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12(목)
<17>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열 처녀
- 열 처녀의 비유
함께 읽을 성서본문: 마태복음서 25: 1~13
1. 한밤중의 혼인잔치
1세기 유대인들은 혼인에 앞서 보통 두 명의 증인이 보는 앞에서 혼인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이 계약서에는 신랑측이 지불할 신부의 몸값과 신부측의 지참금, 그리고 신부의 가족들에게 줄 선물까지도 상세히 기록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렇게 계약서 작성이 끝나면,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서 혼인잔치가 벌어질 아버지 집이나 자신의 집으로 떠난다. 이때 신부 쪽 처녀들이 등불(횃불)을 들고서 신랑과 신부가 가는 길을 밝혀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란영화 <취한 말들의 시간>에 나오는 쿠르드족의 결혼풍속을 보면, 예수시대 팔레스타인의 결혼이 어떠했을지 대강 짐작해 보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거기서도 결혼계약이 먼저 이뤄지고, 정한 날짜가 되자 신부를 노새에 태워 신랑의 가족들이 마중 나온 곳으로 데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동생 문제로 계약 이행에 말썽이 생겨 추운 노상에서 한동안 양가 혼주들이 옥신각신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신랑도 혼인 계약서 작성에 뭔가 어려운 일이 발생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신랑은 예정된 시각보다 많이 지체한 뒤,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혼인잔치가 시작될 집에 나타난다. 그런데 들러리인 처녀들이 대기하고 있는 집이 신랑 측 집인지 신부 측 집인지 분명치 않다. 더구나 신부는 아예 언급도 되지 않고 있다. 유대의 전통혼례 습관과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긴 혼인풍습은 나라마다 다양하고, 같은 나라 안에서조차도 시대, 지방, 신분, 종교 등 여러 요인에 따라 얼마든지 다소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이 비유에 나오는 결혼풍습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야할 것이다.
2. 보아라, 신랑이다
처녀들은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저마다 등불을 준비해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나타나면 환히 길을 밝히고 즐겁게 혼인잔치 집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처녀들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 뒀느냐의 여부에 따라 미련한 자 다섯과 슬기로운 자 다섯으로 구분된다. 이런 두 가지의 상반된 구분은 마태기자가 즐겨 쓰는 표현 방식이다. 지혜로운 건축자나 어리석은 건축자(마7:24, 26),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 악한 종(마24:45~51) 등의 사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왜 열 명의 처녀이며 다섯 명씩 나뉘고 있느냐에 대한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비유를 보통 알레고리적으로 많이 해석해왔다. 그래서 신랑->예수, 열 처녀->교회, 신랑의 지체-> 재림의 지연, 신랑의 도착->재림, 어리석은 처녀 거부-> 마지막 심판, 등과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처녀-> 믿음과 행함을 갖춘 기독교인, 혼인잔치->천국 등으로 각각 이해한다. 하지만 이 비유가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교회에서 교훈을 주기 위해 알레고리 형태로 일부러 만들어낸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혼인한 부부사이(야웨-남편, 이스라엘-신부)로 보는 은유를 찾아볼 수 있다. (호2:18, 사54:5~8) 하지만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신랑-메시야의 알레고리는 후기 유대교 자료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구도는 바울에게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며(고후11:2), 초기 교회에서 즐겨 사용한 것이다.(요3:29, 계19:7) 그렇다면 이 비유를 반드시 알레고리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학자들 중에는 예수께서는 당초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알리고 깨어 준비토록 하기 위해 이 비유를 가르쳤을 것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그랬던 것이 차츰 교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재림의 지연을 어떻게 이해하고 준비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비유로 변형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 못했던 처녀들이 시장에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도착하여 문은 닫히고 말았다. 그런데 혼인잔치 집에 들어가지 못한 처녀들이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님”이라는 호칭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적인 호칭이지 비유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신랑의 대답인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는 표현도 예수님이 자주 쓰셨던 용법이지 신랑이 말할 법한 그런 어투가 아니다. 따라서 이런 표현들은 후대 교회의 반영임에 틀림없으나, 그 외에 전반적인 비유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삶을 위해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신 말씀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3. 깨어 있어라!
비유의 마지막은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종말과 재림을 암시하고 있다. 이 말씀은 24장에 나온 다음의 말씀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42)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각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44) 또한 맨 처음 시작부분인 “그때에(ΤὀΤε)”(200주년기념성서)도 24장부터 이어지고 있는 파국의 때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비유의 말미에서 “깨어 있으라!”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음에도 열 처녀들은 모두 신랑이 늦어지자 졸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잠든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고, 등잔을 밝히기 위해 넉넉한 기름을 준비했느냐가 더 중요했다. 마태는 7:21, 눅13:25~27, 막 13:35을 염두에 두면서 본래의 비유를 확대하여 종말의 맥락에다 넣어 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는 산상수훈에서 ‘등불’을 ‘선한행실’의 의미로 사용한 바 있다.(마5:15~16) 이 비유에서 언급된 등불도 그렇게 이해한다면,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은 인내력을 가지고 선을 행해야함을 말하는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랑은 준비성이 없는 처녀들을 매몰차게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와 종말에 대한 준비가 어떠냐에 따라 축복과 재앙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는 경고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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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고리 해석이란
알레고리 해석은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고 상징적 의미를 찾으려는 해석이다. 성서해석에 알레고리적 해석법이 많이 쓰이는 이유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단순한 문자적 의미를 넘어 신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알레고리 해석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해석법이다. 플라톤은 참된 실체란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 놓여 있다고 하였다. 이런 가르침이 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외견상으로 보이는 문자적 의미보다 그 이면에 있는 의미를 찾도록 영향을 미쳤다. 이 해석법은 당시의 일반 문학을 해석하는 데도 많이 사용되었다. 알레고리 해석의 장점
장점은 본래 문자적 의미를 전하지 않는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알레고리적 해석의 거두인 오리겐이 알레고리 해석을 주장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은유, 예화, 비유 등을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알레고리 양식의 본문을 해석 할 때 유익하다는 장점을 또한 가지고 있다. 이런 본문으로는 비유가 많은데 비유는 무조건 상징적 의미가 하나인 직유나 은유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교부시대로부터 역사비평이 등장 할 때까지 알레고리 해석이 주류를 이루며, 해석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역사비평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알레고리 해석을 배척했으나, 이것은 부당한 일이다. 성경에는 여러 비유를 비롯하여 알레고리 양식의 글도 많이 있다. 이런 글은 알레고리 해석법으로 해석해야 옳다.
대표적인 본문으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막 4:1-20)와 은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막 4:26-29), 겨자씨 비유(막 4:30-32), 그리고 악한 농부의 비유(막 12:1-12), 가라지 비유(마 13:24-30)등이 있다. 알레고리 해석의 문제점
알레고리 해석의 문제점은 본문의 접촉점과 설교의 접촉점의 공통분모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이다. 설교자가 알레고리 해석의 함정에 쉽게 빠지는 일차적인 이유는 본문의 의미를 오늘의 상황으로 문자적으로 가지고 오면, 그 문자적인 의미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전혀 그 의미를 올바로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문의 문자적 의미가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자는 본문의 의미를 오늘의 상황에서도 유효하도록 하기 위하여 본문에 알레고리의 의미를 덧붙인다. 그렇게 본문의 접촉점과 무관한 의미들이 덧붙여지고 오늘의 상황 속으로 들어와서 본문이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다.
알레고리 해석에서는 본문에 담긴 접촉점이나 당시의 구속사적인 시대적 정황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들 속에서 오늘의 설교에 필요로 하는 영적 혹은 윤리적 적용점만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덧붙여지는 의미들이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사기 7장에서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와 전투해서 승리를 거두는 과정(삿7:19-23)을 해석할 때 알레고리 해석으로 덧붙인다면, 횃불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항아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가로막는 내 아집과 교만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은 교만의 항아리를 깨부술 때 비로소 역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밝게 빛을 발하는 순간, 우리는 나팔처럼 담대하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도하며 입술로 고백하고 찬송함으로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알레고리 해석법은 본문이 역사적 배경과 문맥, 그리고 문자적 표현을 통해 명백히 가르쳐 주는 내용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본문의 요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해 통일된 의견이 없고 자의적 해석이 많아서 주관적인 경향을 띤다. 따라서 그 해석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어렵다. 알레고리적 해석의 대표격인 오리겐마저도 자기 해석의 정확도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사기의 기드온 예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알레고리 해석은 본문의 고유한 의미를 상실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탕자의 비유(눅15:11-32)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시는 것에 비난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비유다. 그런데 이것을 알레고리로 해석하여 큰 아들은 유대인, 작은 아들은 이방인으로 보며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가는 구속사로 보여 주는 비유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본문의 핵심 메시지인 죄인을 받아들이고 용납하라는 메시지가 상실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은 성경을 해석하는 여러 방법 중에 하나이고, 특별히 비유와 같은 알레고리적 구절을 해석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지만, 그 외의 성경구절까지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본문의 본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고, 자칫 이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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