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5:1-21)의 상세한 영적인 뜻
(A.C. 1783) 여기에 포함된 내용들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틀림없는 역사적인 것들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아브람과 말씀을 하셨다는 것, 가나안 땅이 상속재산(inheritance)으로 그에게 약속되었다는 것, 아브람이 암송아지,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가져오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것, 새들(=솔개들)이 그것들 위에 내려왔다는 것, 깊은 잠이 그에게 밀려 왔다는 것과 깊은 어둠과 공포가 짓눌렀다는 것, 해질 무렵에 희생제물 사이에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햇불이 갑자기 그에게 나타났다는 것, 그 밖의 다른 역사적인 것들이 되겠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가 틀림없는 역사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에 속한 개별적인 또는 전체적인 것들이나 행해진 것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모두가 표징적이고 그것에 의하여 기술된 낱말들 자체들도 가장 작은 점에 관해서까지 모두가 표의적입니다. 말하자면 이것들에 속한 개별적인 것이든 전체적인 것이든, 그것들 안에는 속뜻(internal sense)이 내재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 안에 포함된 개별적인 것이나 또는 전체적인 것들은 영감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영감으로 쓰여진 것들은 천계적 원천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그것들 안에 천적인 것들과 또 영적인 것들이 필연적으로 저장되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으로는 주님의 성언이 되기에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2] 이러한 것들이 속뜻으로 내포된 것들입니다. 이 뜻이 열리어질 때 성경말씀에 속한 문자적인 뜻은 말살되는데,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한편 역사적인 뜻이나 문자적인 뜻에만 오로지 주의를 집중한다면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속뜻은 말살됩니다. 이들 둘의 관계는 천계적 빛과 세상의 빛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역으로 말한다면 세상의 빛과 천계적 빛과의 관계입니다. 천계적 빛이 나타나면 그때 세상의 빛은 칠흑같이 어둡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영계의 경험에 의하여 나에게는 명확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세상의 빛안에 있을 때 그때 만약 천계적 빛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칠흑같이 어두울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경우도 꼭 같습니다. 인간적인 지혜나 또는 기억지 안에 모든 것들이 좌정한 사람에게는 천계적 지혜는 하나의 불명료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천계적 지혜 안에 좌정한 사람에게는 인간적 지혜가 불명료하고 조잡한 것들에 속한 하나의 것인데 만약 그것안에 천계적 빛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것과 같을 것입니다.
(A.C. 1784)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창15:1)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씀은 어린 시절의 그 싸움들 뒤에 계시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고, “환상”(vision)은 극내적 계시를 가리키고, 그것은 곧 지각에 속한 것입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는 말씀은 악과 거짓에 대한 보호를 뜻하는데 그것은 신뢰받는 것입니다. “받을 보상이 크다”는 말씀은 목표(end) 또는 승리의 목적을 뜻 합니다.
(1785)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어린시절 시험에 속한 싸움이 있은 뒤 계시(revelation)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은 “일들(=이야기들/words)의 표의에서 ”아브람에게 한 주님의 말씀“이 뜻하는 표의에서 또 ”환상“(vision)의 표의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 언어에서 ”일들“은 실제적인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성취된 것들을 뜻하는데 그것이 주님의 시험에 속한 싸움들이라는 것은 앞 장에서 언급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씀은 주님 자신과 같이 한 주님의 말씀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시절 또는 시험에 속한 싸움에서 본질들(Essences)이 한 몸(as a one)으로 아직 결합되지 않았을 때 하나의 계시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에 활동하실 때 이것이 멀어진 순간이나 상태에서는 내적인 것이 다른 방법으로 나타날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겸손의 상태(the Lord's state of humiliation)라 부르는 상태입니다.
(1786) "환상“이 극내적 계시(inmost revelation)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지각에 속한 것을 가리킨다는 것은 사람의 상태에 따라 일어나는 환상의 본성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내면적인 것들이 닫혀 있을 때 내면적인 것들이 열린 사람들에게 있는 환상과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주님께서 시내산의 전 회중에 나타나셨을 때 그 현현(appearing)은 아론에게 나타난 현현과 그 사람들에게 나타난 현현과는 아주 다른 환상이었고 또 아론에게 나타난 환상은 모세에게 나타난 환상과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또한 예언자들에게 나타난 환상도 모세에게 나타난 환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환상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주님의 자비로 뒤에 설명드리겠습니다. 환상이 보다 내면적이면 내면적일수도록 보다 더 완전 합니다. 주님과 같이 한 환상들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완전한 환상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주님께서는 영들의 세계와 또 천계들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관한 지각(perception)을 가지셨기 때문이고 또 주님께서는 여호와와 직접적인 교통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교통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난 환상이 속뜻으로 표징하는 것이고 또 뜻하는 것입니다.
(A.C. 1787)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창15:1)
이 말씀이 악과 거짓에 대한 보호 즉 신뢰(trust)받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은 곧 설명하게 될 방패의 표의에서 명백 합니다. 이들 말씀들 즉 여호와가 방패(shield)이시다 또는 주님은 매우 크신 상급(an exceeding great reward)이시다는 말씀 등은 시험뒤의 위로(consolation)에 속한 말씀들입니다. 모든 시험은 그 어떤 자포자기(despair)를 수반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시험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로가 따릅니다. 시험을 당한 사람은 근심, 걱정에 빠지는데, 그것은 있어야 할 결과에 관해서는 자포자기 상태를 유발 합니다. 시험에 속한 싸움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승리가 확실한 사람은 근심, 걱정안에 있지 않으며 그러므로 시험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2] 주님께서는 모든 시험중에서 가장 비참하고 잔악한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에 주님은 또한 자포자기의 상태를 몰아낼수 있었고 또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능력에 의하여 없애버리시고 정복하시였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시험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서에 기록되기를 -
(누가22:40-45) “그곳에 이르러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셨다. 그런 다음에 그들과 헤어져 돌을 던져서 닿을만한 거리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요.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십시요. 그때에 천사가 하늘로부터 그에게 나타나서 힘을 복돋우어 드렸다.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 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제자들에게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서 잠들어 있었다.”
또 마태복음서에는 -
(마태 26:37-44) “예수께서는 근심하여 괴로워하셨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예수께서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요.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수 없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께서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수 없는 것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요. 예수께서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졸려서 눈을 뜰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다시 가서 같은 말씀을 다시 하시면서 세 번째로 기도하셨다.”
마가복음서에 -
(14:33-41) “예수께서는 두려워하며 괴로워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그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리어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요.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요.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보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안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수 없느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께서 다시 떠나가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와서 보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예수께서 세 번째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인용된 말씀들에서 우리는 주님의 시험의 속성(nature)이 무엇인지 밝히 이해할수 있습니다. 즉 그 시험은 모든 시험들 중에서 가장 가혹한 것이고, 주님은 가장 극내적인 것에서부터 극심한 고뇌를 느끼셨는데 피땀을 흘리시는데까지 고뇌를 겪으셨다는 것이며 주님은 그때 목적과 결과(event)에 관해서 자포자기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또 주님은 위로를 받으셨다는 것 등의 속성입니다. 심사숙고 하에 이 말씀들 즉 “나 여호와는 너의 방패이다. 너의 상급이 매우 크다”는 말씀은 마찬가지로 앞장에서의 시험에 속한 싸움 뒤의 위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788) 방패가 악과 거짓에 대한 보호 그리고 그것이 신뢰받는 것을 뜻한다는 것은 재론이 필요 없이 명백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언어상의 표현방법에서 보면 그 표현은 여호와는 방패(왼손에 드는 둥근 방패/buckler)시고 방어물이다는 말씀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방패가 뜻하는 것은 성경말씀에서 잘알수 있는데, 거기에서 주님에 관해서는 그것은 보호를 뜻하고 사람에 관해서는 주님의 보호에 대한 신뢰를 뜻 합니다. 전쟁이 시험을 뜻하기 때문에(1664 참조) 그러므로 전쟁에 관한 모든 무기들은 시험에 속한 특정한 것들이나 또는 악과 거짓에 대항하는 방어에 속한 것들을 뜻하는데, 즉 그것은 시험을 야기하고 시험을 하는 지옥의 패거리들에 대항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방패는 전자를 뜻하고 둥근 방패는 후자를 뜻 합니다. 그리고 과녁, 투구, 장이나 작살, 검, 활과 화살, 쇠사슬, 갑옷등도 이런 것을 뜻하는데 이들 각각에 관해서는 뒤에 설명드리겠습니다.
[2]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방패가 악과 거짓에 대한 보호를 뜻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주님의 신뢰를 뜻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슴에 대한 방어이고 또 가슴이 선과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선은 심장이 있는 그곳에 있고, 진리는 폐장이 있는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내용이 방패가 가리키는 표의라는 것은 다윗의 글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시편서에 -
(144:1,2) “나의 반석이신 주님을 내가 찬송하련다. 주님은 내 손을 훈련시켜 전쟁에 익숙하게 하셨고, 내 손가락을 단련시켜 전투에도 익숙하게 하셨다.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산성,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뭇 백성을 나의 발 아래에 굴복하게 하신다.”
여기의 전쟁이나 전투는 시험에 관한 것들을 가리키고 속뜻으로는 주님의 시험을 뜻 합니다. 여호와에 관한 방패는 보호를 사람에 관하여서는 신뢰를 가리킨다는 이런 것들은 매우 명료 합니다.
[3] 같은 책에
(시편115:9-11) “이스라엘아 주님을 의지하여라 주님은 도움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 아론의 집이여 주님을 의지하여라 주님은 도움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주님을 의지하여라 주님은 도움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
이 말씀이 뜻하는 것도 같은 내용입니다. 또
(시편 91:2,4) “너는 주님께 고백하기를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주님이 그의 깃으로 너를 덮어주시고, 너도 그의 날개 아래로 피할 것이니 주의 진실하심이 너를 지켜주는 방패와 성벽(=둥근방패)이 될것이다.”
[4] 또 이어서
(시편 18:2,30)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나의 반석,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완전하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신실하다. 주께로 피하여 오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
여기의 뜻도 위와 동일 합니다. 또 이어서
(시편7:9,10) “악한자의 악행을 뿌리 뽑아 주시고, 의인에게는 마땅한 보상을 해 주십시요. 주님은 의로우신 하나님, 사람의 마음 속과 뱃속까지 낱낱이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키시는 방패시요. 마음이 올바른 사람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는 분이시다.”
여기의 뜻은 신뢰입니다. 또
(시편18:35) “주께서는 주께서 쓰시는 구원의 방패를 나의 손에 들려 주셨고, 주께서는 오른손으로 나를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 말씀 역시 신뢰를 뜻 합니다. 또
(시편 47:9) “열강의 군왕(=방패)들은 모두 주님에게 속하였다. 하나님은 지존하시다.”
여기의 말씀도 역시 신뢰를 뜻 합니다.
[5] 또 다시
(시편 84:11)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흠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이 말씀은 보호를 뜻 합니다. 모세의 글에는
(신명기 33:29) “이스라엘아 너희는 복을 받았다. 주께 구원을 받은 백성 가운데서 어느 누가 너희와 같겠느냐? 그분은 너희의 방패이시요. 너희를 돕는 분이시며, 너희의 영광스런 칼이시다. 너희의 원수가 너희 앞에 와서 자비를 간구하나 너희는 그들의 등을 짓밟는다.”
여기의 방패는 보호를 가리킵니다.
[6] 전쟁의 무기들이 시험에 속한 싸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 관하여 언급되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전쟁에 속한 동일한 무기들은 공격하고 유혹하는 적군들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때 그것들은 반대적인 것들을 뜻 합니다. 따라서 방패는 그들 싸움이 비롯된 악과 거짓을 뜻하고 그것은 그들을 방어하고 그들은 그것들을 신뢰 합니다. 예레미야서에
(46:3,4) “크고 작은 방패로 무장하고 싸움터로 나아가거라! 말에 안장을 얹고 올라타거라! 투구를 쓰고 대열을 정돈하여라 창을 날카롭게 갈고 갑옷을 입어라”
그 외에도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1789)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창15:1)
이 말씀이 승리의 목적(end)과 목표(purpose)를 뜻한다는 것은 시험에 속한 싸움 뒤 상을 가리키는 보상(reward)의 표의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여기의 승리의 목적과 목표는 주님께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 어떤 승리의 상(prize)을 기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승리의 상은 전인류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온 인류를 향하신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사랑에서 비롯되어 싸우시는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포상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그것의 모든 소유를 다른 사람 모두에게 주고 또 전가하기를 원하는 사랑이기 때문이고 그것 자체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온 인류의 구원이다는 것이 여기서 보상이 뜻하는 것입니다.
(1791) “아브라함이 주 나의 하나님께 여쭈었다.”(창15:2)
이 말씀이 주님의 지각을 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모든 사물에 속한 가장 내면적인 지각과 가장 완전한 지각을 소유하셨다는 사실에서 확실 합니다. 이 지각은 앞서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천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에 속한 하나의 지각적 감관이고, 천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에 속한 지식이고, 주님 여호와와의 계속적인 교통이며 내적 대화인데, 이것은 오직 주님께서만 소유합니다. 이것이 “아브람이 주 나의 하나님께 여쭈었다”는 말씀이 나타나는 뒤의 곳에서도 같은 뜻이 되겠습니다.
(1792) 아브람이 내면적 사람을 가리키고, 또는 아브람이 주님의 내면적인 것들 또는 합리적인 사람(rational man)을 표징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주님의 내면적 사람이 무엇인지는 다음 장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1793) 주님 여호와(=주 하나님)가 내면적 사람에 대한 상대적인 속사람을 뜻한다는 것은 주님의 속사람에 관해서 설명한 것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즉 그 속사람은 여호와 자신이고, 그분에게서 주님은 수태되었고, 주님은 그분의 독생자이시며 주님의 인성(the Lord's Human)은 시험에 속한 싸움에 의하여 어머니에게서 이어받은 모계적 인간(the maternal human)을 정화하신 뒤 그분에게 결합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 여호와라는 칭호는 성경말씀에 매우 자주 나타납니다. 사실 여호와가 주님(the Lord)이라고 불릴 때마다 주님은 주 여호와(the Lord Jehovah)라고 부르지 않고 주(the Lord Jehovih)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특히 시험에 관해서 언급되는 곳에서 그러하였습니다.
[2] 이사야서에
“만군의 주 하나님(the Lord Jehovih)께서 오신다. 그가 권세를 잡고 친히 다스릴 것이다. 보아라 그가 백성에게 주실 상급을 가지고 오신다. 백성에게 주실 보상을 가지고 오신다. 그는 목자와 같이 그의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들을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며 젖을 먹이는 어미 양들을 주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야40:10,11)
여기에서 “주 하나님은 권세를 잡고 오신다”(주 여호와께서 강한자로 임하실 것이요)는 말씀은 시험에 속한 싸움에서의 주님의 승리에 관계되고 “그가 친히 다스리신다”(그 팔로 다스릴 것이다)는 말씀은 그것이 그분 자신의 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뜻 합니다. 상급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본문 장의 1절에서 설명한 것이 여기서도 선언되었는데, 즉 그것은 온 인류의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목자와 같이 그의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들을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며 젖을 먹이시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는 것으로 이 모든 것들은 극내적 또는 신령사랑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3] 같은 예언서에서
(이사야 50:5-7, 9)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옷처럼 헤어지고 좀에게 먹힐 것이다.”
여기서도 명확히 심판에 관해서 언급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구절이 있습니다.
(1794) "주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창15:2)
이 말씀이 거기에 내적 교회가 없음을 뜻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어린애가 없다”(walking childless)는 말씀의 표의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걷는다”(to walk)는 것은 속뜻으로 산다는 것을 가리킵니다.(519항 참조) 그러나 어린애가 없는 사람은 씨(seed)를 가지지 못한 또는 자기의 후손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어린애가 없는 사람 즉 씨(seed/후손)가 없는 사람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뒤에 이어지는 구절에서(3-5절) 설명하겠습니다.
(1795)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내 집의 집사, 창15:2)
이 말씀이 외적 교회를 뜻한다는 것은 속뜻으로 “한집의 집사”(家令, 한집의 상속자)의 표의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교회에 관한 상속자입니다. 외적 교회(the external church)를 “한집의 상속자”라고 불렀는데, 그때는 내적 교회(the internal church) 자체가 집(가문)이고, 그 가족의 아버지가 주님입니다. 외적 교회는 다른 경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속자들의 직무는 그 교회의 외적인 것들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종교의식의 집전업무나 예배장소와 그리고 교회 자체와 관계되는 행정업무와 같습니다. 즉 여호와의 집 또는 주님의 집에 관계되는 것과 같습니다.
[2] 교회의 내적인 것들이 없는 외적인 것들은 아무것도 없는 무가치(naught)한 것입니다.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에서 그들의 존재가치가 비롯되고 또 그것들은 내적인 것들의 존재가치를 가리킵니다. 여기의 경우는 사람의 경우와 꼭 같습니다. 즉 사람의 외적인 것 또는 관능적인 것들은 그것에게 영혼 또는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들 자체안에는 무가치한 것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것들은 내적인 것들이고 저같은 것들은 외적인 것들입니다. 또 전자는 마음(animus et mens)이고 후자는 외적인 것들 또는 관능적인 것들에 속한 방법들에 의하여 생겨지는 모든 것들의 가치일 뿐입니다. 마음에 속한 것들은 사람을 만들지만 입술만의 또는 겉꾸밈의 제스처에 속한 것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같은 경우는 교회에 속한 내적인 것들과도 꼭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속한 외적인 것들은 사람의 외적인 것들과 같아서 거기에서 그들은 관리자의 일을 맡아 수행 합니다. 또는 꼭같이 외적 사람이나 관능적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 집의 상속자(가령) 또는 그 집의 관리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그 집은 내면적인 것들을 뜻 합니다. 이상에서 볼 때 “어린애가 없다”는 말씀이 뜻하는 것 즉 거기에는 교회에 속한 내적인 것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외적인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때의 경우와 꼭 같습니다.
(1796)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창15:2)
바로 앞에서 설명드린 것에서 확실히 알수 있는 것은 이들 말씀들이 외적 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꼭 같은 내용이 “다마스쿠스”의 표의에서 잘 나타납니다. 다마스쿠스는 시리아의 수도로 거기에는 고대교회에 속한 예배의 잔재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교회의 외적인 것들을 제외하면 무가치한 것들로써(1238, 1241항 참조) 따라서 그 집의 가령직무(the stewardship)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의 에벨과 또는 히브리 민족이 비롯되었습니다. 이들 낱말들 안에 자포자기에 속한 것들 따라서 주님의 시험에 속한 어떤 것들이 수반한다는 것은 그 낱말들 자체에서나 또는 내적인 교회에 관해서 이어지는 위로(consolation)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1797) “주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것입니다.”(창15:3)
“아브람이 주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다고 여쭈었다”는 말씀은 사랑과 믿음인 교회의 내적인 것들이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하고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것이다”는 말씀은 주님의 나라안에는 외적인 것들만 오직 있을 것이다는 것을 뜻 합니다.
(천계비의 1798) “아브람이 주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다고 여쭈었다.”(창15:3)
이 말씀이 교회에 속한 내적인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255, 256, 1025) 사랑과 믿음을 가리키는 자식(seed)의 표의에서 그리고 또 뒤에 설명하는 것과 같이 상속인의 표의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그것에서 비롯된 사랑과 믿음이 교회의 내적인 것들이라는 것은 이미 수차에 걸쳐 설명하였습니다. 사랑과 인애에 속한 즉 사랑과 인애에서 비롯된 것 이외의 교회에 속한 내적인 것을 뜻하는 다른 믿음은 전혀 없습니다.
[2] 일반적인 뜻으로 믿음은 교회에 속한 모든 교리적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사랑 또는 인애에서 분리된 교리(doctrine/doctrinale)는 결코 교회의 내적인 것들을 이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교리는 다만 기억에 속한 지식이고 그것은 가장 사악한 사람과 더불어 존재하고 또 지옥적인 사람과 더불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애에서 비롯된 교리나 또는 인애에 속한 교리는 교회에 속한 내적인 것들을 이룹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 자체는 모든 예배에 속한 내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들은 인애에 속한 생명에서 비롯 됩니다. 이 내적인 것인 믿음을 가리킨다는 것과 또 인애에 속한 삶을 가진 사람은 믿음에 속한 모든 것들을 밝히 알고 있다는 것은 이같은 심사숙고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원한다면 모든 교리적인 것들을 시험해 보십시요. 여러분은 그것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잘 알것입니다. 또 인애에 관계되지 않는 것인지 따라서 인애에서 비롯된 믿음에 관계되는 것인지도 알 것입니다.
[3] 십계명의 계율을 보십시다. 이것은 그 첫째는 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속한 또는 인애에 속한 삶을 사는 사람은 주 하나님을 예배 합니다. 왜냐하면 이 예배가 곧 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속한 삶 안에 또는 인애 안에 있는 사람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예배하고 또 매일매일 주님께 영광돌리는 일 외에 그에게 매혹적이고 즐거운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 역시 전적으로 인애에 속한 것입니다. 자기 이웃을 자기 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그것에도 몸서리 치는데 하물며 사람을 죽이는 짓에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인애에 속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을 그의 이웃에서 줄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그 어떤 것도 빼앗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간음하지 말라”는 계율의 경우에 있어서도 인애에 속한 삶안에 있는 사람은 그의 이웃의 아내를 보호해 줄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 여인에게 이같은 해를 저지르지 못하게 합니다. 그는 간음이 양심에 위배되는 범죄로 여기고 또 이같은 것은 혼인애(conjugial love)와 혼인애의 의무를 파괴하는 것으로 생각 합니다. 이웃의 소유를 탐하는 것은 또한 인애에 속한 삶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의에 의해서 또는 자기의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원하는 것이 인애에 속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소유 그 어떤 것도 탐하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4] 믿음에 속한 보다 외적인 교리적인 것들이 십계명의 계율들입니다. 이것들은 인애 안에 또는 인애의 삶안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기억 안에서 알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안에서 압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자신안에 그것들을 새기고 명심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가 그의 인애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생명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교리적인 내용(nature)에 속한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로 오직 인애에서부터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올바른 양심에 따라서 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이해할수도 없고 또 살필수도 없는 올바름이나 진리를 그는 단순하게 믿고 또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다는 마음의 단순함에서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잘못된 짓을 범하지 않고 비록 그가 받아들인 것이 그것 자체안에 진실된 것이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타난 진리로 행할뿐입니다.
[5] 예를 든다면 어느 누가 주님께서는 노하시고 벌주시고 시험하고 기타 이와같은 분이라고 믿는 경우와 같겠습니다. 혹은 만약 그 사람이 성만찬의 떡과 포도즙이 표의적이라는 것과 그것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어떤 방법에 그 살과 피가 표징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둔다면 그들이 이것을 말하든 저것을 말하든 아무 보잘것 없는 지극히 사소한 것이며 비록 이 문제에 관해서 사람들이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소박한 마음(a simple heart)에서부터 이것이 이루어졌음을 마련해 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애 안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떡과 포도즙이 속뜻으로 온 인류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또 이 사랑에 속한 모든 것들 그리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람의 호혜적 사랑을 뜻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은 당장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믿고 또 기뻐합니다. 교리적인 것들 안에는 있으나 인애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든 것들에 관해서 언제나 다투고 그들은 그들이 하는 것처럼 그들이 믿음(believe)이라고 부른 것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를 불문하고 모두 정죄합니다. 이상에서 볼 때 누구나 깨닫고 이해할수 있는 것은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이 교회에 속한 내적인 것들이다는 사실입니다.
(1799)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것입니다.“(창15:3)
이 말씀이 주님의 나라안에는 외적인 것들이 있을 것이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은 속뜻으로 "상속자"(heir) 또는 "상속하는 일"의 표의에서 잘알수 있습니다. 상속인이 되는 것 또는 상속한다는 것은 주님 나라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뜻 합니다. 주님 나라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상속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호애(mutual love)의 생명인 주님의 생명에 의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그들은 주님의 자녀들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자녀들이나 또는 상속자들은 주님의 생명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명은 주님에서 비롯되었고 또 그들은 주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즉 그들은 중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의 자손이든 그들은 상속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의하여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그들은 주님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의 나라안에는 외적인 사람들 내면적인 사람들 그리고 내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층천에 있는 선한 영(good spirit)들이 외적인 사람이고 이층천에 있는 천사적 영(angelic spirit)들이 내면적 사람이고 삼층천에 있는 천사들이 내적인 사람입니다. 외적인 사람들은 내면적인 사람들처럼 주님에게 아주 가깝게 관계되지 않고 그저 그렇게 가까운 관계입니다. 또 내면적인 사람들은 내적인 사람들처럼 주님에게 아주 가깝게 관계되지 않고 그저 그렇게 가까운 관계입니다. 신령 사랑(the Divine love) 또는 자비(mercy)에서 주님은 주님 자신에게 가까운 모두를 포용하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입구에 서 있지 않습니다. 즉 일층천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삼층천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주님과 같이 있지 않고 주님 자신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사랑이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교회가 그때 오직 외적인 것안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것입니다.”는 말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따라서 주님나라에 외적인 것들도 있다는 것을 뜻 합니다. 그러나 위로가 뒤이어졌는데 내적인 것들에 관한 약속이 다음 절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3] 그 교회에 속한 외적인 것들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설명하였습니다.(1083, 1098, 1100, 1151, 1153) 교리들에 관계되는 것들은 그것 자체를 외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데 하물며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내적인 것들을 만들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상호 교회들을 분별하지 않으나 그러나 교리들에 관계되는 것들은 교리적인 것들에 일치하는 삶을 존재하게 하고 교리적인 것에 일치하는 삶에 속한 모든 것들은 그들의 기초로써 그들이 진실되고 또 인애를 우러르게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것을 가르쳐 주는 것을 제외하면 교리라는 것이 무엇 입니까?
[4] 기독교계에서 교회가 구별되는 것은 교리적인 문제들입니다. 교리적인 것들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로마 가톨릭 교도들, 루터교도들, 칼빈주의자들, 또는 개혁교도들, 복음주의자들 또는 여타의 이름들로 불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일컬어지는 것은 오직 교리적인 것들에서 비롯 됩니다. 만약 그들이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믿음의 으뜸교리로 만든다면 결코 그런 것들은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리적인 문제들은 그때 믿음에 속한 신비들에 관한 다양한 의견에 불과할 것인데 그 믿음의 신비들이란 진실된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람이 그의 양심에 따라서 생각하고 판단할 것을 허락하는 것이고 또 사람은 누구나 참된 기독교인 즉 예수인으로 살 때 즉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같이 살 때 진정한 예수인이라는 것을 진실된 믿음에서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상의 모든 것에서 볼 때 상이한 교회들은 하나의 교회(one church)를 이룰 것입니다. 오직 교리에서 발생된 모든 알력과 분쟁은 모두 소멸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상호간의 모든 증오들은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고 주님나라는 이땅에 올것입니다.
[5] 대홍수 바로 직후의 고대교회는 비록 여러나라들을 통해서 퍼져 나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성품이었습니다. 즉 사람들은 교리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그들 스스로 매우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애가 가장 으뜸되는 교리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에 관계되는 교리적인 것들에 입각하지 않고 삶에 관게되는 인애에 입각하여 예배를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1장 1절에서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입니다. 그들에 관해서는 위에서 설명 드렸습니다.(1258)
(1802)(말씀하시기를)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창15:4)
이 말씀이 외적인 것들이 주님나라의 상속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뜻한다는 것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상속자가 되고 상속하는 일의 표의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주님 나라의 상속자는 외적인 것들이 아니고 오히려 내적인 것들입니다. 외적인 것들이 역시 그럴수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내적인 것들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때 한몸으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경우가 어떤지를 알기 위해서 천계들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삼층천안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일층천과 이층천에 있는 사람들도 꼭 같고 또 내적인 사람들과 같이 외적인 사람이나 내면적 사람들도 꼭 같은 이들이 주님나라의 상속자라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십시요.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하나의 천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천계들에서 내적인 것들과 외적인 것들은 그들이 사람안에 있는 것과 꼭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일층 천계안에 있는 천사들은 이층 천계안에 있는 천사들에게 종속되고 또 이들 천사들은 삼층 천계에 있는 천사들에게 종속됩니다. 그렇지만 이 종속관계는 지배력에 속한 종속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한 사람안에 있는 것과 같이 보다 외적인 것안에 흘러드는 내적인 것들의 입류입니다. 즉 주님의 생명은 그들의 계승의 질서안에서 삼층천계를 통해서 이층천계에 흘러들 이층 천계를 통해서 일층 천계에 입류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즉시 모든 천계들안에 입류 합니다. 하급의 천사들 또는 종속된 천사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소견(reflection)을 주지 않는다면 이런 내용을 전혀 알지 못 합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지배력에 속한 종속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2] 삼층천계에 속한 천사안에 있는 내적인 것의 존재에 비례해서 그는 주님나라의 하나의 상속자입니다. 또 이층 천계에 속한 천사 안에 있는 내적인 것의 존재에 비례해서 그는 주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일층 천계에 속한 천사 안에 있는 내적인 것의 존재에 비례해서 그는 역시 주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그것은 어느 누가 상속자가 되게 하는 원인이 바로 내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면적 천사들로서는 보다 외적인 천사들에 비하여 보다 내면적인 것에 속 합니다. 그러므로 전자는 주님에게 보다 가깝고 그들은 보다 더 완전한 상속자들입니다. 내적인 것이 주님사랑이요 이웃을 위한 인애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사랑과 그 인애에 비례하여 그들은 자녀이고 상속자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비례만큼 그들은 주님의 생명을 받은 분담자들이기 때문입니다.
[3] 어느 누구도 사랑에 속한 선과 믿음에 속한 진리를 밝히 알기 전까지는 일층천 또는 외적 천계에서 이층천 또는 내면적 천계에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 사람이 밝히 아는 것만큼 그는 위로 올리워지고 또 천사적 영들 가운데 있을수 있습니다. 삼층천에 올리워지고 또 천사들 가운데 있기 전에는 천사적 영들도 매 한가지입니다. 교육에 의하여 내면적인 것들은 형성되고 그것에 의하여 사랑에 속한 선과 믿음에 속한 진리의 수용에 적응하는 내적인 것들이 형성되고 또 그것에 의하여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지각이 형성 됩니다. 어느 누구나 그가 알지 못하는 것 또는 믿지 못하는 것은 지각할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들이 어떤 존재이고 그것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한 지식의 수단을 제외한다면 어느 누구도 사랑에 속한 선과 믿음에 속한 진리를 깨닫는 지각의 능력을 부여 받을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 나라의 모든 것을 밝히 아는 어린아이의 경우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보다 쉽게 깨우쳐 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짓의 원칙에 전혀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고 더욱이 그들은 일반적 진리를 밝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것들을 받았을 때 그들은 수도 없이 무제한으로 그것들을 지각 합니다.
[4] 이같은 경우는 일반적으로 어떤 진리에 관해서 설득받는 사람의 경우와도 동일 합니다. 즉 일반적 진리에 속한 특수한 것이든 특수한 것에 속한 개별적인 것이든 그것들은 확증적입니다. 그는 쉽게 배웁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의적이고 임의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일반적으로는 진리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그러므로 확인된 동일한 진리에 속하는 특수적 또는 개별적 진리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기쁨과 즐거움과 더불어 일반적 진리에 들어가고 따라서 즉시 그것을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이 내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속자”라고 불렀고 그것에 의해서 그들은 주님의 나라를 상속받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에 속한 정동 즉 상호애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처음으로 상속자가 되고 또는 유산을 가지기 시작 합니다. 또 그들이 선과 진리에 속한 지식과 그것들의 정동에 의하여 그것들에 소개될 때 그들은 처음으로 상속자가 되고 유산을 받기 시작 합니다. 그들이 선에 속한 정동안에 또는 상호애 안에 있는 만큼 비례하여 그들은 “상속자”이고 유산을 소유합니다. 왜냐하면 상호애는 그들의 조상에게서 생명을 받는 것과 같이 주님의 본질(essence)에서부터 그들이 받은 생명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은 다음 절에 이어지는 설명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1803) "너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창15:4)
이 말씀이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안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은 “몸”(=내장/bowel)의 표의에서와 태어난다는 뜻인 “너의 몸에서 나온다.”(=너의 내장에서 나온다.) 는 말씀의 표의에서 잘알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것은 주님에 의하여 태어난 사람을 뜻 합니다. 주님에 의하여 태어난 사람들 즉 중생한 사람은 주님의 생명을 받습니다.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주님의 생명은 신령사랑인데 즉 온 인류를 향한 사랑이고 또는 가능하면 온 인류 전체 혹은 모둔 사람을 영원히 구원하려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 즉 이웃을 그들 자신 같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주님의 생명을 소유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주님의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즉 “그의 몸에서 나오지”(=그의 내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 나라의 상속자들이 될 수 없습니다.
[2] 이렇게 볼 때 확실한 것은 “몸에서 태어난다”는 말씀이 속뜻으로 여기서는 주님사랑과 이웃사랑 안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 -
“주 너의 속량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이르기시를 나는 주 네 하나님이다. 네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며 네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하나님이다. 하셨다. 네가 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였어도 네 평화가 강같이 흐르고 네 공의가 마다의 파도 같이 넘쳤을 것이다. 네 자손이 모래처럼 많았을 것이다. 네 몸에서 태어난 자손도 모래알 처럼 많았을 것이며 그 이름이 절대로 내 앞에서 끊어지거나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이사야 48:17-19)
“모래알 처럼 많은 자손”은 선을 가리키고, “네 몸에서 태어난 자손”은 진리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랑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오직 선과 진리에 속한 사랑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3] 더욱이 성경말씀에서 “몸”(=내장)은 생식의 내장 특히 어머니의 자궁을 표징하기 때문에 사랑 또는 자비를 뜻 합니다. 따라서 순결한 혼인애 또는 그것에서 비롯된 자녀 사랑을 뜻 합니다. 이사야서에 -
“하늘로부터 굽어 살펴 주십시요. 주님이 계시는 거룩하고 영화로운 곳에서 굽어보아 주십시요. 주의 열성과 권능은 이제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나에게는 주의 자비(=내장/bowels)와 긍휼이 그쳤습니다.”(63:15)
또 예레미야에서는 -
“에브라임은 나의 귀한 아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다. 그를 책망할때마다 더욱 생각나서 측은한 마음(=내장/bowel)이 들어 불쌍히 여기지 않을수 없다.”(31:20)
[4] 이렇게 볼 때 확실한 것은 온 인류를 위한 주님의 사랑 자체 혹은 자비 자체 또는 연민(compassion)이 “몸”(내장)이나 “몸에서 태어난다.”는 말씀의 속뜻이 뜻하는 내용입니다. 결과적으로 “몸에서 태어난 것들”은 사랑을 소유한 자들을 뜻 합니다.(주님의 나라가 상호애라는 것은 위에서 설명하였다. 548, 549, 684, 693, 694)
(1806) "주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창15:5)
이 말씀이 외적인 것에서부터 내적인 것들을 보는 내면적 사람의 시각을 뜻한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것과의 관계에서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는 말의 표의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육체의 눈으로써 사람이 하늘의 별들을 응시할 때 내적인 것들이 앞으로 이끌리는데 거기에서 주님의 나라에 관해서 생각 합니다. 사람이 그의 눈으로 무엇인가를 볼때에는 그가 관찰한 사물을 이해 합니다. 그것은 마치 그가 그것들이 아닌 것을 보았지만 그러나 그것들에서부터 교회 또는 천계에 속한 것들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 그의 내면적 시각 또는 그의 영의 시각 또는 영혼의 시각은 “바깥으로 인도” 합니다. 그 눈 자체는 정화확하게 바깥으로 데리고 나간 그의 영의 시각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특히 외적인것에서부터 내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한 그의 영의 시각입니다. 즉 그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는 대상물에서부터 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계속적으로 생각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목적을 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것이 태고교회 안에 있었던 시각이었고 또 이것이 사람과 같이 하는 천사들의 시각입니다. 또 이것이 주님의 시각이었습니다.
(1807)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쳐다 보아라”(창15:5)
이 말씀이 우주에 속한 정신적 관점에서 주님 나라의 표징을 뜻한다는 것은 “하늘”의 표의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에서 “하늘”(heaven)은 속뜻으로 눈에 나타나 보이는 하늘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이든 개별적이든 주님 나라를 뜻 합니다. 외적인 것에서부터 내적인 것을 유심히 보는 사람이 천계들을 이해(see)할 때 그 사람은 별이 영롱한 창공(sky)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천사적 천계를 생각 합니다. 또 그가 해를 쳐다볼 때 그는 공중의 해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천계의 태양이신 주님을 생각 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달이나 별들을 볼때도 또는 그가 하늘들의 광대무변(immensity)을 볼때도 그는 그것들의 광대무변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헤아릴수 없는 무한한 능력(power)을 생각 합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 모든 사물을 볼때에도 꼭 같은데 왜냐하면 성경말씀에는 표징이 아닌 것은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2] 지상에 있는 것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가 한날의 새벽을 볼 때 그는 그 여명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들의 소생(arising)을 생각하고 한낮으로의 진전에 관해서는 지혜에 관한 것을 생각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동산, 숲, 또는 화단, 등을 볼 때 그의 눈은 어떤 나무나 꽃, 잎, 열매 등에 고정되지 않고 이것들이 표징하는 천계적인 것들에 머무릅니다. 또한 어떤 꽃이나 그것의 아름다움 또는 즐거움에 머무르지 않고 저 세상에서 그것들이 표징하는 것에 머무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하늘 또는 지상에 있는 아름답고 멋진 것들은 별것이 아니고 그것은 적지 않게 주님나라에 속한 표징이기(1632)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늘을 쳐다본다.”는 말씀이 우주에 속한 정신적 관점에서 주님 나라의 표징을 뜻하는 내용입니다.
[3]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표징적이라는 이유는 그것들이 천계를 통해서 주님의 입류에서부터 생성되었고 계속적으로 생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입류에서부터 그것들이 지탱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체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영혼에 속한 방법에 의하여 생성되고 유지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인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개별적이든 일반적이든 모두가 영혼에 속한 표징들입니다. 영혼은 선용(the use)과 목적(the end)안에 존재 합니다. 그러나 몸은 그것들의 성취안에 존재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결과(effect)는 마찬가지로 원인들인 선용에 속한 표징입니다. 그리고 그 선용은 목적의 표징인데 그것은 제일 원리들에 속 합니다.
[4] 신령관념(Divine idea)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내적 시각의 대상물안에 있는 궁지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에서부터 그리고 그것들 안에서 내적인 것들을 보고 이해합니다. 내적인 것들 자체는 주님의 나라에 속한 것이고 따라서 그것들은 목적 그 자체안에 존재 합니다. 주님의 말씀의 경우도 이와 꼭 같습니다. 신령한 것들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문자에서부터 주님의 성언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 교회와 또 주님의 나라에 속한 천적 또는 영적인 것들에 관한 표징과 표의로써 문자와 문자적인 뜻을 생각 합니다. 그 사람에게 문자적인 뜻은 이런 것들을 생각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적 방법일 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시각입니다.
(1808) "별들을 세어 보아라“(창15:5)
이 말씀이 성좌를 정신적으로 고려하여 선한것과 참된 것의 표징을 뜻한다는 것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것에서 그리고 또 선한 것과 참된 것을 가리키는 “별들”의 표의와 표징에서 잘알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자주 표현된 “별들”은 또다른 어느 곳에서든지 별들은 선한 것들과 참된 것들을 뜻하며 또한 반대의 뜻으로는 악한 것들과 거짓된 것들을 뜻 합니다. 또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천사들이나 천사들의 사회들을 가리키고, 반대의 뜻으로는 악령과 그것들의 패거리들을 가리킵니다. 별들이 천사들이나 천사들의 사회들을 뜻할 때 그것들은 그때 붙받이별(항성)들이고 그러나 별들이 악령들이나 악령의 패거리를 뜻할 때 그것들은 떠돌이별(유성)들입니다. 이같은 것을 나는 아주 자주 보았습니다.
[2] 하늘이나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천적인 것들이나 또는 영적인 것들의 표징들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위에 있는 눈 앞에 나타나는 것들과 비슷한 것들이 영들의 세계에서 관찰하기 위하여 나타나는 명료한 지시에 의하여 잘 알수 있는데 이것은 청명한 대낮처럼 명료 하였습니다. 거기에서 그것들은 표징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별이 많은 하늘이 나타났을 때 별들은 거기에 고정되었는데 그것은 곧 별들이 선한 것들과 참된 것들을 뜻한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유성이 나타났을때에는 즉시 그것들이 악하고 거짓된 것들을 뜻한다고 알려졌습니다. 영롱하고 반짝이는 별들에게서는 그것들의 성품을 알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헤아릴수 없이 많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이 지혜롭게 생각하려고 하면 그 사람은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기원이 무엇인지 알수 있습니다. 즉 그 기원이 주님이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관념적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지상에 그것들이 생겨진 이유는 천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모든 것들은 주님에게서 비롯되고 또 그것들은 살아 있고 또 본질적이며 그것들이 불리워지는 것과 같이 실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궁극적 자연 안에 실제 현존하는 것으로 생겨났습니다.(1632)
[3] 별들이 선하고 참된 것들을 표징하고 표의한다는 것은 성경말씀의 아래의 인용에서 잘알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
“하늘의 별들과 성좌들이 빛을 내지 못하며 해가 떠도 어둡고, 달 또한 그 빛을 비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세상의 악과 흉악한 자들의 악행을 벌하겠다. 교만한 자들의 오만을 꺽어 놓고 포학한자들의 거만을 낮추어 놓겠다.”(13:10,11)
여기서는 재앙의 날(the day of visitation)이 취급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나 알수 있는 것은 “별들”과 “성좌”가 여기서는 별들과 성좌를 뜻하지 않고 참답고 선한 것들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또 “해”가 사랑을 “달”이 믿음을 뜻한다는 것도 누구나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둠(darkness)이 일으키는 악과 거짓이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4] 에스겔서에 -
“내가 네 빛을 꺼지게 할때에 하늘을 가려 별들을 어둡게 하고 구름으로 태양을 가리고 달도 빛을 내지 못하게 하겠다. 하늘에서 빛나는 광채들을 모두 어둡게 하고 네 땅을 어둠으로 뒤덮어 놓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겔32:7,8)
여기서 뜻하는 것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요엘서에 -
“전진할 때 땅이 진동하고 온 하늘이 흔들린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는다.”(요엘 2:10, 3:15)
여기의 뜻도 앞서와 비슷한 내용입니다. 다윗의 글에는 -
“해와 달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빛나는 별들아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늘 위의 하늘아, 주님을 찬양 하여라 하늘 위에 있는 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시편 148:3,4)
이 말씀 역시 같은 뜻입니다.
[5] “별들”이 별을 뜻하지 않고 선한 것과 참된 것을 뜻하고 마찬가지로 천사들과 같이 선한 것과 참된 것안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는 것은 요한 묵시록에서 명백히 알수 있습니다. 묵시록에서 -
“그 촛대 한 가운데 인자와 같은 이가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또 오른손에는 일곱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뻗어 나오고 얼굴은 해가 세차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요. 일곱 촛재는 일곱교회다.”(묵1:13, 16, 20)
또 이어서-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입어서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고 낮의 삼분의 일이 빛을 잃고 밤도 역시 그렇게 되었습니다.”(8:12)
여기서 명확한 것은 선한 것과 참된 것이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는 -
“그 가운데의 하나에서 또 다른 뿔 하나가 작게 돋기 시작하였으나 남쪽과 동족과 영광스러운 땅 쪽으로 크게 뻗어 나갔다.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강해지더니 그 군대와 별 가운데서 몇을 땅에 떨어드렸고 짓밟았다.”(다니엘 8:9,10)
이 말씀도 “하늘 군대”와 “별들”이 선한 것과 참된 것을 가리키며 그것이 짓밟혔다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 줍니다.
[7(6??)] 이들 구절에서는 마태복음서의 주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를 잘 알수 있습니다.
“그 환난 날들이 지난 뒤에 곧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24:29)
또 누가복음서에서 -
“해와 달과 별들에서 징조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의 태풍 소리와 성난 파도 때문에 어쩔 줄 몰라서 괴로워 할것이다.”(누가21:25)
여기서 “해”는 결코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뜻하지 않고, “달”도 달을 뜻하지 않고 “별들”도 별을 뜻하지 않고, “바다” 또한 바다를 뜻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이 표징하는 것들을 뜻 합니다. 즉 [해]는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을, [달]은 영적인 것들을 뜻하고 [별들]은 선하고 참된 것들을 즉 선하고 참된 것에 속한 지식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것들이 시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 가까워서 어두워졌는데 그때에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즉 인애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