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영성학 (손)

유럽을 침략한 몽골군을 타타르라고 유럽인들은 불렀다.

작성자현요한|작성시간12.03.11|조회수1,120 목록 댓글 1

세계사는 대체로 변방 유목민족이 정착민족을 정복하는 순서로 이뤄져왔다. 반달 고트족이 로마제국을 침략했고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로마의 붕괴를 가져왔다. 몽골족과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했다. 몽골은 북동부 유럽까지 침략했다. 지금은 카프카스 지역의 한 종족을 타타르라고 부르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종족을 타타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몽골은 가장 동쪽의 타타르였다. 몽골 군단은 불가사의한 군대였다. 너무나 질풍같아 어디에서 공격해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며칠이고 말을 달려 후퇴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포위작전을 펴고 있었다.

 

칭기스 칸의 부족에게는 타르타르, 타타르, 무갈, 무굴, 모알, 몽골 등 여러 가지 이름이 붙었다.몽골족과 가장 가까운 친족은 동쪽의 타타르족과 거란족, 그리고 더 동쪽으로 만주족, 서쪽으로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족이었다. 그래서인지 몽골족은 가끔 ‘푸른 투르크족’이나 ‘검은 타타르족’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친족 관계에 바탕을 둔 이 무리는 칸이라고 부르는 우두머리가 이끌었다. 몽골족 자신은 투르크나 타타르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주장한다. 훈족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훈은 몽골어로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며, 몽골족은 훈족 조상을 태양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훈누라고 불렀다.


테무진의 급진적 개혁 때문에 귀족 다수가 분노했으며, 일부는 그를 버리고 자무카에게 합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타타르는 몽골족보다 널리 알려진 부족이었다. 이 싸움 뒤에 몽골족은 타타르족(테무친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을 아주 많이 받아들였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몽골 제국에서 고위직에 오르고 이름을 떨쳤다. 이런 연유로 타타르라는 이름은 몽골과 동의어가 되었을 분 아니라 몽골보다 더 유명해진 경우도 많아 수백 년 동안 역사적 혼란을 일으켰다.

 

사전적 정의


1. 몽골 족 가운데 한 부족部族 또는 몽골 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
2. 러시아 내의 투르크계 여러 종족種族을 통틀어 이르는 말.


□  일반적인 인식


[타타르Tatar] 혹은 [달단韃靼] [Tartar]라고도 쓴다. 볼가 강 중류와 그 지류인 카마 강을 따라 동으로 우랄 산맥에 이르는 지역에 사는 종족이다. 투르크어를 쓰며 인구는 약 500만 명이다. 유럽권 러시아의 동부 및 남동부와 시베리아 남부에도 살고 있다.

 

옛날에는 [타타르]라는 명칭이 다양하게 쓰여서 몽골족과 투르크계 민족을 포함하여 아시아의 스텝과 사막에 사는 유목 민족을 총칭하거나, 크림타타르*시베리아타타르*카잔타타르*카시모프타타르 등처럼 몽골제국(13C~14C) 때의 여러 민족과 나라를 가리켰다.

 

10C에 러시아 남부의 스텝에서 살던 투르크계 유목민이 유입되어 타타르족을 구성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고대 불가리아(지금의 불가리아와는 다르다)가 현재의 타타르스탄 영토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에 몽골 제국이 건설되면서 그밖에 다른 민족이 추가되었으며 19C에는 추바슈*모르드바족의 일부를 비롯한 인근 부족들이 타타르족에 흡수되었다. 칭기즈칸의 맏아들 <주치(칭키스칸의 아내가 원수/타타르에게 끌려가서 낳은 아들)>의 둘째 아들 <바투>가 이끈 15만 명의 제2차 서정군은 일격이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을 초토화시키고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수도로 한 [킵차크 칸국 AD 1243년~AD 1480년]을 세워 러시아를 지배하였다.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지배를『타타르의 멍에』라고 그 굴욕을 표현했다. [타타르]라는 말은 원래 몽골의 한 부족명인 달단(韃靼-달달達達)의 음사였으나 러시아에 그 이름이 전해지면서 <지옥>이라는 뜻의 그리스어『타르타로스』와 연관시켜 몽골인들에 대한 비칭으로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까지를 포함한 유목 기마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통칭으로 되어버렸는데 당시 서구에도 이 이름이 전해졌으며, 오늘날까지도 러시아 경내에는 [타타르]라는 이름을 가진 몽골족 후예들이 살고 있다.


이들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8세기 전반에 돌궐제2제국(682-745)에서 세운 비문입니다. 빌게카간Kutlug Bilge Kagan(재위 716-734)의 비문에 타타르가 나타납니다. 중국은 당나라 시절이고 당에서는 이들을 달단(達旦 혹은 韃靼)이라고 표기했습니다.

 

돌궐제2제국 멸망 후 위구르 제국의 성립, 그리고 위구르 제국마저 멸망한 840년 이후 몽골에는 통일된 정치결사체가 사라집니다. 10세기 초에 거란이 등장하면서 타타르 부족은 거란의 지배 아래 들어갑니다. 거란 제국의 멸망 후 거란을 대치한 여진족의 금나라는 몽골 지방까지 확실히 다스리지는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몽골 지대는 당시 유목민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곳으로 변하죠. 타타르 부족은 칸을 자처하면서 몽골리아 동쪽에서는 유력한 종족이 됩니다. 이들은 금나라도 수시로 침략하는 등 무서운 것이 없이 설쳐댔죠. 그러다 강적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칭기즈칸입니다.

 

칭기즈칸은 몽골을 통일했는데, 당연히 타타르도 정복했습니다. 타타르 족은 후일 오고타이 칸 시절, 바투의 유럽원정대로 끌려가는데 바로 이 원정대의 주력이었습니다. 이때문에 유럽에서는 몽골 족과 타타르 족을 구분하지 못했고, 모두 묶어서 "타타르"라고 부르게 됩니다. (또는 지옥을 나타내는 타르타르라는 말로도 부릅니다.)

 

지금의 타타르 공화국은 이 당시 원정에 따라갔던 타타르 인들을 주축으로 해서 만들어진 나라(이 과정이 꽤 복잡한데 그걸 논하는 건 아니니까 과감히 생략)입니다. 이들의 활동범위가 넓었던 다른 증거를 하나 볼까요? 사할린 섬과 러시아 사이의 해협 이름이 바로 타타르 해협입니다. 바로 이 지점입니다.

 

 

동시베리아에 있는 러시아 연방의 하나인 야쿠트 공화국에도 타타르인이 살고 있고, 몽골하면 떠오르는 바이칼 호 동쪽의 부리야트 공화국에도 타타르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아무튼 몽골제국이 붕괴되고 있던 시점으로 돌아가 보죠.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태조 1권 총서 69번째 기사]   태조가 단주에 침입한 호발도를 격퇴하고 변방을 평안히 할 계책을 올리다.   “북계(北界)는 여진(女眞) 과 달단(韃靼) 과 요동(遼東) · 심양(瀋陽) 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 (하략)

 

일단 저 기사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고려(조선 때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성계가 호발도(여진 추장)를 몰아낸 것은 우왕 9년=1383년의 일입니다)의 북계, 즉 북쪽 경계는 요동, 심양을 포함하지 않고 있으며 그곳에는 여진족과 타타르족이 모두 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타타르의 유럽침공| 역사토론방(출처있는글)
이원재 | 조회 589 |추천 0 | 2005.01.17. 22:55


로마제국을 실질적으로 멸망시키고 지금의 유럽국가 세력 분포를 이루게 한 세력은 엄연히 훈족이었음에도 교묘히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기록에 없다고라고만 하지만 동로마의 외교관이 훈족의 선우였던 아틸라를 만나서 그의 용모를 기록한 것을 보면


-그는 키가 작았고 얼굴이 하앴으며 구렛나루가 적었고 눈이 양옆으로 찢어졌으며(서양에서 동양인을 비하할때 쓰는 단어) 머리카락은 직모였다-다분히 동아사이 몽골로이드의 특징이 보입니다만 유럽인들은 자신들을 공포에 몰아 넣었던 강대국이 동아시아인이었다라는 것을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등을 보면 아틸라가 8척 8등신의 늠름한 서양인으로 묘사되었지만 그는 결코 서양인형질보다는 아시아적인 형질이 더 강헀던 인물입니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를 가로질러 로마를 한때 점령할려다가 서로마황제의 조공약속으로 말머리를 돌려 지금의 파리까지 갔다가 다시 동유럽 목초지대로 돌아오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 당시 유럽에서 말그대로 서구문명의 중심지였던 지역을 아무런 꺼리낌없이 돌아다니며 자신의 세를 과시할 정도였다하면 훈족의 군사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투가 이끄는 유럽원정대는 동유럽의 강국이었던 헝가리 5만기사단을 섬멸합니다. 그리고 독일기사단령의 5만 기사군단도 간단히 격멸을 합니다.문제는 그들 유럽에서는 최강으로 불리우던 양 군사집단을 아무런 꺼리낌없이 격파한 몽골군의 숫자는 겨우 2천명 -5천명내외였다라는 사실이 유럽인들에게 있어서는 견디기 힘든 모독이었고 공포였습니다.


 

황화론의 시발점이 바로 여기서 부터입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독일지역과 헝가리는 유럽의 군사메카였고 군사력으로 보면 양대산맥이었고 프랑스나 이탈리아는 그정도의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하던 터에 만약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서유럽을 점령하는것은 시간문제였다라는게 중론이고 지금도 역사학자들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비록 오고타이칸의 병사로 인해 후계구도 문제로 바투가 말머리를 돌리자만 바투는 쿠빌라이의 장자인 주치의 아들이지만 주치는 징키스칸이 몽골시절 자신의 아내였던 보오루츠가 적국에 사로잡혀 거기서 적군의 씨를 받아 태어난 아이였기게 비록 주치가 징키스칸의 장자였지만 결코 주치는 그의 유전자를 타고 나지 못했기에 쥬치계열은 영원히 원제국내에서 후계구도의 해택을 받지 못하고 대신 그래도 장자인지라 누구손을 들어주느냐는 바투와 제국에게는 중요했던 사안이었기에 마지 못해서유럽침공을 그만두고 본국으로 귀환합니다. 주치는 몽골어로 손님이란 뜻으로서 주치에 대한 징키스칸의 애증을 엿볼수 있습니다.

 

타타르인들은 지금의 비인을 점령하고 거기서 겨울을 보낸다음 그 동네사람들에게 말도 안하고 그냥 사라졌댑니다. 황화론이 왜 그토록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역사마저 왜곡하게 했는지 그 단초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쨉이가 안되었던 것이죠.그들은 몽골인들이 가져다준 화포기술을 발달시켜 600년 후 아편전쟁으로 황화에 대한 보복을 시작하고 서세동점의 물결을 주도 하였으니 역사는 돌고돈다고 누가 말했던가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현요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3.27 라틴어의 지옥을 뜻하는 타타루스와 발음이 비슷한 타타르, 몽골군을 유럽인들은 이렇게 불렀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