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화론(黃禍論, yellow peril)
출처 : 다음백과
중국인을 쫓아내자!
19세기 말 미국 신문의 만평 하나. '백인 여성의 시신 위에서 입에 칼을 문 중국인이 권총을 쏘아댄다. 천지는 중국인의 방화로 불탄다.' 그림이 전달하려는 의도는 명확하다. '중국인을 쫓아내자!'
붓의 편견은 폭력을 불렀다. 중국인 학살 사건이 빈발하고 1882년에는 중국인 배척법까지 만들었다. 대륙횡단 철도를 깔 때 노동력의 절반 이상을 제공해 서부 개척의 숨은 공로자로 꼽히는 중국인들이 오히려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불경기의 원인을 저임금의 중국인 노동 이민 때문으로 돌리기도 했다.
황인종에 대한 편견은 '황화론(黃禍論)'으로 발전한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1895년 9월 26일자 편지에서 '유럽 문명을 파괴하려는 아시아인들에게 맞서 단결하자'고 촉구했다. 이때 처음 쓰인 '황화(yellow peril)라는 용어는 곧 서구 사회 전체로 퍼지고 아류작이 쏟아졌다. 영국 시인 키플링이 발표한 '백인종은 미개한 야만인들을 교화할 책임이 있다'는 내용의 시 〈백인의 책무〉(1899)에서 1977년 나온 소설집 《황색 악마》까지 황인종에 대한 편견과 황화론은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과연 황화론이 현실화할까. 멜라민 분유의 공포가 확산되고 베이징올림픽에서의 국수주의를 목격한 2008년을 되돌아보면 혹여 그럴 것도 같다.
문제는 '황화'가 중국인만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시안 전체가 대상이다. 미국의 전설적인 노동 운동 지도자인 새뮤얼 곰퍼스는 '우월한 백인은 열등한 아시안들을 법이나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쫓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산 차량이든 중국산 장난감이든 대미 수출이 늘면 어김없이 황화론이 등장하고 한국산 제품까지 덩달아 견제를 받는다. 황인종은 정녕 천형(天刑)을 안고 태어났는가.
황화론 yellow peril , 黃禍論
출처 다음 백과
요약 19세기 후반 유럽인종들 사이에 일어난 황색인종 경계론.
장래에 황색인종이 흥기하여 백인인종에게 해를 입힐 것이라는 논리로 이는 동양인 특히 중국인의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에 대한 공포와 경계에서 비롯되었다. 독일의 지리학자로서 중국 문제의 최고권위자라고 불리는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유럽인이 중국인에게 중국의 거대한 천연자원과 노동력 이용법을 가르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했다.
이어서 영국의 찰스 H.피어슨 교수도 1893년에 런던에서 간행된 저작 〈국가의 생명과 성격-일예견 National Life and character, A forecast〉에서 유럽 국민은 전세계가 아리아 민족과 그리스도 신앙에 따르도록 운명지어졌다고 생각하고 유럽인들끼리 우월권을 가지고 다투었지만, 앞으로는 예속민이라고 무시했던 사람들에 의해 압도되고 추격당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역사가 헨리 브룩스 애덤스도 1895년에 간행한 저서 〈개화와 쇠퇴의 법칙 The Law of Civilization and Decay〉에서 구미열강의 우월을 낳았던 기계문명이 동양에도 옮겨져 공장이 인도·일본·중국에서도 정비될 것이며, 그 결과 여러 백인민족은 여러 동양민족의 값싼 노동력에 의해 압도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값싼 노동력에 의해 생산된 동양의 생산품은 좀더 유리한 조건으로 유럽 여러 도시에서 팔릴 것이라고 했다.
1894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격파하자, 황화론의 대상은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옮겨왔다. 그때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는 황화론을 이용해서 러시아를 자극하여 러시아가 아시아 쪽을 침략하도록 했다. 이로써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압력을 약화시키려는 동시에 아시아에 침략하려는 프랑스·영국·러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려고 했다. 이에 러시아는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난 뒤에 프랑스·독일과 함께 3국간섭을 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청나라에 되돌려주도록 했다.
그 후 러시아는 점점 극동으로 진출함으로써 1904년에는 급기야 일본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이때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러시아는 아시아에서 후퇴했다. 한편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더욱더 황화론의 경계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러일전쟁 이후에는 황화론이 대두되지는 않았지만, 황색인종에 대한 인종적 편견은 그후에도 오랫동안 일부 백인종 나라에서 유지되고 있다.
동서의 열강이 잠자던 사자 중국에서 서로 각축전을 벌이던 청일전쟁 말기인 1895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황색인종이 유럽 문명에 대하여 위협을 준다고 규정, 황색인종을 세계의 활동무대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던 정치론(政治論)을 황화론이라고 합니다. 이 배경에는 인종차별 ·인종편견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당시 일본의 국력과 국제적 발언권의 강화가 유럽열강의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정책에 방해가 된 것이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황화(黃禍)를 방지하기 위하여 러시아의 극동정책을 강화시켜 일본에 대한 관심을 높이게 하고, 러시아를 극동에 세력을 가지는 영국과 대립시킴으로써, 발칸과 근동방면(近東方面)에서의 러시아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점에 정치적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정책이 노골적으로 나타난 것이 1895년의 영국과 중국에 대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에 의한 삼국간섭입니다.
인도의 베다 신화에는 神이 인간을 만들때 진흙으로 먼저 인형을 만들고 이것을 도자기 굽듯 불에 굽는데 처음에 너무 태워서 시커멓게 만들어진 것이 흑색인종이고 다음에는 이 시행착오를 만회하려고 신경쓰다 설구워낸 것이 백색인종이고 삼 세번째로 노랑노랑 알맞게 구워낸 것이 황색인종이라는 신화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와 똑같은 황색인종 우월신화가 아메리카의 원주민 피마족에게서도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핍박은 어쩌면 이런 구원(舊怨)에 대한 앙갚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듭니다.)
서구인은, 이러한 신화시대 이래의 열등감 때문인지 백색인종들의 황색인종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심은 대단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펴 보아도, 영원불변할 것으로 확신했던 로마제국이 북부 아프리카의 식민지 알렉산드리아등의 피부색이 짙은 주변의 이민족들의 경제 교란을 당하여 멸망하는 이유 중의 하나(흉노족=훈족의 유럽이동으로 게르만족이나 반달족이 로마로 이동하면서 로마 제국이 멸망)로 황화론이 대두되고 그 뒤에도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고대군이 유럽을 유린하고 쑥밭으로 만든것 이 또한 황색인종의 화(禍)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907년 미국은 노동시장을 잠식한다는 이유로 황색인종 이민배척법이 생겨나고, 문화수용의 천재인 이들 자녀의 취학을 거부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대미 경제진출과 한국의 경제약진이 중요 타켙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신흥 재기하는 아시아제국의 발전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배척 경원하는것 이, 우리의 우방국 미국이 외치는 신황화론입니다. 이제와서 해묵은 黃禍라 는 용어를 쓰가며 역사적으로 잠재한 반감을 다시 환기시키는 일은 그다지 좋은 정책은 아닙니다.
나는 얼마전까지도 이 황화론과 서구의 몰락을 같은 것쯤으로 잘못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양이 몰락하는 것은, 동양도 마찬가지겠만 유기체의 생로병사의 필연의 과정이요, 황화론은 유럽의 백색인종이 아시아 황색인종의 탓으로 재앙을 당한다는 원망이 서려 있는 나쁜 사례입니다. 말하자면 백인우월주의에 따른 인종차별이요, 인종편견의 타기해야할 나쁜 주의 주장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슈펭글러는 제2차 모로코 사건을 접하면서 독일과 프랑스가 충돌할 것을 직감하고 <서구의 몰락>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문화란 발생, 성장, 노쇠, 사멸의 과정을 밟는 유기체와 같아서 이미 고도성장을 이룬 서구 문화는 필연적으로 사멸, 몰락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에 따르면 근대 서구의 합리주의는 곧 몰락의 징표인 셈입니다. 당시 학자들은 슈펭글러가 직관과 운명에 기댄다면서 비판했지만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불안해하던 사람들은 이 책을 극찬 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독일 제국은 10년 내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던 슈펭글러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고독하게 살다가 1936년 5월 10일에 뮌헨에서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 날은 그의 쉰여섯번째 생일을 3주 앞둔 날이자 히틀러 치하의 독일이 몰락하기 정확히 9년전이기도 했습니다.
출처 : 나무위키
Völker Europas, wahrt eure heiligsten Güter
유럽의 민족들이여, 그대들의 신성한 재보를 지켜라
-헤르만 크낙푸스(Hermann Knackfuß), 1895
독일을 상징하는 대천사 미카엘이 유럽 국가들에게 용(중국)을 타고 날아오는 부처(일본)를 경계의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묘하게도 독일을 제외한 유럽 국가들이 아테나를 연상시키는 여성으로 묘사되어있다.
목차
1. 개요 2. 유럽에서 3. 미국에서 4. 유목제국들과의 연관은 있는가?
1. 개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황인종들에게 정복 당할지도 모른다는 유럽인들의 위기론.(...)
2. 유럽에서
이 "황화"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내어 주창한 사람은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이다. 이러한 황화론은 당연히 인종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있는 것이지만, 사실 황화론과 인종주의의 관계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었다. 여기에는 단순히 황인종에 대한 멸시적 인종주의 뿐만 아니라, 당시 독일 제국의 범게르만주의(Pan-Germanism)과 그와 충돌하고 있던 동시대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Pan-Slavism)까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때는 마침 부동항을 찾아나서던 제정 러시아와 동아시아에 뒤늦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대영제국의 동아시아 진출이 맞물려있던 때로, 동시에 일청전쟁에서 일본제국이 승기를 잡아가면서 일제의 국제적 발언권이 높아지던 시절이다. 빌헬름은 이를 자신의 제국과 대치 상황에 있던 제정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발칸 반도와 그 너머로 범게르만주의를 확산시킬[2] 기회로 보고 마침 새로운 열강으로서 힘을 확장시킬 단계에 있었던 일본을 경계 대상으로 주창하여 러시아와 영국이 자국의 국력을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집중시키는 상황을 유도하려 했다.
실제로도 (몇십년 전만 해도 페리 제독이 "개화시킬 야만족" 취급을 하던) 일본의 갑작스런 국력 신장을 마주했던만큼 러시아와 영국이 둘 다 이러한 황화론에 성공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가장 큰 결과로 러일전쟁이 벌어져 러시아측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야 했다. 다만 빌헬름 2세 본인이 그 기회를 틈타 범게르만주의를 확산시키려는 본래의 의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이는 황화론 주창 자체는 외교적으로 효과적인 전략이었으나 정작 독일 제국 자체가 내정이 시망인 탓이었다 봐야 할 것이다.[3]
여담으로 빌헬름 2세가 일본에 대한 황화론을 펼치는 데에는 보다 통속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빌헬름 본인이 그냥 일본인들을 싫어했다는 것도 있었다.[4] 그래서 그런지 대한제국시절 고종과 빌헬름 2세와의 친분적 교류가 있었다. 실제로 당시만 해도 상대적으로 유럽으로 유학 가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다른 극동인들에 비해 일본인들은 아예 국가 차원에서 프로이센을 모델로 한다며 유학을 보내는 일이 많았으니 일본인들을 개인적으로 접하게 되는 일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일단 유럽과 러시아 일대에서의 황화론 소동은 이렇게 일단락된다.
그러나.....
3. 미국에서
그런데 정작 원조인 유럽에서는 높으신 분들의 정치적 수사로 쓰였던 황화론이 이민 사회인 미국에 소개되고나서는 약간의 의미 변화를 겪은 뒤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미국이 "도금 시대"라 불리는 호황기가 끝나가면서 몇몇 하류층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인 이민자들이 (속어로 "쿨리"라고 한다. 스펠링은 Coolie.) 자신들의 일자리와 기회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는 인종갈등론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 "황화 (Yellow Peril)"라는 말이 자신들의 위기감과 새 인종갈등론을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인 단어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표현이 바로 이른바 "더러운 노란색 폭도들 (Filthy Yellow Hordes)"이라는 문구. 게다가 미국의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황화론은 굉장히 오래 가서 (처음에는 중국계 미국인을 주로 타겟으로 했지만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의 활동반경이 넓어지자 일본계 미국인들에게도 확대되었다.) 1917년의 이민제한법안과 1924년의 국적식별법안은 황화론이 주 원인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5]
이러던 황화론에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당연히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살던 곳에서 쫓겨나 집단수용소에 가둬지고 황화론은 아예 태평양 전선에서 맞닥드린 동양인들을 침팬지(...)로 묘사하는 수준까지 간다.[6] 거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나서도 중국의 공산화와 냉전의 확산으로 미국의 황화론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중국계 미국인들은 그렇지 않았다지만 정작 본토의 중국인들은 모택동을 "건국 영웅"으로 숭상하고 그런 모택동은 인간백정 스탈린과 쌍쌍으로 노니 이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눈치챘겠지만 정작 당시 미국 백인들은 황화에 대한 광증을 겪으면서도 여러 국적의 아시아인들을 그냥 다 "황인"으로 묶어버리는 뻘짓이 생활화됐기에 일본과 중국이 번갈아가며 미국의 적성국가가 되는 이 얄궂은 시대상에 황화론이 멈추지 않는 게 당연했다.
황화론은 80년대에 미국과 소련이 군비증강으로 똥꼬쇼를 하는 동안 일본의 경제가 고속성장을 하여 잠시나마 일본이 미국의 초강대국 자리를 위협하자 더 극에 달한다. 단적인 예로 1988년 기준으로 시가총액으로 따졌을 때의 "세계 50대 기업" 중 3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 다만 이 시기 직후는 다행히도 황화론이 사그라드는 계기가 됐는데 일본의 버블경제가 몰락하게 되고 마침 동시에 냉전도 끝이 나면서 (물론 중국과는 리처드 닉슨 때 이미 국교가 완화되었지만) 황화론이 미국 사회에서 조금씩 옅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LA 폭동 때 두순자 사건을 집중보도 하기에 바빴던[7] 미국 언론들을 생각하면.....
이후 중국의 국력이 급상승하면서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중국 위협론 문서 참조. 단, 중국 위협론 자체는 황화론과 다른 점도 있다.
4. 유목제국들과의 연관은 있는가?
한 때 이 항목에서는 처음 작성 이후 몇년 동안 "황화론"이라는 개념이 청나라의 전성기 때부터 유럽인들 사이에서 본격화된 것처럼 서술했고 심지어는 몽골 제국까지 그 기원을 찾는 서술도 있었으나 엄밀히 말해서 "황화"라는 말은 17-18세기 당시에는 조어되지도 않았고 당시의 유럽인들도 청나라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갖기는 했어도 심각한 경계심 같은 것을 가지지는 않았다. 고로 황화론이 청나라(더 거슬러가서는 "몽골 제국")에 의해 시작됐다는 주장은 사실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적어도 유럽에서의 황화론은 19세기 말 빌헬름 2세의 정치적 계략에 온 유럽인들이 수선을 피운 소동이라고 보는 게 맞으며, 유럽인들을 이렇게 행동하게 한 "신빙성"이란 것도 사실 일본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매우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사실 17-18세기 당시의 유럽인들은 청나라에 대해 막연한 환상, 혹은 동경을 갖고 있었지 경계심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오히려 시누아즈리라고 해서 당시에 떠오르던 로코코 예술에 중국풍을 가미하는 게 대유행을 했고 이 때문에 온갖 경로에서 중국 예술품이나 도자기 등을 있는대로 긁어모았다. 이 시누아즈리는 사실 꽤 오래된 전통이었기 때문에 명나라와 그 뒤를 이어 대륙을 먹은 청나라가 괜히 아시아의 은먹는 하마라고 불린게 아니다. 청나라 때 가서는 청 정부가 소유한 은이 많다보니까 당시에 거두던 인두세를 토지세로 바꿔버렸다.[8]
황화론을 청나라의 중흥과 연결짓다 몽골 제국에서까지 기원을 찾는 건 사실 신빙성이 희박하다. 결론부터 확실히 긋자면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제대로 배운 호사가들 중에서 몽골 제국의 원 황실과 만주족을 단순히 소위 "시베리아 유목계"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해서 아예 동족으로 여기는 경우는 없었고 지금도 없다. 몽골의 원 황실과 근세에야 "만주족"이라는 새 이름을 쓰기 시작한 여진족, 그리고 시베리아 일대의 수많은 유목민들을 다 싸잡아서 "동족"이라고 얘기하는 건 사실상 환빠들이 퍼뜨린 거나 다름이 없고 현대 대한민국에 이런 인식이 많이 퍼져있는 것도 환단고기 떡밥을 지나치게 사용해 온 방송계의 잘못이라고 봐야 한다. 알타이 제어 문서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들은 언어의 어파부터가 다르다.
황화론과 혹성탈출
(http://cafe.daum.net/cinetown19/Gm6q/4037?q=%C8%A4%BC%BA%C5%BB%C3%E2%C0%C7%20%C0%FA%C0%DA%20%C0%CE%C1%BE%20%C2%F7%BA%B0)
그런데 혹성탈출이 서양인이 이른바 황인종을 보고서 느낀 감정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ㅠㅠ아래 황화론에 대한 이야기 루리웹에서 퍼온 글 잠시 올립니다.
독일제국의 3대 황제 빌헬름2세. 그는 극도로 비정삭적인 상식을 지닌 그야말로 '또라이' 황제였고, 이에 세계는 1차 대전이란 미명아래 불바다가 되고 맙니다. 1895년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2세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됩니다.
그의 꿈속에서는 동양인들이 믿는 '불교'의 신 '부처'가 동양용을 타고 날라다니며, 서구문명의 세계를 불지옥으로 만들며, 모든것을 파멸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에, 세계를 파멸시키는 악의 화신 '부처'와 맞서기 위해 '유럽국가를 상징하는 7명의 발키리(유럽국가들의 여체화)' 가 모집되어졌습니다. 게르마니아 발키리(독일제국의 여체화)는 용감하게 맞서기 위해 스스로 앞장서지만, 정작 브리티니아 발키리(영국의 여체화)는 부처의 파괴력에 두려움을 느끼며, 뒤에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커다란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대천사 미카엘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미카엘은 세계를 파멸시키는 부처를 두려워하지 말고, 발키리들에게 '유럽이여, 그대들의 소중한 보물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며, 사기를 복돋아 주었죠.
미카엘의 말과 함께, 빌헬름2세는 꿈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꿈이 예사로운 꿈이 아니며, 혹시나 모를 신의 계시라 생각했죠. 황제는 자신의 궁정화가인 '크나크푸스'에게 꿈의 내용을 알려주며, 그것을 그리라고 명합니다.
궁정화가 크라크푸스가 그린 빌헬름 2세의 꿈. 맨오른쪽에 좌부좌를 튼 부처가 용을 타고 날아다니며 세상을 파멸시키고자 하며, 이에 유럽국가의 여체화인 7명의 발키리가 악의 화신인 부처를 물리치기 위해 결성되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미카엘의 지시를 받는 모습입니다.
빌헬름 2세는 자신이 꿈에서 나온 세상을 파멸시키는 '부처'를 '동양문명' 그자체라 보았고, 유럽을 상징하는 7명의 발키리와의 '최후의 전투'는 말그대로 '동양문명이 서구문명을 능가하거나 혹은 잡아먹는 최악의 사태'라 생각했습니다. 하필이면, 빌헬름 2세가 꿈을 꾼 1895년은 청일전쟁이 벌여진 시기로, 일본이 대국 청나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유럽인들만큼 근대화된 일본군을 보고, 청일전쟁을 취재하는 유럽의 외신기자들은 감탄을 금치못하는 사이에 또다른 두려움이 교차되었죠.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인 만큼, 서구인들은 자신이 일으킨 과학과 문명을 지구상에서 가장 경이롭고 이상적인 세계로 보았으며, 이에 비해 타 문화의 문명은 '야만적이고, 개선되야 할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만약 일본같이 동양문명이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이고, 도리어 그 기술을 이용해 ,서구를 침략해서 서구문명이 '그들 말대로 야만적이고 개선되어야 할 ' 동양문명으로 퇴화된다면, 당시 서구인들으로썬 당연히 공포스러울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으로 탄생한게, 바로 서양의 야만스러운 동양문명에 대한 공포, 즉 황화론입니다.
위에 앞서말한, 빌헬름 2세는 빠르게 근대화되는 일본을 상당히 두려워하였고, 어쩌면, 일본의 칼날이 서구문명에게 돌려져, 말그대로 '자신의 꿈에서 나온 서구세계를 파멸시키는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비정상적인 인물이었던 빌헬름 2세에게 선견지명이었는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예상을 얼추맞았으며,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와 더 후대에 일어난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본인들은 서구인들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였었습니다.
소설이 원작인 혹성탈출역시 '황화론'에서 나왔다고 할수있습니다. 혹성탈출의 작가 피에르불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에게 억류되었는데 그때 영감을 얻어 '진화된 원숭이'가 '퇴화된 인간'을 억류하고 노예로 부리는 것을 묘사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당시 일본군이 중국대륙의 절반과 서구인들의 동남아 식민지들을 잠식해 나가면서, 빌헬름2세가 두려워했던 '황화론'에 대한 공포가 서구인들에게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일본인들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위엄에 그대로 박살이 났고, 이윽고 황화론의 공포는 다시 사그라드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 일본의 어마어마한 경제성장에 어쩌면 일본경제가 세계경제를 좌지우지 할수있다는 식의 다른개념의 황화론이 다시 부활하기도 하였으나 이도, 일본경제가 무너지면서 허상으로 끝나버렸죠.
그리고 현재 새로운 황화론이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중국입니다. '과연 서구인들이 예전부터 두려워했던 서구문명의 우위권을 무너뜨리는 동양의 공포'를 중국이 실현할수 있을까요?
혹성탈출의 저자 ( 과거 일본에서 혹성 탈출... 원래는 영어 제목처럼 유인원의 행성이죠.. 혹성도 일본식 표현이긴 합니다. 뭐 우리나라에는 1968년 찰턴 헤스턴이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울부짖던 모습이 나온 1편부터 혹성탈출이었으니 그 표현이 더 익숙할 것입니다..) 피에르 불은 < 콰이강의 다리>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피에르 불은 2차 대전 당시.. 인도차이나( 현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에서 일본군 포로가 됩니다. 그후 탈출했는데 이때 일을 기반으로 쓴 소설이 콰이강의 다리였고..그것이 1957년 데이비드 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로 나오죠..
1940년 프랑스가 나찌 독일에 항복하고.. 프랑스 남부 비시 지방에 기반을 둔 비시 정부가 들어섭니다. 일본은 본격적 남방 전쟁을 앞두고 프랑스를 협박하죠. 인도차이나에 모든 항구와 기반시설을 일본군에 개방해라. 아니면 그냥 안두겠다..프랑스는 이미 소수 병력만 식민지배에 투입되어 있었고 나찌 독일과 동맹국인 일본을 건드리기도 힘들었습니다. 결국 비시정부의 지시를 받는 장 드쿠 총독은 일본에게 하이퐁 항과 사이공 항들을 사용하게 하고 일본군이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게 하는 한편 프랑스가 여전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게 하는 행정은 프랑스가,군사력은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이중 지배하게 하는 기묘한 협정을 체결합니다. 이 이중지배는 일본이 1945년 3월 결국 인도차이나 프랑스 지배세력을 무장해제시키고 그해 8월까지 직접 지배할때까지 이어집니다.
피에르 불이나... 빌헬름 2세가 당시에 막 커지는 일본을 원숭이..원숭이라 부른 셈이니 흔히 일본인보고 원숭이라 하는 표현으로 그렇지 않냐? 할수도 있습니다..그러나 문제는..빌헬름이나 피에르 불이 본 것은 일본인만을 본것이 아니죠..
콰이강에 다리 원작에는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니콜슨 대령은 두 사람의 거인에게 끌려갔다. 그들은 둘 다 조선인으로 사이토의 호위병이었다” “한 주일 동안을 그는 고릴라 같은 조선인 보초병의 얼굴밖에 볼 수 없었다. 그 보초병은 자기 개인의 특권으로 매일같이 쌀밥에 소금을 덧쳐주는 것이었다”라고. “니콜슨 대령은 또 다시 얻어맞았다. 그리고 그 못생긴 조선인은 처음의 그 비인간적 대우를 다시 하라는 냉혹한 명령을 받았다. 사이토는 그 호위병까지 때렸다”라고.
즉 비록 그 호위병들이 일본군 소속이라도 조선인이라 명기 되어 있고... 순식간에 조선인들은 고릴라가 된겁니다...흔히..서양 코쟁이들은 옐로 몽키라고 황인종들을 비하하는데..4월달에 KBS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오상진 전 MBC 아나운서도 그랬죠..
‘대변인들’ 오상진이 과거 인종차별 경험에 대해 털어놨다. 4월1일 방송된 KBS2 새 파일럿 프로그램 ‘대변인들’에서는 필리핀에서 온 여성이 한국에서 느낀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이를 들은 오상진은 “나도 인종차별을 당한 적 있다. 미군부대에서 복무했을 때 내가 지나가면 뒤에서 ‘옐로 몽키’라고 말했다. 황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하를 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모로코 사건
프랑스와 독일이 모로코의 식민지 지배를 둘러싸고 일으킨 사건으로 2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제1차 모로코 사건은 탕헤르 사건이라고도 한다. 1904년 프랑스는 스페인과 비밀조약을 체결해 모로코를 분할하기로 했다. 그러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1905년 자신의 요트에서 모로코의 독립과 주권국가임을 선포했다. 결국 1906년 열린 알헤시라스 회의를 통해 모로코에서의 프랑스의 '특수한 정치적 이익'과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의 경제적 이익이 인정되었다.
1911년 발생한 2차 모로코 사건은 아가디르 사건이라고도 한다. 1911년 모로코에서 지역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독일은 프랑스를 위협하기 위해 모로코에 군함을 파견하였다. 영국의 주선으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대신 독일은 프랑스령 콩고 영토의 일부를 할양받았다
제2차 모로코 위기(독일어: Panthersprung) 또는 아가디르 위기는 모로코에서의 지역주민들의 반란에 프랑스군이 개입하자, 1911년 7월 1일 독일이 자국국민 보호를 구실로 모로코의 아가디르 항(港)에 전함 '판터호'를 파견하면서 발생했다. 독일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사실은 프랑스를 위협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 아가디르 사건으로 그해 여름과 가을 동안 전쟁 이야기가 오르내렸으나, 국제협상이 계속된 끝에 1911년 11월 4일 회담이 타결됨으로써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이 회담에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대신 독일은 프랑스령 콩고 영토의 일부를 할양받았다. 스페인은 처음에는 이러한 결정에 반대했지만, 영국의 중재를 통해 1911년 11월 27일 프랑스-스페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모로코에서의 프랑스-스페인 경계를 약간 수정할 수 있었다. 1911 ~ 1912년에 열린 열강의 협상으로 탕헤르와 그 주변지역은 국제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