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어의 기원
1. 렙차(Lepcha)어와 기원논쟁
인도의 동쪽 히말라야의 렙차라는 약소민족의 언어가 일본어와 동계, 일본인의 선조- 말레이반도의 고대남바애인족, 티베트족, 히말라야족(安田德太郞), 그러나 "세계민족의 ABO식 혈액형분포"와 비교했을 때 일치하지 않음.
2. 알타이어족과 한국어
알타어의 특징으로 보면 한국어와도 유사하며 일본어과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모음조화·후치사'는 인도의 남부 드라비다어에도 있기 때문에 친족관계를 논하기에는 신중해야함.
3. 연대언어학과 기원추정
연대언어학적으로 일본어, 한국어, 만주어어 공통잔존어의 비율을 계산하여 시간으로 환산해보면, 일본어와 한국어는 6,7천년전에, 만주어는 9천년전에 한 개의 조어(祖語)로부터 나왔다는 가정을 할 수있음. 이는 일본의 상대의 동쪽지역과 서쪽지역의 공통어휘 잔존률이 80%임에 비해 한국어는 14%정도에 지나지 않아, 유구한 옛날에 갈라졌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4. 4개의 문화권
고대의 인구밀도 분포로부터 고대문화의 중심점을 키타큐슈, 기나이, 도코쿠, 이즈모·하리마·사누키로 나눔. 고대에 인구밀도가 높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곳에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 - 석기시대부터 독자적문화를 만들어갔다기보다, 조몬시대부터 어느정도 독자적 문화를 가진 민족이 일본열도에서 생활하고 있었음을 가정할수 있음
5. 인도와 일본어와 고향
인도 남단의 드라비다어(Dravidian) 방언중의 하나인 타밀(Tamil)어는 분사용법등에서 일본어와 아주 유사함.
어휘면 - 인도의 고어인 '우리히(Urihi)'가 일본의 고어인 '우루시네'가 되었다는 설.
일본어의 기원이 복잡했음은 어휘면을 고찰해본 결과 알수 있으나, 인도를 중심으로 동쪽, 남쪽 또는 북쪽과 같은 차이는 있어도 인도와 그 주변 지역을 그 주변으로 상정하고 있음.
2. 일본어의 새벽
1. 왜(倭)와 일본
일본어의 기원을 알아보기위해 중국의 사서를 살펴보면, 태고적부터 일본어적 성격을 가진 언어가 일본열도에서 쓰였음을(니키, 히나모리, 도모) 알수 있고, 일본은 백여개의 나라가 군립했고 중국과도 교섭이 있었으며, 어렵의 풍습과 샤머니즘이 존재했으며, 제정일치의 사회였음을 엿볼수 있다(중국의 정사 『기시와닌젠』) '日本'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9∼10세기경에 성립된 『구조토』에서이고, 이로 미루어 7∼9세기경에 '일본'이 탄생앴음을 추정할 수있다. 왜국은 한국의 남부지방과 일본의 규슈지방 양쪽에 걸쳐 존재했던 나라
2. 일본어의 탄생
야요이 시대의 후반(1∼3세기)의 한국 남부 지방과 규슈지방은 동일 문화권이었고, 동일언어가 사용되었다고 추정되며, 한반도의 언어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음에 비해, 일본의 경우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독자적인 '일본어'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의 발전과 일본어의 완성은 역시 중국과의 접촉을 간과할수 없다.
3. 말의 영력(靈力)을 믿는 나라
1. 고대와 말의 영력
敷島の倭の國は言靈のたすくる國ぞまさきくありこそ(『萬葉集』,本人摩呂歌集)
(우리나라(倭)는 말의 영력인 고토다마가 행복을 가져다 주는 나라이다)
上代부터 이름을 중시했으며, 여성들은 이름을 마아기를 꺼려했고, 침묵을 미덕으로 삼았다.
2. 문자의 습득
표의문자인 중국어의 한자를 사용하는데, 일본적 표기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p60∼61)
(1)의미에 관계없이 음만을 사용 (2) 한자와 일본어의 의미의 일치·유사점을 이용 (3) 한자에 일본어 읽는 법을 부여 (4) 수사등의 읽는 법을 나타낼 때, (5) 추상적인 말
3. 동서의 방언
고대 일본어를 생각할 때, 현대와 마찬가지로 동서방언의 대립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말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새왈 풍속등 여러면에 그 차이점이 있고 또 사상이나 행동면에까지 이질적인 것을 만들어 갔다고 할 수있다. 상당히 일찍부터 형성된 도고쿠 방언이 천년이 지난 뒤 마침내 일본 전체의 공통어적 위치를 확립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주목할 만 하다.
4. 문자와 학습
1. 가나에 대하여
빨간 시키시에 써서 병꽃나무에 붙인 것은 가나이다. 처음에는 오토코테(男手)도 온나데(女手)도 아니었다. (미나모토 시타고『우즈호 모노가타리』) 빨간 시키시에 적혀 있다는 '가나'는 같은 가나라도 여러 가지로 바꾸어 가며 쓴 것으로 '히라가나, 카타카나'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토코테 - 한자만의 만요가나, 온나데 - 여성전용이라는 점에서 후세의 히라가나에 해당, 소가나 - 한자의 초서에서 보다는 가나에 가까운 자체지만 완저난 가나가 아니어서 붙여진 이름, 카타칸나 - 현재의 카타카나와 같은 것으로 한자가 완전한 문자임에 반해 불완전하고 편린한 면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아시데 - 문자의 일종으로 헤이안 시대에는 귀족 계급사이에서 문자적 유희로 애호되었는데 그 실태가 확실하지 않다.
문자의 창출의 배경으로는 서예의 융성과 와카의 번성을 들 수있다. 한자를 자기 것으로 만든 후 일본인이 도달한 작품은 『도사닛키』를 들 수 있으며, 가나의 창조로 인해 일본인은 드디어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말로 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가나로 일기를 씀에 따라 처음으로 시와 진실을 그릴 수 있었따. 그 후, 히라가나는 온나데로부터 문자 그대로 히라가나로서 일반 시민의 문자로 변하게 된다.
2. 귀족과 언어교육
다이가쿠료의 장관인 간무 천황이 정권을 잡게 됨에 따라 헤이안 시대에는 정책상 학문과 교육면에 많은 투자를 하게된다. 견당사등을 파겨나고 다이가쿠(大學)와 고쿠가쿠(國學)등을 만들어 학문을 장려하고, 문장도를 중시하여 단순한 지식의 획득 이외에도 그 활용에 목적을 두었다. 또한 『히쿠라쿠』『구치즈사미』등 중요한 부분만을 사용하기 쉽도록 일종의 모범 문례집이나 용어집이 나오며, 후에, 국립기관인 대학이외에도 '슈게슈치인, 간가쿠인, 쇼가쿠인'등이 창설된다. 견당사의 폐지등 중국과의 교섭을 거절한 쇄국시대에는 『덴레반쇼메기』『신센지쿄』『와묘루이쥬쇼』등, 국어사전과 한자사전이 편집되었다.
마지막으로 한문 훈독이라는 일본적인 중국어 섭취방법과 보급·발전에 있어서, 헤이안 시대에 한문 훈독 방법이 보다 정비되어, 마침내 카타카나라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사이에 조사나 조동사를 나타내는 부호로 ·(점)을 사용하여 데니오와(テニヲハ)를 대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코토(ヲコト點)이다. 또 승려들의 학문, 즉 실담학으로부터 五十音圖 가 생겨 났으며, 일본어 음의 총화에도 상당히 조직적인 구상을 가졌다고 본다. 또한 와카의 융성에 따라 11세기 말부터 13세기 초에 걸쳐 『기교쇼』『와카도모쇼』등의 와카의 시문만을 모은 어휘집과 사전풍의 책자가 나왔다. 이런 준비가 된 상황에서 근대어 전개의 막도 열리게 되었다.
5. 근대어의 원류
1) 근대의 여러 모습
일본의 근대화 : 16세기 유럽화 경향
가마쿠라 -南北朝-무로마치
근대 일본어 시대
- 남북조- 1세기 ∼ 明治20년대
(1) 단 어
古事記·源氏物語
いどこ-どこ
いだく-だく
美しき花-美しい花
美し
受くる-受ける
(2) 세속적인 말이 역사의 표면에 등장
まほし-たき (たい: 가마쿠라)
속담
狂言 : 能樂의 막간에 상연하는 희극
(3) 東國세력이 쿄토에 영향
來た-越し
인적자원의 교류
日蓮 : 간토의 시골 사투리 사용 권함
신뢰감, 세력 확장의 증거
(4) 한자의 통속화 경향과 가나의 일반문자화
권력- 귀족→무사
문자- 귀족→무사
약자, 省文(자획 일부 생략), 異體字, 國字, 當字
문자보급
2) 京都의 변모
귀족과 천황의 중심-무가의 도읍-서민의 도읍
南北朝動亂-應仁の亂-戰國時代
上京-下京(중소상점)
私: 1인칭 대명사- 고대와 근대 사이- 자아의 확립
6. 생활 속의 일본어(1)
승려와 궁중여성들이 사용한 食住의 문화 반영
1) 중국문화와 승려
의식주와 말의 관계
근대일본어의 기초-가마쿠라, 무로마치
古事記·源氏物語-お菓子
가마쿠라 시대 식생활 풍부
行火 : 손발을 따뜻하게 하는 휴대용 난방기구
唐音영향
2) 여성어 (女房詞)
궁정-장군-영주-상류 서민
おかちん : 떡
きなこ : 콩가루
のれん : 원래 난방을 겸하여 방과 방사이의 칸막이 역할을 하였음
こたつ : 난방기구의 일종으로 이불을 씌운 틀 안을 전기의 열로 따뜻하게 하는 것
ゆたんぽ : 금속, 고무, 도자기 같은 용기 안에 더운 물을 넣어 잠자리, 발 따뜻하게 하는 것
3) 玄關과 便所
玄關 : 玄妙의 현으로 상당히 심오하고 현묘한 것 , 관 : 관문, 선종의 특별한 문
露地 : 禪과 茶
東司(とうす) : 禪寺에서 변소
おとう-おとうにいく(행위)
4) 말과 감각
언어유희
連歌 : 내용적인 문학성보다는 언어성을 문제로 한 지적유희
7. 생활 속의 일본어(2)
1) 빵과 담배
외국인-유럽인
무로마치시대
포르투갈의 영향
食 : 빵,카스테라,별사탕, 볼로(밀가루에 계란과 설탕을 넣어 구운 둥근 과자),カルタ
衣 : 메리야스, 주반(일본옷 속에 있는 짧은 속옷), 빌로드, 사라사, 모르, 가네킨, 칼산, 갓파
一張羅 : 단 한벌의 나들이 옷
伊達の薄着 : 뜽뜽해 보이는 것이 싫어서 추워도 옷을 얇게 입는 것
샤봉 : 비누
판야
담배, 기세루, 라우
호박
에도시대
오뎅(덴가쿠야키)
다쿠앙
덴푸라
히료즈(간모도키)
2) 맥주와 단젠
가톨릭과 네덜란드 영향
비루
비스코토
마마레데
폰스 : 橙子를 짜서 만든 즙
아이스크림, 캬라멜
안빵
포마드, 비누, 시멘트
丹前(솜을 두껍게 둔 소매 넓은 방한용 실내복)
(堀丹後守)에서 유래한 말로 영주의 저택 앞에 있던 공중목욕탕에서 나온 새로운 취향의 옷
공중목욕탕- 유나(湯女)사이에서 유행한 옷
도테라(속에 무명을 넣어 만든 옷으로 방한용, 침구용으로 입었음)- 에도말기
8. 남성어와 여성어
1) 오히야와 오카친
南北朝時代-무로마치 시대-교겐
おひやし(女)
すもじ(おすし),めす(たべる),かもじ, おなら
きなこ,おひやし,おいた(생선묵),おあか(팥)
しんもじ,ふもじ
いいずし,つきよ,ひやむぎ,つめたいぞろ
에도시대
女中詞
여성은 말을 떠듬떠듬 거리고 부드럽게 하는 것이 좋으며 모든 말에 お를 붙여야만 한다. -女重寶記
おひるなる-おひんなる(おきる)
おとうにいく
おしずまる
おさがり
おしめり
おひどと
おひざかな
おざぶとん
おしとね
おものもうしました
2) 여성어와 남성어
たがいに 대신에 여성들은 かたみに를
はなはだ 대신에 いと를 쓰고
からだ는 여성들이 잘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9. 종교와 말의 윤리
1. 논증과 윤리
종교와 말의 관계, 종교인들의 사고방식과 일본어 윤리, 일본어의 논리적 측면과 논리조합방법.
▷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의 구게(公家〓귀족)는 방관자로 추락하고, 그 대신 무사와 서민계급이 역사의 중심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그때까지의 문화와 학문을 무사와 서민들의 학문과 하나로 잇는 역할을 한 것은 승려들이었다. 포교를 위한 말훈련→일본어의 논리적 말씨.
▷ 테라고야의 교과서로 사용된 오라이모노(往來物)의 편집자는 승려계급이 중심. 몬쇼(文證:문제를 불전에 따라서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와 겐쇼(現證:눈으로 본 것을 증거로 하여 행동의 올바름을 정하는 것)라는 논증법으로 실증주의적으로 속설을 부정하고 바른 사고방식을 지도함. →"뱀이 개구리를 삼키려 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에는 예로부터의 종교가 쇠퇴하고 새로운 종교(日蓮宗,淨土宗,眞宗)가 등장했고 이어지는 전란 속에서 생명존중의 신도주의적 사고 방식이 유행했다.
2. 논리의 행방
신앙과 거리가 먼 논리, 이성에 호소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실증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일본인이 생겨났다. → 일본어에서도 새로운 표현과 간결한 문장이 생겨났다. 고대어와 다른 일본인과 일본어가 창조됨.
10. 서민과 가나(假名)문자
1. 가나(히라가나, 가타카나)의 사명
▷ 하극상과 전란의 시대인 중세에 서민들은 피지배 계급으로 전쟁이라도 나면 언제나 희생자가 되었고, 혹독한 세금에도 무저항 상태였다. 개선을 호소하려 해도 문자를 가지지 못해 호소할 수 없었다. 헤이안시대에 여성전용 문자였던 히라가나조차도 일반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 중세에 무사들이 정치를 담당하게 되면서 이들도 원래는 농민이며 피지배계급이었다. 이들이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면서 학문과 예능에도 관심,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사용하게 됨. 이것은 봉건시대에 생활의 거점이었던 토지(一所懸命)의 양도증서에서 표면화된다. 토지를 양도할 때 반드시 본인이 자필로 써야만 했던 양도장 규칙 때문에 히라가나가 무사와 서민의 일상적인 실용문자가 될 수 있었다. → 소조(訴狀), 모시죠(申狀)와 같은 직소에 사용한 것은 가타카나였다(*쓰치잇키의 비문).
2. 가나 획득의 의의
가나 획득에는 단순히 한자보다 쉽다고 하는 소극적인 의미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나타낸 것으로 올바른 도리를 표현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 많은 의성어가 발달할 수 있었고, 사이카쿠, 바쇼, 치카마쓰 등이 명작을 남길 수 있었다.
3. 이로하와 로마자
이로하우타(いろは歌)는 헤이안 말기부터 습자본으로 사용되어 서민들의 문자습득에 도움됨. 더불어 로마자도 서민 사이에서 학습되어 성경을 암송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나오기도 함.
일본어를 표현하기 위해 가나가 중심적 문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일본어는 일본인의 모국어가 되었고, 일본인이 로마자를 구사하게 되었을 때 일본어가 세계 속의 언어라는 자각을 하게 됨. → 일본인의 공동의식과 창조적 행동이 세계적 시야를 획득함.
11. 신분과 말
1. 옥상과 오카미상
▷ 언제부터 신분과 말의 관계가 일본어 안에 나타나게 되었는가? → 대우(待遇)표현.
전란과 하극상의 시대에 귀족계급들은 형식적으로나마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용어를 통해 노력함. →황실용어의 창작(천황의 몸은 玉體, 가마는 龍駕). 막부는 돈도 무력도 토지도 없는 구게들로부터 옛 상류계급의 관습 등을 배우게 되었다.
▷ 무로마치 말기에 막부의 힘이 약해지고 서로가 주인이라는 戰國時代에 빠져드는데, 더욱 제도와 형식에 의지하는 권위주의에 의지하게 된다. 말로도 신분제도를 확실히 하려는 기운이 일어남. *데가미(手紙)는 에도 후기에 나온 말로, 당시엔 매우 속어적이어서 공적인 경우는 물론이고 일반적으로도 사용하기 힘든 호칭이었다.
2. 경어의 본질
▷ 경어란 하나의 感情이며 그 가치적 표현이다. 따라서 자연발생적이며 문자그대로 상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기조가 된 것으로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 중세의 경어는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경어는 근대 사회가 만들어 낸 복잡한 메커니즘 위에 만들어진 대우(待遇)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무로마치 시대의 기리시탄 선교사는 일본어의 신분에 따른 쓰임이 세밀하게 나누어진 것에 놀람.
▷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대우표현도 변한다. 현대의 경어를 나타내는 'れる' 'られる'를 당시 신분이 높은 사람은 사용하지 않았다. 'です'는 다이묘가 거만한 어조로 자기 본위의 표현을 할 경우에 사용함.
12. 교토어와 오사카어
1. 교토 사투리·오와리(尾張) 사투리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비스고토바(夷ことば)라고 업신당한 고코쿠고(東國語)가 교토 사투리를 위협해 섞이게 된다. 교토에는 중세 이래 전통을 지켜온 사람들 이외에도 주변으로부터 새롭게 들어온 사람들이 늘어나 교토 사투리에 상당한 영향.→ 교겐의 대사에서 드러남. 서민적인 발상과 새로운 생기와 행동이 엿보임.
2. 교토와 교토 사투리
헤이안 이후의 순수 교토 사투리를 지키려는 노력도 있었다. → 『카타고토』(片言,1650년: 우리아이의 말씨가 문란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리시탄 선교사의 경고(진정한 일본어는 도읍지에서 구게와 귀족들이 사용하는 것으로...그러한 것들로부터 멀어진 것은 모두 변변치 않고 결함이 있다. p.184).
3. 교토 사투리의 여러 모습
- 촉음와 하네루음이 우세함: おなじ→おんなじ,ただ→たった,さき→さっき,やはり→やっぱり
- 장음의 단음화: おおざか→おざか,とんぼう→とんぼ
- 혀를 사용하는 f음에 가까웠던 하행(ハ행)음이 목을 사용하는 h음으로 됨.
- ジ와 ヂ가 ジ로 통일되고, ズ와 ヅ가 ズ로 통일됨.
4. 교토 오사카 사투리와 서민들의 언어
▷ 교토는 귀족의 도시로부터 서민의 도시, 생활,문화와 경제의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지역적으로도 교토 사투리보다는 가미카타고토바(上方言葉)라는 호칭이 적당함. 서민들이 중심이 되어 자신들의 말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함.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서민문화가 활짝 피게 되는데, 사이카쿠, 치카마쓰 같은 인물도 나타났다.
▷ 난반와타리(南蠻渡り)로 새로운 표현도 등장(빌로드, 센베, 만주 ...p.191).
▷ 오사카 부유한 조닌으로 돈과 여자에 관련된 새로운 단어가 등장(普段着,素人,玄人,まぬけ,へそくり,老 ...p.192).
▷ 일반적인 보통어가 되기 위해서는 가미카타에서 소설이나 시집출판이라는 형태의 매스미디어가 필요했다. 치카마쓰 몬자에몬의 조루리(腕づく,きさく,ばれる,みっともない,水くさい...p194)
▷ 속담. (長きにはまかれよ,雨降りて地かたまる,腐りても ,善は急げ,猿も木からおつる,山椒は小粒なれどもからし,壁に耳,船頭が多うて船が山へのぼる...p.196-197)
▷ 오사카를 진원지로 하는 경제용어(株,手形,勘定,取引,入札...p.201)
13.출판 문화와 말
1. 출판과 계몽
출판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판 문화를 유지, 발전 시켜온 町人(※교토에는 쵸닌 이전에 마치슈(街衆)라는 그룹이 있었는데, 이들은 물건을 팔아 돈을 번 부자들과는 달리, 오챠(お茶),오하나(お花)같은 문화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즉, 문화인이자 지식인이었던 것이다)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또한, 에도시대가 되어서 비로소 목판 인쇄를 시작으로하여 대량으로 책이 만들어 졌는데, 이런 인쇄, 출판 문화가 생겨난 것은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쟁을 일으켜 조선에서 인쇄기술을 들여 온 덕분이다. 그후 에도시대(서민문화의 시대)부터 교양서, 계몽서가 다량으로 출판되었다. 물론, 출판물중 에도어로 쓰여진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편, 카와라반(瓦版)(※瓦版: 繪草紙賣り(えぞうしうり), 讀賣(よみうり)라고도 하는데, 호외또는 광고전단에 가까운 한 장짜리 신문. 자살사건이나 큰화재, 희귀한 동물이나 구경거리가 생기면 신속하게 인쇄하여 걸어다니며 많은 사람에게 판매함)이라는 흥미로운 매체로 인해서 주체적으로 사회와 세상의 정세를 스스로 판단할수 있는 능력이 길러지고, 일반 서민들에게 독서습관과 능력을 갖추게 해주었다.
2. 보도와 자유
카와라반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보도 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정치, 사회적으로 진지한 문제를 취급하게끔 하게 된것에는 히캬쿠야(※飛脚屋: 편지를 배달하는 사람. 편지를 배달하는 도중에 여러 사건과 소문을 기사로 만드는 일도 함)의 존재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카와라반과 요미우리를 질적으로 변화시켜 나감으로써,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라 정확한 사실을 전하려고 하는 보도 정신도 육성하게 되었다.
14.쵸닌(町人)문화와 말
1. 가부키와 말
가부키 : 가부쿠(傾く)-정상이 아닌 약간 기울어져 있는 상태, 보통이 아님. 에도시대에는 서민들이 자신들의 감정과 사고를 자유로이 표현하는 것이 곤란했는데 가부키는 상당히 알맞은 표현 도구로서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가부키를 통해 많은 말이 서민 속에 파고들게 되었다. とちる( 배우가 실수하는 것) はねる(흥행의 종막, 종료) けんもほろろのだ(아주 쌀쌀맞은 인사이다) 首になる(해고되다) さやあて(대단치도 않은 일인데 뒤에서 조정하는 철사) 自腹を切る(자기가 지불하지 않아도 될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는 것)
2. 흥행과 센보(せんぼう)
가부키같은 고급 공연장 이외의 싼 공연장에서 흥행했던 말들이 있다.
べらぼう:머리가 뾰족하고 눈이 둥그렇고 충혈되어 있어 원숭이와 닮았다고 할 때.
てくのぼう: 인형이 테쿠노보 같은 역할과 행동을 함
せんぼう: 인형극에서 무대 뒤의 은어
예) すけ : 여자, なおすけ의 일부분으로 나오스케는 온나(女)를 거꾸로해서 나온 것.
즉, 온나-> 나온-> 나오
=>센보는 에도어를 풍성하게 했고 에도토박이들의 언어생활에 커다란 윤활유적 역할.
やくざ : 8.9.3으로 그 무리내에서 모든 나쁜 것을 지칭함
15.간토(關東)방언과 에도어(江戶語)
1. 에도와 에도어
17세기 초까지 에도는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가미가타에 의존한 일종의 가미가타의 문화식민지였는데, 점점 가미가타에 본점을 둔 상가의 지점들이 에도로 흘러들어오게 되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오면서 에도어도 복잡하게 되었다.
2. 간토어와 에도사투리
초기 에도어는 간토 방언일반과 같은데, つっ,ぶち같은 접두어나 ろ,だ같은 명령단정의 형태는 간토방언의 특색이며 あんだる(어떤) がひに(매우) べい(-하자)도 마찬가지이다. 이와같이 에도어는 간토방언의 중요한 성격을 이어받았는데, 또한가지 가미가타어의 유입을 들수 있다.(いで,なんだ,さかいに)
3. 에도어의 성립
가미가타와 간토의 여러곳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일종의 혼혈어가 에도어이다. 에도어의 성립을 증명해주는 일본최초의 방언사전 『物類稱呼』(1775)의 일부를 보면, 대답할 때 간토에서는 あい,키나이(畿內)에서는 はい,오미(近江)에서는 ねい,나카토(長門)에서는 あっつ,사쓰마(薩摩)에서는 をを ,히젠(肥前)에서는 ない,등등..
16. 서구문화와 일본어(1)
1. 번역과 나가사키 통역
란가쿠샤들이 네덜란드어, 넓은 의미의 유럽제국의 언어를 일본어로 옮기기 위해 어떤 고심을 했고, 란가쿠는 유럽문화와 과학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학문으로 탄생했다. 그렇게 란가쿠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나가사키 통역사들의 공헌이 큰데, 그중에서 뛰어난 몇몇 인물을 예로들자면, 나카노류호(中野柳圃),바바사주로(馬場佐十郞).요시오곤노스케(吉雄權之助)등이 있으며, デアル,より,きのうきしところの같은 것은 모두 번역문의 영향을 받은 스타일이다.
2. 번역어와 근대 일본
일요일이나 일주일 같은 개념은 일본어에 본래 없던 개념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번역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단어들이었다. 중력(重力) 구심력(求心力) 화분(花粉), 세포(細胞)도 마찬가지인 단어들이었다.
17. 서구문화와 일본어(2)
한자와 일본문화와의 관계
明治維新이후 한자어의 범람.
역사적인 蘭學者들의 주체적 수용노력.
漢學은 내용을 꾸미는 글인데 반해, 네덜란드문은 소박한 풍속 속의 사실을 간단명료하게 표현.(언문일치 등)
일부 진보적 학자들의 로마자 사용 풍조.
長崎 통역사들은 말보다 내용을 중시.
Love를 愛나 戀가 아닌 財寶로 번역(막부 말기의 영일사전)
厚生濟民의 원칙하에 번역에 대한 막부의 적극적 권장.
18. 문명개화와 언문일치
明治維新이후 東京로 수도가 이전되면서 유럽의 새로운 사상과 학문도 더욱더 유입.
→ 한자어의 홍수로 이어짐.
‘忠君愛國 ’사상을 뒷받침하기 위한 국어교육의 시작.
언문일치 운동의 시작.
- 二葉亭四迷의 『浮雲』,坪內逍遙의 『小說神髓』등등의 근대문학 소설.
문학가들의 노력으로 明治20∼30年代에는 東京語가 확립됨.
cf) 石川啄木의 로마자 일기
19. 東京語와 공통어
학교교육의 시작과 더불어 大正시대를 거치며 東京語가 확립되기 시작함.
라디오방송(1925)으로 대변되는 매스미디어의 보급은 이를 더욱더 촉진시킴.
그런데, 이 과정에 있어 江戶語가 근대국가의 규범이라고 하는 기준에 의해 교육적으로 고려된 말로 변화되어지게 된다. 지도자들은 구미국가에 손색이 없는 일본어를 갖추기 위해 자연언어가 가지는 생명력과 함축성 등을 잘라버리고, 개인의 자유와 창작성이 풍부한 문장, 그리고 창작의 기회·능력까지도 빼앗었다. (현재 東京方言으로 불리우는) → 이것은 현대 일본인의 외국어 콤플렉스로 연결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大正, 昭和시대에는 국적불명의 カタカナ語가 범람함 : オ-ルミス,ワイシャツ,テクシ-,蠻カラ,ヨタリスト,オ-ライねえさん, サラリ-マン 등
단축어도 등장 : アパ-ト,デパ-ト,モボ,ブル,ビル 등
지금도 기록되지 않는 전쟁용어 : 玉音,小國民,徵用,銃後,軍神,軍國の母,戰鬪帽,英靈,白衣の天使,赤紙, 學徒出陣,學徒動員,みたみわれ,神風,特攻隊,轟沈,轉進,空襲 등
1. 렙차(Lepcha)어와 기원논쟁
인도의 동쪽 히말라야의 렙차라는 약소민족의 언어가 일본어와 동계, 일본인의 선조- 말레이반도의 고대남바애인족, 티베트족, 히말라야족(安田德太郞), 그러나 "세계민족의 ABO식 혈액형분포"와 비교했을 때 일치하지 않음.
2. 알타이어족과 한국어
알타어의 특징으로 보면 한국어와도 유사하며 일본어과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모음조화·후치사'는 인도의 남부 드라비다어에도 있기 때문에 친족관계를 논하기에는 신중해야함.
3. 연대언어학과 기원추정
연대언어학적으로 일본어, 한국어, 만주어어 공통잔존어의 비율을 계산하여 시간으로 환산해보면, 일본어와 한국어는 6,7천년전에, 만주어는 9천년전에 한 개의 조어(祖語)로부터 나왔다는 가정을 할 수있음. 이는 일본의 상대의 동쪽지역과 서쪽지역의 공통어휘 잔존률이 80%임에 비해 한국어는 14%정도에 지나지 않아, 유구한 옛날에 갈라졌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4. 4개의 문화권
고대의 인구밀도 분포로부터 고대문화의 중심점을 키타큐슈, 기나이, 도코쿠, 이즈모·하리마·사누키로 나눔. 고대에 인구밀도가 높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곳에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 - 석기시대부터 독자적문화를 만들어갔다기보다, 조몬시대부터 어느정도 독자적 문화를 가진 민족이 일본열도에서 생활하고 있었음을 가정할수 있음
5. 인도와 일본어와 고향
인도 남단의 드라비다어(Dravidian) 방언중의 하나인 타밀(Tamil)어는 분사용법등에서 일본어와 아주 유사함.
어휘면 - 인도의 고어인 '우리히(Urihi)'가 일본의 고어인 '우루시네'가 되었다는 설.
일본어의 기원이 복잡했음은 어휘면을 고찰해본 결과 알수 있으나, 인도를 중심으로 동쪽, 남쪽 또는 북쪽과 같은 차이는 있어도 인도와 그 주변 지역을 그 주변으로 상정하고 있음.
2. 일본어의 새벽
1. 왜(倭)와 일본
일본어의 기원을 알아보기위해 중국의 사서를 살펴보면, 태고적부터 일본어적 성격을 가진 언어가 일본열도에서 쓰였음을(니키, 히나모리, 도모) 알수 있고, 일본은 백여개의 나라가 군립했고 중국과도 교섭이 있었으며, 어렵의 풍습과 샤머니즘이 존재했으며, 제정일치의 사회였음을 엿볼수 있다(중국의 정사 『기시와닌젠』) '日本'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9∼10세기경에 성립된 『구조토』에서이고, 이로 미루어 7∼9세기경에 '일본'이 탄생앴음을 추정할 수있다. 왜국은 한국의 남부지방과 일본의 규슈지방 양쪽에 걸쳐 존재했던 나라
2. 일본어의 탄생
야요이 시대의 후반(1∼3세기)의 한국 남부 지방과 규슈지방은 동일 문화권이었고, 동일언어가 사용되었다고 추정되며, 한반도의 언어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음에 비해, 일본의 경우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독자적인 '일본어'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의 발전과 일본어의 완성은 역시 중국과의 접촉을 간과할수 없다.
3. 말의 영력(靈力)을 믿는 나라
1. 고대와 말의 영력
敷島の倭の國は言靈のたすくる國ぞまさきくありこそ(『萬葉集』,本人摩呂歌集)
(우리나라(倭)는 말의 영력인 고토다마가 행복을 가져다 주는 나라이다)
上代부터 이름을 중시했으며, 여성들은 이름을 마아기를 꺼려했고, 침묵을 미덕으로 삼았다.
2. 문자의 습득
표의문자인 중국어의 한자를 사용하는데, 일본적 표기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p60∼61)
(1)의미에 관계없이 음만을 사용 (2) 한자와 일본어의 의미의 일치·유사점을 이용 (3) 한자에 일본어 읽는 법을 부여 (4) 수사등의 읽는 법을 나타낼 때, (5) 추상적인 말
3. 동서의 방언
고대 일본어를 생각할 때, 현대와 마찬가지로 동서방언의 대립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말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새왈 풍속등 여러면에 그 차이점이 있고 또 사상이나 행동면에까지 이질적인 것을 만들어 갔다고 할 수있다. 상당히 일찍부터 형성된 도고쿠 방언이 천년이 지난 뒤 마침내 일본 전체의 공통어적 위치를 확립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주목할 만 하다.
4. 문자와 학습
1. 가나에 대하여
빨간 시키시에 써서 병꽃나무에 붙인 것은 가나이다. 처음에는 오토코테(男手)도 온나데(女手)도 아니었다. (미나모토 시타고『우즈호 모노가타리』) 빨간 시키시에 적혀 있다는 '가나'는 같은 가나라도 여러 가지로 바꾸어 가며 쓴 것으로 '히라가나, 카타카나'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토코테 - 한자만의 만요가나, 온나데 - 여성전용이라는 점에서 후세의 히라가나에 해당, 소가나 - 한자의 초서에서 보다는 가나에 가까운 자체지만 완저난 가나가 아니어서 붙여진 이름, 카타칸나 - 현재의 카타카나와 같은 것으로 한자가 완전한 문자임에 반해 불완전하고 편린한 면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아시데 - 문자의 일종으로 헤이안 시대에는 귀족 계급사이에서 문자적 유희로 애호되었는데 그 실태가 확실하지 않다.
문자의 창출의 배경으로는 서예의 융성과 와카의 번성을 들 수있다. 한자를 자기 것으로 만든 후 일본인이 도달한 작품은 『도사닛키』를 들 수 있으며, 가나의 창조로 인해 일본인은 드디어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말로 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가나로 일기를 씀에 따라 처음으로 시와 진실을 그릴 수 있었따. 그 후, 히라가나는 온나데로부터 문자 그대로 히라가나로서 일반 시민의 문자로 변하게 된다.
2. 귀족과 언어교육
다이가쿠료의 장관인 간무 천황이 정권을 잡게 됨에 따라 헤이안 시대에는 정책상 학문과 교육면에 많은 투자를 하게된다. 견당사등을 파겨나고 다이가쿠(大學)와 고쿠가쿠(國學)등을 만들어 학문을 장려하고, 문장도를 중시하여 단순한 지식의 획득 이외에도 그 활용에 목적을 두었다. 또한 『히쿠라쿠』『구치즈사미』등 중요한 부분만을 사용하기 쉽도록 일종의 모범 문례집이나 용어집이 나오며, 후에, 국립기관인 대학이외에도 '슈게슈치인, 간가쿠인, 쇼가쿠인'등이 창설된다. 견당사의 폐지등 중국과의 교섭을 거절한 쇄국시대에는 『덴레반쇼메기』『신센지쿄』『와묘루이쥬쇼』등, 국어사전과 한자사전이 편집되었다.
마지막으로 한문 훈독이라는 일본적인 중국어 섭취방법과 보급·발전에 있어서, 헤이안 시대에 한문 훈독 방법이 보다 정비되어, 마침내 카타카나라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사이에 조사나 조동사를 나타내는 부호로 ·(점)을 사용하여 데니오와(テニヲハ)를 대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코토(ヲコト點)이다. 또 승려들의 학문, 즉 실담학으로부터 五十音圖 가 생겨 났으며, 일본어 음의 총화에도 상당히 조직적인 구상을 가졌다고 본다. 또한 와카의 융성에 따라 11세기 말부터 13세기 초에 걸쳐 『기교쇼』『와카도모쇼』등의 와카의 시문만을 모은 어휘집과 사전풍의 책자가 나왔다. 이런 준비가 된 상황에서 근대어 전개의 막도 열리게 되었다.
5. 근대어의 원류
1) 근대의 여러 모습
일본의 근대화 : 16세기 유럽화 경향
가마쿠라 -南北朝-무로마치
근대 일본어 시대
- 남북조- 1세기 ∼ 明治20년대
(1) 단 어
古事記·源氏物語
いどこ-どこ
いだく-だく
美しき花-美しい花
美し
受くる-受ける
(2) 세속적인 말이 역사의 표면에 등장
まほし-たき (たい: 가마쿠라)
속담
狂言 : 能樂의 막간에 상연하는 희극
(3) 東國세력이 쿄토에 영향
來た-越し
인적자원의 교류
日蓮 : 간토의 시골 사투리 사용 권함
신뢰감, 세력 확장의 증거
(4) 한자의 통속화 경향과 가나의 일반문자화
권력- 귀족→무사
문자- 귀족→무사
약자, 省文(자획 일부 생략), 異體字, 國字, 當字
문자보급
2) 京都의 변모
귀족과 천황의 중심-무가의 도읍-서민의 도읍
南北朝動亂-應仁の亂-戰國時代
上京-下京(중소상점)
私: 1인칭 대명사- 고대와 근대 사이- 자아의 확립
6. 생활 속의 일본어(1)
승려와 궁중여성들이 사용한 食住의 문화 반영
1) 중국문화와 승려
의식주와 말의 관계
근대일본어의 기초-가마쿠라, 무로마치
古事記·源氏物語-お菓子
가마쿠라 시대 식생활 풍부
行火 : 손발을 따뜻하게 하는 휴대용 난방기구
唐音영향
2) 여성어 (女房詞)
궁정-장군-영주-상류 서민
おかちん : 떡
きなこ : 콩가루
のれん : 원래 난방을 겸하여 방과 방사이의 칸막이 역할을 하였음
こたつ : 난방기구의 일종으로 이불을 씌운 틀 안을 전기의 열로 따뜻하게 하는 것
ゆたんぽ : 금속, 고무, 도자기 같은 용기 안에 더운 물을 넣어 잠자리, 발 따뜻하게 하는 것
3) 玄關과 便所
玄關 : 玄妙의 현으로 상당히 심오하고 현묘한 것 , 관 : 관문, 선종의 특별한 문
露地 : 禪과 茶
東司(とうす) : 禪寺에서 변소
おとう-おとうにいく(행위)
4) 말과 감각
언어유희
連歌 : 내용적인 문학성보다는 언어성을 문제로 한 지적유희
7. 생활 속의 일본어(2)
1) 빵과 담배
외국인-유럽인
무로마치시대
포르투갈의 영향
食 : 빵,카스테라,별사탕, 볼로(밀가루에 계란과 설탕을 넣어 구운 둥근 과자),カルタ
衣 : 메리야스, 주반(일본옷 속에 있는 짧은 속옷), 빌로드, 사라사, 모르, 가네킨, 칼산, 갓파
一張羅 : 단 한벌의 나들이 옷
伊達の薄着 : 뜽뜽해 보이는 것이 싫어서 추워도 옷을 얇게 입는 것
샤봉 : 비누
판야
담배, 기세루, 라우
호박
에도시대
오뎅(덴가쿠야키)
다쿠앙
덴푸라
히료즈(간모도키)
2) 맥주와 단젠
가톨릭과 네덜란드 영향
비루
비스코토
마마레데
폰스 : 橙子를 짜서 만든 즙
아이스크림, 캬라멜
안빵
포마드, 비누, 시멘트
丹前(솜을 두껍게 둔 소매 넓은 방한용 실내복)
(堀丹後守)에서 유래한 말로 영주의 저택 앞에 있던 공중목욕탕에서 나온 새로운 취향의 옷
공중목욕탕- 유나(湯女)사이에서 유행한 옷
도테라(속에 무명을 넣어 만든 옷으로 방한용, 침구용으로 입었음)- 에도말기
8. 남성어와 여성어
1) 오히야와 오카친
南北朝時代-무로마치 시대-교겐
おひやし(女)
すもじ(おすし),めす(たべる),かもじ, おなら
きなこ,おひやし,おいた(생선묵),おあか(팥)
しんもじ,ふもじ
いいずし,つきよ,ひやむぎ,つめたいぞろ
에도시대
女中詞
여성은 말을 떠듬떠듬 거리고 부드럽게 하는 것이 좋으며 모든 말에 お를 붙여야만 한다. -女重寶記
おひるなる-おひんなる(おきる)
おとうにいく
おしずまる
おさがり
おしめり
おひどと
おひざかな
おざぶとん
おしとね
おものもうしました
2) 여성어와 남성어
たがいに 대신에 여성들은 かたみに를
はなはだ 대신에 いと를 쓰고
からだ는 여성들이 잘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9. 종교와 말의 윤리
1. 논증과 윤리
종교와 말의 관계, 종교인들의 사고방식과 일본어 윤리, 일본어의 논리적 측면과 논리조합방법.
▷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의 구게(公家〓귀족)는 방관자로 추락하고, 그 대신 무사와 서민계급이 역사의 중심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그때까지의 문화와 학문을 무사와 서민들의 학문과 하나로 잇는 역할을 한 것은 승려들이었다. 포교를 위한 말훈련→일본어의 논리적 말씨.
▷ 테라고야의 교과서로 사용된 오라이모노(往來物)의 편집자는 승려계급이 중심. 몬쇼(文證:문제를 불전에 따라서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와 겐쇼(現證:눈으로 본 것을 증거로 하여 행동의 올바름을 정하는 것)라는 논증법으로 실증주의적으로 속설을 부정하고 바른 사고방식을 지도함. →"뱀이 개구리를 삼키려 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에는 예로부터의 종교가 쇠퇴하고 새로운 종교(日蓮宗,淨土宗,眞宗)가 등장했고 이어지는 전란 속에서 생명존중의 신도주의적 사고 방식이 유행했다.
2. 논리의 행방
신앙과 거리가 먼 논리, 이성에 호소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실증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일본인이 생겨났다. → 일본어에서도 새로운 표현과 간결한 문장이 생겨났다. 고대어와 다른 일본인과 일본어가 창조됨.
10. 서민과 가나(假名)문자
1. 가나(히라가나, 가타카나)의 사명
▷ 하극상과 전란의 시대인 중세에 서민들은 피지배 계급으로 전쟁이라도 나면 언제나 희생자가 되었고, 혹독한 세금에도 무저항 상태였다. 개선을 호소하려 해도 문자를 가지지 못해 호소할 수 없었다. 헤이안시대에 여성전용 문자였던 히라가나조차도 일반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 중세에 무사들이 정치를 담당하게 되면서 이들도 원래는 농민이며 피지배계급이었다. 이들이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면서 학문과 예능에도 관심,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사용하게 됨. 이것은 봉건시대에 생활의 거점이었던 토지(一所懸命)의 양도증서에서 표면화된다. 토지를 양도할 때 반드시 본인이 자필로 써야만 했던 양도장 규칙 때문에 히라가나가 무사와 서민의 일상적인 실용문자가 될 수 있었다. → 소조(訴狀), 모시죠(申狀)와 같은 직소에 사용한 것은 가타카나였다(*쓰치잇키의 비문).
2. 가나 획득의 의의
가나 획득에는 단순히 한자보다 쉽다고 하는 소극적인 의미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나타낸 것으로 올바른 도리를 표현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 많은 의성어가 발달할 수 있었고, 사이카쿠, 바쇼, 치카마쓰 등이 명작을 남길 수 있었다.
3. 이로하와 로마자
이로하우타(いろは歌)는 헤이안 말기부터 습자본으로 사용되어 서민들의 문자습득에 도움됨. 더불어 로마자도 서민 사이에서 학습되어 성경을 암송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나오기도 함.
일본어를 표현하기 위해 가나가 중심적 문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일본어는 일본인의 모국어가 되었고, 일본인이 로마자를 구사하게 되었을 때 일본어가 세계 속의 언어라는 자각을 하게 됨. → 일본인의 공동의식과 창조적 행동이 세계적 시야를 획득함.
11. 신분과 말
1. 옥상과 오카미상
▷ 언제부터 신분과 말의 관계가 일본어 안에 나타나게 되었는가? → 대우(待遇)표현.
전란과 하극상의 시대에 귀족계급들은 형식적으로나마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용어를 통해 노력함. →황실용어의 창작(천황의 몸은 玉體, 가마는 龍駕). 막부는 돈도 무력도 토지도 없는 구게들로부터 옛 상류계급의 관습 등을 배우게 되었다.
▷ 무로마치 말기에 막부의 힘이 약해지고 서로가 주인이라는 戰國時代에 빠져드는데, 더욱 제도와 형식에 의지하는 권위주의에 의지하게 된다. 말로도 신분제도를 확실히 하려는 기운이 일어남. *데가미(手紙)는 에도 후기에 나온 말로, 당시엔 매우 속어적이어서 공적인 경우는 물론이고 일반적으로도 사용하기 힘든 호칭이었다.
2. 경어의 본질
▷ 경어란 하나의 感情이며 그 가치적 표현이다. 따라서 자연발생적이며 문자그대로 상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기조가 된 것으로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 중세의 경어는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경어는 근대 사회가 만들어 낸 복잡한 메커니즘 위에 만들어진 대우(待遇)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무로마치 시대의 기리시탄 선교사는 일본어의 신분에 따른 쓰임이 세밀하게 나누어진 것에 놀람.
▷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대우표현도 변한다. 현대의 경어를 나타내는 'れる' 'られる'를 당시 신분이 높은 사람은 사용하지 않았다. 'です'는 다이묘가 거만한 어조로 자기 본위의 표현을 할 경우에 사용함.
12. 교토어와 오사카어
1. 교토 사투리·오와리(尾張) 사투리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비스고토바(夷ことば)라고 업신당한 고코쿠고(東國語)가 교토 사투리를 위협해 섞이게 된다. 교토에는 중세 이래 전통을 지켜온 사람들 이외에도 주변으로부터 새롭게 들어온 사람들이 늘어나 교토 사투리에 상당한 영향.→ 교겐의 대사에서 드러남. 서민적인 발상과 새로운 생기와 행동이 엿보임.
2. 교토와 교토 사투리
헤이안 이후의 순수 교토 사투리를 지키려는 노력도 있었다. → 『카타고토』(片言,1650년: 우리아이의 말씨가 문란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리시탄 선교사의 경고(진정한 일본어는 도읍지에서 구게와 귀족들이 사용하는 것으로...그러한 것들로부터 멀어진 것은 모두 변변치 않고 결함이 있다. p.184).
3. 교토 사투리의 여러 모습
- 촉음와 하네루음이 우세함: おなじ→おんなじ,ただ→たった,さき→さっき,やはり→やっぱり
- 장음의 단음화: おおざか→おざか,とんぼう→とんぼ
- 혀를 사용하는 f음에 가까웠던 하행(ハ행)음이 목을 사용하는 h음으로 됨.
- ジ와 ヂ가 ジ로 통일되고, ズ와 ヅ가 ズ로 통일됨.
4. 교토 오사카 사투리와 서민들의 언어
▷ 교토는 귀족의 도시로부터 서민의 도시, 생활,문화와 경제의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지역적으로도 교토 사투리보다는 가미카타고토바(上方言葉)라는 호칭이 적당함. 서민들이 중심이 되어 자신들의 말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함.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서민문화가 활짝 피게 되는데, 사이카쿠, 치카마쓰 같은 인물도 나타났다.
▷ 난반와타리(南蠻渡り)로 새로운 표현도 등장(빌로드, 센베, 만주 ...p.191).
▷ 오사카 부유한 조닌으로 돈과 여자에 관련된 새로운 단어가 등장(普段着,素人,玄人,まぬけ,へそくり,老 ...p.192).
▷ 일반적인 보통어가 되기 위해서는 가미카타에서 소설이나 시집출판이라는 형태의 매스미디어가 필요했다. 치카마쓰 몬자에몬의 조루리(腕づく,きさく,ばれる,みっともない,水くさい...p194)
▷ 속담. (長きにはまかれよ,雨降りて地かたまる,腐りても ,善は急げ,猿も木からおつる,山椒は小粒なれどもからし,壁に耳,船頭が多うて船が山へのぼる...p.196-197)
▷ 오사카를 진원지로 하는 경제용어(株,手形,勘定,取引,入札...p.201)
13.출판 문화와 말
1. 출판과 계몽
출판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판 문화를 유지, 발전 시켜온 町人(※교토에는 쵸닌 이전에 마치슈(街衆)라는 그룹이 있었는데, 이들은 물건을 팔아 돈을 번 부자들과는 달리, 오챠(お茶),오하나(お花)같은 문화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즉, 문화인이자 지식인이었던 것이다)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또한, 에도시대가 되어서 비로소 목판 인쇄를 시작으로하여 대량으로 책이 만들어 졌는데, 이런 인쇄, 출판 문화가 생겨난 것은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쟁을 일으켜 조선에서 인쇄기술을 들여 온 덕분이다. 그후 에도시대(서민문화의 시대)부터 교양서, 계몽서가 다량으로 출판되었다. 물론, 출판물중 에도어로 쓰여진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편, 카와라반(瓦版)(※瓦版: 繪草紙賣り(えぞうしうり), 讀賣(よみうり)라고도 하는데, 호외또는 광고전단에 가까운 한 장짜리 신문. 자살사건이나 큰화재, 희귀한 동물이나 구경거리가 생기면 신속하게 인쇄하여 걸어다니며 많은 사람에게 판매함)이라는 흥미로운 매체로 인해서 주체적으로 사회와 세상의 정세를 스스로 판단할수 있는 능력이 길러지고, 일반 서민들에게 독서습관과 능력을 갖추게 해주었다.
2. 보도와 자유
카와라반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보도 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정치, 사회적으로 진지한 문제를 취급하게끔 하게 된것에는 히캬쿠야(※飛脚屋: 편지를 배달하는 사람. 편지를 배달하는 도중에 여러 사건과 소문을 기사로 만드는 일도 함)의 존재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카와라반과 요미우리를 질적으로 변화시켜 나감으로써,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라 정확한 사실을 전하려고 하는 보도 정신도 육성하게 되었다.
14.쵸닌(町人)문화와 말
1. 가부키와 말
가부키 : 가부쿠(傾く)-정상이 아닌 약간 기울어져 있는 상태, 보통이 아님. 에도시대에는 서민들이 자신들의 감정과 사고를 자유로이 표현하는 것이 곤란했는데 가부키는 상당히 알맞은 표현 도구로서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가부키를 통해 많은 말이 서민 속에 파고들게 되었다. とちる( 배우가 실수하는 것) はねる(흥행의 종막, 종료) けんもほろろのだ(아주 쌀쌀맞은 인사이다) 首になる(해고되다) さやあて(대단치도 않은 일인데 뒤에서 조정하는 철사) 自腹を切る(자기가 지불하지 않아도 될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는 것)
2. 흥행과 센보(せんぼう)
가부키같은 고급 공연장 이외의 싼 공연장에서 흥행했던 말들이 있다.
べらぼう:머리가 뾰족하고 눈이 둥그렇고 충혈되어 있어 원숭이와 닮았다고 할 때.
てくのぼう: 인형이 테쿠노보 같은 역할과 행동을 함
せんぼう: 인형극에서 무대 뒤의 은어
예) すけ : 여자, なおすけ의 일부분으로 나오스케는 온나(女)를 거꾸로해서 나온 것.
즉, 온나-> 나온-> 나오
=>센보는 에도어를 풍성하게 했고 에도토박이들의 언어생활에 커다란 윤활유적 역할.
やくざ : 8.9.3으로 그 무리내에서 모든 나쁜 것을 지칭함
15.간토(關東)방언과 에도어(江戶語)
1. 에도와 에도어
17세기 초까지 에도는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가미가타에 의존한 일종의 가미가타의 문화식민지였는데, 점점 가미가타에 본점을 둔 상가의 지점들이 에도로 흘러들어오게 되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오면서 에도어도 복잡하게 되었다.
2. 간토어와 에도사투리
초기 에도어는 간토 방언일반과 같은데, つっ,ぶち같은 접두어나 ろ,だ같은 명령단정의 형태는 간토방언의 특색이며 あんだる(어떤) がひに(매우) べい(-하자)도 마찬가지이다. 이와같이 에도어는 간토방언의 중요한 성격을 이어받았는데, 또한가지 가미가타어의 유입을 들수 있다.(いで,なんだ,さかいに)
3. 에도어의 성립
가미가타와 간토의 여러곳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일종의 혼혈어가 에도어이다. 에도어의 성립을 증명해주는 일본최초의 방언사전 『物類稱呼』(1775)의 일부를 보면, 대답할 때 간토에서는 あい,키나이(畿內)에서는 はい,오미(近江)에서는 ねい,나카토(長門)에서는 あっつ,사쓰마(薩摩)에서는 をを ,히젠(肥前)에서는 ない,등등..
16. 서구문화와 일본어(1)
1. 번역과 나가사키 통역
란가쿠샤들이 네덜란드어, 넓은 의미의 유럽제국의 언어를 일본어로 옮기기 위해 어떤 고심을 했고, 란가쿠는 유럽문화와 과학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학문으로 탄생했다. 그렇게 란가쿠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나가사키 통역사들의 공헌이 큰데, 그중에서 뛰어난 몇몇 인물을 예로들자면, 나카노류호(中野柳圃),바바사주로(馬場佐十郞).요시오곤노스케(吉雄權之助)등이 있으며, デアル,より,きのうきしところの같은 것은 모두 번역문의 영향을 받은 스타일이다.
2. 번역어와 근대 일본
일요일이나 일주일 같은 개념은 일본어에 본래 없던 개념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번역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단어들이었다. 중력(重力) 구심력(求心力) 화분(花粉), 세포(細胞)도 마찬가지인 단어들이었다.
17. 서구문화와 일본어(2)
한자와 일본문화와의 관계
明治維新이후 한자어의 범람.
역사적인 蘭學者들의 주체적 수용노력.
漢學은 내용을 꾸미는 글인데 반해, 네덜란드문은 소박한 풍속 속의 사실을 간단명료하게 표현.(언문일치 등)
일부 진보적 학자들의 로마자 사용 풍조.
長崎 통역사들은 말보다 내용을 중시.
Love를 愛나 戀가 아닌 財寶로 번역(막부 말기의 영일사전)
厚生濟民의 원칙하에 번역에 대한 막부의 적극적 권장.
18. 문명개화와 언문일치
明治維新이후 東京로 수도가 이전되면서 유럽의 새로운 사상과 학문도 더욱더 유입.
→ 한자어의 홍수로 이어짐.
‘忠君愛國 ’사상을 뒷받침하기 위한 국어교육의 시작.
언문일치 운동의 시작.
- 二葉亭四迷의 『浮雲』,坪內逍遙의 『小說神髓』등등의 근대문학 소설.
문학가들의 노력으로 明治20∼30年代에는 東京語가 확립됨.
cf) 石川啄木의 로마자 일기
19. 東京語와 공통어
학교교육의 시작과 더불어 大正시대를 거치며 東京語가 확립되기 시작함.
라디오방송(1925)으로 대변되는 매스미디어의 보급은 이를 더욱더 촉진시킴.
그런데, 이 과정에 있어 江戶語가 근대국가의 규범이라고 하는 기준에 의해 교육적으로 고려된 말로 변화되어지게 된다. 지도자들은 구미국가에 손색이 없는 일본어를 갖추기 위해 자연언어가 가지는 생명력과 함축성 등을 잘라버리고, 개인의 자유와 창작성이 풍부한 문장, 그리고 창작의 기회·능력까지도 빼앗었다. (현재 東京方言으로 불리우는) → 이것은 현대 일본인의 외국어 콤플렉스로 연결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大正, 昭和시대에는 국적불명의 カタカナ語가 범람함 : オ-ルミス,ワイシャツ,テクシ-,蠻カラ,ヨタリスト,オ-ライねえさん, サラリ-マン 등
단축어도 등장 : アパ-ト,デパ-ト,モボ,ブル,ビル 등
지금도 기록되지 않는 전쟁용어 : 玉音,小國民,徵用,銃後,軍神,軍國の母,戰鬪帽,英靈,白衣の天使,赤紙, 學徒出陣,學徒動員,みたみわれ,神風,特攻隊,轟沈,轉進,空襲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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