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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손)

[교황]익명(匿名)의 그리스도인(Annoymous Christian) 공식 교리는 아님

작성자혼인잔치|작성시간09.04.08|조회수413 목록 댓글 0

익명(匿名)의 그리스도인

 

가톨릭에서는 "비록 무신론자라도 진리를 탐구하며 자기의 도덕적 양심에 요구하는 바를 실천하는 자를 익명(匿名)의 그리스도인(Annoymous Christian)이라 하며, 인간 쪽에서 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무신론자일 수 있어도, 하느님 쪽에서 보면 엄연한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로 고백하고 있는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은 비(非)그리스도인, 설령 무신론자라도 그들의 구원 가능성에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원하시는"(1디모 2,4)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구원 가능성을 비관적(悲觀的)으로 본다는 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 뜻을 과소 평가하게 되는 것인 만큼, 그리스도인은 다른 종교인들을 얕보거나 무시하지 않고 형제적 자세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을 명백한 말씀으로 강조하셨고, 모든 사람이 마치 문(門)을 통하는 것처럼 세례(洗禮)를 통하여 들어가는 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셨으므로 교회가 구원의 정상적 방법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인의 탓이 없이 복음(福音.그리스도)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비록 하느님만이 아시는 길로써 구원으로 이끄실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여러 신학자들의 연구와 발표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다른 가톨릭 사이트에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복사하여 붙여 드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타종교인들의 구원

 

본 문헌은 공식적으로나 혹은 가시적으로 교회의 구성원이 아닌 이들도 구원에 도달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타종교인들이나 비그리스도교인들이 그들의 힘으로 구원에 도달할 가능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결과로써, 그리고 성령에 의해 주어진 은총을 통하여, 그리고 그들의 자유로운 협력을 통하여" 오는 것으로 본다.

 

다양한 종교 전통들도 그들 민족의 역사와 문화 안에 고상하고 품위있는 가치들을 담고 있는데,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이러한 가치들도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 안에 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특히 타종교의 기도문들과 의식들이 인간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개방되도록 도와주는 성격을 갖고 있을 때, 그것들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타종교인들의 구원은 그들이 갖고 있는 종교 문화들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창조 때 주신 보편적인 선물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갖는 것이며 그것이 독자적이고 사효적(事效的)인 구원 효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상 구원을 위해 파견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이 세우신 교회와 관련하여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 문헌이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들도 타종교의 구원적 가치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신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이 문제는 구원신학의 지속적 과제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이론으로서 가장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적 포괄주의이론"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노선을 따르고 있는 이들은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 한스 큉의 "가능적 그리스도교설", 그리고 화쿠와의 "성취이론", 그리고 요셉 라칭거의 "비그리스도교의 대림적 성격 이론"으로 열거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칼 라너(K. Rahner)의 "익명의 그리스도론"이라고 볼 수 있다. 라너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유비적(analogous) 방법에 입각한 초월적 신학(超越的神學)을 전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은 선과 사랑으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은 선험적으로 (a priori) 하느님의 창조섭리와 은총을 깨달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萬物)과 만사(萬事)를 통해 건네오시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인간은 일상적인 체험(日常的 體驗)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실존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와 더불어 인간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의 절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체험의 전형을 보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와 자기 전달의 절정이며 영원한 로고스께서 육화되신 분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체험의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명시적인 신앙고백(explicit confession)을 통해 이 은총에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타종교인들도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보편성 안에 있으므로 하느님 체험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에 "함축적 그리스도인"(implicitly Christian)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비록 명시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지는 않았지만 선한 양심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때, 이들도 그리스도인과 같은 착한 삶을 살아가게 되므로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이 상태로 계속 머무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구원의 충만한 의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체험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라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가시적 공동체이며 인간 역사 안에 그분을 보여주는 영원성의 현존이 된다. 그러므로 익명의 그리스도인도 가톨릭 교회 안에서 명시적으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구원의 충만성을 이루는 신앙적 상승(信仰的 上昇)을 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타종교인들의 충만한 구원을 위한 선교적 차원이 열린다고 볼 수 있다.

 

 

 

 

 


 아시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더 데레사가 있었듯 남미(南美)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카마라(Dom Helder Camara, 1909-1999)대주교가 있었다. 그는 브라질의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곤궁에 처한 사람들이 있는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서 봉사하였다. 그의 첫 저서는 성경 주해서였다. 그 뒤에 <Through the With Dom Helder Camara>를 출판하였는데 내용이 범상치 않았으며 깊이도 있었다. 그래서 불란서의 소설가 로저 보젼(Roger Bourgeon)이 기획한 TV방송에 카마라 대주교가 출연하여 이 책을 중심으로 강론하기도 하였다. 이의 내용을 발췌편집하였다.
 
[나는 때때로 가톨릭 신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신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신자를 골라 뽑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그들에게 머물고 그들 안에서 숨쉬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만 구원을 받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사랑과 도움에 굶주리고 목말라하고, 에고에서 벗어나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떠나려고 애쓰고, 이웃을 돌보려 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려 하고, 선한 일을 하려고 애쓰는, 세계도처에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종교와 관계 없이 모두 하느님의 성령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동양에서 그리고 서양에서 올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서 몇몇 가톨릭 신자들과 불교의 일부 신자, 유대교의 일부 신자, 이슬람교의 소수의 신자, 개신교의 일부 신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경우 주님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골라 뽑아 주님을 믿게 만들었는데도 하느님의 집에는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믿지 않아도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데 종교는 왜 필요할까요?
 
 우리들은 자신만이 진리를 바로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면 무신론자라도 예수님과 같은 삶,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진리를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고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워낙 위대하셔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느님의 그 넓은 가슴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들은 하느님보다 훨씬 더 위대해져야 합니다. 
 
 나는 우리들이 보지 못했던 달의 뒤 부분 사진이 처음으로 찍혔을 때 무척 놀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들이 하느님 아버지와 마주 앉게 되면 무척 놀랄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을 얼마나 알지 못했던가를 실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만 성령을 독차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겸손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들보다 더 진실한 그리스도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제자들이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간청한 말을 좋아합니다. 우리들은 기도하는 방법을 이미 배워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기도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만 하고 있지, 가슴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사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진실로 하느님이 우리들의 아버지라고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나의' 아버지,'우리의' 아버지입니까? '우리들의' 아버지이면 우리들은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같은 아버지를 가진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미사 시에도 아무 생각 없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은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이 진정으로 우리들의 형제자매라면 그들이 아픈지, 굶어 죽어 가고 있는지 마땅히 알아야 하며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같으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에게 청하는 것이 무엇인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시고 우리가 청하는 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아무 대가도 바라시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오히려 좋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어린애와 같습니다. 아버지는 어린애가 갖고 놀기를 바란다고 칼을 주지 않으며 혼자 계단을 내려가게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내가 좋아하는 기도를 아십니까? "주님, 당신의 은총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저가 원하도록 도와 주시고,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저가 좋아하도록 도와 주소서."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물론 모든 것이 우리들 하기 나름이지만, 우리들 자신을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리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취약한 점을 보완하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대로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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