드로의 경본에는 한결같이 “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이 실려 있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 4세기: 성 에프렘: “형제들이여 나 죽은 뒤에 기도하러 모이거든 나에게는 향액을 주지말고 기도로 도와 달라 죽은 자의 영혼의 산 성인의 기도로 큰 이익을 얻는 법이다”(Apud Faith of Catholics Vol Ⅲ. p162) 라고 하였습니다.


- 5세기: 성 아우구스티노(성 어거 스틴)는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사제인 아들에게 언제든지 주의 제대에 설 때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유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 마음의 하느님이시여 내 어머니 죄를 위하여 주께 간구 하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상처의 구속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평안히 쉬게 하여 주소서. 주여 또한 내 마음과 소리와 붓으로 봉사하는 나의 형제들로 하여금 이 기도문을 읽을 때마다 주님 제대 앞에서 주님의 종 모니카를 기념하도록 북돋아 주시옵소서.”(Confessiones Book Ⅸ).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9세기에 로마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간 정교회의 예절 경본에도 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이 들어 있습니다. 연옥이 없다면 이들은 무엇 때문에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했겠습니까?


이 교리들은 역시 개신교는 부정하고 있으나, 오히려 카톨릭은 개신교인들이 성경이나 성전이나 이성의 아무런 근거가 없는 “사견” 만으로 죽은 부모, 형제를 위한 한마디의 기도도 드리지 않음이 정말 이만저만 냉혹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한 카톨릭 신자의 견해를 소개하자면


여행 중인 형제의 안전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이 사람의 정이거든 하물며 죽음에 괴롭고 먼 바다를 건너 영원의 피안에 이르는 그를 위하여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죽음이란 다만 육신과 영혼의 분리입니다.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나 영혼은 생존하며 영원히 움직이는 존재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육체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생활하고 그 의사와 기억과 애정이 그냥 계속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현세에도, 무덤의 저편 세계에도 다 통치를 하십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죽은 지 2000년 후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삭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마르코 12,26-27)라고 하셨습니다. 기도가 산 이를 돕는다면 어찌 죽은 이를 돕지 못하겠습니까?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 또한 제가 가톨릭 신자가 되어 크게 행복을 느끼는 것 중 하나입니다. 저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다른 죽은 형제들과 또 살아 있는 형제들을 위해 꼭 같이 기도 중에서 매일 만날 수 있어 더욱 행복합니다.


- 이 교리를 부정하던 개신교에서도 최근 한 신학교에서 이 연옥 교리를 믿고 지지한다고 나섰기에 퍽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모든 개신 교회가 이 교리를 믿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어느 날 우연히 기독교 유선TV방송(CH42)에서 어떤 목사님이 심판에 관한 토론식 설교를 하는 것을 유심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여(女) 집사님의 믿는 자의 심판과 불신자의 심판과의 차이에 관한 질문에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불신자는 안 믿었으니 무조건 지옥이다. 그런데 믿는 성도들의 심판은 하나님 앞에 가서 그가 세상에서 한 모든 일을 셈 바쳐서 매우 잘한 이는 주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꾸지람을 듣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기가 벌써 하느님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모든 영혼의 천당과 지옥을 분류하였으나 그가 이미 연옥에 관한 교리를 인정한 것을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은 자” 는 주님과 함께 바로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살 것이고 그렇지 못한 영혼 즉,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은 영혼” 은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연옥 단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목사님은 연옥에 존재를 함축한 성경 구절들을 발표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즉, (이하 생략)

 

 

 

 

(위키백과) 연옥(燃獄, 라틴어: purgatorium) 또는 정죄계(淨罪界)는 로마 가톨릭의 내세관 가운데 하나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의인의 영혼이 있는 천국과 악인의 영혼이 있는 지옥 사이에는, 죽은 후 지옥에 갈 정도의 대죄는 없지만, 천국에 바로 갈 수 없는 소죄가 있는 영혼이 그 소죄를 속죄하기 위해 천국에 대한 희망을 품고 얼마 동안 단련하고자 머무는 장소 또는 과정이 있다고 믿는데, 이를 연옥이라고 한다. 그 실례로 연옥의 연(燃)은 불로 단련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연옥설은 지금까지 로마 가톨릭 종말론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천국의 하부 개념으로 보는 신학자도 있으며[출처 필요], 연옥에서 지옥으로 가는 경우는 없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인간이 죽은 다음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에 깨끗한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대죄 중에서 하느님에게 등을 진 영혼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그 중간 지역에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이라고 하는, 그 죄에 해당하는 보속을 완전히 치르고 천국에 가기 위해 단련을 받는 일시적인 상태나 체류지가 있다고 본다. 연옥의 위치와 연옥에서의 고통과 정화 과정은 죄와 정비례하여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장소와 시간적 길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신적 신비에 속한다.

 

연옥의 단련은 ‘정화의 불(Fegefeuer)’에 타는 고통으로서 이루어지는데, 이 개념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3장 15절의 “깨끗하게 하는 불(ignis purgatorius)”에서 유래한다. 영혼들이 연옥의 불 속에서 참회하며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정화된다는 것이다. 이 불이 과연 물질적인지 아니면 영적인지 그 의미는 분명하지 않았으나, 대부분의 신학자는 정화의 불을 물질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감옥살이하는 범죄자들과 같아서 스스로는 그 보속을 경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승에 있는 사람들이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통해서, 무엇보다 먼저 헌금 등 하느님이 기뻐하는 제단의 제물을 통하여 그들의 보속은 경감이 될 수 있다. 즉, 정화의 과정이 빨리 끝나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에서는 11월을 위령성월로 지정해 죽은 자들을 위한 위령 미사 등을 통해 하느님에게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확고한 교리에 근거한 것이다. 즉, 이승에 있는 ‘지상 교회’의 신자들, 천국에서 보상받는 ‘천상 교회’의 신자들, 그리고 연옥에서 고통을 겪는 ‘연옥 교회’의 신자들은 자신들의 선공을 다른 지체들과 공유함으로써 서로에게 구원을 위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신경 및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있는 ‘성인들의 통공’에 근거한다. 연옥의 고통은 천상 교회의 복을 지금 누리지 못하는 고통을 뜻한다.

 

성서에는 연옥이란 단어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은 없지만, 마태오 복음서 12장 32절에서의 내세에서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암시(다만, 개신교의 개역 성경에는 내세가 아닌 (다가)오는 세상이라고 되어 있다) 및 구약 제2 경전의 마카베오 하권 12장 43절에서 죄를 범하고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한 일을 근거로 하고 있다.

 

연옥에 대한 개념은 연옥이 로마 가톨릭의 공적 교리로 확정되기 이전, 초대교회 시절 교부들의 진술에서도 발견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은 이를 돌봄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아직 내세의 정화를 요구하는 죽은 이들을 위한 신도들의 기도와 순교자들의 중재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영혼이 부활하려면 그 죄에 대한 대가를 한 푼도 남김없이 치러야 할 교도소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키프리아누스는 순교자들은 죽는 즉시 궁극적 구원을 얻지만, 박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부인하였으나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기를 원하였던 사람들은 죽은 후에 정화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진술들이 과연 연옥을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죽은 후에 영혼이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연옥설은 1336년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교서를 통하여 로마 가톨릭의 공식 교리가 되었다. 이 교서에서 교황은 마지막 부활이 있을 때까지 죽은 자들이 잠자는 상태에 있다는 교회의 전통적인 이론을 거부하고, 죽은 자들은 죽음과 동시에 심판을 받는다고 적고 있다.


(개신교) 일반적으로 개신교는 연옥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개신교의 주된 교리는 "오직 성경"("scripture alone")이다. 일반적인 개신교의 관점은 성경에는 연옥에 대해 명확한 논의가 없다는 것이므로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비성경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또다른 개신교의 교리로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천주교는 좋은 행실과 믿음을 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개신교는 믿음만이 구원을 달성할 수 있고 좋은 행실은 단지 믿음의 증거라고 여긴다. 개신교는 지옥에 떨어질 대죄(mortal sin)와 용서할 수 있는 죄(venial sin)를 구분하지 않으며, 대신 구원에 대한 한 사람의 믿음이 저승에 있을 곳을 지시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천국에 갈 운명이 정해지는 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에 따라, 종교개혁자 루터는 ≪연옥론철회≫(Widerruf vom Fegefeuer, 1530)에서 연옥 신앙을 부인하였고, 또 개신교에서도 연옥과 같은 일시적인 상태나 위치의 개념, 그리고 죽은 자들과의 영적 교류를 부인한다.


(성공회) 성공회의 경우는 종교개혁당시 연옥을 비(非)성서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인정하지 않지만, 루가 복음서에 근거한 음간의 존재를 믿으며,부활을 기다리는 모든 별세한 신자의 안식을 위해 기도한다.


(동방정교회) 동방정교회에서는 죽은 영혼이 잠시 고통받는 중간 기간이 있다고는 믿으며, 로마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예식(파니히다)을 행하고 있다.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예절 경본에 있는 죽은이를 위한 기도는 현재 로마 가톨릭의 경본과 대부분 일치한다.


(유대교)유대인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유대교 공인 기도서에는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문이 실려 있다.


(기타) 16세기 유럽의 기독교 종교개혁 이전에도 연옥을 부인하는 교파는 있었다.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유럽에 존재했던 카타리파(Cathari)를 비롯하여 종교개혁에 영향을 남긴 발두스파(Waldenses) 등은 죽은 자를 위한 전구와 연옥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당시 이 종파는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cjh0547) 성경에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연옥가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고전 15:29에도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나 벧전 4:6에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있는 곳이 연옥은 아닙니다. 카톨릭의 연옥의 교리는 이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의 연옥은 세상에서 죽은 자들은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남은 죄를 해결하기 위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죄를 태우는 불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불로 죄를 태우고 나면 천국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천국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연옥이 존재할 수 있는가? 연옥이 죄와 관련된 곳이라는 점에서 죄의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가? 죄의 문제는 믿음에 의하여 해결됩니다. 믿음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을 단변에 제물로 드려 우리의 죄를 대속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 제사를 드린 후에도 제사를 드린 그 죄가 남아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사가 우리의죄를 다 대속하지 못하는가? 그러면 연옥에 가는 자는 제사를 드린 후에 범한 죄나 믿음으로 해결하지 못한 죄의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복음을 새 언약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새 언약에서 죄를 용서하시고 기억지 아니하시고 도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는 것은 죄사함을 받음으로 가는 것이 아님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나는 것이 연옥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듭 나는 것이 연옥에서 이루어진다면 연옥에서 성령도 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천국은 산자의 세계입니다. 하나님도 산자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죽은 자가 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천국에 가려면 부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연옥에서 부활하여 천국에 가는가? 성경에는 부활은 최후의 심판 때에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연옥에서 부활하여 천국에 간다는 것이 인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카톨릭에서 연옥이라 하는 것은 성경과 다름니다.

 

곧 일반적으로 말하는 음부입니다. 이 음부는 낙원과 분리되며 낙원은 약속을 받고 죽은 자로 생명의 부활로 나올 자들이 부활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그리고 음부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연옥이 아니라 음부나 낙원에 있는 자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불신자를 위한 기도나 믿는 자를 위한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 역사하시는 자는 하나님이시니 결과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연옥 교리는 확실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leonhart355) 연 옥

1) 의 미
어떤 이가 은총중에 하느님과 우정을 맺은 상태에서 죽었으나 소죄나 불완전을 가지고 있거나, 죄에 대한 적당한 보속을 다 완료하지 않았을때, 이러한 영혼들은 하느님을 뵈러 가는 데에 방해되는 마지막 장애를 연옥에서 씻는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2) 성서적 근거

2마카 12, 43-45에서 유다인들은 전사한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있다. 또한 마태 12, 32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잘못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연옥에 관한 이러한 성서적 근거가 연옥 교리에 대한 충분하 이유가 된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3) 성서적 - 그리스도교적 하느님 체험으로서의 근거

성서의 수많은 구절을 통하여 인간이 하느님을 만날때 나타내는 반응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주님의 현존앞에 "이제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이사6,5)하고 두려움을 느끼는가 하면, 어부 베드로는 기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식하고 "주님, 저에게서 떠나가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루가5,8)이라고 부르짖고 있다.

 

결국 하느님과의 해후는 죄인에게 있어서 우선적으로 두려운 심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은 죄 중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인간의 상황이 연장되어 연옥 신앙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즉, 인간이 자신의 처지를 볼 때, 죽음을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이, 즉 하느님의 심판, 도저히 견디어낼 수 없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이 인간을 고통스럽게 불태워버리는 화염과 같다는 것을 우리는 예감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하느님 자신이 바로 연옥이며, 그분과의 만남이 바로 연옥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에 하느님 앞에서의 부족한 인간은 하느님을 올바로 뵈옵기 위해서 '정화'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4) 죽은 이를 위한 기도

교회는 초기부터 기도와 미사로써 연옥에 있는 영혼이 도움받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권고해왔다. 즉, 죽은 자들도 살아 있는 이들과의 연대성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는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공동체와 사랑으로 완성되어 가는 교회에 있어서, 죽음을 통한 인간과 하느님과의 만남은 단지 개인적인 측면이 아니라, 기도와 희망 속에 표출되면서 신자들과 성인들의 청원기도로써 지원을 받아 교회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 림 보 : '림보'란 특수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죽은 후에 가는 장소나 상 태를 지칭한다. 즉, 세례성사로써 아직 구원 은총을 받지 못하 였고 다른 방법으로 주어지는 은총에 자유로운 응답을 하지 못한자들이 죽었을 때 가는 곳으로,'기다림'의 의미가 있다.

"마리아 사랑넷(www.mariasarang.net)"의 가톨릭 생활교리 자료실에서 발췌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왜?
2007/11/18 오 전 8:42 | 가톨릭상식

11월은 위령성월이라고 해서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라고 들었습니다. 산 이들도 아닌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또 연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교회가 죽은 이를 위해 기도를 바치는 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잘못한 죄를 다 기워갚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천상 행복에 들기 전에 정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정화 중에 있는 상태를 전통적으로 연옥이라고 불렀습니다.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란 이렇게 정화 중에 있는 영혼이 속히 정화를 마치고 하느님 품에서 영복을 누리도록 해 달라고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 가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무엇보다도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과 희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회개하고 구원, 곧 영원한 삶을 얻을 기회가 아직 있지만 죽은 이들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이들도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산 이들의 기도가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갓난 아이나 중환자실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환자는 아무리 원해도 혼자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돌봐주는 엄마와 봉사자가 있기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또한 사랑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죽은 이야말로 가장 힘없고 약한 이들입니다. 그들에게서는 더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또한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 교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백성의 모임, 곧 성도(聖徒)들 공동체입니다. 성도들 공동체인 교회는 현세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지상교회) 뿐 아니라 이미 천국 영광 중에 살아가는 성인들(천상교회)과 연옥에서 단련받는 이들(정화 중인 교회)이 함께 친교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이란 이렇게 세 형태로 이뤄진 하느님 백성이 서로 공을 나누고 통교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통공에는 기도뿐 아니라 희생과 사랑 등 온갖 좋고 거룩한 일이 모두 포함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상의 성인들께 우리를 위해 빌어 달라고 전구(轉求)하기도 하고,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는 성인들 통공과 관련,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의 친교를 믿습니다. 곧, 지상에서 순례자로 있는 사람들, 남은 정화 과정을 거치고 있는 죽은 이들, 하늘에 있는 복된 분들이 모두 오직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친교로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과 그분의 성인들이 우리의 기도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962항).


<<알아둡시다>>

 ▨ 연옥이란
 교회는 연옥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는 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으려면 죽은 다음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 이들이 거치는 이러한 정화를 연옥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단죄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는 전혀 다르다"(「가톨릭교회교리서」 1030~1031항).

 이 가르침에 따르면 연옥은 단죄받은 이들이 받는 벌(지옥불)과는 전혀 다르며 죄를 지은 영혼이 거룩하게 돼 천국에 들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정화 과정입니다. 이 정화 과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해가 될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그 사람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을 보는 것 자체가 두렵고 고통스럽습니다. 그 사람이 벌을 주겠다고 벼르지 않더라도 그 사람 앞에 나서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화끈거리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연옥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현대 신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죽으면 하느님과 만나게 되는데 사랑 자체이고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과 만나는 그 자체가 죄를 지은 영혼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자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만남을 통해 영혼이 정화됩니다. 그것은 분명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겠지만 받아야 할 벌에 대한 고통이나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신 하느님 앞에 자신이 지은 죄와 허물이 낱낱이 드러나고 그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으로 인한 고통이 감당하기 힘들고 두려운 그런 정화일 것입니다.

 연옥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하느님 사랑과 은총으로 죽은 의인들이 가는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의인이 또는 연옥의 정화를 거친 영혼이 하느님과 누리는 영원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지옥은 하느님을 거부한 사람, 하느님과 또 성인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단절된 상태 그 자체가 지옥인 것입니다. 지옥의 존재에 대한 교회 가르침은 인간에게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책임감을 지니고 자유를 행사하라는 호소이자 또한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이창훈 기자
  

12. 연옥에 대해서


송양

성전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 연옥(煉獄)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박신부

먼저 하나 여쭈어 보겠는데요 개신교에서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까?


송양

???


박신부

개신교는 너무나 많은 교파가 있고 또 교파마다 주장하는 교리가 나르기 때문에 개신교 교리를 획일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마는 일반적인 개신교의 교리에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옥 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송양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우리 교회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박신부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에는 연옥의 교리가 있습니다 즉 사람이 죽은 다음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에 전연 죄의 그림자도 없는 깨끗한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대죄 중에서 하느님과 영영 등을 진 사람들은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이란 단련을 받는 곳이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그 죄에 해당되는 보속을 치르는 곳이지요.


송양

그 기간은요?


박신부

그 기간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법정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극형에 처하는 방법으로 사형 언도가 있고 아무런 죄도 없는 자들은 무죄 석방이 되지만 그밖에 죄에 따라 유기 징역이 있지 않습니까? 그 유기 징역의 기간은 죄와 정비례하지요. 연옥의 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로 연옥이 없다면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마태 16,27) 하신 하느님의 공의(公義)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보겠어요. 송양! 솔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송양이 지금 죽는다면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자신합니까?


송양

???


박신부

그렇게도 자신이 없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듭니까?


송양

글쎄요. 그렇게 질문을 받으니 연옥이 있으면 정말 위안이 될 것 같습니다.


박신부

순수히 어떤 위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극히 상식적인 사고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송양

그런 것을 상식으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성서의 근거가 있습니까?


박신부

저번에도 말씀드린 대로 성서 이외에 성전의 권위를 먼저 알아야겠지요. 연옥설은 주로 성전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만 성서에도 그 뜻이 밝혀져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 보면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은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2마카 12, 43-45)
그런데 저번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시 소위 종교 개혁자들은 연옥설을 부정하고 이 마카베오 성전을 성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은 유다인들의 전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죽은 다음에도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생각하는 연옥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송양

신약 성서에는 연옥에 대해서 어떤 子절이 있습니까?


박신부

신약성서에는 구약성서처럼 명확한 기록은 없지마는 연옥을 암시하는 구절은 있습니다. 예컨대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 32)
여기서 내세에서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암시가 있지요. 그러니까 연옥에서 천국에 가기까지 죄의 벌을 받는 곳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둔다. 네가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 25-26)
이 옥은 연옥을 의미합니다. 지옥도 옥은 복이지만 거기서는 나을 수 있는 옥은 아닙니다. "나을 수 있는 옥"은 곧 연옥을 뜻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할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줄 것입니다 .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1고린 3, 13-14)
공심판 때에 인간의 업적을 시험하는 것은 불입니다. 그런데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들"은 곧 연옥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송양

그런데 연옥에도 불이 있다는 뜻입니까?


박신부

연옥 단련은 불로써 이루어집니다. 연옥의 영혼들은 감옥살이하는 사람들과 같아서 자기들 힘으로는 그 보속을 경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사람들이 바치는 기도와 희생을 통해서 그들의 보속은 경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죽은 이를 위한 '위령 미사'를 위시해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진정 하느님께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거지요.


송양

전통상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전통을 들 수 있습니까?


박신부

유명한 성인이신 아우구스티누스 아십니까?


송양

어거스틴 성인 말이지요?


박신부

예, 영어 발음으로는 어거스틴이라 하고 라틴어 본 발음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의 대학자이며 가톨릭 주교였습니다. 그분이 쓴 '고백록'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는 구절이지요.
"내 마음의 천주님, 내 모친의 죄를 위하여 주께 간구 하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상처로 구원을 받을 수 있기에 기도드립니다. 저의 어머님이 저의 아버님과 함께 편안히 쉬게 하소서."(고백록에서)"
이렇게 대성인 아우구스티누스도 돌아가신 어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송양! 혹시 로마에 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송양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박신부

언젠가는 가시는 기회가 있겠지요. 로마에 가면 초세기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모여서 기도했던 그 옛날 무덤들인 카타콤바라는 지하 무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그 당시 2, 3세기 신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 흔적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송양

그렇게 중요한 교리인 연옥에 대해서 개신교에서는 왜 말이 없는지 전연 모르겠네요?

 

 

(dkekqxj)

 

- 1세기: 성 야고보 사도의 경본, 성 마르코의 경본, 초대교황 베드로의 경본에는 한결같이 “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이 실려 있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 4세기: 성 에프렘: “형제들이여 나 죽은 뒤에 기도하러 모이거든 나에게는 향액을 주지말고 기도로 도와 달라 죽은 자의 영혼의 산 성인의 기도로 큰 이익을 얻는 법이다”(Apud Faith of Catholics Vol Ⅲ. p162) 라고 하였습니다.

 

- 5세기: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사제인 아들에게 언제든지 주의 제대에 설 때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유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 마음의 하느님이시여 내 어머니 죄를 위하여 주께 간구 하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상처의 구속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평안히 쉬게 하여 주소서. 주여 또한 내 마음과 소리와 붓으로 봉사하는 나의 형제들로 하여금 이 기도문을 읽을 때마다 주님 제대 앞에서 주님의 종 모니카를 기념하도록 북돋아 주시옵소서”(Confessiones Book Ⅸ). 라고 하였습니다.

(출처 : '연옥과 지옥의 차이가 뭔가요?' - 네이버 지식iN)

 


- 연옥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 -

 

성 갈리스토의 카타콤에는 죽어 가던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 말마디가 아직도 되풀이 되고 있는 수많은 비문들이 세워져 있다.

 

'그대보다 먼저 간 우리를 그대의 기도 속에 기억해 주오.'

 

뒤에 남은 이들의 대답은

'그대,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빛을 누리소서.' 였다.

 

개신교에서는  구약정경 7권을 떼버리고 그에 걸맞게 모든성인의 통공교리(죽은자와 산자의 기도를 통한 교통)을 삭제하였습니다.

 

연옥은 초기기독교 교부들이 증거한 교리입니다.

 

 

성 그레고리오는 말한다.

 

"어떤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가 봉헌되면 그 동안은 그 영혼의 괴로움은 아주 중지되든가 또는 적어도 얼마만큼 가벼워지는 것이다."

 

 성 예로니모-(제롬)는 말한다.  (성 예로니모 - 성경의 정경화작업에 참여하신 교부 )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가 봉헌되면 그 동안 그들은 조금도 고통을 받지 않는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 개신교신학자들도 감히함부로 논하지 못하는 대신학자)

                                                                                                    

 "연옥에서 영혼을 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물론 미사이다."

 

 연옥에 있던 성 토마스의 누이는 오라버니에게 나타나 몇 대의 미사를 청했다.

 그 미사가 봉헌되자 천국에 들어갔다는 알림이 있었다. 

 

성 요한 다빌라의 임종 때에 곁에 있던 이가 물었다.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미사, 미사, 미사 성제를 청합니다."

 

 매일 전 세계에서 봉헌되고 있는 하나하나의 미사 뒤에는 연옥에서 구출되어 천국에 올라가는 영혼이 많이 있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어느 날 미사 중에 제대의 성작 속에서 천사들이 금잔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을 퍼내어 연옥 영혼 위에 부어 주자 그들이 차츰차츰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광경을 보았다

 

 

성 베드로 사도의 유품에 죽은자를 위한 기도패가 발견되었음, 순교자들의 은둔지 카타콤에서는 죽은자들을 위한 기도문과 기도비석이 수두룩하게 출품되었음, 초기 사도들의 가르침- 연옥과 죽은자를 위한 기도에 관한것을 개신교에서는 왜 사라졋는가??

 

사도신경 - 모든성인의 통공교리를 산자들만의 교통으로 축소한것은 루터시대이후 개신교에서 벌인짓임

 

 


 성서와 성전과 이성에 바탕을 둔 신심


 "왜 가톨릭 신자는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가?" 이는 비신자 동포들이 자주 묻는 말이다. 죽은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관습은 연옥(煉獄)의 교리에 바탕을 둔 것인데, 이 교리는 16세기 종교 혁명가들이 배척하였으므로 오늘날의 개신교 신자들은 사실상 모르는 바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가톨릭이 죽은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관습, 또는 이른바 ’불쌍한 영혼을 위한 신심’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성교회에서는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여, 이미 죽은 모든 영혼들을 위해서 사제들이 미사를 세 번 계속해서 드리기를 허락하고, 또 11월 한 달을 불쌍한 영혼들을 위한 위령 성월로 정하여 신자들이 이 신심에 열성을 드러내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 이 신심 행위가 성서와 이성에 바탕을 둔 것인지를 비신자 여러분과 더불어 연구해보기로 한다.


 연옥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

 성서는 우선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서로 기도하고 성인들과 천사들의 전달을 구하기를 권장할뿐더러 이미 죽은 우리 형제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하기를 장려한다. 마카베오 하권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유다가 고르기아스를 쳐부순 후, 부하를 거느리고 전쟁에서 죽은 유다인을 묻으려 왔다. 그는 은전(銀錢) 2천 드라크마를 모아 죽은 이의 죄를 위한 제사에 써 달라고 예루살렘에 보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죄악이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니고, 하느님을 섬기면서 영면(永眠)한 이는 크나큰 성총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성서의 저자는 여기에 포함된 교리를 명백히 밝혔다.(2마카 12, 45).

 

 우리를 떠난 개신교 형제들은 마카베오서를 영감을 받은 성서로 여기지 않지만-아래 필자의 글 중에서 ’가톨릭에 관한 개신교 측의 억지 비방에 대하여’에서 이미 밝혔듯이 루터가 개신교를 성립시키면서 성서에서 야고보서와 마카베오서를 밀짚보다 무가치한 글이라 하여 빼내어 버렸음을 기억하라- 어쨌든 이 책이 그리스도 강생(降生) 전에 세기를 이어 유다인이 믿어 온 바를 입증하는 충실한 역사적 기록인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실상은 이 책도 이사야서나 요한복음서나 그 밖의 성서와 마찬가지로 성서에 포함된 모든 책이 영감을 받은 것임을 선언하는 가톨릭교회의 틀릴 수 없는 교도권에 바탕을 둔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내세’에 죄를 사하심(마태 12, 32)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그레고리오에 따르면 연옥에 관한 말씀이다. 성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줄 것입니다.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 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만일 그 집이 불에 타 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1고린 3, 13-15). 이 말씀으로 성 바오로는, 그러한 영혼은 한동안 연옥의 정화(淨化)하는 불을 견디어 내야하지만 결국에는 구원될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이는 초대 교부들의 일치된 해석이며 세기를 이어 내려온 성전(聖傳)이기도하다. 이는 순교자의 무덤으로부터 초대 교회 신자들의 시체가 누워 있는 카타콤바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로마 성 밖의 평야(平野) 아래 있는 성 칼리스토의 카타콤바를 지나갔을 때, 죽어 가던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 말마디가 아직도 되풀이되고 있는 수많은 비문(碑文)을 본 적이 있다.


"그대보다 먼저 간 우리를 그대의 기도 속에 기억해 주오." 뒤에 남은 이들의 대답은 "그대,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빛을 누리소서."였다. 반스 몬시뇰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인의 무덤에는 이러한 비문(碑文)이 많이 있다." (A.S. Barnes, The Early Church in the Light of the Monuments, p.149-157).


 사도 시대로부터 시작된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의 관습은 동방과 서방의 교부들이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테르툴리아노(A.D. 160-240)는 기일(忌日)미사에 대해서 두 번이나 말했다."우리는 매년 하루를 기려 죽은 이를 위하여 제물을 봉헌하기를 마치 그들의 생일처럼 한다." (De Cor. Mil., 3). 또 "신자인 과부가 남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가 중간 안식소에 들어 첫 부활에 참례하기를 애원하며 그가 죽은 기일(忌日)에 기도를 바친다."(De Monag.10).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추도하는 조사(弔辭)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주여, 당신의 성인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완전한 안식을 당신 종인 테오도시우스에게도 주시옵소서. 저는 그를 사랑하였기에, 그를 따라 생명의 나라로 가겠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의 기도로써 그를 인도하여 그의 공로가 부르는 곳, 거룩한 산에 인도하기까지 그를 떠나지 않겠나이다." (De Obitu. Theod.).

 

 이 논제에 관한 교부들의 글 중에서도 가장 감동 깊은 것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붓에서 나온 것이다. 5세기 초엽에 살던 이 주교 학자는 자기의 어머니-모니카-가 죽을 때 자기에게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 몸은 아무데나 묻어도 좋으니 이 때문에 번거로이 걱정하지 말라. 다만 한 가지 네게 유언하노니, 네가 어디 있든지 제대에서 나를 기억해다오."(고백록 제9권).


 그 아들은 어머니의 유언을 명심하여 열렬한 기도를 바쳤다. "그러므로 제 마음의 주님이시여, 저 이제 제 모친의 죄를 위하여 당신께 간청하나이다. 나무에 매달리신 당신 상처의 약으로 인하여 제 기도를 들으소서. 제 모친이 그 남편과 함께 평안함에 쉬게 하소서. 그리고 주여, 제가 목소리와  마음과 펜으로써 봉사한 당신 종인 제 형제들에게 영감(靈感)을 주사,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당신 제대에서 당신 종인 모니카를 기억하게 하소서." (고백록).


이 사실로 보아도 초대 교회에서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관습이 널리 실천되고 있었을 뿐더러, 연옥이라 불리는 상태도 믿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죽은 친척이나 벗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와 제사를 바치는 관습은 옛 유다인 사이에 깊이 뿌리박힌 것으로, 그 동안 그들이 여러 번 흩어져 방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다. 필자는 몇 해 전에 예루살렘의 유명한 ’통곡의 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우리나라 -미국- 에서 히브리인들이 쓰는 공식 기도서에는 장례식을 위해 아래와 같은 공식 기도문이 있다.


 "이미 죽은 형제여, 그대는 천국의 문이 열려, 평화의 나라, 안전한 집을 보며 즐거이 그대를 마중 나오는 천사를 만나십시오. 지존하신 사제께서 그대를 받아들여 그대는 목적지에 닿아 평화 속에 쉬며 또 다시 소생할 것입니다. 이로써 천국의 안식처에 죽은 우리 형제의 영혼이 쉬게 될 것입니다. 그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떠났으니, 원컨대 주님의 성령은 그를 낙원에 인도하소서. 원컨대 임금 중에 가장 높으신 임금께서는 무한하신 자비를 말미암아 그분 날개의 그늘 아래 그를 감춰 주소서. 그리하여 끝날에

 

저를 일으키사 그분의 기쁨의 흐름을 마시게 하소서."(Jewish Prayer Book).


 콘웨이(B. L. Conway, C.S.P)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 혁명가들이 연옥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 관한 성서와 증거를 몽땅 집어치웠음은 실로 이상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실려 있는 교리는 서로 뗄 수 없게 얽혀 있기에 중심이 되는 어떤 교리를 부정하면, 논리적으로 다른 여러 교리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루터는 믿음으로써만 의화(義化)된다는 그릇된 학설을 고집하여 대죄와 소죄와의 구별, 잠벌의 사실, 선행(善行)의 필요성, 은사(恩赦)의 효력,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의  유용성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그냥 감춰지기만 한다면(루터는 죄인은 죄를 용서받아 의화(義化)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외투처럼 겉으로 뒤집어씀으로서 내적으로는 죄로 인해 썩은 그대로인 채 하느님께 의인(義人)으로 인정된다고 했다.)  

 

 또 복음에 실려 있는 ’새 사람’이 여전히 죄인인 자에게 당신의 정의를 씌우는 그리스도를 뜻한다면, 죽은 이의 죄를 용서받도록 그를 위해서 기도함은 쓸데없는 짓일 것이다. 루터의 연옥 부정은 이로써 경건한 그리스도인을 많이 잃게 하는 잔인한 교설(敎說)이며, 또 이는 현대에 발생한 새로운 개신교의 주장인 영벌(永罰)을 부정하거나 또는 영혼이 죽을 때에 하느님이 ’갑자기 마술을 써서’ 그 영혼을 깨끗이 해 준다는 터무니없는 괴설(怪說)에 대해서도 그 책임이 있다." (The Question Box).


 연옥이라는 낱말은 성서에 없지만 이 낱말이 표상하는 실재(Substantia, 實在)는 신약에도 구약에도 동방, 서방 교부들의 저서에도 모두 언급되어 있다.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면 유효하다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믿었으므로 연옥에 대한 신앙도 보편적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즉 연옥이 없다면 죽은 이를 위한 기도란 뜻 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연옥 - 이성의 요구


 성서(聖書)나 성전(聖傳)의 증거를 떠나서 이성만으로 따져 봐도, 천국과 지옥과의 중간 상태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조금이라도 더러운 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에’ 소죄를 지닌  채, 또는 잠벌을 아직 다 채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난 영혼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그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면 이는 정의에 어긋날 것이다. 영원한 벌은 그가 저지른 잘못과는 비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죄만 지닌 채 죽는 이가 무수할 것이다. 그들은 즉시 천당에 들어갈 자격은 없지만, 그렇다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가 범한 죄에 맞는 벌을 받는 상태가 없을 수 없다.  이는 이성의 명령이다. 이성이 요구하는 이 상태가 바로 연옥이요, 여기서 죽은 이는 그의 소죄가 씻겨지고 말할 수 없는 행복 속에서 창조주의 엄위하신 현존에 들어가기 맞갖은 자가 된다.


 죽은 벗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함은 성서(聖書)에 맞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본성에서 본능적으로 우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성인의  통공의 교리는 우리가 필요한 때 서로 도울 수 있음을 가르침으로써 인류의 사회적, 정신적 연대(連帶性)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또 죽음의 공포를 없애주는 데 큰 효력이 있다. 16세기 종교 혁명가들은 이 교리를 부정함으로써 성서(聖書)와 16세기 동안 이어 온 교회 전통에 폭행을 가했을 뿐더러 우리 본성과 우리 마음의 갈망에 손상을 입혔다. 실로 그들은 하늘과 땅 - 육체 속에 있는 영혼과 육체라는 그릇을 벗어난 영혼 - 을 잇는 부드럽고도 거룩한 끈을 끊어버렸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형제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면, 그가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영원한 세상으로 넘어갔다고 해서 기도를 계속하지 못한다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죽음이라는 것은 단지 몸만 없어지고 영혼은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는 아직도 살고 있어, 생각하고 기억하며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기도 중에 그를 계속 기억하고 부질없이 눈물만 흘리지 말고 그를 위하여  자비하신 하느님께 간청함으로써  - 이것이 더욱 유효한 방법이니까 - 그에게 대한 사랑을 증명하지  말아야 된다는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무덤을 파헤쳐 놓고 사랑하는 몸을 그곳에 묻는 것을 보면서 눈물 어린 눈을 하늘로 쳐들고 "하느님, 제가 사랑하는 이의 영혼에 평안함을 주소서." 하고 부르짖지 않을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겠는가?

 

 개신교 신자들은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유효함에 대해서는 벙어리이지만, 자기 마음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여 모든 인류가 알아듣는 사랑과 동정이라는 말로 이에 대답하고 있다. 죽어 간 벗의 말 없는 입술에서 그는 역경 중에 허덕이던 욥이 애원한 바로 그 간청을 또 다시 듣는다.


 "벗들이여, 불쌍하고 가련하지 아니한가?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는데 어찌하여 자네들마저 하느님처럼 나를 구박하는가?"


이러한 애원이 안 들릴 수 없음은 사람의 마음이 편견 때문에 사랑과 동정심을 잃은 적이 없다는 증거다. 영원한 세계로 가 버린 영혼들, 그리고 우리가 기도 중에 기억해 주기를 연옥으로부터 간청하는 영혼들에 대해서 우리는 확실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 손이 닿지 않는 곳,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도다. 하지만 하느님께 감사하라! 그들은 결코 우리의 사랑과 기도가 닿지 않는 곳에는 가 있지 않도다."  

 

 명저(名著) ‘The Faith of Our Fathers(교부들의 신앙)’의 저자 기본스 추기경은 50년 이상 전교한 체험에서 아래와 같은 실화를 말한 적이 있다.

 

 "병들어 누워 있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온갖 정성을 기울여 간호 하던 신심 깊은 개신교 신자인 딸이 있었다. 그녀는 날이면 날마다 걱정으로 보내고 밤이면 눈도 붙이지 못한 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바삭 마른 입술을 축여 주고 열이 오른이마를 식혀 주며, 베개 밑에 떨어진 머리를 올려 주면서 환자가 좋아지면 그녀의 얼굴도 좋아졌고 환자가 나빠지면 그녀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이는 모두 그녀의 효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아버지는 죽고, 그녀는 시신의 뒤를 따라 묘지까지 갔다. 그녀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는데, 관 옆에 서 있었을 때 여태까지 그녀의 목을 잔인하게 조르고 있던 종교적 편견의 사슬이  끊기고야 말았다. 그녀는 믿고 있던 교파를 쳐 이기고 울부짖었다.

 

 ’주님,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야말로 자연의 소리요 참된 종교의 목소리였다."

 (교부들의 신앙 中에서).


 테니슨도 그리스도교 전통과 인간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연적 그리움을 표현하여, 죽어 가는 영웅 아더 왕으로 하여금 그의 벗 베디베르에게 이렇게 말하게 한다.


 나는 내 인생을 다 살았노라. 원컨대, 주께서는 그 안에 내가 한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소서. 그러나 그대, 그대가 내 얼굴을 다시는 못 볼지라도, 내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오. 기도로써는 이 세상의 꿈도 꾸지 못할 일이 이루어지노니, 나를 위해, 그대 목소리 밤낮으로 샘솟아 주오. (Morte d’Arthur, in The Best of Tennyson, p. 606).


 힘찬 교리

 개신교에서 진리를 찾아 가톨릭으로 개종한 역사가 스토다드는 종교 진리의 확실한 빛을 찾아 어둠의 안개 속에서 허덕일 때, 때마침 어느 가톨릭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고 연옥에 관한 교회의 아름답고도 이치에 맞는 교리를  암시받았다. 그에게 있어 가장 빛나고 도움이 된 이 편지는 사실(事實)을 아래와 같이 놀라울 만큼 명확히 말하고 있다.


"옛날의 어느 종교 체계를 보더라도 이것(연옥)과  비슷한 것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불멸의 교리는 16세기 종교 혁명가들이 배척하도록 남겨진 듯하다. 그들이 가톨릭의 거룩한 미사와 그 밖의 성사를 부정했을 때 연옥 교리도 도매로 넘겨 버렸다. 만일 죽은 이의 영혼이 즉시 영원히 고정된 상태로 들어가 우리 전구(轉求)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의 연(煉)미사도 기도도 이와 비슷한 신심 행위도 모두 헛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면, 즉 삼중의 교회 -승리 교회, 정화 교회, 순례교회- 가 서로 통공함을 믿는다면, 지상에 있는 우리가 이미 죽어 저승에 간 영혼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입을 수도 있다.

 

 실상 천국에 즉시 들어갈 만큼 순결한 성총의 상태에서 세상을 버리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죽은 이의 중간 집이라 할 수 있는 연옥이라는 고마운 피난처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는 더욱 없기를 바라고 싶다. 나는 개신교 신자들이 어찌해서 이 점에 관해서 오늘과 같이 고집할 수가 있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그들이 연옥을 부정함으로써 여러 사람들이 지옥까지도 부정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라지도 않는다. 사실 지옥 교리는 이것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참으로 괴상한 것이기에 말이다.

 

 실상 가톨릭의 모든 교리는 서로서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가 서면 모두 서고, 하나가 쓰러지면 모두 쓰러진다. 아치에서 돌 하나를 빼내고서도 아치가 서 있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연옥은 생각해 낼 수 있는 개념(槪念) 가운데 가장 인정미가 있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죽은 망나니 아들 때문에 못 박힌 마음이 이 교리 덕분에 희망으로 위로를 받은 어머니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Stoddard, Rebuilding a Lost Faith, p.155).


 스토다드는 개종한 다음, 자기의 종교적 편력(遍歷)을 ’잃었던 신앙의  재건’이라는 책으로 서술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자기 마음을 강하게 내리친 연옥 교리가 이치에 꼭 들어맞는 것이라고 밝혔다.

 

"연옥에 관한 가톨릭의 교리를 보면,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이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동안 단련을 받는 곳이 있다. 즉 아직 용서를 받지 못한 소죄나 허물이 남아 있거나 대죄로 인한 영벌은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로 용서를 받았지만, 그 대죄로 말미암은 잠벌(暫罰)이 남아있는 까닭이다. 더욱 교회는 우리가 기도나 미사성제로써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하여 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교회의 공식 교리도 이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 연옥(煉獄)에 무슨 물질적인 불(火)이 있는지 없는지는 가톨릭의 신앙개조(信仰個條)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은 연옥에 있는 영혼은 영적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곧 그들은 잠시나마 누리지 못하는 완전한 행복에 대한 그리움을 이 세상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할 만큼 강하게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천상 성부와 구세주를 거스르는 무수한 죄악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통절히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필자는 여러 개신교 신자들이 공식 신조로는 연옥 교리를 믿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기도 때에는 죽은 가족을 자주 기억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또 어떤 열심한 개신교 부인 한 사람이  대학 졸업한지 며칠 만에 자동차  사고로 죽은 아들을 위해서 날마다 기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부인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글을 읽은 적도 없고 그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모양인데,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그리움과 인간 본성에서  솟아나는 억제할 수 없는 본능으로 성인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 중에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전혀 입지 못할 만큼 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즉시 행복을 받아 누릴 만큼 착하지도 않은 이들이 있다." (De Civ. Dei., 21; 24).


 우리를 떠난 형제들도 연옥 교리를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아, 이치에도 맞고 권위도 있다고 깨닫는 이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개신교 작가이자 평론가인 말록(W. H. Mallock)은 그의 저서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 것인가?(Is Life Worth Living?)에서 이 사실을 썩 잘 관찰했다.

 

 "이것은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신앙이 우리의 정의 개념(正義槪念)과 합리(合理) 개념에 일치할 수 있는 유일한 교리임을 즉시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슨 피상적인 미신 이기는커녕 실로 이성과 윤리가 요구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를 믿는 것은 단지 지성의 승복일 뿐 아니라, 전(全) 도덕 이념의 한 부분을 조화한 것이기도 하다." (Is Life Worth Living?., p.290).

 

 요컨대 연옥 교리는 이성의 요구를 채우고 우리 본성의 본능적 갈망에 맞으며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최초의 개신교를 성립시킨 장본인인 루터조차도 그 자신이 ’교황의 뺨을 한 대 갈길’ 심산으로 가톨릭의 교리를 부인하도록 유혹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가톨릭의 교리를 증명하는 성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성전(聖傳)의 목소리는 너무도 압도적이라고 고백했다. 이것 역시 필자의 의견이라고 치부해 버릴 독자도 있을 것이므로, 그의 편지를 통해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

 

 루터는 1524년에 쓴 슈트라스부르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서 말씀의 쉽고도 똑똑하고 무리가 없는 뜻이 지극히 힘차고 명백하기 때문에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인정했다.


 "나는 잡혀 있다. 도망갈 수가 없다. 텍스트는 너무나 힘차다." (De Wette.II, 577).


 마지막으로 필자가 가톨릭 신자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현대의 그릇된 경향인 - 이것은 일종의 집단 정신병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도 있다- 종교무차별론자들의 헛소리에 농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종교란 진리(眞理)를 가지고 있으며 모두 선(善)하므로 어느 종교를 믿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들의 그러한 주장은 처음에는 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너무나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러한 주장이 계속되는 무신론자들의 현대에서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알게 모르게 끼쳐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가 언제나 기도하고 또한 흠숭하는 대상이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고 입으로만 외치면서 하느님의 능력을 비웃는 예가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하느님의 그러한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심을 앞의 필자의 글 -’가톨릭과 과학과의 관계 (1), (2)’- 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과학자들 -수학 ,물리, 화학,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자들-의 입을 빌려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특히 천재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던 파스칼과 뉴튼은 하느님을 그러한 이유에서 과학과 수학의 신(神)이라고 이야기했었다.

 

 수학과 과학의 오묘하고도 정교한 그 법칙을 만들어내신 그분이 자신에 대한 종교를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함부로 모두 진리라는 어처구니 없는 괴상한 것으로 만들어내셨는지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나름대로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렇다면 이제 필자가 독자에게 한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교사가 초등학교 학생 10명을 모아놓고 1 더하기 1은 얼마냐고 물었다 해보자. 그렇게 질문했더니 그 중 3명만 답이 2라고  대답하고 나머지는 틀린 답을 이야기했다고 치자. 이때  교사가 모든 학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3명만 맞고 다 틀렸다’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모두 다 맞았다.’라고 말했다 하자. 그러면 이 교사의 애정과 너그러움을 부인할 사람은 없겠지만 과연 이 교사가 제 정신인지를 의심치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10명의 대답이 옳다고 말하는 바람에 지성(知性)의 자살(自殺)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은 위의 예(例)를  어떻게 종교에 적용될 수 있는가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나 그것은 독자가 무의식 중에 종교무차별론에 젖어있음을 드러낼 뿐 종교 문제라고 해서 위에 이야기한 비유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은 논리의 근본적 원리임은 논리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으로 여기서 구구절절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일 것이기에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정하신 가톨릭의 변함없는 교리와 비교하여 다른 개신교 교파들은 그 교리가 완전히 일치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앞의 예를 머리 속에 상기하면서 누가 진리인가 하는 문제를 심사숙고해보기 바란다. 아니, 심사숙고하고 할 것도 사실은  없다. 이 문제의 답은 이미 나와 있다는 것을 현명한 여러분은 이미 알아들었을 것이기에 그렇다.

 

 노파심에서 다시 한번 말하면, 여기서 주의할 것은 앞의 이야기에서처럼 1 더하기 1이 2라고 대답한 학생의 답이 정답 즉, 진리(眞理)라는 것을 나타낼 뿐 그 학생의 인격(人格)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틀리게 대답한, 즉 오류(誤謬)를 진리(眞理)라고 생각한 학생들이 인격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앞의 예에서 답을 2라고 말한 3명만이 맞는 답을 했다고 말한 교사를 책망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처럼 다른 종교의 교리가 가톨릭과 다르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다름이 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이 질책 받아야 한다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라는 것을 이제는 독자들도 알게 되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 수많은 그리스도교 교파 중에서 오직 가톨릭의 교리만이 진리(眞理)임은 틀림없지만 그 신자 개개인 거기에 덧붙여 사제, 주교, 추기경 심지어 교황조차도 인간적인 면에서까지 모두 선하고 결함이 없는 선택받은 자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가톨릭 교회가 보존하고 있는 순수한 진리인 교리와 혼동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어느 신자 개개인의 인간적 잘못이나 사제 또는 주교나 교황의 인간적인 잘못이나 결함, 비리 등을 가지고 가톨릭의 영원불변의 진리와 하느님의 뜻하신 바를 억측하게 되고 오해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가톨릭의 교리와 다른 개신교 교파간의 교리가 다르다고 가톨릭 신자 여러분이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진리만을 말씀하셨고 진리만을 가르치라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안에서 우리의 평화로운 심정을 저명한 개신교 역사가였으나 오직 진리를 찾아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스토다드(John L. Stoddard)의 짤막한 이야기로 필자의 글을 마치겠다.


 "가톨릭 교회는 내게 혼란 대신 질서를, 의심 대신 확신을, 어둠 대신 빛을, 그림자 대신 실체(實體)를 주었다."


위의 글은 ’The Faith of Our Fathers (교부들의 신앙)’과 ’The Faith of Millions (억만인의 신앙)’에서 일부 발췌 인용했음을 말해둡니다.

 

 

 출처: 인천가톨릭대학교 이완희신부님의 글입니다.

 위령기도(연도)에 대한 고찰  

이완희 신부

 

  1. 들어가는 말

 

  교회는 설립 초창기부터 신자가 죽으면 그를 위한 여러 가지 전례적 행위들을 하였다. 박해 상황이었던 초대교회 때, 죽음을 천상탄일이라는 뜻으로 생일(Dies natalis)이라고 부를 만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신앙에 충실하였으며 죽은 이들의 영원한 생명에의 참여를 의심하지 않았다. 죽은 이를 위한 여러 가지 전례와 기도가 바쳐졌다는 기록은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중에서 죽은이를 위한 기도를 위령기도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연도라고 부른다.

 


  2. 위령기도의 역사

 

  (1) 성서

 

  구약성서에서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죽은 이를 위한 위령기도는 마카베오서에서 발견된다(2 마카12,39-45). 유다 마카베오는 기원전 163년경 유대독립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와 기도를 바친다. 전사한 이들의 옷에서 얌니아의 우상이 부적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속죄의 기도를 바친 것이며, 죽은 이들의 부활을 청하는 기도이므로 본연의 위령기도라고 하겠다. 신약성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빕니다"라는 내용으로 오네시포로라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구절(2 티모 1,18)이 유일한 위령기도이다.

 


  (2) 교부시대

 

  사도시대의 문헌에는 명료하게 위령기도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2세기에 이르러 죽은 이들의 무덤 위에 자리한 비문 등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흔적이 발견된다. 교부 떼르뚤리아노(Tertullianus)의 211년경의 작품(CCL 2: 1243)에서는 공적으로 바치는 위령기도가 발견된다. 여기서 떼르뚤리아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죽은 이들의 주년 기념일에 드리는 기도문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러한 기도가 오랜 전통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히뽈리또(Hippolytus)는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중에 사용되던 3세기에 사용되던 기도문을 소개한다(Canones Hippolyti 33.1.169).  3세기 후반의 아르노비우스(Arnobius)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임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산이와 죽은이들을 위한 평화와 용서를 청하는 기도문을 전하고 있다(CSEL 4:171).

 

  4세기에 사용되던 위령기도에 관한 증언들은 많이 발견된다. 교회사가 에우세비오(Eusebius)의 증언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은 뒤 시신을 제대 앞에 모시고 신자들이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음을 알 수 있다(콘스탄티노의 생애 4.71).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Cyrillus)도 당시 사용하던 미사 기도문 중에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부분이 있음을 증언한다(Cathechesi mistagogiche 23, 9-10: 348년). 성 치릴로는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죄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가 희생됨으로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났음을 이 위령기도 안에서 상기시킨다. 성 에피파니오(Epiphanius)도 또한 죽은이들을 위한 기도의 유익함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다(Panarion 75.7.1-5).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는 그의 형제의 사망 주기를 맞이하여 장엄하게 미사를 집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PL 16:1315-1316, 379년). 4세기 말경에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Johannes Chrisostomus)는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위령기도와 죽은 이를 위한 자선행위 등은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가르치고 있다(Homilia 3).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는 5세기 초엽의 전통을 확인시켜준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의 효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아우구스티노는 마카베오 12,43을 인용하면서 당시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던 위령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3) 중세이후

 

  위령기도는 교회 안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1274년 제2차 리용 공의회는 위령기도의 유익함을 공식적으로 전교회에 선포한다. 이는 연옥(Purgatorium) 교리의 확산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위령기도가 미사, 자선행위와 함께 연옥영혼의 구원을 위한 매우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이다(DS 856).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공적인 선언은 피렌체공의회(1439)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DS 1304).

 

또한 대사(Indulgentia)에 대한 교의의 발전으로 인해 위령기도는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1476년에 교황 식스토(Sixtus) 4세는 위령기도를 통해서 연옥 영혼에게 대사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음을 선포하였다(DS.1398). 더 나아가 이 대사를 통하여 연옥 영혼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올려질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DS 1407). 대사에 관한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트렌토(Trento) 공의회는 연옥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였다. 그리고 연옥 영혼들이 열심한 신자들의 기도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특히 제대에서의 희생제사(미사)를 통해서 더 그러하다고 선포하였다(연옥에 대한 교령 1563.12.3; DS 1820). 1840년 교황청 대사성(Sacra Congregatio Indulgentiarum)은 논란 중에 있는 대사의 개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교회가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로서의 대사와 영혼이 받게되는 효과를 명백하게 구분하였다(DS 2750). 하느님께 봉헌되는 기도로 충만한 대사는 연옥 영혼을 구원하기에 충분하지만 실제로 연옥 영혼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3. 위령기도의 신학적 근거

 

  죽은이를 위한 위령기도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교리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든 성인의 통공에 관한 교리>이며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의 인간의 활동에 관한 교리>이다. 모든 성인의 통공에 대해서 교황 레오 13세는 그의 회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체성사를 통해 더욱 깊어지고 강해지며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사랑이라는 은총은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 머무르는 모든 이들에게 흘러 넘친다. 다시 말해서 기도, 도움, 헌신, 호의 등과 같은 신자들의 나눔은, 하느님 나라에 이미 다다른 사람들과, 아직 연옥 단련을 받는 사람들, 그리고 지상의 순례 중에 있는 사람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이 넘치는 살아있는 단일 공동체 안에 머무른다는 증거이며 이것이 바로 모든 성인의 통공인 것이다(회칙 Mirae caritatis 1902.5.28 DS 3363)."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심을 고립되어 있는 개개인의 존재에게 나눠주시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몸소 만들어주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더욱 풍요하게 나눠주신다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공동체에 기꺼이 속하겠다는 결심인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하는 모든 사랑과 희생의 행위는 이렇게 공동체적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산 이들이 바치는 죽은 이들을 위한 위령기도의 의미가 공동체적 차원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의 인간의 하느님 나라를 위한 투신이라는 측면 또한 위령기도를 지지해준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독단적인 의지(Fiat)로서 마련하시지는 않으며 피조물의 도움을 통해서 이룩하기를 원하시고, 피조물의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세상에 드러내신다. 그러나 때가 오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이 심판 때에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로마 6,4)은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한다. 세례를 받은 후에 다시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죄의 탓을 씻을 수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 죄인으로서는 천국에 바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죄를 씻고 죄의 탓까지 벗어버려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때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후에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세례 후에 범한 죄를 씻고 정화되기 위해서는 연옥에서 단련을 받아야 할뿐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구원계획 안으로 모든 인간을 초대하신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살아있는 이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이를 위해 바치는 희생과 자선,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그분의 구원계획이 산 이와 죽은 이 모두에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원계획 안에서 살아있는 이들의 협조를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아있는 이들의 위령기도는 죽은 이들에게 힘이 되는 것이다.

 


  4. 위령기도의 내용과 우리 나라 고유의 위령기도인 연도

 

  로마를 중심으로 교부시대에 사용되었던 위령기도는 여러 편의 시편과 찬미가와 후렴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로마의 전례가 8세기를 거쳐 갈리아를 비롯하여 서방 전례 전체에로 확산되었고, 9-10세기를 지나면서 이 위령기도는 죽은 이를 위해 바치는 공동체의 밤샘기도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이 밤샘기도의 독서로는 욥기가 채택되었다. 트렌토 공의회 이후인 1614년에 간행된 로마예식서(Rituale Romanum)는 이전의 위령기도를 편집하여 예식서와 성무일도서에 삽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위령기도는 간이 성무일도(Breviarium romanum)가 편찬되면서 더욱 내용이 풍부해지게 되었고 죽은 이를 위한 기도도 더욱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저녁기도와 밤샘기도, 아침기도와 소시간경들 외에도 <층계송을 위한 시편들>, <성인호칭기도와 함께 부르는 7편의 시편(6, 31, 37, 50, 101, 129, 142)들>이 첨부되었으며 <영혼을 맡겨드리는 예식(Ordo commendationis animae)>도 보충되었다. 이 <영혼을 맡겨드리는 예식>은 간단한 성인호칭기도(Litania)와 영혼의 용서와 하느님 나라의 입성을 청하는 기도로 구성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새로 나온 위령기도는 두 가지로 나눠진다. 첫째는 장례예식서에 수록되어있는 위령기도로서 전통 예식서 중에서 몇 편의 시편(129, 22, 113)들을 발췌하여 밤샘기도와 입관기도를 수록하고 있다. 이 밤샘 위령기도는 시편 기도와 함께 독서를 배치함으로써 말씀의 전례 형태로 거행할 수 있게 배려하고 있다. 둘째는 성무일도서에 수록된 위령성무일도이다. 이 위령성무일도는 성무일도의 개정 기준에 맞춰 통상 성무일도와 같은 형식으로 개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연도라고 불리는 위령기도를 널리 사용하고 있다. 이 연도는 시편 129와 50편과 성인호칭기도 및 찬미기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트렌토 공의회 이후 간행된 로마예식서의 <성인호칭기도와 함께하는 7편의 시편>, <영혼을 맡겨드리는 예식> 등에서 시편과 기도문, 호칭기도 등을 발췌하여 편집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우리나라 특유의 음률로 널리 노래되고 있다. 이러한 음률은 전통의 곡(哭)의 음률과 그리스도교의 기도 텍스트가 절묘하게 합쳐진 것으로 토착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J.H.Wright, (NCE 4) pp.671-673/ H.Leclercq, (DACL 1), pp.68-75/  B.Botte, Les plus anciennes formules de priere pour les morts, (La maladie et la mort du chr tien dans la liturgie), Roma 1975 pp.83-99/ M.Muccioli, Le esequie cristiane nella Chiesa del primi tre secoli, Bologna 1969/ G.Rowell, The liturgy of christian Burial, London 1977/ V.K.Owusu, The Roman Funeral liturgy: history, celebration and theology, Nettetal 1992/ R.Rutherford, The Death of a Christian; The order of Christian funerals, Collegeville

 

 

(greatlights)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시는 인간 사후세계

 

●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데살로니가전서 4:13)

●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9-10)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전서 5:8)

 

● “사람들이 죽은 자가 실지로 돌아와서 저들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믿으면 사단은 회개하지 않고 무덤에 들어간 자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에서 행복스럽게 지내며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며 의로운 자와 악한 자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그릇된 논리를 가르친다. 그리고 영계에서 왔다고 하는 자들이 때로는 올바른 것으로 판명된 주의와 경고를 하기도 한다. 이리하여 사람들의 신임을 얻은 후에 사단은 바로 성경을 믿는 신앙을 파괴하는 교리들을 제시한다. 그들은 지상에 있는 친구들의 행복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진 체하며 가장 위험한 오류를 교묘하게 내민다. 그들은 때때로 참된 것을 말하고 장래에 일어날 일까지 예고할 수 있으며 그들의 진술이 믿을 만한 것같이 보인다. 이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영계에서 왔다는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즐겨 받아들이고 이것이 성경의 가장 신성한 진리인 것처럼 무조건 승인한다.” (The Story of Redemption, 392)

 

● 최근 몇 년 사이 세계적으로 곳곳에서 사단의 강신술이 편만해 있음을 봅니다. 여기에 대해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더욱더 사단은 여러 가지 이적들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을 이미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셨습니다. 사단은 마리아상에 피눈물을 흘리게도 하고, 감정과 느낌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쉽게 침입하여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온 것 같은 환상을 심기도 하고, 때로는 착한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말씀을 의지하기보다 신비한 경험과 감정을 의지하게 만들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전략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오는 사단의 장난에 속지 마시고 "가라사대" 말씀으로 꿋꿋이 서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영혼이란?


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① 마태복음 10장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핍박에 대한 말씀이다. 핍박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가할 수는 있으나 신앙심은 빼앗을 수 없다. ② 그렇다면, 위의 말씀에서 ‘영혼’【푸쉬케】라는 말은 ‘마음’ 혹은 ‘정신’  으로 번역되어야 타당하다. ③ 사도행전14:2에서는【푸쉬케】라는 말을 ‘마음’으로 제대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2.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마27:50)

  이 절에서의 ‘영혼’의 원어는【프뉴마】로서 ‘숨’이나 바람’이라는 뜻이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숨을 거두셨다’로 올바르게 번역해 놓았다.


3.  영혼(영)으로 사용되는 신구약의 원어들 및 의미    

낱 말

영 혼

구약(히브리어)

네페쉬

루악

신약(헬라어)

푸쉬케

프뉴마

사전의 의미

, 생명, 감정, 욕구

, 생명력, 영, 바람

종합적인 의미

개체, 개인

생명의 기운

 

 

 

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43)

 

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옆에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예수께 구원을 요청했을 때 하신 말씀이다. 마치 강도가 그날 당장 낙원에 간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다.

 

② ‘오늘’이라는 부사는 원래 ‘내가 오늘 네게 말하노니’ 라고 했어야 한다. 헬라어 문장 자체에는 쉼표(,)라는 것이 없다. 그런데 편견을 가진 번역자들이 ‘오늘’의 해석을 뒤에 함으로서 문장의 의미가 와전되어 버린 것이다.

 

③ 우선 강도의 요청 내용을 정확하게 살펴보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 공동번역 성경은 이 성경 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 하여 주십시오” 로 되어 있다. 강도의 요청은 당장  원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자기를 구원하여 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돌아가신 그날 하늘에 가지 않으셨고 무덤에서 죽음을 통해 쉬심으로 안식일을 보내셨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후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직접 증거 하셨다. 왜냐하면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로서 요제절 (1.16)의 원형이신 예수님은, 그의 희생을 받으셨다는 것과 또 그의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그의 속죄가 충분하고 넉넉하여서 그의 피 공로를 힘입어 그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보증을 아버지께로부터 직접 받으실 때까지 그의 백성들이 경배를 받으려고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곧 흠없는 제물로써 아버지께서 가납하셨는지 여부를 먼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⑤ 또한 스가랴9:12에 같은 원문이 있지만 여기서는 “내가 오늘날에 이르노라”라고 바르게 번역되어 있다.

 


5.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12:7)

 

① ‘신’은 히브리어로【루아흐】인데 본래 ‘바람’이라는 뜻이고 의미하는 것은 ‘호흡’이나 생명’이다. ② 현대어 성경(성서교 재간행사 1991년)에서는 “그 때가 되면 흙에서 온 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네 생명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다. ③ 만일 ‘루아흐’를 영혼으로 번역한다면 욥기27:3 “나의 생명이 아직 내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루아흐】이 내 코에 있느리라”는 말씀에서 영혼이 코에 있다는 우스운 말이 되고 만다.

 


6.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살전4:14)

 

① 만약에 예수께서 구원받은 영혼들을 데리고 오신다면 하늘에서 영혼들이 자고 있다는 말이 되어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된다. ② ‘데리고 오시리라’는 말은 헬라어로 【악쎄이】인데 사전에서 이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가다’ ‘데리고 가다’ ‘인도하다’ ‘안내하다’ 등의 미래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단수형이다. ③ 현대어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미 죽어서 세상을 떠난 모든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

 


7.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3:21)

 

① ‘혼’은【루아흐】인데 공동번역에는 ‘숨’으로 되어있다.

② 만일 죽은 사람의 혼이라면 짐승도 혼이 있다는 말이 되고 땅 속에는 짐승의 혼이 가득하다는 말이 되어 어리둥절하게 된다.

 

③ 문맥을 잘 살펴보면 18절에서 사람이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하심이라” 고 하였고, 20절에는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라고 한 후 위의 성경절이 나온다. 이것은 사람과 짐승의 숨이 각기 다른 곳으로 간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죽기는 일반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8.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

①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하신 말씀이며 그 때에 제자들이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하니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었느니라”하셨다. 성경에는 죽음을 잠들었다고 말한 데가 53곳이나 되는데, 부활하는 날까지 자는 잠이다. 몇 천 년이 될지라도 아무 의식이 없기 때문에 당사자에게는    잠깐 동안 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곧 죽자마자 예수님의 재림인 것이다. 나사로는 4일 동안 죽어 있다가 부활한 후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영광스러운 천국의 문턱에서 그리고 천사들과의 만남으로부터 다시 끌어내려 이 어두운 세상으로 데리고 왔다고 고백하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하나의 유치한 사기극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또한 나사로는 고통스런 지옥 불이나 연옥의 불쾌함에서 자신을 구해주신 일에 대해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지도 않았다. 만일 이러한 부활 사건이 오늘날 일어난다면 기자들이 수많은 마이크를 그의 얼굴에 들이대고 하는 첫 질문이 “죽은 후에 무엇을 보았습니까?”가 될 것이다. 놀랍게도 나사로는 사후 경험에 관하여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죽음을 꿈 없는 잠, 곧 고통의 끝에 이르러 오는 휴식의 형태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11:11)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어린 소녀를 부활시키실 때도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막5:39)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죽은 인간의 무의식 상태에 관하여 매우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당신이 어떤 그리스도인의 머리를 망치로 살짝 내려치면 그 사람은 무의식 상태에 빠지지만, 그 사람을 조금만 더 세게 내려치면 천국으로 인도되어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믿는다. 납득할 만한 생각인가?

 

② 죽어 곧 천당에 갔다면 구태여 다시 부활시키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요 부활시키신다 해도 “나사로야 나오너라”하시지 않고 “나사로야 내려 오너라” 하셨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지옥이란?


※ 사단은 성경을 없애버리려고 1,200년 동안 노력했으나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되자 전략을 변경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품성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지옥이다.

 

※ 잉카솔이라는 청년이 교회에 갔다가 목사님 설교 중에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는 곧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리고 교회마다 다니면서 외쳤다 한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겠다! 그런 하나님은 계시지도 않지만 계셔서도 안 된다" 오늘날 많은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을 떠나며 믿지 않는 이유이다.


1.  구약성경의 히브리어로【스올】과 신약성경의 헬라어【하데스】(영어로는 ‘hell')

 

① 이 두 곳은 동일한 곳이다. 이 곳은 누구나 가는 장소인 ‘무덤’을 리키는데 모두 음부로 번역이 되었다.

②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  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16:10)

③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시9:17) ▶ 악인이 가는 곳이 음부인데 악인만 가는 곳일까?

 

④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창37:35) ▶ 요셉은 의인인데 그가 간 곳도 음부이다. 음부는 의인도 가는 곳이다.

 

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전9:2) ▶ 무엇이 일반인가? 3절에 결론을 내리고 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⑥ “아래의 음부가 너로 인하여 소동하여 너의 옴을 영접하되....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사14:9-11) ▶ 바벨론 왕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장면. 이 구절을 보고 지옥에는 구더기와 지렁이가 있다고 설명을 하지만 무덤 속에서 시체가 썩었을 때 생기는 자연현상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⑦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민16:31-33) ▶ 여기서는 오늘날의 지진임을 이해할 수 있다. 지옥의 본 뜻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지옥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 이 구절을 인용하여 “땅 아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다. 음부는 무덤을 가리킬 뿐이다.

 

⑧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욕창)...내 생명의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죽음의 문턱에 있음)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욥7:5-9) ▶ 만약에 음부가 실제 말하는 악인들이 가는 지옥이라면 여기서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욥기는 의인이기 때문이다. 의인도 가는 곳이 무덤인 음부이다.

 

⑩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2:30-32)

 

⑪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20:13) ▶ 이것은 재림 후 천년 후에 있을 악인의 심판인데 둘째 사망을 위해 무덤으로부터 부활한다. 의인은 재림 때 부활한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8-29)

 


2. 【타르타루스】

 

① 이 말은 베드로후서 2:4에 단 한번 사용되었는데 한국말 성경에는 ‘지옥’으로 번역되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대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벧후2:4)

② 타르타루스는 ‘어두운 구덩이(a dark abyss)’를 뜻하는데 유다서1:6에   서도 범죄한 천사들을 ‘흑암’에 가두셨다고 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유1:6) ▶ 흑암은 지옥이며 천사들이 그곳을 떠나지 못하도록 가두어 둔 곳. 이곳은 어디일까?

 

④ ‘타르타루스’는 범죄한 천사들 곧, 사단과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추종자들이 태초에 하늘로부터 쫓겨난 곳, 바로 범죄로 어두워진 이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계12:7-9)


3. 【게헨나】

① 신약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낱말로 가장 많이 번역된 ‘게헨나’는 성경에 12회 나타난다.

 

②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 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리라......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9:43-48) ▶ 여기에 기록된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게헨나’이다. 히브리어로는 ‘골짜기’를 뜻하는 ‘게’와 사람 이름인 ‘힌놈’이 합성되어 ‘게힌놈’이라고 쓰고 있으며, 의미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말씀하실 때 왜 힌놈의 골짜기를 가지고 말씀하셨을까? 왜 거기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지하 어느 곳의 불타는 지옥으로 상상하고 있는 이 ‘힌놈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 비탈에 위치하고 있는 계곡의 이름이다. 현재는 거의 평지와 같다. ▶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힌놈의 골짜기)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5)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힌놈의 골짜기라는 곳을 지칭하실 때 그들은 그 골짜기의 실상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요시아 왕이 개혁하면서 했던 것처럼 너희들을 이렇게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에 일어나는 일등을 통해 비유하신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마19:24) 그 당시 예루살렘에 개구멍 같은 한 구멍이 있었는데 바늘귀라 칭했다. 이 말씀도 그 구멍을 비유해서 하신 말씀으로서,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무엇을 빗대어서 말씀하시는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의 배도와 타락이 극도에 달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방신에게 분향하고 몰렉 신에게 자식들을 불살라 제사 드리며 온갖 추악한 일을 자행하였다. 악한 왕의 기본이 힌놈의 골짜기에서 아들을 지나가게 하여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세라.....또 힌놈의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이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 자녀를 불사르고” (대하28:1-3) 몰렉신을 섬기는 제사를 드릴 때 불을 지퍼 자기의 아들을 순번 따라서 불 가운데로 두 발로 걸어가게 했다. 그 어머니가 아들의 비명소리 듣고 건져낼까 하여 듣지 못하도록 옆에서 북을 쳤다. 이곳이 바로 힌놈이 골짜기이다. “므낫세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이세라.....또 힌놈의 골짜기에서 그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대하33:1-6) “힌놈의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면 이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육의 골짜기라 칭하리니...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렘7:31-33) 모두 다 죽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겠다는 말씀. “왕이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로 모으고...왕이 또 힌놈의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사람으로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그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하지 못하게 하고” (왕하23:1-10)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으로서 가증한 왕들을 요시아 왕이 심판하였다. 수많은 사제들을 이곳에 사장시켰으니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것처럼 다 죽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이것이 최고의 심판이었다. 히스기야 왕도 힌놈의 골짜기에서의 제사를 금지시켰다.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며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사66:24) 시체가 썩어 구더기들이 살게 되고 불이 타오르는 심판의 모양을 연상케 하신 것이다. ▶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골짜기는 처형당한 죄수들의 시체와 죽은 짐승들의 사체를 버리고 온갖 오물을 버리는 장소가 되어 그 쓰레기를 불태우는 연기가 밤낮 타오르고 있었으며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서식하고 악취가 풍기는 곳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게헨나’는 장차 그리스도를 거절한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아 유황불로 멸망(영원한 죽음)당할 곳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지옥을 묘사할 때 불이 꺼지지 않고 구더기가 있다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4. “소돔과 고모라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유1:7)

 

① 그 불이 문자적으로 ‘영원한 불’이라면, 옛날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곳  은 지금의 사해 바다의 어느 한 곳인데 지금도 불이 타오르고 있어야 마땅하다.

 

② 지옥을 묘사할 때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타오르고 있는 곳이라고 하는 곳은, 그 불타는 시간의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 때에 악인들이 불타서 멸망당한 결과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질은?


1.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하나님께서는 흙의 성분을 취하여 사람을 구성하였고, 전깃불에서 전기 를 제거하면 전구만 남듯이 산 사람에게서 생기를 거두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

 

2.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


3.  흙과 사람의 같은 구성 요소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슘, 카리, 염분, 유황, 인, 철, 마그네슘, 기타....흙의 성분과 인체의 성분이 거의 같다는 사실은 사람이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진술에 신뢰를 더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상태


○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 하리이다 (욥7:21)

○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가 잦아서 마름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욥14:10-12)

○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시6:5)

○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  하리로다 (시115:17)

○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127:2)

○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시146:4)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잠9:10)

○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 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전3:19-20)

○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전9:5)


죽음을 잠이라고 말한 이유

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② 반드시 깨 때가 있기 때문에


○ 솔로몬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부친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왕상12:43)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신31:16)

○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마9:18)

○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의 죽어가는 장면 묘사. 행7:60)

 

○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  하니 (고전11:30)

○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살전4:13)


언제 깨는가?


○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예수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단12:1-2)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5)

 

○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엡5:14)

○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왜 깨는가?


○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8-29)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  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15:51-53)

 

○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18)


악인들의 부활은 언제인가?


○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20:4-5) ▶ 의인들의 첫째 부활은 첫째 사망이 있다는 말로서 이 땅에서 모두 한 번은 죽는 죽음 (단, 14만 4천명은 살아서 첫째 사망도 없이 재림을 맞이할 마지막 때의 백성들)

 

○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니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계1:7) ▶ 악인 중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만 예수 재림 시 부활하여 다시 사망하게 되는데 이것을 특별부활이라 한다.

 

○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계20:2) ▶첫째 부활 때 악인들은 모두 죽어 잠들고 사단이 이 지구에 천년 동안 결박당한다.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20:12-13) ▶ 이것이 사단이 천년 동안 결박당한 천년 후에 있을 악인들의 둘째 부활이다.

 

○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계20:8-9)

 

 ○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20:14) ▶ 이 악인들이 죽어야 사단도 죽을 수 있고 그래야 사단으로부터 보호를 받아 이 의인들이 살 수 있음을 알고 이 악인들은 자기들이 죽어 마땅함을 인정한다. 이로 우주의 거민들은 사단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며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선포한다. 죄와 죄인이 다시없으며 하나님의 온 우주는 정결하며 대쟁투는 영원히 끝난 것이다.


악인들의 부활 후 둘째 사망


○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왔나니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옵1:15-16)

○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말4:1)

○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6:23)

○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겔18:4)

○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시37:10)

○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 (시37:20)

 

▶영원히 소멸당하는 악인들의 둘째 사망이다.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21:1-2)

 

영원히 죽지 않는 길은?


○ 사도 바울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라고 하였거니와 사람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다 한 번은 죽어야 한다.

 

○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한계선을  정하시기 위하여 질서를 세우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2:16-17)고 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 명령을 불순종했기 때문에 죽어야 할 인간이 되었고 사망의 줄에 얽매인 바 되었다.

 

“죽지 않음”은 오직 순종이라는 조건하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에 나아갈 길을 막아 저희로 하여금 영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불순종하는 인간이 죄를 지으며 오래 산다는 것은 오히려 불행을 더 지속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 죽어야 할 불쌍한 인간에게 죽지 않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가 독생자를 주심으로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이 불법의 왕 사단의 꼬임에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독생자도 잃고 하나님의 백성들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가슴이 뜨거우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을 지니신 분으로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쓰시고 세상에 오셔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계명, 곧 돌비에 새기신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죄를 짓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 분과 같은 생애를 살아야만 영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또한 우리도 그 분과 같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인성을 쓰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7:25)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4)


영혼불멸 사상의 발단


1. 영혼불멸의 의미

   사람의 몸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말하며, 육체의 죽음 후에도 영혼은 죽지 않고 계속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2. 영혼불멸 사상의 시작

 

○ 에덴동산의 선악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 사단의 거짓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창3:4-5)   

 

○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 사단은 이 거짓말을 감추기 위하여, 몸은 죽었지만 영혼은 죽지 않았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갖도록 하였으며, 사단과 함께 하늘에서 쫓겨난 악한 천사들이 죽은 자의 영혼 행세를 하며 인간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요한계시록 12:7-9)

 

○ 무당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림 (사무엘상28장)

   사울 왕이 신접한 여인에게 가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신접한 여인은 결국 사무엘을 불러내었고 대화를 나누는데 이 유령은 사무엘이 아니라 변장한 사단이었다.

 


3. 영혼불멸설이 교회의 교리로 만들어진 과정

 

○ 이집트의 영혼불멸 사상 (미이라)

○ 피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기원전 6세기)

 

○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 :  참다운 철학자만이 죽어서 하늘로 간다. 선한 영혼은 천국에, 악한 영혼은 지옥에, 중간적인 영혼은 연옥에 간다고 결론짓는다.

 

○ 필론→오리게네스→테르툴리아누스→아우구스티누스→토마스 아퀴나스 →단테 (신곡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영혼불멸 사상에 입각한 지옥, 연옥, 천국을 민속 신앙으로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이 이교 철학 사상으로 전해지던 영혼불멸 신앙이 그리스도교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자 1513년 교황 레오 10세는 제 5차 라테란 종교회의를 거쳐 역사적인 교서를 반포하기에 이른다.

 

○ 이렇게 이교적인 영혼불멸 사상이 중세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1517년). 프랑스의 젊은 카톨릭 신자 칼빈이 1532년 개신교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그가 개종한 지 2년만인 1534년 25세 나이에, 영혼불멸설을 반대하여 죽음을 잠과 같은 무의식으로 가르친 재세례파 그리스도인들을 신랄히 비평하고 이단으로 정죄하는 최초의 신학 논문인 ‘혼수론’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그 논문이 오늘날 일반 개신교회들의 영혼불멸 신앙을 정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어이없는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칼빈에 앞서 성서에 입각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 위클리프, 틴테일, 독일의 루터 등이 이미 중세 교회의 영혼불멸설 교리가 이교적인 사상임을 공공연히 지적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교 사상이 개신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4. 성경 번역자들의 사상문제

   성경의 원어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이다. 성경의 번역 사업은 주로 종교개혁 시대 이후로 크게 발전되었는데, 천년 이상 카톨릭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번역자들이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번역자들은 대체로 이미 중세 교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영혼불멸사상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 원어를 취급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기존 개념에 기초하여 용어를 선택했던 것이다. 성경 원문의 뜻을 충분히 반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마땅히 “침례”라고 번역해야 하는 부분을 여전히 “세례”로 사용하는 것도 그 하나의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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