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을 어떻게 볼 것인가? 20160119
환생은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에서 진리로서 가르친다. 기독교 초기에도 환생을 유명한 교부들이 믿어었다. 환생론이 이단으로 공식적으로 정죄된 것은 553년에 열린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널리 인정받고 믿어 왔던 가르침이였다.
환생론의 관한 역사는 뒤로 하고,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현세의 삶에서 보여지는 불공평한 모습이다. 누구는 태어날 때 왕가에 태어나고 누구는 가난한 농가에 태어난다. 외모도 능력도 환경도 조건도 모두가 다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한 번의 삶으로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삶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상식적으로 믿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마음에서 쉽게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교리에서 떠오르는 것은 너무하다, 부당하다, 불공평하다, 관대하지 못하다는 등등의 이런 부정적인 감정과 느낌들일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진리의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한 번의 인생으로 사람이 천국이나 지옥에서 그것도 일시적이 아닌 영원히 살도록 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에도 어긋나고 진리 즉 질서에도 어긋나 보인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에 한 술 더 떠서 예수가 오기 전의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갔고, 예수가 온 이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살다가 죽은 이들도 모두 지옥에 갔을 뿐만 아니라 복음이 전해졌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지옥에 갔다고 하니 유아인이 베테랑 영화에서 한 대사와 같이 어이가 없는 것이다.
환생론을 믿지 않으면 이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대해 자신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린다는 사실이다. 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나고 부족한 부모 밑에 태어났기 때문에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문제가 있게 된 것이고, 선 보다는 악을 선택하는 것이 쉽고 편해서 결국에 이렇게 악인이 되어 지옥에 가게 된 것이니,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탓이지 내 탓이 아니다라고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환생론의 장점은 내가 괴로움의 세계를 윤회하는 것은 오로지 내가 부족하고 내가 못나서 그런거지 남과는 상관이 없다는 카르마(karma)에 관한 믿음이다. 카르마라는 것은 업(業)을 말한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 말이다. 내가 선을 행하면 보상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종교나 모든 나라의 시민법의 기본 상식이자 믿음이다.
그리고 이 환생론에서는 이 세상에 환생할 때 자신의 환경을 자신이 직접 선택한다고 강조한다. 어느 민족과 어느 나라와 어느 인종과 어느 부모와 가정 환경에 그리고 어느 시기에 남자로 또는 여자로 태어날지를 자신이 선택한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다. 인생 전체의 시나리오를 정해놓고 내려간다. 물론 예정된 것은 자연적인 영역 뿐이다. 죽는 날짜와 시간도 정해져 있다. 가정을 이루는지 못 이루는지, 자녀는 몇 명인지 등등이 모두 정해져 있다. 여기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전생에 자기가 쌓은 업에 따라서 시나리오가 다양하게 주어지는데, 더 많은 시나리오가 주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한 두 개의 시나리오만 주어져서 선택의 폭이 좁은 사람도 있다. 전생에 업이 좋음에도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환생할 때 자연적인 시선으로 볼 때 좋지 않은 시나리오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현재의 환경으로 그 사람의 전생의 업이 좋다, 나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영원천국과 영원지옥이 허상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다. 카르마는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면 그 사람은 그것에 대해 감사의 보답을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일시적이다. 영원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내가 어떤 선한 일로 인해서 나의 환경이 좋아졌지만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 선업의 과보(果報)의 기한이 다하면 그 공덕이 사라져서 이전 상태나 이전 상태보다 나아도 선업의 과보를 누리던 때보다는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저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원히 천국이나 지옥에 있을 수 없다. 업에는 한계 즉 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 사람은 영원히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말하듯이 육도윤회(六道輪廻 :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간도, 천상도)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 그것이 해탈(解脫, moksha :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요, 열반(涅槃, nirvana : 불어 끄다)이다.
해탈과 열반은 힌두교와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도 있다. 그것을 보여준 이가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이것의 가장 좋은 본보기다. 왜냐하면 단 한 번의 인생을 살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6:28) 해탈하려면 어렵지 않느냐, 듣기로 수백 번은 환생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느냐, 그리고 세속을 버리고 출가해서 오로지 해탈에만 전념하는 수행을 해야 하는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냐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말하는 것은 거듭 환생할 필요 없이 지금 현재의 삶에서 바로 해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또한 모든 가르침의 공통된 믿음이다.
해탈과 열반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말한다. 사랑은 너와 나라는 분리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너가 나고 내가 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이원성(二元性)의 세상이다. 너와 나는 다르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것이 육의 세상, 에고의 세상, 윤회의 세상이다고 하면 열반의 세계는 일체성(一體性)의 세계다.(일체성이 사랑이고 이원성이 믿음이다) 모두가 하나인 세상이다. 관념적으로뿐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다. 즉 한 사람으로 우리 모두는 형상화된다. 그것을 카발라에서는 세피로트(sefirot) 즉 생명나무로 말하고 다른 말로는 아담 카드몬(Adam kadmon)이라고 해서 대인간으로 말한다. 기독교 신비가인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책에서도 동일한 가르침이 나온다. 거기에서는 the Grand Mam 즉 대인간 또는 최대인간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오늘날의 대표적인 영성서적이라 할 수 있는 기적수업에서는 이 일체성의 세상을 두고 한 마음으로 말한다.
즉신성불(卽身成佛)은 가능하다. 무아(無我)가 핵심 가르침이다. 에고가 있다고 믿으면 그 믿음에 따라 계속해서 육도윤회한다. 에고가 있으면 그 에고의 반대가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있다고 하면 남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없다고 하면 남도 없게 된다. 이원성의 세상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무아론(無我論)이고, 나를 죽이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에고가 진화한다는 개념은 얼핏 듣기에는 진리처럼 들린다. 거듭 환생하면서 에고를 진화시켜 나가 궁극에는 해탈한다고 말하는데, 에고는 본래부터가 불완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에고를 완성시키기 위해 환생해야 한다고 믿으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환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완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완성의 개념이 아니라 초월의 개념이다. 에고적인 또는 인간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방법은 에고를 죽이는 것이다. 에고의 죽음이 에고의 한계를 넘어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죽여야 한다고 예수가 말과 행동으로 모든 이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1) 자연예정
에드가 케이시의 마지막 예언은 자기 자신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예언대로 그는 1945년 1월 3일,영원한 잠에 들었다.
나는 영계를 보고 왔다.(하재기)
참조) 임마누엘 스베덴 보리의 생애와 사상(정인보)
나의 죽음을 예고한다.
감리교 창시자 죤 웨슬레(Rev. John Wesley)
끝으로 나는 죤 웨슬리라는 어떤 교회의 목사에게 발송한 어떤 편지의 건을 말하기로 한다. 일삼아 이런 사사로운 편지를 공개하는 까닭은 이 안에 나의 최후의 교령술에 대한 결과를 적어 보냈기 때문이다. 그 결과란 엄격히 말해서 나의 사망 후가 아니면 그 정당성이 증명되지 않는 일이지만, 나는 내가 죽는 뒤 그것이 밝혀질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나는 웨슬리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물론 죤. 웨슬리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남이었지만, 나는 영을 통한 지각으로서 그에게 편지를 보내야만 될 사항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영계에서 나를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소. 그리고 나는 1772년(이듬해) 3월 29일에 이 세상을 하직하고 참다운 영계의 영이 됩니다. 이 사실은 벌써부터 결정된 것이므로 아울러 알려 드립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는 답장을 보내 왔다.
“나는 유명한 영매로 이름난 당신의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주신 편지를 친구에게 공개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계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 사실을 지금껏 만나 보지도 못한 당신이 어떻게 해서 알았는지 우리 일동은 다 같이 이상히 여기며 매우 놀랐습니다.”
나는 그의 영으로부터 교신에 의해서 그의 희망을 영적 감각으로 알게 되었으나, 이러한 일은 생자(生者)의 영과 교신한 것이어서 나로서는 드문 예인 것이다. 하여간 내가 생자의 영과 교령술에 의하여 교신한 것은 웨슬리로부터의 답장으로 그 정확성이 증명된 셈이다.
내가 이 세상에 남길 것이란, 이승에서의 용무를 끝마친 나의 육체 말고는 이 수기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저술한 나로서는 이제 이승에 미련을 남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웨슬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의 임종일의 예언도 멀지 않아 내가 죽은 뒤에야 그 진실이 증명 될 것이다.
2) 자연예정은 변경될 수 있다.
자연적인 것은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영적인 자유가 있다. 선과 악을 선택할 자유가 그러나 영적 자유를 선용하면 자연 예정도 변경될 수 있다. - 임마누엘 스베덴보리 -
(열왕기하 20:1-11) 그 무렵에 히스기야가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가 그에게 와서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게 되었으니 네 집안의 모든 일을 정리하여라. 네가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 히스기야는 그의 얼굴을 벽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기도하여 아뢰었다. "주님, 주님께 빕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온 것과,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한 것과, 주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한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나서, 히스기야는 한참 동안 흐느껴 울었다. 이사야가 궁전 안뜰을 막 벗어나려 할 때에,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되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인 히스기야에게 전하여라. '네 조상 다윗을 돌본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네가 기도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고, 네가 흘리는 눈물도 내가 보았다. 내가 너를 고쳐 주겠다. 사흘 뒤에는 네가 주의 성전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너의 목숨을 열다섯 해 더 연장시키고, 너와 이 도성을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하여서,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내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내 종 다윗을 보아서라도, 내가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그리고 이사야가 왕의 신하들에게, 무화과 반죽을 가져 오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그것을 가져 와서 왕의 상처 위에 붙이니, 왕의 병이 나았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고치셔서, 사흘 뒤에는 내가 주님의 성전에 올라갈 수 있게 된다고 하셨는데,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사야가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그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실 것을 보여 주는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해 그림자를 십 도 앞으로 나아가게 할지, 십 도 뒤로 물러나게 할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말씀해 주십시오." 히스기야가 대답하였다. "해 그림자를 십 도 더 나아가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림자가 십 도 뒤로 물러나게 해주십시오."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께 기도를 드린 뒤에, 아하스의 해시계 위로 드리운 그 그림자를 뒤로 십 도 물러나게 하였다.
(나는 영계를 보고 왔다, 하재기) 나는(임마누엘 스베덴보리) 이 수기의 마지막에 쓴 바와 같이 1772년 3월 29일에 이 세상을 버리고 영계로 거주지를 바꾸기로 되어 있다. 사람들은 내가 이와 같이 내 자신이 죽는 날을(내 쪽에서 본다면 단지 이 세상에 육체를 버리고 영의 세계로 옮기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수년전부터 알고 있는 것을 매우 이상하게 여길 것 이고 개중에는 나 자신이 말하는 것을 믿지않는 사람도 있을 것 이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누구나 자기 일생의 운명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을 이 장에서 언급하겠다.
그러면 자신의 생애를 20세 때 예언하고 있던 어떤 사나이의 예를 들어 이것을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그는 프랑스의 한 농부였다. 그는 20세가 되던때에 이미 다음과 같은 자기의 생애의 운명을 말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2년 후 7월 20일 어떤 친구가 서쪽으로부터 나타나서 그자는 그의 52세의 6월까지 그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꼬마 친구가 이에 이어서 셋이 나타나는데 그 중의 하나는 그의 35세 중간쯤에 그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것이다. 또 그는 29세 때 가을에 물밑으로 그의 집이 잠기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32세 때 봄에는 남십자성이 찬란하게 빛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예언대로 22살에 7월 그가 살던 마을의 서쪽에 있는 어떤 마을의 농가집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아내는 그가 52세 때까지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린애(꼬마친구)는 셋이 태어났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은 그가 35세 때 병으로 죽어 그에게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가 사는 마을은 그가 29세 되던 해에 큰 홍수를 만나 집은 그가 예언한대로 물밑에 잠기는 일은 없어지만 농작물은 물밑에 잠겨 전멸당하는 피해를 받았다. 또한 그는 이 홍수가 난 3년 후인 32세 때에 유산 상속인이 없는 친척의 토지를 상속 받았는데 이 토지는 언덕바지에 있는 남향의 토지였다.
나는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죽음의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고 믿는다. 죽음의 기술에 의해서 그도 가끔 영계에 들어 갈수 있었던 것이다. 영계의 영들 사이에서 상념을 나누는 중에 그 영이 인간이었을 때의 일생이나 그 후에 영계에서 보내게 될 미래에 관한 일이 전부 자세하게 그려진 그림 폭으로서 상대방의 눈에 보이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앞에서 언급했었다. 이 그림 폭은 영이라 할지라도 자기에 관한 일이 그려져 있는 그림폭을 자기 눈으로 보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상대방의 영이 본 그림 폭의 내용을 이야기로 듣거나 표상으로 가르쳐 받는 일은 극히 간단하다. 그리하여 만약 사람이 어느 정도 죽음의 기술을 지니고 영계에 들어가서 다른 영과 상념을 교환할 경우 앞에 말한 대로 그의 일생을 미리 알 수가 있는 것이다.
3) 스베덴보리의 환생의 대한 증언
四次元의 世界의 '영계의 수기'
스웨덴보르그 Swedenborg 저, 청화
다시 태어난 병사(환생)
그 영인의 모습은 다른 영인들과 어딘지 모르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가까이에 있는 열 명 정도의 영인들과 약간 떨어져 서 있었고 또 그들과 어울리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존재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멍청하게 서 있었다. 단지 이러한 태도만으로는 죽은 지 아직 얼마 되지 않고 또 중간영계(영인들의 세계)에 익숙치 못한 영인으로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므로 별로 이상하다고 볼 것까지도 없을 것이다. 사실 그는 며칠 전에 죽어서 중간영계로 들어온 영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매우 색다른 정령 이었다는 인상을 주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방금 말한 것처럼 다른 영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고, 다른 영인들과 어울리려고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 표정은 자기 자신이 현재 어디에 와 있는지, 또 자기 자신이 도대체 무엇이 되어 있는지, 심지어는 자기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태도로 보아 누구나 짐작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의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연달아 자기의 목 언저리를 문질러 보고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새로운 영인(중간영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영인이라 한다)에 대한 환영의 표시로 가까이에 있던 10명 가량의 영인 중에서 한 영인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어째서 다른 영인들과 어울리지 않는가?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그렇게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가?” 하지만 그는 이 말도 들리지 않는지 멍청히 서 있을 뿐, 조금도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선배격인 영인은 또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 하여 물어 보았다. “당신은 어째서 다른 영인들과 어울리지 않는가? 그리고 또 당신은...... .” 그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누가 자기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은 알아차렸는지 다음과 같은 말을 혼자서 중얼 거렸다.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건가?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인가? 내가 정말 아직 살아 있단 말인가?” 그는 연방 같은 말을 독백하듯 중얼거리다가 이윽고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승에 있을 때에 아시아에 있는 어떤 나라의 어떤 군인이었다. 그리고 그 나라의 군인 중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활의 명수였으므로 적장의 목숨을 빼앗을 임무를 띠고 다른 몇 사람의 궁수들과 함께 적군의 성 밑으로 몰래 잠입했다. 그들은 적장의 저택 밖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집 뒤에 있는 산 속에 숨었으며, 마치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어서 안심하고 잠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심이 그들의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갑자기 배후로부터 들이닥친 많은 적군에 의해서 몰살을 당했던 것이다. 그는 목이 잘리어 죽은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야기를 마치자 다시 먼저와 같은 독백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살해된 기억은 분명한데, 그런데도 나는 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살아 있는 기분이야. 그 증거로 나는 이처럼 당신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소? 나는 정말 죽은 것인가? 아니면 꿈이란 말이요?” 그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안절부절 자기의 목을 다시 만져 보곤 했다.
하지만 이 영인이 참으로 기묘하고 이상한 영인이라는 점에서, 그 곳에 있던 10여 명의 영인들 사이에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는 것은 그의 이러한 태도나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은 그들 10여 명의 영인들은 그 후 군인이었던 그 영인을 아무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간영계나 영계(천국과 지옥, 중간영계이외의 총칭으로서)는 이미 이야기 한 것처럼 무한하게 넓으므로 우연하게 만나게 되는 일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중간영계이건 영계이건 영들은 타인에 대하여 만나고 싶다는 마음만 먹으면 상대방 영이 즉시 눈앞에 나타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 10여 명의 영인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에게 이상한 인상을 주었던 그 병사의 영인을 만나고 싶었는데도 아무도 그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영계(전영계, 중간영계까지 포함하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이상한 일에 관한 진상은 나는 수년이 지난 후 우연한 기회에 이승에서 알게 되었다. 그 진상이란 아시아 여러 나라 사이를 왕래하고 있는 상선의 한 선원에 의해서 알려진 것이다. 당시 세상에 퍼진 이상한 이야기로 아시아의 어떤 나라의 어린아이에 관한 소문이 파다했다.
이 어린 아이는 겨우 세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직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멀고 먼 외국의 거리를 자세하게 설명할 뿐 아니라, 자기는 그 외국의 거리에서 3년 전까지 살고 있던 사람이었으며, 이제 다시 태어난 아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군인이었으며, 그 나라에서 첫째가는 활의 명수였다는 것과 적국의 성 밑으로 숨어들어가 적장의 생명을 노리고 있을 때, 뜻밖의 습격을 받아 적군에게 목이 잘리어 죽었다는 것, 그리고 전생에서의 이름까지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아이는 자기의 목에 있는 상처는 전생에서 목이 잘리어 죽었기 때문에 난 상처라고 하면서 목덜미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 이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목에 상처의 흔적이 있었고, 그의 부모는 그것을 이상히 여기고 있었다. -
어린아이의 이야기라 세상 사람들이 반신반의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이러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그 나라의 상인에 의해서, 이 어린아이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자 사람들의 놀라움은 절정에 달했다. 더구나 이 어린아이는 그를 찾아온 상인과, 배운 일도 없는 전생에 살았던 나라의 말로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나도 이 이야기를 듣고는 그 이상한 영인에 관한 일도 있고 해서 이상야릇한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그는 중간영계에 단 며칠 동안만 머물렀을 뿐 인간계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영인을 다른 10여 명의 영인들이 만나고자 했어도 이후 다시 만날 수 없었던 이유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다시 태어난 것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어떻게 그 어린아이가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전생에 관한 일을 기억하고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영인이 되었을 때 오래도록 남은 기억은 현세에 관한 한 영적인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달하지만, 그러면서도 개략적인 것만이 기억에 남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혹 어떠한 사정에 의해서 이러한 일도 있는 모양이다.
4) 환생은 불필요한 일이다.
(요한 9:1-3)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자기 죄라고 하는 것은 전생의 업을 말하는 것이고, 부모의 죄라는 것은 업의 연대성을 말한다. 주님은 이 양자에 대해서 부정하면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은 전생의 업이나 죄의 연대성이라는 현상에 주목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굴레와 속박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이것이 더 중요하고 이것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씀을 가지고 전생은 없다, 업도 없다, 죄의 결과도 없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잘못 받아드리는 것이다.
부처님도 이와 비슷하게 대응한 것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답변을 하지 않고 피한 것을 말하는데, 이를 부처님의 무기설(無記說 : 답하지 않음)이라고 하고, 무기의 갯수는 14 가지가 된다. 그 중에서 위의 말씀과 유사한 주제의 말씀이 있다. 그것을 말하면 이렇다.
‘우주의 근원이며 고(苦)의 근원인 무명(無明)이 자기 자신에 의해 야기된 것인가(自緣起)? 신에 의해 야기된 것인가(外緣起)? 자기 자신과 신에게서 야기되었는가(自緣起와 外緣起의 組合)? 자기 자신도 아니고 신도 아닌 것에서 야기된 것인가(무결정론 혹은 무연기론)이다.’
이러한 질문과 의문에 부처님은 답변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구원에는 그러한 것이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현재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 과거든 미래든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반대로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지금 나에게 뭐가 중요한가? 지금의 나는 지금의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밖에 관심이 없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수백 번, 수천 번 환생에 대해서 생각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이 순간에 바로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기적수업에서도 동일하다. 기적수업의 교사 매뉴얼(교사용 지침서)이라는 장에 환생의 관한 항목이 있다. 거기서 말하는 것은 환생이 구원에 도움이 되는가 그것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에게 기적수업은 똑같이 도움을 주어야 하므로 그것이 진실이다 아니다를 말하지 말라, 기적수업 관점에서는 환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참나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적수업은 죄나 업 그리고 환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구원에 초점을 둔다고 말을 한다. 그렇다, 모든 깨달은 사람들은 카르마와 환생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지금 이 순간에 누구든지 해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초인들의 삶과 가르침을 찾아서 p590) 대사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환생이란 불필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방안에 등불이 하나 켜져 있다면 그 빛에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곧장 가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면서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가? 그 빛에 다가가서 그 빛과 하나가 되면 환생은 끝난다. 인간을 윤회의 수레바퀴 속으로 얽매어 놓는 것은 이 핵심 진리 즉 생명의 실재에 직접 뛰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핵심 진리인 만상을 비추는 빛에 뛰어 들어간다면 주변을 배회하는 일이 없어지고 궁극점에 도달할 것이다.
(기적 수업의 교사 매뉴얼)
24. 환생은 진실인가?
1.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환생은 불가능하다. 과거나 미래는 없으며 한 번이든 여러 번이든 몸 안으로 태어난다는 아이디어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환생은 어떤 진정한 의미에서도 진실일 수 없다. 우리의 유일한 질문은 이래야 한다. ‘이 개념이 도움이 되는가?’ 물론 그것은 어디에 씌이느냐에 달렸다. 생명의 영원한 본성을 깨닫는데 사용된다면 과연 도움이 된다. ...많은 다른 믿음들과 마찬가지로 환생도 아주 잘못 사용될 수 있다. 최소한 이러한 오용은 과거에 사로잡히게 하거나 어쩌면 자랑스러워하게 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현재 안에서 타성에 젖게 만든다. 이 사이에 많은 종류의 어리석음이 있을 수 있다.
2. ...환생이 한 개인이 지금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에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과제는 여전히 오로지 지금 그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뿐 이리라. 미래의 삶에 대한 터전을 닦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오로지 지금 그의 구원을 얻어내야만 한다. 몇 사람들에게는 환생 개념 안에 위안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이 그들의 기운을 복돋아 준다면 그 가치는 자명하다. 그러나 환생을 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 자이든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음은 확실하다. ... 현재를 과거의 관점에서 보는 것에는 항상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생명과 몸은 같지 않다는 아이디어를 강화시키는 생각에는 항상 뭔가 좋은 것이 따른다.
3.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환생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신의 교사는 환생을 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 자이든 똑같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 만약 그가 명확한 입장을 취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 자신의 의사 결정은 물론 그의 유용성도 제한할 뿐이리라 우리의 수업은 그의 공식적인 믿음과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든 받아들여질 수 없는 개념에는 관심이 없다. ...
4. 이 수업은 생각을 완전히 역전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그때까지는 그러한 이슈들은 단지 논쟁거리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신의 교사는 이러한 모든 질문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있는 것이 현명하다. 그는 그것 말고도 가르치고 배울 것이 많다. ...
5. .... 그러나 반드시 인지해야 할 것이 있다면 탄생은 시작이 아니요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만큼도 초심자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그는 다만 그가 아는 것이 반드시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아니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의 여정은 이제 시작되었다.
6. 이 수업의 강조점은 언제나 변함없다. - 완전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다. 이는 여전히 그대의 유일한 책임이다. ...하늘은 여기에 있다. 다른 곳이란 없다. 하늘은 지금이다. 다른 시간이란 없다. 이것으로 이끌지 않는 어떤 가르침도 신의 교사의 관심사가 아니다. ... 이것이 이 수업이 요구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이 이상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담배 가게 성자
나사르가닷따 마하라지
1897년 인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뭄바이에서 담배 가게를 하면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삶을 살던 중 37세때 스승인 싯다라메쉬와르 마하라지를 만나 수행의 길에 들어선다. 40세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1981년 입적할때까지 담배가게 2층 다락방에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환생은 없다.
(p 272) 정기적인 방문객들은 마하라지가 환생을 전혀 의미 없는 개념으로 여기고 완전히 도외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방문자들은 마하라지의 이같은 가르침에 반발하곤 한다. 특히 힌두교의 추종자일 경우에는 충격에 휩싸이기까지 한다. 한 번은 힌두교에 헌신하고 있는 한 사람이 마하라지를 찾아왔다. 그는 황색가사를 입은 젊은이였는데, 마하라지가 환생에 대해서 그와 같이 말하자 눈에 불을 켜고 대들었다. 그는 힌두교의 기반인 환생설에 대한 마하라지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듯 했다. 그 젊은이는 지지를 요청하듯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연민의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는 당황했다.
마하라지 : 환생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한 내 말은 그리 놀랄 일이 못 됩니다. 만약 당신이 계속 여기에 오게 된다면 더욱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철학이나 종교도 가르치지 않으며 어떠한 전통적 경전에도 근거하지 않습니다. 나의 스승께서 내 의식을 열어 주신 후부터 나는 단지 내가 체험한 바에 의해서만 말해 왔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듣기 싫으면 언제든지 나가도 좋다고 말 합니다. 사람들이 내게서 얻게 되는 것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내가 깨달은 직접적이고 진실한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의 관념에 영합할 뜻이 없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그 젊은이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동시에 매료시켰으므로 그는 계속해서 마하라지의 가르침을 원했다. 그러자 마하라지가 계속 말했다.
마하라지 : 당신은 인간의 근본적 성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읽고 들은 것들은 잊어 버리십시요. 이 문제를 독자적으로 생각해 본적이 있었습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마치 당신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식을 지닌 존재이고 무엇에도 의지할 것이 없는 상황인 것처럼 철저하게 그리고 깊게 생각해 보았습니까? 세상에 당신을 안내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잘못 인도할 사람도 없습니다. 당신이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의 가장 기본은 무엇입니까? 육체인가요? 지금은 건강하고 강인한 그 육체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었을 때는 단지 한 점의 화학물질에 불과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당신은 그렇게 수태되어지기 위해 무엇을 시도했습니까? 당신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 입니까? 당신이 생각한 일이었습니까? 이것은 중요한 문제인데, 수태된 한 점의 작은 물질 속에 잠복해 있다가 그것을 피와 살과 뼈를 가진 다 자란 아이로 성장시킨 것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당신의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다가 열 달 후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해왔으며 지금은 내 앞에서 진리에 관해 토론하고 있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자라나면서 육체는 당신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가정해 왔지만 그중 어느 것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바뀌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고 실재한다고 느끼는 감각, 즉 몸-마음의 복합적 도구에 지각과 에너지를 부여한 의식이 아니겠습니까? 이 의식은 실재, 진아, 참아, 아트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신, 사랑등도 그것의 다른 명칭입니다. 세상은 단지 의식이 있는 동안만 존재 합니다. 깊이 잠들어서 인식을 못하게 되면 당신에게 세상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본능적으로 당신 자신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알았습니다. 당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외적인 형상이며 실제의 당신 자신은 의식입니다.
그러면 환생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태어난 것, 즉 물질적 육체는 때가 되면 죽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은 분해 됩니다. 회복될 수 없게 소멸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생명력은 육체를 떠나 외부의 대기와 섞이게 됩니다. 지각하는 존재의 물질적 부분은 파기되고 결코 다시는 같은 육체로서 환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식은 물질이 아니며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비 물질적인 의식은 태어날 수도 죽을 수도 없으며 분명히 환생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현상적으로 현시된 모든 존재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본성의 작용 과정으로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어떤 때는 창조의 형태로 또 어떤 때는 파괴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누가 태어납니까? 누가 죽습니까? 그리고 누가 환생을 합니까?
그렇다면 카르마나 인과, 환생이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 입니까? 하고 물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답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현상을 절대가 현시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개체와 동일시하여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생각하는 망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가진 허상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자율적으로 선택의지를 지녀 결정하고 행동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서 살아가고 고통받고 죽는 것은 바로 이 허상에 의한 환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 환영은 카르마라는 거짓된 인과에 얽매이게 되고,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상상된 해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현상이 드러나는 자연적 과정에서 가상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녔다고 상상된 의지적 행동이 일어납니다. 즉 카르마, 구속, 환생등이 거기에 덧씌워지게 된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왜 내가 환생설의 거짓된 정체를 폭로했는지 이해하겠습니까?
라마나 마하리쉬 "태어날때 이미 삶은 결정되어 있습니다. 다만, 진리의 깨침에 대한 것만이 우리에게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기타) 환생론의 세부적인 사항들
1. 사람은 사람으로 환생한다.
(묵시록 해설 1202) “따라서 사람은 영원히 짐승이 될 수 없다. 영원히 짐승으로 다시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어째서 모든 사람은 사람으로서 영원히 사는 가의 이유이다. 이것이 짐승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짐승은 어떤 영적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 이 까닭에 짐승은 죽은 뒤에 살지 않는다”
(순정 기독교 34:2)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리고 실질적인 경건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이해하는 능력과 그에 따른 말하는 능력을 즐기는 것을 제외하고는 짐승처럼 되는 것이다”
2. 기시감 같은 낯선 기억의 원인과 경계해야 할 것
반드시 지금의 삶에서 기억에 없는 것이 떠 오른다고 해서 나의 전생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유는 내 영 주위에 수많은 영들이 있고, 그 영들의 기억이 유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영들은 저 세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 지상인들을 속이는 것(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을 좋아해서 아무 말이나 상념을 전달하기도 한다.
(천국과 지옥 256) “천사나 영은 그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의 기억만을 사용해야 한다. 천사와 영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있다. 만일 어떠한 영인이 자신의 기억으로 사람과 말하면 그 사람은 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자기 것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영의 생각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그 사람이 전에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을 회상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고대인들 중에는 자기들의 전생에서와 같이 지상으로 돌아 왔고 앞으로도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때때로 전에 보지도 듣지도 않은 것이 기억처럼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은 영인들이 그들 자신의 기억으로 사람들의 생각 안으로 유입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영계일기 1902) "영들이 말을 할 때 이것은 이렇다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들은 사실이 아닌 경우도 그것이 사실이다고 아주 진지하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수차에 걸친 경험에 의하여 그들의 성품이 어떠한지, 그들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어떤 것에 대해 질문을 하면 그들은 차례대로 그것이 어떠한 것이다고 대답은 하지만 답변은 모두가 달랐습니다. 만약에 백 가지가 질문되었다고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데 신뢰성 있게 역설할 것입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면 즉시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마치 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 것은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1748, 5, 3,
(영계일기 2860) 수도 없이 나에게 입증된 사실은 나와 대화를 한 영들은 자신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지인이나 유명인)이다는 것 이외의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며 다른 영들도 역시 그와 같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삶에서 알고 있던 사람을, 어제와 오늘 나와 이야기를 한 영이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이다고 생각될 정도로 닮았다는 것과 그 영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영들과 말을 하는 자들은 영들이 자신을 유명인이고 오래전에 죽은 존재이다라고 말할지라도 이에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영계일기 2861) 왜냐하면 닮을(모방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영들이 저 세상에서는 여러 종류가 있고, 그 영들이 사람의 기억을 호출하였을 때 따라서 그 기억의 인물을 표징하였을 때 그들은 자신이 그와 같은 존재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들은 드러난 그 존재의 언어와 음성과 낱말 그리고 몸동작이나 그 밖의 수많은 것들을 지상인의 기억의 의존하여 만들어 냅니다.
(영계일기 617) 악마의 패거리가 얼마나 교활한지는 결코 몇 마디 말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시험 중에는 그들은 천사들처럼 심지어 주님처럼 가장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망상들에 따라서 모든 방법으로 흉내를 냅니다. 악마는 일순간에 사람의 망상들을 파악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의 인격이라는 것으로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람이 알지 못하는 동안에 악마는 사람 자신 안에 있는 바로 그것을 용케도 찾아냅니다. 그리고 또한 매우 놀라운 사실은 기회가 오면 그것을 사용하려고 악마 자신의 기억 속에 저장해 둔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악마가 온갖 방법으로 속이고 흉내를 낼 때 그때 그 악마는 선으로 여기든 악으로 여기든 아주 적절한 정동(감정)들을 주입하고 또 놀라운 방법으로 그 정동들을 배열하고 간계에 의하여 그것들을 악으로 기울게 만듭니다. 그는 하나의 정동이 어떻게 작동하고 움직이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어서 그는 언제나 그 정동이 악으로 기울도록 도모합니다. 더욱이 악마는 그 사람의 정동에 아주 잘 어울리는 낱말들을 사람의 생각이나 입에 주입하며 그리고 즉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들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지상인은 그것들이 자산의 것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모두가 악마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실을 많은 경험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악마는 이 간계에서 저 간계로 계속하여 이 짓거리를 행하였는데, 그는 육신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진 자연적인 본능에 의하여 일순간에 그것을 성취 합니다. 매우 이상한 것은 그들의 본성이 짐승의 것과 같다는 것이고, 그리고 저 세상에서 너무 너무 교활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삶에서 마치 그들이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때 그들은 그들의 본성 때문에 짐승처럼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술책이나 간계를 열거하면 수많은 페이지를 채우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악마를 꽁꽁 묶어 두지 않고 또 그의 의도나 술책을 가라앉히고 완전히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사람은 일순간에 굴종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748년 2월 1일
3. 티벳 사자 서에서 보는 고차원적인 환생
경전을 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과 상징적으로 믿는 사람이다. 경전 전체가 문자 그대로가 아니듯, 상징적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조화가 필요하나, 어떤 주제에 관해서는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기독교의 주된 성경 해석은 문자주의, 축자영감설(안디옥 학파)이다. 상징주의나 알레고리 해석(알렉산드리아 학파, 고대에는 주류였다)이 고대에 있었고, 현대에도 간간히 이어오긴 하지만, 상징주의 해석에 대한 기독교인의 입장은 배타적(이단적)이다.
어쨌든 힌두교와 불교에도 상징적인 관점에서 경전 구절을 해석하는 부류가 있다. 비밀교 또는 탄트라 불교, 힌두교이다. 힌두교와 불교에는 일반적인(대중적인) 종교와 고차원의 종교가 있다. 두 종교의 가르침은 같으나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힌두교의 몇몇 요기들의 책에도 환생에 대해 문자 그대로가 아닌 쪽으로 기록된 것들이 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이를 뚜렷하고 명확하게 상징주의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티벳 사자의 서, 파드마 삼바바 지음, 라마 카지 다와삼둡 번역, 에반스 웬츠 편집, 류시화 옮김>의 책 p102-133, 10. 환생사상 장을 보면, 1항에서 말하고 있는 일반적인 환생론과는 전혀 다른 환생을 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환생에는 두 가지 해석 방법이 가능하다. 특히 우리의 경전에 나타난 환생 사상에 대해서는 그 둘 다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는 문자에 따른 일반적인 해석이다. 이것은 흔히 문자적 해석이라고도 하는데, ‘겉으로 드러난 가르침’만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문자에 담긴 상징과 ‘속에 감춰진 가르침’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것을 상징적 해석이라고 한다. 경전의 권위나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참다운 지혜를 강조하는 소수의 입문자들은 두 번째의 해석 방법을 옳은 것으로 친다. 티벳에 있어서 이러한 소수 입문자는 주로 학식을 갖춘 영적 스승들이다.”
“..진화를 거듭해 마침내 인간의 형태를 갖게 된 한 생명 흐름이 갑자기 엉뚱한 다른 형태를 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든 바르도(사후 중간계)에서든 또는 윤회계에의 어느 세계나 영역에서나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생명계를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이며, 그것은 거기에 더불어 작용하는 카르마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절대불변의 법칙이다.”
“..어떤 종류의 가축이 다른 종류로 바뀌거나 문명인이 미개한 야만인 또는 인간 이하의 동물로 퇴화하는 일은 없다. 생명의 흐름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상징적 해석은 고대 희랍이나 이집트 신비가들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그들은 ‘아래에서처럼 위에서도 그러하다’고 가르쳤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둘 다에는 언제나 공명정대하고 흔들림 없는 조화로운 카르마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르도(사후 중간계)에서 49일간은 진화나 퇴화의 수세기 동안의 기간을 상징한다. 진리를 깨달을수 있는 지자(知者)는 결코 존재의 낮은 단계로 떨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축생(畜生:인간이외의 생물)으로 윤회한다는 사상은 인간의 의식 그 자체가 축생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저차원적이고 동물적인 부분만이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지자 그 자체는 태어나는 것도 환생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지켜보는 자’에 불과하다.”
“(마누법전, 인도 최고문헌중 하나) 마누 왈,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으로부터 생기는 행위는 선이나 악의 결과를 낳는다. 행위에 따라 인간은 여러 신분이 정해지는데, 최상, 중간, 최하 계급이 그것이다. 인간은 마음으로 짓는 선하거나 악한 정신적인 행위와 입으로 짓는 말의 행위 그리고 몸으로 짓는 신체적인 행위 모두에 대해서 과보(果報)를 받는다.”
“(자타카/본생담/부처의 전생 이야기) ...상징적 해석론자들은 설령 아득히 먼 진화의 초기에 붓다가 동식물로 태어났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이번 세상의 주기에 일어났다고 하는 그 전생담들은 어디까지나 상징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통적인 상좌부 불교학자들은 이 모든 사실을 글자 그대로 믿는다. 상징적 해석론자들은 자타카가 원래 일반인들을 위해 씌어진 세속적인 내용이라고 여긴다.”
“...개, 돼지, 개미, 곤충...마찬가지로 경전에서 언급된 송아지, 새끼 염소, 새끼 양, 말, 새들로 그러한 동물들의 속성과 연결된 인간의 속성들을 상징한다. 거의 모든 인간들이 이 속성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동물 신화에서 널리 묘사되고 있다. 이솝 우화집은 이런 동물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럼에도 시드파 바르도 편에 나오는 동물 상징들은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옳다. 인간의 의식체가 영원한 자유에 이르지 못하면 자신이 지은 카르마에 따라 각종 동물들로 상징되는 정신적 특성이나 성격을 지닌채 인간의 형태로 계속 윤회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 대부분을 지배하는 정상적인 카르마의 조건이다. 그러나 예외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카르마의 퇴화 조건 아래서는 오랜 세월을 통해 서서히 인간의 속성을 잃어가 마침내 동물의 세계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에 담긴 환생 사상의 고차원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사람이 죽어 육신을 떠나면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 49일 동안 바르도라고 불리는 중간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때 그 의식체는 생전에 그를 지배하던 저차원적이고 거친 욕망 쪽으로 달려가려는 카르마의 속성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더 강한 힘을 가진 바른 지식의 수련을 쌓으면 그 의식체의 한 부분이 붓다의 경지를 성취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자는 자신의 저차원적인 동물적 성질에서 투영되어 나오는 공포의 유령들에 사로잡히는 대신 죽음과 환생사이의 그 중간상태를 지나 바르도가 아닌 즐거운 세계에 가게 된다. 만일 그 진화된 영혼이 영적으로 특히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면 다시 말해 그가 위대한 성자라면 그는 바르도 상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지고한 극락 세계에 들게 되고(천국과 지옥 426), 카르마의 주관자의 섭리에 따라 인간 세계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그는 아직 윤회계에 속한 존재이긴 하지만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진화된 존재라고 티벳 스승들은 그를 묘사한다. 만법의 주재자의 섭리에 따라 이렇게 지상으로 돌아온 그 존재는 인류를 도우려는 자비심 때문에 환생하는 것이다. 그는 위대한 스승으로 신의 사명을 가진 자로 그리고 니르마나카야(법신)로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환생은 차원이 낮고 평범하게 사자가 그 과정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을 겪는자의 깨달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고등수학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빛의 속도를 계산할 수 없듯이 동물적인 사람이 성스러운 사람의 환생을 지배하는 고차원적인 법칙에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대신에 그는 망각의 강물을 들이키며 자궁의 문 안으로 들어가 바르도라고 불리는 욕망 세계로부터 다시 인간 세계로 환생한다.
그러나 이런 저차원적인 환생일지라도 인간과 동물 모두가 공통적으로 동물적 속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의식체가 갖고 있는 순수한 인간적인 요소 때문에 동물의 환생과는 다르다. 동물들에게도 이 인간적인 요소가 깃들여 있긴 하지만 그것은 활동을 하지 못하고 다만 잠들어 있을 뿐인 것이다. 아무리 저차원적인 인간일지라도 그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적인 요소가 활동하지 않고 잠들어 버리면 거꾸로 동물의 의식체 속에 잠들어 있는 인간적 요소가 완전히 깨어나는데 걸리는 진화의 기간만큼의 똑같은 긴 시간이 필요하다.
환생 사상의 이런 고차원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물이 곧 바로 인간으로 환생하고 인간이 곧바로 동물로 환생한다는 비합리적인 신앙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잘못된 믿음들이 불교와 힌두교 경전 거의 모두에서 두루 발견되고 있다.“
“현대 인류학의 아버지인 고 타일러 E. B. Tylor는 자료들을 세밀히 조사한 뒤 환생의 고차원적인 의미가 보다 합리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따라서 윤회에 대한 원래의 개념은 인간의 영혼이 새로운 인간의 몸으로 환생한다는 단순하고 합리적인 것이었다. 짐승은 인간의 여러 속성들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물들이다. 사자, 곰, 여우, 올빼미, 앵무새, 독사, 벌레 등과 같은 이름을 인간에게 하나의 별명으로 붙여 보라, 그러면 한 인간의 지배적인 속성을 한 단어로 압축해 표현할 수 있게 될것이다.”
4. 중간 영계에서 보이는 동물들이 뜻하는 것
(천계비의 45) 짐승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사람에게 해가 되는 포악한 것과 둘째는 사람에게 유익한 유순한 것입니다. 사람의 사악한 성품은 포악한 짐승들인 즉 곰, 늑대, 승냥이 등으로 상징되고 사람의 착하고 유순한 성품은 암송아지, 양, 어린 양 등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사람의 저속한 성정은 육체와 보다 깊은 관계를 가지므로 땅위의 야생동물로 불리웠고 이런 성정은 바로 정욕과 그 쾌락을 뜻합니다.
(천계비의 46) 짐승들은 사람의 정동을 뜻하는데, 포악한 동물은 사람의 사악한 정동을, 유순한 동물은 사람의 선한 정동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296) “이런 사람들 안에 있는 악의 탐욕을 천사들이 바라볼 때는 용, 도마뱀, 독사 또는 뿔 달린 올빼미, 소리지르는 올빼미와 같은 독 있는 동물같이 보인다”
(천계비의 10042:2) “저승에서는 많은 종(種)과 헤아릴 수 없는 류(類)의 짐승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짐승들은 영인들과 천사들 안의 생명의 대한 겉모습들이며, 영인들과 천사들에게 있는 애정과 사고에 상응하고 있다”
(천계비의 2179) “영인들의 세계에는 여러 가지 표징적인 것들이 시각에 보이게 된다. 거기 있는 영인들의 눈앞에 가끔 짐승들도 나타난다. 다양하게 장식한 말들, 황소, 양, 어린양, 그밖에 다른 여러 종류의 짐승들이 보인다. 때로는 지상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도 보인다. 그러나 그 짐승들은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짐승들은 성경말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선지자들이 본 것이며 같은 근원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영인들 세계에서 보이는 짐승들은 선과 진리의 애정을 또한 악과 거짓의 애정을 상징하는 것이다”
5. 영적 환생론, 사람과 영인의 협력
(영계일기 1533) 내가 어떤 것들을 기록하고 있는 동안에 왼쪽에 가까이 있던 한 영이 있었습니다. 내가 기록하는 것을 마치었을 때 그 영은 내가 저술하는 일을 도와주었다고 나에게 감사하였습니다. 자주 일어나는 일로서 그 영이 나라고 여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과 영의 협력(co-operation)입니다. 내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다른 영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자신들을 위해서 나에게 요구하려고 하였습니다. 어떤 식으로 영들이 사람에게 협력하고 있는지는 아주 명백 합니다. 1748년 3월 19일
(영계일기 557) “사후에 죽은 영혼 즉 영인들은 산 사람의 육체를 통해 사람들과 함께 하는데, 그 사람들 뒤에 서면 그들은 자기들이 모든 면에서 그 사람들 자신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일 허락된다면 그들은 자기들과 말하는 그 사람들을 이용하여 완전히 세상의 삶 속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 실로 저들은 사람을 통해서, 말을 통해서, 또 편지를 통해서까지 자기들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세상 삶의 중심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빈번하게 아니 매우 자주 집필 중의 내 손을 자기 자신의 손 인양 마음대로 움직이므로서(자동서기) 지상인인 내가 아니라 영으로 존재하는 그들이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서 나는 증언할 수 있습니다. 혹 허락된다면 실로 저들은 자기들의 문체(영서)로 기록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일도 나는 잠깐의 어떤 경험으로 알고 있으나 이 경험에 대해 기록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원리강론 p199, 영적 재림부활론) "창조원리에 의하면 인간의 영인체(영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들이는 생소(生素 : 생명 에너지=기)와 육신으로부터 공급되어지는 생력요소(生力要素 : 생리 에너지, 섭식, 운동등)의 수수작용(授受作用 : 주고 받음)에 의하여서만 성장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인체(영체)는 육신을 떠나서는 성장할 수 없으며 또한 부활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지상의 육신생활에서 완성하지 못하고 타계해 버린 영인들이 부활하기 위하여는 지상에 재림하여서 자기들이 지상의 육신생활에서 이루지 못하였던 그 사명부분을 육신생활을 하고 있는 지상의 성도들을 협조하여 그것을 이루게 함으로써 지상인들의 육신을 통하여 대신 이루어 맞추어여 하는 것이다. 유다서 1장 14절에 '끝날에 주님과 함께 수만 성도가 임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영인들은 어떤 방법으로써 지상인으로 하여금 뜻을 이루도록 협조하는가? 지상의 성도들이 기도 및 기타 영적인 활동을 하는 가운데 영인들의 상대가 되면 그 영인들은 재림하여서 그 지상인들의 영인체와 상대기준(相對基準 : 서로 맞대고 교제함)을 조성하여 역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영인들은 지상인들로 하여금 불을 받게 하고, 병을 고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능력을 행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입신상태(入神狀態)에 들어가서 영계의 사실을 보고 듣게도 하고, 혹은 계시와 묵시에 의하여 예언을 하게도 하며, 그 심령에 감명을 주는 등 여러면에 걸쳐 성령 대신 역사를 함으로써 지상인으로 하여금 뜻을 이루어 나가도록 협조하는 것이다.“
(원리강론 p202, 영적 재림부활론) “이와 같은 섭리를 두고 볼 때에 영인들이 지상인들을 협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결과적으로 보아 지상인들도 영인들의 부활역사를 협조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39절 이하에 '이 사람들이(구약 의인들)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천국허입)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지상인) 위하여 더 좋은 것(천국)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지상인) 아니면 저희로(구약 의인들) 온전함(천국인)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된 말씀은 결국 위에서 설명한 사실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이 구절은 영계에 있는 모든 영인들은 지상인의 협조를 받지 않고서는 완성할 수 없다는 원리를 증거 한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기록된바 '무엇이든지 너희가(지상인) 땅에서 매면 하늘(영인들)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도 결국 지상성도들이 풀어주지 않으면 영인들에게 맺혀진 것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었다. 이와 같이 영인들은 지상의 성도들에게 재림하여서 그를 협조함으로써만 부활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마태복음 16장 19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천국문의 열쇠를 지상 성도들(교회)의 대표로 베드로에게 주시어 그로 하여금 천국문을 지상에서 열도록 하셨던 것이었다.”
(원리강론 p206, 영적 재림부활론) “..지상에서 자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간 영인들은 각각 자기들이 지상에서 맡았던 것과 같은 사명을 맡은 동형의 지상인에게 재림하여서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협조하는 것이다. 이때에 그 협조를 받는 지상인은 자기 자신의 사명도 이루어 나아가는 동시에 자신을 협조하는 영인의 사명까지도 대신 이루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명을 중심하고 보면 그 지상인의 육신은 그를 협조하는 영인의 육신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그 지상인은 그를 협조하고 있는 영인의 재림자가 되는 것이므로 그 지상인은 흔히 그를 협조하는 영인의 이름으로 대칭되곤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지상인은 흔히 그 영인이 윤회환생한 실체인 것 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말세에 있어서 세계형의 분단 사명을 맡은 지상인들은 각각 과거에 그와 동형의 사명을 띠고 왔다 간 모든 영인들의 책임분담을 다 계승하여 완수해야 될 입장에 있다. 따라서 그 모든 영인들은 그 지상인들에게 재림하여 그를 협조함으로써 그들이 지상에 있을 때에 다하지 못하였던 사명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인들의 협조를 받는 지상인은 그를 협조하는 모든 영인들의 재림자요 따라서 그 지상인은 그 모든 영인들이 환생한 것 같이 보여지는 것이다. 끝날에 자기가 재림예수요 미륵불이요 석가요, 공자요, 혹은 감람나무, 혹은 생명나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전생 최면에서나 채널링에서 교신하는 많은 성자성녀들) 불교에서 윤회환생(물질적 환생)을 주장하게 된 것은 이와같은 재림부활의 원리를 모르고 다만 그 나타나는 결과만을 보고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